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11일 일요일

블로그가 방치 중입니다

일이 많다 보니 좀 정신이 없습니다. 댓글 달아주시는 분들께 제때 답변을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한 12월은 되야 숨통이 트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2020년 8월 24일 월요일

토마스 젠츠의 저작들의 문제점

 판터의 기계적 신뢰성에 대한 글을 써보려고 책을 몇권 뒤지다보니 2012년 사망한 미국의 독일 기갑차량 연구자 토마스 젠츠(Thomas L. Jentz)의 영향력이 꽤 크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판터에 관한 비교적 최근의 저작이라 할 수 있는 프랑크 쾰러(Frank Köhler)의 Panther: Meilenstein der Panzertechnik에서도 판터의 주요 구성품의 수명주기에 대한 내용은 거의 대부분 토마스 젠츠의 Germany's Panther Tank: The Quest for Combat Supremacy의 내용을 재인용하고 있었습니다. 쾰러의 저작은 프라이부르크의 독일연방문서보관소와 코블렌츠의 연방군 국방기술연구박물관(Wehrtechnischen Studiensammlung)이 소장한 1차 사료등 2014년 시점에서 참고할 수 있는 판터와 관련된 문헌은 대부분 활용한 저작입니다. 이런 연구자 조차 상당히 많은 부분을 토마스 젠츠의 연구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은 그만큼 토마스 젠츠가 연구를 하면서 광범위한 1차 사료를 검토했음을 입증해 줍니다. 즉 신뢰도 면에서 토마스 젠츠는 충분히 검증된 연구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젠츠가 내놓은 수많은 연구서들의 공통적인 문제는 주석을 거의 달지 않았다는 것 입니다. 젠츠의 저작들이 대부분 전문적인 연구서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건 치명적인 문제입니다. 젠츠가 주석을 달지 않았기 때문에 젠츠의 저작에 인용된 1차 문헌들을 찾아보려면 상당히 골치가 아픕니다. 위에서 언급한 프랑크 쾰러나 토마스 안데르손(Thomas Anderson) 같이 비교적 최근 연구를 내고 있는 독일 기갑차량 연구자들은 연구서의 경우 주석을 충실히 달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연구들도 출처가 젠츠의 서적일때는 살짝 난감해 집니다. 젠츠가 본 사료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알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1차 사료에 숙달된 연구자들은 내용만 보면 대략 어느 문서군의 무슨 문서인지 알 수 있습니다만 일반인들은 그게 아주 힘들죠. 젠츠는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만 주석을 제대로 달지 않았다는 점은 그의 명성을 고려했을때 아주 아쉬운 점 입니다.

2020년 8월 21일 금요일

밀리터리 무크지 "헤드쿼터" 창간호 "판터의 모든 것"

 밀리터리 무크지 "헤드쿼터" 창간호 "판터의 모든 것"이 도착해서 읽어봤습니다. 참 좋은 시도인데 결과물이 조금 아쉽습니다. 

이 무크지의 서두를 장식하고 있는 것은 취미가의 편집장이었던 이대영님의 글 「판터는 성공한 짝퉁이다」입니다. 옛날 취미가 시절이 생각나는 글 입니다. 이대영님의 문체는 유려하지만 좀 알맹이는 부실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특히 판터의 변속기와 구동장치가 전쟁이 끝날때 까지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는 약간 부정확한 서술 등이 보입니다. 전반적으로 판터의 개발사를 논하기에는 부족한 글 입니다.

내용면에서 아쉬운 점이 많습니다. 채승병님, 진중근 중령님 같은 분을 섭외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분들에게 지면을 적게 할애해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느낌입니다. 채승병님이 집필한 판터의 첫 실전투입을 다룬 「촉박한 일정 속의 예고된 재앙: 쿠르스크 전투」는 14~21쪽에 걸쳐 실려있으나 다수의 일러스트레이션이 있어서 실제 분량은 이것보다 훨씬 적습니다. 채승병님의 글은 짧은 분량 내에서 쿠르스크 전투의 전략적 배경, 판터가 투입되게 된 작전적 배경, 그리고 실제 전투에서 전술적 운용을 체계적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분량이 조금 더 많았다면 좋았을 것 입니다. 역시 채승병님의 글인 「에른스트 바르크만의 만헤이 활극」은 과거 채승병님의 인터넷 사이트 '페리스코프'에 실렸던 글인데 원문 보다 많이 축약됐습니다.

읽고 나니 이 무크지가 얇은 편이라는걸 감안하더라도 제한된 분량을 낭비했다는 느낌이 듭니다. 54쪽 부터 59쪽 까지는 판터의 사진들이 실려있는데 딱히 고화질의 화보도 아니라서 이런걸 왜 넣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불필요한 화보를 넣을 지면에 다른 분들의 글을 더 보충하는게 좋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또 유감스러운 부분은 이성주씨의 「나는 왜 야크트판터를 좋아하는가」, 그리고 역시 이성주씨의 소설 「요람안에서」가 상당한 분량을 잡아먹고 있다는 점 입니다. 전자는 그냥 단순한 잡담이고 후자는 소설입니다. 이성주씨의 소설은 66쪽에서 76쪽까지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런걸 빼고 판터의 기술적 측면이나 실전 운용을 분석한 글을 더 넣는게 이 무크지를 충실하게 했을겁니다. 

무크지의 제목은 「판터의 모든 것」인데 제목값을 못한다는 느낌입니다. 소설을 넣을 공간에 독일군이 판터를 집중운용한 노르망디 전역이나 1944년 동부전선의 작전들(예를들어 바그라티온 작전 당시 독일 기갑사단들의 작전)을 분석한 글을 넣는게 좋지 않았을까 합니다. 이 무크지에서는 「촉박한 일정 속의 예고된 재앙: 쿠르스크 전투」와 우에스기라는 분의 「판터의 사라지는 전설: 아라쿠르 전투」 등 두편의 글이 판터가 투입된 작전을 다루고 있습니다. 판터 특집이라는데 어째 판터가 굴욕을 당한 전투만 선정을 했군요.

그리고 '판터의 모든 것'을 다루고자 했다면 판터와 관련된 참고문헌들을 정리해서 소개하는 코너를 마련하는 것도 좋았을 것 입니다. 판터는 꽤 유명한 전차이고 이 전차를 분석한 서적은 여러종이 나와 있습니다. 과거 취미가 같은 잡지에서는 모형인들을 대상으로 간헐적으로 군사관련 참고문헌을 소개하는 기사를 마련하곤 했지요. 「판터의 모든 것」에는 이성주씨의 잡담이 들어간 지면은 있지만 판터에 대한 참고문헌들을 다루는 지면은 없습니다. 매우 유감입니다.

아카데미과학 개발부의 이선구 부장님을 인터뷰한 「독일 대전물의 라인업을 완성하다」는 개인적으로 굉장히 마음에 드는 기사였습니다. 이 기사는 무크지 「판터의 모든 것」에 부록으로 들어간 아카데미과학의 판터G형 모형 개발에 대한 이야기인데 개인적으로 이 키트를 꽤 좋아하기 때문에 즐겁게 읽었습니다.

마무리는 정경찬님의 글 「전후세계의 판터는 어떻게 되었을까」입니다. 1945년 이후 각국의 판터 운용에 대해서 소개하는 글 입니다. 무크지의 성격에 맞는 마무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부록은 꽤 충실합니다. 독일군의 교범인 판터 피벨의 원문 복각판과 한국어 번역판, 그리고 웹툰 70의 작가인 김재희님의 단편만화가 있습니다. 

「판터의 모든 것」은 전체적으로 좋은 시도입니다.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둬서 앞으로도 이런 시도가 계속되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다음번에는 첫번째 타자의 단점들을 보완하면 좋겠네요.


2020년 8월 17일 월요일

체코 정부 소유의 무장친위대 사료

 냉전의 종식은 제2차세계대전 연구에 있어 일대 전환점이었습니다. 냉전 시기에는 공개되지 않았던 많은 사료들이 공개되면서 특히 독소전쟁 연구가 급격히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지요. 러시아 정부가 독일 정부에 반환한 사료와 동독 정부가 소장하고 있던 사료가 통일 독일정부의 소유가 된 일 등이 대표적입니다. 이외에도 동유럽의 공산 국가들이 붕괴하면서 새롭게 서방에 공개된 자료도 많습니다. 체코 정부가 소장하고 있던 무장친위대 사료도 그 중 하나입니다. 프라하의 군사문서보관소에 소장된 무장친위대 사료들이 1990년대에 공개되면서 무장친위대에 대한 흥미로운 연구들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2012년 출간된 Norbert Számvéber의  Waffen-SS Armour in Normandy가 대표적입니다. 


