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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4월 29일 수요일

German Strategy and the Path to Verdun

군사사에 관심 없는 일반인이라도 ‘전격전’이라는 단어는 들어 봤을 정도로 독일의 군사사상에서 ‘기동전(Bewegungskrieg)’과 ‘섬멸전(Vernichtungskrieg)’ 개념은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짧은 시기에 독일의 일부 군사사상가들은 미래에는 ‘기동전’과 ‘섬멸전’을 통한 전쟁의 승리가 어려워 질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1차대전을 경험한 독일 군인들은 ‘기동전’만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으며 1차대전에서 패배한 것은 ‘위대한’ 슐리펜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수행하지 못한 결과라고 믿었습니다.

폴리(Robert T. Foley)의 German Strategy and the Path to Verdun : Erich von Falkenhayn and the Development of Attrition 1870-1916은 독일의 군사사상에서 이질적 존재였던 소모전략(Ermattungsstrategie)가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과정을 1980년대에 새로 공개된 독일 사료를 바탕으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저자는 새로운 자료를 통해 흥미로운 논의를 끌어내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살펴보고 있는 것은 소모전략이 등장하는 과정입니다.
독일 통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대(大) 몰트케(Helmuth von Moltke der Ältere)나 유명한 군사사가이자 군사평론가였던 델브뤽(Hans Delbrück)은 보불전쟁의 경험을 바탕으로 미래의 전쟁에서는 더 이상 몇 차례의 결정적인 전술적 승리를 통해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특히 러일전쟁의 결과 델브뤽은 자신의 견해를 더욱 확신하게 됐습니다. 수백만의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유럽국가들이 전쟁을 할 경우 한 번의 전투로 수십만의 적을 섬멸하더라도 결정적인 타격을 입힐 수 없다는 점은 너무나도 명백했습니다. 유럽국가들간의 전쟁에 비해 작은 규모였던 러일전쟁에서 조차 러시아와 일본 양 측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 했습니다. 델브뤽은 보불전쟁과 러일전쟁 등을 관찰한 결과 미래의 전쟁은 소모전으로 나갈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 군부에서는 기동전 사상이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군대 외부의 이질적인 사상은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 했습니다. 슐리펜(Alfred von Schlieffen)은 현대전의 변화된 환경을 이해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의 우수한 전술로서 충분히 단기간의 결정적 섬멸전을 통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슐리펜은 델브뤽과 달리 러일전쟁을 통해 신속한 승리의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슐리펜은 러시아군이 전술적으로 무능하고 전쟁의 패배로 타격을 받았기 때문에 양면전쟁이 발발하더라도 프랑스를 신속히 격파한 다음에 상대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는 쉽게 붕괴하지 않았고 러시아군의 동원속도는 슐리펜이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빨랐습니다. 결국 전쟁 전에 예상했던 신속한 승리는 오지 않았고 독일군은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야 했습니다.

