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November 30, 2006

상해 임시정부의 군사제도에 대한 몇 가지 궁금한 점

상해 임시정부가 1919년에 제정한 대한민국육군임시군제는 여러 모로 흥미롭습니다. 이 법령에 따르면 대한민국육군의 기본 편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군단 : 2~6개 여단 : 편제 상 직할대 없음
2. 여단 : 2개 연대 + 1개 기병중대 + 2개 공병중대 + 2개 헌병중대 + 2개 위생대
3. 연대 : 3개 대대 + 1개 기관총 대대(3개 중대) + 1개 폭탄대(중대 급)
4. 대대 : 4개 중대 + 1개 기관총 중대
5. 중대 : 3개 소대
6. 소대 : 3개 분대

일단 임시정부가 편제에 따른 군대는 한번도 가져 본 적이 없다는 점을 제외하고 대한민국육군임시군제에서 흥미로운 점은

1. 기본적으로 4각 편제의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사단이 없다는 점 입니다. 여단은 바로 군단 직할로 편제돼 있습니다.

2. 연대 편제에 딸려 있는 폭탄대 입니다. 아직까지 임시정부의 군사교리에 대한 자료는 발견되지 않아(그리고 아예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대충 감으로 짐작하자면 일종의 전투공병이 아닐까 싶습니다.

3.대대편제의 기관총중대는 정원 50명으로 소대규모라는 점 입니다. 일단 이건 성격상 중기관총을 장비했을 것 같은데 문제는 이런 편제로는 잘 해야 1개 보병중대 당 중기관총 1~2정 정도를 지원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겁니다. 어차피 임시정부야 제대로 된 군대를 편성할 능력도 없었으니 편제표 상 기관총 중대를 4개 소대로 해도 큰 문제는 없었을 텐데 말이죠.

4. 분대 정원은 분대장인 하사를 포함 17명이고 소대정원은 소대장 포함 51명 입니다. 즉 대략 이런 편성입니다.

소대장
1분대 : 17명
2분대 : 17명
3분대 : 16명

편제 표에도 1개 소대가 51명 이기 때문에 3분대는 16명으로 한다고 돼 있습니다. 이거 뭔가 거꾸로 된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어떻게 보면 임시 군제에서 부대 편제는 정말 생각나는대로 짠게 아닐까 하는 생각 마저 드는 거죠.

예를 들면 이런 망상이 듭니다.

"1개 분대가 17명이니 1개 소대는 17×3=51명으로 하자. (편제표를 작성한다) 어? 그런데 소대장이 빠졌군. 음 소대장을 넣으면 52명이 되는데 고치기 귀찮은데.. 그래 3 분대는 16명으로 하자"

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5. 군단 사령부 편제를 보면 참모장 1인과 참모관 약간 명을 둔다고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군단 참모부는 제대로 된 편제를 짜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당장은 임시정부임시군제 말고는 참고할 수 있는 자료를 못 봤으니 상상의 나래는 이 쯤에서 접는게 좋을 것 같군요.

프레쉬니스버거 대학로점

몇 개월 전. 직장을 때려치고 다시 혜화동으로 돌아 온 뒤 프레쉬니스버거나 먹어볼 까 해서 그곳이 있던 곳으로 갔는데... 없어졌습니다! 처음에는 본인의 기억력에 문제가 있는게 아닐까 하고 이곳 저곳 찿아 봤지만 확실히 없어졌더군요. 아무래도 크기는 작고 값이 비싸서 망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걸 봤습니다.



이걸 가까운 곳에서 먹을 수 있게 됐다는 것이 굉장히 즐겁네요. 흐흐흐. 솔직히 버거킹 따위보다는 이쪽에 백만표를 더 주고 싶은 심정입니다.

아. 어쨌건 기쁩니다. 이히~

미국 육군의 차량화 -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

오늘날의 미육군은 막강한 군사력으로 이곳 저곳 들쑤시며 뉴스거리를 만드는 존재였지만 불과 100년전의 미 육군은 주요 열강의 육군 치고는 비리비리한 군대였습니다. 유럽과 같은 국가 총동원체제가 자리잡힌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상비군이 강력한 것도 아니고. 사실 미국은 육군이 약해도 별 문제가 없는 것이 국경을 마주한 것이 캐나다와 멕시코같이 적대적이지도 않고 군사력도 그저 그런 나라들이었죠.

그래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당시 미육군의 차량화 수준은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유럽의 주요 교전국들에 비해서 크게 뒤떨어 졌습니다. 유럽에 참전하면서 미국이 기여한 것이란 총알받이가 될 청년들 뿐이었다는 빈정거림도 있었다고 할 정도로 미국은 프랑스와 영국으로부터 중요한 군사 장비를 원조 받습니다. 좀 절대적인 비중이죠.

그나마 트럭의 경우는 미 육군이 자체적으로 표준화 해서 생산하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워낙 전쟁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전쟁에 뛰어들었는지라 엉망이었습니다. 1916년에 스탠다드 B, 또는 리버티 트럭이라 불리는 3톤 트럭이 채용 되었지만 생산량이 부족해서 프랑스에 투입된 미육군이 사용한 274,000대의 트럭은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의 219개 모델이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었습니다. 불과 20년 뒤에 가공할 차량화 수준을 달성하게 되는 것에 비교하자면 지독할 정도로 한심한 수준이었습니다. 당연히 일선 부대는 잡다한 트럭의 부품을 제대로 구하지 못해서 트럭의 가동율이 매우 형편없었습니다. 1919년 휴전직후 미육군 제 1 야전군 전체에 가동 가능한 리버티 트럭은 고작 40대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휴전이 체결된 뒤 전쟁성이 나머지 주문을 취소해 버리자 예비부품도 덩달아 취소돼 버렸습니다. 육군의 관점에서 보면 이건 고역이었겠죠.

20년대는 평화롭게, 그리고 궁핍하게 지나갔습니다. 잠시의 호황 뒤에 찿아온 대공황으로 미육군의 예산은 마구 깎여 버렸습니다. 당연히 새로운 트럭을 대량으로 도입 하는것은 꿈에나 가능한 일 이었죠. 미육군은 신형 트럭을 발주하기 보다는 이미 민간 시장에 대량으로 풀려 있는 모델을 구입해서 사용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새로 트럭을 개발하는 것 보다야 후자가 예비 부품을 조달하는데 유리하고 결정적으로 비용도 적게 들었다고 하죠.
그러다 보니 각 병과 마다 서로 다른 종류의 트럭을 구매하는 경향을 보이게 됐습니다. 포병이 사용하는 트럭의 요구 조건과 수송 부대가 사용하는 트럭의 요구 조건이 같을 수는 없을 테니까요. 각 병과별로 차량을 구매하다 보니 1936년에 미육군이 보유한 차량은 총 360개 종류에 달했고 각기 다른 예비부품이 100만개에 달했다고 합니다. 이건 불과 5년 뒤에 소련을 침공한 독일 육군과 비슷한 수준의 난장판 이었습니다.

미 전쟁성은 이 난장판을 정리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2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차량의 표준화에 한층 더 박차가 가해 집니다. 이렇게 해서 1940년에 미 육군은 ½톤, 1½톤, 2½톤, 4톤, 7½톤의 다섯 종류로 차량을 표준화 하기로 결정을 내립니다. 나중에 ½톤 차량은 ¼톤 차량,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지프와 ¾톤 "Weapon Carrier"로 분화 됩니다.

이후의 이야기는 다들 아시다시피 미국의 표준화, 대량생산의 "위대한" 승리였습니다. 미국은 방대한 공업생산력으로 역사상 그 어느 나라도 이룩하지 못한 위업(?)을 달성한 것 입니다! 농담을 조금 보태서 미국이 찍어낸 엄청난 숫자의 트럭이 승리의 원동력 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 해서 미육군의 차량화는 그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그 끝은 창대한 수준을 훨씬 넘어서게 됩니다. 정말 이거야 말로 해피엔딩입니다.

Monday, November 27, 2006

WTM 9탄

이틀간 앓고 나니 일도 안되고 공부도 안되는지라 편의점에 맥주나 살 까 해서 갔더니 WTM 9탄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탕은 한국에서 만든걸 집어 넣고 그동안 WTM 시리즈에 딸려 있던 한 장짜리 만화가 안 들어 있더군요.

재미있게도 이번 시리즈는 냉전의 투사들입니다.

세 통을 샀는데 두 통은...



크으... 홍건적들이 애용했던 T-10 입니다. 으헉.

이에 맞서는 자유의 투사는...



천자국의 M-551이군요. 뭔가 심히 불안한 느낌입니다.

Saturday, November 25, 2006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 대한 뒷북 감상

제 취향이 고상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보니 정치적으로 진지한 영화를 본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습니다. 이 영화를 본지 한달이 넘어가지만 감상을 어떻게 쓸지 고민한 것도 사실은 너무나 오랫만에 진지한 영화를 봤는지라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서 입니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The Wind That Shakes the Barley)은 몇 가지 점에서 랜드 앤 프리덤(Land and Freedom)을 생각나게 합니다. 혁명가 집단 내부의 갈등을 그리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겠지요.

개인적으로는 전작보다는 이번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 좀 더 마음에 들었습니다. 약소민족의 독립투쟁이라는 가슴 뭉클한(?) 소재에다가 무엇보다 저는 아일랜드 가수들을 좋아하거든요. 사실 개인적으로 대부분의 정치 사상에 대해 알레르기가 있다보니 쓸데없이 남의 전쟁에 끼어들어 죽어나가는 랜드 앤드 프리덤의 주인공들은 그다지 호감이 가지 않았습니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서 가장 큰 갈등의 축은 형과 동생인 것 같습니다. 좀 단순하게 분리하면 동생인 데이미언이 좀 더 급진적인 정치성향을 가지고 있지요. 영화 초반만 하더라도 데이미언은 런던에 가서 의사가 되는 것을 아일랜드 독립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청년이지만 갑자기 열렬한 투쟁가로 돌변합니다. 이렇게 급작스럽게 감정의 변화를 일으키는게 좀 어색하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영화 후반부에서 영국과의 협정에 따라 영연방 내의 자치국으로 남는다는 결정이 내려지자 두 형제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전개됩니다. 마치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이 1920년대에 정치사상에 따라 분열돼 갔던 것 과 유사합니다. 이런 독립 운동의 방법론에 따른 분열은 우리에게는 결코 남의 이야기 같이 들리지 않지요.

이렇게 20세기에 들어와서야 민족국가 형성을 시작해야 했던 후발 국가들은 준비 단계에서 부터 골치아픈 내부 투쟁을 겪게 됩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과정을 거쳐 분단되고 결국에는 두 국가로 나뉘어 전쟁을 벌이게 됐지요. 이런 비극은 많은 후발 민족 국가들이 겪는 비극인 것 같습니다. 민족 해방과 계급 해방을 갈등 없이 추진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지요. 이 때문에 우리나라와 중국은 두 체제간의 전쟁을 거쳐 두 국가가 됐고 베트남은 30년에 걸친 긴 내전을 겪어야 했습니다.

심각한 남의 나라 이야기를 보면서 동질감을 느껴 보기는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좀 더 고상한 평을 해 보고는 싶은데 지식이 부족하다 보니 힘들군요. 하핫.

Friday, November 24, 2006

Korean War Project 폐쇄

sonnet님이 쓰신 이스라엘의 로비에 대한 글을 읽고 나서 보니 불현듯 뭔가 하나 떠올랐습니다.

바로 지난 10월 Korean War Project가 운영 자금 부족으로 폐쇄된 것이죠.

Korean War Project는 한국전 참전자들에 대한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놓고 있는지라 한국쪽 방송계가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때 유용하게 활용하는 곳 입니다. 이곳은 말 그대로 기부금으로 운영되는 비영리 조직이고 나름대로 친한파 인맥을 재생산하는 의미가 있는 곳 이었죠. 이곳이 문을 닫게 돼 개인적으로 매우 아쉽고 차후 계획중(?)인 프로젝트에도 타격을 조금 받게 됐습니다.

sonnet님이 지적하신대로 로비란게 그렇게 거창할 필요는 없을 것 입니다. 이렇게 어떤 방식으로든 한국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많고 이들을 돕는게 그렇게 어렵지는 않으니까요.

Thursday, November 23, 2006

중동과 관련된 오늘의 뉴스 두 개...

오늘 아주 재미있는 중동관련 뉴스 두가지가 나왔네요.

軍, 철군계획서 제출 요구에 당혹

역시 열우당입니다. 겉멋만 들어 삽질을 연발하는 군요. 이런것들을 여당으로 만들어 줬으니... 이런 민감한 문제를 꼭 시끄럽게 떠들어야 하는지? 철군 문제야 군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계획을 세우고 있을텐데 개념없이 나서서 날뛰는 꼴 하고는. 정말 구제 불능의 븅신들입니다. 이런것들을 세금으로 먹여 살려야 하다니.

레바논에 특전사 병력 400여명 파병할 듯

이것 역시 난감한 소식이군요. 올 것이 온 것인지? 헤즈볼라와 이스라엘 양측에 껴서 피만 흘리게 되는건 아닐지 걱정입니다.

간만에 부루마블을 해봤습니다.

