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February 27, 2009

환율

환율 1,530원대로…11년만에 최고치

잃어버린 10년을 되찾았는데 별로 기쁘진 않다.

The Evolution of Nuclear Strategy

책을 읽다 보면 가끔 “왜 이런 책이 우리나라에서는 번역되지 않는 걸까?”하는 의문이 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로렌스 프리드먼(Lawrence Freedman)의 The Evolution of Nuclear Strategy도 그런 책 중 하나입니다.

한국은 심심할 때 마다 북한의 핵공갈이 튀어나오는 국가인 만큼 핵전략에 대한 의문도 많을 법 한데 의외로 ‘핵전략’에 대한 관련 서적 찾아 보기가 어렵더군요. 북한 핵문제와 관련된 서적들은 많지만 순수하게 ‘핵전략’ 자체에 초점을 맞춘 서적은 잘 보이지가 않습니다. (물론 도서출판615에서 나오는 쓰레기들은 제외하고) 도서검색을 해 보면 냉전이 한창이던 1980년대에는 핵전략에 대한 서적들이 제법 번역된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냉전이 종식된 이후에는 핵전략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었는지 ‘핵전략’에 대한 서적이 소개되는 것을 찾아보기 어렵더군요.

하지만 잊을 만 하면 기어 나오는 북한의 핵공갈에서 볼 수 있듯 핵무기가 가지는 정치적 위상은 냉전이 끝났어도 여전합니다. 미국과 러시아의 핵무기는 여전히 ‘최종’ 수단으로 존재하고 있지요.

프리드먼의 The Evolution of Nuclear Strategy는 핵무기 문제에 대한 잘 씌여진 개설서 입니다. 1981년에 초판이 나온 뒤 2003년에 제 3판이 나왔으니 거의 30년은 된 책이지요. 여전히 개설서로서 좋은 평을 받으면서 꾸준히 나온다는 점에서 후한 평가를 할 수 있겠습니다. 꾸준히 개정판이 나오면서 새로운 내용도 추가되었는데 1980년대의 핵 전략과 냉전 종식 이후의 핵무기 문제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본질적으로 미국 독자들을 대상으로 쓰여졌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물론 냉전시기 핵무기 경쟁의 주된 참여자는 미국과 소련이었지만 그렇다 치더라도 영국, 프랑스, 중국에 대한 서술이 지나치게 적습니다. 그나마 유럽은 중요하게 다뤄지는 편이라 7장이 유럽의 핵문제에 할애되어 있고 이 중에서 한 절은 영국에, 나머지 한 절은 프랑스와 서독의 핵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유럽국가들에 대한 서술이 이렇다 보니 인도나 파키스탄은 그야말로 듣보잡으로 취급되고 있으며 책 후반부에 짤막하게 언급되는 수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개설서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이 책은 전략폭격의 하위 수단으로 인식되던 1940년대의 초보적 핵 전략에서 상호파괴확증전략(Mutual Assurance of Destruction)으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 그리고 핵전략의 발전 과정에 영향을 끼친 여러 이론들을 역사적 배경과 함께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터넷 백과사전에 나오는 간략한 설명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하겠다는 분들에게 아주 유용한 참고서적이 아닐까 싶습니다.

북한의 핵공갈이 튀어나올 때 마다 우리도 핵무기를 가지면 된다는 단순한 이야기가 반복되는 걸 보면 왜 이런 책은 번역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Tuesday, February 24, 2009

한국군의 소총에 대한 잡담

슈타인호프님이 한국전쟁 발발을 전후한 시기 국군과 경찰의 총기 문제에 대해서 재미있는 글을 한 편 써 주셨는데 사족을 조금 달아보려 합니다.

잘 알려져 있다 시피 1948년 초 NSC8이 작성될 당시 미국 국무부와 국방부는 한국군에 대한 군사원조를 5만명 수준으로 제한했습니다. 즉 소화기는 5만명 분을 원조한다는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1948년 말부터 한국 정부가 독자적으로 병력을 증강하면서 애초 미국이 상정한 병력 상한선을 돌파해 버리자 미국은 이승만 정부와 병력규모를 놓고 협상할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그 결과 1949년 2월 미육군부 장관 로얄(Kenneth Claiborne Royall)웨드마이어(Albert Coady Wedemeyer) 중장을 대동하고 이승만과 회견합니다. 이 회견이 있은 뒤 미국은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 규모를 육군 6만5천명으로 상향조정합니다. 이 내용은 1949년 3월 16일의 NSC8/1에 반영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NSC8/1에 반영된 군사원조가 당장 이행될 수 없다는 것 이었습니다. 여기서 추가된 1만5천명분의 소화기는 1950년도 회계연도 군사원조가 결정된 이후에야 이행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한미군이 철수한 시점에서 한국군은 5만명 분의 미제 소화기만을 장비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한국정부가 독자적으로 육군을 7만5천명 수준으로 증강을 해 버렸기 때문에 일선 부대의 소화기 부족은 매우 심각했습니다.

참고로 1949년 6월경 국군 제7연대와 제10연대의 장비현황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표에 잘 나타나듯 두 연대는 미제 소화기의 부족으로 편제를 초과하는 일본제 99식 소총을 갖추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화기가 편제에서 크게 미달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7보병연대는 미제 소총이 300여정 부족하며 제 10연대는 미국제 소총이 인가량에서 1200정 가량 미달하고 있습니다. 두 연대 모두 부족분을 일본제 소총으로 보충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연대의 경우 소총이 없는 병력이 200명이나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부 공용화기도 편제에서 미달하고 있으며 특히 기관총과 바주카포의 부족이 두드러지지요. 이 두 연대는 비교적 초기에 창설된 연대이지만 신규 창설 부대를 위해 장비를 차출해야 했기 때문에 1949년 6월 시점에서는 공용화기는 물론 기본적인 소총 마저 부족했습니다.

그리고 국군병력은 1949년 8월 시점에는 10만명에 육박해 버리지요. 그야말로 난감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1949년 6월 이후 이승만과 미국 대사관, 군사고문단간의 협상은 나머지 5만명분의 미제 소총과 덤으로 중장비를 원조받는 문제였습니다. 물론 미국 정부는 NSC8/1과 수정안 8/2에 의거해 1만5천명분의 장비만 더 줄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그렇지만 NATO의 창설과 같은해 통과된 상호방위원조법안(Mutual Defense Assistance Act) 때문에 미국의 지원능력에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한국은 상호방위원조법안에 명시된 원조 우선순위 13위(15개 국 중에서)였기 때문에 충분한 원조 예산이 배정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한국에 배당된 원조액을 맞추기 위해서 1만5천정의 M-1 소총 대신 퇴출된 장비인 M-1903 스프링필드 소총을 대신 원조한다는 결정이 내려집니다.
1950년 5월 26일 미육군 군수국은 상태가 양호한 3만정의 M-1903 재고를 확보했으며 NSC8/2에 의거해 이 중 2만정을 수리해서 한국에 보내기로 결정합니다. 수리비용을 포함해 책정된 비용은 1정당 20달러로 총 30만 달러였습니다. 한국으로 보낼 2만정의 M-1903 소총이 정비창으로 보내진 것은 1950년 6월 19일 이었는데 2만정 모두를 사용 가능 상태로 수리하는데 90일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

그러나 불과 일주일 뒤에 수령님이 땅크를 몰고 쳐들어 왔기 때문에 한국군이 스프링필드 소총을 만져볼 기회는 없어졌습니다.

조병옥 박사의 놀라운 연기력

조병옥 박사가 이미 일제의 패망 전에 원자폭탄의 개발을 예언한 일에 대해서는 지난번에 이야기 한 바 있습니다.

사실 이런 예지력을 갖췄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심히 곤란하기 때문에 조박사께서는 각별히 조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간악한 일제의 귀에 이 소문이 들어간다면 조국의 독립이 물 건너 갈 수 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던 조박사는 겉으로는 충량한 황국신민인 것 처럼 위장을 했습니다.

장덕수와 조병옥이 영국인들과 미국인들에 대한 의분(義憤)을 고조시키고자 ‘그들에 대한 오해를 어떻게 바로잡을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일본어가 꽤 유창한 장군은, 관계 당국이 현재 육지와 바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황을 좀더 자세히 알려주어야 하고, 미얀마와 필리핀의 독립에 대한 정부의 입장이나 계획이 명료하게 설명되고 또 실행에 옮겨져야 한다고 제안했다. 조군은, 조선인들은 정부의 충량한 병사가 되기로 결심을 하는 한편 정부는 조선인들에게 총리대신이나 대사가 될 수 있다는 청사진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야기(八木信夫) 보안과장과 하다(波田重一) 장군이 이 발언에 대해 상당히 언짢아 했다.

윤치호의 1943년 2월 28일 일요일자 일기 중에서

윤치호/김상태 편역, 『윤치호 일기 1916~1943 – 한 지식인의 내면세계를 통해 본 식민지시기』, 역사비평사, 2001, 495쪽

조병옥 박사의 연기가 얼마나 뛰어났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물론 이렇게 자신의 예지력을 감추기 위해 충량한 황국신민으로 위장하셨던 조박사께서 왜 고향 동네의 사람들에게는 원자폭탄의 개발을 술술 털어놓으셨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아마 조박사께서는 동네 사람들이 일제에게 자신의 예지력을 밀고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도 간파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믿거나 말거나.

波田重一를 읽는 법에 대해서 배군님께서 지적을 해 주셨습니다. 배군님이 지적해 주신게 맞는것 같은데 저도 한번 확인을 해 보고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항상 좋은 조언 해 주시는 배군님께 다시 한번 감사를^^

Saturday, February 21, 2009

재활용

언제나 그렇듯 난감한 청와대소식.

회전문 by Sprinter

국정원 2차장에 김석기?



가카의 알뜰함은 정말 대단합니다. 무엇이든 함부로 버리지 않고 항상 재활용을 고심하시니 그야말로 눈물이 나네요.

그런데 이건 다른 손님이 먹다 남긴 단무지를 재활용하는 중국집을 보는 느낌이네요.