저자는 다음으로 마른 전투의 패배 이후 새로이 총참모장이 된 팔켄하인(Erich von Falkenhayn)이 소모전 전략을 구상하고 실행하는 과정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팔켄하인은 독일군 장교단의 주류와는 달리 ‘기동전’과 ‘섬멸전’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총참모장에 임명될 당시 빌헬름 2세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지만 팔켄하인은 근본적으로 독일군 고위장교단 내에서 비주류였으며 결국은 기동전 지지자들과 적대적인 관계가 됩니다.
팔켄하인의 전략구상은 서부전선에서의 소모전을 통해 프랑스와 유리한 조건에서 휴전을 맺은 뒤 동부전선의 러시아를 정리한다는 것 이었습니다. 저자는 1915년의 경험을 통해 팔켄하인이 소모전으로 프랑스에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고 주장합니다. 프랑스군이 1915년 9월에 야심차게 실시한 대공세 당시 독일군은 서부전선에 충분한 예비대를 확보하지 못했지만 공세 초기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에 큰 타격을 주면서 전투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습니다. 동시에 동부전선에서는 1915년의 대공세를 통해 러시아군에게 포로 1백만을 포함한 막대한 타격을 입혔습니다. 팔켄하인은 이를 통해 1916년에는 서부전선에서 대규모의 소모전을 벌여 프랑스를 전열에서 이탈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저자는 1916년 전역에 대한 설명에서 흥미로운 주장을 몇 가지 더 하고 있습니다. 가장 재미있는 주장은 영국군의 솜 공세는 팔켄하인이 미리 예측하고 자신의 소모전략의 일부로 포함시켰다는 것 입니다. 팔켄하인의 원래 계획은 베르덩 공세를 통해 프랑스군을 소모시키며 동시에 프랑스가 영국에 구원 공격을 요청하도록 하는 것 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영국군이 구원공격에 나서면 1915년 가을과 마찬가지로 방어를 통해 영국군을 소모시킨 뒤 그동안 확보해 둔 전략예비를 통해 반격한다는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팔켄하인의 구상은 독일군의 전투력은 과대평가하고 영국군과 프랑스군의 전투력을 과소평가한 상태에서 이루어 진 것이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가 없었습니다. 베르덩 공세는 예상보다 완강한 프랑스군의 저항으로 독일군에 막대한 손실을 입혔으며 영국군의 공세는 팔켄하인의 예측보다 늦게 이루어 진데다 결정적으로 예상 이상으로 강력한 것이었습니다. 원래 팔켄하인이 반격에 투입하기 위해 확보한 예비대들은 영국군의 솜 공세를 저지하기 위해 소모되었습니다. 결국 원래부터 비주류였던 팔켄하인은 1916년의 실패를 계기로 반대파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고 총참모장에서 물러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자는 전후 독일의 역사서술에서 팔켄하인이 정치적 반대파, 특히 힌덴부르크(Paul von Hindenburg)루덴도르프(Erich Ludendorff) 등 ‘섬멸전’ 지지자들에 의해 폄하되었다고 지적합니다. 비주류였던 팔켄하인은 총참모장 해임과 함께 전후 독일군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지만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탄넨베르크’의 영웅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섬멸전’ 옹호자들은 독일이 1차대전에서 패배한 원인이 ‘위대한’ 슐리펜의 가르침을 살리지 못하고 어리석은 ‘소모전’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섬멸전’에 입각해 미래의 전쟁을 준비한 독일군은 2차대전에서 또 다시 ‘소모전’에 의해 패배했습니다. 많은 군사사가들이 지적하듯 ‘기동전’과 ‘섬멸전’은 작전단위의 방법론으로 적당한 것이지 ‘전략’ 단위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수단은 아니었습니다. 1차대전 이후의 독일 군사사상가들은 현대전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채 ‘작전’의 수단을 ‘전략’에 까지 확대 적용한 결과 철저한 패배에 직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폴리의 연구는 풍부한 자료에 근거해 새롭고 흥미로운 주장들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20세기를 전후한 시기 독일의 군사사상은 매우 흥미로운 주제이지만 많은 연구자들은 ‘기동전’과 ‘섬멸전’에만 주목한 나머지 짧은 기간 동안 존재했던 ‘소모전’에 대해서는 많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저자는 1차대전 당시 팔켄하인의 전략이 단순히 팔켄하인 개인의 돌출적인 산물이 아니라 19세기 말 이후의 군사사상에 뿌리를 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팔켄하인의 군사 사상이 형성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고찰이 부족하지만 충분히 흥미로운 설명입니다.

잡담 하나. 독일 군사사상의 발전을 개괄적으로 살펴보고 싶으신 분은 시티노(Robert M. Citino)의 The German Way of War: From the Thirty Years' War to the Third Reich를 추천합니다.
시티노의 저작들에 대해서는 채승병님이 쓰신 ‘전격전의 실체는 무엇인가’라는 글의 마지막 부분을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2007년 6월 24일 일요일

Die Schlacht bei Tannenberg 1914

한달 반 만에 집에 내려와서 그 동안 주문했던 책 들을 정리하는 중 입니다.

이번에 온 놈 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놈은 Melchior Verlag에서 출간한 Die Schlacht bei Tannenberg 1914 입니다. 이 책은 1927~1930년에 Gerhard Stalling 출판사에서 Schlachten des Weltkrieges 시리즈로 나온 책 중 하나입니다. 저는 이 책을 1차대전을 다룬 다른 책 들의 각주나 참고문헌 목록에서만 보다가 Melchior에서 이 시리즈를 다시 출간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시험삼아 먼저 탄넨베르크 전투를 주문했습니다. 탄넨베르크 전투에 대해서는 D. Showalter의 꽤 재미있는 책이 있긴 하지만 1차 대전이 끝난지 얼마 안된 시점의 독일인들의 시각도 매우 궁금하더군요.

이 책을 훑어 보니 좋은 점과 난감한 점이 하나씩 있습니다.

먼저 좋은 점은 책에 들어 있는 15개의 지도가 모두 낱장으로 분리되어 스캔하기 편하다는 점 입니다.

