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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January 10, 2018

신속한 지뢰 제거 방법 - 2



"주코프가 설명해 준 소련군의 지뢰지대 돌파 방법은 꽤 인상적이었다. 적의 사격을 받으며 지뢰 지대를 돌파하려면 많은 희생을 감수하고 시간을 소모해야 했다. 우리의 기술자들은 지뢰 지대를 안전하게 개척할 수 있도록 여러가지 장비를 개발했지만, 지뢰 지대를 돌파하는 데는 항상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주코프 원수는 소련군의 지뢰 지대 돌파 방법을 설명해 줬다. '지뢰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대인지뢰와 대전차지뢰죠. 소련군은 지뢰 지대를 마주치면 그냥 돌격합니다. 독일군이 지뢰지대 대신 강력한 부대를 투입해 방어할 경우와 비교해 보면 대인지뢰로 인한 인명피해는 적의 기관총이나 포격에 입는 인명피해와 비슷할 겁니다. 보병들이 공격하다가 대전차지뢰를 밟아도 폭발하지는 않으니까 보병들이 지뢰지대를 돌파해 교두보를 구축한 다음에 공병을 투입해 차량이 지나갈 수 있도록 대전차지뢰를 해체하는 겁니다.'
Dwight D. Eisenhower, Crusade in Europe (William Heinemann Ltd, 1949), pp.510~511

Friday, December 22, 2017

Panzer Krieg Vol 1. German Armoured Operations at Stalingrad

제이슨 마크(Jason D. Mark)의 신작 Panzer Krieg Vol 1. German Armoured Operations at Stalingrad를 막 받아서 훑어보는 중 입니다. 이 책은 원래 Stalingrad: Graveyard of the Panzers라는 제목으로 기획되었다가 집필 과정에서 훨씬 터프한(!!!) 제목으로 바뀌었습니다.

Panzer Kreig은 103전차대대, 129전차대대, 160전차대대 등 1942년 하계공세 당시 독일군 차량화보병사단에 배속되었던 전차대대들의 작전을 다루고 있습니다. 책의 구성은 제이슨 마크가 기존에 냈던 다른 책들과 동일합니다. 현존하는 1차 사료와 증언 구술자료를 극한으로 활용한 미시적인 서술이 이 저작의 특징입니다. 특히 각 부대의 '최후의 생존자'들의 행적을 추적하는 것은 마크의 저작에서 일관적으로 다루는 내용이지만 읽는 이들에게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을 안겨줍니다. 책의 부록으로 실려있는 각 대대별 가동 전차 현황표는 제이슨 마크의 치밀한 연구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NARA에 소장된 독일군 노획문서 사본을 철저하게 분석해서 하루 단위의 전차 보유 변동을 추적하는데서 읽는이를 완전히 압도합니다. 현 시점에서 입수 가능한 야전군, 군단, 사단의 문서를 철저하게 분석했다는 것을 주석만으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943년 이후 독일군 기갑사단에 대해 비슷한 시도를 했던 Kamen Nevenkin의 Fire Brigades: The Panzer Divisions 1943 - 1945가 기갑총감부 문서철 단 하나만을 활용해서 월별 통계를 정리하는데 그쳤다는 점을 상기하면 비록 시간적 범위는 짧을지언정 제이슨 마크가 연구에 투입한 노력이 얼마나 되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단점이라면 A4판형으로 전작들에 비해 훨씬 커졌다는 것을 꼽겠습니다. Leaping Horseman 출판사에서 내는 책들은 고급종이를 써서 책이 무거운게 사실이지만 이번에는 판형도 그냥 들고 보기에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커졌습니다. 책장에 꽃아 넣는 것도 일이로군요. 물론 책에 수록된 수많은 기록사진들을 생각하면 판형이 커진 것은 어쩔수 없는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매우 훌륭한 연구입니다. 앞으로도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꾸준히 인용하게 될 걸작이라고 생각합니다.

Sunday, December 3, 2017

러시아 정부 공식 통계의 쿠르스크 전투 관련 내용에 대한 비판



아래의 내용은 레프 로푸호프스키Лев Николаевич Лопуховский와 보리스 카발레르치크Boris Kavalerchik 공저, The Price of Victory: The Red Army’s Casualties in the Great Patriotic War (Pen and Sword, 2017)의 2장 일부(55~67쪽)를 번역한 것 입니다. 지난번에 소개했었던 로푸호프스키의 글(러시아의 퇴행적 역사인식에 대한 로푸호프스키의 비판)과 바로 연결되는 내용이어서 번역을 했습니다. 크리보셰프의 통계에 대한 문제제기는 워낙에 많아서 영어로 번역된 글만 해도 몇편이 있을 정도입니다. 보리스 소콜로프의 비판은 제 블로그에서도 몇년 전에 소개한 바 있습니다.(2차대전기 소련의 인명피해를 연구하는데 있어서의 문제점) 크리보셰프의 연구팀이 정리한 통계는 현재 이를 대체할 만한 자료가 없어 꾸준히 인용되고 있습니다만, 워낙 엉성하기 때문에 개별 작전단위로 많은 비판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포스팅에서 소개하는 사례도 그 중 하나입니다. 전투에서 발생하는 교환비 문제는 작전사 연구에서 있어 중요한 요소인데 소련-러시아의 공식 연구들은 이 점에서 심각한 하자가 있다는 로푸호프스키의 주장은 경청할 만 합니다.