소비자보호원에 신고해야 겠어요.

비밀

예전에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본과 미국의 용병(用兵) 상의 연구가 흡사 부절(符節)을 합한 것과 같이 일치하는 점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등 불가사의하다고 할 수 없다. 국방용병이나 군사기밀이라고 하는 것은 요컨대 상식의 문제이기 때문에, 정확한 자료에 기반하여 신중한 연구를 거듭한다면 결국 동일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일본해군 군령부장 가토히로하루(加藤寬治), 1930년

가토요코 저/박영준 역, 『근대 일본의 전쟁논리 - 정한론에서 태평양 전쟁까지』, 태학사, 2003, 206~207쪽

가토히로하루의 이 발언은 제 개인적으로 '비밀'의 핵심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군사기밀 뿐 아니라 사회의 다른 여러가지 문제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얼핏 보기에 불합리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자료를 모으고 분석을 거듭 하면 그 실체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불합리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생기면 시간이 걸리는 분석 보다는 당장 귀에 들어오는 말들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사실 이 점에 있어서 자유로운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저도 게으르고 편한 것을 좋아하다 보니 이런 함정에 자주 빠지곤 하지요.

그리고 여기서 한 발짝 더 나가면 요상한 음모론에 빠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민감한 사건들에 음모론이 꼬이는 이유도 본질적으로는 무엇인가 상식을 벗어난 특별한 것이 있지 않겠느냐는 인식 때문이지요. 하지만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고 막상 일급기밀 문서들이 공개되면 대부분은 상식적으로 짐작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말은 쉽지요. 사실 요즘은 정보의 쓰나미 때문에 정신을 차리기가 정말 어렵더군요. 당장 제 자신을 돌아보니 사회적으로 민감한 일이 터지면 뭔가 말은 꺼내고 싶은데 처리해야 할 정보는 산더미 같고 귀찮다 보니 그냥 넘겨버리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그러고 보면 S****t님이나 S******r님 등 이글루의 거물들은 정말 대단하신듯.

※ 배군님이 인용문의 오류를 지적해 주셔서 수정했습니다.

안도감

1달러당 원화가 1,500원대를 돌파한 것을 보니 말이 안나옵니다.

지난해 말 정부의 개입으로 1,200원 중후반까지 떨어졌을 때 지금 책을 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과감하게 여러권을 질렀는데 지금 생각하면 정말 잘 한 결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만약 더 떨어지길 기대하다가 늦게 주문했으면 지금쯤 울화통이 치밀어 실신했을 듯 싶군요.

경제 관련 뉴스들을 보면 1,400원을 한 번 넘어가면 상승세가 꺾이기 어려울 것이라고 하는데 지금이 고점일지, 아니면 계속 상승할 지 궁금하군요.

이번 용역이 끝나고 돈 받을 때 쯤에는 환율이 1,200원 이하로 떨어졌으면 싶습니다.

Thursday, February 19, 2009

대인배가 갖춰야 할 기본 소양

동방의 대인배 마오주석TM께서 중소우호조약 체결을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하셨을 무렵의 일화라는군요.

모택동이 장개석을 화제에 올렸는데 스탈린이 갑자기 진백달(陳伯達)을 상대로 말을 꺼냈다.

“아, 그렇지. 진백달 동지가 쓴 『인민공적 장개석』이라는 책을 나도 읽어 보았소.”

진백달은 원래 한켠에 앉아서 조용히 듣고만 있었는데, 스탈린이 자기의 저작을 언급하자 기뻐서 어쩔 줄 몰랐고 한결 활기를 띠게 되었다. 통역의 말을 기다릴 것 없이, 노어를 아는 진백달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스탈린의 관심은 모택동한테서 진백달에게로 옮겨졌다.

(중략)

이렇게 되다보니 비서인 진백달이 한동안 대화의 중심이 되고 모택동이 도리어 한편에서 듣기만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이야기에 열을 올린 스탈린은 술잔을 들더니 진백달의 앞으로 걸어왔다.

“중국의 역사학자이고 철학가인 진백달 동지를 위하여 건배!”

라고 하였다.

진백달은 자기도 잔을 들고 답례를 하였다.

“세계에서 제일 걸출하신 역사학자이시며 철학가이신 스탈린 동지를 위하여 건배합시다!”

실로 진백달로서는 당시 분위기에 맞지 않는 거동이었다. 모택동의 존재를 전혀 무시하는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진백달은 최고위급 회담에서 자기가 각광을 받았노라고 무척 기뻐하였다.
회담 중에 생긴 이런 비정상적인 현상에 대하여 모택동은 심히 불쾌해 하였으며 특히 진백달의 분수를 모르는 경거망동에 대하여 더욱 분노를 금할 수 없었다.

심야에 회담은 끝났고 스탈린도 돌아갔다. 진백달이 여전히 흥분을 가라 앉히지 못하고 있는데, 갑자기 모택동의 연락을 접하게 된다. 다음 부터는 회담에 참가하지 말라는 것 이었다.

그 후에 있는 몇 차례의 회담에 진백달은 한 번도 참가하지 못 하였다.

섭영렬/최재우 역, 『모택동과 그의 비서들』, (화산문화, 1995), 212~213쪽

넵. 전에 소개한 스탈린 동지의 이야기 처럼 ‘쪼잔함TM은 대인배의 기본 소양이라 하겠습니다.


잡담 1. 진백달은 이후 모택동의 신임을 크게 잃긴 했지만 계속해서 모택동의 비서직을 수행했습니다.

잡담 2. 진백달은 문화혁명 기간 중에 숙청되어 1971년에 투옥되지요. 게다가 이게 끝이 아닌게 4인방이 타도된 뒤에는 임표∙강청 반혁명집단의 일원으로 지목되어 징역 18년을 선고 받았습니다.

Tuesday, February 17, 2009

한편, 동아일보 사이트는...



동아일보 인터넷 판에서는 미네르바 관련 사과문을 구석에 실어놨습니다.

아무래도 동아일보사에서는 자신들의 오보를 언제 인정하나 고심하다가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 소식을 듣자 이때다 싶어 사과문을 실은 듯 싶군요.

정말 안습.

신동아의 굴욕

동아일보 미네르바 사과문 게재


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군요.

동아일보사가 조선일보에 광고를 내 신동아 기사 "미네르바 가짜설"에 대한 사과를 냈습니다.

80년대에는 신동아가 월간지로서 쓸만한 기사도 많이 내더니 90년대 이후 질이 떨어지면서 결국 이꼴이 됐군요.

안습입니다.

Sunday, February 15, 2009

[妄想劇場] 3000

줄거리

서기 660년. 당나라가 백제에 사신을 보내 항복을 요구하자 분노한 의자왕의 왕비는 당의 사신을 우물에 처 넣는다.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의 13만 대군이 백제에 상륙하고 김유신의 신라군도 동쪽에서 쇄도해 오면서 백제는 풍전등화의 위기를 맞게 된다.

나라를 지키기로 결심한 의자왕의 왕비는 3천 궁녀를 이끌고 당나라 군대와 결전에 나서는데.

당나라의 13만 대군은 맹렬한 공격을 퍼 붓지만 3천 궁녀의 결연한 저항에 패배를 거듭한다.

마침내 당나라는 의자왕의 왕비를 회유하기 위해 비장의 카드를 내 놓는데…

드디어 의자왕의 왕비와 3천 궁녀 앞에 모습을 드러낸 모든 음모의 배후 측천무후. 그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의자왕의 왕비를 유혹한다.

“나는 관대하다…”

과연 의자왕의 왕비와 3천궁녀의 운명은 어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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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 영화 ‘3000’ 섹시 마케팅 ‘후끈

올 여름 화제의 한국형대하역사블록버스터 ‘3000’이 개봉 전부터 섹시 마케팅으로 입소문을 타고 있다. 특히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비키니를 입은 3천궁녀가 당나라 13만 대군과 맞서는 장대한 전투 장면. 제작사 관계자는 한국 영화사상 가장 섹시한 장면이 될 것이라며 기대감을 높였다. 또한 시사회를 관람한 관계자들에 따르면 영화의 절정부분에서 황금 비키니를 입은 측천무후가 의자왕의 왕비를 회유하는 장면은 마치 동성애 관계를 암시하는 듯 했다는 후문이다. 홍보사는 메인 포스터를 비키니를 입은 의자왕의 왕비와 3천궁녀로 꾸미고 섹시함을 강조한 홍보에 나선다는 전략이다.

죠센일보 20XX 7월 15일자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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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영화 ‘3000’ 감독 듣보잡 인터뷰

기자 : ‘3000’이 개봉 전부터 화제를 뿌리고 있다. 헐리우드 영화 ‘300’과 제목과 내용이 유사하다는 지적이 있는데.

듣보잡 : (버럭) 그것은 오해다. 원래 시나리오는 ‘300’보다 ‘3000’이 먼저 나왔다. 다만 자금 조달문제로 제작이 연기되다 보니 그 와중에 ‘300’이 먼저 나왔을 뿐이다. ‘300’보다 0이 하나 더 많다고 아류작으로 보지 말아 달라.

기자 : 내용에서도 말이 많다. 전설에 따르면 3천궁녀가 낙화암에서 목숨을 끊었다고 되어 있는데 영화에서는 당나라 군대를 도륙하고 있다.

듣보잡 : (버럭) 그것은 백제가 멸망한 뒤 역사를 서술한 신라의 조작이다. 우리는 패배한 백제의 입장에서 역사를 새로이 조명하고자 했다.

기자 : 삼국사기 등을 보면 의자왕의 왕비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는데.

듣보잡 : (버럭) 그것은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이 유학자라는 점에서 봐야 할 것이다. 가부장적인 유학자들의 서술인 만큼 여성에 대한 긍정적인 서술을 의도적으로 왜곡하거나 누락했을 것이다. 그리고 의자왕의 왕비가 당나라 군대와 싸우지 않았다는 기록도 없지 않은가?

기자 : 영화의 절정에서 측천무후가 의자왕의 왕비를 유혹하는 장면이 있다. 실제로 측천무후가 백제에 온 일은 없지 않은가?

