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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April 27, 2018

한국전쟁기 한국의 건빵 생산

얼마전 트위터에서 한국군의 건빵 썰을 푼 김에 관련된 문헌을 하나 번역해 봅니다. 아래의 내용은 1958년 5월에 Kenneth W. Myers가 작성한 KMAG’s Wartime Experiences: 11 July 1951 to 27 July 1953의 275~289쪽을 번역한 것 입니다. 해당 연구보고서는 총 3개의 폴더로 나뉘어 태평양사령부 군사실 문서군인 RG550 Records of United States Army Pacific, Entry 2A1-2AA1의 85번 상자와 86번 상자에 나뉘어 있습니다. 건빵 외에 통조림 생산에 관한 내용도 있는데 그건 나중에 번역하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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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

1951년 6월 제8군사령부 군수참모처와 군사고문단은 극동군사령부에 9월 15일 부로 일본에서 한국군의 J형 전투식량과 건빵을 생산하는 것을 중단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한국내의 자원을 최대한 활용한다는 정책 기조에 맞춰 전투식량과 건빵은 한국의 민간 공장을 활용하거나 부산에 공장을 지어서 생산하는게 옳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제8군사령부와 군사고문단은 1951년 9월까지는 한국 내에서 건빵 재료와 전투식량에 들어갈 통조림 및 기타 부식 재료를 조달하는게 가능하다고 판단했다.1)
1951년 7월 극동군사령부는 일본에서 생산한 한국군용 건빵 재고가 10월 20일까지 충분한 분량이며, 전투식량은 10월 31일까지 충분한 분량이라고 보고했다. 또한 한국에서 건빵과 전투식량을 생산할 수 있을때 까지 소비할 건빵 재고를 일본에서 조금 더 생산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에서의 건빵 생산은 원래 계획한 9월 15일 보다 늦은 10월 1일 부터 시작할 계획이었다.2)

그러나 1951년 9월이 되자 한국 내에서 건빵과 비상전투식량을 생산하는 계획을 좀 더 연기해야 했다. 부산의 건빵 공장은 건축 자재 조달이 늦어져 1951년 12월 말이나 1952년 1월은 되어야 생산을 시작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되었다. 그리고 한국 정부가 전투 식량의 주 메뉴인 생산 통조림 생산에 필요한 재원을 조달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제8군사령관은 한국 국방부장관에게 서신을 보내 건빵 공장 가동과 전투식량 생산 계획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겠다는 확답을 요구했다. 한국 내에서의 생산이 지연되고 있었지만 제8군사령부는 한국에서 생산을 시작하기 전에 일본에서 한국군용 건빵과 전투식량을 계속 생산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재고량과 일본에 발주한 잔여 물량을 합치면 건빵 5개월 치와 전투식량 2개월 분이 있었다.3)
1951년 10월 초 한국 육군참모총장은 제8군 사령관에게 일본에서 건빵과 전투식량 6개월 치를 추가로 생산해 달라고 요청했다. 제8군 사령부는 한국 국방부장관에게 보낸 서신에서 부산의 건빵 공장을 최대한 빨리 가동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부산의 건빵 공장을 수리하는데 필요한 자재에 소요되는 예산은 한국민간구호계획(Civilian Relief in Korea, CRIK) 기금에서 유용하도록 제안했다. 일본에서 조달한 건빵 재료가 한국에 도착했지만 부산 건빵 공장의 생산 예정일은 확실치 않았다.4)

제8군사령부, 군사고문단, 한국민간구호계획의 대표단은 1951년 11월 건빵을 생산하기로 계약한 업자와 회의를 했다. 그런데 공장 건물은 커녕 부지도 마련하지 못한 상태였다. 한국민간구호계획의 대표는 45일 내로 부지를 마련하고 건설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면 건설 자재를 제공하되, 그 기한을 지키지 못하면 계약을 파기하기로 했다. 11월 말이 됐는데도 계약한 업자는 이 조건을 만족하지 못했다. 군사고문단에 따르면 그 무렵 한국군은 건빵과 전투식량을 생산할 다른 곳을 물색하고 있었다. 한국측은 설사 임시방편이라 하더라도 일본에서 건빵과 전투식량을 생산하는데 반대했다. 제8군 사령관은 군사고문단장에게 서신을 보내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건빵 부족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5)
1951년 초 군사고문단은 제8군사령부에 한국군의 급식 부족 문제를 제기했다. 전투부대는 최소 기준의 급식을 받고 있었다. 최소기준으로는 병사들의 체력과 사기를 높게 유지할 수 없었다. 후방 부대의 급식은 칼로리, 단백질, 지방이 권장량 이하 수준이었다. 한국군이 굶주림에 시달리게 된 원인은 주로 한국 정부의 책임이었다. 한국 정부는 시장 가격의 폭등에 대응해 원화 예산을 증액하지도 않았고 대량 구매를 통해 식량 예비분을 확보하지도 않았다. 제8군사령부 군수참모처는 한국 정부에 생선 공급량을 늘리고, 예산을 증액하고, 늘어난 예산을 육군본부 군수국에 지급해 필요한 식량을 구매하도록 요구했다.6)
한국내에서 건빵을 생산하는 일이 지체되자 군사고문단은 1951년 12월 극동군사령부에 한국군의 1952년 3월 및 4월분 수요를 맞추도록 일본에서 건빵 500만 봉지를 추가로 생산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 군사고문단에 따르면 한국 육군본부는 기존에 계약했던 업자가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자 모든 계약을 취소하고 부산에 있는 다른 회사와 이 회사의 서울 지사에 건빵 생산을 맡기고자 했다. 하지만 이렇게 한다 해도 한국 육군의 건빵 수요 중 50%를 충족하는데 불과했다. 그리고 서울 공장은 1952년 1월, 부산 공장은 1952년 3월은 되어야 건빵 생산을 시작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극동군사령부는 군사고문단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일본에 발주한 건빵은 1951년 12월 말 생산에 들어갔으며 1952년 2월 15일~29일 사이에 500만 봉지를 배송할 예정이었다.7)
군사고문단은 동시에 한국군의 일선 병사들이 일원화된 조달 체계를 통해 김치, 고추장, 된장 등의 부식을 충분히 보급 받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 또한 일원화된 조달 체계 하에서 광주에 각종 장류와 신선한 야채를 공급할 지역 기구를 설치하는 방안도 연구했다. 한국 육군이 일원화된 조달 체계를 받아들이는데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은 각 부대 지휘관들이 급식 수당에 대한 통제권이 약화되는걸 우려했다는 점이었다.8)

