Tuesday, May 29, 2007

1924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경계 설정 문제

sonnet님의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한 글에 첨부된 마지막 지도를 보니 꽤 재미있는 사례가 떠올랐습니다. 예전에 잠시 언급했었던 F. Hirsh의 Empire of Nations : Ethnographic knowledge and the making of the Soviet Union을 보면 소연방의 형성 초기 연방 내 각 공화국간의 경계 확정을 둘러싼 이야기가 소개돼 있습니다. 그 중에서 우크라이나의 사례는 꽤 재미있습니다.

우크라이나 사회주의공화국 수립 후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북카프카즈 지방(край)과 돈 주(타간로그~샤흐티를 포함하는 지역)가 어느 쪽의 영역이 되어야 하는가를 놓고 대립했습니다. 인종적으로 돈 주는 우크라이나인이 거주하는게 맞긴 했는데 러시아 사회주의공화국의 주장은 돈 주의 주민들이 대부분 우크라이나계가 맞긴 하지만 우크라이나어를 사용하지 않으며 우크라이나에 포함되는 것도 원하지 않고 결정적으로 경제적으로는 북카프카즈와 더 가깝다는 논리를 폅니다.
소연방 중앙정부는 돈 주를 북카프카즈에 포함시키는 쪽으로 압력을 넣는데 우크라이나 사회주의 공화국은 돈 주를 북카프카즈에 포함시키는 반대 급부로 쿠르스크와 보로네시, 브랸스크를 우크라이나에 포함시켜 줄 것을 요구합니다. 이 지역도 인종적으로 우크라이나 인이라는 논리였지요. 그러자 당연히 러시아 사회주의 공화국이 여기에 강력히 반발합니다. 그 결과 소련방 중앙집행위원회(Центра́льный Исполни́тельный Комите́т СССР) 지역위원회에서 이 문제를 담당하게 됩니다. 러시아 사회주의 공화국 측의 대표 볼디레프(Михаил Болдырев)는 쿠르스크와 보로네시, 브랸스크의 거주민들에게서 우크라이나 인으로 간주할 만한 문화적 특성이 전혀 없다며 우크라이나의 주장을 반박합니다. 그리고 이 지역에 거주하는 극 소수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의 발언은 무시해도 된다는 발언을 합니다.(여기에 대부분의 "우크라이나계" 주민들은 러시아로 남아있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주장도 곁들여 집니다) 여기에 러시아 경제학자들이 가세하는데 이들은 쿠르스크와 보로네시가 러시아 사회주의 공화국, 특히 모스크바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곡창지대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양측의 주장이 모두 말도 안되는 것이 이 지역은 인종적으로 혼합되어 있어 딱히 어느 인종이라고 잘라 말하기가 어려웠다고 합니다. 접경지대에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죠. 우크라이나의 경우가 문제가 됐던 것은 벨라루스와 달리 우크라이나인들은 민족적 정체성이 강했다는 점 입니다. 그러니 벨라루스같이 민족주의적 경향이 약하고 모스크바에 비교적 순종적인 곳과는 달리 최대한 "우크라이나"의 이익을 챙기는 방향으로 나갈 수 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의견이 평행선을 달리다 보니 아예 러시아 지역의 우크라이나인들을 우크라이나로 이주시켜 버리는 것은 어떻겠느냐 하는 현실성 없는 이야기 까지 나올 정도였다고 합니다.

결국 원만한 문제 해결을 위해서 러시아 사회주의 공화국은 우크라이나 어를 사용하는 우크라이나계 주민이 사는 지역을 우크라이나에 양도하는 안을 내 놓았고 우크라이나는 돈 주를 러시아에 양보하는 대신 러시아로부터 일부 지역을 양도 받는 것으로 문제는 마무리 됩니다.

민족문제란 이래 저래 골치 아픈 것 같습니다. 만약 대한민국에 일본어나 중국어만 쓰는 "한국계"가 인구의 상당수를 차지한다면 나라꼴이 볼만할 것 입니다. 그 점에서 언어와 인종이 단일하다고 할 수 있는 한국에 사는 것은 그럭 저럭 복 받은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Saturday, May 26, 2007

전투에서의 기만술 - 1870년 마 라 투르 전투의 사례

웹 서핑을 하다 보니 이런 농담이 있더군요.

여기는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이 대치한 전선. 양군 모두 참호에 틀어박힌 채 두문불출, 전선은 교착 상태가 되었다.
독일군은 참호에 틀어박힌 이탈리아군을 저격하기 위해, 이탈리아인 중에 흔히 있는 이름을 외쳐서 머리를 내밀게 한 후 그것을 저격하는 잔꾀를 발휘했다.

독일 병사 「어이, 마르코! 마르코 어디있어?」

이탈리아 병사 「여기야―」

그렇게 머리를 내밀고 대답한 이탈리아 병사는 총격당했다.
그 방법으로 많은 손해를 입은 이탈리아군은 간신히 그 잔꾀을 깨닫고 똑같은 수법을 독일군에게 시도했다.

이탈리아 병사 「어이, 아돌프! 아돌프 어디야?」

독일 병사 「지금 내 이름을 부른 것은 누구냐!」

이탈리아 병사 「네? 아, 접니다!」

그렇게 머리를 내밀고 대답한 이탈리아 병사는 총격 당했다.

그런데 이게 웃기기만 하는게 아닌 것이 실제로 독일군은 이런 방법을 꽤 썼고 성공을 거둔 사례도 더러 있습니다. 그것도 한 두 명 단위의 저격이 아닌, 연대 급 전투에서 말입니다.

이런 종류의 기만술에 대해서 제가 알고 있는 가장 유명한 사례는 Geoffrey Wawro의 The Franco-Prussian War에 나와 있는 1870년 8월 16일에 벌어진 마-라-투르(Mars-la-Tour) 전투입니다. 이 전투는 잘 아시다 시피 숫적으로 열세였던 프로이센군의 제 3군단과 제 10군단이 베르됭 방면으로 퇴각하려는 프랑스 라인군(Armée du Rhin)의 5개 군단을 포착해 승리한 전투입니다.