어쩌다 보니 후배 몇명을 만나 식사를 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커피나 한잔 마실까 하고 커피집에 갔는데 그 집은 보드게임이 몇 개 있는 집이었죠. 커피를 마시고 이런 저런 잡담을 하다 가 본 어린양의 재미없고 썰렁한 농담에 지친 후배 하나가 부루마블을 발견해 국제적인 부동산 투기를 해 봤습니다.

다시 해 보니 서울은 무려 100만원이나 하는게 압권이더군요. 저는 초기에 땅 값이 비싼 지역을 싹쓸이하고 서울까지 매입했는데 문제는 그러고 나니 건물 지을 돈이 없었다는 점 입니다. 그래도 다행인게 움직일때 마다 황금열쇠나 제가 산 땅에 걸려 거덜 날 일이 없었고 의외로 다른 사람들이 서울에 잘 걸렸다는 점? 그리고 몇 번 돌고 모은 월급(한번에 20만원이죠?)을 탈탈 털어 빌딩 하나씩 지어 놓으면 거기에 꼭 한사람 씩 걸리더군요.

별로 돈은 많이 못 벌었지만 끝까지 파산은 면할 수 있었습니다. ㅋㅋㅋ

역시 보드게임은 규칙이 단순한게 가장 좋은 것 같습니다. 가끔 A&A 같은 것을 할 땐 좁은 맵에 비해 유닛이 너무 많아 귀찮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에. 그러고 보니 한국에서 개발한 보드게임 중에 할만한 것은 어떤게 있을까요?

아시는 분께서 게임 하나 추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Tuesday, November 21, 2006

뭔가 궁색한 강대국

닉슨은 브랙퍼스트(Breakfast) 작전 실시 3일전인 3월 13일에 국방장관 레어드(Melvin R. Laird)와 만나 레어드의 남베트남 철군안에 대해 논의했다. 레어드는 휠러(Earl G. Wheeler) 대장과 함께 사이공에서 에이브럼스(Creighton W. Abrams, Jr) 대장 및 MACV 참모진을 만나 철군문제에 대해 논의하고 막 워싱턴에 도착한 참이었다. 베트남의 미군 지휘관들은 이미 1년 전부터 철군에 대해서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워싱턴으로부터 명확한 지침은 받지 못했고 그에 대한 계획도 세우지 않고 있었다. 베트남에 파견된 장성들은 철군은 북베트남과 상호 철수를 위한 협상의 일환으로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에이브럼스 대장은 신속한 철군안에 찬성하는 대신 평정작전의 진도, 남베트남군의 강화, 적의 공격 완화 등 세가지 점이 개선돼야 철군이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레어드는 이 의견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동의했지만 닉슨 행정부의 집권 초기 내에 철군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정치권의 요구에 더 중점을 두고 있었다. 레어드는 에이브럼스에게 “새 행정부에게 주어진 시간이 다하기 전에(재선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 3개월, 6개월, 9개월, 기왕이면 3-4개월 안에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레어드는 온건파가 아니었고 존슨 행정부 보다 더 강력한 군사적 대응을 선호했지만 그는 무엇보다 미국내의 정치적 동향에 민감했고 워싱턴이나 사이공에서 논의되고 있는 강경책은 실제로 실행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점도 잘 알고 있었다. 레어드는 남베트남에서 군사적 승리를 거두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닉슨의 베트남 정책은 잘해봐야 전쟁의 베트남화를 통해 남베트남군이 미국의 철수에 따른 공백을 메꿀 수 있도록 육성하고 북베트남과 미국의 상호 철군을 이끌어 내는데 그칠 것이었다. 그러나 레어드는 남베트남 군의 전투력을 강화하는 것 보다 지속적으로 작전을 펼치는 MACV의 기본적인 방침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또 북베트남과의 협상이 신속히 진행될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었다. 레어드는 이 점을 고려해 키신저의 협상 진행이나 에이브럼스의 견해와 상관없이 철군 계획을 세우기로 결심했다. 레어드는 1968년 까지만 해도 워싱턴의 그 누구도 고려하지 않고 있던 점진적인 일방적 철군을 기본 방침으로 결정했다. (후략)

Jeffrey Kimball, Nixson's Vietnam War, p.137~138


천자국의 굴욕.

럼즈펠드가 이라크를 쳐들어 갈 때 자신이 저것과 비슷한 상황에 처할 것이라고 생각 했을까?

미국의 베트남화는 결국 돈만 잡아먹은 실패작이 됐다. 오늘 워싱턴포스트에는 이라크군 재건이 뭔가 꼬여가고 있다는 요지의 기사가 하나 떴다. 이라크는 정치상황도 복잡하게 꼬여버렸으나 베트남보다 더 지독한 진창이라고 해야 하나?

사족 하나 더

위의 기사에서 이 부분은 정말 웃겼다.

Some of the American officers even faulted their own lack of understanding of the task.

"If I had to do it again, I know I'd do it completely different,"

reported Maj. Mike Sullivan, who advised an Iraqi army battalion in 2004.

"I went there with the wrong attitude and I thought I understood Iraq and the history because I had seen PowerPoint slides, but I really didn't."

독일 국방군의 급여체계(재탕!!!)

원래 페리스코프 포럼에 올렸던 내용인데 현재 그곳이 운영자님의 사정으로 인해 폐쇄됐으므로 여기다가 재탕을 해볼까 합니다.

==============(이 하 재 탕)==============

독일 국방군(Wehrmacht)의 급여 체계

독일 국방군의 급여체계는 25개의 급여등급(Besoldungsgruppen)으로 나뉘는 기본급과 전시 주둔지역의 부대에 일상 생활에 필요한 지출을 위해 지급되는 전시수당(Wehrsold), 주둔지의 주택 비용으로 지급되는 주택수당(Wohnungsgeldzuschuß), 자녀를 가진 군인에게 지급되는 자녀양육수당(Kinderzuschläge), 특별수당(Zulage)등이 있습니다.

1. 기본급

독일 국방군의 기본급은 25개 등급으로 나뉩니다. 독일 국방군의 기본급여 등급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었습니다. 기본급여는 주택수당과 합산되어 지급 됩니다. 주택 수당은 계급 등급에 따라 I부터 VII까지 7개 등급으로 나뉩니다. 전쟁 초기의 급여 체계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아래의 금액은 “연봉”입니다.

A. 장성급(Besoldungsgruppe 1~ Besoldungsgruppe 4)

Besoldungsgruppe 1, Wohnungsgeldzuschuß I(1942년부터 Besoldungsgruppe 1a)
26550 마르크
국방군 총 사령관(der Chef des Oberkommandos der Wehrmacht)
각 군 총 사령관(die Oberbefehlshaber der Wehrmachtteile)
원수 – 1942년부터
대제독(Großadmiral) – 1942년부터

Besoldungsgruppe 2, Wohnungsgeldzuschuß I
24,000마르크
상급대장, 해군상급대장(Generaladmiral), 대장, 해군대장(Admiral)

Besoldungsgruppe 1은 1942년 4월부터 Besoldungsgruppe 1a와 Besoldungsgruppe 1b로 나뉘었습니다. Besoldungsgruppe 1b에는 상급대장과 해군 상급대장이 포함됩니다. 대장과 해군대장은 기존의 Besoldungsgruppe 2에 들어갑니다. Besoldungsgruppe 1가 두개의 등급으로 나뉜 것은 1940년부터 원수 계급이 생기면서 새로 생긴 계급에 맞는 급여 등급이 필요해서 였습니다. 1942년에 새 급여 체계가 생기기 전 까지 원수와 대제독은 행정부의 장관급의 급여를 받았다고 하는 군요.

Besoldungsgruppe 1b, Wohnungsgeldzuschuß I
25,500마르크
상급대장, 해군 상급대장

Besoldungsgruppe 3, Wohnungsgeldzuschuß I
19,000마르크
중장, 해군중장(Vizeadmiral), 군의, 수의병과 중장급(Generalstabarzt, Admiralstabarzt, Generalstabveterinar)

Besoldungsgruppe 4, Wohnungsgeldzuschuß II
16,000마르크
소장, 해군소장(Konteradmiral), 군의, 수의병과 소장급(Generalarzt, Admiralarzt, Generalveterinar)

B. 영관급(Besoldungsgruppe 5~7)

Besoldungsgruppe 5, Wohnungsgeldzuschuß II
12,600마르크
대령과 대령급 군의, 수의병과 장교(Oberstarzt, Flottenarzt, Oberstveterinar)

Besoldungsgruppe 6, Wohnungsgeldzuschuß III
9,700마르크
중령과 중령급 군의, 수의병과 장교(Oberfeldarzt, Geschwaderarzt, Oberfeldveterinar)

Besoldungsgruppe 7, Wohnungsgeldzuschuß III
7,700~8,400마르크
소령과 소령급 군의, 수의병과 장교(Oberstabarzt, Marineoberstabarzt, Oberstabveterinar)

C. 위관급(Besoldungsgruppe 8~ Besoldungsgruppe 16)

Besoldungsgruppe 8
Wohnungsgeldzuschuß III : 4,800~6,900마르크, 대위와 대위급 군의, 수의병과 장교(Stabarzt, Marinestabarzt, Stabveterinar), 호봉(Dienstaltersstufe) 2등급
Wohnungsgeldzuschuß IV : 4,800~6,000마르크, 대위와 대위급 군의, 수의병과 장교, 호봉 1등급

※Dienstaltersstufe를 번역할 뾰족한 단어가 생각이 안나서 의미가 가장 비슷할 듯한 호봉으로 옮겼습니다.

Besoldungsgruppe 9, Wohnungsgeldzuschuß IV
3,400-3,700-4,000-4,200마르크
중위

Besoldungsgruppe 10,
2,400-2,700-3,000-3,400-3,700-4,000-4,200
소위
Wohnungsgeldzuschuß IV – 호봉 4등급
Wohnungsgeldzuschuß V – 호봉 1등급부터 3등급까지

Besoldungsgruppe 11, Wohnungsgeldzuschuß IV
3,400-3,800-4,200마르크
중위, 소위급 간부(군의, 수의 병과, Oberarzt, Marineoberassistenzarzt, Oberveterinar, Assistenzarzt, Marineassistenzarzt, Veterinar)

Besoldungsgruppe 12, Wohnungsgeldzuschuß III
7,650-8,680마르크
군악병과 중령(Obermusikinspizient)

Besoldungsgruppe 13, Wohnungsgeldzuschuß III
6,350-6,750-7,150
군악병과 소령(Musikinspizient)

Besoldungsgruppe 14, Wohnungsgeldzuschuß IV
5,000-5,250-5,500마르크
군악병과 대위(Stabmusikmeister)

Besoldungsgruppe 15, Wohnungsgeldzuschuß IV
3,960-4,160-4,360-4,590-4,848마르크
군악병과 중위(Obermusikmeister)

Besoldungsgruppe 16
2,930-3,170-3,470-3,620-3,770마르크
군악병과 소위(Musikmeister)
Wohnungsgeldzuschuß V – 호봉 1, 2등급
Wohnungsgeldzuschuß IV – 호봉 3 등급

D. 부사관급(Besoldungsgruppe 17~ Besoldungsgruppe 22)

Besoldungsgruppe 17, Wohnungsgeldzuschuß IV
3,400-3,600-3,800-4,000마르크
주임원사급(병기 정비(Oberwaffenwarte, Festungsoberwerkmeister), 말 편자 수리(Oberhufbeschlagslehrmeister))

Besoldungsgruppe 18
2,500-2,700-2,850-3,050-3,250-3,400-3,600마르크
원사급(Festungswerkmeister, Hufbeschlagslehrmeister)
Wohnungsgeldzuschuß IV – 호봉 6등급
Wohnungsgeldzuschuß V – 호봉 1~5등급

※ Oberwaffenwarte, Festungsoberwerkmeister, Oberhufbeschlagslehrmeister, Festungswerkmeister, Hufbeschlagslehrmeister는 상사(Stabsfeldwebel) 보다 위의 계급입니다. 원사라는 표현이 적당하지 않다는 생각도 들긴 하지만 독일 국방군의 분류상 부사관 계급이고 마땅한 번역어가 생각나지 않아서 주임원사와 원사급으로 옮겼습니다.

