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March 29, 2017

레마겐 교두보 전투당시 미3군단장 밀리킨 소장 해임에 관한 잡설

포스팅 “패튼의 전과 과장에 대한 하지스의 비난”에 문기야님이 달아주신 댓글을 읽으니 레마겐 교두보 전투 당시 미3군단장 밀리킨 소장이 해임된 사건에 관해 이야기를 하고 싶어지는군요.


먼저 사건의 개요를 살펴보는게 좋겠습니다. 미육군 공간사 The Last Offensive는 레마겐 교두보를 둘러싼 전투와 밀리킨 소장John Millikin의 해임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1군사령관 하지스 장군은 작전 초기 부터 레마겐 철교와 교두보를 담당한 제3군단장 밀리킨 장군의 지휘를 불신하고 있었다. 하지스와 제1군 사령부의 참모장교들은 라인강 양안에 배치된 미군부대에 대한 통제가 형편없으며 라인강 동안의 미군부대 배치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부족하다고 격렬하게 비판했다. 3월 9일 아이젠하워 장군이 라인강 동안의 교두보를 점진적으로 확대하라는 명령을 내렸음에도 하지스 장군은 제3군단의 진격이 느리고 독일군이 육안관측으로 레마겐 철교에 포격을 유도할 수 없도록 공세를 펼치지도 못하고 있다며 짜증을 냈다. 

밀리킨 장군은 3월 9일 제9기갑사단장 레오나드 장군에게 레마겐 철교 일대의 모든 군사활동을 통제하도록 하고 라인강 동안에 배치된 미군부대는 모두 제9보병사단장 크레이그 장군이 관할하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하지스 장군의 불평은 끊이질 않았다. 제3군단은 얼마전 까지 패튼의 제3군 휘하에 있었기 때문에 제1군 사령부는 밀리킨과 원활한 관계가 아니었다. 하지스와 그의 참모진은 공공연하게 “레마겐 교두보 일대의 지휘를 7군단장 콜린스 장군에게 넘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밀리킨 장군이 직면한 문제는 심각했다. 그는 직접 레마겐 다리까지 나가 지휘했지만 라인강 동안에 배치된 미군부대는 시간에 맞춰 정확한 보고를 하지 못했다. 이렇게 우발적으로 실시된 작전의 경우 초기에는 작전에 필요한 물자와 지원 부대를 충분히 확보할 수 없었다. 특히 통신부대가 부족했다. 차량통행이나 포격으로 레마겐 철교에 부설한 전화선은 자주 끊어졌고, 파편이나 라인강의 빠른 물살 때문에 강을 따라 가설한 전화선도 제 기능을 못했다. 레마겐 철교가 혼잡했기 때문에 연락장교들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고 무전통신도 큰 도움이 되질 못했다. 

레마겐 교두보로 재배치된 보병부대들은 도착하는 대로 시급히 필요한 지구에 축차적으로 투입됐다. 심지어 연대단위 편성 조차 유지하지 않은채 투입하기도 했고 여러 사단의 부대들이 뒤죽박죽으로 섞이는게 다반사였다. 작전 자체가 짧은 시간동안 우발적으로 일어난데다 지형 문제까지 있는 상태에서 이런식으로 부대를 운용하니 문제는 더 커졌다.
밀리킨 장군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교두보를 신속하게 확장하는 것 보다는 체계적이로 점진적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3월 8일에 3단계에 걸쳐 교두보를 확장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제1단계는 레마겐 철교의 북쪽과 남쪽으로 2.5마일을 진격해 독일군이 더이상 철교를 소화기로 공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2단계에 확장의 목표는 독일군의 포병관측을 중단시키는 것 이었다. 마지막 3단계는 북쪽으로는 본Bonn, 남쪽으로는 안더나흐Andernach, 그리고 동쪽으로는 고속도로까지 진출해 독일군이 교두보를 더이상 포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목표였다.

(중략) 

밀리킨 장군은 교두보가 확대되는 경과를 바르게 파악하고 있지는 못했지만 교두보의 부대를 가장 효과적으로 운용하려면 란Lahn 강 유역과 프랑크푸르트Frankfurt-카셀Kassel 회랑으로 진격해야 한다고 판단해 군단 주공을 동쪽과 동남쪽에 두기로 했다. 이것은 앞서 브래들리와 아이젠하워 장군도 동의한 것 이었다. 밀리킨은 이렇게 해야 독일군이 레마겐 철교에 포격을 유도하는 것을 가장 빨리 중단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스 장군은 제3군단이 제일 먼저 북쪽으로 진격해 콜린스 장군의 제7군단의 도하점을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작전 4일차인 3월 11일까지도 이 점을 밀리킨에게 명확히 설명하지 못했다. 이날 밀리킨은 처음으로 철교를 건너 라인강 동안의 교두보로 갔다. 하지스는 3군단이 북쪽으로 진격해야 하며 주공을 이 방향에 두어야 한다고 몇 번 언급하기는 했지만 구체적인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물론 밀리킨은 이정도의 언급만으로 하지스의 의도를 이해했다. 그는 제78보병사단의 정면을 축소하고 제9보병사단의 대부분을 북동방향으로 진격하도록 했다. 다음날인 3월 12일 교두보 남쪽과 동남쪽을 인계받기 위해  제99보병사단의 주력이 도착했다. 밀리킨은 제99보병사단의 부대들을 원 소속사단으로 복귀시키도록 했다. 하지만 이미 북쪽으로 신속히 진출할 수 있는 기회는 사라졌다.

(독일군의 반격에 대한 서술은 생략)

바이어라인Fritz Bayerlein 장군은 제130보병사단을 공격에 사용할 수 없다면 미군에 대한 효과적인 역습을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라인강을 건넌 미군이 레마겐 교두보에 증원군을 더 투입한다면 미군을 격퇴할 만한 병력을 동원하는게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모델 원수의 판단 덕분에 밀리킨 장군이 주공을 투입한 지구에서 미군의 진격은 둔화됐다. 이때문에 하지스 장군은 계속해서 밀리킨의 지휘방식에 대한 불만을 표출했다.

(독일군의 반격에 대한 서술은 생략) 

그동안 레마겐 교두보는 꾸준히 확장됐지만 그 속도는 느렸다. 하지스 장군은 밀리킨 장군의 지휘방식을 여전히 불신했다. 그는 3월 15일에 제12집단군사령관 브래들리 장군을 만나 밀리킨을 해임하는 방안을 의논했다. 

“레마겐 교두보에서 싸우고 있는 우리 장병들은 매우 존중합니다. 하지만 지휘관이 문제입니다.” 

브래들리는 하지스의 주장에 동의하고 밀리킨의 후임을 알아보라고 한 뒤 제1군 사령부를 떠났다. 이틀 뒤 제90보병사단을 지휘했던 밴 플리트 소장이 제1군 사령부에 도착해 제3군단장에 임명됐다. 하지스는 오후 3시가 되기 조금 전 밀리킨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쁜 소식이 있소.” 

그리고 하지스는 밀리킨이 제3군단장에서 해임됐다고 통보했다. 밀리킨은 하지스가 말을 마칠때 까지 기다렸다. 

“사령관님. 저도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레마겐 철교가 무너졌습니다.” 

Charles B. MacDonald, The Last Offensive, (Center of Military History, US ARmy 1993) , pp.223~229.



이 일화를 보면 하지스라는 인물은 꽤 주관이 강한 인물이었던 듯 합니다. 밀리킨 장군이 애초에 제3군단 주공을 동쪽과 동남쪽으로 한 것은 제12집단군사령관 브래들리 장군의 의도였기 때문입니다. 하지스가 상급 사령부의 의도에 반하여 자신의 의견을 관철한 것이죠. 미육군 공간사의 서술을 보면 확실히 밀리킨 소장이 억울한 측면이 있습니다.

밀리킨 소장의 해임이 결정된 3월 15일에 있었던 브래들리와 하지스의 회의에 대해서 조금 더 설명을 하는게 좋겠습니다. 1945년 3월 15일자 제1군 사령관 일지는 이 사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오경 브래들리 장군은 참모장 앨런 장군을 대동하고 제1군사령부를 방문했다. 브래들리 장군은 어제 대장으로 진급했지만 아직 별 세개만을 달고 있었다. 브래들리 장군과 하지스 장군, 그리고 참모진은 사령관 집무실에서 한시간 반 가량 비공개로 회의를 한 뒤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외출했다. 브래들리 장군은 라인강 서안에서 독일군의 저항이 모두 끝나기 전에는 교두보를 동쪽으로 확대하는데 힘을 쏟아서는 안된다는 연합군최고사령부SHAEF의 공식 방침에 동의한다고 말했다. 하지스 장군은 이 방침에 반대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몽고메리의 제21집단군이 연합군최고사령부에 전화를 걸어 북쪽에서 대규모 도하를 하기 전에 ‘양동작전’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건을 두고 이야기를 나눴다. 몽고메리가 전화를 걸고 5분 뒤에 미 제1군이 라인강을 도하해 교두보를 확보했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그는 더이상 양동작전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참모장 앨런 장군은 패치 장군이 패튼 장군에게 보낸 전문 이야기를 꺼냈다. 패치와 패튼은 서로 즐겁게 장난을 쳤다. 패치 장군은 “제3군이 라인강에 꼴지로 도착한 것을 축하함. 그럴 줄 알았음.”라는 전문을 보냈다. 패튼 장군은 답신으로 “라인강을 첫 번째로 도하할 부대가 전문을 보내줘 정말 감사함.” 그리고 브래들리 장군은 독일 장군 세명이 항복하기 위해 미군 부대를 찾아 돌아다녔다는 농담을 꺼냈다. 독일 장군들은 대공포병들을 발견하고는 그들에게 적의가 없으며 항복하겠다는 뜻을 보이려고 루거 권총을 땅바닥에 던졌다. 그러자 미군들은 루거 권총을 얻으려고 득달같이 달려들었지만 장군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고. 