이 전투는 병력에서 압도적으로 불리한 프로이센군이 많은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오후 까지 프랑스군 주력이 베르됭 방면으로 돌파하려는 것을 저지하고 오후 3시30분~오후 4시경 제 10군단이 증원되면서 프로이센의 승리로 끝나게 됩니다. 전투는 저녁까지 계속됐는데 오후에 증원된 제 10군단은 프랑스군 우익의 제 4군단을 공격해 퇴각시키면서 사실상 마무리 됩니다.
저녁 전투에서 프로이센 6보병사단 병력은 프랑스군 제 4보병사단 70연대(제 6군단 소속)에 접근한 뒤 프랑스어로 아군이니 쏘지 말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프랑스 보병들이 아군으로 착각하고 소총을 내리자 프로이센군은 갑자기 일제사격을 퍼부어 프랑스군 제 70연대는 그대로 무너져 버렸습니다. 여기에 프로이센 기병이 가세해 프랑스어로 "프랑스 만세! 황제 만세!"를 부르며 돌격하자 프랑스 제 6군단전체는 공황상태에 빠져 버립니다.

마-라-투르 전투에서 있었다는 이 사례는 단순한 기만도 실전에서 꽤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점을 잘 보여주는 사례 같습니다. 덤으로 외국어 교육의 중요성(!)도 일깨워 주는군요.

Wednesday, May 23, 2007

남한의 병역 의무에 대한 잡상

잡설입니다.

이승만 담화집을 읽었을 때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군사 문제와 관련된 담화나 연설에서 전통적인 역할모델을 찾는 경향이 보였다는 점 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고구려의 사례와 국민 개병제를 연결 짓는 과감한(!) 발상입니다. 마치 대한민국의 도덕 교과서가 민주주의의 원형을 “화백제도”에서 찾듯 국민개병제의 원형을 고구려에서 찾는 것 이지요. 옳고 그름을 떠나 아주 재미있는 발상입니다.

그런데 왜 고구려는 이승만에게 있어 한국적 국민개병제(?)의 역할이 됐을까요? 이점은 꽤 흥미로운 문제인데 아마도 유럽식의 국민개병제, 즉 "시민"으로서의 의무와 권리의 개념이 기본으로 탑재된 유럽식의 국민개병제라는 것이 1950년대의 남한 실정과는 맞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국민을 국가에 복종해야 하는 통치의 대상정도로 봤던 이승만이니 만큼 근대유럽의 사례를 들기 보다는 고대 왕조국가의 사례가 좀 더 마음에 들었던 것이 아닐까도 생각됩니다. 아마도 남한의 국민들이 병역에 따르는 권리를 당당하게 요구하는 것은 이승만이 결코 바라는 바가 아니었을 것 입니다. 사실 국민방위군 같은 개념없는 사고를 내던 것이 이승만 정권이니 만큼 유럽식의 의무와 권리가 결합된 개병제에는 관심이 전혀 없었을 것 같기도 하군요.

이승만 뿐만 아니라 박정희 막부에서도 국민을 동원하는 논리는 민주주의 사회의 그것 보다는 왕조시대의 논리에 가까웠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진지하게 고찰한 것이 아니라 근거도 빈약하고 모호하기는 합니다만 이박사나 박장군이 국민의 권리에 대해서 관심이 거의 없었다는 점은 거의 확실한 듯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왕조시대의 전통을 억지로 현대에 끌어다 사용한 것이 아닐까 싶더군요. 사실 이박사나 박장군은 민주국가의 대통령이라기 보다는 전통왕조의 국왕에 가까운 통치자였으니까요.

남한의 병역 의무라는 것이 서구사회의 병역 의무 보다는 왕조시대의 부역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아마도 선대의 훌륭한(?) 지도자들에게 그 원인이 있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어쩌면 한국의 징병제도를 개선하려면 이런 부역 같은 느낌이 나지 않도록 하는게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싶군요.

Tuesday, May 22, 2007

The People in Arms : Military Myth and National Mobilization since the French Revolution

군사사에서 제가 가장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부분은 “동원” 입니다. 이렇게 말하기는 아직 공부가 부족하고 읽은 것도 부족하긴 하지만 확실히 전쟁과 “동원”은 매우 흥미로운 주제입니다. 징병제가 꾸준히 유지되고 있는 국가에서 살고 있으니 “동원”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어찌보면 매우 자연스러운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 동안에는 주로 경제적 동원에 관한 책을 몇 권 읽은 정도였고 “인적 동원”에 대해서는 부분적으로 언급된 서적을 일부 읽은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석달 전에 The People in Arms라는 서적을 구매했습니다. 이 책은 2003년에 출간됐는데 IAS(Institute for Advanced Study)에서 열린 “역사에서의 무장력(Force in History)”라는 세미나에서 발표된 논문들을 엮은 것 입니다.

