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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 18일 일요일

어떤 노동운동가의 자아비판

어떤 유명한 노동운동가의 자아비판...

내가 태어난 황강동이란 동네는 우리 14대 조상 때 부터 대대로 살아오던 경주 김씨 양반 씨족부락이었읍니다. 100여 호 되는 마을에서 타성받이라고는 다섯 손가락에 꼽힐 정도였고 그것도 우리 마을에 데릴사위로 왔다든가 머슴을 살던 사람뿐이었으니까요.

양반이라고는 하지만 구한말 때 약간의 벼슬을 한 것을 제외하고는 내내 몰락의 길을 밟은 전형적인 몰락양반이었읍니다. 따라서 새로운 시대의 교육을 일부러 거부하고 봉건적 사고방식을 고집한 선조들 덕분에 우리 마을은 개화니 문명이니 하고는 상당히 거리가 멀었읍니다. 그래도 몰락 봉건층의 지조랄까 그런 것은 있어서 일제에 대해서는 굉장히 반감을 가졌읍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 부터 누가 뭘 좀 잘못하면 저놈 왜놈 물 먹었구나, 고약한 냄새가 나면 왜냄새가 나는구나 하는 소리를 흔히 들으면서 자랐으니까요. 그렇다고 독립투사가 거기서 나왔냐하면 그것도 아니었읍니다. 그냥 시대의 발전을 주체적으로 수용하거나 극복해 내지 못하고 퇴보해 가는 선비의 모습이 남아 있었던 것 입니다.

때문에 우리 마을에서는 해방이 되고 한참이 지났어도 학교를 제대로 구경한 사람이 거의 없었읍니다. 마을 서당이 76년도에도 있었을 정도면 짐작이 갈 겁니다. 나도 어릴 때는 서당을 국민학교와 함께 다녀야 했고 중고등학교 다닐 때도 방학이 되어 집에 오면 서당엘 나가야 했읍니다. 그때는 나 자신도 인근에 하나밖에 없는 우리 마을 서당이 자랑스러웠을 뿐 아니라 명심보감을 읽는 것은 좋은 것이라는 생각을 철썩같이 믿고 있었읍니다. 동네 어른들이 쥐뿔도 아무것도 없으면서 우리는 아직도 서당이 있는 양반동네라는 자부심만 잔뜩 가지고 유교적 전통을 고집하는 분위기가 은연중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영향을 안 미칠 수가 없었던 것 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내겐 아직도 유교적 잔재가 많이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그게 사람들과 대중적으로 어울린다든지 하는 데 조금 안 좋게 작용한다는 것을 종종 느낄 때가 있거든요.

김문수, 1985년 8월 『현장』과의 인터뷰에서.

현장 편집부, 「어느 실천적 지식인의 자기 반성 : 노동현장 속의 지식인 김문수」, 『현장』제6집, (돌베게, 1986), 128쪽

자아비판으로 부터 30년이 다 되어 가지만 이 분의 유교적 잔재는 여전하신 듯 싶습니다. 자아비판 한번 더 하셔야 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