******************************


(전 략)


작전에서 발생한 사상사 수치를 축소하는 사례는 비단 1941년의 패배한 작전에서만 나타나지 않는다. 크리보셰프Григорий Федотович Кривошеев의 연구집단은 심지어 소련군이 승승장구 하던 제2차대전 하반기의 작전에서도 독소 양측의 사상자 교환비가 너무 큰 경우에는 이를 은폐하기 위해 소련군 사상자를 축소했다. 예를 들어 1943년 7월 5일 부터 23일까지 소련 중부 전선군, 보로네지 전선군, 스텝 전선군이 참전한 쿠르스크 전략방어작전기의 통계를 살펴보자. 이 작전에는 오룔-쿠르스크 축선 방어작전과 벨고로드-쿠르스크 축선 방어작전이 포함된다. 크리보셰프의 책에서는 이 작전을 이렇게 설명한다.


“중부 전선군과 보로네지 전선군은 방어작전을 통해 독일 파시스트 군대 충격집단의 전투력을 소진시키고 그 진격을 저지했다. 이로서 오룔과 벨고로드-하리코프 축선에서 반격으로 이행하는데 유리한 조건을 만들었다. 쿠르스크 돌출부의 소련군을 격파하려는 히틀러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122)


소련군은 임무를 달성하기 위해 적군 보다 훨씬 많은 인명희생을 치르고 더 많은 무기와  물자를 상실했다. 그 상세한 내역을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크리보셰프가 정리한 쿠르스크 방어작전에서 붉은군대가 입은 손실을 살펴보자.(표 5.) 이 표를 보면 스텝 전선군의 사상자는 보로네지 전선군의 사상자와 거의 비슷해서 고작 90명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두 전선군의 사상자를 합친 뒤 딱 둘로 나눈게 아니냐는 느낌이 들 정도다. 사상자 숫자는 동일하고 두 전선군의 전투서열만 다를 뿐이다.


표5. 쿠르스크 전략방어작전 기간 중의 전투서열과 병력 및 사상자 통계
부대 및 작전 참여일수
작전 개시 당시 전투서열과 병력
작전에서 발생한 인명손실
부대
병력
완전손실
부상 및 질병
총계
일평균
중부전선군
(43.7.5~11)
41개 소총병사단
1개 대전차사단
4개 전차군단
5개 소총병여단
3개 독립전차여단
3개 요새지대
738,000
15,336
18,561
33,897
4,842
보로네지전선군
(전기간)
35개 소총병사단
1개 기계화군단
4개 전차군단
6개 독립전차여단
534,700
27,542
46,350
73,892
3,889
스텝전선군
(43.7.9~23)
-
-
27,452
42,606
70,058
4,670
총계
77개 사단
9개 전차 및 기계화군단
14개 여단
3개 요새지대
1,272,700
70,330
107,517
177,847
9,360
Россия и СССР в войнах XX века, p.285