이 책에 실린 논문의 저자는 John Whiteclay Chambers II, Owen Connelly, Alan Forrest, Michael Geyer, John Horne, Greg Lockhart, Daniel Moran, Douglas Porch, Mark von Hagen, Arthur Waldron 등인데 이 중 Alan Forrest, John Horne, Mark von Hagen 등 세 사람을 제외하면 모두 이 책에서 처음 접한 사람들입니다.
Chambers는 서문과 19세기 후반 독일의 영향을 받은 미국의 징병제 논의에 대한 글을 썼으며 Forrest와 Connelly는 1793년 혁명당시 프랑스의 국민 동원에 대해서, Moran은 18세기 중반 독일의 국민 동원 논의에 대해서, Horne은 보불전쟁부터 세계대전기 사이의 국민 동원 논의에 대해서, Geyer는 1차 대전 말기 패전에 직면한 독일 사회 내부의 국민 총동원 논의에 대해서, Hagen은 19세기 후반에서 스탈린에 이르는 시기 러시아와 소련의 사례를, Waldron은 신해혁명부터 중일전쟁 시기까지 중국 군사사상가들(주로 국민당 계열)의 동원에 대한 논의와 결론부를, Lockhart는 베트남 사회주의자들의 사례를, Porch는 알제리 전쟁시기 FLN과 OAS에 대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제가 가장 재미있게 읽은 부분은 Mark von Hagen과 Arthur Waldron의 글 인데 Hagen의 글은 러시아 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약간은 익숙한 내용도 있었던 반면 Waldron의 글은 거의 아는게 없는 중국 현대사인지라 매우 생소하고 한편으로는 재미있었습니다.
Waldron은 신해혁명 이후 근대교육을 받은 중국의 군사사상가들이 새로 습득한 근대 군사사상, 특히 “동원”의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실천에 옮기려 했는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글은 청나라 말기 양무운동 같이 외형만 유럽을 모방한 개혁의 실패를 경험한 중국의 사상가들이 근대체제를 확립하기 위해서 유럽식의 국민 동원에 주목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저자는 유럽, 특히 프랑스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중국의 군사사상가들이 중국의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국민을 동원하는 체제를 만들고자 노력했으나 중국의 사회체제는 유럽식의 국민 동원을 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없었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중국의 사례는 근대화를 타율적으로 경험한 국가의 시민으로서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었습니다.

Saturday, May 19, 2007

각하의 찬란한 존안 - (2)

어제 명동에 나갔다가 입수했습니다.


각하의 전 재산 290,000원의 600분의 1을 넘는 500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입수한 각하의 찬란한 존안입니다. 그러나 무려 레이건 선황폐하까지 덤으로 영접하는 영광을 안았으니 어찌 500원이 아깝다 하겠습니까.

이 어린양 앞으로도 각하를 받들어 모시는데 소홀함이 없을 것을 맹세합니다. 크하하핳

각하의 찬란한 존안
전략우표 비축계획 - sonnet

Wednesday, May 16, 2007

The Wages of Destruction - Adam Tooze

이 책은 이번에 도착한 책 중에서 제일 두꺼운 녀석입니다.

대략 한번 훑어 본 느낌은 약간 별로입니다. 이 책을 사게 된 계기는 서평들이 매우 좋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많은 서평들은 이 책이 히틀러 시기 독일 경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정립했다고 좋은 평을 하고 있더군요.

Bertrand Benoit의 서평(파이낸셜 타임즈)

Bruce Ramsey의 서평(시애틀 타임즈)

Simon Williams의 서평

아직 통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책의 내용에 대해서 왈가왈부 하기는 조금 그런데 전반적으로는 1차사료 보다는 기존의 저작들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것으로 보입니다. 많은 통계들이 기존의 저작들, 예를들어 Das Deutsche Reich und der Zweite Weltkrieg같은 저작에서 인용한 것 입니다. 물론 2차사료를 가지고 쓴 책 중에도 훌륭한 책이 많긴 합니다만 개인적으로는 1차사료의 활용이 부족한 저작에 믿음이 안가는지라 첫 인상은 별로입니다.

물론 좋은책인지 아닌지는 끝까지 한 번 읽어 본 뒤에 이야기 할 수 있겠지요. 다 읽고 나면 전반적인 인상을 한번 올려 볼까 합니다.(그 전에 밀린 것들을 처리해야 하는데 난감하군요)

Sunday, May 13, 2007

자칭 민족주의자의 이중 플레이

다음은 1950년 4월 28일에 주한 미국대사관에서 국무부에 보낸 보고서의 내용 일부를 발췌한 것 입니다.

한국 국회의 반응 : 국무부장관 각서와 호프만 서한의 번역본은 4월 7일, 헌법수정안 표결 다음날 개회 직후에 배부됐습니다. 이승만 대통령도 사전 통보 없이 의회에 참석했으며 만약 국회의원들이 정부가 미국에게서 받은 경고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경제협력처나 미국 대사에게 문의한다면” 미국의 원조가 삭감되거나 철회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래티모어(Owen Lattimore)와 미국에 거주하는 불특정 다수의 한국인들을 비난한 뒤 1950/51년도 예산안으로 이야기를 옮겨서 의원들이 “개인적” 이해관계를 떠나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총선을 5월 25일에서 30일 사이에 실시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하는 한편 이전에 총선의 연기를 요청한 것은 (국회의원들이) 충분한 여유를 가지고 편안한 마음으로 중요한 안건을 통과시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명을 하고 사과했습니다. 부록 2(Enclosure 2)은 4월 7일 국회 회의의 요약문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국무부장관 각서에 대해서 언급하자 대한국민당 당수인 윤치영 국회부의장이 즉각 발언을 했습니다. 윤치영은 자신의 생각에는 미국이 한국의 내정에 간섭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하고 국무부장관 각서 뿐 아니라 이전에 번스 박사가 의회에 발언한 내용도 함께 비난했는데 이것은 마치 1920년 하니하라 주미 일본대사가 일본 의회에서 발언한 이후 있었던 상황과 유사했습니다. 윤치영은 “우리는 다시는 외국인들로부터 이런 문서를 받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나는 우리의 우방 미국을 비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주권국가로서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 이런 발언을 하는 것입니다.”라고 평상시 보다 선동적인 어조로 말했습니다. 부록 2에는 국회속기록에서 발췌 번역한 윤치영 부의장의 발언 내용도 포함돼 있습니다.

“민족주의자” 윤치영 선생께서는 국회에서는 이렇게 민족의 존엄을 세우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양반 미국인들을 만나시더니 말씀이 이렇게 돌변하시네요.

