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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4일 금요일

국립김해박물관 특별전시전 '갑주: 전사의 상징' 도록


10월에 부산 출장을 가면서 잠깐 시간을 내 김해박물관의 특별전 '갑주: 전사의 상징'전을 다녀왔었습니다. 매우 훌륭한 전시여서 전시가 끝나는 11월 29일 이전에 시간을 내서 한번 더 가야 겠다고 생각했는데 유감스럽게도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그 대신 박물관 매점에 연락해서 도록을 한 부 구매했습니다. 이 도록도 전시 만큼이나 훌륭하네요.



도록은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제1장 '갑주의 흐름'은 한반도 고대 국가들의 갑주 발전사를 보여줍니다. 나무와 갑옷 등을 소재로 한 갑주에서 철을 사용한 판갑과 찰갑, 마지막으로 마갑을 포함한 중기병이 등장하기 까지 이어지는 흐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4~5세기 찰갑의 발전과정을 보여주는 부분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참고로 동래성 해자 유적에서 발굴된 조선시대 찰갑에 대해서도 간략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소단락 '비늘갑옷 읽기: 유적에서 출토된 비늘갑옷을 복원하기 까지'에서는 찰갑의 재현 과정을 사진과 함께  간략히 설명해 놓았습니다. 영화나 드라마 소품 담당자들에게 유용한 도움이 될 듯 합니다.

제2장 '갑주의 지역성'은 고대 국가별 갑주의 특징에 대해 설명하는 장 입니다. 먼저 한반도의 철제 갑주 도입에 영향을 준 중국 갑주 유물과 한반도의 영향을 받은 왜의 갑주에 대한 간략한 해설로 시작해 종장판갑(縱長板甲)으로 대표되는 가야와 신라, 그리고 찰갑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갑주의 특성을 보여주는 유물과 벽화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아쉬운 점이라면 유물을 비롯한 자료가 부족한 백제 갑주에 관한 부분이 좀 빈약하다는 것 입니다. 소단락 '백제인가, 당인가?: 공산성에서 출토된 옻칠갑옷'에서는 공주 공산성 터에서 출토된 옻칠갑옷을 비롯한 갑주 유물에 대한 두 가지 가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3장 '갑주: 고대 기술의 정수'에서는 고대의 갑주 제작 방식과 갑주의 구조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다양한 찰갑 소찰의 결합 방식을 설명한 부분이 흥미있었습니다. 제3장은 분량이 조금 소략합니다.

제4장 '갑주로 엿본 고대사'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됩니다. 첫 번째는 갑주의 장식과 매장 방식을 통해 갑주에 대한 고대인의 인식을 살펴보고자 하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중요한데 바로 한반도 중부와 남부에서 출토되는 왜 계열의 갑주의 역사적 의의를 다루고 있습니다.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나타나는 왜 계열의 유적과 유물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소재인데 일본측에서는 임나일본부의 실존을 증명하는 근거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도록에서는 한반도 고대국가들과 왜의 활발한 교류를 보여주는 유물이라는 서술을 하고 있습니다. 김영민의 2014년 논문을 인용하여 왜 계열의 갑주가 주로 발굴된 가야의 경우 교역품으로, 백제 지역의 경우는 갑주 소유자가 왜인을 가능성이 있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또한 전라남도 해안지역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빈번하게 출토되는 왜 계열의 유적과 유물이 용병의 성격을 가진 왜군의 주둔을 보여주는 것인지, 아니면 이 지역과 왜의 활발한 교류를 보여주는 것인지 문제를 제기하는 점도 주목할 만 합니다.

마지막으로 도록의 말미에는 두 편의 짧은 논문이 실려 있습니다. 정관박물관의 이현주가 쓴 「삼국시대 찰갑제작의 전개과정」과  울산문화재연구원의 오광섭과 부산대학교 박물관의 박준현이 쓴 「삼국시대 판갑의 연구 현황과 과제」 두 편 입니다. 이현주의 글은 한반도 고대 갑주의 발전 과정을 시기별로 설명하고 있는 글이고, 오광섭과 박준현의 글은 한국의 고대 갑주 연구사를 정리한 글 입니다.

도판과 해설 모두 충실한 훌륭한 도록이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김해박물관 매점에 연락해서 구매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훌륭한 책은 많은 분들이 보셨으면 합니다.