크리보셰프의 연구집단은 스텝 전선군이 전투에 투입된 시점의 전투서열과 병력 통계를 의도적으로 누락하고 있다. 단지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스텝 전선군 사령부와 네 개(제5근위군, 제27군, 제47군, 제53군)의 야전군, 제5근위전차군, 제5항공군, 5개 전차군단, 1개 기계화군단, 19개 사단, 1개 여단이 증원되었다고 언급할 뿐이다.123) 크리보셰프는 스텝 전선군이 7월 9일 전투에 투입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아무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총사령부 예비대로 후방에 대기하고 있었던 스텝 군관구가 전선군으로 개칭된 것은 7월 10일이다. 당시 스텝 전선군은 전선에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후방에 있었다. 스텝전선군이 전투에 투입된 것은 7월 19일이었고 예하 부대들이 실제로 전투를 시작한 것은 7월 20일이었다.
보로네지 전선군의 방어 작전은 공식적으로 7월 23일 종료됐다. 이 날자는 1943년 7월 24일 최고사령부가 쿠르스크 전투의 결과에 대해 발표한 포고에 따른 것이다. 최고사령부 포고는 ‘7월 23일, 바로 어제 독일군이 오룔 지구와 벨고로드 북부 지구에서 쿠르스크 방면으로 감행한 7월 공세를 최종적으로 격퇴했다.” 즉 스텝전선군이 전투에 참여한 것은 불과 4일 밖에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크리보셰프의 통계에 따르면 스텝전선군은 전력의 13.8%를 잃었고 그 손실이 19일에 걸쳐 격전을 치른 보로네지 전선군과 같다는 것이다. 이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제5근위전차군과 제5근위군이 전투에 투입된 날자를 적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이 두 부대는 당시 보로네지 전선군 소속이었다. 스텝 전선군 사령관 코네프Иван Степанович Конев는 완편 상태인 자도프Алексей Семёнович Жадов의 제5근위군과 로트미스트로프Павел Алексеевич Ротмистров의 제5근위전차군을 차출당하고 그 대신 전력이 약화된 슈밀로프Михаил Степанович Шумилов의 제8근위군과 크류쵼킨Василий Дмитриевич Крючёнкин의 제69군을 배속받게 된 조치에 격렬히 반발했다. 이러한 병력 이동으로 스텝 전선군은 55,000명의 병력을 잃었다. 코네프의 참모장 카자코프Михаил Ильич Казаков에 따르면 스텝 전선군 사령부는 최고사령부로 부터 보로네지 전선군에 배속될 예정인 제47군 소속 사단에서 병력을 차출해도 된다는 허가를 받았다. 제47군도 병력이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전선이 소강상태로 접어든 3월에 제47군에서 병력을 차출했다. 이렇게 해서 약 10개 대대를 차출해 제69군의 병력을 보충할 수 있었다.
크리보셰프 연구집단은 쿠르스크 전략방어작전에 투입된 소련군의 총 병력을 계산하면서 스텝 전선군을 빠트렸다. 이 오류를 정정해보자. 1943년 7월 20일 스텝 전선군의 병력은 다음과 같았다. 편제표 상으로는 572,683명, 실제 병력은 451,524명이었다. 이중 제4근위군은 83,391명(편제상 83,385명), 제7근위군은 80,367명(편제상 118,919명), 제47군은 82,831명(편제상 93,807명), 제53군 72,035명(편제상 85,480명), 제69군 70,028명(편제상 111,562명), 제5항공군 16,316명(편제상 18,220명), 전선군 직할대 46,556명(편제상 61,310명).124) 7월에 제27군과 제47군은 전투에 투입되지 않았다. 7월20일 기준으로 스텝 전선군의 제1제대 공격부대로 투입된 제7근위군과 제69군, 제53군 등 3개 야전군의 총 병력은 222,400명이었다. 크리보셰프 연구집단은 스텝 전선군의 사상자를 집계할 때 7월 20일 부터 23일까지의 기간만 포함했다. 하지만 최고사령부의 문서를 보면 보로네지 전선군과 스텝 전선군 예하 부대들은 7월 23일 이후에도 공격을 계속했다.(제5근위전차군은 예외이다.) 7월 23일 이후에 발생한 인명 손실도 포함하는게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퇴각하는 적을 추격하던 사단들은 적의 공세 개시선인 벨고로드 선을 점령하려 했기 때문에 7월 말 까지도 전투가 계속됐다. 예를들어 제93근위소총병사단은 부대원들의 체력과 정신력이 고갈되어 7월 30일 공세를 중단했다. 이때 사단의 실 전투병력은 220명에 불과했다.125) 제5근위군은 7월 23일 이후의 작전에서 거의 8,000명을 잃었다. 이 수치는 이 부대가 7월에 입은 총 인명손실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것이다. 제69군은 14,000명을 잃었다. 7월 23일 이후에 발생한 인명손실은 어디에 넣어야 하는가? 그냥 아무데나 포함시키면 되는가?
크리보셰프 연구집단은 보로네지 전선군의 사상자 일부를 스텝 전선군 사상자에 포함시켜 두 전선군의 총 사상자와 완전손실을 비슷하게 만들었다. 쿠르스크 전투의 추이를 보면 두 전선군의 사상자 숫자가 동일할 수 없다는 점이 명백하다. 1943년 7월 24일 보로네지 전선군 참모장이 총참모부에 제출한 보고서를 보면 보로네지 전선군은 19일간의 작전에서 100,932명의 병력을 잃었다. 이것은 크리보셰프의 통계보다 27,040명이 더 많은 것이다. 게다가 독일군의 주력이 공세 개시선으로 퇴각한 7월 20일에서 31일 사이에 코네프의 스텝전선군은 34,449명의 사병과 장교를 잃었는데 이 수치는 크리보셰프의 팀이 집계한 스텝전선군 인명손실의 절반에 해당하는 것이다.126) 연방국방문서보관소에서 발굴한 사료를 분석한 결과 표6과 같이 완전히 다른 통계가 나왔다.(스텝전선군의 인명손실은 2와 5에 있다.)


표6. 다양한 자료 출처를 통해 집계한 쿠르스크 전략방어작전 기간 중 보로네지 전선군과 스텝 전선군의 인명손실
인명손실 유형
크리보셰프의 통계
(7월 5일~23일: 총19일)*
각 전선군 사령부의 보고내용**
작전 전 기간


7월 전체
7월 4일~16일
7월 16일~22일
(1)
(2)
7월 4일~22일
(3)
(4)
(5)
(6)
보로네지 전선군
완전손실
27,542
46,505
42,977
3,528
61,302
전사자

20,578
18,097
2,481
30,003
행불자

25,898
24,851
1,047
31,226
부상 및 질병
46,350
54,427
47,272
7,155
92,196
총계
73,892
100,932
90,249
10,683
154,352
스텝전선군

