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March 28, 2012

2차대전 중 독일의 돌격포 수출에 관한 통계

지난번에 썼던 “동맹국들의 조병창이 될 수 없었던 독일”과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생각나는 대로 책 몇권 펼쳐놓고 쓰다보니 빠진 이야기가 많아서 조금씩 보충하는 내용을 써 넣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첫번째가 되겠군요.

간단한 통계를 하나 올려 보겠습니다. 2차대전 기간 중 독일이 다른 국가들에 수출한 돌격포 수량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 표를 살펴보시면 아시겠지만 독일이 1942년 부터 1944년 까지 다른 국가들에 수출한 돌격포의 총 대수가 미국이 토브룩 함락 이후 영국에게 한번에 지원한 셔먼의 숫자 보다 더 적습니다. 산업 동원력의 현격한 차이라 할까요...

표. 독일의 돌격포 수출(1942.11~1944.12)
불가리아
이탈리아
핀란드
스페인
루마니아
헝가리
총계
1942.11
2
2
1942.12
1943.1
1943.2
5
7
1943.3
5
12
1943.4
5
17
1943.5
10
5
32
1943.6
10
42
1943.7
10
52
1943.8
10
10
72
1943.9
10
82
1943.10
10
92
1943.11
4
96
1943.12
10
2
108
1944.1
2
110
1944.2
12
122
1944.3
1944.4
10
132
1944.5
30
162
1944.6
15
177
1944.7
14
40
231
1944.8
20
30
281
1944.9
10
291
1944.10
1944.11
1944.12
총계
57
5
59
10
120
40
291
[표 출처 :  Peter MüllerㆍWolfgang Zimmermann, Sturmgeschütz III : Rückgrat der Infanterie, Band 1, Geschichte, Entwicklung, Herstellung und Einsatz, (History Facts, 2007), p.240]

Sunday, March 18, 2012

어떤 노동운동가의 자아비판

어떤 유명한 노동운동가의 자아비판...

내가 태어난 황강동이란 동네는 우리 14대 조상 때 부터 대대로 살아오던 경주 김씨 양반 씨족부락이었읍니다. 100여 호 되는 마을에서 타성받이라고는 다섯 손가락에 꼽힐 정도였고 그것도 우리 마을에 데릴사위로 왔다든가 머슴을 살던 사람뿐이었으니까요.

양반이라고는 하지만 구한말 때 약간의 벼슬을 한 것을 제외하고는 내내 몰락의 길을 밟은 전형적인 몰락양반이었읍니다. 따라서 새로운 시대의 교육을 일부러 거부하고 봉건적 사고방식을 고집한 선조들 덕분에 우리 마을은 개화니 문명이니 하고는 상당히 거리가 멀었읍니다. 그래도 몰락 봉건층의 지조랄까 그런 것은 있어서 일제에 대해서는 굉장히 반감을 가졌읍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 부터 누가 뭘 좀 잘못하면 저놈 왜놈 물 먹었구나, 고약한 냄새가 나면 왜냄새가 나는구나 하는 소리를 흔히 들으면서 자랐으니까요. 그렇다고 독립투사가 거기서 나왔냐하면 그것도 아니었읍니다. 그냥 시대의 발전을 주체적으로 수용하거나 극복해 내지 못하고 퇴보해 가는 선비의 모습이 남아 있었던 것 입니다.

때문에 우리 마을에서는 해방이 되고 한참이 지났어도 학교를 제대로 구경한 사람이 거의 없었읍니다. 마을 서당이 76년도에도 있었을 정도면 짐작이 갈 겁니다. 나도 어릴 때는 서당을 국민학교와 함께 다녀야 했고 중고등학교 다닐 때도 방학이 되어 집에 오면 서당엘 나가야 했읍니다. 그때는 나 자신도 인근에 하나밖에 없는 우리 마을 서당이 자랑스러웠을 뿐 아니라 명심보감을 읽는 것은 좋은 것이라는 생각을 철썩같이 믿고 있었읍니다. 동네 어른들이 쥐뿔도 아무것도 없으면서 우리는 아직도 서당이 있는 양반동네라는 자부심만 잔뜩 가지고 유교적 전통을 고집하는 분위기가 은연중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영향을 안 미칠 수가 없었던 것 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내겐 아직도 유교적 잔재가 많이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그게 사람들과 대중적으로 어울린다든지 하는 데 조금 안 좋게 작용한다는 것을 종종 느낄 때가 있거든요.