서울의 건빵 공장은 1952년 1월 중순 소규모 생산을 시작했다. 얼마 있지 않아 서울 공장의 건빵 생산량은 하루 20,000~25,000봉지에 달했다. 부산 대신 1952년 5월 1일까지 대구에 두 번째 건빵 공장을 세우는 계획도 수립되었다.9) 극동군사령부는 1952년 1월 초 제8군사령부와 주한미군사고문단에 보낸 서신에서 한국의 건빵 생산 현황에 대해 평가했다. 이 서신은 한국 국방부가 건빵 공장 건설에 필요한 예산을 승인하지 않았으며, 그 이유는 한국군에 대한 급식을 미국 정부에 무한정 의존하려는 의도라고 지적했다. 극동군사령부는 6개월치의 건빵 재료 공급이 확정되었고, 한국 내의 건빵 생산이 본 궤도에 오를 때 까지 임시방편으로 500만 봉지의 건빵을 공급할 계획도 확정되었다고 지적하면서 “즉시 한국 정부에 건빵의 추가 공급은 없다고 통보하라. 한국 정부가 건빵 생산을 위해 조치를 취하고 있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않는 한 극동군사령부는 건빵의 추가 공급을 거부할 것이다.”라고 했다. 추후의 원조는 건빵 생산 공장을 운영하는데 제한하기로 했다. 이것도 한국측이 완전하고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한국정부와 한국군, 건빵 공장 운영진에게서 자구책 마련을 위해 납득할 만한 노력을 기울이고, 요청한 원료와 기자재를 원조받으면 건빵을 생산해 공급할 수 있다는  확실한 보증을 받은 뒤에만 제공하기로 했다.10) 제8군사령부는 한국 국방부장관과 군사고문단에 이 사실을 알렸다. 제8군사령부는 4월 30일까지는 한국군의 건빵 수요를 맞출 수 있지만 이때까지 한국 내에서 생산하는 양으로 4월 30일 이후의 수요를 맞출 수 있을지 회의적이었으며, 1952년 6월에서 7월쯤이 되면 건빵 부족 사태가 일어날 거라고 예상했다.11)

1952년 2월에는 한국군에 대한 건빵 공급이 개선되었다. 서울 공장의 생산량은 하루 평균 25,000봉지에 달했고 3월 초에는 33,000봉지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었다. 한국 육군의 하루 건빵 수요는 90,000봉지였으니 이것은 수요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대구의 건빵 공장이 4월 말에서 5월 초 생산을 시작하면 하루 평균 30,000봉지를 생산할 것으로 예측되었다.12)
1952년 2월 제8군은 한국군이 그해 6월까지 미육군의 보급시설에서 건빵 생산에 필요한 재료를 보급받을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다. 1952년 6월 1일 부터 9월 30일까지의 재료는 한국 육군이 항구에 하역되는 대로 인수하도록 했다. 한국군이 재료를 직접 인수하면 미군 보급고가 한국군 건빵 재료를 보관할 필요가 없어지게 되고, 향후 들어올 재료들도 마찬가지였다.13) 1952년 3월 초 군사고문단은 제8군사령부에 서울의 건빵 공장의 생산 수율을 일본 공장의 85% 수준에서 81% 수준으로 낮출필요가 있다고 보고했다. 군사고문단은 서울 건빵공장을 시찰했을때 굽는 과정에서 재료 낭비가 심하고, 필요 이상으로 건빵의 수분함량을 낮추기 위해 과하게 가열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서울 공장의 초도 계약 물량 1백만 봉지 생산 수율은 일본 공장의 85% 수준으로 이루어졌다. 제8군사령부는 서울 공장의 생산 수율을 낮추지 말도록 지시하는 한편, 군사고문단에 다음 사항을 권고했다.

-서울 공장의 오븐 온도를 순간적인 가열과 재료 손실을 막고, 제빵 표준을 맞출 수 있도록 할 것.
-건빵의 수분함량을 줄이고 덜 단단하게 만들고, 가능하다면 일본에서 생산한 제품과 비슷한 품질로 만들도록 할 것.
-생산 설비의 벨트를 교체할 것.
-건빵에 숱검댕이 묻지 않도록 화덕을 밀폐할 것14)

1952년 4월에 이르러서도 한국군용 건빵 생산은 희망한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 서울 공장의 하루 생산량은 평균 30,000봉지에 머물렀다. 군사고문단은 대구에 건설 중인 건빵 공장은 대규모의 작업이 필요해 8월 1일은 되어야 첫 생산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했다. 유엔군사령부는 고위 인사들에게 건빵 생산 문제를 브리핑 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951년 10월 부터 1952년 3월까지 미육군은 한국군에 비상식량으로 26,040,000봉지의 건빵을 제공했으며 달러화로 환산하면 1,939,685달러에 해당한다. 동시에 미국은 비슷한 양의 건빵을 생산할 수 있는 재료를 공급했다. 한국 정부는 건빵 공장 설립을 지체했다. 건빵 공장을 세워서 가동하기 전에는 건빵 완제품과 건빵 재료를 더 이상 지원하지 않겠다고 통보한 뒤에야 한국측은 조치를 취했다. 최근의 보고에 따르면 서울 공장의 건빵 생산은 한달에 488,000봉지라고 한다. 이를 위해 한국정부에 아홉달 동안 압력을 넣어야 했다.”15)