난감한 점 이라면 본문의 활자체 까지 1927년판을 그대로 사용했다는 점 입니다. 즉 우리가 흔히 보는 활자체가 아니라 Blackletter, 즉 고딕폰트로 되어 있다는 것 입니다. 저는 이런 활자체는 별로 익숙치 않아서 읽기가 난감하더군요.

책 자체가 1927년판을 그대로 다시 만들어서 그런지 펜화로 된 삽화가 많이 들어 있는데 꽤 마음에 듭니다. 물론 당시의 사진자료들도 꽤 많이 실려있습니다.

이 출판사의 사이트에 들어가서 보니 다른 시리즈들은 분량이 150~200쪽 정도로 내용이 다소 빈약해 보입니다. 일단 이 책을 한번 읽어 보고 나서 나머지 시리즈들을 구매할지 생각해 봐야 겠습니다.

※ 이번에 도착한 책 중에서는 이 것 외에 Daniel Niemetz의 Das feldgraue Erbe도 꽤 흥미있어 보입니다. 독일 국방군이 동독군에 끼친 인적 유산에 대해 다룬 책인데 과거 청산이 중요하게 다뤄지는 한국에 사는 사람으로서 독일의 사례는 어떨까 싶어 산 책 입니다. 대충 훑어 보니 1970년대 초반까지는 국방군 출신의 부사관 계층이 동독군 내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 같군요.

※ 잠시 TV를 보니 故 이은주씨가 나오는 영화를 해 주는군요. 목소리만 빼면 아주 멋진 배우인데 참 아깝게 일찍 갔습니다.

2007년 2월 24일 토요일

1차 대전 동부전선의 전쟁포로

2차 대전 당시의 동부전선은 서부전선에 비해 그 영향력이 과소 평가되는 경향이 강하다고 이야기 돼 왔습다만 탄넨베르크 전투나 브루실로프 공세 같은 몇몇 전투를 제외하면 그다지 언급되지 않는 1차 대전의 동부전선에 비하면 양반인 셈입니다. 오죽하면 독일애들이 1차 대전 당시의 동부전역을 Die vergessene Front라고 하겠습니까.

2차 대전 당시의 동부전선도 엄청난 인력과 물량이 동원된 전장이었지만 1차 대전 당시의 동부전선도 규모가 크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1차 대전 동안 포로가 된 교전국들의 군인이 약 900만 명인데 이 중 대략 500만 명이 동부전선에서 발생한 포로라고 하니까요.
무엇보다 2차 대전당시에는 주로 소련측의 포로가 압도적으로 많이 잡힌데 비해 1차 대전당시에는 대규모 육군을 보유했으나 전투력은 부실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있었기 때문에 양측이 모두 사이 좋게 많은 포로를 잡았다는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1차 대전 당시 동부전선의 전황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전체적으로 독일-오스트리아군이 계속해서 승리를 거두면서 우세를 보이지만 간간히 러시아군의 강력한 반격도 이어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는 서로 승리와 패배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난타전의 양상을 보이고 있고 독일은 거의 일방적으로 승리만을 거두는 형국입니다.

이렇다 보니 포로의 비율을 보면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가 서로 비슷한 규모로 엄청난 포로를 내고 있고 독일은 상대적으로 극히 적은 포로만을 내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러시아군은 1918년 초까지 독일에 240만 명, 오스트리아-헝가리에 186만 명, 그리고 오스만투르크와 불가리아에 3만~4만명이 포로로 잡힌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독일은 17만 명, 오스트리아-헝가리가 185만 명, 오스만투르크와 불가리아 두 나라가 합쳐서 8만 명 가량이 러시아군의 포로가 됐습니다. 오스트리아는 근소한 차로 적자를 면했고 오스만투르크와 불가리아는 적자를 낸 셈이군요.
이 중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주목할 만한 점은 전쟁 초-중반에 엄청나게 많은 포로를 발생시켰다는 것 입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전체 포로 중 73만 명은 개전 첫 1년에 잡힌 것이고 1915년 12월까지 포로 숫자는 97만 명으로 늘어납니다. 즉 1년 만에 전체 포로의 50%가 발생한 것 입니다. 1916년 6월의 브루실로프 공세에서 38만의 포로가 발생한 것을 제외하면 전쟁 후기에는 포로가 되는 숫자는 크게 감소합니다. 하긴, 초반에 원체 많이 잡히다 보니 1916년 이후가 되면 더 잡힐 만큼의 병력도 없었다지요.