 프라하 군사문서보관소가 무장친위대 사료를 소장하게 된 계기는 꽤 재미있습니다. 친위대 본부는 1944년 초 부터 베를린 북쪽의 오라니엔부르크(Oranienburg)에 보관하고 있던 서류들을 연합군의 폭격을 피하기 위해 프라하 동쪽의 자스무키(Zásmuky)로 옮겼습니다. 독일이 패망하자 이 문서들은 체코슬로바키아 정부가 소유하게 됩니다. 체코슬로바키아가 공산화 된 뒤 무장친위대 문서들은 비공개로 제한적인 접근만이 가능했습니다. 동독 정부가 1950년대 부터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와의 교류하에 무장친위대 자료 중 일부를 반환받았습니다. 동독정부는 1957년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로 부터 약 10톤 가량의 문서를 반환받았는데 이것은 친위대원의 신상문서, 무장친위대의 군법회의 기록 등이었다고 합니다. 동독정부는 반환받지 못한 문서에 대해서는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의 협조하에 마이크로필름을 촬영하고 해제를 작성했지만 동독이 붕괴될 때 까지도 이 작업을 마무리하지는 못했습니다.


결국 냉전이 종식된 이후에야 프라하에서 보관하고 있던 무장친위대 사료들이 본격적으로 공개되게 됩니다. 통일된 독일 정부는 체코 정부가 소장하고 있는 독일 사료들에 대한 조사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1991년 부터 독일 연방문서보관소와 체코 군사문서보관소 사이에 공식 교류가 시작됐습니다. 1993년에는 이때까지의 연구 성과를 반영하여 Militärgeschichtliche Mitteilungen 52호에 Zuzana Pivcová가 쓴 프라하 군사문서보관소가 소장한 무장친위대 사료에 대한 짤막한 해제 "Das Militärhistorische Archiv in Prag und seine deutschen Bestände"가 발표되었습니다.


프라하 군사문서보관소가 소장한 무장친위대 사료군의 특징은 연대급 부대들의 문서가 주종을 이룬다는 점 입니다. 무장친위대의 야전군~사단급 문서들은 미국이 노획하여 1970년대까지 원본을 미국이 소장하고 있다가 서독 정부에 반환했습니다. 미국은 노획한 무장친위대 문서들을 다른 독일 문서와 마찬가지로 RG242 문서군에 넣어 관리했습니다. 프라하 군사문서보관소는 연대급 부대들의 사료를 소장했는데 이러한 문서들은 보다 미시적인 전술 단위의 연구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물론 프라하 군사문서보관소에도 군단급의 상급부대 사료들이 있습니다만 미국이 가지고 있다가 독일 반환한 것에 비하면 소량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Norbert Számvéber의  Waffen-SS Armour in Normandy가 무장친위대 제12전차연대의 기록을 바탕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 외에도 2000년대 이후 간행되고 있는 무장친위대에 관한 서적 중 많은 수가 프라하 군사문서보관소의 사료들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체코 정부가 소장한 사료들은 현재 독일 정부가 소장한 무장친위대 사료들의 빠진 부분을 보완해 주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2020년 8월 3일 월요일

밀리터리 무크지 "헤드쿼터" 창간호 판터 특집

『탱크의 탄생』을 낸 출판사 '레드리버'에서 밀리터리 무크지 헤드쿼터를 낸다고 합니다. 창간 특집호는 독일의 5호전차 '판터'로군요. 헤드쿼터 창간호에는 채승병님이 쓰신 쿠르스크 전투 당시 판터의 작전에 관한 글을 비롯해 판터를 주제로 한 글이 실린다고 합니다. 부록이 풍부합니다. 부록으로 웹툰 70의 작가인 김재희님의 단편만화가 있네요. 꽤 흥미로운 구성입니다.




2020년 7월 31일 금요일

To Defeat the Few: The Luftwaffe’s Campaign to Destroy RAF Fighter Command, August-September 1940

Osprey 출판사에서 낸 Douglas C. Dildy Paul F. Crickmore To Defeat the Few: The Luftwaffe’s Campaign to Destroy RAF Fighter Command, August-September 1940를 읽었습니다. 영국본토방공전을 독일 공군을 중심으로 분석한 저작입니다. 필자들은 히틀러와 독일공군 수뇌부의 전략적 목표와 작전 단위의 결단을 분석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작전 단위 이상의 전개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전술 차원의 공중전 교환비나 격추 전과 검증은 중요하게 다루지 않고 있습니다. 단지 고급 지휘관들의 결심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경우에 한해서 독일공군과 영국공군이 자군의 전과와 손실을 어떻게 평가했는지를 언급합니다.

 

이 책은 총 14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중 1장부터 3장을 영국본토방공전의 전사인 서부전역 항공전과 됭케르크 항공전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4장부터 6장까지는 서부전역 이후 독일 수뇌부의 전쟁지도 방침, 독일공군과 영국공군의 조직과 편성, 교리, 전술을 비교분석 하는 내용입니다. 7장부터 13장까지는 영국본토방공전을 단계별로 나누어 분석하고 있습니다. 7장은 영국해협의 해운 봉쇄를 위한 해협항공전(Kanalkampf), 8장은 제뢰베 작전의 입안, 9장부터 12장까지는 812일부터 917일까지의 영국본토방공전을 단계별로 나누어 분석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13장은 9월 공세에서 패배한 독일 공군이 10월까지 진행한 공세작전을 다루고 있습니다. 마지막 14장은 결론입니다.

 

저자들은 독일공군의 입장에서 서술을 하기 위해 영국본토방공전의 각 단계를 독일측의 기준에 맞춰 분류하고 있습니다. 각 단계는 다음과 같습니다.

 

조우전단계, 프랑스전역 종결 직후부터 194087일까지: 영국해협 해운 봉쇄를 위한 해협항공전이 진행된 시기.

11단계, 88~823: 바다사자작전 준비 차원에서 영국 남부의 비행장과 해군 기지에 대한 광범위한 공격이 진행된 시기.

12단계, 824~96: 영국 남부의 제공권 장악을 위해 영국공군 제11비행단(No.11 Group)의 기지에 공격을 집중한 시기.

21단계 , 97~919: 런던과 인근 지역을 중심으로 공격을 집중한 시기

22단계, 920~1113: 런던을 중심으로 전투폭격기(Jabo)의 주간 공격과 폭격기부대의 야간 폭격을 병행한 시기.

23단계, 1114~1941521: 영국 본토에 대한 대규모 폭격의 최종 단계. 영국에서 통칭 야간 전격전(Night Blitz)로 칭하는 시기.

 

작전사를 다루는 연구들이 모두 그렇듯 이 책의 핵심 주제는 독일 공군이 왜 영국본토방공전에서 패했는가?”입니다.

 

저자들은 독일 공군의 전술적 우위에 대해서는 동의하는 입장입니다. 문제는 작전~전략단위의 능력입니다. 결국 영국본토방공전이라는 전략 단위의 항공전에서 독일공군이 패배한 원인은 작전~전략 단위의 역량 부족에서 찾아야 한다는 관점입니다.

이 책에서는 먼저 독일공군본부의 조직적 문제를 지적합니다. 독일공군은 신생 병종이었고 이 때문에 공군본부를 원활하게 운영할 수 있을 만큼의 고급장교를 육성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독일공군의 고급장교들은 대부분 육군 출신으로 항공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인물도 있었습니다. 가장 큰 구조적 문제는 1940년 시점에서 독일공군본부에는 공군이 독립적으로 수행하는 전략단위의 작전을 기획할 조직이 없었다는 점 입니다. 저자들은 19406월 시점에서 독일공군본부의 참모조직은 독일육군본부나 독일해군본부의 전문적인 참모조직과 달리 공군사령관 헤르만 괴링의 개인 참모조직에 불과한 수준이었다고 비판합니다.

오토 호프만 폰 발다우(Otto Hoffmann von Waldau) 소장이 이끄는 독일공군본부의 작전참모국은 작전과, 훈련과, 정보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공군본부의 작전참모국은 부대의 이동과 작전 목표 선정 및 우선순위 부여, 목표 목록 및 정보 하달 등의 기능을 수행했습니다. 실제 작전 수립은 항공군(Luftflotten) 사령부와 항공군단 사령부 단위에서 담당했는데 이건 어디까지나 작전-전술 단위에 불과했으며, 이때까지 지상군의 작전과 연계된 작전만을 수행해 왔습니다. 공군본부의 작전참모국이 각 항공군사령부에 작전 목표 목록을 하달하면 항공군사령부는 지원하는 육군의 집단군 사령부와 협의해 목록 중에서 목표를 선정하고 실제 작전을 입안하는 방식이었습니다. 19406월 시점에서 독일공군본부는 단독으로 영국공군을 제압하는 전략 단위의 항공 작전을 수립해야 했습니다. 독일공군본부가 여지껏 단 한번도 수행해 보지 못한 과제였습니다.