2009년 5월 5일 화요일

어떤 환빠 장군

어제 도서관에 갔다가 『바로잡아 쓴 동아시아 종주민족국가 한국의 역사와 한국 국가안보전략 사상사』라는 긴 제목과 제목에 걸맞게 두툼한 책을 한 권 발견했습니다. 당장 제목부터 범상치 않은 기운을 풍기고 있었는데 펼쳐보니 역시나 환빠 도서였습니다.

모든 환빠 서적들이 그러하듯 책의 내용은 대부분 정신을 안드로메다 탐사를 보내는 수준이었습니다. 특이한 점이라면 군사안보 문제를 환단고기에 엮어 내는 괴악한 감각의 소유자가 썼다는 점 입니다.

어떤 분이 이런 희한한 취향을 가지셨는지 하도 궁금해서 저자의 약력을 보니 다음과 같았습니다.

1958년 육군사관학교 졸업(14기), 이학사, 보병육군소위
1962년 미 특수전학교 유학
1965년 보병학교 유격학부 교관
1966년 주월 맹호부대 전사(戰史) 장교
1970년 독일군 참모대학 유학

(중략)

1985년 육군본부 작전참모장
1987년 육군 제1군단장
1988년 제1야전군 부사령관
1993년 국가안보회의 국가비상기획위원회 부위원장(차관급)

(후략)

헉. 그야말로 엘리트 코스만 밟은 분이 아니시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환빠의 거성 중 한 분인 고(故) 박창암 장군도 미 특수전학교에 유학하신 경력이 있으시지요. 미 특수전학교 교관 중 아틀란티스나 무우제국에 심취한 사람이 없었는지 궁금해 집니다.

목차도 환상적입니다. 일부만 살펴보죠.

제 1절. 하느님과 으뜸신의 창세(創世), 개천(開天)시대
1. 하느님과 으뜸신의 우주 만물 창조
2. 광의의 우리민족(동아시아 諸民族) 형성과 발전
3. 평지평원원주민족 최초국가 환웅의 신시(神市)
4. 우리민족(국가)의 국가안보전략사상(사) 태동
5. 환웅천왕의 천명사상(天命思想)과 신정(神政)

목차에서 알 수 있듯 저자는 기독교+환단고기 세계관을 기초로 여기에 군사학을 뒤섞어 이 괴작을 완성했습니다.

본문 자체가 매우 난감하기 그지 없는데 ‘동아시아 종주민족’의 기원에 대한 부분을 일부 인용해 보겠습니다. 이 책이 기반하고 있는 세계관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알다시피 지금으로부터 대략 일만년 전 황해바닥(당시로부터 대략 BC4000년에 이르기 까지 황해는 육지였다)을 중심으로 오늘날의 대륙과 한반도, 그리고 열도의 평원 평지에는 유전인자를 같이 하고 농경생활(일부 북부에서는 반농반목도 하였다)이라는 문화를 공유하는 동일민족이 광범위한 지역에 분포해 역사활동(석기시대)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BC3000년을 전후하여 시작된 지구상의 대홍수를 비롯하여, 계속된 과우기(寡雨期)를 맞이하면서 황해가 조성되고 대륙과 반도와 열도가 생겨났다.(어떤 이는 이미 1만년 전에 황해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럴 때 특히 황해바닥 평지민족은 동서남북방향의 구릉고지로 이주하였는데 오늘날의 한반도와 왜열도에는 당시에는 환경조건이 여의치 않아 당분간 원주민 그대로 소수의 조상들이 비교적 조용하게 그러나 나름대로의 문화를 발전시켜 나갔다. 굳이 분류한다면 이들이야 말로 순수한 평지 평원의 원주민 이었다.

(중략)

그후 또다시 우리 원주민족의 한 고향, 즉 옛날 우리의 서언왕이 주름잡던 徐帝國이 번성하던 지역, 회대(淮垈) 지방의 초(楚)나라에서 항우와 유방이 그곳 주민들과 궐기하여 한(漢)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래서 그 이후 오늘까지 대륙의 그 우리 흡수동화민족을 이름하여 한민족(漢民族)이라 한다. 따라서 이 한민족은 바로 조상을 공동으로 하는 광의의 우리민족이라는 사실을 다시 강조하고자 한다.