부록 3의 윤치영과 대사관 직원과의 대화에 나타나 있듯 윤치영은 “국회의원 대부분은 한국이 형식적으로는 독립국이지만 실제로는 국가의 생존 여부를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고 인정하고 있으며 “(한국은 미국의 방침을 따를 것 이기 때문에) 핵심적인 문제는 미국의 방침에 따르느냐 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독립국가의 입법부로서 최소한의 체면을 차리는 것.”이라고 털어놓았습니다. 윤치영은 국무부장관 각서와 호프만 서한이 미국정부에 의해 발표됐다는 점이 유감이라고 지적한 뒤 이와 관련해서 한국의 언론 매체들이 국무부장관 각서의 전문을 직접 보도하는 일은 없을 것이며, 아마도 이승만 대통령의 국회 출석과 윤치영 자신이 국무부장관 각서와 호프만 서한을 비판했다는 내용, 워싱턴의 특파원들이 송고한 내용 정도나 보도하는데 그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Drumright, Everret. F, 'Reaction to the Secretary’s Aide-memoire, April 28, 1950',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50, (USGPO, 1976), pp.54~55

이래서 민족 팔아먹는 정치인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요즘도 목청 높이며 민족 외치는 높으신 분들께서는 이런 짓을 하신다지요.

Friday, May 11, 2007

대통령 리박사 화법....

이박사 화법에 대한 Sonnet님 글에서 트랙백
(전략)

동시에 우리 우방들은 이 반대분자들의 선전을 기왕에도 많이 들었을 것이요 지금에도 또 연속 부언낭설로 들어오는 것을 가지고 비치어 보아서 한국대통령이 독재정권을 갖기 위해서 국회를 병력으로 압박한다, 국회의원을 이유없이 가둔 것을 석방해야 된다, 헌법을 무시하고 국회를 위협한다는 등 말의 공문으로 공화정체를 말살시킨다는 요구가 각처에서 연속내도하였으나 이것이 다 사실이 아니므로 우리는 이에 대해서 별로 고려할 점이 없었으며 오직 공산당의 음모만을 우리가 심상히 여길 수 없는 것 이므로 아직까지 침묵하고 재판으로 판결되기 만을 기다려 오던 것이다. 그러나 이 음모사건의 조사가 거의 다 마치게 되었으나 오직 정범인 두 사람을 아직 잡지 못하고 있는 까닭으로 재판이 며칠 지체되어 오는 것이니 이 사람들을 쾌히 잡을 수 없는 경우에는 지금 조사된 공범만을 가지고 재판을 시작할 것이니 얼마 안에 이 일의 사실유무가 명백히 드러날 것이다.

(후략)

정치음모사건에 관하여, 1952년 6월 15일 담화문, 대통령 이승만 박사 담화집 1권, 공보처, 1953년

(전략)

그런데 어찌해서 사욕을 도모하는 정치객들이 국가안위와 민족의 화복을 생각지 못하고 어떤 분자는 정당명색을 띄고 공산에 내응이 되어 타국의 재정을 얻어다가 정치상 음모로 자기들이 정권을 잡게 되면 이북 괴뢰군과 합동해서 통일을 이루겠다는 계획을 진행하다가 발각이 되어 재판을 당하여 모든 죄상이 들어 났으나 이 음모를 행하든 정범이 외국으로 다라나서 잡지 못하게 됨에 아직도 결말을 못 내고 있는 중이며 근일에 와서는 또 어떤 사람은 정당의 지도자란 명의를 가지고 외국 신문상에 선전하기를 자기들이 정권을 잡으면 리대통령의 배일 정책을 고쳐서 일본과 협의로 친선을 이루겠다고 하는 이런 망설을 발하고 있으니 이것은 우리가 참 놀라운 일이다.

(후략)

친일 친공한다는 것은 망언이다, 1956년 4월 12일 담화문, 대통령 이승만 박사 담화집 3권, 공보처 1959년

위의 담화는 1952년 소위 국제간첩단 사건으로 국회의원들을 잡아 넣고 나서 한 것이고 아래의 담화는 1956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한 것입니다. 음모는 밝혀 졌지만 정작 그 음모의 실체는 없다는 매우 괴이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는 것이 핵심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거야 말로 이박사 화법의 핵심이 아닐까 싶군요. 아무나 따라하다간 왕따 등의 부작용이 있으니 함부로 따라 하지 마세요.

독일 육군의 기관총 도입과 운용 : 1894~1914

많은 분들이 잘 아시는 이야기 같긴 합니다만 농담거리가 생각이 안 나다 보니 이런 글이라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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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에 맥심이 개발한 기관총이 처음 선을 보이자 많은 국가들이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당연히 유럽의 일류 육군국인 독일 또한 이 새로운 물건에 큰 흥미를 나타냈습니다. 1894년에 맥심 기관총의 실험을 참관한 빌헬름 2세는 기관총의 성능에 크게 감명을 받아 전쟁성에 기관총의 추가 시험을 하도록 지시했습니다. 황제의 취향 탓은 아니겠지만 어쨌거나 독일 육군은 1895년에 기관총을 정식 채용합니다.