7월 9일~23일


7월 20일~31일
7월 전체
완전손실
27,452

-
8,657
8,748
전사자


-
6,167
6,258
행불자


-
2,490
2,490
부상 및 질병
42,606

-
25,683
25,792
총계
70,058
21,000
-
34,340
34,686
양 전선군 총계
143,950
122,000
-
45,023
189,038
*Гриф секретности снят : потери Вооруженных Сил СССР в войнах, p.188
**TsAMO RF, f.203, op.2843, d.301, 1. 255; f.240, op. 2785, d. 3,1.294ob.
***Ibid., f.203, op.2870, d.44, 11. 801, 840, 848, 931; f.426, op. 10753, d.8; 240, op. 2795, d.35, 1. 123; f. 7th Guard Army, op. 5317, d.11, 1. 376(필자가 직접 계산함. 이 표의 사상자 분류는 주요 범주만 표시한 것임.)


어째서 각 전선군의 사상자 통계가 이토록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인가? 7월의 사상자 보고를 살펴보자. 실제 사례를 보면 (그리고 크리보셰프도 인정한 바와 같이) 인명피해 유형과 계급별로 나누어 집계한 월간 사상자 보고가 훨씬 완전하고 정확하다.(표 6의 6번 항목) 게다가 보로네지 전선군과 스텝 전선군은 7월 말 까지도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월말이 되면 사령부는 훨씬 자세한 사상자 집계를 할 수 있게 된다.
월간 사상자 보고에 따르면 보로네지 전선군은 1943년 7월 1일 부터 30일까지 총 99,596명의 사병과 장교를 잃었다.127)  이 수치는 보로네지 전선군 참모장의 보고서에 있는 통계와 거의 일치한다. 그러나 보로네지 전선군의 사상자를 계급별로 집계한 통계가 있는 사료가 더 있다. 이 자료에 있는 보로네지 전선군의 사상자 숫자는 『기밀해제: 소련군이 전쟁에서 입은 인명손실Гриф секретности снят : потери Вооруженных Сил СССР в войнах』 에 실린 사상자보다  1.5배나 더 많다.(표 7을 참고하라.)


표7. 보로네지 전선군이 1943년 7월에 입은 인명손실

장  교
부사관
사  병
총  계
7월 1일~15일
7,648
31,574
70,877
110,099
7월 15일~8월 1일
2,911
10,035
25,294
38,240
총  계
10,559
41,609
96,171
148,339
비  율
7.1
28.1
64.8
100.0
TsAMO RF, f.203, op.2843, d.427, 1. 17.


이렇게 많은 차이가 생긴 이유는 스텝 전선군으로 배속 변경된 제7근위군과 제69군에서 7월1일 부터 15일까지 발생한 사상자(제 7근위군 23,390명, 제69군 26,267명, 총 52,657명)를 보고에서 제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텝 전선군의 문서에는 이 두 야전군이 배속된 시점 부터 사상자를 집계하고 있다. 이게 논리적으로 옳다. 코네프는 자신이 지휘하지도 않았던 부대가 입은 인명손실의 책임을 질 생각이 없었다.(코네프가 살아있었다면 크리보셰프의 통계에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결과 제7근위군과 제69군이 7월 5일 부터 20일까지 입은 인명손실은 보로네지 전선군과 스텝 전선군의 보고에서 누락됐다. 이런 통계를 신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오락가락하는 통계를 정리해 보자. 표8에 있는 두 전선군의 사상자 통계는 집계를 보다 명확하고 편하게 할 수 있도록 정리한 것이다. 제7근위군과 제69군의 사상자 통계는 두 시기로 나누었다. 7월 1일 부터 19일까지는 보로네지 전선군에 포함시켰고(7월 1일 부터 15일까지 집계한 수치 보다 훨씬 손실이 많다.), 7월 20일 부터 31일까지는 스텝 전선군에 포함시켰다. 이렇게 해야 두 전선군의 사상자 통계를 작전의 추이에 맞춰 보다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표 8을 참고하라.)
스텝 전선군에서 증원 받은 야전군을 포함할 경우 보로네지 전선군의 사상자는 사병과 장교 154,600명이 된다. 이것은 전선군 총 병력의 24%에 해당한다. 보로네지 전선군은 스텝 전선군 보다 4.5배 많은 인명손실을 냈다. 스텝 전선군은 총 병력의 7.7%에 해당하는 병력을 잃었다.128) 즉 크리보셰프의 통계는 7월 5일 부터 19일까지 제7근위군과 제69군이 입은 인명손실을 누락한 것이 맞다. 두 전선군이 7월 4일 부터 16일까지의 방어작전 기간 중 입은 일평균 인명손실은 최소 12,000명의 사병과 장교다. 이 수치는 표5에 정리된 수치 보다 세배나 많다.
그러므로 보충병력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보로네지 전선군과 스텝 전선군이 1943년 7월에 잃은 병력은 최소 190,000명에 달한다. 특히 행방불명자가 많았는데 그 숫자는 33,000명으로 총 인명손실의 20%에 달한다. 행방불명자의 대다수가 포로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독일 사료에 따르면 독일군은 7월 13일까지 24,000명의 소련군을 생포했고 7월 13일 부터 16일까지 10,000명을 더 사로잡았다.129) 소련군이 독일군 보다 더 많은 병력과 장비를 보유했음을 감안하면 이것은 엄청난 손실이다.
1943년 7월의 전투에서 가장 큰 인명피해를 입은 부대는 제69군이었다. 제69군은 40,500명을 잃었고 이중 18,800명이 완전손실이었다.(총 손실의 46%) 그리고 이 중에서 12,400명이 행방불명자였다.(총 손실의 31%) 제7근위군은 7월에 38,300명을 잃었다. 이 중 포로는 4,000명이었다. 이 두 야전군은 79,000명의 사병과 장교를 잃었다. 스텝 전선군에 배속되기 전 까지 입은 손실은 55,000명이고 이 중 14,500명(총 손실의 26%)가 행방불명자이다.130)
1943년 7월에 발생한 인명 손실 통계를 보다 정확히 산출함으로서 양 전선군이 7월 23일까지의 방어작전에서 입은 인명피해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계산 과정까지 설명하면 글이 매우 길어지므로 집계 결과만 바로 공개한다. 보로네지 전선군은 7월 한달간 154,600명의 병력을 잃었다. 방어작전 기간 중의 인명피해는 제27군과 제47군을 제외하고 144,000명이다. 이것은 배속된 예비대까지 포함할 경우 작전 시작 당시 보로네지 전선군 총병력의 22%가 된다. 일 평균 사상자는 7,579명으로 공식 통계보다 두 배나 많다. 스텝 전선군은 7월 20일 부터 23일 사이에 22,000명을 잃었는데 이것은 총 병력의 5%에 해당한다. 일 평균 인명손실은 5,500명이다. 두 전선군은 쿠르스크 돌출부 남부 전선에서 166,000명을 잃었는데 이 수치는 크리보셰프의 공식 집계보다 22,000명 더 많다.