Besoldungsgruppe 19

Besoldungsgruppe 19, Wohnungsgeldzuschuß V : 2,550마르크
상사(Stabsfeldwebel), 상사급 병기 담당관(Waffenwarte) 13-14년차 근무

Besoldungsgruppe 19, Wohnungsgeldzuschuß V : 2,742마르크
상사, 상사급 병기 담당관 15-16년차 근무

Besoldungsgruppe 19, Wohnungsgeldzuschuß V : 2,934마르크
상사, 상사급 병기 담당관 17-18년차 근무

Besoldungsgruppe 20

Besoldungsgruppe 20a, Wohnungsgeldzuschuß V : 2,454마르크
중사, 중사급 병기 담당관 13-14년차 근무

Besoldungsgruppe 20a, Wohnungsgeldzuschuß V : 2,646마르크
중사, 중사급 병기 담당관 15-16년차 근무

Besoldungsgruppe 20a, Wohnungsgeldzuschuß V : 2,838마르크
중사, 중사급 병기 담당관 17-18년차 근무

Besoldungsgruppe 20b, Wohnungsgeldzuschuß V
2,400마르크
중사, 중사급 군의(Unterarzt) 수의병과(Unterveterinar) 12년 미만 근무

Besoldungsgruppe 21

Besoldungsgruppe 21a, Wohnungsgeldzuschuß V : 2,394마르크
하사, 13-14년차 근무

Besoldungsgruppe 21a, Wohnungsgeldzuschuß V : 2,520마르크
하사, 15-16년차 근무

Besoldungsgruppe 21a, Wohnungsgeldzuschuß V : 2,646마르크
하사, 17-18년차 근무

Besoldungsgruppe 21b, Wohnungsgeldzuschuß V : 2,340마르크
하사, 12년 미만 근무

Besoldungsgruppe 22

Besoldungsgruppe 22a, Wohnungsgeldzuschuß VI : 2,322마르크
병장, 13-14년차 근무

Besoldungsgruppe 22a, Wohnungsgeldzuschuß VI : 2,424마르크
병장, 15-16년차 근무

Besoldungsgruppe 22a, Wohnungsgeldzuschuß VI : 2,514마르크
병장, 17-18년차 근무

Besoldungsgruppe 22b, Wohnungsgeldzuschuß VI : 2,040-2,160마르크
병장, 12년 미만 근무

E. 사병급(Besoldungsgruppe 23~ Besoldungsgruppe 25)

Besoldungsgruppe 23

Besoldungsgruppe 23a, Wohnungsgeldzuschuß VI : 2,064마르크
상병, 13-14년차 근무

Besoldungsgruppe 23a, Wohnungsgeldzuschuß VI : 2,166마르크
상병, 15-16년차 근무

Besoldungsgruppe 23a, Wohnungsgeldzuschuß VI : 2,256마르크
상병, 17-18년차 근무

Besoldungsgruppe 23b, Wohnungsgeldzuschuß VI : 1,536-1,920마르크
상병, 12년 미만 근무

Besoldungsgruppe 24, Wohnungsgeldzuschuß VI : 1,680-1,740-1,800마르크
일병

Besoldungsgruppe 25, Wohnungsgeldzuschuß VII : 1,410마르크
이병

2. 전시수당(Wehrsold)

전시수당은 독일군이 유럽 각지를 점령한 뒤 현지에 주둔하는 병력에게 생활에 필요한 경비를 추가로 지급하기 위해서 도입 되었습니다. 전시 수당 지급은 16개 등급으로 나뉩니다. 아래의 수치는 월 급여 입니다.

1a : 국방군 총사령관, 각군 사령관 : 300마르크
1b : 상급대장 : 270 마르크
2 : 대장 : 240 마르크
3 : 중장 : 210 마르크
4 : 소장 : 180 마르크
5 : 대령 : 150 마르크
6 : 중령 : 120 마르크
7 : 소령 : 108 마르크
8 : 대위 : 96 마르크
9 : 중위 : 81 마르크
10 : 소위 : 72 마르크
11 : 상사, 중사 : 60 마르크
12 : 하사, 상급수습사관(Oberfahnrich) : 54 마르크
13 : 병장, 수습사관(Fahnrich) : 45 마르크
14 : 상병 : 42 마르크
15 : 일병, 근무 연한 2년 이상의 이병 : 36 마르크
16 : 근무연한 2년 이하의 일병과 이병 : 30 마르크

전시 수당이 지급된 지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네덜란드, 벨기에 : 1940년 9월 1일부터
노르웨이 : 1940년 10월 1일부터
프랑스, 덴마크 : 1940년 11월 1일부터
이탈리아, 크로아티아, 루마니아, 세르비아, 불가리아, 그리스 : 1941년 7월 1일부터
발트 3국, 구 폴란드 동부, 구 핀란드 영토 : 1941년 7월 1일부터

3. 자녀 양육수당(Kinderzuschläge)

바이마르 공화국 당시 Reichswehr의 자녀 양육수당은 다음과 같이 지급되었습니다.

한 자녀 : 월 10 마르크
두 자녀 : 월 20 마르크
세자녀, 네자녀 : 각 25 마르크
다섯자녀 이상 : 각 30 마르크

이 규정은 1938년 6월 30일 까지 시행 되었고 1938년 7월 1일부터 적용된 새 기준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 자녀 : 10 마르크
두 자녀 : 20 마르크
세 자녀 : 25 마르크
네 자녀 이상 : 각 30 마르크

그러다가 1941년 1월 1일 부터는 일괄 20 마르크로 통일되었습니다.

4. 특별수당(Zulage)

잠수함 승무원이나 강하병의 경우 특별 수당이 지급 되었습니다. 특수 병과이고 위험도가 상대적으로 높았기 때문입니다.

강하병특별수당(Fallschirmschützenzulage)은 강하부대의 모든 부대원들에게 계급에 상관없이 일괄적으로 월 75마르크가 지급 되었습니다. 강하학교등의 교육 기관에서 훈련 중의 강하 부대원은 월 30마르크를 받았습니다.

잠수수당(Tauchzulage)은 잠수함이 출항한 날짜를 기준으로 일 단위로 지급 되었습니다. 1941년 3월 1일부터 적용된 규정에 따르면 소위 이상의 장교는 하루에 일괄 4 마르크를, 상사와 중사는 3마르크를, 하사부터 상병까지는 2.50마르크를, 그 이하의 사병들은 1.50마르크를 받았습니다.

아프리카수당(Afrikazulage)는 북아프리카에 파병된 장교와 사병들에게 특별히 지급 된 수당입니다. 사막이 사람 살기에 좋지 않은 지역이다 보니 특별 수당이 지급 되었다고 합니다. 아프리카수당은 장교의 경우 매일 4 마르크, 부사관의 경우 매일 3 마르크, 사병의 경우 매일 2 마르크를 지급 받았습니다.

지뢰제거수당(Zulage für Minensuchen)은 공병들에게 특별히 지급된 수당으로 지뢰 제거에 투입된 기간동안 매일 1 마르크씩 지급 되었습니다.

5. 장성급직위 지출경비(Dienstaufwandentschädigungen der Generale)

이 수당은 장성급 이상 고위 지휘관들이 작전 지역에서 직책에 맞는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특별히 지급되는 경비 입니다. 이 수당은 직책에 따라 다음과 같이 책정 되었습니다.

집단군 사령관 : 월 250 마르크
야전군 사령관 : 월 250 마르크
군단장급, 군관구, 상급 지휘부(예를 들면 포병지휘부) 지휘관 : 150 마르크
사단장급 지휘관 : 월 50 마르크

1940년 이후 새로 생긴 원수급 장성들은 월 400마르크를 지급 받았다고 합니다.

Monday, November 20, 2006

Sunday, November 19, 2006

차베스가 새로운 지옥문을 여는건가?

Sonnet님께서 뭔가 찝찝하게 돌아가는 차베스 추장의 위서내랍(委內瑞拉)국의 사정에 대해 글을 써 주셨다. 은하계 본좌급 포퓰리스트인 차베스가 전 인민의 무장화를 추구한다는 소식을 접하니 이제 잘만하면 베네주엘라에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전개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엄습한다.

천자께서 이른바 WMD를 단속한다며 지구 곳곳을 쑤시고 계실 때 국제 NGO들은 WMD 보다는 덜 요란하지만 실제로는 더 위험한 Small Arms에 주목하고 있다. 이곳에 오시는 다른 분들께서 더 잘 아시겠지만 WMD란 건 그럭 저럭 추적이 가능한 반면 총기류는 기본적으로 이런게 불가능하다. 대한민국과 같이 총기 규제가 엄격한 국가라면 모를까, 행정 체계가 미비한 제 3세계 국가는 총기가 한번 풀리면 걷잡을 수 없게 된다. WMD에 속하는 것들은 사용할 수 있는 인력이 제한돼 있지만 소화기는 그렇지가 못하다. 총 한자루만 주면 누구든 살인자로 만들어 줄 수 있지 않은가?

Omega Foundation의 Pete Abel이 지적했듯 1960년대에 아프리카에서 총기류를 개발, 생산할 수 있었던 국가는 한 곳 이었고 회사도 하나여서 국가의 의지만 있다면 총기류의 생산과 유통을 통제하는 것이 완벽하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 가능했지만 1990년대에는 이것이 7개국 22개 회사로 늘어나면서 사정이 아주 달라졌다. 아프리카 보다 사정이 좀 나쁜 중남미 조차도 5개국 17개사가 소화기를 개발,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 단순히 총기를 만들 수 있는 곳 까지 합하면 이미 2000년에 거의 2,000개 이상에 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 자료는 아직 접하지 못해 잘 모르겠지만 이것 보다 늘면 늘었지 줄진 않을 것이다.

냉전시기 강대국들은 아프리카에 보잘 것 없는 싸구려 무기들을 잔뜩 풀어놓았고 그 결과 몇몇 국가들은 냉전의 종식과 함께 생지옥으로 변했다. 우리가 몇 년전 지겹게 보아온 소말리아나 르완다가 바로 그런 꼴이 아니던가? 국가가 통제할 수 없는 무장집단들이 살육극을 벌여댄 소말리아는 AK 소총이 WMD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직접 보여줬다.

그런데 이제 차베스 각하는 그런 위험한 짓을 자국에 하시겠다고 한다. 정부가 나서서 빈민들에게 총기를 뿌릴 모양이다. 외국인인 나 조차도 두렵기 그지없다. 혹시 몇 년 뒤 아프리카에서 보던 광경을 중남미에서 보게 되는게 아닐까? 각하께서는 이제 빈민들에게 빵을 나눠주는 것으로는 부족해서 유흥거리라도 주시겠다는 걸까?
만약 차베스 각하의 구상대로 빈민에 기반한 수백만의 민병대가 만들어 졌다고 치자. 만약 이들을 통제하는 차베스가 무력화 된다면 민병대들도 무력화 되는가?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그 즉시 통제불능이 된 민병대는 WMD가 된다. 민병대 100만명이 한명씩만 죽여도 100만명이니 이게 WMD가 아니면 뭐가 WMD란 말인가.

대한민국의 국영방송은 차베스를 띄워주는 방송을 한 바 있는데 그걸 제작한 PD는 차베스의 이런 위험한 발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려나?

SS 3 기갑군단의 외국인 지원병은 얼마나 됐을까?

국내의 인터넷 게시판을 보면 무장친위대의 “의용병” 규모를 굉장히 과장되게 인식하고 있는 글들이 많다. 이런 글을 쓰는 사람들은 의용병 부대들이 대부분 외국인 지원자들로 충원된 것 처럼 생각하고 있다. 특히 동부전선에서 용맹을 떨친 11 SS 기갑척탄병사단(11 SS Freiwilligen Panzergrenadier Division Nordland)은 거의 대부분의 인원이 서유럽 지원병들로 구성됐다고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렇다면 실제로는 어떠했을까?

친위대가 몸집 불리기를 준비하고 있던 1943년 초, 무장친위대, 의용군단(Freikorps) 소속의 북방계 “게르만”인은 다음과 같았다.

표1. 1943년 2월 6일 무장친위대/의용군단 소속 "게르만"인

국적/민족무장친위대(야전부대)무장친위대(보충부대)의용군단(야전부대)의용군단(보충부대)비 고
네덜란드인7906251,263693-
플랑드르인88153528373-
노르웨이인131121613318-
덴마크인205209633366-
핀란드인28221900-
에스토니아인001,222야전부대 및 보충부대 합계

3 SS 기갑군단의 편성 명령이 떨어진 것은 불과 1개월 뒤인 1943년 3월 30일이었다. 간판은 germanisches라고 달아놓긴 했는데 정작 게르만계 외국인 지원병은 일부분에 불과했던 셈이다. 실제로 11 SS 기갑척탄병 사단 소속의 SS 24 기갑척탄병연대 단마르크(Danemark)의 모체인 Freikorps Danmark 소속의 덴마크 지원병들은 1943년 5월에 연대로 확대 개편되는 과정에서 독일인 연대장과 기간요원들이 대규모로 충원되자 여기에 반발해 복무연장을 거부하기도 했다.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들 Freikorps는 그 동안 육군 보병사단의 일반 보병연대에 편입됐을 때 별 탈없이 잘 싸웠다는 점이다.)
연대의 명칭은 “노르게(Norge)” “단마르크”로 붙여 해당 국가의 지원병이 주축인 것처럼 포장했지만 실제로는 독일인과 독일계가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원래 11 SS 사단 소속 연대로 재편성될 예정이었던 4 SS 기갑척탄병여단 네더란트는 그나마 네덜란드인 지원자가 많아서 독립여단으로 편성했지만 이 여단조차 병력의 절반 이상을 독일인과 독일계 외국인으로 채우는 실정이었다.
미하엘리스(Rolf Michaelis)의 11 SS 기갑척탄병 사단사에는 1943년 2월까지는 11 SS 사단을 라트비아인 지원병으로 편성할 계획이었다고 돼 있는데 아마 이쪽이 훨씬 병력 보충은 쉬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덤으로, 히믈러의 원래 계획은 나중에 히틀러유겐트 사단의 단대호가 된 12 SS를 리투아니아인 사단에 붙이는 것이었다고 한다.)

3 SS 기갑군단 편성시 병력 보충에 도움을 준 것은 1943년부터 독일계 루마니아인이 대규모로 독일군에 편입된 점이었다. 운 좋게도 3 SS 기갑군단이 편성될 당시 독일계 루마니아인들이 편제표를 채우게 됐다.
히믈러는 지원병 군단이라는 구색을 맞추기 위해서 6 SS 산악사단 소속의 스위스인과 노르웨이인 150명이 차출해 3 SS 기갑군단에 배속시켰다.