 

다음으로는 정보 문제를 지적합니다. 사실 정보 수집 및 분석능력 부족은 독일 공군은 물론 육군본부의 참모조직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였습니다. 영국본토방공전 기간 중 독일공군본부 작전참모국의 정보과장은 요세프 슈미트(Josef Schmid) 중령이었습니다. 정보과의 정보 수집능력은 상당히 빈약했던 것으로 나타납니다. 전쟁 이전에는 각국 주재 공군무관부와 국방군 방첩국(Abwehr)의 정보수집에 의존했습니다. 그리고 친위대 보안국(SD, Sicherheitsdienst)의 해외자료 수집에도 크게 의존했습니다. 그러나 친위대 보안국은 군사정보 수집을 주목적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안국을 통한 군사정보 획득은 불규칙했습니다. 이런 빈약한 정보수집능력 조차 전쟁이 발발하면서 무너지고 맙니다. 결과적으로 전쟁이 발발한 뒤에는 인적자산을 통한 정보수집은 마비되었고 항공정찰 및 감청이 주된 정보수집 수단이 됩니다. 정보과장 슈미트 중령의 분석 능력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지만 수집되는 첩보가 감소하니 분석력을 발휘할 여지도 줄어든 셈 입니다. 그리고 슈미트의 분석력 또한 점차 감퇴해 결국에는 객관적인 분석력을 상실하고 상관들이 원하는 정보를 가공해서 바치는 수준으로 전락했다고 평가합니다.

 

저자들은 슈미트가 8월의 공세 결과를 잘못 평가한 점을 예시로 듭니다. 1940819일 베를린에서 열린 독일공군 수뇌부 회의에서 슈미트가 보고한 정보분석은 완전히 잘못된 분석을 하고 있었습니다. 슈미트는 1940 71일부터 영국공군이 561대의 전투기를 전투 손실로 잃었으며 추가로 196대의 전투기가 전투외의 원인으로 파괴되었다고 추산했습니다. 반면 같은 기간 보충된 전투기(스핏파이어와 허리케인)270~300대라고 과소평가했습니다. 그는 영국공군이 본토 남부지역에 투입할 수 있는 주간전투기가 330대 가량일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슈미트는 이후에도 괴링에게 계속해서 부정확하고 과장된 내용을 전달했습니다. 그는 824일부터 92일까지 제2항공군의 전투기부대가 공중전에서 영국공군의 전투기 572대를 격추했다고 보고했고 괴링은 이것을 토대로 영국 공군의 잔여 전력을 격파하기 위해서는 비행장을 폭격하는 것 보다 공중전으로 끌어내는게 더 효과적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사실 8월 내내 영국공군의 전투기 부대는 완강하게 저항했으나 슈미트는 이런 사실을 무시하고 독일공군의 전투기부대가 압도적인교환비로 공중전에서 승리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91일 기준으로 영국공군의 전투기 전력은 총 600대이고 이중 420대가 영국 동남부에 배치되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괴링과 제2항공군 사령관 케셀링(Albert Kesselring)은 비행장을 계속 폭격하면 영국 전투기부대가 후방의 기지로 철수해 Bf109의 작전반경 안으로 끌어낼 수 없다고 생각해서 런던 폭격을 미끼로 영국공군의 남은 전투기를 끌어내 섬멸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독일공군의 고급 지휘관 중에서 제3항공군 사령관 후고 슈페를레(Hugo Sperrle)는 슈미트의 정보평가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영국공군의 가용 전투기 전력이 1,000대 이내일 것이라고 슈미트 보다는 정확한 평가를 했습니다. 또한 독일공군 전투기부대의 전과 보고가 매우 과장되어 있다고 정확하게 보았습니다. 슈페를레는 영국공군의 전투기 전력이 상당한 규모이기 때문에 제뢰베 작전을 수행하려면 영국 남부의 비행장을 계속 타격해서 영국 공군의 전투기 부대를 북쪽의 기지로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괴링은 슈미트의 정보평가를 신뢰해서 런던을 타격한다는 결정을 내립니다. 괴링은 915일 런던 상공의 공중전에서 참패한 뒤에도 여전히 영국 전투기부대를 단기간 내에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독일 공군은 927일의 런던 공습에서 참패하고서야 영국 전투기부대를 단기간에 제압하는게 불가능하다고 인정하게 됩니다. 독일공군은 이미 8월의 전투에서 영국 전투기부대의 완강한 저항으로 고전을 하고 있었음에도 자신들이 공중전에서 압승하고 있다는 잘못된 정보평가를 맹신했습니다. 독일 공군 전투기 부대가 영국본토방공전 기간 중 1.77:1로 우세한 교환비를 보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괴링이나 케셀링이 생각한 압도적 승리와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영국공군 전투기 부대는 지속적으로 증강되고 있었고 전투가 소모전으로 접어들자 독일공군 전투기 부대 보다 훨씬 잘 견딜 수 있었습니다. 저자들은 괴링이 잘못된 정보분석을 맹신해 비행장에 대한 타격을 중단한 것이 결정적인 패인이라고 평가합니다.

 

각 단계의 작전에 대한 저자들의 평가도 꽤 재미있습니다. 됭케르크 항공전을 예로 들 수 있겠군요. 저자들은 됭케르크 항공전 당시 영국공군 전투기부대의 역할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비판적입니다. 숫적 열세 때문에 독일 공군이 됭케르크에서 철수하는 연합군 선단을 공격할 때 충분한 공중 엄호를 제공하지 못했다고 평가합니다. 다이나모 작전 당시 독일 공군의 피해는 폭격기 51대와 전투기 36대인 반면 철수작전을 엄호한 제11비행단은 작전에 투입한 전투기 106대를 잃었고 이중84대를 독일 전투기와 폭격기의 방어사격에 상실한 것으로 집계하고 있습니다. 저자들은 독일공군이 다이나모 작전을 저지하는데 실패한 가장 큰 원인은 공격을 됭케르크에 집중하지 못한데 있다고 봅니다. 독일공군은 다이나모 작전이 진행된 9일 중 겨우 3일만 됭케르크에 공격을 집중했기 때문에 실패했다는 겁니다. 저자들은 영국공군이 수송함대를 엄호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다이나모 작전 기간 중 됭케르크 공격에 집중했다면 독일공군이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영국 해협 봉쇄를 위한 항공작전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양호한 성과를 거두었으나 영국의 해운을 단기간에 마비시키기에는 충분하지 못한 수준이었다고 평가합니다. 독일공군은 이 기간에 급강하 폭격기와 중형폭격기의 폭격만으로 34척의 민간선박과 13척의 군함을 격침시켰으나 이것은 영국의 해운력과 해군력의 극히 일부에 불과했습니다.

이 책은 꽤 장점이 많습니다. 독일공군을 중심에 놓고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지만 영국공군의 조직과 전술에 대한 설명도 풍부합니다. 오스프리 출판사의 저작 답게 독일공군과 영국공군의 전술을 그림으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는 장점이 있습니다. 사진을 비롯한 도판도 풍부하고요.

저자들은 현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영국본토방공전을 현대 나토의 군사용어와 개념에 맞춰서 설명합니다. 예를들어 영국공군의 위성 비행장(satellite airfields)와 독일공군의 야전비행장(Feldflugplätze)을 나토의 개념인 전방작전기지(Forward Operating Location)로 분류하고 다우딩 시스템을 현대의 통합방공체계(Integrated Air Defence System)으로 분류하는 식 입니다.

기존의 연구 성과들을 잘 정리해서 재미있게 잘 쓴 책입니다. 다만 이미 영국본토방공전에 대한 훌륭한 책이 많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유명한 오스프리 출판사의 책이라는 점 때문에 완전히 묻히지는 않겠지만요. 



2020년 7월 25일 토요일

찰스 딕의 From Defeat to Victory: The Eastern Front, Summer 1944에 인용된 통계 문제


1990년대 이후 새로운 사료가 꾸준히 공개되고 기존에 공개된 사료에 대한 분석이 심화되면서 제2차세계대전 시기 러시아 전선에 대한 연구는 크게 발전했습니다. 냉전시대에 독일이나 소련 어느 한쪽에 편향된 연구가 이루어졌던 것과 비교했을 때 큰 발전이라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사료 활용에 있어 문제를 보이는 저작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특히 2차문헌을 비판 없이 인용하는 경우 이런 문제가 발생하지요. 1944년 러시아전선 하계전역을 분석한 찰스 딕(Charles J. Dick)From Defeat to Victory: The Eastern Front, Summer 1944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딕은 바그라티온 작전 직전 소련군과 독일군의 전력비가 병력에 있어서 2.5:1, 박격포와 다련장포를 포병전력은 2.9:1, 기갑전력은 4.3:1, 항공전력은 6.3:1로 소련군이 우세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1) 이 통계는 소련의 제2차대전 공간사에서 제시한 것 입니다. 소련측의 주장은 꽤 오랫동안 정설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딕이 From Defeat to Victory: The Eastern Front, Summer 1944의 바그라티온 작전 부분을 쓰면서 인용한 자료 중에는 게르트 니폴트의 Mittlere Ostfront Juni’44의 영어번역본인 Battle for White Russia가 있습니다. 니폴트는 이 연구에서 소련 공간사의 통계를 인용하고 있습니다.2) 니폴트가 소련 공간사의 잘못된 통계를 인용한 이유는 확실치 않으나 연구가 나왔을 당시인 1985년에는 중부집단군의 전체 전력을 집계할 만큼 사료 분석이 되어 있지 않아 소련 공간사의 통계를 인용한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니폴트가 이 연구에서 제시하고 있는 독일군의 전력 통계는 당시 사료의 한계 때문에 불완전 합니다. 4군과 제9군의 전력 통계를 제시하고 있는데 제4군은 병력 및 장비 통계를 제시하고 있지만 제9군은 병력 통계만 제시하고 있습니다.3)

