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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31일 금요일

To Defeat the Few: The Luftwaffe’s Campaign to Destroy RAF Fighter Command, August-September 1940

Osprey 출판사에서 낸 Douglas C. Dildy Paul F. Crickmore To Defeat the Few: The Luftwaffe’s Campaign to Destroy RAF Fighter Command, August-September 1940를 읽었습니다. 영국본토방공전을 독일 공군을 중심으로 분석한 저작입니다. 필자들은 히틀러와 독일공군 수뇌부의 전략적 목표와 작전 단위의 결단을 분석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작전 단위 이상의 전개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전술 차원의 공중전 교환비나 격추 전과 검증은 중요하게 다루지 않고 있습니다. 단지 고급 지휘관들의 결심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경우에 한해서 독일공군과 영국공군이 자군의 전과와 손실을 어떻게 평가했는지를 언급합니다.

 

이 책은 총 14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중 1장부터 3장을 영국본토방공전의 전사인 서부전역 항공전과 됭케르크 항공전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4장부터 6장까지는 서부전역 이후 독일 수뇌부의 전쟁지도 방침, 독일공군과 영국공군의 조직과 편성, 교리, 전술을 비교분석 하는 내용입니다. 7장부터 13장까지는 영국본토방공전을 단계별로 나누어 분석하고 있습니다. 7장은 영국해협의 해운 봉쇄를 위한 해협항공전(Kanalkampf), 8장은 제뢰베 작전의 입안, 9장부터 12장까지는 812일부터 917일까지의 영국본토방공전을 단계별로 나누어 분석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13장은 9월 공세에서 패배한 독일 공군이 10월까지 진행한 공세작전을 다루고 있습니다. 마지막 14장은 결론입니다.

 

저자들은 독일공군의 입장에서 서술을 하기 위해 영국본토방공전의 각 단계를 독일측의 기준에 맞춰 분류하고 있습니다. 각 단계는 다음과 같습니다.

 

조우전단계, 프랑스전역 종결 직후부터 194087일까지: 영국해협 해운 봉쇄를 위한 해협항공전이 진행된 시기.

11단계, 88~823: 바다사자작전 준비 차원에서 영국 남부의 비행장과 해군 기지에 대한 광범위한 공격이 진행된 시기.

12단계, 824~96: 영국 남부의 제공권 장악을 위해 영국공군 제11비행단(No.11 Group)의 기지에 공격을 집중한 시기.

21단계 , 97~919: 런던과 인근 지역을 중심으로 공격을 집중한 시기

22단계, 920~1113: 런던을 중심으로 전투폭격기(Jabo)의 주간 공격과 폭격기부대의 야간 폭격을 병행한 시기.

23단계, 1114~1941521: 영국 본토에 대한 대규모 폭격의 최종 단계. 영국에서 통칭 야간 전격전(Night Blitz)로 칭하는 시기.

 

작전사를 다루는 연구들이 모두 그렇듯 이 책의 핵심 주제는 독일 공군이 왜 영국본토방공전에서 패했는가?”입니다.

 

저자들은 독일 공군의 전술적 우위에 대해서는 동의하는 입장입니다. 문제는 작전~전략단위의 능력입니다. 결국 영국본토방공전이라는 전략 단위의 항공전에서 독일공군이 패배한 원인은 작전~전략 단위의 역량 부족에서 찾아야 한다는 관점입니다.

이 책에서는 먼저 독일공군본부의 조직적 문제를 지적합니다. 독일공군은 신생 병종이었고 이 때문에 공군본부를 원활하게 운영할 수 있을 만큼의 고급장교를 육성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독일공군의 고급장교들은 대부분 육군 출신으로 항공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인물도 있었습니다. 가장 큰 구조적 문제는 1940년 시점에서 독일공군본부에는 공군이 독립적으로 수행하는 전략단위의 작전을 기획할 조직이 없었다는 점 입니다. 저자들은 19406월 시점에서 독일공군본부의 참모조직은 독일육군본부나 독일해군본부의 전문적인 참모조직과 달리 공군사령관 헤르만 괴링의 개인 참모조직에 불과한 수준이었다고 비판합니다.