1952년 5월과 6월에 서울 건빵 공장은 하루 30,000봉지의 건빵을 생산하고 있었다. 한국군의 하루 건빵 수요의 3분의 1 수준이었다. 군사고문단은 대구에 새로 짓고 있는 건빵 공장은 8월 15일 쯤 되어야 생산을 시작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서울 공장은 1952년 2월 1차분 계약 물량 1,800,000봉지 생산을 완료했다. 6월 부터는 새로 계약한 1,077,000봉지에 대한 생산을 시작해 814,980봉지를 납품했다.16) 대구 건빵 공장은 1952년 7월 초도생산을 시작했다. 당초 예상한 8월 15일 보다 일정을 당긴 것이었다. 대구 공장의 하루 생산 예상치 30,000봉지에 서울 공장의 하루 평균 생산량 30,000봉지를 합치면 일선 부대의 장병들은 하루 평균 1/3봉지의 건빵을 배급받을 수 있었다.17) 한국육군 군수국은 군사고문단의 자문을 받아 공장들에 압박을 가했다. 그 결과 8월 부터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9월에 이르러서는 서울 공장과 대구 공장의 생산량을 합쳐 하루 60,000봉지의 건빵이 생산되기 시작했다.18)

1952년 10월과 11월에는 서울과 대구 공장을 합친 생산량이 목표치에 미달하는 하루 평균 52,000봉지에 머물렀다. 건빵 생산은 줄어드는데 한국군 병력이 늘어나는 한편, 건빵 보급량을 늘리려는 계획이 수립되었기 때문에 군사고문단은 1952년 10월 영등포의 건빵 공장을 재가동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공장 복구에 필요한 건설 자재를 확보하고 이 공장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이주시키는 게 큰 문제였다.19)
군사고문단은 하루에 병사 1인당 건빵 1/3봉지를 배급하는 수준으로는 겨울철에 일선 장병들에 충분한 급양을 제공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또한 훈련병에게는 건빵 배급이 허가되어 있지 않았는데, 이들에게도 건빵을 배급해야 한다고 보았다. 훈련병들은 훈련소에 입소할 당시 충분한 급식을 받지 못하는 상태로 하루 평균 12~15시간의 격렬한 훈련을 받아야 했다. 그러니 훈련병에게는 칼로리와 영영가가 더 높은 급식을 하는게 옳았다. 군사고문단은 훈련병에게 건빵을 보급하면 체력을 증진하고 사기를 높이는데 도움이 되리라 보았다.20) 1952년 11월 제8군 사령부는 군사고문단과 한국 육군 군수국의 건의를 받아들여 극동군사령부에 한국에서 건빵 생산을 늘릴 수 있도록 재료를 더 공급해 줄 것을 요청했다. 건빵 생산을 늘려서 병사 1인당 건빵 배급량을 하루 평균 1/3봉지에서 1/2봉지로 늘린다는 계획이었다. 이 계획에 따르면 하루 평균 129,536봉지의 건빵이 필요했다. 이정도 양이면 일선부대의 205,740명에게 하루 평균 1/2봉지, 훈련병 80,000명에게 하루 평균 1/3봉지의 건빵을 배급할 수 있었다.21) 1952년 12월 육군부는 한국군에 대한 건빵 배급량 증대를 허가하고 하루에 130,000봉지를 생산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로 했다. 이 인가량은 전방 부대 장병들이 하루 1/2봉지, 훈련병들은 하루 1/3봉지의 건빵을 배급받을 수 있는 양이었다. 하지만 한국 내의 건빵 생산은 한국 육군 군수국의 요구치를 미달하고 있었다. 1952년 12월 한국내의 건빵 생산량은 하루 평균 45,000봉지였다. 군사고문단은 영등포 공장 재건을 위한 건설자재 확보에 노력해 약간의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1953년 1월은 되어야 공장 부지에 있던 피난민들을 이주시킬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22) 영등포 공장의 생산 설비 복구는 만족스럽게 진행됐지만 건설 자재 확보가 문제였다. 1953년 1월 군사고문단의 조달 고문관은 일본을 방문해 극동육군사령부 조달과와 건설자재 확보 문제를 상의했다.23) 1953년 3월, 제8군 사령부는 이 문제를 연구한 뒤 극동육군사령부에 나중에 상환받는 조건으로 제8군 사령부가 보유한 건설자재를 제공하도록 허가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건빵 공장이 추가로 건설될 때 까지 미국 고문관들이 한국군 취사병들을 훈련시켜 건빵 생산을 감독하도록 하는 방안을 제시했다.24)

1953년 4월, 미국정부는 한국군에 43,000달러에 상당하는 양의 건설자재를 공급해 영등포 건빵 공장을 복구하도록 했다. 공장 소유주와 한국군은 영등포 건빵 공장이 군납만을 한다는 계약을 체결했다. 영등포 공장의 건빵 생산은 1953년 5월에 시작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하지만 영등포 공장이 생산을 시작하더라도 한국군의 수요를 맞추기는 어려웠다. 당시 한국군의 하루 건빵 수요는 294,233봉지였다. 한국내에 있는 건빵 공장을 최대한 가동해도 최대 생산량은 하루 평균 210,000봉지에 불과할 것으로 예측되었다. 적절한 건빵 보급을 위해 부대 단위에서 임시변통의 조치를 계속 취할 필요가 있었다.25) 모든 한국군 부대는 기본적인 재료를 공급받아 국수, 경단, 건빵 등을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조치를 취했다. 건빵을 생산한 부대들은 낡은 드럼통, 진흙, 점토 등을 동원해 오븐을 만들었다. 한국군의 일선 부대들은 건빵과 비슷한 수준의 칼로리를 가진 대체품을 생산할 수 있었다.26)

영등포 공장 복구에 필요한 마지막 건설자재는 1953년 5월 중순 전달되었다. 5월 말까지의 공장 복구 수준으로 봤을때 6월 10일 쯤이면 건빵 생산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되었다.27) 1953년 5월 영등포 건빵 공장의 복구 공사는 거의 6개월째에 접어들었다. 군사고문단은 공장 복구가 완수되도록 여러 번에 걸쳐 개입했다. 군사고문단의 개입은 정치적인 문제를 불러올 위험이 있었다. 한국육군은 군수국 보급과에 공장소유주와 교섭할 권한을 주고 한국은행에 대출을 주선 했는데, 이것은 모두 군사고문단이 추가로 확인조치를 취해야 했다.28)

