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May 30, 2010

회계사의 군대

어떤 책의 묘하게 인상적인 한 부분...


1949년 10월 19일에는 독립된 경리학교가 설립되었다. 경리학교가 설립되기 이전 까지는 한국군의 병참과 경리 인력이 일본식 교육 과정에 맞춰 동일한 교육을 받고 있었다. 미군사고문단의 경리 고문인 랄프 B 화이트(Ralph B. White) 중령은 1948년 이래로 두 과정을 분리하려 해 왔으며 경리학교는 이러한 노선의 첫 걸음 이었다.

Robert K. Sawyer and Walter G. Hermes, Military Advisors in Korea in Peace and War(Honolulu, University Press of Pacific, 1961/1988/2005), pp.84~85

흔히 미군을 농담삼아 일컫을때 '회계사의 군대'라고 하는데 과히 틀린 말은 아닐 것 같습니다. 군 내에서 재정회계 업무를 군수 업무와 명확하게 분리했으니 말입니다.

Tuesday, May 25, 2010

'에반게리온 파'가 유출되었다니

'에반게리온 파'의 립버전이 유출됐다지요. 아. 이거 국내 정식발매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걱정되는 군요. 아아. 별 일 없기만 바라는 바입니다.


국내 판권가진 회사의 관계분께.(뭐, 이런 블로그를 보실일은 없겠지만^^)


저는 '에반게리온 파'만 극장에서 열 세번 봤습니다. 이게 나오면 DVD/BD 둘 다 사드릴테니 제발 정식 출시만 해 주십시오.^^

Monday, May 24, 2010

고종석의 노무현에 대한 평

오늘 아침 뉴스를 보니 어제 있었던 노무현 1주기 추모행사가 나왔다. 벌써 1년이나 지났다니 시간은 정말 빠르다는 생각이 든다. 노무현의 인간적인 매력은 어느정도 인정하지만 정치인으로서는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입장인지라 노무현의 유산을 계승하겠다는 친노정치인들의 행각에는 코웃음만 나왔다.

며칠전 광화문에 갔다가 노무현을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로 묘사한 그림을 보고 어이가 없었던 기억이 난다. 노무현의 지지자들은 노무현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면서 어떤 역사적 의미를 찾고자 노력하고 있지만 글쎄올시다. 노무현 재임기는 훗날의 역사에서 지나가는 에피소드 정도나 되면 다행일 것이다.

노무현이 퇴임하기 직전 한국일보의 고종석은 '노무현 생각'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노무현에 대해 아주 재미있는 평가를 했다. 결론 부분만 조금 인용해 보자.


노무현과 노무현 시대에 대한 평가는 앞으로 분명히 나아질 것이다. 그러나 그 때에조차, 노무현이 실패한 대통령이었음은 엄연하다.


100% 공감이다.

Friday, May 21, 2010

독일군의 군마 동원과 유럽의 농업

2차대전 당시 독일은 점령지역에서 징발이라는 이름의 약탈을 통해 전쟁 수행에 필요한 자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을 하나 꼽으라면 "군마"를 들 수 있을 것 입니다. 독일군은 전쟁 초기 부터 대량의 마필을 사용했으며 전쟁이 지속될 수록 그 양은 늘어만 갔습니다. 1939년에 독일군은 59만 마리의 군마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은 1945년 1월에 이르면 1,198,724마리로 늘어납니다. 전쟁이 지속될 수록 병력이 증가했고 동시에 차량의 보충이 손실을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에 전통적인 수단에 의존 할 수 밖에 없었던 것 이지요. 그런데 독일은 자체적으로 군마의 대량 소모를 감당할 능력이 없었고 전쟁 초기부터 점령지에서의 군마 징발에 크게 의존하게 됩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점령지역에서의 마필 감소를 가져왔는데 이것은 아직 기계화가 충분히 되어 있지 않아 축력에 의존했던 유럽의 농업 방식에 큰 피해를 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독일군의 마필 징발이 유럽의 농업에 끼친 영향에 관심을 연구자로는 디나도(Richard L. DiNardo)가 있습니다. 디나도는 1988년에 발표한 Horse-Drawn Transport in the German Army라는 논문의 결론 부분에서 독일이 전쟁 기간 중 점령지에서 막대한 마필을 징발한 것이 전쟁 기간 중 유럽의 농업생산을 감소시킨 원인 중 하나였다고 주장했습니다. 실제로 전쟁 초기에 점령된 폴란드는 독일의 주된 군마 공급처가 되었고 1940년 서부전역에 동원된 보충용 군마의 대부분을 충당했습니다. 폴란드의 농업생산량 감소는 매우 놀라운데 1939년에 227만톤이었던 밀 수확량이 1940년에는 177만8천톤으로 급감했고 이것이 1942년에는 133만2천톤 까지 떨어집니다.1) 서부전역이 독일의 대 승리로 끝난 뒤에는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가 독일의 새로운 약탈 대상이 되었습니다.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경우는 폴란드 만큼 약탈이 심하지는 않았으나 농업용 마필의 감소는 뚜렸습니다.(네덜란드의 경우 전쟁 중 마필의 숫자는 증가했는데 농업용 마필만 감소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역시 독일에게 가장 혹독하게 당한 것은 소련일 것 입니다. 독일군은 동부전선에서 1941년 6월 22일 부터 1942년 1월 20일까지 335,588마리(169,172마리 폐사+166,416마리 질병)의 말을 상실하는 끔찍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여기에 같은 기간 동안 보충된 마필은 불과 47,801마리에 불과했기 때문에 독일군은 어쩔 수 없이 폴란드나 서유럽산의 말 보다 체구가 작고 힘도 약한 러시아산 말을 보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89,725마리의 러시아 말이 노획되었습니다.2) 1942년 이후 러시아산 말이 대량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러시아산의 약한 말을 지칭하는 Panjepferde라는 신조어가 등장할 정도였다고 하지요.3)
사실 소련은 집단화를 추진하면서 대량의 농기계를 생산했기 때문에 축력으로 부터 해방된 것 처럼 보였습니다만 1930년대 부터 군수산업으로 전환이 급격히 이루어지면서 축력에 계속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여기에 전쟁이 터지면서 농기계 생산이 사실상 중단되자 기존에 생산된 농기계조차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는 상황이 됩니다.4) 여기에 마필도 대량으로 동원되거나 독일군에게 빼앗기게 되었으니 사람이 쟁기를 끄는 참담한 상황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전쟁 발발직전 소련에는 2100만 마리의 말이 있었는데 이것은 780만 마리로 감소했습니다. 소련측의 추정에 따르면 전쟁 기간 중 700만 마리의 말이 죽거나 독일군에게 약탈당했다고 합니다.5)