오토 호프만 폰 발다우(Otto Hoffmann von Waldau) 소장이 이끄는 독일공군본부의 작전참모국은 작전과, 훈련과, 정보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공군본부의 작전참모국은 부대의 이동과 작전 목표 선정 및 우선순위 부여, 목표 목록 및 정보 하달 등의 기능을 수행했습니다. 실제 작전 수립은 항공군(Luftflotten) 사령부와 항공군단 사령부 단위에서 담당했는데 이건 어디까지나 작전-전술 단위에 불과했으며, 이때까지 지상군의 작전과 연계된 작전만을 수행해 왔습니다. 공군본부의 작전참모국이 각 항공군사령부에 작전 목표 목록을 하달하면 항공군사령부는 지원하는 육군의 집단군 사령부와 협의해 목록 중에서 목표를 선정하고 실제 작전을 입안하는 방식이었습니다. 19406월 시점에서 독일공군본부는 단독으로 영국공군을 제압하는 전략 단위의 항공 작전을 수립해야 했습니다. 독일공군본부가 여지껏 단 한번도 수행해 보지 못한 과제였습니다.

 

다음으로는 정보 문제를 지적합니다. 사실 정보 수집 및 분석능력 부족은 독일 공군은 물론 육군본부의 참모조직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였습니다. 영국본토방공전 기간 중 독일공군본부 작전참모국의 정보과장은 요세프 슈미트(Josef Schmid) 중령이었습니다. 정보과의 정보 수집능력은 상당히 빈약했던 것으로 나타납니다. 전쟁 이전에는 각국 주재 공군무관부와 국방군 방첩국(Abwehr)의 정보수집에 의존했습니다. 그리고 친위대 보안국(SD, Sicherheitsdienst)의 해외자료 수집에도 크게 의존했습니다. 그러나 친위대 보안국은 군사정보 수집을 주목적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안국을 통한 군사정보 획득은 불규칙했습니다. 이런 빈약한 정보수집능력 조차 전쟁이 발발하면서 무너지고 맙니다. 결과적으로 전쟁이 발발한 뒤에는 인적자산을 통한 정보수집은 마비되었고 항공정찰 및 감청이 주된 정보수집 수단이 됩니다. 정보과장 슈미트 중령의 분석 능력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지만 수집되는 첩보가 감소하니 분석력을 발휘할 여지도 줄어든 셈 입니다. 그리고 슈미트의 분석력 또한 점차 감퇴해 결국에는 객관적인 분석력을 상실하고 상관들이 원하는 정보를 가공해서 바치는 수준으로 전락했다고 평가합니다.

 

저자들은 슈미트가 8월의 공세 결과를 잘못 평가한 점을 예시로 듭니다. 1940819일 베를린에서 열린 독일공군 수뇌부 회의에서 슈미트가 보고한 정보분석은 완전히 잘못된 분석을 하고 있었습니다. 슈미트는 1940 71일부터 영국공군이 561대의 전투기를 전투 손실로 잃었으며 추가로 196대의 전투기가 전투외의 원인으로 파괴되었다고 추산했습니다. 반면 같은 기간 보충된 전투기(스핏파이어와 허리케인)270~300대라고 과소평가했습니다. 그는 영국공군이 본토 남부지역에 투입할 수 있는 주간전투기가 330대 가량일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슈미트는 이후에도 괴링에게 계속해서 부정확하고 과장된 내용을 전달했습니다. 그는 824일부터 92일까지 제2항공군의 전투기부대가 공중전에서 영국공군의 전투기 572대를 격추했다고 보고했고 괴링은 이것을 토대로 영국 공군의 잔여 전력을 격파하기 위해서는 비행장을 폭격하는 것 보다 공중전으로 끌어내는게 더 효과적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사실 8월 내내 영국공군의 전투기 부대는 완강하게 저항했으나 슈미트는 이런 사실을 무시하고 독일공군의 전투기부대가 압도적인교환비로 공중전에서 승리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91일 기준으로 영국공군의 전투기 전력은 총 600대이고 이중 420대가 영국 동남부에 배치되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괴링과 제2항공군 사령관 케셀링(Albert Kesselring)은 비행장을 계속 폭격하면 영국 전투기부대가 후방의 기지로 철수해 Bf109의 작전반경 안으로 끌어낼 수 없다고 생각해서 런던 폭격을 미끼로 영국공군의 남은 전투기를 끌어내 섬멸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독일공군의 고급 지휘관 중에서 제3항공군 사령관 후고 슈페를레(Hugo Sperrle)는 슈미트의 정보평가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영국공군의 가용 전투기 전력이 1,000대 이내일 것이라고 슈미트 보다는 정확한 평가를 했습니다. 또한 독일공군 전투기부대의 전과 보고가 매우 과장되어 있다고 정확하게 보았습니다. 슈페를레는 영국공군의 전투기 전력이 상당한 규모이기 때문에 제뢰베 작전을 수행하려면 영국 남부의 비행장을 계속 타격해서 영국 공군의 전투기 부대를 북쪽의 기지로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괴링은 슈미트의 정보평가를 신뢰해서 런던을 타격한다는 결정을 내립니다. 괴링은 915일 런던 상공의 공중전에서 참패한 뒤에도 여전히 영국 전투기부대를 단기간 내에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독일 공군은 927일의 런던 공습에서 참패하고서야 영국 전투기부대를 단기간에 제압하는게 불가능하다고 인정하게 됩니다. 독일공군은 이미 8월의 전투에서 영국 전투기부대의 완강한 저항으로 고전을 하고 있었음에도 자신들이 공중전에서 압승하고 있다는 잘못된 정보평가를 맹신했습니다. 독일 공군 전투기 부대가 영국본토방공전 기간 중 1.77:1로 우세한 교환비를 보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괴링이나 케셀링이 생각한 압도적 승리와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영국공군 전투기 부대는 지속적으로 증강되고 있었고 전투가 소모전으로 접어들자 독일공군 전투기 부대 보다 훨씬 잘 견딜 수 있었습니다. 저자들은 괴링이 잘못된 정보분석을 맹신해 비행장에 대한 타격을 중단한 것이 결정적인 패인이라고 평가합니다.