김문수, 1985년 8월 『현장』과의 인터뷰에서.

현장 편집부, 「어느 실천적 지식인의 자기 반성 : 노동현장 속의 지식인 김문수」, 『현장』제6집, (돌베게, 1986), 128쪽

자아비판으로 부터 30년이 다 되어 가지만 이 분의 유교적 잔재는 여전하신 듯 싶습니다. 자아비판 한번 더 하셔야 할 듯.

Saturday, March 17, 2012

The German Air War in Russia - Richard Muller

오늘은 리처드 멀러Richard MullerThe German Air War in Russia라는 좀 오래된 책 이야길 해 볼까 합니다. 1992년에 나왔으니 딱 20년 전에 나온 책이군요. 뜬금없이 예전의 책 이야길 꺼내는 이유는 제임스 코럼James S. Corum의 리히토펜Wolfram Freiherr von Richthofen 평전, Wolfram von Richthofen: Master of the German Air War를 읽고 나서 몇가지 확인해 볼 것이 생각나서 이 책을 꺼내 들었다가 또 읽은 김에 내용 정리나 해 볼까 해서 입니다.

이 책이 나왔던 1990년대 초반에는 학계 외부에서 독일공군이 처음부터 단순히 육군을 지원하는 ‘전술공군’으로 등장했다고 보는 논의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1982년에 나온 호르스트 보크Horst BoogDie Deutsche Luftwaffenführung 1935-1945가 이러한 인식을 비판하면서 반향을 일으켰지만 독일어라는 언어의 특성상 독일어권 바깥에서는 대중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진 못했던 것 같습니다. Die Deutsche Luftwaffenführung 1935-1945는 연구사적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영어로 번역되지 못했지만 보크의 논의는 영어권의 군사사 연구자들에 의해서 간접적으로 소개되었습니다.
리처드 멀러의 연구는 보크의 연구에 영향을 받아서 출간될 당시에는 매우 신선한 시각을 보여주었습니다. 멀러의 문제의식은 독소전쟁 당시 동부전선에서 전개된 항공전은 단순히 지상군 지원작전에 그치지 않고 전략폭격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있는데 기존의 저작들은 독일공군을 단순히 전술공군으로 파악하는 틀 안에 갇혀 있어 동부전선 항공전의 다면적인 측면을 설명할 수 없다는데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동부전선에서 전개된 독일공군의 작전을 재해석하고 있으며 특히 오랫동안 관심을 받지 못했던 1943~44년 시기 전략폭격 작전을 재조명하고 있습니다.