1953년 5월 초 제8군사령부, 군사고문단, 한국후방관구사령부(KCOMZ) 대표들은 한국군의 실제 건빵 수요량을 평가하기 위해 회의를 가졌다. 한국군은 병력 602,880명을 기준으로 병사 1인당 하루 평균 건빵 1/2봉지를 보급하기 위해서 일일 건빵 생산량을 130,000봉지에서 294,233봉지로 늘리기를 원했다. 한국군의 요구량은 미국 육군부가 하루 생산량을 130,000봉지로 승인했을때 고려한 변수와 일치하지 않았다. 육군부는 영등포 공장이 복구되어  재가동에 들어가면 건빵 생산량을 늘리는데 기여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한국군 병력이 급속히 증강되면서 최저 보급 기준이 악화되자 한국군은 건빵을 더 많이 소비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국군의 급식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건빵을 통해 탄수화물을 더 공급할 필요는 없었다. 회의에 참석한 군의관은 영영학 관점에서 하루에 건빵 1/4봉지면 충분하고 1/3봉지는 과하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회의 참석자들은 육군부에서 파견한 조사단이 한국군 급식 소요를 영양학적으로 분석한 결과가 나올때 까지는 최종결정을 유보하고, 그대신 1952년 4월 기준 한국군 병력 525,000명에 맞춰 하루 1/3봉지의 건빵을 보급하기로 했다. 525,000명을 기준으로 하면 한국군의 하루 평균 건빵 수요는 175,000봉지였다. 육군부에서 허가한 양 보다 45,000봉지를 더 생산해야 했다.29) 1953년 7월 말에도 한국군의 일선 부대들은 서울, 대구, 영등포 공장에서 생산하는 건빵으로는 부족한 양을 보충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건빵을 생산해야 했다.



주석

1) Comd Rept(S), HQ EUSAK, Jun 51, Narrative, p.118.
2) Comd Rept(S), HQ EUSAK, Jul 51, Narrative, p.97.
3) Comd Rept(S), HQ EUSAK, Sep 51, Narrative, pp.80~81.
4) Comd Rept(S), HQ EUSAK, Oct 51, Narrative, pp.78~79.
5) Comd Rept(S), HQ EUSAK, Nov 51, Narrative, pp.71~72.
6) Staff Sec Rept(S), QM G4 EUSAK, Dec 51, p.12; Comd Rept(S), HQ EUSAK, DEC 51, Narrative, pp.54~55.
7) Staff Sec Rept(S), QM G4 EUSAK, Dec 51, p.12; Comd Rept(S), HQ EUSAK, Dec 51, Narrative, pp.54~55.
8) Comd Rept(S), HQ KMAG, Jan 52, Narrative Summary, p.24.
9) Ibid.
10) Comd Rept(TS), GHQ UNC/FEC, Jan 52, p.104; Comd Rept(S), HQ EUSAK, Jan 52, Narrative, p.54.
11) Comd Rept(S), HQ EUSAK, Jan 52, Narratvie, p.55.
12) Comd Rept(S), HQ EUSAK, Feb 52, Narratvie, p.60.
13) Ibid.
14) Comd Rept(S), HQ EUSAK, Mar 52, Narratvie, p.54.
15)Comd Rept(S), HQ KMAG, Apr 52, Narratvie Summary, p.16; Briefing for VIP’s, HQ UNC, Apr 52, Sec. 16, p.7.
16) Staff Sec Repts(S), G4 KMAG, May 52, Summary, p.2; Jun 52, Summary, p.1; Comd Repts(S), HQ KMAG, Narrative Summaries, May 52, p.18; Jun 52, p.18.
17) Comd Rept(S), HQ KMAG, Jul 52, Narratvie Summary, p.18.
18) Comd Rept(S), HQ KMAG, Aug 52, Narratvie Summary, pp.15, 17.
19) Staff Sec Rept(S), G4 KMAG, Oct 52, Summary of Activities, p.1.
20) Staff Sec Rept(S), QM G4 EUSAK, Nov 52, p.46.
21) Comd Rept(S), HQ EUSAK, Nov 52, Narrative, pp.132~133.
22) Comd Rept(S), HQ EUSAK, Dec 52, Narrative, p.143; Staff Sec Rept(S), G4 KMAG, Dec 52, Summary of Activities, p.1.
23) Staff Sec Rept(S), G4 KMAG, Jan 53, Summary of Activities, p.1.
24) Comd Rept(S), HQ EUSAK, Mar 53, Narratvie, p.146; Staff Sec Rept(S), QM G4 EUSAK, Mar 53, p.23.
25) Comd Rept(S), HQ EUSAK, Apr 53, Narratvie, p.149; Staff Sec Rept(S), G4 KMAG, Apr 53, Summary of Activities, p.1.
26) Staff Sec Rept(S), QM G4 EUSAK, Mar 53, p.23.
27) Staff Sec Rept(S), G4 KMAG, May 53, Summary of Activities, p.2.
28) Staff Sec Rept(S), G4 KMAG, May 53, Summary of Activities, p.3.


Thursday, March 22, 2018

"Armor In Battle" Special Edition for the Armored Force- 75th Anniversary


미 육군 기갑학교가 2016년에 간행한 "Armor In Battle" Special Edition for the Armored Force- 75th Anniversary을 읽어봤습니다. 군대에 계신 분들이 읽어보시고 추천하는 평을 먼저 접한 뒤 읽었는데, 역시 군대에서 교육적인 목적으로 집필한 책이다 보니 흥미로운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이 책의 구성은 크게 다음과 같이 이루어져 있습니다.