그런데 바로 이 시점에 대륙의 우리원주민족적 성향이 강한 이 황해안 지대에 우리의 백제, 신라제국이 건설되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전통적으로 주(周)시대에도 허용되었던 원주민 종족들의 종묘사직의 보존, 제사모시기와 함께 우리 평지평원원주민족 특유의 문화와 습성을 국시(國是)로 유지 발전시켜 나가게 되었다.

특히 대륙에서 백제보다 북방인 낙랑지역에 자리한 고구려는 이 시점에서 원주민족성이 가장 잘 보존되고 있는 우리 원주민족의 국가로 출발하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고구려는 서방민족이나 유목민족에 의한 민족적 식민이나 국가적 합방에 의한 혼혈과정을 비교적 경험함이 없이 평원평지원주민족의 혈통과 문화전통을 계속 유지해 왔던 역사지리적 안보환경을 가진 우리민족으로 구성되게 되었다. 그러기 때문에 명실공히 우리 종주민족에 의한 우리 종주민족국가로서 새로운 민족부흥의 역사를, 이후 900여년간 주도적으로 전개해 나가게 된다.

문영일,『바로잡아 쓴 동아시아 종주민족국가 한국의 역사와 한국 국가안보전략 사상사』, (21세기군사연구소, 2007), 187~189쪽

;;;;

넵. 살짝 할 말이 없습니다.

황해 바닷속으로 들어가 버린 민족의 기원 평원평지 문명이야기는 무슨 아틀란티스 이야기 같군요. 이 세계관을 가지고 이상한 바다의 나디아를 리메이크 하면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2009년 2월 15일 일요일

[妄想劇場] 3000

줄거리

서기 660년. 당나라가 백제에 사신을 보내 항복을 요구하자 분노한 의자왕의 왕비는 당의 사신을 우물에 처 넣는다.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의 13만 대군이 백제에 상륙하고 김유신의 신라군도 동쪽에서 쇄도해 오면서 백제는 풍전등화의 위기를 맞게 된다.

나라를 지키기로 결심한 의자왕의 왕비는 3천 궁녀를 이끌고 당나라 군대와 결전에 나서는데.

당나라의 13만 대군은 맹렬한 공격을 퍼 붓지만 3천 궁녀의 결연한 저항에 패배를 거듭한다.

마침내 당나라는 의자왕의 왕비를 회유하기 위해 비장의 카드를 내 놓는데…

드디어 의자왕의 왕비와 3천 궁녀 앞에 모습을 드러낸 모든 음모의 배후 측천무후. 그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의자왕의 왕비를 유혹한다.

“나는 관대하다…”

과연 의자왕의 왕비와 3천궁녀의 운명은 어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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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 영화 ‘3000’ 섹시 마케팅 ‘후끈

올 여름 화제의 한국형대하역사블록버스터 ‘3000’이 개봉 전부터 섹시 마케팅으로 입소문을 타고 있다. 특히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비키니를 입은 3천궁녀가 당나라 13만 대군과 맞서는 장대한 전투 장면. 제작사 관계자는 한국 영화사상 가장 섹시한 장면이 될 것이라며 기대감을 높였다. 또한 시사회를 관람한 관계자들에 따르면 영화의 절정부분에서 황금 비키니를 입은 측천무후가 의자왕의 왕비를 회유하는 장면은 마치 동성애 관계를 암시하는 듯 했다는 후문이다. 홍보사는 메인 포스터를 비키니를 입은 의자왕의 왕비와 3천궁녀로 꾸미고 섹시함을 강조한 홍보에 나선다는 전략이다.

죠센일보 20XX 7월 15일자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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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영화 ‘3000’ 감독 듣보잡 인터뷰

기자 : ‘3000’이 개봉 전부터 화제를 뿌리고 있다. 헐리우드 영화 ‘300’과 제목과 내용이 유사하다는 지적이 있는데.

듣보잡 : (버럭) 그것은 오해다. 원래 시나리오는 ‘300’보다 ‘3000’이 먼저 나왔다. 다만 자금 조달문제로 제작이 연기되다 보니 그 와중에 ‘300’이 먼저 나왔을 뿐이다. ‘300’보다 0이 하나 더 많다고 아류작으로 보지 말아 달라.

