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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7월 7일 월요일

제2차 세계대전시 미육군 보병병과 인력 수급과 사회적 불평등에 관한 연구

 독립 연구자인 존 리드(John S. Reed)가 2024년에 발표한 논문 The Infantry's "Problem of Quality": Classification and Assignment to MOS 745, Rifleman, 1942-1945를 읽었습니다. 이 논문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육군의 병과별 인력수급 구조 때문에 보병 병과에는 사회적으로 교육과 소득 수준이 낮은 인력이 많이 배치되었고 이때문에 보병의 전투력에 악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지적되었고, 전쟁 직후 전훈 분석 과정에서도 제기되었기 때문에 완전히 새로운 주장은 아닙니다. 그 유명한 마르틴 판 크레벨트(Martin van Creveld)의 연구 Fighting Power에서도 이 문제를 제기했지요. 하지만 1980년대 이후 미국에서 나온 제2차 세계대전의 미군을 다루는 유명 저작들이 이 당시 미군을 이상적인 시민군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강해졌습니다. 이런 저작들은 대중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죠. 이 연구의 저자 존 리드는 리 케넷(Lee Kennett), 존 맥마너스(John C. McManus), 피터 킨즈배터(Peter S. Kindsvatter), 릭 애킨슨(Rick Atkinson) 같은 작가들에 비판적입니다.

 필자는 미국이 전쟁에 참전한 직후 부터 1944년 초 까지는 미육군 지상군(Army Ground Force), 그 중에서도 보병에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의 인력이 배치되어 전투효율성을 떨어트리는 요인이 되었지만 1944년 이후 점진적으로 우수한 인력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문제가 개선되었다고 봅니다. 전쟁 초기~중기에 이렇게 인적자원이 불균등하게 배분된 원인은 미육군의 항공군(Army Air Force)과 근무지원군(Army Service Force)에 우수한 인적자원이 우선적으로 배치되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연합군이 유럽 본토 침공을 준비하면서 제공권 장악을 위해 항공군을 크게 강화했고 1944년 초 까지는 질이 높은 인적자원이 항공군에 배치되었습니다. 항공군은 기술집약적인 특성상 질이 낮은 인력을 쓰기가 곤란하죠. 마찬가지로 전투지원 병과로 구성된 육군 근무지원군도 질이 높은 인적자원을 필요로 했습니다. 행정과 보급 같은 임무를 수행하려면 일정한 교육수준이 필요하지요. 그리고 근무지원군 병과는 특성상 민간 사회의 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병과가 많습니다. 미육군공병단은 1,000명당 725명 꼴로 민간 사회의 직업에 대응하는 보직에 배치되었고 미육군수송단은 1,000명당 788명, 미육군통신당은 1,000명당 579명이었습니다. 반면 보병 병과는 순수하게 전투를 수행했기 때문에 민간 사회의 직업에 대응하는 보직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니 기술을 가지고 있는 우수한 인적자원은 항공군과 근무지원군에 먼저 가고 남은 인력이 지상군, 그 중에서도 보병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이건 통계로 입증이 됩니다. 전쟁 기간 중 미육군이 병과분류를 위해 시행한 육군일반분류평가(AGCT, Army General Classification Test)는 5개 등급으로 나누었습니다. 1943년에 미육군 항공군에 보충된 병력의 41.7%는 AGCT 1등급과 2등급이었습니다. 반면 보병 병과는 1등급과 2등급의 비중이 30.2%였습니다. 반면 미육군 항공군에는 4등급과 5등급이 27%였으나 보병 병과는 37.2%였습니다.

 이때문에 1943년 부터 1944년 초 까지 미군 보병의 전투효율성은 낮은 편이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육군 지상군 사령관 맥네어(Lesley J. McNair) 장군은 AGCT 점수가 높은 인력을 지상군에 보충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1944년 초 까지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미육군은 보병 보충병의 질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보병보충훈련소(IRTC, Infantry Replacement Training Centers)의 훈련 과정을 강화했습니다. 하지만 1944년 여름 부터 유럽과 태평양 전선의 반격이 본격화되면서 사상자가 급격히 증가했고 이중 대다수가 육군 보병이었습니다. 1944년 말이 되면 방공포병과 대전차포병 등 상대적으로 여유있는 병과를 보병으로 전환하는 것도 한계에 달합니다. 필자는 그결과 1945년 초 부터는 AGCT 점수가 높은 인력도 보병에 배치되는 비율이 높아지게 됐다고 주장합니다. 즉, 미육군의 사회적 불평등이 이상한 방식(?)으로 해소됐다는 결론입니다.