-기갑 병과 창설까지의 약사
-제2차 세계대전
-전후 독일 점령기의 기갑부대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파나마 침공
-걸프전쟁
-발칸반도의 평화유지작전
-테러와의 전쟁

군대의 교육용 서적이어서 그런지 최근의 전쟁인 걸프전쟁과 테러와의 전쟁시 기갑부대 운용에 관한 내용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양만 따지면 제2차 세계대전기에 대한 서술 보다 테러와의 전쟁에 관한 부분이 조금 더 많을 정도입니다. 물론 제2차 세계대전기의 실전 사례도 교육적인 효과는 있겠습니다만 현재와는 기술적 환경과 전장의 환경이 많이 다르니 최근의 교전 경험 보다는 효과가 적겠지요.

제 개인적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 대한 부분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여기서는 북아프리카 전선과 이탈리아 전선의 제1기갑사단, 1944년 아라쿠르 전투의 제4기갑사단, 뉴기니아 전역의 제41보병사단, 이오지마 전투의 제4해병사단의 전투 경험을 다루고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기 미군의 기갑작전 하면 자주 언급되는 노르망디와 아르덴느 전역의 사례가 제외된 점이 특기할 만 합니다. 아마 이 두 전역은 지나치게 많이 언급되었기 때문에 제외된게 아닌가 싶습니다.

한국전쟁 부분에서는 서울 탈환작전 당시 시가전에서의 전차 운용 경험, 단장의 능선 전투에서의 전차 운용 경험을 다룬 부분이 흥미롭습니다.

발칸반도의 평화유지 작전과 테러와의 전쟁에서의 기갑부대 운용은 현대의 군인들에게 매우 유용한 내용일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작전의 특성상 대규모 기갑부대 운용 보다는 소규모의 전술적 운용과 시가전 및 대게릴라전 같은 상황이 대부분입니다만.

Monday, December 4, 2017

신속한 지뢰 제거 방법


다부동을 쳐들어가야 하겠는데 그곳으로 가는 길이 하나밖에 없었다. 적들은 길에다 지뢰를 촘촘히 묻어놓았다. 공병이 없었기에 우리는 어쩔수 없었다. 하여 나무를 찍어다가 길을 가로막아놓았다. 이때 찌프차 한대가 오더니 꺽다리 쏘련 군관이 내렸다. 그는 번역을 통해 막아놓은 나무를 치우라고 야단을 쳤다. 지뢰가 많아 그리로 못간다고 하자 그는 권총을 들이대면서 당장 치우라고 윽박질렀다. 

"죽고싶으면 가거라!" 

하는수 없어 우리는 나무를 치웠다. 하지만 그 쏘련 군관이 탄 차는 얼마 가지 못하고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 날아갔다.

낙동강 전투 당시 북한군 6사단 정찰중대 중대장대리였던 김리정의 증언
연변조선족자치주 문사자료위원회 편, 『돌아보는 력사』 (료녕민족출판사, 2002), 185쪽.

※전쟁이 끝나고 수십년이 지난 뒤 회고한 내용이기 때문에 구술자의 증언에 약간의 오류가 있습니다. 중국군 출신자로 편성된 북한군 제6사단은 낙동강 전투 당시 마산 방면에 투입되었습니다.

Wednesday, November 1, 2017

한국전쟁에 참전한 무장친위대원의 이야기: Waffenbrüder- Ein Niederländer in Russland und Korea

제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은 군사사에 관심 가진 사람들에게 매우 인기있는 주제고 그중에서도 무장친위대는 독보적인 존재입니다. 무장친위대의 역사, 장비, 군장을 다룬 연구서 뿐만 아니라 무장친위대원들의 회고록도 여러권이 발간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소개할 John J. R. Folmer의 Waffenbrüder- Ein Niederländer in Russland und Korea도 무장친위대원으로 제2차세계대전에 참전한 인물의 회고담입니다.

이 책의 주인공인 John J. R. Folmer는 1923년 5월 4일 오늘날의 인도네시아인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태어나 1939년 대학입학자격시험을 치기 위해 본국으로 돌아옵니다. 하필이면 그때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이듬해에 네덜란드는 독일군에 점령됩니다. 그는 대학에 진학하는 대신 무장친위대에 자원하기로 결심합니다. 폴머르는 훈련을 수료한 뒤 무장친위대 비킹 사단의 베스트란트(Westland) 연대 2대대 7중대 1소대 1분대 기관총 사수로 독소전쟁에 참전하게 됩니다. 이어지는 독소전쟁의 회고담은 다른 무장친위대원들의 회고담과 비슷합니다. 그는 동부전선에서 전개되는 일련의 격전에 참전해 전공을 세우고 부상을 당하기도 합니다. 폴머르는 1944년 7월 그간의 공훈을 인정받아 바트 퇼츠의 친위대사관학교에 입교하게 됩니다.

전쟁 말기의 경험담은 꽤 흥미롭습니다. 저자는 무장친위대 소위로 임관하면서 전쟁말기에 급조된 부대인 제38사단(니벨룽엔 사단) 제95연대 3대대 대대장 부관으로 다시 전선에 나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무장친위대에 관한 책은 많지만 제38사단은 전쟁 말에 급조된 부대라서 관련된 문헌이 상대적으로 소략합니다. 이 회고담에 묘사된 제95연대 3대대장은 꽤 상식적인 인물입니다. 3대대장은 미군이 추격해 오는 상황에서 중간에 휴식을 취하기 위해 도시에 머무를 때 마다 소년병들을 제대시키고 후퇴합니다. 한 부대가 자발적이고 조직적으로 와해되는 과정에 대한 묘사는 꽤 재미있습니다. 대대장의 부관인 폴머르는 머무르는 도시의 시장과 협의해 소년병들에게 나눠줄 사복을 모으고 '제대시키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합니다. 미군에 포로가 된 폴머르는 임시 수용소에서 탈출해 귀향합니다.