우리는 연합군최고사령부가 레마겐 교두보 확대를 원하지 않았으며 기존에 세워둔 계획이 어그러졌다는 이유로 제1군이 라인강을 도하했다는 소식을 기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좋았던 분위기가 나빠졌다. 연합군최고사령부는 북쪽에서 라인강을 도하하는 쪽을 선호했고 우리 제1군이 확보한 교두보에 중점을 둘 의도가 없음이 확실했다.  

그리고 하지스 장군은 브래들리 장군과 밀리킨 장군을 해임하고 새로 제3군단장을 임명하는 문제를 상의했다. 두 사람은 밀리킨 장군이 유능하긴 하지만 돌발상황에 대응하는 능력이 떨어지고 하지스 장군이 직접 개입하기 전 까지는 레마겐 교두보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는 점에 동의했다. 밀리킨 장군은 패튼 장군 휘하에 있을때도 의견 충돌이 있었음이 확실하다. 그래서 패튼은 제3군단을 제1군에 떠넘긴 것이다. 새로운 제3군단장 후보로는 하몬Ernest N. Harmon, 밴 플리트, 개피Hugh Joseph Gaffey 등이 거론됐다. 하지스 장군은 하몬 소장을 선호했지만 브래들리 대장은 제15군 사령부가 하몬 장군의 인사이동에 찬성할지 의문이라고 답했다. 제3군단은 아직 하지스 장군의 의도대로 고속도로까지 진출하지 못했지만 0.5마일만 더 진격하면 되는 상황이다. 오늘 제99보병사단이 돌출부 남쪽에서 큰 성과를 거뒀다. (제9보병사단) 60보병연대는 로르샤이트Lorscheid를 점령했으며 (제9보병사단) 47보병연대는 적이 강력하게 방어하는 채석장을 점령하고 장교 2명과 사병 100명을 포로로 잡았다. 교두보 전체에 걸쳐 약 2,000야드를 진격했다. 하지스 장군은 제9보병사단의 성과가 평소 사단의 실력에 미치지 못한다고 약간 불만을 표했다. 하지스 장군은 저녁에 이렇게 말했다. 

“레마겐 교두보에서 싸우고 있는 우리 장병들은 매우 존중합니다. 하지만 지휘관이 문제입니다.” 

William C. Sylvan and Francis G. Smith Jr.. Normandy to Victory: The War Diary of General Courtney H. Hodges and the First U.S. Army (The University Press of Kentucky, 2008) Kindle Locations 4619-4639.


이 일지에서도 하지스 장군이 상급 사령부에 상당한 불만이 있었음이 잘 나타납니다. 제1군이 라인강돌파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해야 하는데 영국군인 몽고메리를 정치적으로 배려하는 듯한 움직임에 불만을 나타내고 있지요. 그리고 최대한 점잖은 표현을 쓰고 있지만 제3군단장 밀리킨 소장에 대해서도 격렬한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국내에도 소개된 밴 플리트 평전 『승리의 신념: 밴 플리트 장군 일대기』에서는 밀리킨의 보직해임에 대해 미육군 공간사 보다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살짝 다른 서술이 하나 보입니다. 이 부분도 직접 인용을 하겠습니다.



바로 이날 제3군단장 밀리킨 장군은 보직해임되었다. 밴 플리트 장군은 영국에서 근무하는 동안에도 하지스 장군과 존 밀리킨 장군간의 불협화음을 잘 알고 있었다. 밴은 과거에 패튼 장군이 자신 앞에서 ‘벌지’ 전투에 임하는 밀리킨의 소극적인 태도를 비난한 사실을 기억하였다. 이제 밴 플리트 장군은 밀리킨이 물러나고 자신이 그 공백을 메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밴은 또한 이러한 상황 속에서 지휘권인수가 좋지 않은 경우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다음날 아침 일찍 제1군사령부로 가기 위해 자신의 전용비행기를 준비시켰다. 브래들리의 전화를 받은 바로 그 다음날 아침, 밴 플리트 장군은 가볍게 짐을 꾸리고 전속부관과 운전병을 대동한 채 지휘관 전용항공기에 탑재 가능한 지프 1대만을 싣고 제1군사령부로 향했다. 

밴 플리트가 도착하여 신고를 마치자 하지스 중장은 그에게 밀리킨 장군을 대신하여 제3군단장의 임무를 수행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밀리킨은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어.”라고 하지스가 말했다. 이에 밴은 “밀리킨도 제가 제3군단의 지휘권을 인수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하지스는 “아니, 자네가 가서 직접 말하게. 밀리킨에게 제1군사령부로 출두하라고 전해주게.”라고 대답하며 급한 업무를 핑계로 돌아섰다. 밴은 자신이 직접 밀리킨 장군에게 좋지 않은 소식을 전해야만 한다는 사실에 몹시 언짢았다. 또한 이러한 방식의 보직해임은 군 전통에 어긋나는 것 이었다. 브래들리나 하지스 둘 중 한 사람이 밀리킨에게 전화를 걸어 그의 보직해임을 통보하거나, 보다 나은 것은 직접 밀리킨을 찾아가 보직해임시키는 용기를 보여줬어야 했다. 밴은 또한 그 자신이 밀리킨보다 후임이고, 몇 개월 전 제3군단의 벌지공격 때만 해도 제90사단장으로서 그의 휘하에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난처해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밴은 지휘권을 인수하기 위해 즉시 이동하였다. 

밴 플리트는 지휘소에 있던 밀리킨을 찾아가 보직해임의 소식을 전했다. 밴은 당시 밀리킨의 표정에 나타났던 충격받은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직업군인으로서 보직해임을 당한다는 것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비극적인 상황이 아닐 수 없다. 특히 고급장교의 경우 그 충격은 말할 것도 없다. 그것은 보통 군 생활이 끝장났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보직해임의 경우는 씻을 수 없는 오명을 남긴다. 설사 정황에 비추어 볼 때, 보직해임이 부당했다고 판단되더라도 그 오명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밴은 솔직히 밀리킨의 보직해임이 정당하다고 확신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보직해임으로 자신이 득을 보게 되는 상황에서 밀리킨에게 그 소식을 직접 전해야하는 일에 몹시 당혹해 하였다. 

밴은 불편한 심정으로 밀리킨과 함께 군단 지휘소에 있으면서 이러한 소식을 밀리킨이 매우 기분 나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서 있던 밀리킨은 이유가 무엇이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밴은 문제가 무엇인지 그리고 보직해임의 이유가 무엇인지 아무 것도 모른다는 뜻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밀리킨은 하지스에게 전화를 걸었고, 하지스는 그의 보직해임을 확인해 주었다. 끝내 밀리킨은 전화에다 대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런데 여기도 반갑지 않은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레마겐의 철교가 붕괴되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제1군사령부의 부대일지에는 3월 17일 하지스 장군이 밀리킨에게 전화를 걸어, 그가 보직해임되었고 후임으로 밴 플리트가 결정되었다는 사실을 통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밴이 밀리킨의 지휘소에 도착하기 전에 이 전화가 걸려온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밀리킨이 하지스 장군에게 확인전화한 것을 그렇게 기록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폴 F. 브레임/육군교육사령부 번역실 옮김, 『승리의 신념 : 밴 플리트 장군 일대기』(봉명, 2002), 193~194쪽.


다시 미1군사령관 일지를 인용하겠습니다. 여기에는 위의 사실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후 두시에 하지스 장군은 지휘소에서 밴 플리트 장군을 만나 환영인사를 하고 약 한시간 동안 대화를 나눴다. 하지스 장군은 브래들리 장군이 밀리킨 소장의 후임을 보내준 것을 아주 기뻐했다. 오후 2시 50분에 하지스 장군은 밀리킨 장군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쁜 소식이 있소.” 그는 밀리킨에게 해임 사실을 알리고 원한다면 내일 군단사령부를 떠나도 상관없다고 말했다. 하지스 장군의 말이 끝나자 밀리킨 소장이 말했다. “사령관님. 저도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레마겐 철교가 무너졌습니다.” 

William C. Sylvan and Francis G. Smith Jr.. Normandy to Victory: The War Diary of General Courtney H. Hodges and the First U.S. Army (The University Press of Kentucky, 2008) Kindle Locations 4661-4665.


하지스의 성격을 고려하더라도 밀리킨의 해임과 그 방식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비록 벌지전투 시기 부터 군단지휘능력에 비판을 받아왔다고는 하나 레마겐 교두보 전투 자체는 무난하게 전개되고 있었고 굳이 군단장을 교체할 필요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벌지전투 당시 미국 군단장들의 지휘방식에 대해 책을 쓴 해롤드 윈튼Harold R. Winton은 밀리킨에 대해 우호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의 평가는 이렇습니다.


밀리킨이 해임된데는 그의 책임도 없지 않다. 3월 11일에 제9보병사단 참모장은 하지스 장군의 부관에게 라인강 동안의 교두보가 혼란하기 때문에 군단장이 직접 전방을 시찰하면서 상황을 통제해야 하지만, 밀리킨은 교두보에 거의 오질 않는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밀리킨이 해임된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제1군의 “일가족”이 아닌 아웃사이더였던데 있었다. 그는 좋지 못한 시기에 좋지 못한 장소에 있었던 것이다. 