※약간 사족을 더 붙이자면 1999년에 출간된 제임스 코럼의 대표작, The Luftwaffe - Creating the Operational Air War, 1918–1940도 호르스트 보크, 리처드 멀러와 유사한 인식의 연장선 상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독소전쟁 시기 독일공군의 개별 작전들을 서술하는데 초점을 맞추는 대신 독일공군의 교리가 소련 전선에서 어떻게 적용되었고 어떠한 한계에 부딛혀 패배로 이어졌는가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전쟁 이전의 독일공군 교리에 대해서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독일공군이 처음 부터 전술공군으로 등장한 것은 아니었음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독일공군 참모총장 베버Walther Wever의 군사사상에 대한 재검토에서 드러납니다. 저자는 베버를 단순히 두에Giulio Douhet의 이론을 따르는 전략폭격의 옹호자로 보아서는 안된다고 강조합니다. 베버가 전략폭격에 관심을 가지고 장거리 폭격기 개발에 노력한 것은 사실이지만 베버의 사상은 공군의 다양한 가능성에 주목하여 제공권 장악, 지상군에 대한 직간접지원, 그리고 전략폭격에 이르는 다양한 방면에 걸쳐있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독일공군의 융통성 있는 교리가 베버의 군사사상에 대한 해석에 어려움을 주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베버의 사상에서 전략폭격은 독일이 1차대전에서 경험한 것과 같은 소모전을 피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적의 핵심적인 전략 목표를 타격함으로써 전략적인 목표를 이룰 수 있다는 것 이었습니다. 이것이 두에의 사상과 차이를 보이는 것은 민간인에 대한 테러 폭격은 논의의 대상으로 삼고 있지 않다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베버의 사후에도 전략폭격에 대한 연구가 꾸준히 진행되었음을 강조하면서 단순히 베버의 죽음으로 독일공군이 전술공군에 머무르게 되었다는 서술은 무리한 비약임을 지적합니다. 아래에서 또 이야기 하겠지만 저자는 이러한 사상이 1943~44년에 독일공군이 동부전선에서 전략폭격으로 선회하게 되는 사상적 기반을 제공했다고 봅니다.
반면 독일공군의 상징과 같은 지상군지원에 대해서는 2차대전이 일어날 때 까지도 독일공군 내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우선순위를 부여받았음을 지적합니다. 저자는 1938년 까지도 지상군에 대한 직접지원을 임무로하는 전문 부대가 편성되지 않았으며 독일공군의 주력이었던 중형폭격기 부대는 오히려 차단과 같은 간접지원에 더 적합했음을 지적합니다. 특히 독일 육군 내에서도 1930년대 중반까지는 공군의 간접지원에 만족하는 견해가 우세했다고 강조합니다. 스페인 내전을 통해 지상군 직접지원에 대한 경험이 상당히 축적되었지만 지상군 직접지원을 전담하는 부대의 증강은 매우 더디게 이루어 졌으며 독소전쟁이 발발할 때 까지 리히토펜이 지휘하는 제8항공군단외에는 지상군 직접지원을 전문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전력을 갖추지 못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독소전쟁의 첫 단계인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독일 공군의 작전에 대한 서술은 이러한 바탕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저자는 개전 초기에는 독일 공군이 교리를 충실하게 따라 독립된 공군으로서 소련 공군을 목표로 한 제공권 장악과 지상군에 대한 ‘간접 지원’에 집중했다고 지적합니다. 당시까지의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제공권을 장악한 직후 육군에 대한 직접 지원 보다는 항공차단과 같은 간접 지원의 비중이 더 컸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 입니다. 남부집단군을 지원한 제4항공군이 계획 입안 단계에서 육군측의 지원요청에 대해 제공권 장악이 제4항공군의 최우선 목표이며 이를 위해 지상군 지원을 위한 급강하폭격기 부대의 차출은 최대한으로 제한하려 했다는 점을 예로 드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위에서 이야기 한 것 처럼 스페인 내전과 폴란드, 프랑스 전역을 거치면서 독일공군의 근접항공지원 능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었지만 그것을 전담한 것은 리히토펜의 제8항공군단이었고 이 때문에 바르바로사 작전에서도 근접항공지원과 같은 직접 지원의 상당수는 제8항공군단이 전담하였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특수성을 부각하기 위하여  공군지휘장교Kommandeur der Luftwaffe, KoLuft의 성격에 대해서 서술합니다. 공군은 육군과의 협력을 위해 육군의 사령부에  공군지휘장교를 배속 시켰지만 역할이 육군과의 연락임무와 정찰비행부대를 통제하는 수준에 머물렀으며 육군에 대한 지원임무는 전적으로 항공군단 사령부 내에서 결정되었습니다. 이것은 사단급 부대들에 파견되었던 항공연락장교Fliegerverbindungsoffizier, FliVO도 마찬가지여서 1941년 전역에서는 단순한 연락업무 이외의 역할에 머물렀습니다.
또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1941년 말에 실시된 몇 차례의 모스크바 공습이 단지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 전쟁 이전의 항공전 교리에 기반한 작전이었을 가능성을 제시하는 점 입니다. 저자는 전쟁 후 헤르만 괴링과 같은 독일 공군 지휘관들이 모스크바 공습을 단순히 히틀러를 의식한 체면치레의 성격을 가진 공격이라고 증언한 것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독일공군의 능력 부족으로 소수의 폭격기를 동원할 수 밖에 없었지만 어디까지나 적의 “힘의 원천”을 타격할 것을 강조하는 교리에 기반한 것이라고 보는 것 입니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독일 공군은 독립된 공군에서 점차 육군에 종속되어가는 경향을 보이게 됩니다. 저자는 이것이 본질적으로 독일의 전쟁 지도자들이 가진 전략적 사고의 한계에 기인한다고 봅니다. 1941년의 바르바로사 작전과 마찬가지로 1942년의 블라우 작전도 단지 수개월의 짧은 작전으로 결정적인 승리를 얻으려는 시도였습니다. 그리고 독일 공군도 그러한 방향을 추구했습니다. 저자는 독일 공군이 전략적인 작전 능력을 갈수록 상실하게 된 원인이 단지 히틀러를 위시한 수뇌부와 육군에 있다는 전후 독일 공군 지휘관들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1942년 전역이 그러한 주장에 대한 반례라고 보는 것 입니다. 그리고 독일공군 지휘관들, 특히 남부전선의 제4항공군과 제8항공군단의 지휘관들은 독일공군도 “전략적인 결과를 달성할 수 있는” 남부에 독일 공군의 전력을 집중하는데 적극적으로 찬성했음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1942년 전역에서 독일 공군이 육군의 지원에 집중하게 되는 원인이 됩니다.
독일 공군 지휘관들의 이러한 결정은 또다시 실패로 이어집니다. 독일 공군은 크림반도와 세바스토폴 전투에서는 전력의 집중을 통해 성공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여름 전역에서 리히토펜이 지휘한 제4항공군은 크림반도에 투입한 전력보다 그리 많지 않은 500여대의 항공기로 카프카즈에서 스탈린그라드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을 담당해야 했던 것 입니다. 공세가 진행되면서 독일 육군은 카프카즈로의 진격에 전력을 집중하지 못하고 스탈린그라드 방면으로 조금씩 전력을 돌릴 수 밖에 없었는데 독일 공군 또한 마찬가지의 문제를 겪게 됩니다. 1941년 전역에서 1개 항공군이 1개 집단군을 지원한 것과 달리 1942년 전역에서는 1개 항공군단이 1개 집단군을 지원하는 상황이 전개됩니다. 독일 공군은 전략적인 결과를 달성할 수 있는 지역에서 전력의 집중을 달성할 수 없었던 것 입니다.