 

각 단계의 작전에 대한 저자들의 평가도 꽤 재미있습니다. 됭케르크 항공전을 예로 들 수 있겠군요. 저자들은 됭케르크 항공전 당시 영국공군 전투기부대의 역할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비판적입니다. 숫적 열세 때문에 독일 공군이 됭케르크에서 철수하는 연합군 선단을 공격할 때 충분한 공중 엄호를 제공하지 못했다고 평가합니다. 다이나모 작전 당시 독일 공군의 피해는 폭격기 51대와 전투기 36대인 반면 철수작전을 엄호한 제11비행단은 작전에 투입한 전투기 106대를 잃었고 이중84대를 독일 전투기와 폭격기의 방어사격에 상실한 것으로 집계하고 있습니다. 저자들은 독일공군이 다이나모 작전을 저지하는데 실패한 가장 큰 원인은 공격을 됭케르크에 집중하지 못한데 있다고 봅니다. 독일공군은 다이나모 작전이 진행된 9일 중 겨우 3일만 됭케르크에 공격을 집중했기 때문에 실패했다는 겁니다. 저자들은 영국공군이 수송함대를 엄호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다이나모 작전 기간 중 됭케르크 공격에 집중했다면 독일공군이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영국 해협 봉쇄를 위한 항공작전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양호한 성과를 거두었으나 영국의 해운을 단기간에 마비시키기에는 충분하지 못한 수준이었다고 평가합니다. 독일공군은 이 기간에 급강하 폭격기와 중형폭격기의 폭격만으로 34척의 민간선박과 13척의 군함을 격침시켰으나 이것은 영국의 해운력과 해군력의 극히 일부에 불과했습니다.

이 책은 꽤 장점이 많습니다. 독일공군을 중심에 놓고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지만 영국공군의 조직과 전술에 대한 설명도 풍부합니다. 오스프리 출판사의 저작 답게 독일공군과 영국공군의 전술을 그림으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는 장점이 있습니다. 사진을 비롯한 도판도 풍부하고요.

저자들은 현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영국본토방공전을 현대 나토의 군사용어와 개념에 맞춰서 설명합니다. 예를들어 영국공군의 위성 비행장(satellite airfields)와 독일공군의 야전비행장(Feldflugplätze)을 나토의 개념인 전방작전기지(Forward Operating Location)로 분류하고 다우딩 시스템을 현대의 통합방공체계(Integrated Air Defence System)으로 분류하는 식 입니다.

기존의 연구 성과들을 잘 정리해서 재미있게 잘 쓴 책입니다. 다만 이미 영국본토방공전에 대한 훌륭한 책이 많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유명한 오스프리 출판사의 책이라는 점 때문에 완전히 묻히지는 않겠지만요. 



2018년 3월 11일 일요일

체임벌린 내각의 공군 전투기 전력 증강에 관한 잡설

‘덩케르크’와 ‘다키스트 아워’에 이어 ‘가이 마틴의 스핏파이어’ 까지 보고 나니 전간기 영국 공군 전투기 전력 증강에 대해 썰을 풀고 싶어지는군요.