Harold R. Winton, Corps Commanders of the Bulge: Six American Generals and Victory in the Ardennes,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7), pp.354~355.

Tuesday, March 28, 2017

군대에 가면 총값을 내야지!


 군대에서 하는 장난 중에서 신병에게 총값을 내라고 하는게 있죠.(요즘은 안그러나요?^^) 그런데 실제로 총값을 내고 군대에 가는 경우도 있긴 했다는군요.

 법률에 따라 짧은 기간만 복무해도 되는 특권을 가진 계층 조차 아예 군대를 가지 않으려 했다는 사실은 프로이센의 군사개혁과 나폴레옹 전쟁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군대가 인기없었음을 보여준다. 교육수준이 높고 부유한 계층의 청년들은 1년간 정규군에 복무한 뒤 전역해 지방군(Landwehr) 장교로 임용되는 것 보다는 아예 군대에 가지 않는 쪽을 선호했다. 쾰른 행정구의 경우 1817년에서 1818년 사이에 1년 복무를 위해 병적 등록을 한 사람이 겨우 41명 밖에 되지 않았다. 이것은 그해 쾰른 행정구 징집 인원의 1%에 불과했다. 실제로 이 계층의 사람은 징집 인원의 3%에 달했다.
 프로이센의 1814년 병역법은 자발적으로 병적 등록을 한 사람 중 두 부류에 한하여 복무기간을 줄여줬다. "교육을 받은" 계층과 군복 및 무기를 사는데 필요한 돈을 직접 지불한 사람의 경우 복무기간이 1년이었다. 복무기간을 1년으로 줄이는데 필요한 비용은 1816년 기준으로 40탈러(공병)에서 214탈러(중기병) 사이였다.(당시 프로이센에서 자영업 이외의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의 연평균 소득은 94탈러였다. 프로이센의 초등학교 교사는 1년에 107탈러를 벌었다.) 1814년 병역법의 문맥을 보면 복무기간 단축의 대상으로 "교육을 받은" 계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물론 교육을 받은 사람은 군복과 무기를 살 비용도 댈 능력이 있으리라고 암묵적으로 가정한 것이었다. 병역법은 "교육을 받은 계층"을 명확히 규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제도가 실시되자 금방 확실해졌다. 예를들면 김나지움에 2년 반 재학했던 자물쇠 장인들은 자신이 "교육을 받은 계층"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독자적인 레시피를 가진 제빵사들도 같은 생각을 했다. 
Ute Frevert, A Nation in Barracks: Modern Germany, Military Conscription and Civil Society, (Berg, 2004), pp.52~53.

Sunday, March 26, 2017

불량식품(?)


옛날 신문을 읽다 보면 참 답답한 사건사고가 많습니다. 그 원인은 대개 낮은 교육수준, 안전불감증 등으로 인한 것 입니다. 어릴때 어른들에게서 듣던 1940~50년대 이야기를 보면 그런 사례가 참 많지요. 한성일보를 읽다가 그런 유형의 사고 사례가 눈에 들어와 포스팅을 합니다.


도라오는 신생의 봄을 압두고 전재민에게 일어난 불상사! 
시내 전농정(典農町) 철도관사내에 있는 전재민수용소에 있으면서 용산연병장육군창고에 근무하고 있는 전재민의 한사람인 노선보(魯善普, 38세)는 지난 14일에도 역시 전기(前記) 육군창고에서 노동일을 마치고 도라오는 길에 동 창고에서 「통조림관」 같은 것을 같어다가 작 16일 오전 11시 반경에 역시 전재민인 친구 두 사람과 같이 그 통조림을 먹고저 뚜껑을 떼든 찰나에 그 통조림관 속에는 진짜 통조림이 아니고 미국제 수류탄이였든 관계로 돌연이 큰소리를 내며 폭발이 되는 동시에 전기 노선보외 1명이 즉사하고 그외 한명도 빈사의 중상을 입어 생명이 위독하다고 한다. 
「수류탄을 통조림으로: 육군창고에서 나온 것, 2명 즉사」, 『한성일보』 1946년 3월 18일자 2면 
 

Tuesday, March 21, 2017

패튼의 전과 과장에 대한 하지스의 비난



 전에 "스티븐 잘로가의 2차대전 기갑전 저작에 관한 잡담"이란 포스팅에서 패튼 휘하 미3군, 특히 제4기갑사단이 전과를 심각하게 과장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간단하게 했습니다. 패튼이 전과를 과장한다는 점은 당시 미군 내에서도 인지하고 있었던 듯 합니다. 1945년 1월 15일 월요일자 미 제1군사령관 일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오늘 제3군은 약간 진격하긴 했지만 특기할 만한 것은 아니다. 오늘 저녁에 발행된 성조지는 제3군이 독일군 8만명을 해치웠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포로 숫자를 열배로 부풀리는 전형적인 패튼식 계산법이다. 
 The Third Army made some advances during the day but they were not particularly noteworthy. Stars & Stripes tonight carried the story that they had accounted for some 80,000 Germans, which figure is totalled [totaled] in the usual Patton manner, of multiplying PWs captured by ten. 
 William C. Sylvan and Francis G. Smith Jr.. Normandy to Victory: The War Diary of General Courtney H. Hodges and the First U.S. Army (The University Press of Kentucky, 2008) Kindle Locations 3598-3600. 

 제1군사령관 일지는 매일 저녁 사령관 하지스(Courtney Hicks Hodges) 장군에게 초고를 검토 받은 뒤 정식으로 작성됐기 때문에 이 구절은 하지스 장군 본인의 평가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라이벌 의식이 있어 상대를 폄하하는 것 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패튼이 전과를 과장한 사례가 실제로 존재하니 그냥 무시할 수는 없겠습니다.


Friday, March 17, 2017

소련군의 독전대, 형벌부대, 즉결처형에 대한 로저 리즈의 평가

이 포스팅은 Roger R. Rees, Why Stalin’s Soldiers Fought: The Red Army’s Military Effectiveness in World War II, (University Press of Kansas) 160~175쪽을 발췌 번역한 것 입니다. 얼마 전에 했던 “스탈린그라드 시가전 초기 소련군 부대의 무장 상태”라는 포스팅의 후속편 정도 되겠습니다.


이 글은 주로 서구권의 대중문화에서 묘사하는 독전대, 즉결처형, 형벌부대 같은 소련군의 잔혹행위들이 실제 보다 다소 과장된 면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소련군의 막장성(?)에 대한 이야기는 수없이 많은데 그 중 일부는 사실로 드러났고 또 어떤 것은 잘못된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로저 리즈는 그 중에서 과장된 사례들을 찾아 비판하면서 균형을 잡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스탈린 체제의 잔혹성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 안에도 일정한 합리성은 작용했다고 보는 것 입니다. 상당히 흥미롭고 귀담아 들을 만한 지적입니다.


다만 이 글의 후반부에서 인용한 다른 나라 군대와의 비교 통계는 조금 조심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부분은 제가 예전에 썼던 “국민동원에 특별히 유리한 정치사상은 존재하는 것일까?”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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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압적인 조치는 효과가 있었을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의 혹독한 규율은 과거 제정 러시아군대의 규율 만큼이나 전설적이다. 수많은 역사가와 참전자들은 혹독한 규율이 소련군을 승리로 이끈 핵심적인 요인이라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이 혹독한 규율이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연구한 사례는 없었다. 붉은군대의 강압적인 조치들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꽤 과장된 면이 많기 때문에 이것이 붉은군대의 전투력에 끼친 영향력에 대해서도 의문이 생긴다.


스탈린은 전쟁이 발발한 뒤 처음 한 연설에서 강압적인 조치를 취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는 1941년 7월 3일의 라디오 연설에서 전쟁 수행을 방해하는 사람들에게 경고를 했다.


우리는 반드시 후방의 온갖 와해분자, 도피분자, 낙망자, 유언비어 유포자들과 무자비하게 투쟁할 것이며 밀정, 게릴라, 적의 공수부대를 일망타진하는 이 모든 방편에 있어서 우리의 박멸단을 신속히 조직할 것입니다. 원수들은 교활하고 음험한 기만과 유언비어 유포에 경험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 모든 사실을 헤아려 악선동에 넘어가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낙망비겁으로 국방사업을 방해하는 자들은 다 즉시 군법회의에 넘겨야 할 것입니다.22)***


일반 대중은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이보다 하루 전에는 총참모부 내에서 규정에 따른 증명서류 없이 부대를 벗어난 군인은 군법회의에 회부해 군법에 따라 처분한다는 결정을 내렸다.23) 하지만 이 조치가 모두 총살에 처하라는 뜻은 아니었다.


1941년 8월에 선포된 명령 270호는 아주 유명하다. 이 명령은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는데 이에 대한 책임은 스탈린에게 있다. 명령 270호는 탈영병과 그 가족을 가혹하게 처벌하는 근거가 됐다. 평시에는 국방인민위원회가 범죄를 저지른 군인에 사형을 허가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전쟁 발발시 까지도 그러했다. 그러나 독일의 침략이 시작되고 5일이 지난 뒤 최고소비에트는 전선군 군사위원회에 군사법정 판결을 받은 비겁자, 탈영병, 배신자에 사형을 허가할 권한을 부여했다. 그리고 2주 뒤에는 야전군과 군단급 군사위원회도 사형을 허가할 권한을 가지게 됐다.24)


사형을 허가할 권한이 대폭 확대됐지만 피비린내 나는 처형은 명령 270호에 따라 이루어졌다. 당시 레닌그라드에 군인으로 있었던 이오시프 핑켈슈테인은 1941년 10월 1일에 있었던 처형에 대해 기록을 남겼다. 당시 그의 부대는 전쟁 전 그가 공부하던 기술대학 근처에 있는 빈 공장에 집합해 처형을 참관해야 했다.