여기까지라면 다른 무장친위대원의 회고담과 비슷한 개성없는 이야기가 되었을 것 입니다. 수많은 무용담과 고통스러운 패배의 기억으로 끝나는 이야기지요. 하지만 이 책은 마지막 1장으로 인해 맥락이 바뀌게 됩니다. 폴머르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네덜란드군에 자원입대해 한국에 파견되기 때문입니다. 1951년 3월 네덜란드군 2진으로 C중대가 한국에 도착합니다. 그는 네덜란드군에 자원입대해 C중대의 기관총 사수로 참전합니다. 그리고 이 전쟁은 그에게 '승리'를 가져다 준 전쟁이 됩니다. 폴머르는 이렇게 회고합니다.

"한국전쟁은 자유세계가 공산주의의 광기에 맞서 싸운 전쟁이었다. 10년전에는 독일만이 홀로 공산주의에 맞서 싸우다 패배했다. 하지만 이제는 전 세계가, 자유세계 전체가 공산주의에 맞서 일어났다."

폴머르는 한국전선에서 1년간 싸운 뒤 1952년 9월 18일 '명예롭게' 군 생활을 마칩니다. 그의 세계관에서 독소전쟁은 공산침략에 맞서싸운 10년 전쟁의 일부였고 한국전쟁은 이를 승리로 마무리한 경험이 됩니다. 다른 무장친위대원의 경험담과 달리 이 책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승리'의 기록으로 마무리 됩니다. 꽤 특이한 시각의 회고담이고 한국전쟁 때문에 더욱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 이 책에는 다른 네덜란드 무장친위대원들의 이야기도 있지만 이 책을 쓸 당시(1996년) 살아있었던 가족들의 보호를 위해 모두 가명으로 처리되어 있습니다.


Thursday, July 13, 2017

1952년 9월 4일 스탈린-펑더화이-김일성 회담



이 글은 Cold War International History Project Bulletin 14-15 합본호 378~381쪽에 실린 1952년 9월 4일 스탈린, 펑더화이, 김일성 회담 녹취록의 영역본입니다. 한국전쟁 중반기 공산군 수뇌부의 시각과 몇가지 갈등 요인을 보여주는 재미있는 자료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전황이 유리하다고 주장하는 중국-북한측과 이를 의심하는 소련쪽의 신경전이 재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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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 동지와 김일성 동지, 펑더화이 동지의 회담 녹취록


1952년 9월 4일


기타 참석자
우리측: 몰로토프 동지, 말렌코프 동지, 미코얀 동지, 베리야 동지, 불가닌 동지, 카가노비치 동지
중국과 북조선측: 저우언라이 동지, 천윈陳雲 동지, 리푸춘李富春 동지, 장웬티안張聞天 동지, 박헌영 동지.
통역: 문, 스저師哲, 페도렌코




스탈린: 조선 인민들의 사기는 어떻습니까?


김일성: 높습니다.


스탈린: 박헌영 동지도 같은 생각입니까?


박헌영: 그렇습니다. 높습니다.


스탈린: 군대는 어떻습니까?


김일성: 군대도 사기가 높습니다.


스탈린: 펑더화이 동지는 어찌 생각하시오?


펑더화이: 좋습니다.


김일성: 전반적인 정세는 유리합니다. 적의 폭격을 제외하면 그렇습니다.


스탈린: 전투기사단은 있습니까?


김일성: 1개 사단이 있습니다.


스탈린: 중국은 공군을 투입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될 겁니다. 그렇게 한다면 의용군이 아니라 중국 정부가 직접 개입한 것이라고 여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의용군이 자체적인 공군력을 갖출리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런 행동이 민주진영에 유리하겠습니까? 내 개인적으로는 중국 정부가 (누락) 선언하는 것은 불리한 행동입니다. 전쟁은 군대가 있어야 치를 수 있습니다. 김일성 동지는 조선인으로 구성된 항공부대가 있어야 합니다.


김일성: 장비만 있다면 항공사단을 1~2개 편성할 수 있습니다.


스탈린: 조선 인민이 전쟁으로 고통을 받고있고 영웅적인 인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 인민이 고통을 받고 있으니 우리 소련군 1~2개 사단을 해체해서 장비를 양도할 생각이 있습니다.


김일성: 감사드립니다.


스탈린: 전투기 사단이 1개 있다고 했지요?


김일성: 그렇습니다.


스탈린: 다른 부대의 조종사들을 전환시키는 것도 가능합니다.


김일성: 아직 훈련중인 항공사단이 하나 더 있습니다.


스탈린: 항공사단을 1~3개 정도 편성할 수 있는 장비를 제공할 수 있소.


김일성: 그에 필요한 인력을 충원할 수 있을 겁니다.


스탈린: 좋습니다. 3개 항공사단을 편성할 수 있는 장비를 주겠소. 또 필요로 하는건 없습니까?


김일성: 적의 공습이 지속적으로 강화되고 있어서 대공포 부대를 조직해야 겠습니다. 얼마전 5개 대공포 연대를 편성할 수 있는 장비를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10개 연대분의 장비가 필요합니다. 스탈린 동지께는 5개 연대 분 장비를 부탁드렸고 마오쩌둥 동지께도 5개 연대분의 장비를 부탁드렸습니다. 마오쩌둥은 현재 중국 정부는 그럴 능력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스탈린 동지께서 대공포 연대 10개분의 장비를 원조해주셨으면 합니다.


스탈린: 지상군은 어느정도요?


김일성: 18개 사단입니다.


스탈린: 포병은 어느정도요?


김일성: 포병은 몇개 연대밖에 없고 장비도 부족합니다.


스탈린: 우리 소련군은 1개 사단에 포병연대가 2개입니다. 중국군도 마찬가지이고. 조선인민군의 편제는 어떻소?


김일성: 우리 군대의 편제도 동일합니다.


스탈린: 필요한게 있으면 목록을 주시오.


김일성: 목록을 작성해 놓았습니다.


스탈린: 박격포는 있소?


김일성: 그렇습니다. 122mm 입니다.(영어 번역문에 122mm로 되어 있습니다.)


스탈린: 조선에 대공포연대 10개분의 장비를 원조하겠소.


김일성: 스탈린 동지. 감사합니다. 우리 지상군은 122mm 곡사포를 비롯해 여러 장비가 부족합니다. 추가로 원조를 부탁드립니다.