듣보잡 : (버럭) 마찬가지이다. 측천무후가 백제에 오지 않았다는 기록도 없지 않은가? 시나리오 작가의 상상력을 제약하지 말아 달라.

기자 : 3천궁녀의 의상이 너무 선정적이라는 지적이 있다. 백제시대에 비키니가 있었는가?

듣보잡 : 자료가 거의 없다 보니 고증문제로 미술팀이 고생을 많이 했다. 고심 끝에 당나라 군대와 맞서는 3천궁녀의 씩씩한 건강미를 표현하기 위해 비키니로 의상을 통일했다. 결코 제작비가 부족해서 헐벗게 한 것은 아니다.

경양신문 20XX 7월 15일자 20면

Thursday, February 12, 2009

손학규 전 대표에 대한 추억

문수훃의 화려한 개그

경기도지사는 정말 머리 좋은 사람 바보로 만드는 이상한 자리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에 대한 추억이 하나 떠오르는군요.

이 양반이 아직 경기도지사로 있던 몇 년 전.

이 어린양의 아버지께서 표창을 받으러 가실 일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 표창을 받으시니 아들로서 당연히 따라갔지요.

마침 경기도지사 표창을 받는다고 해서 시청에서도 담당 공무원이 한 분 따라 나왔습니다. 대략 40대 중반 정도 된 분이었습니다.

이날 손학규 지사는 컨디션이 좋지 않았는지 연설하는 자리에서 횡설수설을 하다가 내려왔습니다. 듣는 입장에서 재미없고 지루해 죽을 지경이더군요.

마침내 상을 주고 악수하는 자리.

제 아버지의 차례가 왔습니다.

손학규 지사가 제 아버지와 악수를 한 뒤 옆에 있던 시청 공무원을 보고 말하길.


"선생님은 아드님을 참 잘 두셨군요."


순간 손학규 지사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버~엉 쪘습니다.

손학규 지사의 옆에 있던 도청 공무원이 조금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이분 아드님은 이쪽입니다."

하고 해명했습니다. 그러자 손학규 지사는 멋쩍은 표정으로 "허허" 하더니 지나가더군요.

이 일이 있고 나니 손학규 지사의 앞날이 별로 밝아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Wednesday, February 11, 2009

[妄想大百科事典] 정론지(正論紙)

[妄想大百科事典] 정론지(正論紙)

특정 정파의 입맛에 맞는 활자매체를 해당 정파가 높여 부르는 말.

특정 매체가 특정 정파로 부터 정론지 호칭을 받을 경우 그 매체의 신뢰성에 대해 심각하게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한편, 정론지라 하더라도 특정 정파의 입맛에 맞지 않는 보도를 할 경우에는 단번에 해당 정파에 의해 찌라시로 격하되기도 한다.

전문가들은 특정 정치집단의 정론지 타령은 정치 의식의 저열함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보고 있다.

Tuesday, February 10, 2009

이박사는 밀리터리매니아?

1949년 초의 어느 날, 국무회의에 참석한 이박사께서 갑자기 이런 이야길 하셨습니다.

찦車에 鐵板을 加工하야 鐵匣車를 우리의 손으로 優良品을 생산할 수 있다하니 五十臺 可量 製作하여 보는 것도 좋겠다.

第十二回 國務會議錄, 檀紀四二八二年 一月二十一日

이박사 말씀인즉, 이런 물건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죠.


아무래도 건국 초의 대한민국은 안보적으로 불안한 나라이다 보니 대통령인 이박사가 군대에 관심이 많은건 당연하겠습니다만 이렇게 시시콜콜한데 까지 신경쓰는걸 보면 좀 묘합니다. 물론 다른 기록을 보더라도 이승만은 군사 무기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였다는건 알 수 있습니다만 이런 잡다한 물건까지 관심을 가질 줄이야. 어쩌면 우리의 초대 대통령은 밀리터리매니아 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대한민국이 충분한 돈과 기술이 있었다면 이박사의 국방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었을까요 아니면 더 매니악한 기질을 발휘해 히총통 처럼 됐을까요? 하여튼 여러모로 재미있는 양반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박사에게 지프를 개조해 장갑차를 만들자는 이야기는 누가 처음 꺼냈을까요? 이게 정말 궁금합니다.

Sunday, February 8, 2009

구글 블로거의 아쉬운 점

제가 구글 블로거(Blogger)를 사용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지극히 단순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좀 요란한 것을 싫어 하다보니 네이버 블로그 같이 화려한 블로그 서비스는 피곤해서 쓸 수가 없습니다.

이런 단촐한 면이 크나큰 매력이지만 단점도 많습니다.

제 블로그에서 누차 이야기 했지만 트랙백이 되지 않아 할로스캔(Haloscan)같은 외부 서비스를 끌어다 써야 하고 이러다 보니 가끔 댓글이 제대로 표시 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제가 지우지도 않은 댓글을 지웠다고 욕을 먹기도 하니 이건 정말 고역이죠.

그런데 가장 아쉬운 점은 레이블이 제한된다는 점 입니다. 블로거에서는 다른 블로그의 태그와 같은 레이블이 있는데 이게 글자수 제한이 있어서 경우에 따라 필요한 내용을 다 입력할 수가 없습니다. 방금전 올린 글도 마찬가지 경우입니다. 레이블에 표시해야 할 내용이 많은데 그럴 수 가 없으니 정말 아쉽군요.

미국 합동참모 본부의 대소 작전계획 : 1945~1950

지난해 11월에 미국 극동군사령부의 작전 연구안 Gunpowder의 내용에 대해 간략히 소개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연구안은 합동참모본부의 작전 계획의 하위 개념으로 연구된 것이었기 때문에 상위 계획인 미 합참의 전쟁계획안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간단히 1945년부터 한국전쟁 발발 이전까지 미 합참이 수립한 여러 개의 전쟁계획에 대한 글을 쓰려 했었는데 깜빡하고 넘어간 것이 벌써 석 달 째로군요.

이 글에서는 Steven T. Ross의 American War Plans 1945~1950의 내용을 골격으로 하고 여기에 다른 서적의 내용을 일부 참고해서 냉전 초기 미 합참의 전쟁 계획들에 대해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1. 소련의 위협에 대한 미 합참의 평가

미 합참은 1944년부터 전후 세계에서 소련이 미국과 대등한 강대국으로 부상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 놓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2차대전이 종결된 지 2개월 남짓 지난 1945년 10월 9일에는 합참 예하의 합동전략조사위원회(Joint Strategic Survey Committee)에서 소련과 협상을 통해 유럽과 태평양 지역의 안정을 이루는 것이 어려워 졌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합니다. 합참은 이 보고서를 받아 들인 뒤 10월 16일에는 소련군의 전력에 대한 정보평가를 검토했는데 여기에 따르면 소련군은 동원해제 이후에도 병력 441만1천명, 113개 사단 및 410개 항공연대를 유지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이 예측에 따르면 동원해제 이후의 미 육군은 소련의 위협에 적절히 대응할 수 없었습니다. 합참은 만약 소련이 1945년에서 1948년 사이에 전쟁을 시작한다면 영국을 제외한 전 유럽을 석권할 수 있을 것으로 평가했습니다. 물론 1945년 10월 시점에서는 아직 냉전이 격화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미 합참은 소련이 전쟁을 먼저 도발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한편, 1945년 11월 16일에는 미국의 주요 동맹국인 영국과 프랑스의 전력에 대한 평가 보고서가 제출됐는데 이 보고서는 프랑스의 전력은 극도로 빈약하고 영국은 본토 방어에 급급하거나 기껏 해야 수에즈 운하 일대를 방어할 능력밖에 없다고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미 합참은 계속해서 소련의 전략적 의도와 능력에 대한 분석을 계속했습니다. 1946년 1월 31일에 합참 예하 합동정보위원회(Joint Intelligence Committee)가 제기한 소련의 전략적 목표에 대한 문제제기는 소련의 전쟁 도발 가능성을 제기했습니다. 합동정보위원회는 소련은 경제 복구를 위해서 향후 5년간은 전쟁을 피하겠지만 만약 스탈린이 다른 국가들의 저항 의지를 과소평가한다면 무력도발을 감행할 가능성도 있다고 보았습니다. 흥미롭게도 합동정보위원회에서는 1946년 7월 9일에 전후 안정을 위해서 소련과 세력권을 분할하는 방안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합참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만.
전후 처리 문제로 소련과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미 합참은 소련과의 전쟁 가능성에 대해 더욱 더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1946년 11월 6일의 합참 정보평가에서는 향후 10년 내에 소련과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을 상정했으며 소련이 1956년까지 미국을 타격할 수 있는 전략공군과 150발의 원자폭탄을 보유할 수 있다고 예측했습니다. 특히 이 평가에서는 소련이 재래식 전력의 우위 때문에 미국이 핵 전력의 우위를 가지고 있더라도 유럽과 아시아 본토를 상실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미국은 2차대전 종결 이후 급속히 군사력을 감축하고 있었고 특히 육군이 집중적으로 감축되었기 때문에 대륙의 지상전에서 소련을 저지할 가능성은 낮았습니다.


2. Pincher 계획과 그 보완계획 – 최초의 대소 작전계획

1946년 3월 2일, 합참 예하의 합동전쟁기획위원회(Joint War Plans Committee)는 소련과의 전쟁을 상정한 핀처(Pincher) 계획안을 제출합니다. 이 계획안은 소련이 전면전을 도발하는 것이 아니라 우발적으로 시작한 도발이 전면전으로 확대되는 상황을 가정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소련과의 전쟁에 대비한 전략적 차원의 첫 번째 작전계획이기도 했습니다.