“이 처형은 다른 병사들에게 교훈을 주려고 한 것이었다. 먼저 우리 중대 소속의 전차병이었던 세명의 탈영병이 끌려나왔다. ‘조국의 배반자 세놈을 처단하라!’ 선임 장교가 외쳤다. 탈영병들은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아직 두명이 더 있었다. NKVD한명이 끌려나온 탈영병 두명의 머리를 권총으로 쐈다.”25)


이런 처형은 꽤 흔한 일이었고 특히 1941~42년에는 매우 흔했다.


붉은군대가 공황에 빠져있던 1941년 늦여름 병사들에 대한 가혹행위는 스탈린이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 아마 이때는 최고사령부가 이것을 주도했을 것이다. 이 당시 최고사령부는 강압적인 조치들을 완화하려는 움직임이 없었다. 1941년 10월 4일 대령과 그 이상급의 장교들에게 배포된 명령 391호는 전선의 지휘관들이 자신이 공황에 빠져 판단을 내릴 수 없는 것을 감추려고 병사들을 학대하고 구타하거나 탄압(즉결 처형 등의)한다고 비판했다. “탄압은 극단적인 조치이므로 명령을 직접적으로 거부하거나 전투 상황에서 공개적으로 반항하는 경우, 또는 지휘관의 명령이 이행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경우에만 취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서는 당근과 채찍을 병용하도록 했다.  대부분의 탄압은 정당화 할 수 없으며 즉결 처형은 불법이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지휘관이 멋대로 행동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의지가 부족하고 능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명령 391호를 주도적으로 작성한 인물이 스탈린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이 명령문은 가혹하고 법에 의거하지 않은 처벌은 부대의 규율과 사기를 꺾으며 되려 병사들이 적에게 투항하게 만든다는 점을 잘 파악하고 있다.26)


1942년 7월 명령 227호를 내리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스탈린이었다. 이 “후퇴불가” 명령은 아무 이유 없이 항복하거나 퇴각하는 사람은 사형에 처하고 명예를 박탈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명령은 뜬금없이 나온 것이 아니어서 기존의 규율 관련 명령과 상충되지 않았다. 스탈린은 병사들이 명령 227호에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NKVD는 이 명령이 전선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자세히 조사했다. 이 명령에 대한 반응은 극과 극이었다. 일부는 이 명령을 좀 더 일찍 내렸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또 다른 쪽에서는 비난을 했다. 북부전선군과 북서전선군 처럼 상대적으로 전선이 안정되었던 지역에서는 명령 227호가 남부전선에서 퇴각하는 부대를 대상으로 내린 것이라고 생각해서 이를 무시했다.


만수르 압둘린은 명령 227호가 그의 부대에 공포를 불러왔다고 회고했다. “이 명령으로 병사들은 아주 강한 정신적 동기를 가지게 됐다. 퇴각하는 병사를 사살할 권한을 가진 독전대가 있다는 소식 만큼이나 강력했다.”27) 독전대가 병사들을 마구잡이로 사살했다는 인식은 사실과 다르다. 하지만 이런 과장된 인식이 퍼진데는 소련 당국의 책임도 있다.


명령 270호와 이에 따라 처형을 집행해도 후퇴나 탈영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많은 병사들이 명령 227호가지고 달라질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어떤 병사는 전우에게 명령 227호는 전에 내려온 다른 명령과 다를바 없고, 앞서 내려온 명령으로 바뀐게 뭐가 있냐고 지적하기도 했다. 통찰력 있는 평가다.28) 일부는 이 명령이 소련 정부 고위층의 절망감을 보여주는 신호라고 생각했다. 스탈린그라드 전선군의 필류코프 이병은 명령 227호 보다 더 위에 있는 법은 살아남는 것이라고 말하다가 체포됐다. 그는 “명령은 명령이다. 하지만 독일놈들의 비행기가 폭탄을 떨구면 도망쳐야지. 다들 이 법칙을 알지 않냐?”고 말했다는 혐의를 받았다.29) 두보빅 이병은 전우들에게 “독전대가 바로 제2전선 아닌가? 앞에서는 독일놈들이 총을 쏘고 뒤에서는 독전대가 총을 쏘지.”고 말했다.30)


장교들도 마찬가지였다. 보병중대장 세브첸코 중위는 명령 227호를 독일군에게 도움을 주는 아주 나쁜 발상이라고 생각했다. “소총만 쥔 아군 병사들은 자동화기와 박격포로 무장한 독일군을 당해낼 수 없다. 하지만 독전대 때문에 후퇴도 할 수 없다. 남은 것은 그냥 두손 드는 것 뿐이다.”31) 군의관 올샤네츠키는 “최고사령부의 명령 227호는 독일놈들에게 저항할 여력이 없으니 지르는 최후의 단발마다. 이런 비슷한 조치들이 무슨 효과가 있었나”라고 말했다.32)


명령 227호는 형벌대대를 편성하고 전선 후방에는 독전대를 두도록 했다. 사실 독전대 편성은 이미 개전 5일차인 1941년 6월 27일에 승인된 바 있었다.  이날 티모센코 원수와 주코프는 명령 35523호에 서명했는데, 이 명령은 독전대를 운용할 수 있는 환경과 절차를 마련하라는 내용이었다. 독전대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41년 9월 5일이었다. 이날 최고사령부는 브랸스크 전선군 사령관에게 독전대 편성을 승인했다.33) 일주일 뒤 최고사령부는 남서방면군 예하의 모든 사단에 독전대 편성을 명령했다. 독전대는 전선에서 공황에 빠져 도망치거나 아무 명령 없이 부대에서 떨어져 나온 병사들을 모아 원대로 복귀시키는 임무를 맡았다. 실제로 독전대는 전선에 가까운 후방의 도로에 분대규모의 검문소를 설치하는 식으로 운용됐다. 그리고 도망친 병사들을 구금하고 군사재판에 회부하거나 저항 또는 도주할 경우 사살했다. 사실 독전대에 소속된 군인들의 성격에 따라 운용도 천차만별이어서 탈주병들에게 문제가 심각해 지기 전에 그냥 본대로 복귀하라고 경고만 하는 경우도 있었다.34) 독전대의 주 임무는 병사들이 전열을 벗어나지 못하게 감시하고 탈주병들을 기관총으로 쓸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탈주병이나 패잔병들을 모아 원대로 복귀시키는 것 이었다. 독전대는 마구잡이로 즉결처분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다.35)


독전대는 고작 소총과 권총 정도로 무장을 해서 전술 부대의 기능을 할 수 없었다.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독전대는 독일군의 공격으로 전선이 붕괴될 때 패주병들을 사살하기는 커녕 제일 먼저 줄행랑을 쳤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야전군 사령관들은 자발적으로 독전대를 해체하고 장교들이 직접 병사들을 통제하도록 했다. 결국 스탈린도 이 문제를 깨닫고 1944년 10월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전선의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으므로 더이상 필요가 없는 독전대는 해체해야 한다.” 스탈린은 11월 15일까지 모든 사단의 독전대를 해체하고 인원은 전투 부대로 보내라고 명령했다.36)


 제4전차군은 1942년 8월 스탈린그라드 방면으로 철수하던 도중 명령 227호의 적용대상이 됐다. 제4전차군은 명령에 따라 200명으로 편성된 독전대 3개를 편성했다. 제4전차군 사령관은 독전대를 사령부의 NKVD 특무국Особый отдел 의 지휘하에 두었다. 제4전차군 독전대는 8월 8일 부터 14일 까지 363명을 붙잡았다. 이중 93명은 독일군의 포위망을 돌파해 나왔고, 146명은 부대에서 낙오된 패잔병이었으며, 52명은 원 소속부대를 잃어버렸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12명은 군교도소에서 도망쳤으며, 54명은 전선을 무단으로 이탈했고, 2명은 부상자라고 주장했다. 특무국은 이들을 모두 조사한 뒤 187명은 원대복귀 시키고 43명은 병력이 부족하지만 보충병을 받지 못한 부대로 보냈다. 그리고 73명은 NKVD에 넘겨 더 자세한 심문을 받도록 하고 27명은 형벌대대로 보냈다. 그리고 6명은 체포한 뒤 상급부대로 이송했으며 부상병 2명은 자해여부를 판별하기 위해 의료위원회로 보냈다. 원소속부대의 전우들 앞에서 처형당한 것은 24명에 불과했다.37)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와 카프카즈로 진격하던 1942년 8월 1일 부터 10월 15일 사이에 붉은군대의 독전대는 전선을 이탈한 병사 중 140,755명을 체포했다. 이중 3분의 1인 52,000명이 후퇴중이던 스탈린그라드 전선군과 돈전선군 소속이었다. 체포된 인원의 대다수인 131,094명은 원대복귀 조치되거나 다른 전선부대의 보충병으로 처리됐다. 유죄가 인정된 것은 3퍼센트 남짓한 3,980명에 불과했다. 이중 2,776명의 사병과 부사관은 형벌중대에 배속됐고 185명의 장교는 형벌대대로 보내졌다. 마지막으로 1,189명이 군사재판에서 유죄를 받아 처형됐다.38) 이 사례가 보여주듯 독전대에 의해 목숨을 잃은 경우는 매우 드물었고 체포된 인원의 0.84퍼선트에 불과했다. 바로 소련정부가 가장 필사적으로 병사들을 위협하던 때에 이정도였다는 뜻이다.