디나도의 연구는 개괄적인 수준에 머무르고 있지만 매우 흥미로운 점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실제로 독일의 마필 징발은 유럽의 농업 생산구조에서 매우 취약한 부분을 타격했습니다. 독일은 전쟁 중 자체적인 자원의 부족으로 지속적으로 점령지역의 자원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점령지역의 경제를 근본적으로 파괴하는 주된 원인이 되었고 오랫동안 상처를 남기게 되었습니다.



1) Richard L. DiNardo, 'Horse-Drawn Transport in the German Army', Journal of Contemporary History, Vol. 23, No. 1. (Jan., 1988), p.139
2) Hartmut Schustereit, Vabanque : Hitlers Angriff auf die Sowjetunion 1941 als Versuch, durch den Sieg im Osten den Westen zu bezwingen(Herford, Mittler und Sohn, 1988), s.97
3) Katherina Filips, 'Typical Russian Words in German War-Memoir Literature', The Slavic and East European Journal, Vol. 8, No. 4. (Winter, 1964), p.409
4) John Barber and Mark Harrison, The Soviet Home Front 1941~1945 : A Social and Economic History of the USSR in World War II(London, Longman, 1991), p.187
5) DiNardo, ibid., p.136

Wednesday, May 19, 2010

트루먼 - 꽤 재미있는 미국 대통령

요즘 읽는 책 중에는 마이클 펄만(Michael D. Pearlman)의 Truman and MacArhur : Policy, Politics, and the Hunger for Honor and Renown이 꽤 재미있습니다. 작년에 조금 읽다가 책장에 꽂아두고 1년이 지나서 다시 읽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맥아더를 해임하는 부분을 읽고 있습니다.