티케(Wihelm Tieke)의 SS 3 기갑군단사 부록에는 노르트란트 사단의 1943년 9월 15자 외국인 병력 현황이 실려있다.

표 2. 1943년 9월 15일 노르트란트 사단의 외국인

국적/민족장 교(Führer)부사관(Unterführer)사 병(Mannschaften)비 고
덴마크인331621,191-
노르웨이인2050464-
스웨덴인0339-

1943년 12월의 병력 현황은 좀 더 자세한 자료가 있다.
베그너(Bernd Wegner)의 “Auf dem Wege zur pangermanischen Armee”의 부록에 실린 SS 3 기갑군단의 1944년 3월 31일자 보고서에는 1943년 12월 SS 3 기갑군단이 오라니엔바움 지구에 투입됐을 당시 병력 구성이 나와있는데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표 3. 1943년 12월 SS 3 기갑군단의 외국인

a. 군단 사령부 / 군단 경비중대 / 헌병대 / 기타 직할대

-장 교(Führer)부사관(Unterführer)사 병(Mannschaften)비 고
편제상 병력2049433,319-
독일인53144136-
Volksdeutsche
독일계 루마니아인03181-
독일계 헝가리인021-
독일계 크로아티아인004-
외국인 지원병
네덜란드인28129-
덴마크인2523-
플랑드르인031-

군단 보급수송대 (SS-Korps-Nachschub-Truppen 103)
-장 교(Führer)부사관(Unterführer)사 병(Mannschaften)비 고
편제상 병력2049433,319-
독일인62975-
Volksdeutsche
독일계 루마니아인01192-
독일계 헝가리인002-
외국인 지원병
네덜란드인106-
플랑드르인001-

b. 11 SS 기갑척탄병사단 “노르트란트(Nordland)”

-장 교(Führer)부사관(Unterführer)사 병(Mannschaften)비 고
편제상 병력5583,39112,612-
독일인2321,4962,403-
Volksdeutsche
독일계 루마니아인0225,738-
독일계 네덜란드인021-
독일계 덴마크인52616-
독일계 벨기에인001-
독일계 헝가리인0169-
독일계 크로아티아인126-
독일계 우크라이나인002-
독일계 리투아니아인001-
독일계 라트비아인002-
독일계 에스토니아인001-
외국인 지원병
네덜란드인119254-
덴마크인411931,123-
플랑드르인1915-
노르웨이인2962705-
스웨덴인1533-

c. 4 SS 기갑척탄병여단 "네더란트(Nederland)"

-장 교(Führer)부사관(Unterführer)사 병(Mannschaften)비 고
편제상 병력3251,8956,740-
독일인94497457-
Volksdeutsche
독일계 루마니아인0252,070-
독일계 네덜란드인011-
독일계 덴마크인124-
독일계 벨기에인001-
독일계 헝가리인0426-
독일계 크로아티아인0010-
독일계 우크라이나인001-
독일계 리투아니아인002-
외국인 지원병
네덜란드인331991,984-
덴마크인006-
플랑드르인105-
노르웨이인002-

대략적인 통계를 보면 독일인과 독일계 외국인을 제외한 “게르만 계” 지원병은 전체 군단에서 1/4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친위대는 일종의 선전효과를 위해 “게르만 계 지원병 군단”이라는 간판을 달았지만 독일인과 독일계 외국인을 빼면 거의 알맹이도 없는 셈이었다.

1944년 5월 25일 자료에 따른 외국인 지원병 현황은 더 좋지 않다.(Tieke)

표 4. 1944년 5월 25일 SS 3 기갑군단의 외국인

11 SS 기갑척탄병사단

국적/민족장 교(Führer)부사관(Unterführer)사 병(Mannschaften)비 고
덴마크인37220852-
노르웨이인2148269-
스웨덴인2819-

4 SS 기갑척탄병여단

국적/민족장 교(Führer)부사관(Unterführer)사 병(Mannschaften)비 고
네덜란드인392912,406-
플랑드르인2810-

독일군은 전쟁 기간 내내 병력 보충에 애를 먹었지만 특히 이들 외국인 지원병들은 전쟁 말기로 갈수록 보충에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하긴, 독일인이 아닌 이상 어떤 정신나간 사람이 히틀러의 덜떨어진 이상을 위해 독일인의 전쟁에 총알받이로 나가고 싶겠는가? 실제로 1941년 7월 중립국이던 포르투갈 정부는 지원병 부대(portugiesischen Legion) 편성을 허가했지만 지원자가 거의 없어 부대 편성까지는 되지 못했다고 한다.

역시 현명한 친구들이다.

1930년대 소련군 장교의 생활 수준(번역글)

저는 서방에서 소련, 러시아군을 연구하는 학자들 중 Roger R. Reese의 글을 가장 좋아합니다. 사회사적인 접근방법도 좋거니와 문장이 매우 쉽고 읽기 편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내용도 매우 좋지요. 이 글은 Roger R. Reese, Stalin;s Reluctant Soldiers : A Social History of the Red Army, 1925-1941, p125-p127에서 발췌 번역한 글 입니다.

소련군 장교의 주거는 매우 형편없어서 붉은군대의 이미지를 실추시켰고 또 장교 모집에도 장애요인 이었다. 1차 5개년 계획이전부터 주택 문제는 군대 뿐 아니라 소련 사회의 전체적인 문제였다. 예를 들어 1931년에는 붉은군대의 장교 5만 명이 숙소를 제공 받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그리고 그나마 있는 주택이라는 것도 그 상태가 형편없었다. 심지어 고급 장교들의 관사 조차 일반 시민들의 아파트처럼 낡고 비좁았다. 20년대, 30년대, 그리고 심지어 40년대 까지도 장교들은 수준 이하의 복지에 대해 불만이었다. 일반적으로 장교들의 생활수준은 사회의 비슷한 계층의 민간인들에 비해 낮았기 때문에 소련 인민들은 기본적인 혜택도 주지 않는 조국을 지키는데 대해 관심이 낮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혁명 이전 제정 러시아의 상황이 그대로 이어지게 됐다. 알렉산드르 3세가 모스크바와 상트 페테르부르크 부근에 주둔한 부대들을 대대적으로 서부 국경지대로 재배치 하자 번듯한 주택에서 거주하던 장교들은 서부 폴란드나 우크라이나의 가난한 농촌 촌락에 적응해야 했다. 이렇게 되자 엄청난 숫자의 장교들이 전역해 버렸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 다시 반복돼 1930년대에 소련 육군이 우크라이나에 새 부대들을 편성하고 장교들을 전출 시키자 장교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주택을 지어야 했다. 그리고 더 멀고 사정이 열악한 극동 지역에서 근무할 장교를 확보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웠다.

장교들은 종종 도시민들이 그랬듯 공동 주택에 거주했다. 예를 들어 1932년 “붉은별”지는 한 항공여단의 장교용 아파트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장교용 아파트는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건물벽의 회반죽은 갈라져 떨어지고 있었고 문과 창문은 제대로 닫히지 않았다. 그리고 한 블록에 있는 세 개 동은 세면장이 없었다.” 이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한 장교는 군 소식지에 보낸 편지에서 비가 오면 아파트는 지붕에서 떨어지는 빗물로 엉망이 된다고 하소연할 정도였다. 그는 비가 오면 꼭대기 층에서 가장 아래층 까지 빗물이 흘러내린다고 적었다. 그리고 창문이 엉망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창유리가 떨어지고 없었다. 문은 싸구려 합판으로 만들어져 찬바람이 들어왔다. 수도도 공급되지 않는 지경이었다. 1년전 겨울에 이 장교의 가족들은 그나마 관사조차 배정 받지 못해 병사들의 내무반에서 병사들과 지내야 했다. 숙소가 너무 부족해 학교의 교실까지 사용해야 할 정도였다. 장교용 주택이 난방이 안되거나 아예 안되는 것은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겨울에는 건강에 직접적으로 악영향을 끼쳤다.

가족을 가진 장교들은 자신의 아내와 자녀들이 겪는 고통 때문에 분노에 가득 차 있었다. 우크라이나 군관구의 기혼 장교들은 두 세대가 방 두 세칸 짜리 아파트 하나를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장교들은 또 자녀들을 위한 탁아소, 유치원, 놀이터도 매우 부족하다고 하소연했다. 1930년대 초반에 레닌그라드 군관구의 많은 장교들은 관사가 부족한데다 일반 주택도 얻기가 힘들어 부대에서 퇴근하지 않고 지내는 지경이었다. 비슷한 사례를 들면 1931년에 모스크바 경비부대의 장교 1,730명은 관사를 지급 받지 못했고 또 다른 529명은 “매우 나쁜” 주택에 거주했다. 장교와 그 부인들이 불평을 많이 한 것은 애초에 생활수준에 대한 기대가 높았기 때문이었다. 군인 가족들은 일반 시민의 생활수준도 엉망이라는 점에 대해 거의 위안을 받지 못했다.

장교의 주거 수준은 장교 집단의 구성에도 일정한 영향을 끼치는 요인이었다. 제 1차 5개 년 계획 실시 이전에 고학력의 젊은이들에게는 기회가 풍부했다. 많은 장교들이 군대를 제대해 다른 직장과 더 나은 생활 수준을 찾았고 아이러니 하게도 장교에 지원하는 교육수준이 낮은 집단 조차도 군대에서 교육을 받게 되면 더 나은 생활 환경을 찾기 시작했다. 사례를 하나 들면 세르게이 슈테멘코는 그가 1933년 모스크바의 차량화 및 기계화학교의 경험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 했다.

“나는 학교 근처인 레포르토보에 살았다. 나는 첫 해에 호스텔에서 거주했고 2년차가 되자 9제곱미터 짜리 방 한 칸을 배정해 준 뒤 키예프에 있는 내 가족들을 모스크바로 불러들였다. 내 어머니는 침대에서 주무시고 나와 아내는 바닥에서 자야 했으며 나의 어린 딸은 바로 옆의 욕조에서 재웠다. 1년 뒤 우리는 학교 부지 일부에 새 건물을 짓는데 참여했고 그곳으로 이사하자 엄청난 호사를 누린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슈테멘코와 다른 장교들이 이런 생활 수준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가난한 농부 출신에 낮은 교육수준을 가졌고 10대 후반이 되면 입을 하나 덜기 위해 가족에서 내몰리는 사회 계층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슈테멘코는 농업학교에 지원했다가 탈락하자 고향 친구와 함께 군에 지원했고 교육수준이 형편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장교 교육 과정으로 차출됐다. 그 결과 슈테멘코는 1926년에 19세의 나이로 모스크바 포병 학교에 입교했다. 아무리 군대의 복지 수준이 낮더라도 슈테멘코가 고향에 있는 것 보다는 훨씬 나았다. 만약 그가 고향에 남았더라면 공사장의 잡부나 짐꾼, 나뭇꾼으로 지내며 공용 건물의 다락이나 국영 전당포의 구석진 방에서 살아야 했을 것이다. 그러니 슈테멘코가 군대에 계속 남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게 슈테멘코에게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군대와 당은 주로 가난한 농민이나 노동자 층에서 장교를 선발했기 때문에 이런 사례는 매우 흔했다.

그러나 붉은군대만이 2차 대전 이전에 장교의 생활 수준과 사회적 지위가 낮았던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 육군도 역시 우수한 자질을 가진 장교를 확보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으며 소련과 사정이 비슷했다. 1930년대에 정부가 장교 봉급 인상과 복지 향상을 거부하자 많은 프랑스 군 장교들이 전역해 버렸다. 영국육군은 진급 적체 때문에 장교를 확보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영국군 장교는 대위까지 진급하는데 평균 14년이 걸렸으며 대위에서 소령으로 진급하는데 6년, 소령에서 다시 중령으로 진급하는데 9년이 걸렸고 이때쯤 되면 전역을 고려해야 했다. 소련과 마찬가지로 영국도 군대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다. 본드(Brian Bond)와 머레이(Williamson Murray)는 일반적인 영국인들은 장교의 복지수준이 2급 수준의 인력이나 바보들에게나 적당한 수준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영국군이 장교 충원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보고 있다. 영국, 프랑스, 소련에서 성공하는 길은 사회나 정치 방면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반면 독일군의 장교는 1차 대전 이전의 사회적 지위와 소득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크나페(Siegfried Knappe)의 연구에 따르면 1937년 기준으로 독일군의 중위는 월급만 가지고도 자동차 한대와 승마용 말 한 마리를 유지할 수 있었으며 생활 수준도 좋은 편이었다. 그 결과 독일군은 2차 대전 이전 장교를 확보하는데 하등의 어려움이 없었다.

Thursday, November 16, 2006

한국군 5사단의 일일 식량 지급

한국전쟁 기간 중 일선 부대의 급식에 관한 재미있는 자료를 하나 찾았습니다. RG-338 KMAG, Adjutant General, Decimal File, 1948-53, Box 40에 실려 있는 1951년 11월 27일자 한국군 5사단 검열 보고서에 보면 전투부대의 식량 지급 상황에 대해 나와 있습니다. 대충 아래와 같더군요.