명령 227호는 스탈린 체제의 기준에서도 혹독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비겁자, 탈주병 또는 전투 관련 규율을 위반한 자들을 처분하기 위해 편성한 형벌대대 덕에 많은 사람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형벌대대가 편성되기 전에는 총살 처분 됐을 사람들이 목숨을 건질 수 있는 두 번째 기회를 얻은 것이다. 형벌부대는 가장 위험한 임무에 투입되었고 정규군의 길을 열기 위해 최악의 전장에 배치되었지만 단순한 자살 부대는 아니었다. 그리고 형벌부대의 복부기간은 짧았다. 형벌부대에서 임무를 완수하고 살아남거나 전투중 뛰어난 전공을 세우거나 부상을 당할 경우 사면을 받아 전에 복무했던 정규부대로 복귀할 수 있었다.39)


 아모소프 중위는 군사재판에서 판결받았을 당시의 판결문을 기억했다. “피고의 태만함에 대해 계급을 강등하고 2개월간 형벌대대에서 복무할 것을 명령한다.” 아모소프 중위의 죄는 그가 속한 사단이 드네프르강을 건너려고 했을때 그가 지휘한 공병소대가 임무를 달성하지 못해 사단의 작전을 실패하게 한 것이었다. 그는 1943년 12월 31일 형벌대대에 배치되어 그 해의 마지막날을 감자 껍질을 벗기면서 다른 동료들과 농담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이 대대는 1944년 1월 5일 전투에 투입됐다. 아모소프는 부상을 당해 야전병원으로 후송됐다. 치료가 끝나자 그는 원래 계급을 회복해 정규 소총병사단에 배치됐다.40) 그가 형벌대대에 복무한 기간은 6일에 불과했다.


형벌부대에 배치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군대의 규율을 유지하는데 얼마나 효과를 발휘했는지 평가하는 것은 힘들다. 1943년에 전투 지역에 배치된 인원의 2.7%가 형벌부대에 속해있었다. 1945년에는 그 비율이 1.3%로 줄어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스탈린의 바램과는 달리 일선의 장병들은 형벌부대에 배치되는 것을 그리 두려워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보병 부사관이었던 마트베이 게르시만의 증언에 따르면, 그의 대대에서는 일반 소총병중대나 형벌중대나 별 차이가 없었다고 한다.41) 일선 병사들은 형벌대대에 있건 일반 부대에 있건 죽을 확률은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건 틀린 생각이었다. 1942년 부터 1944년 사이에 형벌부대는 일반 보병부대에 비해 50% 높은 사상율을 기록했다. 1945년에는 형벌부대가 일반 부대에 비해 3배에서 6배 높은 사상율을 기록했다. 예를들어 1944년 말 기준으로 형벌부대에 복무한 346,144명 중 50%인 170,298명이 사상자가 되었다.42)


형벌부대는 두 종류가 있었다. 형벌중대에는 사병이 배치됐다. 그리고 형벌대대는 장교들이 배치됐다. 형벌부대에서는 사병과 장교가 함께 복무하지 않았다. 먼저 군법회의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사병은 형벌중대로 보내졌으며 복무기간은 보통 3개월이었다. 1943년 8월 스탈린은 연대장, 사단장, 독립여단장에게 탈영, 명령불복종, 경계근무 태만, 무단이탈 등의 죄를 지은 사병들을 군사재판 없이 형벌중대로 보낼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43) 규정상 장교를 형벌대대에 보내려면 반드시 군사재판을 거쳐야 했다. 하지만 일부 장군들은 상황을 봐 가며 규정을 무시해도 된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부하 장교들을 재판 없이 형벌대대에 보낸다고 협박할 수 있었다. 장교는 형벌대대 복무를 마친뒤 원래 계급을 회복하고 형 집행 이전의 지위에 상응하는 직책을 맡을 수 있었으며, 형벌대대 복무기록은 말소 처리됐다. 병사들도 기록말소와 함께 일반 부대로 복귀할 수 있었다. 형벌부대에서 전공을 세울경우 훈장을 받을 수도 있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소련군은 65개의 형벌대대와 1,048개의 형벌중대를 가지고 있었고 여기에 총 427,910명이 소속되어 있었다.44) 독일군도 형벌부대를 편성하긴 했지만 전투에 투입하지는 않았다. 서방 연합군은 이런 편제가 없었고 전투중 비겁행위를 하거나 탈영, 또는 기타 범죄를 저지를 경우 군교도소에 수감했다.


부대 전체가 형벌부대로 보내지는 경우도 있었다. 1944년 11월, 스탈린은 제214기병연대가 군기를 빼앗기자 연대의 장교와 사병을 모두 형벌부대로 보냈다. 연대장은 중령에서 소령으로 강등하고, 형벌대대 복무를 마치고 일반 부대로 복귀하더라도 원래 계급은 회복할 수 없도록 했다.  문제는 이 연대가 군기를 빼앗겼을 뿐 아니라 군기를 되찾기 위해(또는 뺏기지 않도록) 용맹하게 싸우지 않은데 있었다.45) 하지만 1944년 12월에 제8근위 공수연대와 제10근위공수연대가 전투에서 군기를 빼앗겼을때는 달랐다. 이 두 연대는 진지를 사수하다가 독일군에게 거의 전멸당했다. 스탈린은 이 두 연대에 새 군기를 주라는 명령을 내렸다.46)


 형벌부대는 장교와 병사들을 위협해 순응하도록 하는 기능 뿐 아니라 동원의 수단이기도 했다. 굴락과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민간인들은 종종 위협과 강요에 의해 곧바로 형벌중대에 입대했다. 소련 정부는 이들에게 형벌부대에 복무하면 형기를 줄여준 뒤 다시 정규군 부대에 복무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5년형 까지는 형벌중대에 1달간 복무하면 형기를 마칠 수 있었다. 5년형 이상 7년형 미만의 경우는 2개월 복무였다. 7년형 이상 10년형 미만의 경우는 3개월 복무를 선택할 수 있었다. 정치범은 보통 10년형 이상을 선고받았기 때문에 형벌중대에 복무할 수 없었다. 소로킨이 복무한 형벌중대는 1944년 5월에 편성됐는데 중대원의 95%는 굴락과 교도소 출신이었다.47) 거의 1백만명에 달하는 죄수들이 군대에 징집됐는데 이 중에서 형벌부대에 복무한 인원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수십만명 수준일 것이라고 짐작만 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형벌부대에 복무한 인원의 숫자만 가지고 명령 277호의 강압적인 측면이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 평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소련정부는 병사들의 탈주를 막고 군대가 조국에 대한 배신이라고 딱지붙인 행위들을 징벌할 수 있도록 다른 여러가지 조치를 취했다. 상황이 심각할 경우에는 장교가 비겁한 병사들을 즉결처분 할 수 있었다. 소련 장교들은 즉결처형 한다는 협박으로 병사들을 복종하게 하는 경우가 잦았다. 이반 셸레포프는 즉결처형을 목격했다. “우리 중대장은 병사들이 움직이지 않으면 총살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리고 몇명을 죽였다. 우리는 이걸 보고 더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48) 즉결 처분을 일삼는 장교와 정치장교는 댓가를 치러야 했다. 한 퇴역 장교는 캐서린 메리데일Catherine Merridale에게 이렇게 증언했다. “그런 일은 꽤 자주 있었습니다. 병사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한다면 그들에게 총을 맞을 수도 있었지요.”49)


역으로, 장교에게 총살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때문에 적에게 투항하는 경우도 있었다. 오스타펜코라는 병사는 1941년 12월 7일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도망칠 생각이야. 독일놈들에게 도망치는게 낫지. 놈들에게 잡히면 살 가능성이 있어. 하지만 후방으로 도망가면 총살을 당하지. 독일놈들은 공산당원과 콤소몰 단원만 쏜다고.”50) 다른 병사는 1941년에 무능한 지휘관들이 남발했던 즉결처분 협박이 역효과를 일으킨 사례를 증언했다. 그의 연대가 두 번째로 포위되자 병사들은 공공연하게 패배주의적인 발언을 일삼았다. 한번은 중대 정치장교가 어떤 병사를 총살하겠다고 권총을 뽑자 그 병사가 먼저 소총으로 정치장교를 죽여버렸다. 다른 병사들은 정치장교의 시체를 숨기는 것을 도왔고 상관들에게는 이 사건을 일체 발설하지 않았다. 이틀뒤 이 연대는 격전 끝에 거의 절반에 달하는 병력을 잃었다. 증언을 한 병사가 소속된 중대는 공격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병사들은 따르려 하지 않았다. 다른 정치장교가 움직이지 않으면 즉결처분하겠다고 협박하자 어떤 병사가 정치장교를 쏴 죽였다. 그리고 이들은 독일군에게 항복했다.50)


즉결처분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장교들은 상부의 압력을 받았다. 1942년 여름 골브라이흐 중위는 어떤 박격포 중대의 유선전화를 사용하려다가 그의 연대장과 사단장이 나누는 대화를 엿듣게 됐다. 사단장은 골브라이흐의 동료 중대장이 병사들을 너무 무르게 다룬다고 비난했다. 이 중대는 독일군의 진지를 두 번이나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사단장이 물었다. “즉결처분은 했나?” 연대장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아닙니다.”라고 대답했다. 사단장이 대답했다. “그럼 쏴 버려! 지금 여기가 노동조합 회의장인줄 알아? 여긴 전쟁터라고!” 이날 저녁 공격에 실패한 중대장은 대대의 다른 장교들 앞에서 총살당했다.52)