일선 부대가 기동훈련에서 기관총을 처음 사용한 것은 1898년이라고 합니다. 이 해에 동프로이센 제 1 군단의 엽병(Jäger) 대대는 기동 훈련에서 기관총을 운용했습니다. 그러나 이 기동훈련에서는 기관총에 대한 평이 별로 좋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많은 고위 장교들은 기관총이 사격 시 총열의 과열 문제가 있고 기동 시 불편하다는 점을 들어 비판했습니다. 이 기동훈련의 결과 엽병대대는 물론 정규 보병 연대 조차 기관총의 도입을 꺼리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정규 직업군인들 보다는 아마추어인 독일 황제가 기관총의 잠재력을 더 잘 파악 하고 있었고 그는 계속해서 군부에 기관총의 운용을 확대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1900년 9월의 기동훈련에서는 기병부대가 기관총을 운용했으나 기병 장교들 역시 기관총은 기동전에 적합한 물건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황제가 기관총의 위력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보수적인 독일 보병 장교들은 기관총의 잠재력을 제대로 파악 하지 못 했으며 그 결과 1904년 까지도 독일 육군은 기관총을 독립 부대로 운용했습니다. 그렇지만 기관총이 쓸만한 물건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했습니다.
러일전쟁 이전까지 독일육군의 기관총 옹호자들은 기관총이 가진 범용성을 강조했습니다. 크레취마르(Kretzschmar), 플렉(A. Fleck), 메르카츠(Friedrich von Merkatz) 대위 같은 위관급 장교들이 대표적인 기관총 옹호자였는데 이들은 기관총은 공격시 특정 지점에 강력한 화력을 집중할 수 있다는 점을 높게 평가했습니다. 플렉은 4정으로 이뤄진 기관총대(Maschinengewehr-abteilung : 대대가 아님)와 소총으로 무장한 100명의 보병(정면 80m로 산개)의 사격실험 결과를 통해 기관총 팀은 한 목표에 대해 5분간 3,600발을 사격할 수 있는데 반해 보병 100명은 500발 내외에 그쳤다는 점을 들어 기관총의 유용성을 주장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 차례의 운용 시험 결과 몇 가지의 문제점이 지적 됐는데 가장 큰 문제는 보병부대가 돌격을 시작하면 후방에서 지원하는 기관총이 아군의 등 뒤에 사격을 할 수 있다는 점 이었습니다. 실제로 이런 문제점은 기관총 도입 초기에 빈번히 나타났으며 기관총을 공격적으로 활용한 일본군의 경우 러일전쟁 때 이런 실수를 저질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기동을 중시하는 독일의 군인들은 기관총 화력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기동성을 살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1904년 이전 까지 기관총의 화력은 포병의 보조적인 역할 정도로 규정되고 있었습니다. 독일군의 포병운용은 여전히 직접 사격을 통한 화력지원을 중요시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포병은 직접 화력지원을 강조하는 교리 때문에 이동 및 사격 준비 사이가 매우 취약했는데 기관총은 바로 이 시점에서 포병을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독일 육군의 보수적인 장교들 마저 기관총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된 계기는 1904년 러일 전쟁에서 기관총이 괴력을 발휘한 이후 였습니다. 독일은 러일전쟁에서 러시아와 일본 양측이 대량의 기관총을 운용해 효과를 거두자 기관총 활용에 보다 적극적이 됐습니다.
독일은 1907년에 기관총 부대의 단위를 중대급으로 확대하고 기관총의 숫자를 4정에서 6정으로 늘렸습니다. 이 해에 총 12개의 기관총 부대가 중대급으로 확대되었고 1914년 발발 이전까지 현역 보병연대는 모두 기관총 중대를 가지게 됐으며 엽병 대대도 바이에른 1엽병대대와 바이에른 2엽병대대를 제외하면 모두 기관총 중대를 배속 받았습니다. 그리고 기관총의 유용성이 입증되자 기관총을 불신하던 보병과 기병 장교들 조차 기관총을 보병 및 기병연대의 편제에 넣어 줄 것을 전쟁성에 요청하기 시작했습니다. 각 사단마다 기관총대대(3개 중대 편성)을 넣는 안이 제시되기도 했으나 사각편제 체제에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결국은 각 연대별로 기관총 중대가 배치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역시 1907년에는 기관총 팀의 기동성을 높이기 위해서 기관총 1정 당 견인용 마필을 네 마리에서 여섯 마리로 늘렸습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방식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기관총 1정 당 말 여섯 마리를 사용하는 것은 기동성은 높였지만 전장에서는 적의 목표가 될 확률을 높이는 위험이 있었습니다. 결국 그 대안으로 기관총의 소형화가 필요했고 그 결과 비록 일선 부대의 요구에는 미치지는 못하지만 MG 08이 도입됩니다. MG 08의 도입 이후 기관총 1정당 견인용 마필은 여섯 마리에서 두 마리로 줄어 듭니다.(기병 사단 소속의 기관총대는 1정당 네 마리)

1914년 전쟁 발발 당시 독일군의 기관총 부대는 정규 보병연대에 배치된 것이 219개 중대, 엽병 대대에 배치된 것이 16개 중대, 예비보병연대에 배치된 것이 88개 중대, 기병 사단에 배치된 것이 11개 대(Abteilung), 보충사단에 배치된 것이 43개 대였습니다.
전쟁 발발 당시 향토연대(Landwehr-regiment)는 기관총 중대가 없었는데 사실 향토연대 급의 예비부대는 전쟁 와중에 소총부족으로 1916년까지 Gew 88을 지급 받을 정도였으니 기관총은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 입니다.
예비 사단 중에서는 제 1근위예비사단(Garde-reserve-division)이 좀 별종인데 이놈의 사단은 이름만 예비사단이었고 전쟁 발발 당시 정규 보병사단 편제를 갖춰 4개 기관총 중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냥 예비사단은 아니고 “근위(Garde)” 예비사단 이로군요. 그리고 제 1예비사단(Reserve-division)은 훨씬 더 해괴한 녀석인데 이 사단은 전쟁 발발 당시 예비 사단 주제에 예하 4개 보병연대 중 3개 연대가 기관총 중대를 2개씩 가지고 있어 기관총 중대가 7개나 됐다고 합니다.

전쟁 발발 당시 보병연대와 엽병대대에 배속된 일반적인 기관총 중대는 다음과 같이 편성되어 있었습니다.

장교 2명
부사관 및 사병 95명
말 45마리
기관총 7정(1정은 예비용)
탄약 수송용 마차 3대
야전 취사차 1대
장비 수송용 마차 1대
건초 수송용 마차 1대
화물 수송용 마차 1대

참고서적

Brose, Eric D., The Kaiser’s Army, The Politics of Military Technology in Germany during the Machine Age, 1870~1918,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Cron, Hermann, Imperial German Army 1914~19 : Organisation, Structure, Orders-of-Battle, (Helion, 2001)
Echevarria Jr, Antulio J, After Clausewitz : German Military Thinkers before the Great War,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0)
Stevenson , David, Armaments and The Coming of War, Europe 1904~1914, (Oxford University Press,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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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May 8, 2007

독서문답

sonnet 대인의 블로그에서 트랙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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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평안히 지내셨습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2. 독서 좋아하시는 지요?