물론 소련 공간사의 통계는 틀린 것 입니다. 역시 딕이 인용하고 있는 소련군 총참모부의 작전연구 영어번역본인 Belorussia 1944: The Soviet General Staff Study는 바그라티온 작전 직전 독일 중부집단군의 총 병력이 1,036,760, 야포 7,760, 대공포 2,320, 전차 800, 돌격포 530, 항공기 1,000~1,300대라고 추산하고 있습니다.4) 소련 자료에 실려있는 양군의 전력비는 바로 이 통계를 기반으로 한 것 입니다. 소련군 4개 전선군의 총병력 250만에 독일 중부집단군 1백만명으로 2.5:1의 병력비가 나온다는 계산입니다. 그러나 1944년 6월 1일 기준으로 독일 중부집단군 총병력이 578,225명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바그라티온 작전 직전 독일 중부집단군 병력이 1백만명을 넘었다는 소련측의 추산은 크게 잘못되었음 알 수 있습니다.5) 소련측 통계는 양군의 기갑전력 비율 역시 심각한 수준으로 과장하고 있습니다. 

※바그라티온 작전 직전 독일 중부집단군의 기갑전력에 대해서는 "바그라티온 작전 당시 독일중부집단군 소속 사단급 부대들의 기갑 및 대전차전력"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독일측 사료를 바탕으로 정리한 보다 정확한 전력비는 칼-하인츠 프리저의 연구에 실려 있습니다. 프리저가 집계한 통계에 따르면 바그라티온 작전 직전 소련군과 독일군의 전력비는 병력에서 3.7:1, 기갑전력 8.2:1, 포병전력 9.4:1, 항공전력 10.5:1로 소련군이 우세를 보이고 있습니다.6)

딕이 훨씬 정확한 프리저의 통계를 인용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정확한 소련 공간사의 통계를 인용해 독일군의 전력을 과장한 이유는 의문입니다. 그는 바그라티온 작전 당시 독일군의 손실 통계는 프리저의 연구에서 인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7) 이런 식으로 양군의 전력비를 부정확하게 평가하면 제대로 된 작전 연구를 할 수 없습니다. 독일군의 전력을 과장하는 서술은 자연히 소련군의 전투 효율성을 과장하는 잘못된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2018년에 썼던 러시아 연구자의 '최신 연구' 얼마나 신뢰할 있는가?: 이고르 네볼신의 사례”에서 이야기 하기도 했습니다만, 최근에 나오는 연구 중에서도 냉전 시기 소련에서 제기한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인용하는 사례가 간혹 발견됩니다. 군사사, 특히 작전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교차검증과 문헌 비판이 필수적이라 하겠습니다.



1)     Charles J. Dick, From Defeat to Victory: The Eastern Front, Summer 1944 Decisive and Indecisive Military Operation, Vol. 2 (Lawrence: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16) p.99.
2)     Gerd Niepold, Mittlere Ostfront Juni’ 44, (Hamburg: Mittler und Sohn, 1985), p.55. 니폴트의 연구에서 소련 자료를 인용해 정리한 전력비는 병력 2.5:1, 포병 2.9:1, 기갑 4.3:1, 항공기 4.5:1 소련군이 우세했다고 되어 있음.
3)     Niepold., Ibid., pp.35~36.
4)     David M. Glantz and Harold S. Orenstein, Belorussia 1944: The Soviet General Staff Study (London: Frank Cass, 2001), p.6.
5)    Walter S. Dunn, Jr., Soviet Blitzkrieg: The Battle for White Russia, 1944 (Boulder: Lynne Riuenner Publishers, 2000), p.61.
6)     Karl-Heinz Frieser, “Der Zusammenbruch der Heeresgruppe Mitte im Sommer 1944“, Das Deutsche Reich und der Zweite Weltkrieg 8L: Die Ostfront 1943/44, Der Krieg im Osten und an den Nebenfronten (München: Deutsche Verlags-Anstalt, 2011), p.534. 전투병력 1,254,399:336,573, 전차 2,715:118, 자주포 1,355:277, 야포 24,383:2,589, 항공기 6,334:602. 프리저는 독일 제3기갑군, 제9군, 제4군의 전투병력과 같은 구역에 투입된 소련군 전투병력을 기준으로 양측 전력비를 계산하였음.
7)     Dick, Ibid., p.117.

2020년 7월 3일 금요일

새롭게 도색을 한 전쟁기념관 소장 중장비들

업무차 전쟁기념관에 들렀다가 최근에 도색을 새로 한 중장비들을 구경했습니다. 실내 전시실의 전차 및 야포류를 구경했는데 도색을 아주 깔끔하게 잘 해 놓았더군요. 차량의 부대 표식도 전쟁에 참전했던 부대에 맞춰 놓은게 인상적이었습니다.









2020년 5월 24일 일요일

[번역글] 군 현대화 VS 대규모 동원 체제


이 글은 작년 미육군대학 전략연구소가 간행한 The Russian Military in Contemporary Perspective265~285쪽에 실린 알렉산드르 골츠(Aleksandr Golts)의 글 Modernization versus mobilization을 번역한 것 입니다. 러시아의 인구구조 변화가 군제개혁에 끼친 영향을 언급하고 있어서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비단 러시아군이 아니더라도 군사개혁 과정에서 양적 규모와 질적 수준의 균형을 맞추는 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글에서는 기존의 군사구조에서 이익을 얻는 집단이 개혁에 반대하고 그 결과 이루어진 정치적 타협이 개혁을 좌초시키는 과정도 잘 잡아내고 있습니다. 다소 러시아에 비판적인 시각이긴 하지만 충분히 참고할 만 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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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현대화 VS 대규모 동원 체제



알렉산드르 골츠



러시아군이 크림반도 병합, 돈바스 지역의 이른바 하이브리드 전쟁, 시리아 내전 개입에서 수행한 역할은 러시아의 급격한 군사개혁의 결과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2014226일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군에 불시검열을 지시한 직후 불과 수일만에 러시아군은 주요 성과를 달성했다.1) 러시아군 총참모부는 크림 반도의 우크라이나군이 저항하고 우크라이나 정부가 이 지역에 군사적 지원을 할 가능성을 고려했던 것으로 보인다.(크림 반도에서 저항이 없을 것이라고 본 푸틴의 의견과 반대이다.) 그러므로 러시아군은 원래 우크라이나군이 크림 반도로 증원되는 것을 막으려고 국경에 전개했을 것이다.

불시검열로 위장하고 서부군관구, 중부군관구, 공수부대, 우주군, 항공수송부대, 전략공군부대가 배치되었다.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장관은 이 불시검열에 15만명의 병력이 투입됐다고 밝혔다.2) 당시 나토 유럽사령관이었던 미국의 필립 브리들러브(Philip Bredlove) 장군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의 국경지대에 30,000~40,000명의 병력을 배치했다고 진술했다.3) 러시아의 신문 베도모스티(Ведомости)지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국경에 배치된 대대전술집단은 제4전차사단(칸테미롭스카야Кантемировская)과 제2차량화소총병사단(타만스카야Таманская), 76공중강습사단, 31공중강습사단, 106공중강습사단, 23차량화소총여단 예하 부대들로 구성되었다고 보도했다.4) 러시아군 총참모부는 이후 2~3일간 이 부대들의 이동과 작전배치를 은폐할 수 있었다. 쇼이구 국방장관은 이 불시검열에 3개 군관구와 4개 야전군사령부 지휘부가 참여했다고 진술했다.5) 2015년 가을에 있었던 첸트르2015 훈련에서도 이와 비슷한 대규모의 병력 동원이 있었다. 이 기동훈련은 내전이 일어난 국가에 전면침공을 감행할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 실시한 것이었다. 충분한 항공지원을 받는 1개 공수사단과 지상군부대가 침공 작전을 수행했다.6) 이 훈련을 기획한 인물들은 훈련의 주목적이 시리아나 중앙아시아에서 지상작전을 전개할 가능성을 염두에 뒀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즉 러시아군은 신속한 결정과 신속한 병력전개를 할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능력은 러시아가 돈바스 지역에서 전개하는 하이브리드 전쟁이나 시리아에 대한 군사개입 보다 더 심각한 위협으로 보인다. 러시아가 1999년 제2차 체첸전쟁을 시작했을 당시에는 다게스탄이 침공을 받은 뒤 2주 뒤에 러시아군의 전개가 시작되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러시아가 2008년부터 2012년까지 수행한 군사개혁의 주요 성과는 30~40개의 엘리트 부대를 전략적으로 기동할 능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명령이 하달되고 불과 수시간 내에 전투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준비태세를 갖춘 것이다.) 쇼이구 장관은 이른바 불시검열에 150,000명의 병력이 참가했다고 했는데 이것은 과장됐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군을 마비시키고 크림반도를 병합하는데 저항하지 못하게 했다. 러시아는 군사개혁을 통해 비록 유럽 전체에는 못 미치더라도 구소련의 영향권에 한해서는 절대적인 군사적 우위를 발휘할 수 있는 군사적 역량을 갖추게 됐다고 평가할 수 있다.