기자 : 내용에서도 말이 많다. 전설에 따르면 3천궁녀가 낙화암에서 목숨을 끊었다고 되어 있는데 영화에서는 당나라 군대를 도륙하고 있다.

듣보잡 : (버럭) 그것은 백제가 멸망한 뒤 역사를 서술한 신라의 조작이다. 우리는 패배한 백제의 입장에서 역사를 새로이 조명하고자 했다.

기자 : 삼국사기 등을 보면 의자왕의 왕비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는데.

듣보잡 : (버럭) 그것은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이 유학자라는 점에서 봐야 할 것이다. 가부장적인 유학자들의 서술인 만큼 여성에 대한 긍정적인 서술을 의도적으로 왜곡하거나 누락했을 것이다. 그리고 의자왕의 왕비가 당나라 군대와 싸우지 않았다는 기록도 없지 않은가?

기자 : 영화의 절정에서 측천무후가 의자왕의 왕비를 유혹하는 장면이 있다. 실제로 측천무후가 백제에 온 일은 없지 않은가?

듣보잡 : (버럭) 마찬가지이다. 측천무후가 백제에 오지 않았다는 기록도 없지 않은가? 시나리오 작가의 상상력을 제약하지 말아 달라.

기자 : 3천궁녀의 의상이 너무 선정적이라는 지적이 있다. 백제시대에 비키니가 있었는가?

듣보잡 : 자료가 거의 없다 보니 고증문제로 미술팀이 고생을 많이 했다. 고심 끝에 당나라 군대와 맞서는 3천궁녀의 씩씩한 건강미를 표현하기 위해 비키니로 의상을 통일했다. 결코 제작비가 부족해서 헐벗게 한 것은 아니다.

경양신문 20XX 7월 15일자 20면

2007년 12월 21일 금요일

연개소문=뭇솔리니???

조광(朝光) 창간호를 보다 보니 아주 재미있는 구절이 하나 있더군요.

나당(羅唐)이 백제를 멸하고나서는 다시 마수(馬首)를 고구려에게 돌리어 해마다 평양성을 진공(進攻)했으나 번번이 실패하드니 고구려의 大‘뭇소리니’인 개소문이 죽고 그 제자(諸子) 사이에 권력 사움이 일어나매 기회를 타서 나당이 또다시 출병하야 평양성을 에우니 고구려는 이에 그 칠백년의 빛나는 역사가 막을 마치고 말었다.

문일평(文一平) 掌篇新羅史, 朝光, 창간호, 1935년 11월, 275쪽.

푸하하. 이때는 연개소문=독재자=뭇솔리니 였던 모양입니다. 연개소문을 뭇솔리니에 비교하다니 이 양반은 미래의 국수주의적인 후손들이 두렵지 않았나 봅니다. 조광 창간호에는 이탈리아의 에디오피아 침공에 대한 분석기사도 실려 있습니다. 이때만 하더라도 이탈리아가 그렇게 한심한 나라일 것이라고는 대부분 상상도 못하고 있었으니 연개소문의 강인한 인상을 뭇솔리니와 비교할 법도 하군요.

2007년 1월 31일 수요일

민족인가, 국가인가? - 이종욱

오늘 이종욱의 "민족인가, 국가인가? 신라 내물왕 이전 역사에 답이있다"를 샀습니다. 아직은 대략 훑어본 상태인데 이거 생각보다 흥미로운 물건이더군요. 신라사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기존의 역사학이 정통론 세우기에 집중했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이런 이야기가 나올 것 이라고 생각했는데 발언 수위가 약간 센 편입니다. 앞으로 상당히 욕을 많이 먹을 것 같군요. 뭐, 다른 건 둘째 치고 민족주의가 국교가 된 대한민국에서 이런 책을 낸다는 건 좀 위험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국 고대사쪽은 아는게 거의 없긴 하지만 근현대사 서적이 아니라 고대사 서적에서 이렇게 노골적으로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는 사람은 별로 못 봤던 같습니다. 몇몇 구절에서는 지나치게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광고하고 있어서 찝찝하긴 하지만 들어볼 만 한 부분도 있습니다.

읽으면서 흥미 있었던 구절을 몇 개 발췌해 봅니다.