그럼요!



3. 그 이유를 물어 보아도 되겠지요?


잠자는 걸 제외하면 제일 편한 일 중 하나거든요.


4. 한 달에 책을 얼마나 읽나요?

전공 이외의 책만 따지면 한 달에 5~7권 정도 읽습니다. 갈수록 독서량이 떨어지고 있어 이정도 선을 사수하는 것도 어려울 지 모르겠군요. 2006년 1/4분기 까지는 한 달에 10권 정도 읽었습니다.


5. 주로 읽는 책은 어떤 것인가요?

옛날 이야기들입니다. 가끔 요즘 이야기들에 대한 책도 읽습니다.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뼈와 살이 분리되는 살벌한 이야기 들이지요.


6. 당신은 책을 한 마디로 무엇이라고 정의하나요?

한마디로 요약하는 것은 제가 가장 취약한 분야 중 하나입니다.


7. 당신은 독서를 한 마디로 무엇이라고 정의하나요?

힘 안들이고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가장 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8. 한국은 독서율이 상당히 낮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정말 대답하기 어려운데요…


9. 책을 하나만 추천 하시죠? 무엇이든 상관 없습니다.

War before Civilization : The Myth of the Peaceful Savage


10. 그 책을 추천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세상이 결코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잘 설명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대한민국에 많이 살고 있는 가방 끈만 길다란 자칭 “진보” 얼간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습니다. 만약 기회만 된다면 이 책을 번역해 보고 싶을 정도이죠.


11. 만화책도 책이라고 여기시나요?

책이 아니면 뭘까요?


12. 문학을 더 많이 읽나요? 비 문학을 더 많이 읽나요?

문학은 가뭄에 콩 나듯 읽습니다. 원래 문학 체질이 아닌 듯 싶습니다.


13. 판타지와 무협지는 "소비문학"이라는 장르로 분류됩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상당히 재미있는 분류군요. 그런 분류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14. 당신은 한 번이라도 책의 작가가 되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얼떨결에 번역은 한 번 해 봤군요.


15. 만약 그런 적이 있다면 그때의 기분은 어떻던가요?


책이 안팔리면 열받지요. 크하하하


16. 좋아하는 작가가 있다면 누구입니까?

Douglas Adams


17. 좋아하는 작가에게 한 말씀 하시죠?

양이란 동물은 선생의 생각 만큼 한심하지 않아요!

Monday, May 7, 2007

1차대전 당시 독일육군의 포병 지휘 구조

불법 날림 번역으로 땜빵하는 것은 계속 됩니다.
전쟁 발발 당시 독일군은 야전포병(Feldartillerie)과 중포병(Fußartillerie)을 엄격히 분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야전포병 내에서도 중야전포대대는 기동전에 적합하지 않다는 견해가 많았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전쟁 초기의 경험을 통해 잘못됐다는 것이 입증됐다. 전투의 주역인 보병지휘관들의 견해가 가장 존중됐는데 이들은 중포가 매우 효과적이라는 점 때문에 이 무기를 선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급 포병지휘관들도 점차 보병 전투의 양상에 대해 잘 이해하게 됐다. 포병지휘관들은 중포와 경야포의 화력 통제를 담당할 책임을 지게 됐다. 이 때문에 각 포병부대를 통합해서 지휘할 수 있는 통일된 고급포병지휘부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리고 이런 대대적인 개편을 담당하는 것은 힌덴부르크 체제하에서 시작되었다.

전쟁 발발 당시 야전포병의 경우 가장 높은 지휘부는 보병사단의 야전포병여단지휘부(Kommandeur der Feldartillerie-brigade)였다. 전쟁 발발 당시 독일 육군에는 총 52개의 야전포병여단지휘부가 있었다. 1914~1916년 사이에 신규 부대가 편성되었는데 이중 야전포병여단지휘부가 18개, 예비포병지휘부가 14개, 향토야전포병지휘부가 1개, 보충야전포병여단지휘부가 4개 였다.1)

중포병의 경우는 사정이 조금 달랐는데 군단의 경우 동원 개시 당시 단 한 개의 중야전포병대대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군단포병의 경우 고급포병지휘부가 없었다. 대신 야전군 사령부나 육군총사령부 직속 예비대로 1~3 중포병사령부(General der Fußartillerie)2)와 1~9 중포병여단지휘부(Fußartillerie Brigade-kommando)3)가 있었다. 야전군급 부대는 강력한 공성포병부대를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고급중포병지휘부도 있었다. 이 때문에 제 2군의 경우 제 3중포병사령부를, 제 4군과 제 6군은 각각 제 1중포병여단지휘부와 제 2바이에른중포병여단지휘부(Königlich Bayerisches Fußartillerie Brigade-kommando 2)를, 제 5군은 제 1중포병사령부와 제 6중포병여단지휘부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러나 참호전이 장기화 되자 전 전선에 걸쳐 중포병의 수요가 증가했고 육군총사령부는 각 야전군 사령부 직할로 중포병부대를 총괄 지휘할 사령부를 둘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게 됐다. 또한 필요에 따라 투입할 수 있도록 동급의 사령부를 예비로 확보할 필요도 있었다.

마침내 1915년 가을, 독일군은 모든 야전군급 포병 사령부의 명칭을 “중포병사령부”로 통일함과 동시에 20개의 사령부를 신설했다.4) 이후 야전군 예하 포병부대의 화력분배 및 사격통제는 중포병사령부과 총괄하게 됐다. 베르됭 전투에서 중포병 부대를 집중운용 한 결과 중요한 전역에 추가로 투입할 수 있도록 고급포병지휘부를 추가로 편성할 필요성이 생겼다. 그 결과 중포병사령부는 37개로 늘어났다.