 비교적 재미있긴 하지만 많은 내용이 기존의 연구에서 다루었던 이야기 입니다. 하지만 '시민군'의 신화를 팔아먹는 대중서에 대한 비판으로서 나쁘지 않습니다.

2019년 11월 19일 화요일

제2차대전 말기 재만 조선인들의 일본군대 체험담

강용권이 조선족들의 증언을 엮어낸 구술자료집 『강제 징병자와 종군위안부의 증언』 을 읽다보니 제2차대전 말기 일본 관동군에 징집된 사람들의 회고담이 눈에 들어옵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제2차대전 중반 부터 관동군에서 전투력이 있는 사단들이 태평양이나 일본 본토 등으로 차출되다 보니 1944년 이후 급히 편성된 관동군 사단들은 전투력이 매우 부족한 편이었습니다. 당시 일본군에 입대했던 조선족들의 증언에도 이런 실정이 잘 드러납니다. 

이 책은 비매품이라 구하기가 좀 까다로운 편이지만 간혹 헌책방에 매물이 나오기는 합니다. 흥미로운 증언이 많아서 이 시기에 관심을 가지신 분이라면 읽어보실 만 합니다.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읽은 경험담 몇개를 발췌해 봅니다.


1944년 봄부터 적령 청년들을 신체검사 시킨 후 1, 2, 3기생으로 나누어 지방 훈련을 시켰다. 그중에서 1기생을 위주로 서란현 막석훈련소에 가서 3달씩 정식 훈련을 받게 하였는데 나는 1945년 3월에 막석에 가서 6월에 돌아왔다. 그토록 바라지 않던 '빨간 딱지'가 나에게도 날아왔다. 1945년 8월 6일에 나는 왕청현 대흥구역에서 일본군에 나가는 열차를 탔다. 2천여명의 팔팔한 생명은 일제가 내민 제2차 세계대전의 밑천으로 충당되어 생사를 가늠 못할 운명을 지닌 채 도문, 장춘, 할빈을 거쳐 해랄까지 갔다. 그 속에는 50명 가량의 조선족 처녀들도 있었는데 그들에겐 어떤 불운의 그물이 덮씌우겠는지? 
기차가 치치할을 지나 찰란툰에까지 갔을 때는 벌써 전쟁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동쪽으로 밀려오는 피난민들이 끝이 없었다. 일본 가족들이 있는가 하면 양떼를 몰고 오는 몽고족이나 아이들을 외바퀴 짐 위에 싣고 오는 한족들, 오로지 동쪽으로 동쪽으로 밀려 나왔다. 다만 우리를 태운 열차만이 대가리를 서쪽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찰란툰역에서 떠날 줄 모른다. 폭격에 철길이 파손되어 수리하는 중이란다. 반나절이나 멈춰 섰던 열차가 떠나기 바쁘게 소련 비행기가 따라오며 폭격을 들이댔다. 그럴 때 마다 기차는 멈춰 섰고 차안의 사람들이 모두 내려 철길 옆 풀밭에 숨었다. 이렇게 기차에서 내려 대피하기를 서너 번 하고서야 해랄까지 가게 되었는데 해랄역은 몽땅 내려앉았다. 해랄역과 3, 4리 떨어진 곳에 와서 내려 걸어 들어갔다. 해랄 시가의 곳곳에 지금도 불길이 치솟았고 큰 건물로는 성한 것이 업었다. 폭격은 계속되었고 밤에도 조명탄을 걸어놓고 일본 군사들의 이동을 저지하였다. 
신병들은 각기 부대에 편입되었다. 나는 산포병 118부대에 귀속되었다. 명색은 포병부대인데 산포 한 문도 없었으며 우리에게 발급한 무기란 날창(총검) 하나에 수류탄 두개 뿐이었다. 
우리가 해랄에 도착했을 때는 전 부대가 해랄 시가의 병영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가는 때였다. 일본군이 병영을 떠나기 바쁘게 병영과 창고에 불을 질렀다. 자동차도 휘발유를 치고 불을 붙였다. 소련군에게 하나도 넘겨주지 않는다는 훼손 정책의 발로이다. 모든 건물마다 불기둥이 솟았고 군수품 창고에서 탄알이 튀었다. 이는 마치 일제의 수치스런 패망을 예고하는 조잡한 울부짖음 같았다. 
일본군이 마지막 부대가 산에 채 오르기 전에 소련군 탱크 부대가 끝이 보이지 않게 밀려들었다. 그들은 산에 대고 난사하면서 안하무인격으로 들어왔다. 해랄시를 점령하고 동쪽으로 계속 전진하였다. 일본군은 해랄 주변 산에 파놓은 산굴과 숱한 군수품을 내버린 채 철퇴를 시작했다. 
산 아래 공로에는 소련군 탱크가 질주하고산 위에서는 일본군이 길도 없는 산림속을 뚫고 힘겹게 철퇴했다. 얼핏 보기에는 같은 방향으로 전진하는 같은 부대 같지만 실은 2차 대전의 적대국인 소련과 일본의 군대들이다. 소련 탱크 부대는 산 위의 일본군을 보면서도 '너희들은 내 입안의 사탕알이다'하는 격으로 거들떠 보지도 않고 앞으로 전진하기만 했다. 일본군은 기실 반포위 상태에 처했고 밤에 낮을 이어 철퇴하여도 소련 탱크 부대 속도의 몇 분의 일도 안 되었다. 휴식도 없이 일주일이나 연속으로 급행군한 일본군은 대흥안령에 까지 와서 철퇴를 멈추었다. 병졸들은 지칠대로 지쳤다. 
1945년 8월 6일에 입대한 김태진의 경험담, 강용권 엮음, 『강제 징병자와 종군위안부의 증언』, 해와 달, 2000,  92~93쪽.