스탈린: 또 부족한게 뭐가 있소?


김일성: 공병 부대와 통신 부대의 장비가 부족합니다. 너무 부족합니다. 항공기도 부족합니다. 우리는 장비와 물자가 부족합니다. 물자가 부족해서 한달 내에 122mm 포탄 생산을 중단해야 할 것 같습니다.


스탈린: 필요한 물자 목록을 주시오.


김일성: 목록을 작성해 놓았습니다.


스탈린: 식량 상황은 어떻습니까? 빵이랑 쌀 말이요.


김일성: 올해는 작황이 좋습니다. 하지만 내년은 어떨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마오쩌둥 동지가 의류와 식량 원조를 약속하셨습니다.


스탈린: 조선 인민들은 밀가루도 먹습니까? 아니면 그냥 밥만 먹습니까?


김일성: 스탈린 동지께서는 우리가 어려움에 처해있을때 5만톤의 식량을 원조해 주셨습니다. 우리 인민들도 밀가루를 좋아합니다. 우리 인민들은 직면한 문제를 극복하면서 겨우 생계를  유지하는데 급급합니다. 하지만 운송 수단이 턱없이 부족하고 우리 힘으로는 극복할 능력이 없습니다. 자동차와 트랙터, 화학 비료를 원조해 주셨으면 합니다.


스탈린: 필요한 목록을 주시오. 중국과 조선 동지들이 미국과 휴전협상을 진행하는데 의견 충돌이 있었다는데 사실입니까?


김일성: 제가 알기론 심각한 의견 충돌은 없습니다. 중국 동지들이 제안한 협상안에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민들이 직면한 어려움을 고려해서 최대한 빨리 휴전협상을 마무리 짓고자 합니다. 중국 동지들도 동의하고 있습니다.


스탈린: 그 문제는 중국 대표단과 논의했습니다. 중국 대표단은 미국이 제안한 포로송환 조건이 동의하지 않으며 우리의 조건을 관철해야 한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만약 미국이 중국군과 조선인민군 포로의 20%를 돌려보내지 않으면 그들이 풀려날 때 까지 미국 포로의 10%를 억류하자고 합니다. 아니면 같은 비율의 미군 포로를 억류하자고도 합니다. 그렇게 하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포로문제를 타결하고 휴전협상을 마무리 지을 수 있습니다. 석방되지 않은 포로들은 휴전이 성립되고 적대행위가 중단된 뒤에도 협상을 할 수 있을겁니다. 동지는 이 문제를 어찌 생각하는지 모르겠소만 포로문제야 말로 우리의 입장이 진지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될 겁니다. 미국은 중국군과 조선인민군 포로의 20%는 송환을 거부한다고 주장할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믿을 수 없다고 하면 됩니다. 이렇게 20%의 포로를 문제삼는 동안 60%는 송환이 될 겁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중국동지들은 지금 상황에서는 새로운 제안을 할 필요가 없으며 미국이 새로운 제안을 할 때 까지 기다려서 우리쪽에서 수정안을 내놓자고 합니다. 이에 관해 알고 있습니까?


김일성: 마오쩌둥 동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스탈린: 마오 동지가 뭐라고 합디까?


김일성: 마오쩌둥 동지께서 몇가지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첫 번째는 포로를 모두 석방하라고 요구하는 겁니다. 두 번째는 휴전협상을 먼저 타결하고 포로 문제를 상의하는 것 입니다. 세번째는 아군 포로들이 억류되어 있는 만큼 그에 해당하는 수의 적 포로를 억류하는 것 입니다. 포로문제에 있어서 마오쩌둥 동지의 시각은 스탈린 동지의 시각과 같습니다. 이 세가지 대안은 합리적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포로 문제를 확실히 해결하기 위해 스탈린 동지의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스탈린: 나는 당분간 포로를 모두 송환하라고 주장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게 통하지 않으면 송환을 거부하는 20%의 포로 문제를 제기해야 합니다. 방안을 바꾸자는게 아니라 경우에 따라 태도를 바꿔보자는 겁니다. 처음에는 모든 포로를 송환해야 한다는 태도를 취하고 다음에는 적의 포로 20%를 석방하지 않겠다고 하는 겁니다. 물론 다른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우리가 새로운 제안을 하거나 미국이 새로운 제안을 할 때 까지 시간을 버는게 괜찮겠는가? 포로 교환을 완료할 것을 주장하고 상황이 어떻게 되는지를 관망해야 합니다.
두번째 안은 김일성 동지와 동지의 투쟁에 유리합니다. 적이 아군 포로 20%를 석방하지 않는다면 적군 포로 20%를 석방하지 않으면 됩니다. 두번째 안을 택한다면 미국의 국론이 분열될 겁니다. 포로를 석방하고 전쟁을 그만두자는 움직임이 일어날 겁니다. 이렇게 되면 당신이 유리합니다. 이 문제에 대한 나의 의견은 이렇습니다.
미국인들은 전투에서 어떻게 싸웁니까? 잘 싸웁디까?


펑더화이: 미군은 사기가 낮은게 약점입니다.


스탈린: 미국내에서 전쟁에 반대하는 여론이 우세하니 그럴겁니다. 미군이 어떻게 싸우는지 알고 싶군요. 정신력입니까? 전술입니까? 아니면 물량입니까?


펑더화이: 1952년 1월 부터 2월 사이에 미군은 200번 이상의 공세를 취했지만 고작 1%만 승리했습니다. 반면 우리는 겨우 30번의 공세를 취해서 80~90%의 승률을 보였습니다.


스탈린: 구체적으로 어떻게 승리한겁니까?


펑더화이: 아군은 적의 1개 소대나 1개 중대 정도를 섬멸하는걸 목표로 했습니다.


스탈린: 김일성 동지도 동의하시오?


김일성: 물론입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스탈린: 미군의 방어진지는 강력합니까?


펑더화이: 최근 적은 방어진지를 더욱 강화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도 마찬가지로 방어진지를 강화했습니다. 미군의 야전 축성은 우리보다 취약하지만 건설자재는 훨씬 좋습니다.