스탈린은 전선의 패배가 단지 소련군의 무능과 독일군의 능력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전황의 악화로 비상사태가 초래됐기 때문에 정치국은 1941년 8월 17일 조국에 대한 배신행위에 대응하기 위한 일련의 절차를 개정했다. 개정된 절차에 따르면 조국에 대한 배신행위로 의심될 경우 혐의가 발각된지 10일 이내에 군사재판에 회부하도록 했다. 이전에는 재판 기한에 대한 규정이 없었다. 기소가 되면 군사법원이 결론을 내릴때 까지 이틀의 시간 밖에 없었다. 소련 연방대법원 군사분과는 각 군사재판의 평결과 선고 사항을 검토한 뒤 이것을 승인하거나 기각할 권한이 있었다. 또 배신자의 가족들이 범죄행위에 연좌 책임을 져야 하는지 여부도 연방대법원 군사분과가 판단했다. 결정문의 사본은 NKVD에 전달되 필요한 조치를 취하도록 했다. 그리고 연방대법원 군사분과는 유죄평결이 있기 전에 조국의 배신자가 복무하는 부대에 결정사항을 통보하도록 되어 있었다.53)


그리고 전쟁이 시작된지 1년 뒤인 명령 227호 반포 직전에 국방인민위원회는 조국의 배신자의 가족들을 처벌하는 조항을 신설해 기존에 있던 여러 억압조치에 덧붙였다. ‘가족’의 범주에는 배신자의 아버지, 어머니, 아내, 자녀, 형제자매가 포함되었다. 배신자가 음모를 꾸밀 당시, 혹은 군에 입대할 당시 가족이 동거하고 있었다면 연좌죄에 따른 처벌의 대상이 됐다.54)  이 법령은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단지 1934년 6월에 만들어져 소련 형사법에 추가된 ‘반역죄 조항’을 인용한 것에 불과했다. 1942년의 법은 반역자는 무조건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은 5년간 굴락에 수용하는 조항을 추가했을 뿐이다.55) 하지만 실제로는 사형 대신 굴락에 보내는 것으로 감형되는 경우가 흔했다.


스탈린 체제의 정치적 불안정 때문에 전쟁이 발발하자 반역죄는 광범위하게 적용됐다. 기존에는 무능함, 태만함, 훈련 부족으로 인한 실수로 간주되었던 것도 반역죄가 됐다. 예를들어 전쟁 초기 군사법원은 포병장교 가에프 소령이 공격시 화력 지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사형을 언도했다. 가에프 소령은 법정에서 통신장비가 부족해 화력지원을 제대로 못했다고 항변했다. 그의 동료장교들도 가에프가 무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법원은 총살형을 선고했다. 가에프가 유죄 판결을 받고 총살형을 받자 동료 장교들은 불안할 수 밖에 없었다. 누구던 비슷한 꼴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56) 소련 정권이 장교들이 용감히 싸우도록 협박하는 모양새였다.


탈영병이나 전투에서 비겁행위를 한 군인이 모두 사형선고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군사법원의 판결은 일관적인 기준 없이 아무렇게나 내려졌기 때문에 정권이 강압적인 조치를 취해 얻으려 한 효과를 떨어트렸다. 예를들어 전쟁 초기의 첫 3개월 반 동안 NKVD는 허가 없이 부대를 이탈했거나 적전도주로 의심되는  군인 657,364명을 잡았다. 이중 NKVD 특무국이 체포한 것이 249,969명, 독전대와 NKVD 예하 특수수색대가 체포한 것이 407,395명이었다. 군은 이 중 632,486명이 무단이탈, 패잔병, 또는 부대에서 낙오된 인원이라고 판단했다. 이들은 전투부대로 편성돼 다시 전선에 투입됐다. NKVD는 나머지 24,878명의 탈영병, 반역자, 간첩, 기타 범죄자를 체포했다. 재조사 결과 이 중 8,772명이 탈영병으로 분류됐다. 군사법원은 폭증하는 탈영과 적전도주를 막아야 한다는 압박때문에 이 중 10,201명에 사형을 언도했다. 이들 대부분은 총살에 처해졌고 그중 3,321명은 본보기로 다른 병사들 앞에서 공개 총살당했다.57)


소련 당국은 어느정도 공정함과 관용을 발휘했다. 개전 초기의 급박한 상황에서 구금된 657,364명 중 구속한 사람은 3.7%에 불과했고 사형에 처한 인원은 1.5%였다. 전투를 회피하는 군인들을 모두 죽인 것이 아니라 조국의 배신자와 범죄자, 전투 참여를 단호하게 거부하는 경우에만 처형하는것이 일반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정상적인 절차가 이루어진다면 전선을 이탈한 군인이라 할 지라도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1941~1942년 시기에 병사들을 가장 위협한 것은 공황상태에 빠져 분노한 장교나 정치장교가 명령 270호를 근거로 즉결처분을 하는 것 이었다.


본대에서 떨어졌다고 해서 모두가 탈영병으로 간주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탈영병과 전투 중 비겁행위를 한 병사가 모두 조국의 배신자로 취급된 것도 아니었다. 보병 중위 알렉세이 실린은 두 번이나 적전도주를 했다. 그리고 두 번 모두 체포되어 NKVD의 수용소에 갇혔지만 그때마다 일선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58) 마찬가지로 세묜 라빈스키가 지휘한 연대의 타지키스탄 출신 탈영병 일곱명은 탈영하고 두달 뒤에 체포됐지만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원대복귀했다. 연대의 다른 전우들이 모두 놀란 것은 당연했다.59)


하지만 탈영병도 아닌데 다른 병사의 탈주를 도왔다는 이유로 총살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바실리 그로스만은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10월 19일. 제8중대의 병사 한명이 다른 병사가 적에게 투항하는 것을 도왔다는 이유로 총살됐다.”60) 가혹한 제재가 병사들을 위협하긴 했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그들의 생사를 좌우하는 상급자의 기분과 병사들이 상관의 잔인성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였다. 예를들어 1941년 12월에 10개의 전선군과 야전군 사령부가 6개월간의 체포 및 처형 통계를 보고한 것에 따르면 예비야전군은 체포 5위, 처형은 8위였다.(체포된 병사의 35%를 처형했다.) 반면 레닌그라드 전선군은 체포 7위, 처형은 1위였다.(체포된 병사의 82%를 처형했다.)61) 전쟁 전 기간 동안 군사법원은 탈영, 비겁행위, 반역, 그 밖의 범죄로 기소된 158,000명의 군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62)
1941년에는 병사들이 대규모 투항과 패배가 잇따랐고 이 중 일부는 반역행위의 결과라는 의심을 받았다. 소련군 수뇌부는 이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평시에는 연대당 NKVD 장교 1명이 배속되어 있던 것을 대폭 증원하기로 했다. 1943년에는 보안기구의 조직을 개편하고 임무를 재조정 하면서 NKVD 특무국이 국가보안국ГУГКБ과 통합되어 국방인민위원회 산하 방첩국Главное управление контрразведки 으로 개편됐다. 이 조직은 다시 스메르시라는 명칭을 가지게 됐는데 이것은 “스파이에게 죽음을Смерть шпионам!”이란 단어를 줄인 것 이었다.63) 작전에 실패, 퇴각하거나 중요한 장비를 잃어버릴 경우엔 누구든지 반역죄로 간주되어 스메르시의 조사를 받을 수 있었다. 또 스메르시는 자해, 사보타주, 비겁행위로 의심되는 경우를 조사하고 군율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취할 권한이 있었다. 또한 장교와 사병을 체포해 군사재판에 회부할 권한도 있었다. 만약 작전에 실패한 원인이 단순히 무능함이나 훈련부족일 경우에는 강등, 타 부대로의 전속, 또는 형벌부대에 배치되는 정도로 끝났다. 하지만 반역행위로 판명되면 총살되거나 굴락에 수용됐다. 스메르시 대원이 나타나기만 해도 부대 전체가 겁에 질렸고, 특히 지휘관들이 그랬다.


전쟁이 끝난뒤 수색대에서 활동했었던 블라디미르 호흘로프는 작전에 실패한 경험이 있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린 항상 성공했습니다. 실패한다면 뭐 그냥 자살이나 해야죠. 실패하면 독일놈들한테 죽거나 스메르시한테 죽었을테니까요.”64) 스메르시는 독일군과 독일 정보기관에 고용된 소련 민간인과 군인을 적발하는 방첩업무도 수행했다. 병사가 행방불명되면 생사가 확인되기 전 까지 그냥 적에게 투항한 것으로 간주했다. 만약 아군 전선으로 복귀할 경우에는 병사 스스로 적의 스파이가 아니라는 점을 입증할 책임이 있었다.


지난 70여년간 그 전문성과 단결력을 과대 평가 받았던 독일 국방군의 경우 동부전선 뿐만 아니라 다른 전선에서도 규율을 유지하기 위해 가혹한 수단을 사용했다. 만프레트 메서슈미트의 연구에 따르면 “전쟁의 야만화”로 인해 동부전선에서만 13,000~15,000명에 달하는 병사가 탈영, 비겁행위, 기타 범죄 혐위로 총살됐는데 이것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훨씬 ‘문명화된’ 서부전선에서도 수천명의 독일 병사가 같은 혐의로 총살을 당했다. 나치 독일도 소련과 마찬가지로 병사가 탈영하면 총살하고 탈영한 병사의 가족을 협박했다.65) 그리고 독일군은 23,000명의 군인을 중노동에 시달리는 장기간의 유기형에 처했으며, 84,000명을 1년 이상의 유기형에 처했고 320,000명을 1년 미만의 유기형에 처했다. 그리고 수천명을 형벌부대에 보냈다. 오머 바르토프Omer Bartov는 처벌을 받을 지 모른다는 공포감이 독일군의 규율을 유지하는데 효과를 발휘했다고 주장하는데 이 주장을 입증할 객관적인 근거는 없다.66)


 반면 전쟁 기간중 1200만명에 달했던 미군은 징집 기피 348,217건을 기록했다. 또한 21,000명이 탈영했는데 대부분은 1944년 6월 6일 부터 1945년 6월까지 서유럽전선에서 발생한 것이다.67) 미군도 적전도주하여 탈영한 병사를 사형에 처할 수 있는 규정이 있었지만 전쟁 기간 중 실제로 사형을 집행한 것은 단 한명이었다.