※ 브루실로프 공세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것은 당시 러시아측의 보고서에는 포로가 19만으로 돼 있다는 것 입니다. 1차 대전 연구자들은 이렇게 된 원인이 러시아측의 포로 집계가 잘못된 것 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위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독일-러시아간의 대결에서는 독일이 꾸준하게 승리를 거두면서 적당히(?) 많은 숫자의 포로를 잡고 있습니다. 간단히 1914-1915년 전역, 즉 1914년 탄넨베르크 전투부터 1915년의 제 2차 마주리아 호수 전투까지 여러 차례의 전투가 적당한 사례가 되겠습니다. 독일군은 탄넨베르크에서 10만, 1차 마주리아 호수 전투에서 3만, 2차 마주리아 호수 전투에서 9만2천명의 포로를 잡았습니다. 상당한 성과이긴 하지만 결정타를 먹이지는 못해서 러시아군은 계속 밀려나면서도 붕괴되지 않고 저항을 하지요.

반면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의 대결은 그야말로 난타전의 표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전쟁 초기인 1914년 9월의 갈리치아 전역에서 10만에 달하는 포로를 냈다고 하지요. 그리고 1915년 1월~2월에 걸쳐 프세미우(Przemysl) 구원을 위해 감행한 공격에서는 러시아군 6만을 생포했지만 오스트리아군도 4만(!)의 포로를 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3월 23일 프세미우가 함락되면서 11만9천명의 포로가 발생했습니다. 하지만 다시 독일군이 증원된 뒤 갈리치아에서 벌어진 5월 전역에서는 러시아가 포로만 14만에 달하는 패배를 당합니다. 이건 뭐 난장판이 따로 없군요.

이렇게 난타전이 벌어지면 인구가 부족한 쪽이 결정적으로 부족한데 1차 대전 당시에는 오스트리아가 바로 그런 꼴이었습니다. 특히 1914-1915년 전역에서 숙련된 장교와 부사관을 대규모로 잃어 버렸다는 점은 오스트리아의 전쟁 역량을 결정적으로 약화 시켰습니다. 1915년 중반부터 대규모로 투입된 속성으로 양성한 장교단은 대학물을 너무 많이 먹어서인지 전쟁 이전의 직업군인들에 비해 체제에 대한 충성심이 부족한 편이었다지요.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다민족 국가라는 점 때문에 특히 포로가 더 많이 발생했습니다. 브루실로프 공세 당시 체코인으로 편성된 제 8보병사단은 사단전체가 항복해 버려 마치 2차 대전당시 소련군 소속의 에스토니아인 부대의 이야기를 연상시킵니다. 특히 체코계 부대는 “슬라브 형제”들과 싸우는 것을 별로 선호하는 편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헝가리나 크로아티아계 국민을 제외하면 전쟁에 별다른 열의가 없었다고 하지요. 슬라브계 국민들은 오히려 러시아에 더 친근감을 느낄 정도였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 입니다.
더 흥미로운 점은 러시아인을 증오하는 폴란드인 역시 강대국의 전쟁에 목숨을 내던지는 것은 별로 선호하지 않았다는 점 입니다. 독일이 1916년에 “해방(?)” 시킨 폴란드 지역에서 러시아와 싸울 의용병을 모집했을 때 당초 목표는 1917년 상반기 까지 폴란드 인으로 15개 보병사단을 편성하는 것 이었는데 지원자는 동부 폴란드 전역에서 4천명을 약간 넘는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폴란드인의 입장에서는 독일인이나 러시아인이나 그놈이 그놈 이었겠지요.

이런 강대국들간의 난타전 말고도 루마니아와 같은 어중간한 나라의 흥미로운 사례도 있습니다. 루마니아는 1916년 9월 헝가리를 침공했다가 바로 독일-오스트리아 연합군의 반격으로 박살이 나는데 독일군의 11월 공세에서 루마니아군은 14만명의 포로 외에도 그냥 집으로 돌아간 병사가 9만명에 달해 말 그대로 군대가 분해돼 버렸다고 전해집니다.(한편, 같은 기간 루마니아군의 전사자는 14,000명이었다고 합니다.) 이후 루마니아군은 사실상 증발해 버리고 러시아군이 루마니아에 들어와 독일군과 싸우는 양상으로 전개가 됩니다.