이 계획안은 소련이 그리스와 터키, 이란 방면으로 이익을 획득하려 압력을 가하는 상황을 상정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소련이 터키를 장악한다면 이것은 영국의 중동에 대한 통제력에 큰 위협이 될 것이기 때문에 소련의 터키 침공은 영국과의 충돌을 가져와 이것이 3차대전으로 확전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소련은 전쟁 발발시 총 113개 사단과 동맹군 84개 사단을 동원할 수 있으며 이 중 40개 사단을 터키 및 중동 방면의 침공에 투입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이에 대해 영국은 총 20개 사단을 동원할 수 있으며 수에즈 운하 지구를 방어할 수 있을 것으로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소련이 영국의 참전과 동시에 서유럽에서 전면적인 공세로 나서는 것 이었습니다. 이 계획안은 미군과 영국, 프랑스군의 전력으로는 기껏해야 라인강 선에서 지연전을 펴는 것 이상은 할 수 없을 것으로 평가했습니다. 또 오스트리아 방면의 연합군은 이탈리아로 철수해 포 강을 끼고 방어선을 형성할 계획이었지만 만약 소련군이 총력을 기울인다면 이탈리아는 함락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핀처 계획은 소련과의 전면전이 발발할 경우 초기부터 지상전에 휩쓸려 소모되는 것을 피하고 미국이 가진 해군과 공군의 우세를 살리는 방안을 추천했습니다. 서유럽은 포기하되 영국, 이집트, 인도, 이탈리아(방어가 가능하다면), 중국을 거점으로 소련에 대한 봉쇄와 전략 폭격으로 대응하자는 것 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계획에서는 서유럽을 탈환하는 것은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소련군에 점령된 서유럽을 탈환하기 위해 상륙작전을 감행한다면 숫적으로 열세인 미 육군이 소모전에 말려들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같은 이유로 레닌그라드나 무르만스크, 리가 등 소련의 해안지역에 상륙하는 것 또한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핀처 계획의 초기안은 문제가 많았습니다. 병력 감축으로 제한된 미군의 능력을 고려한 계획이기는 하지만 이 계획에는 소련에 어떻게 승리할 것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핀처 계획에 대한 추가 연구는 계속 되었는데 추가 연구에서는 극동에서 소련군이 공세로 나올 경우 만주와 한반도는 소련에게 넘겨주고 미 지상군은 일본으로 철수하는 방안이 채택되었습니다. 핀처 계획에서 승인된 이 방안은 이후 미국의 전쟁계획에서 계속 유지됩니다.

핀처 계획이 상정한 소련군의 전력은 엄청난 규모였습니다. 미 합참은 소련이 동원을 시작하면 동원 시작 60일 이후 서유럽 전선에 총 270개 사단을 투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와 별도로 42개 사단을 중동 방면에, 49개 사단을 극동 방면으로 투입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반면 소련의 공군과 해군 항공대는 막대한 숫자에도 불구하고 전략 공군이 취약하기 때문에 지상군 만큼 큰 위협이 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평가됐습니다. 그리고 핀처 계획에서 중요하게 평가된 것이 터키였습니다. 터키는 48개 사단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것은 미군을 제외한다면 연합군 중 최대의 전력이었습니다. 비록 소련군에 비해 장비가 구식이긴 하지만 훈련도가 높다는 점이 높게 평가되었습니다. 또 터키를 통해 우크라이나와 카프카즈를 폭격할 수 있다는 점도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핀처 계획을 기반으로 1946년 12월 20일에는 이탈리아 방어 계획인 닭발톱(Cockspur) 계획, 1947년 8월 4일에는 이베리아 반도 방어 계획인 북소리(Drumbeat) 계획, 1947년 8월 29일에는 극동 방어 계획인 월출(Moonrise) 계획 등이 작성되었습니다.

한편, 핀처 계획은 어디까지나 전쟁 초기 단계의 대응만을 상정한 계획이었기 때문에 소련과의 전쟁에 대한 전체적인 계획은 될 수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미 합참은 핀처 계획을 보완할 계획 작성을 시작합니다.

1947년 2월 13일 합동전략기획위원회가 제출한 전쟁계획 JCS 1725/1은 핀처 계획의 연장선 상에서 수립된 계획이었습니다. 이 계획은 전쟁 초기 소련이 유럽 본토를 석권하는 것은 저지할 수 없기 때문에 북미의 주요 공업지대를 방어하고 영국과 수에즈 운하지대, 인도 북부 등의 핵심 지역을 사수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의 공격은 전략 폭격 중심으로 이루어 지는 것으로 되어 있었는데 소련의 석유 생산시설 중 80%가 영국이나 이집트에서 발진하는 미국 폭격기의 작전 범위내에 있기 때문에 충분히 효과적이라고 평가되었습니다. 또한 터키를 방어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터키를 잃게 되면 지중해 동부가 소련 공군의 위협을 받기 때문에 이집트를 통한 보급을 대서양을 통해 해야 한다는 문제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터키가 소련군에 함락 될 경우 그 다음의 방어선은 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형성하도록 했습니다.
이 계획에서는 전쟁 발발 1년 차에는 전략 방어를 취하고 전쟁 발발 2년 부터는 전략폭격을 중심으로 소련의 전쟁 수행역량을 감소 시킨 뒤 전쟁 발발 3년 째에 흑해와 카프카즈를 통해 소련 남부로 진격해 소련의 항복을 받아내는 것을 상정했습니다. 미군의 병력 동원은 전쟁 1년 차에 육군 45개 사단과 공군 70개 항공단 및 56개 독립항공대대, 항공모함 9척, 전쟁 2년 차에는 육군 80개 사단과 공군 139개 항공단 및 113개 독립항공대대, 전쟁 3년 차에는 육군 90개 사단과 공군 264개 항공단 및 141개 독립항공대대, 해군은 항공모함 21척으로 계획되었습니다. 육군의 규모는 2차대전 당시 동원한 규모와 비슷한 수준이라는 점이 특징입니다.

다음으로 7월 말에 작성된 동원계획 JWPC 486/7에서는 소련에 대한 전략 폭격 중 핵공격을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이 계획에서는 전략 핵폭격을 통해 소련의 항공기 생산능력의 86%, 항공기 엔진 생산능력의 99%, 각종 화기 생산능력의 56%, 전차 및 장갑차량 생산능력의 99%, 석유 생산능력의 52%를 파괴할 수 있을 것으로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부수적으로 민간인을 대량으로 살상해 소련의 사기를 꺾고 최선의 경우 이를 통해 소련의 항복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 합니다.

핀처 계획을 보완하는 여러 계획들은 공통적으로 전쟁 초기의 전략 방어와 전략 폭격을 통한 대응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때문에 미국은 영국, 그린랜드, 아이슬랜드, 알래스카, 중동, 파키스탄, 오키나와, 일본의 기지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특히 공군이 강력히 지지하는 B-36 폭격기는 미국의 전략 폭격 및 핵 타격능력을 크게 높여 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여러 계획에서 논의된 전후 처리 문제인데 소련이 항복하면 동유럽의 국경은 1939년의 국경으로 되돌린다는 합의가 잠정적으로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혹시 히총통이 노린 것은 이것?!?!)


3. Broiler, Frolin 계획 – 비상대응계획

브로일러(Broiler) 계획은 핀처 계획과 1947년에 작성된 여러 동원 계획을 반영해 작성되었습니다. 브로일러 계획은 소련이 1948년에 전쟁을 시작할 경우를 상정한 계획으로 일종의 비상대응계획이었습니다. 합참의 합동전략기획위원회는 1947년 8월 29일에 그 당시까지 연구된 각종 계획을 반영해 1948년에 전쟁이 발발할 경우의 대응 계획을 작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계획의 초기안은 같은 해 11월 8일 합참 브리핑에서 처음 발표됩니다.
브로일러 계획에서는 전략 핵폭격을 위해 충분한 원자폭탄을 확보할 필요성을 제기했습니다. 또한 미국의 재래식 전력이 부족하고 원자폭탄의 숫자도 부족하기 때문에 서유럽을 상실하는 것은 물론 터키와 지중해 해안 일대, 이집트를 방어하는 것 조차 어려울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특히 소련군이 우세한 전술 공군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영국에 공군 기지를 두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브로일러 계획에서는 미국의 군사적 상황이 극도로 불리하다고 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핵 폭격은 사실상 거의 유일한 반격 수단으로 간주되었습니다. 합동전략기획위원회는 다시 1949년에 전쟁이 발발할 경우를 상정한 브로일러 계획의 개정안을 작성했고 이것은 1948년 2월 11일에 채택되었습니다.

물론 브로일러 계획의 개정안도 우울한 전망을 하는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브로일러 개정안은 1949년 전쟁이 발발할 경우 소련은 순식간에 서유럽과 아시아 본토를 장악하고 미국이 전략 핵폭격을 할 근거지를 없애기 위해 영국과 이집트에 대한 공격에 나설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소련은 전쟁이 발발할 경우 총 173개 사단과 동맹군의 68개 사단 및 25개 독립여단의 지원을 받을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 또한 공군은 13,000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고 전쟁 개시 150일 이내에 2만대로 증강될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미국은 1949년 전쟁이 발발할 경우 육군 9개 사단과 9개 독립연대, 해병대 1개 사단을 동원하는데 그칠 것이기 때문에 유럽 본토에서 소련을 저지하는 것은 불가능 하다는 결론이었습니다.
브로일러 개정안은 소련군이 공격을 시작하면 개전 70일 만에 프랑스까지 점령되고 만약 소련군이 스페인까지 침공할 경우 소련군은 개전 180일에 지브롤터까지 함락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중동방면의 공격에서는 최악의 경우 개전 90일에 터키가 항복하고 175일 차에는 수에즈 운하까지 점령될 것으로 상정했습니다. 또한 서유럽이 함락되면 개전 12개월 뒤에는 서유럽에 전개한 소련공군이 하루 평균 전술폭격 1,550회를 실시하고 또한 V-2 개량형으로 영국을 타격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아시아의 경우 한반도는 모두 포기하고 중국은 연안 일대의 방어 가능한 지역으로 후퇴하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중국 본토도 포기하되 일본은 반드시 사수하는 것이 골자였습니다.
한편, 반격은 거의 유일하게 전략 핵폭격에 의해 실시될 계획이었습니다. 이 경우 가장 유력한 기지는 이집트와 인도 북부였습니다. 브로일러 개정안의 핵폭격 계획은 위에서 언급한 JWPC 486/7과 거의 동일한 것 이었습니다. 이 밖에 중동의 석유자원을 확보하기 위해서 쿠웨이트와 바레인에 대한 상륙작전이 계획되어 있었고 이 작전이 성공할 경우 바그다드와 모술까지 반격한 뒤 2단계 작전으로 이란에서 소련을 축출할 예정이었습니다. 이 계획에서 중동에 대한 반격작전에는 미군 12개 사단과 영국군 8개 사단이 배정되었습니다. 만약 소련이 핵폭격에도 불구하고 저항을 계속한다면 흑해를 통해 우크라이나에 상륙작전을 펼 계획이었는데 이것은 기존 계획의 골격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 이었습니다.