영국군은 규율 유지를 위해 사형을 이용하는 것에 대해 소련군과 정 반대의 입장을 취했다. 영국군은 제1차 대전당시 사형을 해도 탈영을 막을 수 없었다는 연구 결과 1930년에 탈영병을 사형에 처하는 조항을 삭제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육군은 3,080명의 군인에게 사형판결을 내렸고 이 중에서 346명이 사형에 처해졌다.68) 전쟁 첫해인 1914년 10월 1일 부터 1915년 9월 30일까지 영국군에서 40,375명의 탈영병이 발생했는데 이것은 육군 병력의 20.7%에 해당했다. 전쟁 첫해의 탈영이 가장 심각했다. 탈영율이 가장 낮았던 1916~17년에는 총 병력의 6.03%가 탈영을 했다. 그리고 이 해는 가장 많은 전사자가 발생한 해였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에서 발생한 탈영은 총 137,773건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탈영이 가장 많았던 시기는 1940년 10월 1일 부터 1941년 9월 30일까지로 총 22,248명, 병력의 10.05%가 탈영을 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전 기간에는 총 100,350명이 탈영을 했다. 즉 탈영하면 사형에 처했던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연평균 탈영율은 10.26%였는데, 사형을 폐지했던 제2차 세계대전때는 연평균 탈영율이 6.8%에 불과했다.69)


영국 연구자들은 두개의 사례를 비교한 뒤 이런 결론을 내렸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탈영을 막는데 사형은 효과적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탈영이라는 문제는 주로 선택과 도덕의 문제였다. 체계적인 교육훈련, 합리적인 임무 부여, 훌륭한 지휘관, 충분한 복지 등으로 사기를 유지하면 군인들의 심리적 붕괴나 탈영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을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또 “탈영을 근본적으로 예방할 수 있는 요인들을 무시한다면 사형이라는 다모클레스의 칼로 이미 현대전장의 격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병사들을 위협한다 해도 효과가 없을 것이다. 협박 만으로는 심리적 붕괴, 탈영, 그 밖에 사기와 관련된 문제들을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 이 연구의 결론은 이렇다. “사형이 탈영을 막는데 효과가 있다는 주장은 환상에 불과하다.”70)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군이 경험한 탈영 문제는 영국과는 다른데, 정부의 태도에서는 소련의 경험과 유사하다. 사료가 부족하고 반증할 수 있는 사례도 있긴 하지만, 당시 이탈리아군은 350,000명을 탈영 혐의로 기소했고 이중 210,000명이 유죄판결을 받아 750명이 처형됐다. 이탈리아군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다른 연합국들 보다 더 많은 병사를 사형에 처한 것이다. 소련과 마찬가지로 당시 이탈리아 군부와 시민사회는 탈영을 조국에 대한 범죄로 인식했다. 그런데 전후의 연구에 따르면 이탈리아군의 탈영은 전선이 아니라 대부분 후방에서 일어났다. 탈영의 이유는 대개 가족 문제였으며 이런 병사들은 자발적으로 복귀했다. 상당수의 병사는 휴가를 갔다가 늦게 복귀했다는 이유로 탈영 혐의를 받았는데  전장의 전우를 버려두고 도망친 것 같은 취급을 받았다.71)  다른 나라의 군대와 마찬가지로 이탈리아군 또한 처벌을 가혹하게 한다고 해서 탈영을 막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가혹한 처벌은 오히려 모든 군인과 군사 체제에 악영향만 끼쳤을 뿐이다.


사형의 위협과 독전대의 존재, 그리고 형벌대대로 끌려갈 가능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 병사들은 꾸준히 탈영을 하거나 불법적으로 전투를 회피했다. 예를들어 전세를 완전히 소련쪽으로 뒤집은 1943년의 쿠르스크 전투 당시 독일군의 공격을 받은 3개 야전군의 독전대는 7월 8일 부터 14일까지 부대를 이탈한 군인 6,965명을 잡았다. 명령 227호가 발효되고 거의 1년이나 지난 시점에서도 많은 탈영병이 생긴 것이다. 이중 절반인 3,745명은 8개의 근위사단에서 도망친 군인이었다. 제93근위소총병사단의 경우 병력의 10%에 해당하는 969명이 탈영 했다. 7월 8일의 전투에서 발생한 공황상태의 패주로 보로네지 전선군 지구에서만 734명의 탈영병이 잡혔다.72)


1943년 한해동안 전선으로부터 25km 떨어진 후방지역에서 NKVD는 무단 이탈한 군인 42,807명과 158,585명의 낙오병을 체포했다. 조사를 거친 뒤 이 중 23,418명이 탈영병으로 판명됐다. 나머지는 원소속부대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18,086명은 1941년의 포위전 당시 잠적했으나 소련군 지역으로 탈출하지 않은 자들이었다. 이들은 심사를 위해 수용소로 보내졌다.73) 심사를 거쳐 일부는 형벌부대로 보내고 나머지는 굴락으로 보냈다.


NKVD는 1942년 부터 1943년까지 적법한 서류 없이 부대를 이탈한 군인 125만명과 낙오병 20만명을 잡아 본대로 복귀시켰다.74) 1944년 부터 1945년까지의 통계는 아직 확보하지 못해서 전쟁 전 기간의 통계는 파악할 수 없다. 예를들어 1944년 봄 기간 동안 NKVD의 후방 경계부대는 전선 후방에서 25,979명의 군인을 잡았다. 조사 결과 이 중 7,573명이 탈영병으로 판명되어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낙오병으로 판명된 나머지는 원대복귀 조치되었다.75) 전쟁 말기까지도 탈영은 심각한 문제였다. NKVD는 벨로루시아가 해방된 1944년 7월 부터 일본이 항복한 뒤인 1945년 9월까지 이 지역에서 부대를 무단이탈한 군인 82,752명을 잡았다.76)


대조국전쟁 전 기간 동안 소련군에서 2,846,000명의 탈영과 징집 기피자가 발생했다.(이중 일부는 여러번 체포되었다.) 이중 1,543,000명은 자수했다. 그리고 군당국은 837,000명을 특별한 처벌 없이 원대복귀 시켰다. 그리고 나머지 212,400명은 체포하지 못했다.77) 전쟁 전기간 동안 군입대, 전투를 거부하거나 적극적으로 적에게 부역한 인원은 최소 4,383,859명에 달한다.78) 이중 군법 체계를 통해 처벌한 것은 병역기피자 251,408명과 탈영병 126,956명 등 고작 8.6%에 불과했다. 처벌 방식은 징벌대대 배속, 노동수용소 수감, 사형 등이었다.79) 탈영이나 병역기피를 포함해 범죄에 연루되어 사형당한 군인은 158,000명이었고 굴락에 수용된 인원은 436,000명 이었다. 그리고 1941년에 군법회의 없이 즉결처분된 군인의 숫자는 알 수 없다.


자료가 부족하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사형이 마구잡이로 집행되는 않았고 군인들도 이점을 잘 알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사형이 군율을 유지하는데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는 재고할 필요가 있다. 독전대가 병사들을 기관총으로 쓸어버리거나 장교나 NKVD 대원이 마구잡이로 즉결처분을 해서 공포감으로 병사들을 통제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소련군에서 탈영이나 징집 기피를 통해 군무를 이탈한 인원의 비율은 총원의 8.2%였다. 군무이탈에 사형을 적용하지 않은 영국군이나 미군이 3% 정도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소련군인들이 싸우는 동기에 공포감은 그리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탈영병이나 비겁자를 처형하는 것은 불필요하고 정당화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물론 일부 병사들은 적의 총알 세례 보다 소련 체제를 더 두려워 했기 때문에 전투에 나섰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소련군인의 대부분이 명령에 따라 싸운 이유는 되지 못한다. 수백만명은 전투를 피하기 위해 죽음도 무릅썼지만, 동시에 더 많은 사람들이 강요나 협박을 받지 않고서도 전쟁에 나섰다. 소련 정권이 자국의 군인들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간혹 충성을 바쳐 싸우던 군인들의 사기가 꺾이곤 했다. 한 병사는 스메르시의 감시를 피해 전우들과 함께 분노에 찬 노래를 불렀다.


“첫 번째 포탄이 내 전차의 연료통을 관통했다.


난 전차에서 탈출했다. 왜 그랬나 몰라.


그래서 난 특무국에 불려갔네.


‘이 새끼야! 왜 끝까지 전차를 지키지 않았냐?’


그래서 난 이렇게 대답했지.