1990년대였다면 러시아 정부는 러시아군의 능력이 이렇게 갑자기 상승할 거라고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러시아군은 러시아 국민들에게 러시아가 포위당한 요새라는 점을 보여주는 물적 근거가 되었다. 지난 수년간 러시아 정부의 대서방 정책은 군사적 억지라는 개념을 패러디한 것이었다. 러시아 대통령은 러시아가 미국의 선제 핵공격을 받을 경우 보복으로 세계의 절반을 소멸시킬 능력을 갖추는 여부가 러시아의 안보를 결정한다고 믿고 싶어한다. 이러한 억지-패러디 게임은 푸틴이 미국에 대한 불만을 말로 드러낼 수 있게 만들었다. 푸틴은 미국이 러시아에 맞서 색깔 혁명을 일으키려 음모를 꾸민다고 믿는다. 러시아 정부로서는 불만을 군사적인 방식으로 표출하는 것이 가장 적합할 것이다. 러시아 국방장관을 지냈던 아나톨리 세르듀코프는 군사개혁을 통해 억지-패러디 게임을 현실화 시켰다.

러시아군 수뇌부와 정치 지도자들은 2008년 조지아를 패배시킨 직후 향후 9년간 매년 20%씩 국방예산을 증가시키더라도 러시아군의 전투력이 부족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만약 조지아군이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러시아군이 패배할 수도 있었다. 조지아와의 전쟁 결과 150년내에 가장 과격한 군사개혁이 추진되었다. 이 막대한 임무를 맡은 것이 세르듀코프였다. 러시아군의 문제가 무엇인지는 러시아 지도층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푸틴은 2006년 연방의회 연설에서 제2차 체첸전쟁 발발 당시의 상황을 회고하면서 러시아군의 문제를 제기했다.



우리는 테러리스트들을 효과적으로 격퇴하기 위해 65,000명의 병력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군 전체를 통틀어 전투 준비가 된 병력은 55,000명에 불과했습니다. 게다가 이 병력이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러시아군 병력은 1,400,000명에 달했지만 전투를 할 수 있는 병력은 부족했습니다. 이 때문에 실전 경험도 없는 젊은이들을 전투에 내보내야 했습니다. 나는 이 사건을 결코 잊지 못할 겁니다. 이러한 사태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과업입니다.”7)



푸틴은 2012년 로시이스카야 가제타에 기고한 글에서 이 문제를 보다 명쾌하게 설명했다. 그는 소련으로부터 물려받은 군사적 유산에 대해 설명하면서 동원체제에 기반한 대규모 군대로는 21세기의 안보 위협에 대응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푸틴은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해결책은 단 하나 뿐이었다. 새로운 군대를 만들어야 했다.”8) 200810월 세르듀코프는 러시아연방군의 전망과 2009~2020년 러시아연방군 조직에 관한 최우선 정책이라는 이름의 계획이 향후 수년 내로 실현될 것이라고 공언했다. 이 계획을 입안한 기획자들은 개혁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지만 이 계획은 사실상 모든 군사 체계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려는 것이었다. 이 개혁은 장교 보직 355,000개 중 135,000개를 제거하고 육군의 동원부대를 모두 해체하는 내용이었다. 그 결과 지상군의 규모는 11분의 1로 줄어들었다. 러시아육군의 1,187개 부대 중 지금 남아있는 것은 189개 부대에 불과하다. 러시아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과 달리 이정도 규모의 감축은 최적화러시아군의 모습을 일신했다고 보기 어렵다.(이 글을 쓰던 시점에서 러시아군 장교의 3분의 1이 해임된 것으로 밝혀졌다.)

러시아 군사개혁의 또다른 중요한 경향은 군대의 조직 변화이다. 지상군의 구조는 사단 중심에서 여단 체제로 변화했다. 6개의 군관구가 5개의 통합전략사령부(서부, 동부, 중부, 남부, 북부)로 개편되었다. 통합전략사령부는 지상군, 공군, 해군 부대를 총괄한다. 이러한 구조개편은 합동작전 이론과 이를 실행하기 위해 취해야 할 첫 단계였다.

군 규모의 측면에서 봤을 때 러시아군 구조개편의 주요 성과는 대규모 병력동원에 기반한 모델을 거부하는 방향으로 개혁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세르듀코프는 러시아군의 주된 약점이 대규모 병력동원 개념을 적용하려고 하는데서 비롯된다고 이해했다. 기간 요원으로 구성된 동원부대를 해체하고 불필요하게 많은 장교를 해임한 것은 러시아 정치 지도부가 대규모 병력동원 개념을 포기하기로 결심했음을 뜻한다. 비교적 최근까지 러시아는 전시에 최대 4백만에서 최대 8백만명의 예비군을 동원해 국토를 방어한다는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9) 육군사령관을 지냈던 블라디미르 볼디레프(Владимир Болдирев)에 따르면 현재 러시아 육군의 전시 계획은 60개 여단, 300,000명의 예비군만 동원하는 것이다.10) 총참모장을 지냈던 니콜라이 마카로프(Николай Макаров)는 전면전이 발발하면 700,000명의 예비군을 동원한다고 말했다.11)

과거 러시아 육군은 23개의 소총병 및 전차사단으로 편성되었으나 현재는 60여개의 여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만 타만스카야 사단과 칸테미롭스카야 사단은 다시 사단 편제로 회귀했다. 극동지역의 기관총 및 포병사단과 17개의 독립 연대는 기존의 편제대로 유지되고 있다. 세르듀코프는 정규군에 전투태세가 완비된 부대만 남겨두고자 했다. 이러한 부대들은 편제대로 병력을 갖추고 가동 가능한 무기체계를 장비하여 명령을 내리면 즉시 전투를 수행할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모든 동원부대는 해체되었다.(동원부대는 지상군 총병력의 70%를 차지하고 있었다.)

사실 이러한 구조개편만이 러시아군의 모습을 일신할유일한 방법이었다. 러시아 정부는 1870년대에 채택한 대규모 병력동원 개념을 완전히 포기했다. 과거의 병력동원 개념은 군사적 위협이 발생하면 러시아의 성인 남성 대부분, 수백만명의 병력을 동원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긴급 동원 태세를 갖추려면 수백만명의 훈련된 예비군이 필요했다. 이 때문에 매년 수십만명을 징집했다. 예비대대와 연대를 지휘할 장교도 확보해야 했다. 러시아군의 70%는 지휘부 및 기간요원, 장비와 탄약만 보유한 동원부대였다. 소련이 붕괴한 뒤 대규모 병력동원 체제를 효율적으로 유지하는게 어려워졌다. 러시아의 인구는 급격히 감소했다. 소련이 붕괴할 무렵 2020년에 입대할 남자들이 이미 태어났으니 이 숫자가 바뀔 리 없었다. 2011년 러시아의 18세 남성은 648,000명이었다. 2012년에는 662,000, 2013년에는 641,000, 2014년에는 613,000, 2015년에는 592,000명으로 감소했다. 인구 감소는 계속되고 있다.12) 2022~2023년에만 18세 남성의 숫자가 조금 증가한다. 인구 감소 때문에 러시아군의 편제 계획은 18세에서 30세 사이의 가장 생산성 높은 연령대의 남성이 부족하다는 점을 고려해 수립되야 한다. 또 러시아의 군수산업도 수백만명의 예비역을 무장시킬 능력이 없다.

공수군 사령관을 지낸 블라디미르 샤마노프(Владимир Шаманов) 장군은 과거의 대규모 동원 개념은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솔직하게 인정했다.



2차세계대전 이후 무력투쟁의 형태와 방식은 급격히 변했다. 이제 대규모의 동원부대를 해체해야 한다. 이러한 개념으로는 국방력을 담보할 수 없다. 솔직히 말해서 이른바 동원자원으로 완편하는 연대와 사단을 군사적 위협이 있을 때 동원하는건 아주 시대착오적이다. 핵무기가 등장한 이상 수백만명의 군대가 대치하는 전쟁은 더 이상 일어날 수 없다! 그런데도 쓸모없는 동원부대를 유지하느라 군사비 부담만 가중되고 있다. 동원부대를 유지하느라 여러가지 중요한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부대의 규모가 작고 총 병력은 20만명 수준의 높은 전투력을 갖춘 신속대응군을 만들어야 한다. 신속대응군은 기동성과 항시 모든 전장에 투입할 수 있도록 훈련을 받아야 한다.”13)



러시아 정부는 군대의 편제와 군사력 증강 체계 전체를 극단적으로 개편하고자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양적인 단계에서 중단된 상태다.