표8. 1943년 7월 보로네지 전선군과 스텝 전선군의 인명피해*

부대
인명손실
총계**
완전손실
질병 및 부상
포로
기타
전사
실종
총계
부상
질병
보로네지전선군
5근위전차군(7월 6일 이후)
10,545
2,780
1,079
3,859
6,465
174
2
45
2근위전차군단
2,314
789
27
816
1,450
46

2
2전차군단(7월 8일 이후)
2,669
490
1,094
1,584
1,073
9

3
5근위군
23,848
4,881
1,070
5,951
16,981
790

126
6근위군
28,784
5,051
8,041
13,092
14,718
732
36
206
1전차군
12,929
3,517
2,145
5,662
6,847
378

42
40군
10,784
1,430
2,565
3,995
5,138
1,530
2
119
38군
3,813
460
271
731
1,856
1,171

55
27군****
1,362
28

28
56
1,188

90
47군****
1,254
34

34
52
1,122

46
2항공군
588
97
352
449
92
39

8
전선군직할대
706
101
20
121
243
328

14
제7근위군과 제69군을 제외한 전선군 총계
99,596
19,658
16,664
36,322
54,971
7,507
40
756
제69군(7월 1일~19일)
26,415
4,351
10,587
14,938
11,024
387
27
39
제7근위군(7월 1일~19일)
28,578
6,086
3,969
10,055
17,867
591
6
59
전선군총계
154,589
30,095
31,220
61,315
83,862
8,485
73
854
스텝전선군(7월 20일~31일)
69군
14,105
2,018
1,807
3,825
9,927
295
43
15
7근위군*****
9,713
2,222
102
2,324
7,066
286
2
35
53군
10,239
1,860
407
2,267
7,345
605

22
5군 및 전선군 직할대
392
66
180
246
57
60

29
전선군 총계
34,449
6,166
2,496
8,662
24,395
1,246
45
101
양 전선군 합계
189,038
36,261
33,716
69,977
108,257
9,731
118
955
*TsAMO RF, f.203, op.2870, d.44, 11. 801, 840, 848, 931; f.426, op. 10753, d.8; f.240, op.2795, d.35, 1. 123; f. 7th Guard Army, op.5317, d.11, 1. 37.
**사상자를 집계할때 병력 보충 현황은 제외했다.
***각 부대의 보고서에 따른 것이다.
****제27군과 제47군은 7월에는 전투에 투입되지 않았다.
*****제81근위소총병사단의 사상자 4,152명은 제7근위군에 포함시켰다.