그 결과 힌덴부르크 체제에서 고급포병지휘부는 총 89개의 야전포병여단지휘부와 37개의 중포병사령부로 증가했다. 포병이 전투에서 가장 결정적인 요소라는 점과 중포병과 야전포병의 효과적인 협동을 위해서는 효과적인 조직이 필요조건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육군총사령부는 이것을 위해서 통합된 포병 지휘부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1917년 2월 독일 전쟁성(Kriegsministerium) 명령에 따라 야전포병여단지휘부와 중포병사령부를 통합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사항이 결정되었다. (1) 제 1~13 포병사령부(General der artillerie)를 창설하고 (2) 각 사단에 배속된 경포병대대와 중포병대대를 통합 지휘하기 위해 포병지휘부(ArKo, Artillerie Kommandeur)를 둔다.

13개의 포병사령부 사령관 중 단 한명을 제외하면 모두 중포병사령부 출신이었다. 이 중 제 9포병사령부는 1917년 3월 해체됐다. 그리고 다시 1917년 7월 6일 이것을 대신해 제 14포병사령부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918년 7월 14일에 제 15, 16포병사령부가 편성되었다. 육군총사령부는 각 포병사령부를 상황에 따라 강력한 포병 전력을 필요로 하는 야전군 사령부에 배속시켰다. 그리고 당연히 포병사령부가 주로 투입된 곳은 서부전선이었다.

포병사령부의 지휘관은 보통 여단장이나 연대장급이었으며 두 명의 부관을 두고 있었다. 그리고 포병사령부는 야전군 사령부에 배속되면 두 명의 참모 장교와 함께 야전군 소속의 통신반을 배속 받았다. 제 1포병참모장교(StOArt, Stabsoffizier der Artillerie)는 모든 전술, 조직문제와 가스탄, 고폭탄 사격 훈련과 매일 발생하는 문제의 교정 등을 담당했다. 제 2포병참모장교는 포병에 대한 보급 및 정비반에 대한 보급을 담당했다. 마지막으로 통신반은 포병관측기구반, 사진반, 포병조사반과 연계해 적 부대의 배치에 대한 최대한 정확한 정보를 파악했다. 또한 정보반은 포병용 지도의 작성을 책임졌다.

이쯤에서 1916년 4월 29일 동부전선의 나로치(Нароч) 호수 전투에서 강력한 포병부대를 통합 운용해 큰 성과를 거둔 포병 지휘관 한명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브루흐뮐러(Georg Bruchmüller) 중령은 전쟁 이전에 중령으로 진급했으며 포병 지휘체계의 대대적인 개편 이후 제 86포병지휘부(ArKo 86)의 지휘관이 됐다. 이동탄막사격, 즉 포격을 보병의 전진에 맞춰 수정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고 모든 포병 지휘관 보직에 충분히 경험 있는 장교들을 충원할 수는 없었다.

브루흐뮐러는 초기부터 야전군 사령부의 중앙 통제하에 실시되는 포격의 장점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1917년의 서부전선에서는 이동탄막사격을 할 만한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브루흐뮐러는 동부전선에서 이동탄막사격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지휘체계를 만들었고 이 때문에 독일 육군총사령부는 브루흐뮐러를 서부전선으로 배속시켜 1918년 춘계대공세 준비를 담당하게 했다. 브루흐뮐러의 방식은 매우 뛰어난 것으로 입증됐다. 부르크 호에넥(Burg Hoheneck)에 있는 브루흐뮐러의 조각상 밑에는 기념비가 있다. 그 기념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자랑스럽게 적혀있다.

“ [돌파 브루흐뮐러 Durchbruchmüller라는 별명을 가진 브루흐뮐러 대령은 1918년 3월 21일 제 18군의 포병을 지휘해 성공적으로 이동탄막사격을 실시해 아미앵 방면으로 대규모 돌파를 성공시켰다.]

1918년의 대공세에서 독일군의 강력한 포병사격은 성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기습적으로 실시됐다. 이 사격은 이른바 풀코프스키(Pulkovski) 방식에 의한 훈련을 통해 가능했다. 이 방식은 과학적인 분석을 통해 오차를 없앴으며 신속한 수정 사격을 가능하게 했다.

포병지휘부(ArKo)는 포병사령부와 거의 같은 시기에 만들어 졌으며 기존에 있던 야전포병여단을 대체했다. 이 중 27개는 기존의 야전포병여단지휘부를 개편해 만들어 졌다. 그리고 나머지는 신규편성 되거나 다른 야전포병이나 중포병 부대를 개편해서 만들어졌다. 새로운 사단포병지휘부의 단대호는 제 1~8근위, 제 1~23바이에른, 제 1~255(중간에 65개가 빠진)였다. 새로 개편된 단대호에서는 예비 또는 향토 부대의 구분이 사라졌다. 그러므로 이에 따라 총 221개의 Arko가 편성되었다. 포병지휘부의 지휘관은 계급상 연대장 이하였다. 포병지휘부의 참모진은 한명의 부관, 두 명의 연락장교, 한 명의 통신 장교로 구성됐다.

ArKo의 지휘관은 실제 전투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포병 지휘관이었다. 포병지휘부의 명령하에 사단 편제 포병과 상급 부대에서 배속된 수많은 야전포병 및 중포병 부대가 움직였다. Arko는 부여된 임무 내에서 자율성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 인접 사단의 포병과 배속된 독립 포병부대간의 조율도 책밈 져야 했다.
원거리의 목표에 대한 포격은 뒤에 설명하겠지만 야전군 사령부의 몫이었다.