이렇게 군사 개혁을 진행하는 상황에서는 징병제를 점진적으로 폐지하고 지원병제에 기반한 군대로 개편하는게 논리적이다. 예비역의 숫자가 평시 군대 규모의 3분의 2 수준이라면 징병제는 합리적이지 않다.(징병제가 아니라 지원병제에 기반한 군대의 특성이다.) 군사행동을 취해야 할 때 700,000명의 예비역만 동원하고 징집을 하지 않는다면 매년 300,000명의 징집병을 훈련하는데 막대한 예산을 소모할 이유가 있겠는가?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부장관은 2020년까지 495,000명의 지원병을 모집한다는 목표를 세웠다.14) 동시에 징집을 유지하면서 징집병을 1백만 정규군의 10% 이내로 유지하려 했다. 러시아군은 지원병제 군대가 된다. 징집병이라도 직업군인이 될 의향이 있는 경우에만 징집을 한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러시아군 당국은 매년 300,000명의 징집병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징집을 유지하는 것은 항시 준비태세를 갖춘다는 개념과 상충한다. 복무기간 1년의 징집을 계속한다면 앞으로도 러시아군의 전투력을 높게 평가할 수 없다.

기존 방식의 동원을 중단하려면 러시아군의 훈련을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 군사교육 체계 전체를 과격하게 개혁하고 기존의 장교 복무 방식을 폐기하고 전문적인 초급 간부를 육성할 기관을 만들어야 한다. 세르듀코프와 국방부 관료들은 이 문제를 매우 효과적으로 판단했다. 러시아의 군사개혁가들은 러시아의 군사교육기관에서는 전문적인 장교가 아니라 대규모의 징집병 군대에 필요한 수준 낮은 군사 기술자만 육성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대부분의 군사교육기관은 장교후보생들이 1~2 종류의 장비만 숙달될 수 있도록 가르쳤다.

동시에 러시아 국방부 관료들은 장교의 숫자를 7분의 1로 줄여야 하며 1년에 필요한 신규 임관 장교의 숫자는 8,000명 정도라고 이야기했다. 이렇게 한다면 군사교육의 수준을 높일 가능성이 있었다. 또한 과거와는 달리 장교들의 고등군사교육을 한차례로 줄이기로 했다. 군사교육기관의 숫자를 17개로 줄였다. 그 결과 러시아군에는 3개의 군사교육 및 군사과학 연구소, 11개의 군사학교, 3개의 군사대학이 남게 되었다.15)

군사교육기관에서는 각군의 장교들에게 인문학과 과학 교육을 실시한다. 인문학 교육은 장교들이 급속하게 변하는 세계에서 군인의 위치를 이해하고 장교로서 책임감을 가지게 한다. 과학 교육은 장교들이 현대 무기 체계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진급 체계 및 상위 보직에 임명되는 절차는 경쟁적이고 투명해졌다. 연공서열 뿐만 아니라 능력도 진급에 영향을 끼치게 되면서 장교를 지속적으로 교육할 수 있는 체제가 만들어졌다. 진급을 원하는 군인들은 높은 평가를 받고 소속 부대 및 예하 부대들을 잘 관리해야 한다는 점을 알고있다.

세르듀코프가 물러난 뒤 장교 교육 체계 개혁 중 일부는 과거로 돌아갔다. 러시아 국방부는 다수의 군사학교를 독립 기관으로 남겨두기로 했다. 여기에는 미하일롭스키 포병학교, 방공학교, 우주방공학교, 화생방학교 등이 있었다. 러시아군은 18개의 군사학교 및 군사대학, 15개의 병과학교를 유지하기로 했다. 쇼이구는 각 병과학교의 지위를 독립교육조직으로 돌려놓기 위해 고등군사교육기관의 구분을 과거의 3단계(군사종합대학, 군사대학, 학교)로 되돌려야 한다.”고 고려했다.16)  러시아 전역에 33개의 군사대학이 흩어져 있는 상태에서 높은 수준의 군사교육과 훈련을 할 수 있겠는가? 세르듀코프가 국방장관으로 있던 시기에는 국방부 교육국이 군사교육기관을 관리했다. 그러나 현재는 각군 산하의 사령부들이 교육기관을 관리한다. 군당국은 행정 업무를 해결하느라 훈련생들에게 필수적인 지식과 실용적인 기술을 교육하는데 관심을 두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된다면 과거의, 즉 근본적으로 소련과 같은 군사교육 제도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총참모부 군사대학이다.

러시아 국방부가 군사교육 체제 개혁을 중단한 것은 돌발적인 사고가 아니다. 현재 러시아의 환경에서는 고등 교육을 받고 독립적이며 자신감을 가진 장교가 군복무를 즐겁게 할 수 없다. 고등교육을 받은 독립적인 장교들은 범죄적인 명령이라 할지라도 복종하지 않으면 군사재판에 회부될 위험이 있는 현재 체제에 만족할리가 없다. 좋은 교육과 훈련을 받은 장교가 존재한다면 현재 러시아 정권에 불만을 가질 것이다. 현재의 러시아 정권이 이른바 색깔 혁명을 새로운 전쟁 방식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황은 심각하다.17) 러시아 정부는 대중 소요가 발생할 경우 러시아군을 투입하려는 의도를 가진게 확실하다. 이런 경우 러시아 정부가 필요로 하는 것은 교육을 잘 받은 장교가 아니라 정권에 충성하는 장교다.

러시아 국방부는 교육 수준이 낮은 장교를 대규모로 양성하는과거의 정책으로 돌아갔다. 모든 군사교육기관이 자기 조직의 영향력을 높이고 학생 숫자를 늘리려 할게 확실하다. 2009년에서 2012년 사이에 배출된 졸업생들은 2014년 말 까지 부사관이 배치되는 보직을 담당해야 했다.18) 러시아 정부는 장교의 의무복무기간을 5년으로 연장했기 때문에 장교의 숫자도 증가할 게 확실하다. 소령이나 중령급의 중견 장교들이 처음에 장교의 의무복무기간 연장에 관심을 가졌다.(군사 개혁가들은 중견 장교들을 최대한 빨리 감축하려고했다.) 국방부 인사국장 빅토르 고레믜킨(Виктоп Горемыкин)26,000명의 장교가 복무기간 연장을 신청했다고 보고했다. 복무기간 연장을 신청하는 장교는 더 늘어날 듯 하다.19) 장교 숫자가 증가하면서 러시아군 조직은 대규모 병력동원 개념으로 회귀할 것이다.

예비군 충원 체계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나타났다. 러시아 국방부는 2008년말 러시아 역사상 처음으로 예비군에 급여를 지급하고 자원제로 운영하려로 했다. 예비역은 군관구 직할의 독립부대에 배속될 것이었다. 러시아 장군들은 새로운 예비군 동원체계의 규모를 축소해서 불합리하게 만들어 버렸다. 이들은 예비군 체계 개편 '시험'에서 고작 5,000명의 사병과 장교만 잠재적인 예비역으로 선발하자고 제안했다. 시험이 성공하면 유급 예비역의 숫자를 8,000명으로 늘리도록 했다. 이건 고작 2개여단 규모에 불과했다. 러시아 지상군은 60개여단 규모의 예비역이 필요하다. 나머지 58 여단은 이른바 동원 자원으로 충원해야 했다. 소련 시절 처럼 러시아의 병역 적령기 남성을 모조리 동원하는 개념이었다. 2014년에 시작된 예비역 충원 체계를 개편하는 '실험' 진짜 목표는 예비역 동원 조직 현대화를 미루는 것이다.

조만간 쇼이구는 서로 연결된 두개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번째 문제는 그가 푸틴이 내린 불가능한 명령을 이행하야 한다는 것이다. 푸틴은 러시아군 병력을 1,000,000 규모로 개편하도록 했다. 하지만 필자가 글을 쓰는 시점에서 러시아군 병력은 920,000 수준이었고 현재 러시아의 인구학적 상황으로는 이조차도 유지하는게 버겁다. 번째 문제는 쇼이구 본인이 병력 충원 체계를 어떻게 할지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쇼이구는 세르듀코프의 개혁으로 이룩한 뚜렷한 성과들을 포기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보수적인 군수뇌부와 직접 부딛히는 일도 피해야 한다.