결국 1942년 전역의 실패로 독일 공군이 다른 출구를 찾게 되었고 그것이 소련의 핵심 공업지역에 대한 폭격 계획으로 이어지게 된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입니다. 독일 육군이 전략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동안은 공군이 이를 지원했으나 육군의 작전이 한계에 다다르자 공군의 독자적인 능력으로 전략적인 영향을 끼치는 방향으로 선회하게 된다는 것 입니다. 이것은 다시 공군의 독립적인 지위를 찾기 위한 시도이기도 했습니다.  
만슈타인의 반격으로 남부전선이 일시적으로 안정된 이후 독일 공군은 폭격기 부대의 재정비에 들어가면서 폭격기 부대를 육군에 대한 직접지원 임무에 투입하는 것을 최소화 합니다. 6월 초 부터 독일 제4항공군과 제6항공군은 고리키, 야로슬라블, 사라토프 등에 대한 야간 폭격을 시작했고 독일 공군은 이 공격, 특히 고리키에 대한 공격이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내립니다. 이러한 “성공”에 힘입어 독일 공군 수뇌부는 동부전선에서 보다 효과적인 전략 폭격을 위한 표적 선정과 함께 이에 필요한 능력을 확충하려 합니다.
1943년 8월 예쇼넥이 자살하자 그의 후임으로 공군 참모총장에 임명된 귄터 코르텐Günther Korten은 두가지의 목표를 추구합니다. 먼저 전선의 요구에 따라 지상군에 대한 지원 능력을 강화하는 한편 또 다른 한편으로 공군의 독립적인 역할로서 전략 폭격을 추구하게 된 것 입니다. 그렇지만 코르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준비는 지나치게 늦었고 충분하지가 못했습니다. 독일 공군 폭격기 부대의 주 전력이 He 111이나 Ju 88은 이러한 임무를 수행하기에 충분한 능력이 없었고 He 177은 동부전선에 지나치게 늦게 등장했습니다. 또한 갈수록 심각해 지는 연료 부족은 폭격기 부대의 작전에 심각한 지장을 초래하는 요인이었습니다. 결정적으로 1943년 하반기 부터 독일 육군이 소련군의 반격에 밀려하면서 독일 공군 폭격기 부대가 고리키와 같은 전략 목표들을 타격할 수 있는 범위에 있는 비행장들을 계속해서 상실한 것도 문제였습니다. 결국 독일 공군이 전략 폭격으로 선회하기에는 그 능력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시기 조차 늦었던 것 입니다.