극영화의 특성상 ‘다키스트 아워’에서는 네빌 체임벌린을 음모만 꾸미는 음흉한 패배주의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물론 뮌헨 회담 등 치명적인 외교적 실책이 있다 보니 비난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래도 전간기 영국의 군비 증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인데 지나치게 과소평가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네요. 체임벌린 내각의 국방 정책 중 가장 특기할 만한 것은 공군력 증강, 특히 본토 방공을 위한 전투기 전력 증강에 힘을 쏟은 것 입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체임벌린 내각이 재무장을 추진하면서 전략적으로 합리적인 결정을 내렸다는건 인정해야 할 거 같습니다.

먼저 1930년대 영국의 국방비 지출 추이를 살펴보죠.

표1. 1930년대 영국 국방비 지출(단위: 1000파운드)
연도
공군
육군
해군
1930/31
17,800
40,150
52,574
1931/32
17,700
38,520
51,060
1932/33
17,100
35,880
50,010
1933/34
12,780
37,592
53,500
1934/35
17,630
39,660
56,580
1935/36
27,496
44,647
64,806
1936/37
50,134
54,846
81,092
1937/38
82,290
77,877
101,950
1938/39
133,800
121,361
127,295
[G. C. Peden, Arms, Economics and British Strategy: From Dreadnoughts to Hydrogen Bombs(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7), p.151의 표3.8를 재구성]

이 표에서는 체임벌린 내각에 들어와 공군 예산의 비중이 큰 폭으로 늘어나는걸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영국의 재무장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35년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 해에 재무장관 피셔Warren Fisher의 강력한 지지하에  1936/37년 부터 1941/42년에 걸친 재무장 계획이 수립됩니다. 영국 의회는 1937년에 재무장 계획의 원활한 추진을 위해 1937/38년 부터 1941/42년까지를 기한으로 하는 국방융자법Defence Loans Act을 통과시켜 재무장에 필요한 재원 조달을 용이하게 했습니다. 이 법안이 통과되면서 영국 군부는 사실상 제약 없이 예산을 지원받게 됩니다. 물론 과도한 국방비로 균형재정이 무너지고 인플레이션이 일어날 위험도 컸습니다. 1937년 총리로 취임한 체임벌린도 과도한 국방비 지출이 인플레이션을 일으켜 되려 재무장 계획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을까 우려했다고 합니다.1) 국방융자법 통과는 국방비의 가파른 증액에 일조합니다. 1937/38년의 총 국방예산 2억6200만 파운드 중 6500만 파운드가, 1938/39년의 총 국방예산 4억 파운드 중 1억2800만 파운드가 이 법안에 따라 증액된 예산이라고 하는군요.2) 이렇게 1936년 이후 급증한 예산을 바탕으로 영국 공군력은 급격히 증강됩니다.

영국 공군의 증강 계획도 독일의 위협 증대와 예산 증액에 맞춰 단계적으로 상향됩니다. 영국 정부가 독일의 재무장에 대응해 처음 내놓은 공군 증강 계획은 ‘F계획Scheme F’로 불립니다. F계획은 1936년 2월 내각 회의에서 채택된 안으로 향후 3년에 걸쳐 8,000대의 신형 군용기를 도입하는 것을 골자로 했습니다. 하지만 아래에서 영국의 항공기 생산 능력 부족으로 계획이 종료단계였던 1938년까지 영국 공군이 확보한 신형 항공기는 목표에 미달하는 4,500대에 불과했습니다. 게다가 이 중 3,000대는 F계획 이전에 발주된 구형 항공기였습니다.3) F계획은 기본적으로 구형 기체의 교체 외에도 개전 첫 3개월간의 소모를 보충하기 위해 일선 배치기수의 150%의 예비기를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4)
체임벌린 내각은 독일의 전쟁 위협이 증대되고 재무장 계획이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1938년 4월 27일 특단의 조치로 ‘L계획Scheme L’을 통과시킵니다. L계획은 향후 2년 내로 공군에 일선 기체와 예비 기체를 합쳐 12,000대의 신형 항공기를 도입하는 야심찬 계획이었습니다. 전후에 편찬된 영국 정부의 공간사는 L계획이야 말로 영국 공군의 재무장에 있어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고 평가합니다.5) L계획은 채택되지 못한 K계획을 수정 보완한 것 입니다. 계획 1차년도에는 4,000대의 항공기를 생산하고 2차년도에는 8,000대를 생산해 2년 내로 완료하는게 목표였습니다. 또한 전투기 중대의 중대 당 기체 수를 14대에서 16대로 상향하는 편제개편도 포함됐습니다. 또한 개전 초기의 소모를 감당할 수 있는 예비기체의 확보도 중요하게 고려됐습니다.6)
F계획 부터 L계획에 걸친 영국 공군 증강 계획은 다음과 같습니다.