쿠르스크 돌출부 남부전선의 방어작전에서 보로네지 전선군과 스텝 전선군은 독일군 보다 3.8배나 많은 인명손실을 입은 것이다.(44,000명 대 166,000명)131)


크리보셰프가 집계한 중부 전선군의 사상자 통계도 의심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크리보셰프는 중부 전선군이 총 병력의 4.6%인 33,897명을 잃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중부 전선군의 병력은 오룔 공세작전이 개시된 7월 12일 시점에 이미 92,700명이나 줄어든 상태였다.132) 다른 사료를 보면 이 시기 중부 전선군의 병력은 711,570명에서 640,975명으로 70,595명이 줄어있었고 전투병력만 꼽으면 510,983명에서 440,383명으로 70,600명이 줄어 있었다.133) 이 수치에 주목하자. 방어작전 기간 중 중부 전선군의 전투서열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2개 소총병여단이 전투서열에서 빠지고 새로 1개 전차여단이 배속됐다. 즉 편제 개편으로 인한 병력 변화는 최대 7,000명이다. 중부전선군은 7월 5일 부터 11일 사이에 7월 1일 기준 전선군 총 병력의 12%에 달하는 63,000명을 잃었는데 이것은 전투손실이 틀림없다. 이 수치는 크리보셰프가 제시한 인명손실 보다 29,000명이나 더 많은 것이다.
중부 전선군, 보로네지 전선군, 스텝 전선군 등 총 3개 전선군은 쿠르스크 방어작전 기간 중 229,000명의 병력을 잃었다. 이 수치는 크리보셰프의 『기밀해제』에 실린 수치 보다 85,000명이나 더 많은 것이다. 같은 시기 독일 중부집단군과 남부집단군의 병력 손실은 약 70,000명이다. 즉 양측의 교환비는 1:3.3(70,000:229,000)으로 독일군이 유리하다.134)


한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 소련군의 인명손실을 집계할때는 오직 연방국방문서보관소의 사료만을 활용하는 데도 이렇게 큰 차이가 발생하고 완전히 다른 결론이 도출된다는 점이다. 즉 붉은군대의 인명손실을 다시 검증해서 집계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대부분의 경우 사상자가 증가할 것이다.


2005년 말 제2차세계대전사 학회의 모임에서 크리보셰프는 ‘기존에 발표된 통계를 바로잡을 계획이 있느냐?’는 질문에 부정적으로 답했다. 우리 중 한 사람(로푸호프스키)은 이날 크리보셰프에게 프로호로브카 전투를 연구한 책을 증정하면서 그에게 『기밀해제』에 실린 각 전선군의 사상자 통계를 조작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던졌다. 『기밀해제』 집필에 참여한 연구자들은 통계를 조작하고 있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크리보셰프의 연구팀원 중 한 사람이 로푸호프스키의 주소를 받아 적은 뒤 반드시 답변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로푸호프스키는 아직도 크리보셰프의 답변을 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로푸호프스키의 연구도 크리보셰프의 연구와 동일한 사료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총참모부의 장교들과 사적으로 대화를 나누었을때 그들은 당시 총참모부 문서보관소의 소장과 기념사업회 회장을 비판하는 것은 헛수고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이들은 그들의 공적인 지위 때문에 붉은군대가 대조국전쟁에서 입은 인명손실 문제에 있어서 공식적인 노선을 지지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째서 붉은 군대의 사상자 통계를 이렇게 조작하는 것일까? 어째서 『기밀해제』의 집필자들은 스텝 전선군 사령부가 7월 20일 부터 31일까지 발생한 인명손실을 보고한 내용을 무시하는 것일까? 이들은 『기밀해제』 개정판에서 쿠르스크 전략방어작전을 다루는 분량을 두 배로 늘리고 ‘양군의 병력 구성’과 ‘작전의 추이’를 다루는 소절을 추가했다.135) 하지만 구판과 마찬가지로 스텝 전선군에 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고 있다. 신판에서도 스텝 전선군과 보로네지 전선군의 사상자 숫자는 동일하다. 보로네지 전선군과 스텝 전선군의 사상자 통계를 아무런 근거 없이 나눈 것은 보로네지 전선군이 막대한 인명손실을 입었기 때문에 독일군과의 교환비가 불리했다는 사실을 은폐하려는 의도라고 판단된다.
쿠르스크 방어작전에서 소련군은 독일군의 공세를 격퇴하기 위해 막대한 인명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이때문에 간혹 아군이 먼저 숫적인 우위를 활용해 전략 공세로 나가 독일군의 공세를 사전에 막는게 훨씬 나았을 것이며 전략적으로 방어를 취한것이 실책이었다는 의견이 나온다. 오늘날 사건의 결과를 아는 상태에서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우리는 방어를 취한 것이 실책이었다기 보다는 숫적인 우위를 살리지 못한 것 자체가 문제였다고 본다.
1968년 쿠르스크 전투 승리 25주년을 맞아 군사과학 학술대회가 열렸다. 전투의 결과에 대한 토론에서 이 당시의 정치적 환경을 고려하면 꽤 대담한 결론이 나왔다.