2013년에는 푸틴은 대학생들이 휴학을 하지 않고도 군복무를 할수 있는 제도를 제안했다. 쇼이구도 방침을 지지했다. 푸틴이 제시한 방안은 대학생들이 1 6개월에서 2 정도 매주 하루씩 군사훈련을 받는 이었다. 훈련을 모두 마치면 3개월치의 군사훈련을 받은셈이 된다. 군사훈련을 모두 마친 대학생들은 현역 복무를 하지 않고 예비역 사병이나 부사관 계급을 가지게 것이었다. 쇼이구는 대학생들이 제도를 신뢰할 있도록 하려 했다.



이 제도가 휴학을 하지 않으면서 군사교육을 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이를 위해 러시아 국방부는 특별 훈련소를 설치할 겁니다. … 1년에 8만명에서 10만명의 예비역을 훈련시킬 수 있기를 원합니다.”20)



쇼이구도 노리는 바가 있었다. 러시아 국방부는 10만명의 대학생에 군사훈련을 시켜 서류상으로 군 병력을 1백만명으로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장군들은 이 계획이 불만이었다. 군 지휘관들은 서류상으로 존재하는 병력이 아니라 실제로 지휘할 수 있는 병력을 원했다. ‘현역병력이 장군의 숫자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러시아군 수뇌부는 쇼이구의 계획을 망쳐버리기로 했다. 원래 계획에 따르면 2015년에는 새로운 훈련 체계에 따라 대학생 58,000명이 군사훈련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실제로 군사 훈련을 받은 대학생은 15,000명에 불과했다.21)

노련한 정치인인 쇼이구는 자유주의적군제 개혁과 강대국으로서 1백만명 수준의 군대를 유지해야 한다는 현 정부의 기본 원칙 사이에서 균형을 아주 잘 유지해왔다. 그 결과 개혁을 시작하기는 했으나 이 개혁은 푸틴이 만든 국가 체제의 이데올로기 기반과 상반되는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보수적인 군사 엘리트 집단은 과거의 대규모 병력 동원 체제로 회귀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첸트르2015 훈련까지의 모든 전략군사훈련은 대규모 병력동원 훈련을 포함하고 있었다는데 주목해야 한다. 이제는 지역 행정기구도 군사훈련에 참여하고 있다.22) 그리고 세르듀코프가 개혁을 추진하던 와중인 2010년에 채택한 군사교리는 기존의 동원준비 교리와 큰 차이점이 없었다. 2014년 말에 채택한 새 교리에도 여전히 동원 준비에 대한 내용이 상당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설사 대규모 병력 동원 개념을 포기했다 하더라도 러시아 정부는 여전히 이 방식으로 회귀할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언젠가는 러시아 정부가 러시아군의 역량에 만족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러시아 정부는 개혁을 마친 러시아군의 역량을 높게 평가해서 러시아군이 달성할 수 없는 임무에 투입하고자 했었다. 20143월 러시아 정부는 우크라이나 남동부 지역에서 크림 반도에서 했던 것과 같은 방식을 반복할 수 없었다. 크림 반도의 경우 페레코프 지협을 통과하는 고속도로와 철도만 차단하는 것으로 우크라이나 본토에서 쉽게 떼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도네츠크와 루간스크 지역은 같은 방식으로 다룰 수 없었다. 러시아군은 이 지역에서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국경을 만들어야 했다. 도네츠크와 루간스크를 우크라이나의 다른 지역과 연결하는 수백개의 도로망을 차단해야 했다. 이런 임무는 비밀 작전이나 은밀한 침공 작전으로 달성할 수 없었다. 모든 중요한 교통선에는 일반적인 검문소를 설치하고 우크라이나의 다른 지역에서 우크라이나군이 증원되는 걸 저지할 능력을 갖춰야 했다. 설사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국경에 40,000명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 하더라도 실제로 이 지역을 점령하려면 이보다 두 배는 많은 병력이 필요했다.

현재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국경에 배치된 대대전술집단 정도만 항시 준비태세를 갖추고 있으면 되는데도 갈수록 부족해지는 병력을 보충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20152월 우크라이나 분리주의자들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데발체보의 철도교차점을 점령하려 했을 때 러시아군 수뇌부는 부랴티야에서 전차대대 1개를 파견했다.23) 아이러니하게도 지난 수년간 러시아군은 과거 콜린 파월이 제안했던 모델과 비슷하게 만들어졌다. 단기간 내에 대규모 기동을 해서 이동한 뒤 승리를 거두는 즉시 철수하는 것이다. 우크라이나에서 전개되고 있는 하이브리드 전쟁에서 필요한 것이 또 하나 생겨났다. 러시아군 수뇌부는 군병력을 증강하고 장기간 유지할 필요성에 직면했다. 하지만 숙달된 군 병력은 제한적이다. 그래서 우크라이나 국경에 징집병들을 배치해야 했다. 이 결정은 전략적 유연성을 제한했다.

게다가 돈바스에서 전개한 비밀 작전은 군대의 규율과 사기를 악화시켰다. 러시아군 지휘관들은 인명손실을 은폐하기 위해 작전 중 전사한 인원의 장례식을 비밀리에치렀다. 러시아 군관계자들은 우크라이나에서 싸우고 있는 러시아군 소속 병력은 휴가를 받아서 우크라이나에 간 것이라고 주장했다. 휴가를 가는 병사는 휴가 예정지역을 서면으로 보고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러시아 정규군 병사는 러시아 보안기구 소속의 특수부대원과 다르다. 직업군인으로 입대한 정규군 병사는 조국을 지키기로 서약했을 뿐이지 외국에서 비밀 작전을 수행하기로 한 것이 아니다. 정규군의 사기와 규율은 보안 기관과 크게 다르다. 예를 들어 정규군 병사들은 지휘관이 부하들의 목숨을 전적으로 책임지기 때문에 신뢰를 한다. 그러나 지금은 러시아 정규군 정예 부대의 지휘관들이 자신들이 내린 명령에 따른 책임을 회피하려 하고 있다. 수십만명의 러시아군 장병과 이들의 친인척들이 러시아 정부에 이런 권리를 줄 거라곤 생각되지 않는다. 러시아 국방부는 1년에 5만명의 지원병을 뽑는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정규군이 비밀 작전에 투입되는 일 때문에 지원병 중 다수가 장기복무할 생각을 거두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와 반대되는 사례는 러시아군이 시리아 내전에 개입한 일이다. 러시아군은 장기간 작전을 펼쳤다. 2015924일 러시아 국방부는 시리아에 러시아 군을 투입할 가능성을 완강히 부인했다. 하지만 930일에는 러시아 공군기가 비밀리에 라타키아 기지로 이동해 첫 번째 공습 임무에 투입됐다. 1124일 터키 전투기가 러시아군의 Su-24 전폭기를 격추한 직후 러시아군의 대응은 더욱 인상적이었다. 1126일 최신 방공무기체계인 S-400이 라타키아 기지에 배치됐다. 이렇게 신속한 부대 배치가 가능했던 원인은 중대한 군사적 결정을 단 한사람, 푸틴이 내렸기에 가능했다. 푸틴은 러시아 의회와 군대 투입을 놓고 협상할 필요가 없었다. 러시아 연방의회는 간단하게 파병을 승인해서 푸틴이 시리아에 러시아군을 투입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푸틴은 동맹국과 상의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러시아 카스피해 분함대 소속의 군함들이 순항미사일을 발사했을 때 카자흐스탄 지도부는 매우 불편해했다.

하지만 결정을 내리는 속도 때문에 결정에 따르는 모든 영향을 고려할 수 없을 때 견제와 균형이 없다면 전략적으로 실수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집트에서 테러리스트가 민간인이 탄 항공기를 폭파한 사건이나 Su-24 조종사가 전사한 일은 러시아가 신속하게 시리아에 개입한 대가였다.

NATO에 대응하고자 한 계획은 세르듀코프의 개혁을 끝장내 버렸다. 후임자인 세르게이 쇼이구는 이렇게 말했다.



러시아 국방부는 나토군이 러시아 국경지대 인근에 집결하는데 대응하기 위해 여러가지 조치를 취하는 중이다. 연말 까지 서부군관구에 새로 2개 사단을 배치하고 남부군관구에 1개 사단을 배치할 예정이다.”24)



이보다 전에 로스토프 나 도누(Ростов-на-Дону) 인근에 새로운 차량화소총병 부대가, 그리고 스몰렌스크와 보로네지 지역에 개의 신규 사단이 창설되었다.

하지만 신규 사단 창설은 러시아 육군의 전투력을 강화하기 보다는 약화시킬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 지도자들은 군국주의적 도취 상태에서 러시아 육군에 새로운 대규모의 목표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번째는 나토와의 군사적 대결이라는 임무다. 하지만 러시아군의 규모는 너무 작아서 강대국을 상대로 중대한 작전을 수립할 능력이 없다. 그래서 러시아국방부는 새로 사단을 편성했다. 러시아 국방부 장관은 신규 사단 편성이 3 사단으로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언명했다.