스탈린: 적의 방어선은 어느 정도 요새화 되어 있습니까?


펑더화이: 방어선이 3중으로 되어 있습니다.


스탈린: 아군은 어떻소?


펑더화이: 제2선까지만 요새화 되어 있습니다. 제3선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스탈린: 지뢰지대를 구축했습니까?


펑더화이: 지뢰와 철조망이 부족합니다. 적의 물자를 노획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스탈린: 우리는 대조국전쟁 당시 지뢰를 대량으로 사용했습니다. 아군은 지뢰지대를 표시한 특수한 지도를 이용했습니다. 지뢰를 사용하지 않고 전쟁을 할 수는 없습니다.


펑더화이: 아군 진지와 적군 진지는 매우 가깝게 붙어있습니다. 보통 300~500미터 정도입니다.


스탈린: 지나치게 전방으로 진출했군요.


펑더화이: 지난 4월 이래 아군이 꾸준히 진격했기 때문입니다.


스탈린: 각 방어선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됩니까?


펑더화이: 지형에 따라 다르지만 가깝게 붙어있습니다. 일부 지역은 각 방어선간의 거리가 좁습니다. 하지만 어떤 지역은 방어선간의 거리가 20km 정도 되기도 합니다. 지금은 강화 콘크리트로 방어진지를 만들고 있습니다.


스탈린: 참호선도 구축하고 있습니까?


펑더화이: 그렇습니다.


말렌코프: 그럼 아군 포로가 적군 보다 더 많은 이유는 뭡니까?


펑더화이: 전반적으로 보면 우리가 더 많은 포로를 잡았습니다.


스탈린: 중국군과 조선인민군 포로가 몇명입니까?


펑더화이: 우리쪽 추산으로는 중국군 포로가 12,000명 입니다. 하지만 미국은 중국군 포로를 20,000명 잡았다고 주장합니다. 조선인민군 포로가 많은 이유는 1951년 10월 이전에 많은 수가 생포됐기 때문입니다. 미군은 공세 중 조선인민군의 예비 여단에서 많은 포로를 잡았습니다. 중국 인민지원군이 참전한 뒤 총 12,000명의 적을 생포했습니다. 이중 8,000명이 미군입니다. 이승만 군대로 부터 잡은 포로는 40,000명 입니다. 하지만 생활 환경이 열악해서 외국인 포로 중 많은 수가 사망했습니다.


김일성: 우리가 집계한 바에 따르면 포로 12,000명 중 4,416명이 미국 이외의 국가 출신입니다. 미군 포로 중 300명이 조종사이고 그 중 30명이 장교입니다. 남조선 군대의 포로 중 27,000명은 조선인민군에 편입시켰습니다. 인민군에 편입시킨 포로에 대해서는 공개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말렌코프: 중국의용군을 교대로 순환 투입하고 있습니까?


펑더화이: 그렇습니다.


말렌코프: 그렇다면 중국의용군 사단들은 훈련할 시간이 있다는 뜻이군요?


펑더화이: 그렇습니다. 1953년 8월까지 현재 조선에 있는 의용군 사단을 모두 교대할 예정입니다. 중국 인민해방군의 모든 지휘관들을 교대로 조선 전선에 참전할 수 있도록 할 것 입니다.


스탈린: 카츄사 로켓포도 가지고 있습니까?


펑더화이: 전선에 1개 사단을 배치했고 다른 사단은 후방에 배치했습니다.


스탈린: 후방에 빨치산도 활동하고 있습니까?


김일성: 그렇습니다. 상황이 좋지 않지만 활동하고 있습니다.


스탈린: 포로 중에 일본군도 있습니까?


펑더화이: 일본계 미국인 뿐입니다.


말렌코프: 미군이 북조선을 폭격할때 격추한 비행기가 많지 않은건 어떻게 설명할겁니까?


펑더화이: 우리가 평가하기로는 격추한 적기가 많습니다. 전쟁이 시작된 이래 미국 비행기 5,800대를 격추했습니다.


스탈린: 중국 조종사들을 어떻게 제트 전투기에 적응시킬 겁니까?


펑더화이: 중국 조종사들은 소련 조종사들이 지휘해야만 전투에 참가합니다.


스탈린: 왜  그럽니까? 뭘 두려워 합니까?


펑더화이: 우리 조종사들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다만 편대를 짜서 비행하지를 못합니다.


스탈린: 조종 훈련을 더 시켜야 겠군요. 일단 비행을 해야 훈련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소련 조종사들도 출격을 기피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비행을 시작하면서 점차 조종하는 법을 배워나갔습니다. 지금 우리는 조종사를 평가할때 비행시간을 따집니다. 조종시간이 많으면 기장을 줍니다. 비행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실전을 해야 진짜 경험을 쌓을 수 있습니다. 중국 조종사들도 출격하는걸 겁내면 안됩니다. 대신 조종하는 것을 집에 있는 것 처럼 편하게 여겨야 합니다. 야간 비행도 교육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공군을 육성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포상과 훈장 체계를 갖춰야 합니다.
중국군은 훈장이나 기장이 있습니까?


펑더화이: 아직 없습니다. 내년 쯤 도입하려고 생각합니다.


스탈린: 그러면 안됩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중국군은 무정부주의자들 처럼 훈장과 기장을 무시하는 것 같습니다. 장성 계급도 없다지요? 훈장과 기장, 계급이 공산주의의 원칙에 반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계급 체계, 휘장, 포상 체계는 군대에 매우 중요합니다. 이게 없으면 진짜 군대가 아닙니다. 소련의 빨치산이 그런 식으로 운영됐지요. 우리 빨치산은 내전에 승리하고 미제국주의 군대를 몰아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군 계급도 없고 휘장이나 훈장도 없었습니다. 이건 잘못된 관행이었습니다.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세요. 장교단을 세심하게 육성해야 합니다. 장교들에게 봉급을 주는 등의 관리를 해야 합니다. 핵심은 장교단을 유지하고 관리하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환경을 조성해 군사전문가로 키우는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