표2. 1930년대 중후반의 영국 공군 증강 계획
계획안
폭격기
전투기
연안부대
육군지원
총계
완료예정일
비고
중대
기체수
중대
기체수
중대
기체수
중대
기체수
중대
기체수
F
70
1022
30
420
13
162
11
132
124
1736
1939.3.31

H
87
1631
34
476
13
183
11
132
145
2422
1939.3.31
채택되지 않음
J
90
1442
38
532
19
281
11
132
158
2387
1941 여름
채택되지 않음
K
77
1360
38
532
19
281
11
132
145
2305
1941.3.31
채택되지 않음
L
73
1352
38
608
19
281
11
132
141
2373
1940.3.31

[Ian M. Philpott, The Royal Air Force: An Encyclopedia of the Inter War Years Vol.2: Rearmament 1930 to 1939, (Pen and Sword, 2008, Kindle Edition) Location 1582]


영국 정부가 공군력을 증강하면서 추진한 일 중 하나는 항공기 제작회사들에게 하청 회사를 늘리도록 유도한 것 입니다. 영국은 1920~30년 중반까지 세계에서 손꼽히는 항공기 수출 대국이었지만 독일의 재무장에 따라 군비경쟁이 시작되자 생산능력의 한계를 절감하게 됩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영국 항공기 회사들은 유사시를 대비해 여유로운 생산능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급속한 군축으로 된서리를 맞은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 유명한 솝위드Sopwith가 여유 생산설비를 유지하다가 군축의 타격으로 부도(...) 난 대표주자죠. 솝위드의 멸망(...)을 보고 경악한 항공 기업들이 잇따라 구조조정을 실시한 결과 영국 정부가 재무장을 본격적으로 지작한 1930년대 중반에는 항공기 생산능력이 격감한 상태였습니다.
유럽 본토의 정세가 다급하게 돌아가자 영국 정부는 항공기 생산 하청을 적극적으로 권장해 1938년 봄에는 항공성이 정부와 계약을 맺은 항공기 회사에 생산물량의 36%를 하청업체에 배정하도록 권고하기도 합니다.7) 위에서 언급한 L계획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항공기 하청생산에 참여하는 기업이 급증합니다. 너필드Nuffield 그룹은 빅커스 수퍼마린의 하청업체로 스핏파이어 생산에 참여하기로 결정하고 캐슬 브롬위치 근교에 월간 240대의 스핏파이어를 생산할 수 있는 공장 건설에 들어갑니다. 자동차 회사인 오스틴Austin과 루츠Rootes는 폭격기 동체 생산에 참여했습니다. 또한 루츠, 다임러, 스탠다드, 로버 등의 자동차 회사는 브리스톨 허큘리스 엔진 생산에도 참여했습니다.8) 이외에도 수많은 기계 관련 기업들이 영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항공기 생산에 참여합니다. 항공산업계 외부에서 새로운 사업자들이 나타나면서 1937년 이후 항공기 생산 계획은 탄력을 받습니다. 특히 조선업계의 항공기 생산 참여는 큰 도움을 줍니다. 예를들어 웨스트랜드Westland는 조선기업인 존 브라운John Brown의 투자를 받아 1938년에 재무구조를 튼실히 개선하는데 성공합니다.9) 1930년대 영국을 포함한 주요 국가의 항공기 생산량은 다음의 표와 같습니다. 체임벌린 내각 수립 이후 영국의 항공기 생산이 급증하는 경향이 눈에 띄게 나타납니다.

표3.1930년대 주요 국가의 항공기 생산량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미국
소련
1933
633
?
368
766
466
2,595
1934
652
?
1,968
688
437
2,595
1935
893
785
3,183
952
459
3,578
1936
1,830
890
5,112
1,181
1,141
3,578
1937
2,218
743
5,606
1,511
949
3,578
1938
2,827
1,382
5,235
3,201
4,800
7,500
1939
7,940
3,163
8,295
4,467
2,195
10,383
[G. C. Peden, Arms, Economics and British Strategy: From Dreadnoughts to Hydrogen Bombs(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7), p.138 표.3.5.]