쇼이구는 이전에 2015 이래 서부군관구에 30개의 부대를 창설했다고 밝혔다.25) 그리고 2015 11 말에는 남부군관구에 15개의 부대를 새로 편성했으며 최종 단계에서는 2개의 부대가 추가될 것이라고 밝혔다.26) 독립군사평론(независимое военное обозрение)지의 보도에 따르면 2016년에만 8개의 새로운 작전급 제대, 25 사단(지상군사단, 공군, 방공군, 해군), 15 여단이 창설됐다고 한다.27) 서부군관구에는 모스크바에 사령부를 1전차군이 증강되었다.28) 총참모부의 고위 간부는 타스통신에 20군의 소속 부대들을 1전차군에 배속 변경하고 그대신 완전 신규 부대를 보충했다고 밝혔다.29)

필자가 글을 쓰고 있을 무렵 러시아 국방부의 계획은 1년에 10,000명씩 병력을 증강하는 이었다. 이건 고작 1 사단을 완편할 있는 수준이지 40개의 주요 부대를 창설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가지 가능성이 있다. 번째는 다른 지역에서 부대를 서부 지역으로 이동해 신규 사단을 편성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은 이미 진행 중이다. 중앙군관구 사령관은 타지키스탄의 201기지에 주둔 하던 사단을 여단급으로 개편한다고 발표했다.30) 러시아는 군사적 야망을 충족하기 위해 실질적인 위협이 상존하는 중앙아시아의 군사력을 크게 감축하는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군의 병력은 제한적이다. 러시아의 군사 기획자들은 다른 방법을 취할 것으로 판단된다. 러시아 국방부는 전투력을 확보할 있는 동원부대를 창설할 것이다. 동원부대는 예비역으로 병력을 충원해야 한다. 그런데 러시아는 충분한 예비 병력 자원이 없다. 이건 효율성이 떨어지는 기존의 대규모 병력 동원 방식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각지에 산재해 있는 여단들은 전투력을 잃게 것이다. 뿐만 아니라 현재 러시아 정부는 확보할 수도 없는 수많은 예비 병력 자원을 무장시킬 방법을 강구하고 있다. 푸틴은 산업계의 동원능력을 증대시키기 위한 회의를 열었다. 러시아 군수산업계의 지도자들은 전쟁이 임박할 경우 러시아의 산업을 군수 공업으로 전환할 가능성에 대해 논의했다. 1980년대 유가 하락에도 불구하고 동원준비태세를 강화하려 하다가 소련 경제가 붕괴하고 말았다. 오늘날 같은 상황이 반복되는 하다. 서방과의 대립은 소련을 자멸하게 했던 대규모 동원 체제의 부활로 이어지는 것이다.





주석



1. Alexander Tikhonov, “Oboronnye prioritety” (“국방상의 우선 순위”), 크라스나야 즈베즈다, 2014 2 27.

2. Ibid.

3. Laura Smith-Spark, Barbara Starr, and Karl Penhaul, “What do we know about Russia’s troop buildup on Ukraine’s border?” CNN, April 2, 2014, available from http://www.cnn.com/2014/03/28/world/europe/russia-ukraine-troop-buildup/.

4. Polina Himshiashvili and Aleksej Nikol’skij, “Koncen­traciya bez gruppirovki” (“Concentration without Grouping”), Vedomosti, April 2, 2014.

5. Tikhonov, “Oboronnye prioritety” (“Defense Priority”).

6. Ivan Buvaltsev and Oleg Falichev, “Blizhnij Vostok na JUzhnom Urale” (“우랄 남부의 중동”),

보예노 프로믜슬레늬 쿠리에르, 2015 11 2, http://vpk-news.ru/articles/27827.

7. 블라디미르 푸틴, 의회연설, 크렘린, 2006 5 10 http://en.kremlin.ru/events/president/transcripts/23577.

8. Vladimir Putin, “Byt’ sil’nymi: garantii nacional’noj bezo­pasnosti dlja Rossii” (“강해야 한다. 러시아를 위한 안보 공약”), 로시이스카야 가제타, 2012 2 12.

9. Vladimir Zolotarev, ed., Istorija voennoj strategii Rossii (러시아 군사전략사), Moscow: Kuchkovo pole, 2000, р. 528.

10. Leonid Khairemdinov, “Vremya mobilnosti” (“기동의 시대”), 크라스나야 즈베즈다, 2009 10 1, http://old.redstar.ru/2009/10/01_10/1_05.html.

11. Denis Telmanov, “V sledujushhem godu zarplata lejten­antov sostavit 50 tysjach rublej” (“다음해 소위의 급여를 5 루블로 인상”), 가제타, 2008 11 14.

12. Vladimir Yevseev, “Otsrochki ot voennoi sluzhby: Segod­nya i zavtra” (“군복무 연기: 현재와 미래”), Otechestvennye zapiski, No. 5, 2005, http://www.strana-oz.ru/2005/5/otsrochki-ot-voennoy-sluzhby-segodnya-i-zavtra.

13. Vladimir Shamanov, “Neobkhodimost reform podtverdila voyna” (“전쟁에 대비한 개혁의 필요성”) 크라스나야 즈베즈다, 2009 2 11.

14. “V 2020 godu v rossijskoj armii budut sluzhit’ polmilliona kontraktnikov” (“2020년까지 러시아군에 50만명의 지원병이 복무할 예정”), 아르구멘티 네델리, 2014 2 14, http://argumenti.ru/army/2014/02/319393.

15. Vladimir Ivanov, “Po amerikanskomu ranzhiru” (“미국 고위층의 발언”), 독립군사평론, 2012 4 6 http://nvo.ng.ru/high/2012-04-06/1_ranzhir.html.

16. 세르게이 쇼이구가 라잔고급공수지휘학교에서 군사교육 발전에 대해 연설, 인테르팍스 통신 2013 11 15일자 보도에서 인용 http://www.interfax.ru/russia/341145.

17. Aleksandr Tikhonov, “‘Cvetnye revoljucii’―ugroza miru” (“‘색깔 혁명: 평화에 대한 위협”), 크라스나야 즈베즈다, 2014 4 23.

18. Nikolaj Gur’janov, “Serzhanty ne spravilis” (“실패한 부사관들”), Vzgljad, May 16, 2012.

19. Ol’ga Bozh’eva, “V armii uvelichat srok sluzhby” ( 복무 기간이 연장될 예정”), 모스코브스키 콤소몰렉, 2013 11 14 http://www.mk.ru/politics/army/article/2013/11/11/943499-v-armii-uvelichat-srok-sluzhbyi.html.

20. Aleksandr Tihonov, “Studencheskij prizyv: v nogu so vremenem” (“학생 징집: 현실과 보조를 맞추다”), 크라스나야 즈베즈다, 2013 12 19.

21. 러시아군 총참모부 조직동원국 1부국장 예프게니 부르딘스키(Евгений Бурдинский) 2015 7 18 에코 모스크비 라디오방송에서 발언한 내용. http://echo.msk.ru/programs/voensovet/1586730-echo/.

22. Oleg Vladyikin, “‘TSentr-2015’ nikomu ne ugrojaet” (“첸트르2015훈련은 누구도 위협하지 않는다.”), 독립군사평론 2015 9 11.

23. Elena Kostjuchenko, “My vse znali, na chto idem i chto mozhet byt” (“무엇을 해야 할지, 긜고 무엇이 일어날지 모두가 알고 있다.”), 노바야 가제타, 2015 3 4 http://www.novayagazeta.ru/society/67490.html.

24. 러시아 국방장관, 나토에 대항해 3 사단을 편성한다고 공언타스통신, 2016 5 4 http://tass.ru/en/defense/873755.

25. 국방장관, 2015 중으로 서부군관구에 30개의 육군 부대를 창설할 계획타스통신, 2015 9 11, http://tass.ru/en/defense/820572.

26. 2014 11 25 국방부 위원회 회의에서 세르게이 쇼이구 장관이 발언, 인테르팍스 통신 보도에서 인용. http://www.interfax-russia.ru/South/main.asp?id=676521.

27. Nikolai Poroskov, “Nekololnye interesi Rossii” (“러시아의 과하지 않은 이해관계”), 독립군사평론, 2016 2 19 http://nvo.ng.ru/concepts/2016-02-19/12_interests.html.

28. “Pervayatankovaya: zachem armii Rossii mekhaniziro­vannyy kulak” (“1전차군: 러시아군이 강력한 기계화 부대를 필요로 하는 이유”), 타스통신, 2016 2 2 http://special.tass.ru/armiya-i-opk/2632366.

29. “Russia to set up 3 divisions to counteract NATO — defense minister”; See also “Istochnik: tankovaya armiya budet sformirovana pod Moskvoy k zime” (“겨울까지 모스크바에 전차군이 창설될 예정”), TASS통신 2015 7 29 http://tass.ru/armiya-i-opk/2150702.

30. “Rossiyskuyuvoyennuyu bazu v Tadzhikistane perevedut na brigadnyy shtat” (“타지키스탄의 러시아군 기지는 여단 규모로 전환 예정”), TASS통신 2016 1 30 http://special.tass.ru/armiya-i-opk/26270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