1948년 3월 17일에는 브로일러 계획을 간략화한 프롤릭(Frolic) 계획이 입안되었는데 브로일러 계획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재래식 전력의 취약상을 강조하고 전략 핵폭격을 중시하는 계획이었습니다.

브로일러와 프롤릭 계획은 핀처 계획 및 그 보완 계획들 보다 더 비관적인 전망을 담은 계획이었습니다. 특히 터키와 이집트, 지중해 재해권의 상실까지 염두에 둔 점이 그렇습니다. 또한 영국을 방어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해서도 비관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등 군축에 따른 미국 군부의 위기의식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4. Bushwacker 계획

1948년 1월 3일, 합참의 전쟁 계획들을 검토한 군수위원회(Munitions Board)에서는 핀처 계획에 기반한 작전 계획들이 현재 미국의 전쟁 수행 능력으로는 대응하기 어려운 안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합참에 미국의 전쟁 수행능력에 맞는 새로운 전쟁 계획을 수립할 것을 요청합니다.

이에 따라 1948년 3월 8일, 기존의 계획을 대체할 새로운 작전 계획, 부시워커(Bushwacker) 계획이 입안됩니다. 부시워커 계획은 전쟁이 1952년 경에 시작된다는 가정하에 수립되었습니다.
먼저 소련이 1952년에 전면전을 시작할 경우 투입할 수 있는 전력에 대한 평가가 다시 이루어 졌습니다. 부시워커 계획안에서는 소련이 1952년에 전쟁을 시작할 경우 전쟁 발발과 동시에 110개 사단을 투입할 수 있으며 동원 개시 180일 만에 500개 사단을 투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소련 지상군은 3만대의 전차와 77,500문의 견인포, 7,500문의 로켓포, 13,000대의 자주포 등 압도적인 전력을 투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공군의 경우도 1952년에는 대부분 제트기로 이루어지는 2만대의 항공기를 보유할 것이며 특히 B-29에 필적하는 중폭격기 1,600대도 여기에 포함되었습니다. 해군은 200척의 신형 고속 잠수함과 130척의 재래식 잠수함을 가지고 미군의 교통선을 위협할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그러나 부시워커 계획에서는 소련이 1952년까지 원자폭탄을 보유할 가능성은 적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기존의 계획들과 마찬가지로 부시워커 계획은 소련이 미국의 의도를 과소평가하고 제한적 도발을 시작하면 이것이 전면전으로 확대될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물론 서유럽은 소련 육군에 의해 단기간에 석권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또한 알래스카와 일본에 대한 전략적 폭격을 실시하고 그린랜드와 아이슬랜드에 대한 대규모 공수부대 투입도 가정하고 있는 등 소련이 보다 과감한 공격에 나설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부시워커 계획 또한 다른 계획들과 유사하게 전쟁이 3단계로 진행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1단계는 16일간 지속되며 소련의 전략적 공세와 미국의 전면적인 방어로 진행됩니다. 2단계는 미국이 소련의 공세를 둔화시키면서 제한적인 공세작전을 감행하고 3단계에서는 미국이 전면적인 반격에 돌입한다는 것 입니다. 특히 부시워커 계획은 미군의 증강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계획에 따르면 1단계와 2단계는 신속히 진행되기 때문에 전시 동원의 효과가 없어 미국이 당장 보유하고 있는 전력만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이 계획에서는 미 육군을 14개 사단과 1개 독립연대로 증강하는 것을 가정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공군은 기존의 계획들과 마찬가지로 폭격을 통해 소련군의 공세 능력을 감소시키는 한편 민간인에 대한 폭격을 통해 소련인들의 전쟁 의지를 꺾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특히 1952년 까지는 충분한 수의 B-36을 확보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에 공군으로 소련의 20개 주요도시들에 충분한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련이 초기의 핵공격에도 저항을 계속한다면 다음 단계로 터키, 스칸디나비아 반도, 영국, 북아프리카 등에 기지를 확보하고 전략 폭격을 지속하고 추가적으로 소련 본토에 대한 지상공격을 준비하도록 되었습니다.

또한 핀처 계획에 기반한 비상 작전계획인 브로일러, 프롤릭 계획과 같이 부시워커 계획을 기반으로 한 비상 작전계획도 수립되었습니다. 브로일러와 프롤릭 계획에 이어 수립된 새로운 비상작전 계획은 크랭크축(Crankshaft) 계획으로 명명되었습니다.
크랭크축 계획 또한 이전의 비상 작전계획들과 마찬가지로 당장 전쟁이 발발할 경우 미국과 영국군은 유럽과 아시아 본토를 방어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유럽, 중동, 중국, 한반도는 포기하고 해당 지역의 방어는 각국의 지상군에 맡기되 미국은 공군 및 해군 지원만을 하는 것이 골자였습니다. 이 계획에서는 개전 60일차에 소련군이 프랑스 전역을 점령하고 이탈리아는 개전 75일에, 시칠리아는 개전 105일에, 그리스는 개전 60일에서 90일 사이에 점령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또한 터키는 최대 개전 150일까지, 수에즈 운하지대는 개전 175일 무렵 소련군에 장악되고 이란과 아라크는 개전 60일차에, 그리고 중국과 남한은 개전 150일차에 점령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크랭크축 계획은 공군의 위력을 지나치게 과대 평가하고 있는데 브로일러, 프롤릭 처럼 전략폭격을 통해 소련의 항복을 받는 것이 가능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재래전은 전략폭격이 통하지 않을 경우 수행될 예정이었습니다.
1단계의 반격은 페르시아만 일대의 유전 지구에 감행될 계획이었습니다. 물론 개전 초기에는 소련군의 공격에 이곳을 상실할 것이기 때문에 석유 생산시설을 모두 파괴하고 철수할 것이었지만 소련이 전략 폭격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계속한다면 장기전으로 가기 때문에 페르시아만의 유전을 반드시 확보해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서 1단계 반격에는 미군 18개 사단과 영국군 9개 사단을 먼저 바레인에 상륙시킨 뒤 쿠웨이트-바스라를 장악하고 다음 단계로는 이라크와 이란에서 소련군을 격퇴하는 것이 반격의 개요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프랑스령 북아프리카를 확보한 뒤 이곳을 그리스와 터키 탈환의 발판으로 삼을 예정이었습니다. 그리스와 터키를 장악하면 다음 단계로 흑해를 통한 우크라이나 침공도 가능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합참은 전면적인 전략 핵폭격과 뒤이어 그리스와 터키 까지 탈환한 상태에서도 소련이 항복하지 않을 경우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기존의 계획들은 터키를 발판으로 우크라이나에 상륙, 지상전을 수행하는 것을 가정하고 있었는데 소련 본토에서 지상전을 수행한다면 대규모의 육군이 필요했습니다. 과연 2차대전과 비슷한 90개 사단 수준으로 소련에서 지상전을 수행할 수 있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입안가들이 부정적이었습니다.


5. Halfmoon 계획 – 서유럽의 적극적인 방어

한편, 미 합참은 1948년 4월 워싱턴에서 영국, 캐나다군 관계자와 함께 기존에 작성된 대소 작전계획을 토의합니다. 이 과정에서 미국, 영국, 캐나다는 새로운 작전계획인 반달(Halfmoon)을 승인합니다.
반달계획은 전쟁 첫 해에 시행될 단기간의 비상 계획으로 기본적으로는 브로일러 계획과 유사한 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계획은 소련이 1949년에 국지 도발을 감행해 전면전으로 발전하는 상황을 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계획 또한 전쟁 종결 뒤에는 소련의 국경을 1939년 국경으로 되돌리는 방안을 채택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반달 계획은 기본적으로 이전의 계획들과 동일한 골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단 한가지만은 기존 계획들과 차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전 계획에서는 서유럽이 소련에게 단기간내에 석권되는 것을 불가피한 것으로 상정하고 있었지만 반달 계획에서는 서유럽에서 소련군을 최대한 저지하는 것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연합군은 라인강 선에서 소련군을 최대한 저지하면서 점령지역의 저항 활동을 촉진하고 만약 라인강이 돌파된다면 영국군은 본토 방어를 위해 단계적으로 철수하고 미군은 프랑스에 남아 지연전을 계속할 계획이었습니다. 다음으로 미군 주력은 스페인이 중립으로 남는다면 프랑스의 연안 지역으로 퇴각하고 스페인이 참전할 경우 피레네 산맥을 경유해 스페인으로 퇴각하는 것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 주둔 연합군은 가능하면 독일 주둔군과 함께 라인강선으로 퇴각하고 소련군의 신속한 진격으로 라인강 방면으로의 퇴각이 봉쇄되면 이탈리아로 후퇴하도록 되었습니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에 오스트리아 주둔군은 스위스를 경유해 후퇴하는 방안도 고려되었습니다. 서유럽과 달리 그리스는 방어를 포기하고 철수하도록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미국은 전면전 발발시 서유럽에서 대규모 지상전을 수행할 계획을 수립한 것 입니다.
다른 지역은 기존의 계획과 유사했습니다. 수에즈 운하 지대는 지중해와 중동일대의 방어 거점이 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동북아시아에서는 중국과 한국을 포기하고 일본을 거점으로 전략 방어를 실시할 것이었습니다. 경우에 따라 중국 국민당 정부에 군사원조를 실시하기는 하겠지만 아시아 본토를 포기한다는 원칙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반달계획은 전쟁 첫해에 적용될 비상계획이었기 때문에 이후의 전략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지만 미국이 처음으로 서유럽의 적극적인 방어를 계획했다는 점에서 이전의 계획들과 차별화 되는 계획입니다. 이후 수립된 전쟁 계획들은 유럽 대륙에서 보다 적극적인 지상작전을 고려하기 시작합니다.