Hermann Cron, Imperial German Army 1914-18 : Organisation, Structure, Orders-of-Battle, Helion & Company, 2002, pp.131~134

각주

1) 새로 편성된 지휘부는 제 5근위야전포병여단지휘부, 제 10바이에른야전포병여단지휘부, 제 50, 52, 54, 56, 58~67, 123, 220야전포병여단지휘부(이 중에서 61, 65, 66포병여단지휘부는 육군총사령부 직할이었다.), 제 23, 24, 26, 28, 75~82예비야전포병여단지휘부, 제 1, 8 바이에른예비야전포병여단지휘부, 제 1바이에른향토야전포병여단지휘부, 그리고 제 4, 8, 10, 19보충야전포병여단지휘부가 있었다.
2) 이와 함께 세 개의 중포병총감부(Fußartillerieinspektion)가 있었다.
3) 전쟁 이전에는 8개의 중포병여단지휘부가 있었으며 1914년 8월 새로 제 2바이에른중포병여단지휘부가 편성됐다.
4) 1917년 9월 17일자 전쟁성 명령에 따라 제 1~6중포병사령부와 제 1~3바이에른중포병사령부, 바르샤바 총독부 소속의 중포병사령부, 벨기에 총독부 소속의 중포병사령부, 마지막으로 해안방어사령부 소속의 중포병사령부가 편성되었다.

이번에 베낀 책은 1937년에 독일에서 출간된 책을 번역한 것인데 그다지 번역이 매끄럽지 않다는 느낌이 듭니다.

흥미로운 점 하나는 1차 세계대전 당시 ArKo는 사단급 포병을 지휘하기 위해서 만들어 졌다는 점 입니다. 2차 세계대전의 ArKo는 군단급 포병 지휘부였지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포병부대의 구조에 대해서는 채승병님의 글, 2차 세바스토폴 전투에 투입된 독일군 독립 포병부대를 참고하십시오.

어떤 우익 성향의 서점

이 바닥에 계시는 많은 분들께서 이미 경험하셨겠지만 군사 서적을 구매하다 보면 종종 우익 성향의 서점들과 엮일 때가 많습니다. 아무래도 군사 문제에 관심을 가진 계층 중에서 우익들이 많아서 그런게 아닌가 싶습니다.

예전에 무장친위대와 관련된 서적을 몇 권 구매했던 Buchdienst Kaden도 역시 우익 성향의 서점인데 며칠전에 여기서 우편으로 카탈로그를 보내왔더군요. 카탈로그를 보니 저 같은 Untermensch가 읽기에는 어려운 책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재미있어 보이는 책은 Joachim Nolywaika라는 사람이 쓴 Polen-nicht nur Opfer와 Jürgen Riehl의 Funkenflug이었습니다. 대충 살펴보니 전자는 폴란드가 독일의 동부 지역을 집어삼킨 만행(???)을 규탄하는 내용인 듯 싶고 후자는 자유주의, 민주주의, 맑시즘, 세계화, 다문화주의 등의 사상에 대해 자~알 설명(또는 규탄) 해주겠다는 내용 같습니다.

아시아 동쪽 구석의 Untermensch에게도 이런 책을 권하는 것을 보면 요즘 서양의 극우들은 융통성이 늘어난 모양입니다. 하긴, 거래한 지 꽤 된 어떤 서점은 데이빗 어빙의 구명운동을 위한 모금 메일을 열심히 보내기도 하더군요.

하여간 왜 이런걸 보내는지 갈수록 궁금해 지는군요.

Thursday, May 3, 2007

닭과 달걀 중 어떤게 먼지인지...

근래에 주요 일간지들이 앞 다투어 F-22건으로 낚시를 한 것은 상당히 민망한 일 이었습니다. 군사 전문기자를 가지고 있다는 조선일보나 중앙일보의 보도 행태도 다른 신문들과 다를 바 없었던 것을 보면 상당히 난감하더군요. 이 난감한 사태를 지켜보다 보니 한가지 의문이 떠올랐습니다.

일반적인 뉴스 소비자층이 자극적인 기사를 좋아하기 때문에 신문들이 자극적인 기사를 뽑아내는 것 일까요? 아니면 신문들이 자극적인 기사를 뽑아대다 보니 뉴스 소비자들이 자극적인 기사에 익숙해 지는 것 일까요?

매우 궁금하더군요. 답이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The Age of Battles - Russel F. Weigley

대략 1~2년 전 쯤 어떤 분으로 부터 유럽의 근대 전쟁사에 대한 쓸만한 개설서가 없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저도 특별히 공부를 제대로 한 게 아니다 보니 제대로 대답을 못 했었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근대 유럽전쟁사에 관심이 있긴 있습니다. 2차대전사에 관심이 많다 보니 자동적으로 그 이전 전쟁인 1차세계대전에도 관심이 가게 되고 1차대전에 대한 관심은 다시 유럽의 근대전쟁으로 쏠리게 되더군요.

그러나 수백년에 걸친 군사사를 달랑 책 몇 권만 가지고 이해하기는 어려운 일이지요. 간간히 그럭 저럭 유명한 저작들을 한 두권 찿아서 읽긴 했는데 체계적으로 독서를 하는 것도 아니다 보니 아주 두리뭉실한 상 밖에는 안 떠올랐습니다. 그렇다 보니 저 역시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를 포괄하는 쓸만한 개설서가 뭐 없나 찿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걸린 녀석이 바로 이 책 입니다.

저자인 Russel F. Weigley는 미국 군사사와 관련해서 꽤 이름있는 저작들을 출간한 군사사가입니다. 예전에 이 사람이 쓴 The American Way of War를 조금 읽어 본 적이 있어서 이 책도 어느 정도 만족할 만한 수준은 되지 않을까 생각을 하고 구매했습니다.

이 책은 개설서로서 상당히 무난하다고 생각되는데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30년 전쟁부터 나폴레옹 전쟁 까지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벌어진 유럽인들의 전쟁을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지도는 꽤 많이 실려있는 편이고 지도의 수준도 개설서로서는 합격선이라고 생각됩니다. 주요 전투에 대한 서술 역시 짧지만 핵심적인 부분은 잘 설명해 놓았다는 느낌입니다. 개설서로서는 매우 훌륭한 수준이라고 생각됩니다. 페이퍼백으로 출간 돼 있기 때문에 가격도 적절합니다.
약간 아쉬운 점 이라면 주요 전투의 경우 전투서열에 대한 설명이 없다는 점입니다. 개별 전투를 세부적으로 분석하는 저작은 아니지만 전투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 군단급 수준의 전투 서열을 실어 주는것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