“쿠르스크 전투는 물론 대조국전쟁 시기의 다른 전투와 작전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사상자 문제를 주의깊게 조사할 필요성이 시급하다고 판단된다. 전투로 인해 발생한 사상자를 밝혀야만 쿠르스크 전투에서 각 야전군과 지휘관들이 수행한 역할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136)


『기밀해제』의 발간은 쿠르스크 전투의 승리 50주년에 맞춰 이뤄졌다. 그리고 1993년 7월 12일 전례 없는 행사가 열렸다. 소련의 적국이었던 독일 군사사가들이 참여한 군사사 학술대회가 열린 것이다. 당시 독일연방군사사 연구소의 연구원이었던 역사학 박사 칼 하인츠 프리저Karl-Heinz Frieser 중령을 필두로 한 독일 연구자들이 학술대회에 참석했다. 프리저 중령은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과 사료들을 소개했다.137)
독일에서도 쿠르스크 전투 50주년을 기념해 유사한 학술행사를 기획했다. 크리보셰프의 연구집단이 독일 학자들과의 논쟁에 대비해 쿠르스크 방어작전에 관한 내용을 손질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때문에 『기밀해제』 집필진은 스텝 전선군과 그 손실에 대한 언급을 회피한 것이다. 군사백과사전의 신판에도 스텝 전선군이 쿠르스크 돌출부 방어작전에서 수행한 역할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방어 전투 기간 중 보로네지 전선군과 중부 전선군 예하 부대들은 적 충격집단을 소모시켰다. 독일군은 공세 기간 중 100,000명의 병력과 1,200대의 전차, 850대의 야포와 박격포, 1,500대 이상의 항공기를 잃었다.”138) 독일군의 손실을 어떤 자료로 집계한 것인지는 일절 언급이 없다. 하지만 이렇게 단순한 날조를 통해 양측의 교환비를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맞췄다. 중부 전선군과 보로네지 전선군은 크리보세프의 집계에 따라 107,800명을 잃었고 독일군은 100,000명을 잃었다. 속편하게도 이런 통계를 들고 국제학술대회에 나간 것이다.


독일 잉골슈타트Ingolstadt에서 열린 학술대회에 참석했던 러시아 연구자 한 명은 쿠르스크 전투 당시 양측의 교환비는 4.3:1로 독일군이 우세했다고 평가했다. 독일군의 공세 단계에서는 2:1로 독일군이 우세했고 아군의 반격 단계에서는 6:1로 소련군이 불리했다는 것이다.139) 아군의 반격 단계에서의 손실 추정치는 스텝 전선군의 사상자를 비정상적으로 높게 평가한 것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물론 쿠르스크 전투에서 발생한 인명손실을 축소한 것은 1941년의 패배에서 입은 인명손실을 축소한 것에 비하면 약과다. 하지만 이 경우 크리보셰프 연구집단의 정치적 편향성과 대조국전쟁의 극적인 전환점인 쿠르스크 전투의 실상을 날조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크리보셰프 연구집단은 인명손실 뿐만 아니라 무기와 물자의 손실도 날조하는 일관성을 보여줬다. 보로네지 전선군 사령관 바투틴Николай Федорович Ватутин 장군은 보고서에서 보로네지 전선군이 1,387대의 전차와 33대의 자주포를 잃었다고 밝혔다. 한편 보로네지 전선군 참모부는 7월 5일 부터 23일까지 전선군이 전차 1,571대와 자주포 57대를 잃었다고 보고했다.140) 그런데 크리보셰프의 연구를 보면 중부 전선군, 보로네지 전선군, 스텝 전선군을 합친 손실이 전차와 자주포 1,614대에 불과하다141) 이건 보로네지 전선군이 잃은 기갑차량 숫자에 지나지 않는다! 한편 붉은군대 기갑총국의 7월 23일자 보고서를 보면 보로네지 전선군은 총 2,924대의 전차 중 1,254대를 잃었다.(이것은 증원된 전차 부대까지 포함한 수치이다.) 또 다른 문서를 보면 보로네지 전선군은 7월 5일 부터 13일까지 1,223대의 전차를 잃었다고 되어 있다.(만약 이 문서가 사실이라면 보로네지 전선군이 그 다음주에 입은 전차 손실은 고작 31대 밖에 안되고, 이것은 제5근위전차군의 손실통계와도 맞지 않는다.)
7월 17일 기갑총국 부참모장 자예프Дмитрий Иванович Заев 대령은 보로네지 전선군이 7월 5일 부터 15일까지 890대의 전차를 잃었다고 보고했다.(전차와 자주포를 모두 합친 것으로 추정된다.)142) 자예프는 제5근위전차군의 전차 손실을 누락한 것으로 추정된다. 로트미스트로프의 제5근위전차군이 입은 손실(전차와 자주포 334대)을 여기에 더하면 비슷한 수치가 나온다. 1,224대 또는 1,254대의 손실이다. 보로네지 전선군의 전차 손실이 1,254대라고 치면 7월 20일 기준으로 3개 전선군은 1,900대의 전차와 자주포를 상실했다고 볼 수 있다. 보고서들에 기록된 보로네지 전선군 손실의 평균치(전차와 자주포 1,500대)와 독일군의 전차 손실(320)을 비교하면 쿠르스크 돌출부 남부전선에서 양군의 기갑차량 교환비는 4.7:1로 독일군이 우세하다.143)
1993년 9월 잉골슈타트에서 열린 제35회 국제군사사학회에 참석했던 소련 대표 중 한명인 벤코프 대령(총참모부 문서보관소 소장 겸 추모사업회의 회장)은 크리보셰프 연구팀의 통계를 인용했다. 그는 보로네지 전선군이 890대의 전차를 잃은 반면 독일 남부집단군은 2,644대의 전차와 35대의 자주포를 잃었다고 주장했다.(소련측 기록을 인용한 것이다.) 그리고 중부전선군은 7월 5일 부터 15일까지 651대의 전차와 자주포를 잃었지만 같은 기간 독일 중부집단군은 928대를 잃었다고 주장했다.144) 이 학술대회에 참가한 독일 연구자들이 이 ‘발견’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는 여러분의 상상에 맡긴다.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국방위원회 성원이자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였던 말렌코프Георгий Максимилианович Маленков가 이끄는 조사단이 제5근위전차군의 반격 실패와 막대한 손실의 원인을 조사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있다. 말렌코프 위원회가 보로네지 전선군을 조사한 수백쪽에 달하는 보고서는 현재 러시아 대통령문서고에 소장되어 있다.(이 문서고는 과거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 문서고였다.) 일반 연구자들은 이 문서고에 들어갈 수 없다. 왜 이 보고서는 아직도 기밀인가? 쿠르스크 전투에서 패배한 것은 독일군이고 승리한 것은 소련군이 아니던가? 즉 뭔가 숨겨야 할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바실례프스키Александр Михайлович Василевский가 스탈린에게 보고한 것 처럼 병력과 전차의 손실은 단순한 통계 문제가 아니다. 말렌코프 보고서에는 양군의 교환비가 큰 차이를 보인 원인이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공격자가 방어자 보다 세배 많은 손실을 입는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후략)