또한 항공기 생산을 뒷받침할 기간 산업에 대한 투자도 증대합니다. 영국 정부는 1938년 말 알루미늄 판(Sheet와 Strip 포함) 생산량을 연간 2만 톤에서 3만톤으로 늘리는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그리고 1939년 봄이 되어 위기가 고조되자 영국의 전체 경금속 생산량을 두 배로 늘리는 계획도 수립됩니다.10)

뮌헨 사태는 영국 공군의 재무장을 더욱 가속하는 계기가 됩니다. 당시 영국 정부와 군부는 독일 공군의 전력을 과대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군력 강화는 시급한 과제였습니다. 1938년 9월 기준으로 영국 전투기사령부Fighter Command 예하 부대는 총 29개 중대에 전투기 406대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중 신형항공기는 허리케인 5개 중대(70대)에 불과했습니다. 게다가 허리케인은 배치 초기라서 아직 원활한 운용이 힘들었습니다. 15,000피트 이상의 고도에서는 기관총 사격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하죠. 이때까지도 전투기사령부의 주력은 건틀렛과 글래디에이터 같은 구형 복엽기였습니다. 또한 전투기 조종사 2,500명 중 즉시 작전이 가능한 인원은 고작 200명으로, 나머지 인력은 추가로 훈련을 더 해야 하는 상태였다고 합니다.11)  게다가 예비 기체 확보량도 충분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전쟁 발발시 예상되는 소모에 대응하기 위해 최소 75%의 예비기체를 확보하고 있어야 했지만 실제 예비 기체는 30% 미만에 불과했습니다.12)

표4. 1938년 9월 영국 공군 전투기 사령부 전력 현황
기종
중대 수
보유 기체
예비 기체
허리케인
5
70
23
글래디에이터
5
70
40
건틀렛
9
126
33
데몬
7
98
53
퓨리
3
42
11
총계
29
406
106
[T.C.G. James, The Growth of Fighter Command 1936-1940(Routledge, 2014), p.45]

전쟁의 징후가 보이는데도 전투기를 포함한 공군 전력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영국 정부는 신형 항공기와 조종사를 대량으로 확보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입니다. 영국 공군본부는 뮌헨 사태에 직면해 1939년 4월까지 허리케인 270대, 스핏파이어 130대를 포함해 총 400대의 신형 전투기를 확보한다는 계획을 세웁니다.13) 영국 항공성은 1938년말 전시생산기획국DPWP, Directorate of Planning of War Production을 새로 설치해 전시 항공기 생산 기획을 총괄하도록 하는 등 전시에 대비한 항공기 생산 태세를 갖추어 나갑니다.14) 전쟁 위기에 직면해 공군력 증강에 막대한 자원을 투입한 결과 1939년 상반기 영국 공군의 항공기 도입은 계획량을 초과하는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전투기 생산도 급증해서 1939년 4월 1일까지 생산된 허리케인은 315대, 스핏파이어는 130대에 달했습니다.15) 전년도 가을에 수립한 계획 목표치를 조금 상회한 수준을 달성한 겁니다.

표5. 1939년 상반기 영국 공군의 항공기 도입량
계획량
실제도입량
1월
425
445
2월
452
579
3월
504
712
4월
543
364
5월
594
702
6월
637
681
총 계
3,155
3,483

써야 할 이야기가 많은데 대충 우겨넣으니 좀 이상한 글이 됐습니다.^^


1) G. C. Peden, Arms, Economics and British Strategy: From Dreadnoughts to Hydrogen Bombs(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7), pp.131~132.
4) Ian M. Philpott, The Royal Air Force: An Encyclopedia of the Inter War Years Vol.2: Rearmament 1930 to 1939, (Pen and Sword, 2008, Kindle Edition) Location 1583-1599
5) Postan, Ibid., p.18.
6) Philpott, Ibid., Location 2416-2418.
7)  Peden, Ibid., p.139.
8)  Sebastian Ritchie, Industry and Air Power: The Expansion of British Aircraft Production, 1935~1941(Routledge, 1997), pp.59~60.
9) Ritchie, Ibid., p.188.
10) Ritchie, Ibid., p.66.
11) T.C.G. James, The Growth of Fighter Command 1936-1940(Routledge, 2014), pp.43~45; Philpott, Ibid., Location 3313-3321.
12) James,  Ibid., pp.45~46.
13) James,  Ibid., p.50.
14) Postan, Ibid., p.67.
15) Ritchie, Ibid., p.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