표1. 한국군 5사단의 1일 급식
품목수량
5.5홉(5.5. hops of rice)
건빵1/3봉지(1/3 bag biscuits)
담배10가치

이밖에 된장(bean mash), 고추장, 소금, 어포(魚脯)가 지급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구체적인 수량은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주식 이외에 1인당 하루 500원의 식비가 지급됐는데 이 중 200원은 행보관이 관리하고 300원이 실질적으로 사병들이 부식을 사는데 쓸 수 있는 비용이었다고 합니다. 일일 평균 섭취 영양소는 대략 다음과 같이 나와 있네요

표2. 한국군 5사단의 사병 1일 영양 섭취량
품목
양(파운드)
칼로리
지방(g)
단백질(g)
탄수화물(g)
1.74
2,700
6.81
65.42
577.60
건빵
0.2023
338.8
2
8.9
67.8
고추장
0.08
36
1.09
2.36
3.94
된장
0.12
95.04
2.70
7.24
9.87
총계
2.1423
3169.84
12.60
73.92
659.21

그리고 이 보고서에 따르면 1951년 12월 1일부터 1/6 파운드의 생선 통조림과 절인 무(또는 무 김치)가 지급될 예정이라고 돼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칼로리는 적당한 것 같은데 밥에 대한 의존도가 절대적으로 높은 것으로 보입니다.

예전에 막연히 생각했을 때는 미국측이 육류 통조림을 대량으로 원조해 줬으니 군대에서도 많이 먹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꼭 그런 건 아닌 모양입니다.

한국전쟁 시기 다른 사단의 급식 현황에 대한 내용도 찿을 수 있으면 흥미로울 듯 싶습니다.

Tuesday, November 14, 2006

북한의 아리랑 공연으로 만든 gif 애니메이션

예전에 어떤 친구가 북한의 아리랑 공연의 수준은 좀 버벅거리는 gif 애니메이션 수준이라고 평한바 있는데 어떤 유쾌한 서양인이 정말로 이걸 가지고 gif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과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그래, 다 좋으니 당신들 꼴리는 대로 사시구려. 우리는 귀찮게 하지 말고.

Monday, November 13, 2006

War before Civilization 내용 요약

요즘은 책을 읽어도 기억이 잘 안납니다. 책을 덮는 순간 읽었던 내용이 휘발되어 사라지는군요.

그런고로 예전에 읽었던 책 중에서 재미있었던 놈들을 골라 요약문을 써 볼까 합니다.

1번 타자는 Lawrence H. Keenley의 War before Civilization : The Myth of the Peaceful Savage입니다. 1996년 옥스포드 대학 출판부에서 출간됐는데 그 해 LA Times의 올해의 역사서적 최종 후보까지 올라갔다고 하는군요. 이하는 내용 요약입니다.

1장 The Pacified Past
홉스는 Leviathan에서 자연 상태의 인간이 처한 환경을 “the war of every man against every man"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반면 루소는 홉스와 달리 ”문명 이전“의 인간은 본능에 따라 평화롭게 욕구를 해결할 수 있었으나 문명화로 인해 평화가 깨졌다고 보았다. 루소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홉스의 이론을 경멸했다. 흥미롭게도 루소는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 하기 위해서 신대륙에서 귀환한 탐험자들의 보고서와 자료를 활용하려 했는데 탐험가들이 관찰한 ”미개인“ 사회의 모습은 각양각색이었다. 타스마니아 원주민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들은 루소는 ”선한 자연의 자녀들이 그렇게 사악해 질 수 있단 말인가?“ 하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루소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19세기 동안 선사시대 인간 사회의 모습에 대해서는 홉스의 이론이 통용됐다. 특히 “야만적인 미개사회”를 유럽의 기독교 문명으로 평화롭게 한다는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는 홉스의 “미개사회”에 대한 견해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식민지 개척에서 돌아온 선교사, 탐험가, 군인들은 미개한 원시사회의 실상을 서구사회에 알리면서 이것을 “문명화”의 정당한 근거로서 제시했다. 19세기에는 오직 개혁적인 지식인, 예술인 정도만이 루소의 견해를 지지했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18세기 이래로 축적돼 온 “미개사회”에 대한 정보들이 학문이라는 체계하에 체계적으로 정리되기 시작했다. 인류학자들은 이제 “미개사회”에 가까이 접근해 좀 더 심도깊은 관찰과 분석을 시도했다. 이 시기에는 식민화가 완료돼 더 이상 이들 “미개인”들이 전쟁을 할 수 없었지만 인류학자들은 구전과 소수의 사례 연구를 통해 “미개인”들의 사회도 평화로운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이론을 체계화 했다. 1941년에 말리노프스키(Bronislaw Malinowski)는 “인류학으로 인해 .... 인류의 선조들이 평화로운 ”황금시대“에 살았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어렵게 됐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20세기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다시 “평화로운 야만(Peaceful Savage)"시대에 대한 논의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주장은 기본적으로 루소의 인간관에 바탕을 두고 인류학의 연구성과를 활용했다. 즉 ”미개인“의 전쟁은 근본적으로 그 규모도 작고 살상도 적게 일어나며 ”문명사회“의 그것에 비하면 전쟁이라고 볼 수 없는 수준이라는 것이다. 즉 전쟁 중에는 ”원시 전쟁(Primitive War)“이라는 특이한 형태의 전쟁이 있다는 이론이었다. 
이 이론은 시카고 대학의 라이트(Quincy Wright, 1890~1970)에 의해 체계화 되기 시작했다. 라이트는 1926년부터 시카고 대학에서 “전쟁의 원인”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라이트의 연구는 1942년 A Study of War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는데 라이트는 “전쟁”을 “무장한 집단으로 투쟁을 벌이는” 합법적인 상태라고 정의했다.
또 터니-하이(Harry Holbert Turney-High, 1899~1982)는 몬타나주의 인디언들을 연구해 1949년 Primitive War라는 연구를 출간했다. 특히 터니-하이는 장기간 직업군인으로 복무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라이트와 터니-하이는 “미개 사회”의 전쟁은 문명사회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견해를 보였다. 즉 미개인들의 전쟁은 인간의 그것 보다는 원숭이 집단의 싸움에 가깝다는 견해였다. 터니-하이는 원시 시대의 전쟁은 어린애장난 같은(childish) 것이었으며 문명사회의 전쟁과는 원인, 동기, 수행 방식부터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미개사회’의 전쟁은 그 파괴력도 미약하며 사회, 기술적 발전이 없는한 전쟁이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고 보았다. 
2차 대전이후 인류학계를 중심으로한 원시사회의 전쟁에 대한 연구는 주로 전쟁의 원인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1950~60년대에 뉴기니와 남미(주로 아마존강 유역)에서 활동한 인류학자들에 의해 새로운 사례연구가 발표됐다. 2차 대전이후 원시사회의 전쟁에 대한 논쟁은 소위 ‘문화생태론자(cultural ecologist)’와 ‘문화유물론자(cultural materialist)’간에 전개됐다. 
문화유물론자들은 원시사회의 전쟁에서 물질적 요인이 중요한 원인이 된다고 보았다. 즉 원시사회의 전쟁은 각 부족간의 부족한 자원(식량, 가축, 경작지)을 재분배하고 잉여 인구를 조절하는 기능을 한다는 것 이었다. 이런 주장은 ‘물질적 궁핍’을 전쟁의 원인으로 보고 있어 루소의 주장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간주됐다. 
반면 문화유물론적 견해에 반대하는 인류학자들은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관심을 돌렸다. 1960년대 후반 발표된 야노마뫼(Yamomamo)족에 대한 샤농(Napoleon Cagnon)의 연구는 문화유물론적 견해에 큰 도전이었다. 샤농은 야노마뫼족이 풍부한 자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복수, 또는 여성을 약탈하기 위해서 전쟁을 벌이는 점에 주목했다. 샤농의 연구는 문화유물론 진영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문화유물론에 반대하는 진영 중 사회적 특성에 주목한 집단은 신홉스주의자(Neo-Hobbesian)로 분류된다. 신홉스주의자 중 대표적인 학자로 할파이크(C. R. Hallpike)는 국가이전 단계의 사회들이 아무런 물질적 이득이 없는데도 전쟁을 계속하는 점에 주목했다. 신홉스주의자들은 원시사회의 전쟁은 매우 잦으며 특별히 중요한 원인이 없이도 전쟁을 벌인다고 주장했다. 
고고학 분야에서는 원시사회가 기본적으로 평화로운 사회였다는 인식이 일반적이었다. 고고학 분야는 전쟁에 대해 중요하게 다루고 있지 않고 있으며 유명한 개설서들은 전쟁에 대해서 따로 다루지 않고 있다.
고고학에서는 선사시대를 평화로운 시기로 서술하고 있다. 고고학 개설서 중 가장 유명한 편에 속하는 페이건(Brian Pagan)의 고고학 개설서는 영국에서 발굴된 기원전 4000년경의 유적지에 있는 해자가 군사적인 용도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초기 철기시대를 연구하는 벨기에의 한 고고학자는 무기와 함께 묻힌 무덤의 주인이 전사(warrior)라고 주장했으나 무기는 단지 무덤주인의 신분을 나타내는 것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주류 고고학계는 선사시대 유적에서 발견되는 성곽의 흔적과 무기는 상징적인 의미가 강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퍼거슨(Brian Ferguson)등 신 루소주의자들은 1950~60년대에 인류학자들이 관찰한 부족사회의 전쟁은 원시시대의 전쟁이 잔인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보기는 어려우며 이들의 전쟁이 잔인성을 띄게 된 것은 유럽문명과의 접촉이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신 루소주의자들은 학술적인 근거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학문의 연구방법을 도입하는데 소극적이다. 일부 신 루소주의자들은 민족학(ethnographic)의 연구성과를 활용하지 않을 뿐 아니라 민족학이 원시시대의 생활상을 설명하는데 부적합하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신 루소주의자들은 기존연구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반면 유럽문명과의 접촉 이전에 원시사회들이 어떤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명확한 가설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 루소주의적 견해는 점차 광범위한 지지를 받게 됐다. 
이렇게 해서 1980년대를 거치면서 원시사회의 전쟁이 위험하지 않다는 주장은 ‘선사시대의 평화(prehistoric peace)’라는 가설로 발전하게 됐다. 오늘날(1990년대 중반) 신 루소주의적 선사시대관은 지식인과 일반인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다. 지식인들의 담론과 대중문화에서 “전쟁”은 서구문명의 특수한 “정신병적(psychosis)” 행위로 묘사되고 있다.

2장. The Dogs of War : The Prevalence and Importance of War
만약 신 루소주의자들의 견해가 옳다면 인류학, 민족학, 고고학적 근거가 뒷받침 돼야 할 것이다. 그러나 “평화로운 미개사회”에 대한 사례는 매우 드문 반면 그 반대의 경우는 매우 증거가 많다.
그리고 전쟁을 벌이는 빈도가 낮은 부족이나 무리(band)의 경우에는 집단내의 인구대비 살인률이 매우 높은 특성을 가지고 있다. 흔히 서구사회에 평화로운 부족으로 알려진 쿵산(Kung San, 부시맨)족의 경우 1920년부터 1955년까지 인구대비 살인률이 미국에 비해 80배가 높았으며 종종 Tswana족을 집단으로 습격하기도 했다. 캐나다의 Copper 에스키모역시 높은 살인률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고립된 집단도 마찬가지로 남미 티에라 델 푸에고(Tierra del Fuego)의 Yaghan족의 살인률은 미국보다 10배가 높다.
리(Richard Lee)나 해리스(Marvin Harris, 1927~2001)는 쿵산족을 비롯한 사회를 평화로운 집단으로 묘사하면서 이들의 살인률에 대한 통계는 사실상 조작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들은 서구사회의 경우 전쟁에서의 사망률을 합쳐서 비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리와 해리스의 주장처럼 전쟁에서의 사망률을 합쳐서 비교하더라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뉴기니 Gebusi족의 살인률을 그대로 미국의 베트남전에 대입할 경우 미국은 베트남전 개입 9년째에 베트남인을 멸종시켰을 것이다. 농경을 주 생활수단으로 삼는 부족사회의 경우 확실히 “평화로운” 사회의 사례가 있기는 하다. 말레이반도의 Semai족은 전쟁을 하지 않으며 다른 부족이 공격해오면 어쩔수 없이 대항하거나 대개는 도망을 친다. 그러나 Semai 부족은 영국이 1950년대 말레이시아 독립운동을 진압할 때 영국군에서 대 게릴라전 부대로 활약했다. 한 Semai족 참전자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는 죽이고, 또 죽이고 계속 죽였습니다. 말레이인들은 시체를 뒤져서 시계나 돈을 훔쳤지만 우리는 그런 일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오직 적을 죽이는 것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적의 피를 마시기도 했습니다.” 
확실히 전쟁을 거의 하지 않는 평화로운 사회는 존재하지만 그 사례는 지극히 드물다.
미국 서부 평원지대의 인디언 부족 중 86%는 매년 습격이나 보복습격을 벌이며 단지 북아메리카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뉴기니의 Dugum Dani족에 대한 한 연구에 따르면 이들은 5개월 2주 동안 일곱차례의 전투와 아홉차례의 습격을 벌였다고 한다. 아마존 유역의 한 야노마뫼 부족은 15개월간 총 25차례의 전쟁을 벌였다.