1943년 이후 독일 공군의 지상군 지원 능력은 크게 향상됩니다. 독일 공군이 추구했던 전략 공군으로서의 역할은 좌절되었으나 지상군에 대한 지원은 육군의 요구에 따라 강화됩니다. 저자는 책의 서두에서 설명한 것 처럼 제공권 장악, 지상군에 대한 직간접지원, 그리고 전략폭격에 이르는 다양한 방면에 걸친 독일 공군의 융통성 있는 교리가 결국에는 독일 공군이 육군의 보조적인 역할로 전락하는 원인이 되었다고 지적합니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전쟁 초기와 달리 독일 공군의 육군 지원 능력은 크게 향상됩니다. 특히 1944년에 공군과 육군의 협조 체제가 개편된 것을 지적합니다. 먼저 항공연락장교, 즉 FliVO는 집단군과 야전군 단위의 연락을 담당하고, 군단급과 중점Schwerpunkt 사단의 연락은 항공통신연락장교Fliegerverbindungsoffizier Luftnachrichten, FliVO-LN가 담당하며, 마지막으로 지상군과 지상공격기 부대의 직접적인 연락은 지상공격 항공관제장교Fliegerleitoffizer(Schlacht)가 지휘하는 지상관제단Fliegerleittruppe이 담당하는 체제가 완성된 것 입니다. 저자는 지상공격기가 차지하는 비중도 커져서 1944년 6월에 이르면 동부전선의 독일 공군에서 지상공격기 부대가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커졌다고 지적합니다. 바르바롯사 작전 개시 당시 폭격기 부대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고 지상공격기 부대의 규모가 작았던 것 과는 완전히 달라진 것 입니다. 그러나 전략적인 판세가 뒤집힌 상황에서 지상공격기 부대는 큰 역할을 할 수 없었습니다.

저자는 결론에서 독일 공군의 실패 요인을 크게 두 가지로 보는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외부적 요인인데, 그것은 바로 독일의 전략적인 열세입니다. 독일 공군은 육군과 마찬가지로 제한된 전력으로 소련과의 전쟁에 뛰어들었으며 전쟁이 확대될 수록 그 제한된 능력을 집중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소모되어 갔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바로 독일 공군의 내부적 요인으로서 융통성있는 교리와 독일 공군이 동부전선에서 처한 상황에 대한 독일 공군 지휘관들의 판단에 있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독일 공군 지휘관들은 전장의 상황에 따라 동부전선에서 독일 육군이 가지는 핵심적인 지위를 인정했으며 결국 독일 육군이 전장의 주도권을 상실한 이후에야 독립된 공군의 역할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는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