첫째, 그때나 지금이나 손진태가 말한 내용 가운데 국민이 곧 민족이라는 주장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남한과 북한이 분단되어 각기 서로 다른 국가가 들어선 상황에서 국민이 민족이라고 주장한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는 1945년 하나의 민족이 38도선을 경계로 남한과 북한으로 나뉘고, 1948년 남한과 북한에 각기 독립된 정부가 들어서며 한국인이 두 국가의 국민으로 나뉜 사실을 은폐한 것이다. 남한에 사는 사람들은 대한민국의 국민이고, 북한에 사는 사람들은 북한의 국민이 되었다. 지금도 대한민국에서는 한민족 두 국가의 상태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민족이라는 용어에 마비되어 국민과 민족을 구별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 결과 “민족끼리” “우리끼리”라는 북한의 말에 놀아나고 있다. 그 결과 한 민족 두 국가의 현실에 있으면서도 민족과 민족공조라는 말에 꼼짝 못하고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고 있다.

146쪽

그런데 이러한 민족이 한국인의 신앙이 되기에 이르렀다. 한 가지 예만 들어보자. 1945년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한국은 38도선을 경계로 남한과 북한으로 나뉘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한 침공으로 벌어진 6.25전쟁 뒤 지금까지 휴전선을 경계로 남한과 북한은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다. 남한은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위를 북한은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택했다. 남한과 북한은 서로 다른 이념(사상)과 체제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이념과 체제는 공존할 수 없는 것이다. 2002년 서해에서 북한 함정의 공격을 받아 한국 해군의 함정이 침몰하고 해군들이 전사한 전투가 있었다. 이는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남한과 북한이라는 두 국가 사이에서 전쟁 상태가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은 어떤 면에서 때로는 국가보다 민족을 중시하는 모습을 보인다.

153쪽

그러나 남한과 북한이 택한 서로 다른 이념과 체제는 민족과는 다른 문제다. 1945년 해방 이후 남한은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위를 북한은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국가의 이념과 체제로 택했다. 그런데 남한과 북한이 택한 서로 다른 이념과 체제는 하나로 합칠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북한은 주체사상을 택하여 자주라는 이름으로 세계화를 거부하며 북한 인민들의 자유를 빼앗고 굶주리게 만들고 있다. 현재 이 세상에서 그처럼 인민의 자유를 빼앗고 굶주리게 만드는 폐쇄적인 나라는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들이 각별히 경계해야 할 사실은 그러한 주체사상으로 인민의 자유를 빼앗고 굶주리게 하는 체제의 전파다.

지난 60여년 동안 한국사학은 위와 같은 사실은 생각하지 않고 민족을 발명해 서로 다른 두 이념과 체제위에 놓고서 남한과 북한이 통일되어야 하는 이유로 삼았다. 현대 한국사학이 만든 민족사는 민족이 우선이고 국가(국민)에는 관심이 없었다. 어떤 면에서 현대 한국사학이 국가와 국민보다 민족이 먼저라는 역사 지식과 역사의식을 한국인들에게 주입한 것이다.

(중 략)

가상의 공동체로서 민족을 만든 현대 한국사학은 그러한 민족이 걸어가야 할 길까지 정해 놓고서 실제 역사는 그 길을 벗어났다고 비판하며 꾸중해 왔다.

(중 략)

대륙을 지배하던 고구려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당나라 군대를 끌어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신라를 반민족적 왕국으로 보는 것이 그 좋은 예다. 이러한 민족사는 과거의 이야기로 그치지 않는다는 점에 더 큰 문제가 있다. 현재의 정치, 군사적 상황을 이해하는 기준이 되는 것을 그대로 지나칠 수 없다.
6.25전쟁 이래 남한과 북한이 군사적으로 대치하는 상황에서 한국은 미국의 도움을 받아 북한의 남침 기도를 막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사학은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의 나라를 멸망시켰다며 신라를 반민족적 행위를 한 나라로 판정하는 역사 공식을 만들었다. 그러한 역사 공식은 6.25전쟁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한 UN군의 도움으로 북한의 남침을 막은 대한민국을 반민족적 행위를 하는 나라로 보도록 만든 것이다.

316~319쪽


이 양반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국민이 더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도, 이 책에 대해 실린 기사에는 악플이 엄청 달렸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