한편, 인구대비 전투원의 비율에서도 원시사회는 "문명사회“보다 높은 경향을 보인다. 타히티인들의 평균적인 남성인구대비 병력 동원률은 45%를 넘는데 이른바 ”문명사회“인 소련의 2차대전기 병력 동원률은 25%를 약간 밑도는 수준이었고 미국은 20%를 넘지 못했다. 특히 문명사회는 생산에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병력 동원에 제약이 있지만 부족사회, 무리사회의 경우 사실상 적정 연령대의 남성은 거의 대부분 동원이 가능하다.
선사시대에도 전쟁이 많았음을 보여주는 고고학적 근거는 매우 많다. 이탈리아 그리말디(Grimaldi)에서 발굴된 34,000~24,000년 전 오리냑(Aurignac) 문화기의 유적에서는 척추에 관통상을 입은 어린아이들의 뼈가 대량으로 발굴됐다. 프랑스에서 발굴된 오리냑 문화기의 한 유골은 두개골에 가죽을 벗겨낸 흔적이 있기도 했다. 이집트의 Gebel Sahaba의 후기 구석기 유적에서 발굴된 유골의 40%는 돌로 만든 도구에 의해 뼈가 훼손되어 있었다. Gebel Sahaba를 발굴한 웬도프(Fred Wendorf, 1925~)는 이 유적에 매장된 사람의 50% 이상이 살해됐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일부 고고학자들은 인류가 ‘본격적’으로 전쟁을 시작한 것은 생산양식이 수렵채집에서 농경으로 전환한 이후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이미 수렵채집 단계에서도 집단적인 무력 사용이 흔했다는 증거가 더 많다.
3장 Policy by Other Means
1장에서 언급한 터너-하이는 원시사회에는 문명사회와 달리 정교한 전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퍼거슨의 최근 연구는 전술이 문명화에 따라 급격한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발전해 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원시사회의 전투 참여자는 문명화된 사회의 군인보다 기술적으로는 뒤떨어지지만 사실상 평생을 전사로 지내기 때문에 전투원으로서의 숙련도는 매우 높다. Oglala Sioux 부족은 미국 정부와의 전쟁에서 복잡한 기만전술을 구사해 여러 차례 승리했다. 뉴기니 원주민들은 전투에서 매복, 측면 공격 등의 전술을 구사한다. 스페인의 모레야 라 비야(Morella la Villa)에서 발견된 신석기 시대 벽화에는 전투하는 모습이 묘사돼 있는데 이 벽화에서도 적의 측면을 공격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원시사회의 전술과 조직력은 사회 구조상의 문제 때문에 여러 모로 결함이 많다. 뉴기니의 한 부족은 전투를 지휘하는 리더도 전사의 일원이기 때문에 직접 전투를 벌이다가도 뒤로 빠져 지휘를 하고 다시 전투에 뛰어든다. 이런 경향은 원시 사회에서는 지도자의 권위가 비교적 약하고 평등주의적인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원시사회의 무기는 타격(Shock)무기와 발사(fire)무기로 나뉜다. 화약 이전의 발사무기는 기본적으로 타격무기보다 정확도가 뒤떨어지기 때문에 전투는 타격무기에 의해 주도된다. 특히 사냥에도 이용되는 활과 달리 타격무기는 원시사회에서는 가장 전쟁에 특화된 도구이다. 곤봉같은 물건은 전쟁 외에는 다른 용도가 없다. 발사 무기로는 활과 투창류, 돌팔매가 있는데 특히 투창은 국가 이전 단계의 사회에서 많이 사용되는 발사 무기이다. 투창은 활 보다는 사거리가 짧지만 위력은 보다 강해 많이 사용된다. 돌팔매는 사용하기가 쉬우나 위력이 떨어진다.
터너-하이는 원시 사회는 거주지역을 요새화 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는데 유럽의 경우 초기 신석기 시대에 이미 주거지를 요새화 하고 있으며 미주리 강 일대에서 발견된 14~15세기 경의 주거지 유적도 요새화가 돼 있었다. 요새시설은 크게 요새화된 주거지, 요새화된 피난처, 요새화된 지배층의 거주지, 그리고 순수한 군사적 목적의 요새로 나뉜다. 원시사회에서 가장 일반적인 형태는 요새화된 주거지이다.
과거의 인류학자들이 주장한 것처럼 원시시화는 요새의 존재에 무지하거나 이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경제적 기반이 뒷받침 되지 않기 때문에 요새를 만들지 못하는 것이다.
4장 Imitaing the Tiger
Dugum Dani족은 다른 부족과 전쟁을 결심하면 전령을 보내 결투를 신청한다. 상대방이 결투에 응하지 않으면 다시 다음날 전령을 보내 결투를 신청하고 상대방이 싸우러 나올때 까지 같은 방법을 반복한다. 뉴기니의 마링(Maring)족은 상대방이 결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바로 쳐들어가서 승리할 경우 상대방을 몰살시킨다. 태평양 지역과 아메리카의 부족사회들은 이렇게 사전에 선전포고 형식으로 전투를 준비한다. 선전포고는 대개 상대방에 대한 모욕으로 이뤄진다.
이와 함께 원시사회의 전쟁은 형식화, 또는 스포츠화 되어있는 경향이 강하다. 전자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북미 평원 인디언들의 관행인 “counted coup"가 있다. 이것은 전투에서 용맹한 행위를 하는 것인데 적의 말을 훔치거나 일대일로 싸워 적을 죽이거나 다친 동료를구하거나 혹은 단독으로 많은 적과 싸우는 행위등이 그것이다. 전쟁에서 용맹한 행위를 중요시하는 것은 이른바 문명사회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문명사회의 전쟁은 의식적인 측면이 매우 희박하다. 서구 사회의 경우 19세기 말 까지 깃발과 같은 상징적인 것들을 중요시 했는데 줄루 전쟁에서 두명의 영국 장교는 줄루족에 패해 도망칠 때 연대기를 무사히 들고 도망쳤기 때문에 빅토리아 훈장을 받을 수 있었다.(정작 줄루족은 영국군의 연대기에 관심이 없었다.) 이외에 화려하고 요란한 군복도 서구 문명의 전쟁에 남은 의식적인 측면의 잔재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원시사회에서는 전투에 투입된 병력 대비 사상자율도 문명사회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비슷한 부족이나 언어집단간에는 전쟁 시 사상자 비율이 제한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승리한 측은 무차별적인 학살을 자행한다.
한편, 원시사회의 전투에서는 일반적으로 기습과 습격이 일반적이다. 기습과 습격은 연중 여러 차례 행해지는데 2장에서 언급한 야노마뫼 족은 25번의 습격으로 전 인구의 5%를 잃었다. 일반적으로 정상적인 전투 보다는 기습과 습격으로 인한 사망자가 더 많다. Lilloet 족은 이웃 부족의 기습으로 전 인구의 10%인 400명의 사망자를 냈다는 기록이 있다.
원시사회의 전쟁은 이렇게 기습과 습격 단계에서 점차 격화돼 학살로 발전한다. 뉴기니의 사례를 보면 한 부족은 기습으로 순식간에 인구의 8%를 잃었고 역시 뉴기니의 경우 한 부족연합군이 한시간도 안되는 사이에 전체의 13%에 해당하는 인명을 잃었다. 캐나다의 노란칼 부족은 개갈비 부족에게 여러 차례 학살을 당해 결국에는 다른 부족에 흡수됐다.
대량 학살은 자주 일어나지는 않는다. 일반적으로 이런 학살은 10~20년에 한번 발생하는 수준이다. 일부 학자들은 대량학살이 유럽인의 영향으로 시작됐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고고학적인 근거에 따르면 결코 그렇지 않다. 사우스 다코타의 크로 크릭(Crow Creek)에서는 14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대량 학살터가 발견됐는데 여기서 무려 500구의 유골이 출토됐다. 남아있는 가옥 유적들을 가지고 추산했을 때 학살된 부족은 전 인구의 60%에 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5장 A Skulking Way of War : Primitive Warriors vs Civilized Soldiers
19세기 중반 이전까지 아프리카의 유럽인 지배는 해안 지역에 국한됐다. 창으로 무장한 원주민들은 수발식 총을 쓰는 유럽인들에 비해 여러모로 우세했다. 인디언 전쟁에서도 미군은 종종 압도적인 수의 인디언에 포위돼 많은 피해를 입었다. 이와 반대의 경우도 있다. 50명의 Modoc 부족 전사들은 1,200명의 미군에 맞서 물이 떨어질 때 까지 다섯달 간이나 버텨냈다.
동시기의 미군보다 잘 훈련된 유럽의 군대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영국군은 줄루전쟁에서 후장식 소총, 개틀링건, 대포를 갖췄지만 이산들와나(Isandlwana), 마이어스 드리프트(Myer's Drift) 전투에서 연달아 참패했다. 1890년대 프랑스군도 투아렉(Tuareg) 족에게 여러차례 패배했으며 독일은 헤레로(Herero)족과 나마(Nama)족과의 전쟁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대개의 경우 문명화된 사회의 군대가 이런 야만사회와 싸워 이긴 것은 유럽의 전투방식을 버리고 이들의 방식에 맞추는 것이었다. 많은 경우 야만족과 싸우기 위해 다른 야만족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문명화된 군대가 항상 야만족에 승리를 거둔 것도 아니었다. 14세기 카나리아 군도의 부족들은 나무창과 돌팔매를 가지고 프랑스, 포르투갈, 스페인의 침략군을 여러차례 무찔렀다. 스페인인들이 이 지역을 완전히 제압한 것은 첫 침략으로부터 100년이 훨씬 지난 1496년이었다. 신대륙의 정복자들이 승리를 거둔데는 보이지 않는 동맹, 즉 바이러스, 박테리아 같은 것들의 역할이 컸다. 스페인군과 전투를 벌이다 죽은 아즈텍인은 10만명으로 추정되는 반면 스페인인들이 옮긴 전염병에 죽은 아즈텍인은 800만명으로 추정된다.

이른바 문명사회가 야만인들에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은 문명인들의 압도적인 숫자였다.

6장 The Harvest of Mars : The Casualties of War
뉴기니의 Mae Enga 부족은 상대방이 부상을 입고 쓰러지면 그를 난도질해 죽인다. 성인 남성은 무장을 하건 그렇지 않건간에 무조건 죽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부족간의 전쟁에서는 항복을 하지 않는 편이 나을 정도다.
부족사회의 전쟁에서는 포로를 잡지 않는데 이것을 확실히 설명할 수 있는 가설은 없는 상태다. 줄루 전쟁 당시 한 영국군 장교가 줄루족 포로에게 왜 우리가 너희들을 죽이지 않느냐고 묻자 줄루족 포로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이 우리를 죽이지 않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백인포로를 죽이는 것은 그것이 흑인의 관습이기 때문이듯 그러지 않는 것은 백인의 관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점차 영국군도 줄루족의 관습을 따르게 됐다.
일부 부족사회는 제물로 바치거나 의식을 위해 포로를 잡는다. 이로코이 족은 포로를 잡아 고문하는데 고문 끝에 포로가 죽으면 포로를 죽인 사람이 그 포로의 신체 일부를 먹는다. 남미의 투피(Tupi)족은 고문한 포로를 어린이들에게 죽이도록 하는데 이것은 그 어린이가 전사가 되겠다는 의식의 일부이다. 남 태평양의 여러 부족사회에는 적을 고문하거나 잡아먹는 관습이 널리 퍼져있다. 동부 아프리카의 일부 부족은 몸값을 받기 위해 포로를 잡기도 한다. 남아메리카의 일부 군장 사회는 포로들을 자기 집단내의 여성들과 결혼시키기도 하는데 이것은 매우 드문 경우이다. 투아렉 족은 전투에 지면 가족들을 남겨두고 도망치는데 이것은 그들이 비전투원을 죽이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많은 부족 사회에서 여성을 사로잡는 것은 중요한 일이며 종종 전쟁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종종 포로로 잡은 여성이 부족 구성원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수렵채집사회에서 여성의 노동력은 가치가 있기 때문에 여성 포로는 더욱 더 중요시된다. 
그러나 적을 몰살시키는 관습을 가진 부족도 많다. 타히티 원주민들은 적의 부인과 자식들을 잡아 창으로 꿰어 죽인다. 마오리족은 적의 여성을 잡아 도망치지 못하게 부상을 입힌 뒤 강간하고 잡아먹는다. 대개의 경우 포로 학살이 시작되면 몰살시키기 전에는 끝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현대 국가의 문명인들은 자신들이 모든 면에서 야만인들보다 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한 연간 사망률은 원시사회가 문명사회의 그것을 크게 능가한다. 미국의 남북전쟁과 영국의 크림전쟁 기간 중 사망자율은 비전투 손실을 합쳐도 북아메리카 인디언이나 남미 원주민의 그것 보다 훨씬 낮다. 여기서 순수하게 전투의 결과로 죽은 사람을 빼면 그 차이는 더 벌어진다.
신 루소주의자들은 미개 사회가 유럽과 접촉하면서 더 잔인해 졌다고 주장하지만 실제 북아메리카의 경우 유럽인이 이주한 이후 폭력으로 사망한 원주민의 비중은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원시사회는 항복을 인정하지 않고 남성을 몰살시키기 때문에 사망자의 비중이 매우 높다. 남성대 여성의 사망비 역시 부족사회의 그것이 더 높다. 2차 대전기간 중 연합군의 독일 폭격은 많은 여성을 죽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에서 남성대 여성의 사망비는 16대1이었다. 원시사회는 그 비율이 1대1에서 1대7 정도이다. 
7장 To the Victor : The Profits and Losses of Primitive War
타히티에서는 전투에서 승리한 뒤 적의 시체를 곤봉으로 내리쳐 짓이긴 뒤 그 위에 걸터 앉는다. 많은 사회에서는 시체를 훼손함으로서 그 영혼과 정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믿는다. 또 이런 행위는 승리자의 영혼을 더 강하게 한다는 믿음도 있다.
승리자가 가장 애호하는 전리품은 적의 머리나 해골이다. 적의 머리를 자르는 풍습은 매우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다. 오늘날 수정주의자들은 북미 인디언들이 머리가죽을 벗기는 행위가 원래 백인들이 하던 것이 인디언에게 퍼졌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백인들이 도착하기 이전부터 머릿가죽을 벗기는 행위는 널리 행해지고 있었다. 머리외의 전리품으로는 적의 성기, 손, 이빨 등이 있다.
설사 전리품이 아니더라도 적의 시체를 훼손하는 행위는 많다. 줄루족은 죽인 적의 복부를 가르는데 이것은 적의 영혼이 머무르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이다. 평원 인디언들도 시체 훼손을 많이 한다. 수 족은 목을 자르고 샤이엔 족은 팔을 자르고 아라파호 족은 코를 벤다.

