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18일 목요일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31-4호에 실린 H. G. W. Davie의 논문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최신호인 31-4호에 흥미로운 제2차대전 논문이 한 편 실렸습니다. H. G. W. Davie라는 연구자의 'Logistics of the Combined-Arms Army- Motor Transport'라는 글 입니다. H. G. W. Davie는 이미 같은 저널에 독소전쟁시기 철도망의 역할에 관한 연구를 기고한 바 있습니다. 이 연구는 제2차대전기 소련군의 차량화 수준과 군수보급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매우 흥미로운 주제입니다.

필자가 가장 먼저 주목하는 문제는 소련군의 낮은 차량화 수준입니다. 소련군의 차량 보유량은 전쟁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늘어났습니다. 1942년 1월 1일 소련군이 보유한 차량은 31만 8,500대였습니다. 1942년 동안 차량 증가분은 소련 국내 신규생산분이 2만 5천대, 민간차량 징발분이 9만대, 렌드리스 차량이 3만 900대였습니다. 1943년 1월 1일에 소련군이 보유한 차량은 40만 4,500대로 증가합니다. 그리고 같은해 증가분은 신규생산 4만 600대, 민간차량 징발분 1만 2,400대, 렌드리스 차량 8만 3,700대 였습니다. 1944년 1월 1일 차량 보유량은 49만 6,000대로 늘어납니다. 그리고 같은해 신규생산 3만 6,700대, 렌드리스 차량 12만 8,800대 등의 증가에 힘입어 1945년 1월 1일 소련군의 차량 보유량은 62만 1,200대가 됩니다. 매우 인상적인 규모입니다.

하지만 소련군의 병력 규모를 고려하면 사정이 조금 달라집니다. 전쟁이 발발할 당시 소련군의 차량 1대당 병력비율은 1:28이었습니다. 그러나 막대한 차량 손실과 병력 증가로 인해 전쟁 기간 중 차량 1대당 병력비율은 정체된 상태였습니다. 렌드리스 차량이 대량으로 보급된 1944년 1월 무렵에야 차량 1대당 병력비율이 1:24가 됩니다. 차량 규모의 증가로 1945년에는 차량 1대당 병력 비율이 1:21까지 낮아지기는 하지만 미군이나 영국군과 비교하면 차량화 수준이 좋은 편이 아니었습니다. 영국군은 1945년 6월 기준으로 차량 1대당 병력 비율이 1:7.7이었습니다. 야전부대로 한정하면 차량화 수준이 더욱 떨어지게 됩니다. 소련군도 독일군 처럼 기계화부대와 독립지원부대(특히 포병) 중심으로 차량을 집중 배치했기 때문입니다. 소련군의 일반 보병부대는 같은 시기 독일군 보다 특별히 나을게 없는 차량화 수준을 보였습니다. 소련군의 소총병사단에서 차량화된 부대는 사단 직할 대전차포 대대, 122mm 곡사포 대대, 중박격포 대대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필자는 제7근위군의 사례 분석을 통해 소련군의 1개 야전군의 차량 보유량이 영국군 1개 보병사단 보다 못한 수준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이 때문에 소련군도 독일군 처럼 마필에 크게 의존했습니다. 1945년 1월 기준으로 소련군은 105만 4,200마리의 마필을 보유했고 이 중 야전군이 보유한 마필이 79만 1,600마리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소련군은 1944~45년 사이에 매우 높은 수준의 작전 템포를 달성했습니다. 비수아-오더 작전에서 소련군의 전차군은 1일 평균 45~75km를 진격했고 보병과 마필 중심의 제병협동 야전군은 1일 평균 30km를 진격했습니다. 저자는 소련군이 부족한 보급 능력에 맞춰 보급 소요를 책정하고 부족한 물자를 현지조달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다고 봅니다. 예를들어 1943년 8월 루먄체프 작전에서 스텝전선군은 주공축선의 주력부대에 전선군 직할 수송부대의 역량을 집중하고 부차적인 지역은 야전군 및 사단의 자체적인 수송역량으로 보급소요를 해결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제한된 수송역량도 탄약과 유류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8월 3일 부터 23일까지의 작전 기간 중 스텝 전선군의 보급부대는 총 42,972톤의 물자를 수송했는데 이 중 탄약이 2만 7,887톤, 연료가 7,906톤, 기타 보급품이 7,949톤이었다고 합니다. 단순히 중량으로 따지면 탄약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걸 알 수 있습니다. 비슷한 양상이 비수아-오더 작전 당시 제8근위군의 사례에서도 나타납니다. 제8근위군은 식량 조달을 노획하거나 현지 징발에 의존하면서 탄약 및 유류 보급에 수송역량을 집중해 높은 진격속도를 유지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주장은 소련군의 낮은 보급능력과 과도한 약탈을 일리있게 설명해 준다고 봅니다. 발레리 자물린 등의 연구자는 소련군이 낮은 보급능력으로 인해 전쟁 중후반까지도 영양실조와 질병에 시달리는 경우가 잦았다는 사실을 밝혀낸 바 있습니다. 전투에 필수적인 탄약과 연료에 수송역량을 집중하고 병사의 생활에 필요한 보급소요를 최소화 하는 경향이 일반적이었다면 이런 문제들을 충분히 설명 가능합니다. 굉장히 재미있는 논문이라 시간이 되면 한번 번역해 보고 싶네요^^

2018년 10월 7일 일요일

러시아의 국가 범죄 은폐 의혹?


Dig Near Stalin-Era Mass Grave Looks To Some Like Kremlin Dirty Work

Russian digs accused of covering up Stalinist crimes

9월에 있었던 AFP 통신의 보도에 따르면 러시아에서 제2차세계대전 당시 소련군 유해 발굴작업을 명분으로 소련의 학살 범죄를 은폐하는 공작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의혹이 있다고 합니다.

러시아 정부에서는 제2차대전 중 핀란드군이 학살한 소련군 포로 유해를 발굴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전쟁 중 핀란드군이 포로수용소에 수감된 소련군 포로들을 대량 학살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발굴을 주도하고 있는 군사사학회(РОССИЙСКОЕ ВОЕННО-ИСТОРИЧЕСКОЕ ОБЩЕСТВО [РВИО])는 문화부장관 블라디미르 레딘스키와 우익 정치인 드미트리 로고진이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어용단체'입니다. 실제로 이 단체의 활동에 대해서는 러시아 내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있지요.

러시아 인권운동단체들은 이 발굴이 스탈린 시절 소련 정부가 자행한 정치범 학살을 은폐하려는 공작이라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푸틴 집권 이후 퇴행적이고 쇼비니즘 적인 분위기에서 소련 시기를 미화하려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정부의 주도 하에 적극적으로 역사 왜곡에 나서는 분위기는 매우 우려스럽군요. 카틴 학살 같이 소련의 전쟁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다른 국가의 범죄라고 날조공작을 한 사례도 있습니다. 그러니 만큼 러시아 정부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찝찝함이 느껴지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