주 석
122) Rossiia i SSSR v voinakh XX veka, 2001, p.285.
123) Ibid.
124) TsAMO RF, f. 240, op.2795, d.38, 1. 1.
125) TsAMO RF, f.1262, op. 1, d. 28, ll. 2~7; d. 11, ll. 11~33. 소총병 사단의 전투 병력은 소총병 부대와 정찰대, 공병대를 합산한 것이다.
126)  Ibid., f. 240, op. 2795, d. 35, 1. 123.
127) TsAMO RF, f. 203, op. 2870, d.44, 1. 931.
128) 스텝 전선군의 병력은 1943년 7월 20일 기준으로 451,524명이었다.(편제표 상으로는 572,683명). 세부 내역은 다음과 같다. 제4근위군93,391명(83,385명), 제7근위군 80,637명(118,919명), 제47군 82,381명(93,807명), 제53군 72,035명(85,480명), 제69군 70,028명(111,562명), 제5항공군 16,316명(18,220명), 전선군 직할대 46,556명(61,310명) 이 통계의 출처는 TsAMO RF, f.240, op.2795, d.38, 1. 1.이다.
129) E. Manstein, Uteriannye pobedy(Moscow: ACT, 1999), pp.532, 535.
130) 각 야전군과 전선군의 구체적인 사상자 통계는 L. N. Lopukhovsky, Prokhorovka, Bez grifa sekretnosto, (Moscow: Iauza-Eksmo, 2008), pp.503~14를 참고하라.
131) 자세한 사항은 ibid., pp.521~3을 참고하라.
132) Grif Sekretnosti Sniat, pp.188, 189.
133) Russky arkhiv: Velikaia Otechestvennaia. Kurskaia bitva. Dokumentry i materialy. 27 marta-23 avgusta 1943 g., Vol. 15(4-4) (Moscow: TERRA, 1997), pp. 394, 395, 401.
134) 자세한 사항은 Lopukhovsky, Prokhorovka, Bez grifa sekretnosto, p.524~5를 참고하라.
135) G. F. Krivosheev, V. M. Andronikov, P. D. Burikov, et al., Rossiia i SSSR v voinakh XX veka. Kniga poter’ (Moscow: Veche, 2010), pp.299~301.
136) 자세한 사항은 Lopukhovsky, Prokhorovka, Bez grifa sekretnosto, p.549를 참고하라.
137) K. H. Frieser, Paper: ‘The German Offensive against Kursk. Illusions and Legendes.’
138) Voennaia entsiklopediia, Vol.4 (Moscow: IVI, 1999), p.361.
139) N. M. Ramanichev, ‘Bitva pod Kurskom. Doklad na simpoziume v Ingol’shtadte’, Vortrage zur Miltärgeschichte, Vol.15.(Hamburg, Berlin, Bonn; Verlag E. S. Mittler und Sohn: 1996), p.62.
140) TsAMO RF, f. 236, op.2673, d.6, 11. 48~51; f.203, op.2843, d.301, 1. 204.
141) Russia and the USSR in Wars of the 20th Century, 2001, p.485.
142) K. H. Frieser, ‘Schlagen aus der Nachhand- Schlagen aus der Vorhand. Die Schlachten von Charkov und Kursk’ Vortrage zur Miltärgeschichte, Vol.15., p.129, 주석 57.
143) 자세한 사항은 Lopukhovsky, Prokhorovka, Bez grifa sekretnosto, pp.488~92, 501, 502를 참고하라.
144) I. N. Venkov, ‘Doklad na simposiume v Ingol’stdte’, Vortrage zur Miltärgeschichte, Vol.15., p.2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