1949년 1월 28일 완성된 트로잔(Trojan) 계획은 기본적으로 반달계획을 바탕으로 한 전쟁 첫해의 전략 계획이었는데 전략 핵폭격에 대한 내용이 대폭 강화되었습니다. 트로잔 계획에서는 전쟁 첫 해에 소련의 주요도시 70곳에 총 133발의 원자폭탄을 투하해 소련의 전쟁 수행능력에 타격을 입힌다는 내용이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트로잔 계획은 언급된 대규모 공군작전에 대규모의 군수지원이 필요하고 작전 기지가 될 수에즈 운하 지구의 비행장들의 수준이 낮다는 점에서 문제가 많다고 지적되었습니다. 결정적으로 트루먼 행정부의 광범위한 군축 때문에 트로잔 계획의 실행에 필요한 병력을 확보할 수 없다는 반대가 빗발쳤습니다. 트로잔 계획을 검토한 공군참모총장 반덴버그(Hoyt S. Vandenberg) 장군과 해군참모총장 덴펠드(Louis E. Denfeld) 제독은 현재의 병력으로는 트로잔 계획을 수행할 수 없다고 비판했습니다.


6. Offtackle 계획 – 유럽에서의 적극적인 작전

각 군 수뇌부들은 반달 계획 및 트로잔 계획에 필요한 병력이 부족하다는 불만을 쏟아냈습니다. 사실 트루먼 행정부의 군비 축소는 군대의 입장에서 보면 지나치게 과도했습니다. 특히 육군의 감축은 심각해서 트로잔 계획에 명시된 개전 초기의 능동적 방어에 대해 비판적이었습니다. 해군 또한 예산 확보에서 공군에 밀려 극도로 불만이 많았고 그나마 감축을 덜 당했다는 공군 조차 원래 계획했던 70개 비행단을 확보할 수 없어 불만이었습니다. 결국 축소된 군사력에 맞춘 새로운 계획의 수립이 요구되었습니다.

특히 소련군의 전력에 대한 새로운 정보는 지상전력의 취약성을 더 두드러지게 했습니다. 1948년 8월 1일 합참의 정보 평가에 따르면 소련 육군은 총 104개 소총사단, 35개 기계화사단, 10개 전차 사단, 15개 기병사단으로 구성되었고 여기에 위성국의 90개 사단이 더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미육군은 겨우 10개의 현역 사단 밖에 없었고 이 중 당장 전투에 투입 가능한 것은 1개 사단이었습니다. 나머지 9개 사단은 편제에 미달하는 병력과 장비만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한편, 소련이 핵개발에 성공한 것은 더욱 더 큰 불안감을 가져왔습니다. 공군참모총장 반덴버그 장군은 원자탄을 추가적으로 생산하는 것 보다 본토 방공을 위한 전력을 확충하는 것이 더 시급해 졌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합참의 정보평가는 소련이 1953년 중순까지 135발의 원자폭탄을 보유할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미국이 가지고 있던 가장 큰 전략적 우위가 사라진 것 이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에게 긍정적인 변화도 있었으니 그것은 1948년 3월 17일에 브뤼셀 조약(Treaty of Brussels)을 통해 영국, 프랑스, 베네룩스 3국이 공동 방위 체제를 만든 것이었습니다. 미국은 서유럽의 정치적 안정을 위해서라도 서유럽에 보다 적극적인 안보공약을 제공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에게 유사시 라인강선의 적극적인 방어를 요구했고 미국도 1948년부터 이에 대해 긍정적이 되었습니다. 장기적으로 군사원조를 통해 서유럽 국가들의 군사력을 강화한다면 이것은 미국의 안보에도 이익이 된다는 관점이었습니다. 물론 소련이 단기간에 전쟁을 개시한다면 이것은 재앙으로 돌변할 수 도 있었지만 어쨌든 미국에게는 충분히 해 볼 만한 시도였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새로운 전쟁 계획의 수립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반달계획은 처음으로 서유럽에 대한 적극적인 방어를 명시했지만 기본적으로는 기존의 작전계획들을 조금 변경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1949년 4월 26일 합동참모본부는 예하 합동전략기획위원회에 새로운 비상 전쟁 계획의 수립을 지시합니다. 이 계획은 기본적으로 서유럽에서의 전략적 공세와 동아시아에서의 전략적 방어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주전장이 될 서유럽에서는 영국-라인강 선을 잇는 방어선을 고수하고 라인강이 돌파되더라도 서유럽 본토에 교두보를 유지할 것이 요구되었습니다. 그리고 만약 불가피하게 서유럽 전체가 석권된다면 최대한 빨리 서유럽에 대한 상륙과 탈환을 계획하도록 했습니다. 즉 새로운 작전 계획은 기존에 취하고 있던 서유럽 포기를 완전히 폐기한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계획인 오프태클(Offtackle) 계획은 1949년 12월 합참에 의해 승인됐습니다. 이 계획은 사실 여전히 부족한 병력으로 더 큰 목표를 추구한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국가 안보목표인 서유럽의 방어를 위해서는 전력이 증강될 때 까지의 단기간의 문제점은 감수한다는 것이 합참의 입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오프태클 작전은 처음으로 3차대전 이후의 정치적 질서 재편을 언급하는 계획이었습니다. 기존의 계획들도 전쟁 후 소련의 영토를 축소한다는 계획 정도는 언급하고 있었으나 정부의 명확한 대소 정책의 뒷받침은 없었습니다. 오프태클 계획은 전쟁이 종결되면 동유럽에서 러시아 세력을 축출하고 공산당 조직을 완전히 와해시킬 것을 명시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소련의 공산 정부를 붕괴시킬 수 없을 경우에는 전쟁 수행능력 만이라도 와해시킬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대소 작전계획에 이스라엘을 포함시켰는데 오프태클 계획에서는 소련이 중동으로 침공해 이스라엘을 위협한다면 이스라엘도 동맹에 포함시킨다는 내용이 들어갔습니다.

오프태클 계획은 소련이 서유럽과 중동, 아시아에서 동시에 공세를 시작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다고 전제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 제 1단계에서 라인강선을 방어하는 것은 한동안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전의 계획들과는 다르게 라인강선이 돌파되더라도 꾸준히 지연전을 펼치고 서유럽에 최소한의 교두보를 확보해 반격의 발판을 삼는 다는 점을 명시했습니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 마지막 교두보에서 밀려나더라도 서유럽에 대한 탈환작전을 최대한 이른 시기에 실행하도록 했습니다. 또 유럽을 상실할 경우 영국 방어에 총력을 기울이기 위해 개전 2개월 이내에 영국에 총 144개 대공포연대와 전투기 1,152대를 배치할 계획이었습니다. 유사시에는 미국 항모기동부대 또한 영국 방공전에 투입하는 방안이 고려되기도 했습니다. 다음으로 지중해 서부를 유지하기 위해서 북아프리카에 지상군과 공군을 신속히 증강하고 서유럽이 함락될 경우 북아프리카를 유럽 탈환의 발판으로 삼을 것이었습니다. 또한 소련이 스페인을 침공할 가능성은 적다고 판단되었으나 만약 소련이 스페인을 침공한다면 피레네 산맥에서 1차 방어를 하고 이곳이 돌파되면 지브롤터로 점진적으로 후퇴할 예정이었습니다.
이렇게 전쟁 1단계에 서유럽에서 전략방어를 실시하는 동안 미공군은 가능한 모든 전력을 동원해 전략 핵폭격을 실시하도록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쟁 개시 3개월 이내에 영국 주둔 전략폭격기 부대를 7개 항공단으로 증강해 소련의 서부 공업지대에 타격을 가할 것이었습니다.
전쟁 개시 3개월 이후 부터는 제 2단계로 전환해 전략 폭격을 계속하는 동시에 병력 동원을 가속화해 유럽 탈환을 준비할 예정이었습니다. 동시에 서유럽 상륙작전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시칠리아와 코르시카, 사르데냐, 또는 이탈리아 남부에 상륙작전을 실시하는 방안도 고려되었습니다.
전쟁개시 12개월 에서 24개월 사이에는 제 3단계로 전환해 서유럽 탈환작전을 시작하도록 되었습니다. 서유럽에 대한 상륙작전에는 미군 41개 사단과 항공모함 전투단 10개, 그리고 43개 항공단이 투입될 계획이었습니다. 이 상륙작전은 셀부르에서 덴마크 서해안에 이르는 지역 중 그때 상황에 적합하다고 예상되는 지역에 감행될 것이었으며 서유럽에 상륙한 주력은 이탈리아에서 북상하는 부대와 대규모의 포위망을 만들어 서유럽의 소련군을 섬멸할 것이었습니다. 그 이후에는 다시 동쪽으로 진격해 소련이 항복할 때 까지 전쟁을 계속한다는 것이 이 계획의 결론이었습니다.

오프태클 계획은 군사적인 면 보다 서유럽에 대한 정치적 고려가 많이 작용된 계획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미 군부에서는 오프태클 작전의 수행을 위해 전력 증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7. Dropshot 계획 – 유럽에서의 대규모 지상전

한편, 합참은 소련과의 전면전이 1956년 7월 발생할 경우를 상정한 비상 계획안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연구안은 다시 전쟁 발발시기를 1957년 1월로 늦추었고 당시 미군의 군비 축소를 고려해 최소한의 병력과 물자가 소요되는 방향으로 연구되었습니다. 이 연구안은 1949년 1월 31일 제출되어 드롭샷(Dropshot)이라는 명칭이 붙었습니다.