‘알겠습니다. 다음번 공격 때는 꼭 그러겠습니다!’”80)


주석
***) 이 번역문은 전에 포스팅한 북한 번역문을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22) Joseph Stalin, “The German Invasion of the Soviet Union, July 3, 1941 Radio Address,” in The Great Patriotic War of the Soviet Union (New York: International Publishers, 1945), 14-15.
23) TsAMO f.48a, op.3408, d.23, l.353, in Russkii arkiv: Velikaia Otechestvennaia General’nyi shtab v gody Velikoi Otechestvennoi voiny: Document i materialy. 1941 god, vol, 23(12-1), ed. Vladimir Zolotarev(Moscow: Terra, 1998), 61.
24) “Ukaz Prezidiuma Verkhovnogo Soveta SSSR,” and “Zapiska A. Ia. Vyshinskogo V. M. Molotovu,” Istoricheskii arhkiv 3 (2000): 34-35.
25) 핑켈슈테인과의 인터뷰 http://www.iremember.ru/content/view/238/85/lang.en/ (2006년 7월 25일 접속)
26) Organy gosudarstvennoi bezopasnosti SSSR v Velikoi Otechestvennoi voine: Sbornik dokumentov, vol 2, book 2, Nachalo, 1 sentiabria- 31 dekabri 1941 goda (Moscow: Rus’, 2000), 164-165; Rodric Brathwaite, Moscow 1941: A City and Its People at War (London; Profile, 2006), 165.
27) Mansur G. Abdulin, Red Road from Stalingrad: Recollections of a Soviet Infantryman (Barnsley, South Yorkshire: Pen and Sword, 2004), 31.
28) TsA FSB RF f.14, op.4, d.22, ll.45-46, in Stalingradskaia epopeia: Material NKVD SSSR i voennoi tsenzury iz Tsentral’nogo arkhiva FSB RF (Moscow: Zvonnitsa- MG, 2000), 180.
29) TsA FSB RF f.14, op.4, d.912, ll.160-162, ibid., 174.
30) TsA FSB RF f.14, op.4, d.912, ll.167-168, ibid., 191.
31) TsA FSB RF f.14, op.4, d.912, ll.163-166, ibid., 187.
32) Ibid.
33) Arsen Martirosian, 100 Mifov o Berii: Ot slavy k prokliatiiam. 1941-1953 gg.(Moscow: Veche, 2010), 38-39; Organy gosudarstvennoi bezopasnosti SSSR v Velikoi Otechestvennoi voine, 20.
34) Harvard University Refugee Interview Project, #118, 35, 39, Hoover Institution Archives, Stanford University, Stanford, Calif.
35) Organy gosudarstvennoi bezopasnosti SSSR v Velikoi Otechestvennoi voine, 85.
36) Vladimir Zolotarev, ed., Russkii arkhiv: Velikaia Otechestvennaia: Prikaz Narodnogo komissara oborony SSSR (1943-1945 gg.) Vol.13(2-3) (Moscow: Terra, 1997), 326.
37) TsA FSB RF f.14, op.4, d.22, ll.45-46, in Stalingradskaia epopeia, 181-182.
38) TsA FSB RF f.14, op.4, d.386, ll.22-24, ibid., 230.
39) S. Khomenko, “Disciplinary Battalion Joins Battle,” Soviet Soldier 11 (1990): 36-38
40) “Iz pisem P. S. Amosova,” Istoricheskii arkhiv 3 (2007): 44-45.
41) 마트베이 게르시만과의 인터뷰, http://www.iremember.ru/infantry/gershman/gershman_r.htm (2005년 7월 7일 접속)
42) Iu. V. Rubtsov, “Put’ v nikuda ili shans dlia ostupivshegosia? Shtrafnyi chasti v pis’makh uchastnikov Velikoi Otechestvennoi voiny,: Istoricheskii arkhiv 3 (2007): 37, 305. G. F. Krivosheev et al., Velikaia Otechestvennaia bez grifa sekretnosti. Kniga poter’ (Moscow: Veche, 2010)
43) Zolotarev, Russkii arkhiv, vol. 13(2-3), 198.
44) Krivoshev et al., Velikaia Otechestvennaia bez grifa sekretnosti, 41; Rubtsov, “Put’ v nikuda ili shans dllia ostupivshegosia?” 36, 37.
45) Zolotarev, Russkii arkhiv, vol. 13(2-3), 332-333.
46) Ibid., 338.
47) “Iz pisem V. G. Sorokina,” Istoricheskii arkhiv 3 (2007): 53.
48) 셸레포프와의 인터뷰.
49) Catherine Merridale, “Culture, Ideology, and Combat in the Red Army, 1939-45,” Journal of Contemporary History 41, 2(2006): 318.
50) TsA FSB RF f.14, op.4, d.287, ll. 150-154, in Lubianka v dni bitvy za Moskvu: Materialy organov gosbezopasnosti SSSR iz Tsentral’nogo arkiva FSB Rossii, ed. V. K. Vinogradov (Moscow: Evonnitsa-MG, 2002), 305.
51) G. Bukhanstev memoir, 1941-1945, 2-3, Bakhmeteff Archive, Rare Books and Manuscript Library, Columbia University, New York.
52) 에핌 골브라흐와의 인터뷰, http://www.iremember.ru/content/view/57/75/lang.en/ (2006년 7월 16일 접속)
53) RGASPI f.17, op.162, d.28, l.73, in Lubianka. Stalin i NKVD-NKGB-GURK “Smersh” 1939-mart 1946. Arkhiv Stalina. Dokumentry vysshikh organov partiinoi i gosudarstvennoi vlast, ed. V. N. Khaustov (Moscow; Materik, 2006), 184.
54) AP RF f.3, op.57, d.59, l.67, ibid., 350-351.
55) Richard Overy, The Dictators: Hitler’s Germany, Stalin’s Russia (New York: W W. Norton, 2004), 297-298.
56) Ivan Stadniuk, “Na podstupakh k stolitse,” in Zhiviaia Pamiat’: Velikaia Otechestvennaia: Pravda o voine v trekh tomakh, vol. 1, ed. V. I. Bogdanov (Moscow; Sovet veteranov zhurnalistiki Rossii Soiuz Zhurnalistov, 1995), 124-125.
57) RGANI f.89, op.18, d.8, ll. 1-3, in Lubianka. Stalin i NKVD, 317-318.
58) 알렉세이 실린과의 인터뷰, http://www.iremember.ru/content/view/128/76/lang.en/ (2006년 7월 19일 접속)
59) 세묜 라빈스키와의 인터뷰, http://www.iremember/ru/content/view/59/73/lang.en/ (2006년 7월 16일 접속)
60) Vasily Grossman, A Writer at War: Vasily Grossman with the Red Army 1941-1945, ed. and trans. Antony Beevor and Luba Vinogradova (London: Harvill Press, 2005), 71.
61) “Narodnomu komissaru vnutrennikh del SSSR General’nomu komissaru gosudarstvennoi bezopasnosti tovarishchu Beriia,” Istopricheskii arkhiv 3 (2000): 37-38.
62) Review by Evan Mawdsley, War in History 4, 2(1997): 230.
63) Robert Stephan, “Smersh: Soviet Military Counter-Intelligence during the Second World War,” Journal of Contemporary History 22, 4 (October 1987): 587-592.
64) 블라디미르 호흘로프와의 인터뷰, http://history.vif2.ru/library/memoirs2.html (2001년 1월 24일 접속)
65) Manfred Messerschmidt, “Deutsche Militärgerichtsbarkeit im Zweiten Weltkrieg,” in Die Freiheit des Anderen, ed. Hans-Jochen Vogel, Helmut Simon, and Adalbert Podlech (Baden-Baden: Nomos, 1981); Robert S. Rush “A Different Perspective: Cohesion, Morale, and Operational Effectiveness in the German Army, Fall 1944,” Armed Forces and Society 25-3 (Spring 1999): 488-489.
66) Omer Bartov, Hitler’s Army: Soldiers, Nazis, and War in the Third Reich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2), 95-96.
67) George Q. Flynn, Conscription and Democracy: The Draft in France, Great Britain, and the United States (Westport, Conn,: Greenwood, 2002), 251-252.
68) Gerard Oram, “The Administration of Discipline by the English is very Rigid’: British Military Law and the Death Penalty (1868-1918),” Crime, History, and Societies 5, 1(2001): 94.
69) Robert H. Ahrenfeldt, Psychiatry in the British Army in the Second World War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58), 271-275.
70) Ibid., 273-274, 275.
71) Paul O’brien, “Summary Executions in Italy during the First World War: Findings and Implications,” Modern Italy 11, 3(November 2006): 353-359.
72) Iurii Konnov, “Voiska NKVD SSSR po okhrane tyla deistvuiushchei Krasnoi Armii v kurskoi bitve (Belgorodskoe napravlenie),” Voeeno-istoricheskii arkhiv 3 (March 2006): 144-145.
73) GARF f.9401, op. 2,d. 64, ll. 9-13, in Khaustov, Lubianka, Stalin i NKVD, 406-409.
74) RGVA f.38650, op.1, d.313, ll.10-41.
75) GARF f.9401, op.2, d.65, ll.325-327, in Khaustov, Lubianka. Stalin i NKVD, 438-440.
76) GARF f.9401, op.2, d.99, ll.167-69, ibid., 537-538.
77) Grigorii F. Krivosheev, “O dezertirstve v Krasnoi Armii,” Voenno-istoricheskii zhurnal 6(2001): 94; Krivosheev et al., Velikaia Otechestvennaia bez grifa sekretnosti, 41.
78) 이 통계를 산출한 방식은 확실치 않다. 여기에는 중복 집계된 인원도 상당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이 수치는 탈영, 낙오 그밖의 사례가 발생한 건수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을 것이다.
79) Krivosheev et al., Velikaia Otechestvennaia bez grifa sekretnosti, 41.
80) 쿠르노소프는 전쟁이 끝난뒤 어떤 군인의 친척으로 부터 이 노래를 처음 들었다. 이 증언은 S. Seniavskaia, “Heroic Symbols: The Reality and Mythology of War,” Russian Studies in History 31, 1(1998): 34에 실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