신체 훼손중 가장 극단적인 행위는 식인이다.
인류학자들은 의식으로서의 식인과 단순한 식사로서의 식인을 엄격히 구분하고 있다. 중남미의 많은 부족들에서 식인행위는 매우 널리 퍼져있는 행위였다. 어떤 부족은 하루에 100명의 적을 먹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리고 많은 경우 나중에 먹기 위해 시체를 훈제해서 보관하기도 한다. 식인 행위는 태평양에서도 널리 행해졌다.
이외에 의식으로서의 식인이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아즈텍 제국이 있는데 해리스는 아즈텍을 “식인 국가”로 정의했다. 일부 문화 유물론자들은 아즈텍 제국이 인구밀도는 높은데 가축이 부족했기 때문에 식인을 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아즈텍의 식인이 순수하게 종교적인 것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어쨌건 아즈텍의 식인은 대규모로 이뤄졌다. 
전리품으로 적의 식량을 약탈하는 행위도 매우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많은 경우 이런 약탈은 도망친 적들이 굶어 죽게 하려는 의도에서 행해진다. 또 가축을 약탈할 경우 특정 종의 동물만 약탈하기도 하는데 베두인들은 낙타를 빼앗고 동아프리카에서는 주로 소를 약탈한다. 원시 사회의 사회 인프라는 매우 취약하기 때문에 불과 수일간의 전쟁과 약탈만으로도 부족의 생활 기반 자체게 붕괴된다.
한편, 원시 사회의 전쟁은 영토획득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는 가설이 있는데 이것은 아무 근거가 없는 낭설이다. 많은 경우 승자는 패배자의 영역을 빼앗는다. 한 연구에 따르면 뉴기니의 Mae Enga 부족이 벌인 전쟁 중 75%가 전쟁이 끝난 뒤 영역 조정이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설사 영역 흡수가 없어도 전쟁으로 인한 무인지대의 발생, 잦은 습격으로 인한 황폐화는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
8장 Crying Havoc : The Question of Causes

1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회과학자들은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원시사회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원인을 연구했다. 원시사회에서 전쟁의 원인은 가장 많이 연구되면서도 어려운 대상이다.
코흐(Klaus Koch)의 뉴기니 Jalemo 부족의 전쟁에 대한 연구사례는 그것을 잘 보여준다. A 마을은 B 마을이 지난 전쟁에서 도움을 줬기 때문에 돼지 몇 마리를 빌려줬다. 어느날 A마을의 남자 한명이 B마을의 남자가 자신의 아내를 유혹한다는 소문을 듣고는 친척들과 함께 의심가는 남자를 습격했다. 그러자 B 마을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습격을 감행했다. 그 결과 A 마을은 B 마을에 정식으로 전투를 신청했다. 양측은 곧 휴전하기로 했으나 B마을의 전사가 단독으로 친척의 복수를 했기 때문에 전투가 재개됐고 결국 전투가 2년간 계속됐다. 이 경우 어떤 행위가 실질적으로 2년간의 전쟁을 일으킨 것인지 명확히 정의내리기 힘들다.
1798년 맬서스(Thomas Malthus)가 인구론(Essay on the Principle of Population)을 저술한 이래 인구 증가에 따라 전쟁이 증가한다는 것이 일반화 됐다. 7장에서 살펴 봤듯 전리품 중에는 생산물과 생산수단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오늘날 사회과학자들은 인구증가와 전쟁의 확대에 대해 두 가지 가설을 제기했다. 
첫 번째는 인구 증가에 따라 갈등이 증가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교차 문화 비교(Cross cultural comparison)에서는 이런 가설을 지지하지 않는다. 교차 문화 비교를 활용한 몇몇 연구는 인구 증가와 전쟁의 발생 빈도가 반드시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맬서스식의 단순한 인구밀도 비교는 정확한 실상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10평망마일 당 한명은 북극의 툰드라 지대에서는 매우 높은 인구밀도지만 사바나 지역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렇지만 높은 인구밀도가 중요한 원인 중 하나라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또 하나의 추론은 부족간 교역과 결혼 문제도 전쟁을 일으키는 원인이라는 것이다. 특히 전자의 경우 상이한 집단간의 교류는 전쟁 위험을 줄인다는 주장을 반박하는 것이다. 인류학자들은 어떤 부족들은 서로 교역과 결혼을 하지만 가끔 전쟁을 벌이는 사례도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알래스카의 에스키모들은 여름에 교역 기간을 가지지만 교역하는 부족이라고 전쟁을 하지 않는 경우는 없다. 뉴기니의 Mae Enga족의 경우 전투를 벌일 때 자신의 친척을 발견해 죽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기도 하다.
교역이 전쟁의 원인이 되는 경우는 한 부족이 어떤 중요한 자원을 독점했을 때이다. 북부 캘리포니아의 원주민들은 종종 소금 확보를 놓고 전쟁을 벌였다. 교역과 전쟁은 비슷한 결과를 가져오는데 고고학자들은 여태까지 이 사실을 무시해왔다. 많은 경우 특정한 유물이 출토되면 고고학자들은 이것을 교역의 증거로만 해석했다. 그러나 이런 유물들은 동시에 전리품일 가능성도 매우 높다.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교역은 전쟁이 일어나기 쉬운 조건을 만들기도 한다. 
9장 Bad Neighborhoods : The Context for War
Joseph Jorgensen은 아메리카 서북부의 인디언에 대한 연구에서 한 지역마다 습격을 많이하는 특정 부족이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왜 한 부족이 특별히 호전적인가는 인류학, 역사학적인 의문의 대상이다. 전쟁의 원인에 대해서는 앞장에서 설명했다. 일반적으로 호전적인 부족은 인구와 영토가 꾸준히 증가하는 경향을 보인다. 콜로라도강 하류에서는 Mohave 족이 가장 호전적이지만 이들의 인구는 1770년대 3천명에서 1872년에 4천명으로 증가하는데 그쳤다. 반면 Mohave의 주요 적들은 인구가 감소하는 추세를 보였다. 인구증가는 호전성을 높이며 동시에 전쟁을 치를 인적자원을 뒷받침한다. 이와 함께 기술의 발전도 호전성을 높이는 원인이 된다. assegai를 개발한 줄루족이 적극적으로 전쟁을 벌인것이 대표적이다. 물론 호전적인 부족이 계속해서 호전적이지는 않다. 한 때 흉포한 야만인이던 스칸디나비아 반도인들이 지금은 가장 평화로운 인종이 됐다. 
일부 인류학자들은 교역이 이뤄지는 집단간의 경계지역이 가장 평화롭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8장에서 살펴봤듯 교역이 전쟁의 위험을 감소시킨다는 근거는 확실치 않다. 그리고 경계지역은 오히려 적의 습격에 더 빈번히 노출되는 지역이다. 경계지역이 평화롭다고 주장하는 인류학자들은 몇 가지의 사례만을 근거로 들고 있다.
이미 확정된 경계지역도 위험하지만 끊임없이 변하는 경계지역은 더 위험하다. 경계지역의 변동은 한 집단이 확대됨에 따라 그 반대집단이 위축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물론 상호 교류가 평화적으로 이뤄지는 경우도 많지만 대개는 그렇지 않다.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약 7,000~6,000년 전 서부유럽의 신석기 농경민들이 수렵채집을 하는 중석기인들과 광범위하게 접촉하면서 두 집단간에 충돌이 빈번했던 것으로 보인다.
10장 Naked, Poor, and Mangled Peace : Its Desirability and Fragility
문명사회도 그렇지만 부족사회들은 전쟁에 대해서 다양한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대개 전쟁에 대해서 전적으로 긍정적으로 보는 부족은 없다. 일반적으로 많은 부족사회들은 적을 죽인 전사가 영적으로 오염됐다고 인식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을 정화하기 위한 의식이 존재한다. 뉴기니의 Huli족 전사는 사람을 죽이면 수일간 사람을 죽인 손을 쓰지 않는다. 또 가장 호전적인 부족조차도 전투에서 가장 용맹을 떨친 사람을 지도자로 삼지 않는다. 또 전쟁에서 전리품은 남성의 몫이며 여성과 어린이는 배려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사회에서 여성들은 전쟁을 싫어한다. 매우 호전적인 남미의 Jivaro족 조차 자신들이 저주를 받아 전쟁을 많이 한다고 생각한다.
평화는 한 부족의 지도자가 전쟁을 그만두고 싶다는 뜻을 밝히는 것으로 시작한다. 일반적으로 평화협상은 양측의 피해가 비슷한 수준일 때 이뤄진다.

11장 Beating Sword into Metaphors : The Roots of the Pacified Past
원시사회가 평화로웠다는 견해는 2차 세계대전 이후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 전쟁은 유럽인들에게 엄청난 정신적인 고통을 안겨줬으며 특히 자신들이 저지른 일의 결과를 뼈저리게 느끼도록 만들었다. 이후 대중문화에는 반전 성향이 두드려졌으며 전쟁의 영광과 영웅적 행위를 다루던 미국의 전쟁 소설들은 세계대전 이후 정신병적인 상관들에 의해 무고하게 희생되는 군인들을 소재로 다루는 등 반전 성향이 강해졌다. 2차대전 이후 대학에서는 군사문제를 기피하기 시작했다. 뒤이어 시작된 냉전과 핵무기 경쟁은 미래에 대한 어두운 전망을 불러왔다. 다음번에 전쟁이 벌어진다면 그것은 단순히 3차 대전이 아니라 아마게돈이 될 것이었다. 핵무기의 등장으로 전쟁은 단순히 선과 악의 문제에서 멸망을 부르는 광적인 행동으로 바뀌었다. 그 결과 서구문명은 치유 불능의 상태라는 인식이 생겨났다.

이와 함께 식민지의 독립이 이뤄지면서 유럽 열강들은 몰락했고 각각 미국과 소련의 위성국화 돼 유럽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을 유사 식민지(Quasi Colonies) 상태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유럽이 그동안 누리던 우월적인 위치를 상실하자 한때 자신들의 식민지였던 제 3세계에 대한 재인식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세기 제국주의자들이 ‘야만사회’를 바라보던 홉스주의적 시각이 송두리째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홉스주의적 시각은 19세기 말 이른바 ‘백인의 부담(White-man's burden)'이라는 개념으로 식민지배를 정당화 했으며 학자들은 여기에 다윈주의(Darwinism)와 인종주의를 덧 붙여 정교화 했다.
그러나 2차 대전은 이런 모든 인식을 송두리째 뒤엎었다. 나치는 비 백인뿐 아니라 유럽인들조차 열등한 종자(lesser breed)로 인식했으며 백인이 비 백인에게 저지르던 행동을 같은 백인에게 저질렀다. 거위를 요리할 때 쓰던 소스를 기러기에게도 쓰기 시작한 것이다.(the souce for the goose had finally been applied to the gander) 나치의 충격과 뒤이은 유럽의 몰락은 백인들의 세계관을 송두리째 무너뜨렸다.
한편, 재인식이 이뤄지던 시기에 그 인식의 대상이었던 제 3세계는 빠르게 문명화됐다. 그 결과 이들을 올바르게 관찰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졌다. 문명이전 사회에 대한 서구의 동경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또 암울한 미래로 진보에 대한 확신도 줄어들었다. 진보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자리를 메우기 시작한 것은 “황금 시대에 대한 신화”였다. 서구 사회의 지식인들은 이제 제 3세계를 물질적 진보에 의한 희생자로 인식했다. 해리스가 관찰한 뉴기니의 화물 숭배(cargo cult)처럼 서구 문명은 원시사회를 타락 시켰다. 지식인들은 이 악의 근원을 서구 문명과 물질적 진보에서 찿으려 했다. 신 루소주의적 시각은 마침내 원시사회가 평화로운 사회라는 왜곡된 신화를 퍼트렸다.
12장 A Trout in the Milk : Discussion and Conclusions
원시사회의 전쟁이 서구사회 못지않게 잔인하다는 것은 백인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이다. 백인들은 항상 자신들이 모든 면에서 다른 세계보다 더 우월하고 효율적이라고 자부해 왔다.
이런 신화를 만든 주체는 인류학자들이었다. 2차대전 후 인류학자들은 ‘원시사회’의 전쟁이 단순하고 피해도 적다는 시각을 체계화 했다. 그들의 본질적인 의도가 어땠건 간에 이런 왜곡된 시각으로 만들어진 자료들이 축적되면서 하나의 신화가 만들어 졌다. 그러나 민족학과 고고학에 의해 이런 신화들을 부인하는 근거가 꾸준히 발견됐다. 
전쟁은 나무로 만든 창으로 사람을 찌르건 아니면 네이팜탄을 투하하건 간에 본질적으로 끔직한 행위이다. 평화로운 원시사회라는 것은 매우 드물게 존재한다. 이른바 문명사회가 아닌 곳에서 전쟁은 자주 일어나며 종종 더 치명적이기도 하다. 원시사회의 전쟁은 어린아이 장난이 아니라 문명사회의 전쟁이 가진 본질적인 특성을 다 가지고 있다. 원시사회의 전쟁에 결여된 것은 전략에 불과하다. 제 3세계에서는 원시사회에서 많이 쓰는 전투 방식인 게릴라전에 현대적인 무기를 결합해 엄청난 효과를 발휘했다. 즉 원시사회의 전쟁은 제한적인 수단이 사용되는 ‘총력전'이다.(Primitive warfare is simply total war conducted with very limited means)
그러나 전쟁은 인류의 생활에서 부차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충분한 준비 기간이나 회복 기간 없이 전쟁이 계속된다면 인류는 이미 멸종하고 없을 것이다. 루소의 원시 황금 시대가 단순한 상상이라면 홉스식의 끊임없는 투쟁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원시사회가 평화로웠다는 ‘신화’는 서구 지식인들의 자기 인식의 결과로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19세기의 제국주의가 백인우월론을 내세웠듯 원시사회의 도덕적 우월성을 주장하는 것은 인류의 지적, 정신적, 육체적인 동등함을 부정하는 것이다.