전쟁말기 일본군에 동원된 부실한 병역 자원에 대한 묘사도 흥미롭습니다.

1944년부터 징병등기를 하고 지방훈련을 시작하였다. 나는 연령이 초과되어 생각지도 않았는데 나의 이름도 적혀 있었다. 알아본즉 중국의 민적에 원래의 나이보다 두 살 적게 적혀 있어 그만 1기생으로 그물에 걸렸다. 소학교 선생들은 지방훈련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1944년 9월에 서란현 막석훈련소에 가서 3달간 훈련한 후 1945년 3월에 정식으로 출정의 길에 올랐다. 천교령에서 기차를 타고 목단강, 할빈, 치치할, 백성자, 우란호트를 지나 알산에 도착하여 관동군 318부대에 편입되었다. 우리의 주둔지에서 중소국경이 5km 밖에 안되니 실로 최전선 이었다. 내가 속한 8중대에는 조선 청년이 6명 밖에 없었다. 나와 남청룡은 외따로 떨어진 급수소(給水所)의 일을 보았으므로 독립성이 많았다. 진종일 기계실을 떠날 수는 없지만 하는 일이 없으므로 심심하기만 했다. 배가 고픈 곳이 문제였다. 이곳엔 인가가 없었으므로 강냉이나 감자 같은 것을 구할 수 없기에 산열매나 풀뿌리 같은 것으로 먹이를 보충해야 했다. 
(중략) 
일제는 멸망의 벼랑 위에서 바둥거리며 최후 일전을 본토 보위전에서 벌여보려고 시도하였다. 이리하여 내가 속해 있던 318부대에서 지원병 360명을 보내기로 하였는데 그 속에 나도 들어 있었다. 앓고 있는 청룡이와 갈라지게 되었다.
360명 본토지원병 중에 조선 청년이 24명이었다. 지원병들을 완전 무장하고 기차로 우란호트, 백성, 장춘, 심양을 거쳐 본계에 와서 내렸다. 지원병의 집결지가 본계인 것 같았다. 우리 먼저 도착한 일본군도있었고 우리 후에 속속 모여들기도 하여 병력이 방대한 '일본 본토 지원연대'를 구성하였다. 할빈특구 기관장이 연대장을 맡았다고들 전했다. 
그런데 이 지원연대의 병사들을 보기만 해도 눈이 감길 지경이었다. 알찬 병사들이라고는 318부대에서 파견한 360명이고 그 외는 모두 재향군인들 속에서 긁어모았기 때문에 머리가 시허연 50넘은 영감들, 코물 건사를 잘 못하는 병자들, 심지어 눈먹쟁이와 절름발이도 있었다. 줄지어 걸을 때면 지원병이라 하기 보다 큰 전투를 겪고 난 포로병 같았다. 
1945년 3월 10일에 입대한 황기섭의 경험담, 강용원 엮음, 위의 책 108~10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