전쟁포로의 처우는 아주 개판이었습니다. “서부전선 이상없다”에는 독일에 포로가 된 러시아 포로들의 비참한 모습이 짧지만 인상적으로 묘사돼 있습니다. 그렇지만 러시아에 포로가 된 독일, 오스트리아 포로에 비하면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 잡힌 러시아 포로는 “아주 약간” 나은 편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1914/15년 겨울과 1915/16년 겨울에 유행한 티푸스로 러시아군에 포로가 된 인원 중 30만 명이 사망했고 이 외에도 강제노동으로 인한 사망자도 엄청났습니다. 무르만스크 철도 공사에서는 2만5천명이 중노동과 영양실조로 사망했습니다.

동부전선에서 이렇게 대규모의 포로가 발생한 것은 양측 모두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먼저 오스트리아는 1916년 여름이 되자 전쟁 수행능력을 거의 상실해 더 이상 대규모 공세작전을 펼칠 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에 따라 독일에 의존하는 경향이 더욱 강해지지요. 러시아는 다들 잘 아시다시피 짜르 체제가 붕괴돼 버리죠.

이런 것을 볼 때 2차 대전당시 소련이 1차 대전당시의 러시아보다 더 짧은 기간동안 더 많은 손실을 입고도 전쟁에 승리한 것을 보면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2차 대전 때도 짜르 체제였다면 러시아는 1941년에 전쟁에 졌을지도 모릅니다.

참고서적

Holger Herwig, The first world war : Germany and Austria-Hungary 1914-1918, Arnold, 1997
Reinhard Nachtigal, Die Kriegsgefangenen-verluste an der Ostfront, Die vergessene Front – Der Osten 1914/1915, Schoningh, 2006
Dennis E. Showalter, Tannenberg : Clash of Empires, Brassey’s, 2004
Norman Stone, The Eastern Front 1914-1917, Penguin Books, 1998

2006년 11월 6일 월요일

탄넨베르크(Tannenberg) 전투에 투입된 독일군 기병부대

엠파스에서 어떤 전쟁 보드게임 카페를 운영하시는 운영자님과 채팅으로 대화를 나누다가 탄넨베르크 전투에 투입된 양군 기병에 대해서 이야기가 나오게 됐다. 카페 운영자님 말씀인즉슨 Clash of Giants라는 게임에는 독일군 소속으로 각 군단별로 기병여단이 하나씩 있는 것으로 설정이 돼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편제에 따르면 탄넨베르크 전투 당시 독일 제 8군 소속 군단들은 군단 직할 기병여단이 아니라 사단 직할 기병연대를 한 개씩 가지고 있었고 이렇게 각 군단별로 2개 기병연대가 있었다. 큰 오류는 아니지만 아마도 게임을 만들다 보니 마커를 최대한 적게 하기 위해서 2개 연대를 따로 만들지 않고 1개 여단으로 묶은 모양이다.

탄넨베르크 전투에 투입된 독일군의 기병 부대 중 향토부대(Landwehr)와 요새부대를 제외한 부대는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Dennis E. Showalter, Tannenberg : Clash of Empires 1914 부록과 기타 몇 개의 자료에서 발췌)

보병사단 소속 기병연대

-1 보병사단 : 8 울란연대(Ulanen-Regiment 8)
-2 보병사단 : 10 기마엽병연대(Jägerregiment zu Pferde 10)
-1 예비사단 : 1 예비울란연대(Reserve-Ulanen-Regiment 1)
-36 예비사단 : 1 예비후사르연대(Reserve-Husaren-Regiment 1)
-35 보병사단 : 4 기마엽병연대
-36 보병사단 : 5 후사르연대(Husaren-Regiment 5)
-37 보병사단 : 11 용기병연대(Dragoner-Regiment 11)
-41 보병사단 : 10 용기병연대
-3 예비사단 : 5 예비용기병연대(Reserve-Dragonerregiment 5)

기 타

-1 기병사단
=1 기병여단 : 3 흉갑기병연대(Kürasierregiment 3), 1 용기병연대
=2 기병여단 : 12 울란연대, 9 기마엽병연대
=41 기병여단 : 5 흉갑기병연대, 4 울란연대

1차 대전당시 동부전선은 서부전선에 비해 기동전의 양상이 강했기 때문에 기병들도 어느 정도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무래도 과거의 전통의 영향덕에 구닥다리 티가 물씬 나는 부대 명칭도 남아 있어서 그런지 가끔가다가 1차 대전당시 독일군의 전투서열을 살펴보는게 2차 대전당시 독일군의 전투서열 보다 재미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