드롭샷 계획은 소련이 개전 당일 135개 사단과 20개 포병사단을 동원하고 개전 한달 이내에 248개 사단, 그리고 개전 1년 내에 500개 사단으로 증강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이에 대해 연합군이 라인강-알프스-피아브 선을 방어하는데 필요한 병력은 76개 사단으로 상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라인강 방어선이 돌파될 경우 프랑스 북부에 교두보를 유지하는 방안도 고려되었는데 이 경우 코탕탱 반도에 10개 사단, 브르타뉴에 20개 사단을 배치해 방어하도록 계획했습니다. 그러나 2차대전 당시의 경험에서 드러났듯 북부 프랑스에는 대규모 육군을 지원할 만한 항구가 부족하기 때문에 교두보를 장기간 유지하는 것은 문제가 있을 수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드롭샷 계획에서는 그 대안으로 이탈리아 남부에 34개 사단을 투입해 교두보를 확보하는 방안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최악의 경우에는 말타, 크레타, 키프러스 등을 확보하는 방안이 있었는데 이러한 작은 섬은 유럽 탈환의 기지가 되기에는 부족했습니다.
그리고 드롭샷 계획은 기존의 계획과 달리 중동을 장기간 방어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터키의 경우 전토를 방어하는 것은 어렵지만 연합군의 지상군과 공군 지원이 있을 경우 터키 남부를 장기간 방어하는 것은 가능할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이란과 쿠웨이트의 유전지대도 가능한 사수하되 소련군에게 점령될 경우 최대한 빨리 탈환작전을 펼치도록 예정됐습니다. 극동지역은 기존의 계획들과 동일하게 오키나와와 일본 본토를 중심으로 전략 방어를 하되 홋카이도는 유사시 소련군에게 점령되는 것을 감수할 것이었습니다.

이후 공군참모총장 반덴버그 장군과 육군참모총장 브래들리 장군이 드롭샷 계획의 보강을 지시해 드롭샷 계획의 개정안이 1949년 12월 19일 합참에 제출되었습니다.
개정안에서는 작전에 필요한 병력 규모를 보다 구체적으로 산정했습니다. 먼저 반격의 주력이 될 공군의 경우 개전 당일 미공군은 3,529대, 영국 등 연합군은 5,058대를 투입할 수 있어야 하고 개전 6개월 차에는 미공군이 4,270대, 연합군은 5,399대로 증강될 계획이었습니다. 그리고 개전 30개월 차에 미공군은 11,152대까지 증강될 것이었습니다. 해군은 13척의 정규항모, 4척의 경항모, 9척의 호위항모를 동원하고 육군은 개전 첫 단계에 15개 사단, 그리고 개전 30개월 까지 74개 사단과 2개 독립연대로 증강될 예정이었습니다. 또한 아시아를 포함한 전 전선의 연합군은 같은 기간 동안 총 213개 사단으로 증강될 것이었습니다.
소련에 대한 전략 핵공격에는 미군 19개 비행단, 영국군 7개 비행단 등 총 26개 비행단, 폭격기 780대가 배정되었습니다. 최 우선 공격목표는 소련의 핵공격 수단으로 여기에는 핵폭탄 제조 시설, 폭격기 기지 등이 포함되었습니다. 이것을 파괴하는데 100발의 원자탄이 배정됐습니다. 다음 목표는 석유 생산시설, 발전소, 철강을 포함한 금속 생산공장이었는데 이 목표를 공격하는데 최초의 30일간 180발의 원자탄을 배정했습니다. 그리고 첫번째 타격을 한 이후에도 복구를 저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핵폭격 및 통상 폭격을 실시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리고 소련 위성국의 공업 시설을 타격하는데 원자탄 73발이 배정됐습니다.

지상에서는 전쟁 1단계에 총 76개 사단(이중 미군은 2개 사단)을 동원해 라인강-알프스-피아브 선을 방어하고 2단계에서는 서유럽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미군을 55개 사단으로 증강할 것이었습니다. 만약 소련이 2단계에서 연합군에 항복한다면 그대로 동유럽과 소련으로 진격해 무장해제 및 점령에 들어갈 예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소련이 2단계에서도 항복을 하지 않는다면 동유럽에 대한 대규모 지상전을 감행하는 대안이 준비되었습니다.
동유럽에 대한 공세는 다시 세가지 안으로 뉘었습니다. 첫 번째는 North안으로 이 안은 108개 보병, 38개 기갑, 5개 공수사단과 90개 항공단을 동원해 쾰른을 거쳐 베를린으로 진격하는 것 이었습니다. 주력은 베를린을 해방한 뒤 계속 동진해 바르샤바를 점령하고 오스트리아로 진입한 조공은 크라쿠프에서 주력과 합류할 것이었습니다. 다음 단계로는 폴란드 남부에서 남동쪽으로 진격해 발칸반도를 소련으로부터 고립시키는 작전이 실시될 예정이었습니다.
두번째 안은 Pincer안으로 이 안은 117개 보병, 30개 기갑, 9개 공수사단과 110개 항공단을 동원해 독일과 발칸반도에서 동시에 공격을 실시하는 것 이었습니다. 먼저 터키 남부의 연합군이 공세로 전환해 그리스에 상륙한 뒤 교두보를 확대해 루마니아로 진출하고 이후 폴란드 남부로 공세를 확대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서유럽의 연합군도 반격을 개시해 78개 사단이 베를린을 거쳐 폴란드로 진격, 대규모 포위망을 완성할 것이었습니다.
마지막 안은 South안으로 이 계획은 총 182개 사단과 124개 항공단을 동원하는 등 세가지 안 중 가장 규모가 큰 계획이었습니다. 이 계획에서 주력은 터키에서 발칸반도로 진출, 베를린과 폴란드로 진격할 예정 것 이었습니다. 여기서 서유럽의 연합군은 소련군을 묶어두는 역할을 수행할 것이었습니다.

결국 드롭샷 계획은 합참에서 승인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오프태클과 함께 미국의 서유럽 방어 계획의 일대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후 미국은 NATO의 강화와 함께 서유럽에 대한 적극적 방어를 일관되게 유지해 나갑니다.

Friday, February 6, 2009

주한미군의 성병 발병율 - 1948년의 통계에 대해서

필요한 자료가 있어서 하루 종일 하지(John R. Hodge) 중장 문서철을 뒤졌는데 쓸만한 것을 전혀 찾지 못했습니다. 허탕을 치면 정말 허무하고 우울해지죠;;;;;

그런데 자료를 뒤지다 보니 1949년에 작성된 주한미군 의무감실의 문서가 한 건 있었습니다. 1948년도의 의무활동 결산 보고서인데 잠깐 쉬어가는 셈 치고 보고서를 훑어 보다 보니 1948년도 성병 발병율에 대한 통계가 있더군요. 이 통계를 보니 작년에 John Willoughby의 논문을 언급하면서 인용한 표 하나가 생각났습니다. Willoughby가 인용한 미 제3군의 성병 발병율 통계에 따르면 유색인종이 백인에 비해 성병에 걸리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높았다고 하지요. 주한미군은 독일주둔 미군과 비교했을때 어떠했을까 궁금해 지더군요. 호기심에 해당 통계를 복사해서 비교해 보니 주한미군의 경우도 백인에 비해 유색인종의 성병 발병율이 높게 나타나더군요.

해당 보고서에 실린 1948년도 주한미군의 성병 발병율은 다음과 같습니다.



비록 독일 주둔 미군과 비교하면 낮지만 유색인종이 백인 보다 두 배 정도 높은 성병 발병율을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체 환자 중 82%에 달하는 2924명이 임질(Gonorrhea)에 감염되었고 10%인 360명이 매독(Syphilis) 환자입니다. 나머지 8%인 284명은 기타 성병으로 분류되어있고 구체적인 병명은 기록되어 있지 않군요.

이 문서 외에 역시 하지 중장 문서군에 들어있는 13번 Box의 문서철 두건은 모두 1947년부터 1948년 기간의 주한미군 의무관계 문건들인데 제가 확인해 본 바로는 70% 가까이가 성병관계(;;;;) 기록이었습니다. 특히 두 번째 문서철은 모두 성병관계 기록이더군요. 한번 구체적으로 읽어 볼까 하다가 시간이 없어서 덮었습니다. 이걸 일일이 분석해 본다면 아주 흥미로운 글을 한 편 쓸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당장 필요한 문건은 아니라서 분석은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했습니다.


잡담 1. 그러고 보니 빨리 스캐너를 하나 사야 겠습니다. 표 만드는 것 보다 그냥 스캔하는게 더 편할 것 같군요.

잡담 2. 그런데 역시 골치 아픈 물건들은 통신부호가 가득 섞인 전문들이죠. 어디 까지가 통신부호인지 알기 어려운 경우도 많습니다.

Wednesday, February 4, 2009

시장 對 국가 : 국가 주도 경제의 쇠퇴와 시장 경제의 승리

The Commanding Heights의 한국어판 『시장 對 국가 : 국가 주도 경제의 쇠퇴와 시장 경제의 승리』를 읽었습니다. 지난 달에 채승병님이 같은 책을 바탕으로 제작된 다큐멘터리에 대한 글을 쓰셔서 재미있게 읽었는데 이 글을 읽고 나니 원작의 한국어판이라도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마침 다큐멘터리의 영향 때문인지 도서관에 있는 한국어판이 모두 대출 중이라 좀 늦게 읽게 됐습니다.

제대로 된 서평을 하기에는 경제 분야에 대한 지식이 형편 없으니 간단한 감상을 조금 적어볼까 합니다.