Wednesday, November 8, 2006

이근안 "앞으로 신앙생활을 하겠다"

이근안씨 7일 새벽 만기출소

이 양반이 다시 사회에 나오게 됐다고 한다.

그런데 "앞으로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대목에서 심히 덜덜덜이다.

이 양반이 나가는 교회 분위기는 대충 이렇지 않을까?

Monday, November 6, 2006

탄넨베르크(Tannenberg) 전투에 투입된 독일군 기병부대

엠파스에서 어떤 전쟁 보드게임 카페를 운영하시는 운영자님과 채팅으로 대화를 나누다가 탄넨베르크 전투에 투입된 양군 기병에 대해서 이야기가 나오게 됐다. 카페 운영자님 말씀인즉슨 Clash of Giants라는 게임에는 독일군 소속으로 각 군단별로 기병여단이 하나씩 있는 것으로 설정이 돼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편제에 따르면 탄넨베르크 전투 당시 독일 제 8군 소속 군단들은 군단 직할 기병여단이 아니라 사단 직할 기병연대를 한 개씩 가지고 있었고 이렇게 각 군단별로 2개 기병연대가 있었다. 큰 오류는 아니지만 아마도 게임을 만들다 보니 마커를 최대한 적게 하기 위해서 2개 연대를 따로 만들지 않고 1개 여단으로 묶은 모양이다.

탄넨베르크 전투에 투입된 독일군의 기병 부대 중 향토부대(Landwehr)와 요새부대를 제외한 부대는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Dennis E. Showalter, Tannenberg : Clash of Empires 1914 부록과 기타 몇 개의 자료에서 발췌)

보병사단 소속 기병연대

-1 보병사단 : 8 울란연대(Ulanen-Regiment 8)
-2 보병사단 : 10 기마엽병연대(Jägerregiment zu Pferde 10)
-1 예비사단 : 1 예비울란연대(Reserve-Ulanen-Regiment 1)
-36 예비사단 : 1 예비후사르연대(Reserve-Husaren-Regiment 1)
-35 보병사단 : 4 기마엽병연대
-36 보병사단 : 5 후사르연대(Husaren-Regiment 5)
-37 보병사단 : 11 용기병연대(Dragoner-Regiment 11)
-41 보병사단 : 10 용기병연대
-3 예비사단 : 5 예비용기병연대(Reserve-Dragonerregiment 5)

기 타

-1 기병사단
=1 기병여단 : 3 흉갑기병연대(Kürasierregiment 3), 1 용기병연대
=2 기병여단 : 12 울란연대, 9 기마엽병연대
=41 기병여단 : 5 흉갑기병연대, 4 울란연대

1차 대전당시 동부전선은 서부전선에 비해 기동전의 양상이 강했기 때문에 기병들도 어느 정도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무래도 과거의 전통의 영향덕에 구닥다리 티가 물씬 나는 부대 명칭도 남아 있어서 그런지 가끔가다가 1차 대전당시 독일군의 전투서열을 살펴보는게 2차 대전당시 독일군의 전투서열 보다 재미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Sunday, November 5, 2006

김석원 준장 재임용 소문에 대한 미국 군사고문단의 반응

김석원이라는 군인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평가가 많은데 대체적으로 부정적인 의견이 많은 것 같다. 나는 아직 공부가 부족해서 어떻게 판단을 내려야 할 지는 모르겠지만 부정적인 평가가 많은걸로 봐선 당시에도 썩 좋은 평을 받지는 못 한 것 같다.

다음 문서는 미 대사관 문서군인 RG59에 들어있는 내용으로 미 군사고문단장이 신성모 장관에게 보낸 편지다. 꽤 유명한 문서고 한국전쟁과 관련된 저작들에 자주 언급되는 것 같다. 아마도 김석원에 대한 가장 신랄한 평가가 아닐까 싶다.

1950년 3월 18일

대한민국 국방부장관 각하

본관은 최근 김석원 전 육군 준장이 복직될 가능성이 있으며 그 경우 그가 대한민국 육군 참모총장에 임명될 것이라는 정보를 접했습니다.
각하(신성모) 께서도 기억하시겠지만 저는 지난해 7월과 8월 김석원이 공금횡령과 부정행위를 저질렀으며 부패하고 공직을 남용하는데다 장교에게 필요한 윤리와 도덕적 기준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음이 적발된 데 관한 저의 견해를 말씀 드린 바 있습니다. 이미 지적한 문제점 외에도 제가 직업군인의 관점에서 진지하게 평가하면 김석원의 군사 과학과 전술에 대한 지식은 매우 형편없습니다. 김석원은 그가 맡은 방어책임구역의 방어 준비를 하는데 기본적인 원칙조차 이해하지 못했으며 설사 말단 초급장교라 하더라도 용납 못할 정도로 전술원칙에 대해 근본적으로 무지합니다. 저는 김석원이 전술가로서의 능력이 형편없기 때문에 만약 그가 더 책임 있는 직위를 맡게 된다면 대한민국의 안보에 심각한 장애를 초래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김석원은 도덕적으로도 해이한 인물이기 때문에 행정이나 재정을 책임지는 직위에는 결코 임명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김석원의 무능함에 대해서 더 지적하자면 우리 미국측의 관점에서 봤을때 김석원 장군은 고문단을 활용할 줄도 모르고 그럴 의사도 없었습니다. 그는 미국인 고문관을 신뢰하지 않았으며 한번도 솔직하게 의논한 적이 없고 고문관의 조언을 무시했습니다. 김석원은 한국 육군본부의 명령을 종종 무시했습니다. 제가 그의 직속상관이었을 때도 김석원은 명령을 따르지 않아 저는 몇 차례나 그를 군법회의에 회부하려 했습니다.

김석원을 채병덕 소장의 후임으로 임명하는 것이 국가에 해가 되는 일이기 때문에 각하께서 이 문제를 직접 다루셨으면 합니다. 각하께서 김석원 문제를 그냥 내버려 두신다면 김석원은 참모총창과 국방부를 무시하고 직접 이 대통령에게 음모를 꾸밀 것입니다. 김석원이 재임용 된다면 그의 입지가 더 커져 각하마저도 그에게 휘둘리게 될 것입니다.

김석원은 일본 장교집단이 가진 가장 추악한 특성은 모두 가지고 있지만 그들이 갖춘 직업군인적인 미덕은 하나도 갖추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건데 김석원이 대한민국 육군 참모총장에 임명될 경우 한국군과 미국 군사고문단이 계속해서 효율성을 유지할 수 있을지 의심이 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김석원이 고위직에 임명된다면 한국에서의 임무를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김석원이 참모총장에 임명된다면 저는 본국에 저의 소환을 요청할 것이고 또 제 후임을 추천하는 것도 매우 난처할 것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각하께서 김석원을 복직시키실 경우 저의 반응에 대해서 관심이 있으실 것 같기 때문입니다. 저는 대한민국 육군이 성장하고 발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각하를 직접 뵙고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각하께 저의 존경을 표하는 바입니다.

미육군 준장 W. L. 로버츠

대한민국 국방부 장관 신성모 각하께 
‘Activities of Brig Gen. Kim Suk Won’(1950. 3. 25), Enclosure 1; RG 59, Records of State Department


당시 한국군 장성 중 김석원 이상으로 미국측이 혐오한 사람은 또 누가 있으려나?

Saturday, November 4, 2006

Die Italiener an der Ostfront 1942/43 - Thomas Schlemmer

독일에서 쓸만한 군사사, 특히 현대 군사사 부문의 연구를 많이 내놓는 곳은 역시 연방군 산하의 MGFA 지만 그에 못지 않은 곳으로는 뮌헨의 현대사 연구소(Institu fuer Zeitgeschichte)가 있다. 물론 이외에도 다른 대학이나 일반 연구자들도 흥미있는 연구를 많이 내놓고 있으며 굳이 학술적인 연구가 아니더라도 좋은 책이 많긴 하지만 왠지 앞의 두 곳에 비하면 뭔가 하나씩은 빠졌다는 허전한 느낌이 든다.

Die Italiener an der Ostfront 1942/43는 현대사 연구소에서 지난해 10월에 출간한 책으로 제목이 바로 말해주듯 동부전선에 참전한 이탈리아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동부전선의 독일 동맹군들은 매우 흥미가 당기면서도 쓸만한 책이 가뭄에 콩나듯 소개되는 지라 돈 좀 생기는 대로 사야지 하며 벼르다가 다른 책에 우선 순위가 밀려 지난달에야 구입할 수 있었는데...

재미있는게 본문은 매우 짧고 부록이 엄청나다. 처음에 이 책을 주문할 때 이탈리아군의 작전에 대한 상세한 분석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그렇지는 않다.

그런데 이 책의 진가가 발휘되는 부분은 바로 부록이 아니던가!

부록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독일이 이탈리아군에 파견한 연락장교의 보고서와 번역된 이탈리아측의 문헌자료로 돼 있다. 특히 이탈리아 쪽 자료는 이탈리아어라고는 하나도 모르다 보니 접할 기회가 없었는데 친절하게도 번역을 해서 실어 주고 있다. 독일군 연락장교의 보고서에는 소련군의 동계공세 당시 몇몇 사단의 작전 상황에 대해서 유익한 정보들(특히 그동안 궁금했던 동부전선의 이탈리군의 전차 운용 같은)이 많이 실려 있다.

그러나 지도가 부실한 점은 매우 유감이다. 지도는 책의 가장 끝에 작은 지도 두개가 붙어 있는데 기존의 다른 저작들에 실린 지도 보다 깔끔하게 편집은 돼 있지만 내용은 그저 그렇다. 좋은 지도가 여러장 뒷받침 됐다면 훨씬 더 멋진 책이 될 수 있었을텐데 아쉽다.

우리들의 하느님 - 권정생 저

오프라인이건 온라인이건 간에 NL에서 환빠에 이르기 까지 호전적 내셔널리스트들이 득시글대는 대한민국에서 살다 보니 “우리 민족”이라는 단어만 나와도 울컥거릴 지경이 됐다. 이런 증상을 보다 못해 딱하게 여긴 어떤 선생님이 “온건한 내셔널리스트”의 글을 읽어 보는게 어떠냐 하시며 권정생 선생의 “우리들의 하느님”이라는 책을 선물해 주셨다.

책을 선물로 받은 고로 쭈욱 읽어 봤다.

권정생 선생은 확실히 이 어린양과 같은 타락한 속물이 범접할 수 없을 정도의 인격을 갖춘 고상한 분인 것은 맞는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리게 됐다.

그러나.

이분의 글을 읽다 보면 소위 “민족”의 문제가 외세인 “양키”들 때문에 비롯되고 있다는 듯한 느낌을 풍기는데 이런 생각에는 결코 동의하기 힘들다. 결국 인격의 고매함의 여부에 상관없이 내셔널리스트들은 내 취향과는 결코 부합하지 않는 듯 싶다.

하지만 책 자체는 좋은 글이 많은 것 같고 가끔 가다 튀어 나오는 “민족”과 관련된 언급만 아니라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선물하고 싶은 좋은 책이다.
허구 헌날 뼈와 살이 분리되는 이야기만 읽다가 이런 잔잔한 내용의 책을 읽으니 별세계를 다녀온 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