먼저 한국어판의 문장에 대해서 한 마디. 영어판은 읽지 못했지만 아마존에서 제공하는 미리 보기를 놓고 보면 번역판도 읽기 편하게 잘 번역됐다는 느낌입니다. 그리고 원판의 문장 자체도 읽기 편하게 잘 쓰여진 것 같습니다. 대중을 상대로 한 저술은 충실한 내용도 중요하지만 그 내용을 명확히 전달할 수 있도록 간결하고 명확한 문장을 활용해야 합니다. 간혹 개설서를 쓰면서 복잡하게 배배꼬인(!) 문장을 사용하는 저자들이 있는데 저는 그런 저자들은 가능한 모든 수식어를 동원해 혹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으로, 아무래도 출간된 지 10년이 넘은 책이니 만큼 2000년 이후에 일어난 사건들을 떠올리며 읽으면 더 재미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승승장구하는 시장 주도 경제의 이야기로 끝을 맺기 때문에 결론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할 지가 궁금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자들은 결론에서 시장 주도 경제의 긍정적인 가능성을 이야기 하지만 동시에 21세기에 직면하게 될 문제점들에 대해서도 지적하고 있습니다. 특히 국제 금융 체제의 위험성을 경고한 것은 마치 오늘날의 경제 위기를 예측한 것 같아서 재미있었습니다. 저자들은 21세기에도 시장에 대한 신뢰가 지속될 것인지 아니면 퇴보할 것인지 의문을 던지면서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있습니다. 그 신뢰에 대한 첫 번째 시험이 현재 진행 중이기 때문인지 저자들의 던진 의문에 대해 몇 번이고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변화를 가져오는 동력은 신념과 아이디어에 있다는 지적 또한 인상 깊습니다. 비록 뻔한 이야기라 할 지라도 말입니다. 저자들은 위험을 무릅쓰고서야 세상이 앞으로 전진할 수 있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 책에서는 2차대전 이후 수많은 국가에서 이루어 졌던 경제적 실험들이 성공 또는 실패하는 과정과 실패의 경험을 거울로 삼아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과정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특히 2차대전 이후 식민지에서 독립한 국가들의 사례는 더욱 감동적입니다. 신생 독립국들이 희망에 부풀어 추진한 경제적 실험에 대한 이야기들은 비록 담담한 문장으로 서술되고 있지만 마음에 와 닿는 바가 많습니다. 한국이나 대만 처럼 성공의 길을 가는 경우이건 인도와 같이 실패를 경험한 뒤 먼 길을 돌아가는 경우이건 말입니다. 이들 국가들의 경제적 실험은 마치 미지의 항로를 찾아 작은 배 몇 척으로 대양에 맞섰던 탐험시대의 용감한 항해자들의 이야기를 연상시킵니다. 물론 탐험시대의 항해자들과 달리 국가의 경제적 실험은 끝없이 계속되겠지만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 좌절이 있더라도 더 나은 길을 향한 모색은 계속될 것이라는 점이겠지요. 시지프스의 바위라는 우화가 떠오르게 되는군요.

이 책을 조금 더 빨리 읽었더라면 하는 후회도 없진 않습니다만 지금 읽게 된 것도 아주 나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Tuesday, February 3, 2009

언제나 환율이 문제

현재 추진 중인 어떤 일 때문에 조금 뒤에 약속이 있습니다.

며칠 전 그 회사의 사장님과 통화를 했을 때 다른건 다 괜찮은데 환율이 걱정이라고 하시더군요. 사실 저도 환율 문제가 마음에 걸리는데 오늘 뉴스를 보니 장중 환율이 1달러 당 1,400원대를 돌파했다고 합니다. 올해 초의 경제 전망 중 1/4분기에는 환율이 1,300원 대에서 1,400원대를 오가다가 2/4분기 이후 안정될 것이라는 내용도 있었는데 나쁜 쪽으로는 잘 들어 맞는군요. 환율 때문에 잘 풀릴 일도 꼬이지나 않을런지 걱정입니다. 업무는 물론이고 지름 생활에도 곤란한 영향을 끼치고 있으니 진짜 골치 아프죠;;;;

이놈의 환율은 언제쯤 안정이 될 것인지;;;

Sunday, February 1, 2009

조병옥 박사의 놀라운 예지력

모든 예언은 항상 사건이 터진 다음에 들어 맞는다고 하지요. 무슨 큰일이 날 때 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노라고 요란하게 떠들어 댑니다. 물론 왜 그런 예언들이 사건이 터지기 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는지는 모두가 다 아는 비밀 아닌 비밀이지요.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이런 뒷북 예언, 예측은 많은 사람들이 하는데 최근의 사례로는 미네르바의 정체를 사전에 간파한 전여옥 여사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전여옥 여사가 미네르바의 정체를 미리 간파한 것은 예언 축에도 못 낄 정도로 엄청난 예지력을 갖춘 분이 과거에 계셨으니 한 시대를 풍미한 조병옥(趙炳玉) 박사가 되시겠습니다.

1945년 8월 초 조병옥 박사는 상경하던 도중 소련의 참전 소식을 듣고 이런 생각을 하셨다고 합니다.

이렇게 일본의 패망의 날이 올 것을 우리 한민족들은 36년동안 매일같이 손꼽아 기다렸거니와 나 자신은 일본패망론에 대하여 일찍부터 간파한바 있어 올것이 왔고나 하고 생각 하였던 것이다. 내가 천안서 소개(疏開)생활을 하였을 때에도 그 일본패망론을 동리사람들에게 말하였드니 처음에 그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처다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시 설명하기를 미국은 물질자원이나 인적자원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과학력이 고도로 발달되어 입체전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절대 필요한 공군력이 몇 배나 일본보다 강하고 원자탄이 제조되어 일본이 연합군측에게 끝까지 항전하는 경우에는 일본민족은 전멸될 것이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또 일본의 경우로 말하면 남방을 점령하여 거기서 인적 물적자원을 충당시켜 보려고 하였으나 그곳 원주민들이 대일협력을 하지 않을뿐만 아니라 오히려 반항적태세를 갖추고 있으며 한국같은 가난한 나라의 대대손손이 간직해 내려오는 유기(鍮器)그릇 또는 은가락지 금반지 및 비녀 숟가락 등을 공출해 내라고 하니 그 자원에 있어 벌써 미국에 지고 들어가는 고로 일본은 도저히 장기항전을 못할 것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은 가까운 장래에 손을 들 것이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이런 말을 시골에 가서 한 지 2년도 못되어 일본은 패망의 날이 내일로 닥쳐왔구나 하는 것을 생각할 때 나는 참으로 감개무량하였던 것이다.

趙炳玉, 『나의 回顧錄』, 民敎社, 1959, 141쪽

조박사께서는 미국이 원자폭탄을 실전에 투입하기 2년여 전에 원자폭탄의 개발을 알고 계셨던 것 입니다. 물론 이런 예지력을 가진 분이 북괴의 남침 날자를 정확히 예견하지 못 하셨다는게 궁금하긴 합니다만 뭐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지요.

안녕하세요

제 블로그에 대해 간단히 소개를 드릴까 합니다.

자주 들러주시는 분들이라면 이미 알고 계시겠습니다만 처음 오시는 분들을 위해서 이 블로그가 어떤 블로그인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제 블로그는 술자리 잡담 분위기를 지향합니다. 뭐, 대략 대학가 술집에서 오고가는 진지한 듯 하면서도 진지하지 않은 그런 대화를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아무래도 블로그 주인장인 저의 관심사와 지식의 범위가 제한적이다 보니 블로그에서 다루는 주제가 상당히 제한적입니다.

에. 그리고.

저는 무신론자입니다. 가끔 글을 쓰는데 이런 성향이 튀어 나오기도 하니 종교, 특히 유일신 신앙을 가지신 분들께 양해를 구하는 바 입니다.



저는 정치인 빠돌이/빠순이들을 매우 싫어합니다. 박빠건 노빠건 다 싫습니다. 특히 노빠는 극도로 혐오합니다. 이런데 갑자기 "왜 우리 노짱을 싫어하시나요" 같은 질문을 하시는 분은 매우 곤란하겠지요. 사실 네이버 블로그와 이글루를 거쳐 이곳으로 오기까지 정말 이런 분들을 많이 뵈었습니다.
물론 정치인의 빠순이, 심지어 노빠라도 나카마 유키에나 손예진 같이 아리따운 분이라면 열렬히 환영할 것입니다. 아니, 만약 그런 미인들께서 이 블로그에 왕림해 주신다면 당장 노빠 블로그로 개편하고 노비어천가로 도배할 용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미인들이 이런 재미없고 칙칙한 블로그에 들러주실 리는 당연히 없겠지요. 고로 모든 정치인 빠돌이/빠순이들은 환영하지 않습니다.

그밖에

주체사상 신봉자, 환빠, 음모론자들은 노빠 이상으로 혐오합니다. 민족자주 천년왕국의 도래나 사뷁력을 호령하는 대제국의 부활을 꿈꾸는 분들은 환영하지 않습니다. 물론 환빠라도 나카마 유키에나 손예진 같이 아리따운 분이라면 열렬히 환영할 것 입니다. 만약 그런 미인들께서 이 블로그에 왕림해 주신다면 당장 환빠 블로그로 개편하고 치우천황을 찬양하는 글로 도배를 할 용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미인들이 찌질하게 환빠질이나 하지는 않겠지요.

그리고

농담을 하는데 진지하게 받아들이시는 분들은 정말 부담스럽습니다. 제가 블로그에서 농담을 할땐 함께 농담을 하시면 됩니다.

한마디 더 하자면

가끔 제 정치적 성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시비를 거는 할일 없는 양반들이 있습니다. 특히 노빠계열들은 그런 짓을 서슴없이 하지요. 그런 양반들에게 제가 쓸데 없이 시비걸지 말라고 하면 대부분 블로그는 열린 공간인데 무슨 상관이냐고 궤변을 늘어놓습니다. 그러나 길바닥에서 파는 떡볶이 냄새를 맡는건 자유지만 그걸 먹으려면 합당한 댓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아시겠지요. 그와 마찬가지로 제 개인공간인 블로그의 글들이 마음에 안든다고 인상쓰는건 자유지만 뻘플을 싸지르는건 별개의 문제입니다.

마지막으로

트랙백을 달기 위해서 할로스캔을 쓰는데 이놈의 할로스캔은 한글 지원이 부실해서 한글 아이디로 답글을 다시는 분들의 닉네임이 제대로 표시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끔 댓글이 표시 안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글이 한 번 뒤로 밀리면 댓글을 확인하기가 곤란합니다. 그러니 오래된 글에다 댓글을 달아주시면 신속한 답변을 드리지 못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양해를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