트루먼 재임기는 군사사에 관심을 가진 입장에서 매우 재미있는 시기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도 트루먼 행정부 시기는 꽤 매력적입니다. 트루먼은 2차대전이 종결되고 냉전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미국 대통령이라는 막중한 지위에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잘 아시다 시피 트루먼은 약간 난감한 상황에서 대통령의 직위에 앉았습니다. 루즈벨트가 급사해서 대통령직을 이어받았는데 트루먼에게 남겨진 임무는 전후 세계질서의 재편이라는 엄청난 것 이었지요. 상대해야 할 인간들도 스탈린이나 처칠 같은 희대의 대인배들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관점을 군대로 돌려보더라도 트루먼이 처한 상황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재임하는 기간 동안 미군은 전시동원체제에서 평화시의 급격한 병력 감축을 경험했으며 동시에 냉전의 시작과 함께 소련이라는 새로운 적을 상대하기 위해 체제 개편을 단행합니다. 그리고 트루먼 행정부에서는 각 군을 총괄하는 국방부가 조직되지요. 물론 초기 구상과는 매우 다른 형태의 국방부가 만들어졌습니다만.(자유주의자 놈들의 딴지란!) 그리고 이런 혼란의 와중에 초대 국방부장관인 포레스탈이 자살하고 이른바 제독의 반란이라는 민군관계에 파란을 몰고오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이런 와중에 한국에서는 또 다른 전쟁이 벌어지지요. 어수선한 사건들을 그럭 저럭 잘 수습하면서 대통령직을 수행한 것 만 보더라도 트루먼에게는 개인적으로 후한 평가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특히 민군관계에 있어서 2차대전을 통해 등장한 수많은 전쟁영웅들은 골치 아픈 존재였습니다. 별일이 없었어도 거만했을 맥아더 같은 인물이 전쟁 영웅이라는 간판까지 달게 되었으니 군 통수권자로서 이들을 적절히 제어하는 것은 골치 아팠을 것 입니다. 전쟁영웅이란 민주주의 체제에서 필요로 하는 대중적 인기를 가진 존재들이니 말입니다. 이런 문제는 바로 제독의 반란에서 잘 드러났습니다. 문민통제에 반기를 든 제독들 상당수가 전역과 같은 처분을 받았지만 몇몇 유명한 제독들은 그렇게 되지 않았지요. 아마 맥아더도 중국군의 개입으로 참패를 하지 않았다면 쉽게 축출하기가 어려웠을 것 입니다.(뭐, 마샬과 그 계열의 인물들은 맥아더를 싫어했다고 하니 좀 다른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었겠습니다만) 맥아더는 한국전쟁 기간 중 행정부와 군수뇌부의 아시아 정책을 공공연히 비판했는데 이것은 문민통제의 관점에서 보면 그다지 바람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문제가 발생할 때 마다 트루먼은 단호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트루먼은 초대 국방부 장관에 임명한 포레스탈이 자신을 기만했다고 판단하자 가차없이 교체했으며 한국전쟁에 개입하는 과정에서도 단호한 면을 보여주었습니다. 의회에 대해서도 자신의 영역에 쓸데없이 간섭한다고 툴툴댔다죠. 물론 포레스탈의 후임으로 앉힌 존슨은 별로 좋지 않은 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만;;;; 대중적으로 인기가 상당했던 맥아더를 교체할 때에도 맥아더가 일정한 선을 넘었다고 판단하자 해임시키지요. 문제가 아예 없다고는 못하겠습니다만 그래도 민군관계의 측면에서 꽤 모범적인 군통수권자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Saturday, May 8, 2010

장비교체

노트북과 디카를 교체했습니다.


두 물건 모두 2005년 부터 마르고 닳도록 써오고 있었는데 특히 노트북(에버라텍6300)은 작년 여름에 액정이 맛이 갔지만 그 당시에는 책을 사느라 돈을 탕진해서 새 노트북을 살 여유가 없었지요.

어쨌든 올 봄에 약간 여유가 생겨서 또 책을 잔뜩 살까 아니면 노트북을 교체할 까 하다가 책은 조금만 사고 노트북과 디카를 교체하기로 했습니다. 노트북은 전에 쓰던 에버라텍이 좀 커서 휴대성이 떨어지는 지라 13인치로 골랐습니다. 돈을 좀 더 주고 12인치 급에서 쓸만한 걸 찾아볼까 하기도 했는데 13인치라도 적당할 듯 싶더군요.


이것 저것 비교해 보다가 파빌리온 DM3으로 골랐는데 이유는 별게 아니라 제 마음에 드는 다른 모델들은 랜선 꼽는 부분이  죄다 오른쪽에 달려 있어서 제 방 구조와 맞지가 않다보니;;;; 결국 살짝 아쉽긴 하지만 랜선 꼽는 부분이 왼쪽에 달린 이놈을 골랐습니다. 뭐, 평가가 아주 좋은 물건은 아니지만 가격도 착하고 제가 주로 하는 짓이 글쓰는것 뿐이니 적당하다고 하겠습니다.

아직 이것 저것 설치하고 있는 중이고 할일도 많다 보니 지금 하는 일이 마무리 될 때 까지는 에버라텍6300을 계속 쓰고 다음주 금요일 쯤에 이놈으로 완전히 교체할 생각입니다. 하드디스크에 잡다한 자료가 많다 보니 이것 옮기는 것도 시간이 걸리는군요. 특히 사진으로 찍어놓은 자료들이 문제입니다;;;;;

디카는 20배 줌이 되는 파워샷 SX20으로 골랐습니다. 제가 여기 저기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줌기능을 많이 쓰는데 지금까지 쓰던 쿨픽스4100은 그점에서 꽝이라;;;;


사실 제 개인적으로는 니콘 똑딱이의 뽀사시한(???) 색감을 좋아하는 편이라 가능하면 니콘 모델로 하려 했는데 이게 훨씬 싸더군요;;;; 쿨픽스4100은 아직 상태가 좋으니 보조용으로 계속 사용할 생각입니다.

낡은 장비들을 교체해서 좋긴 한데 이덕에 책 살 돈이 줄어들었고 결정적으로 아이폰 사는게 당분간 물 건너 갔습니다. ㅋ~

Wednesday, May 5, 2010

대답없는 메아리

다들 잘 아시겠지만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방송은 2차대전 당시 선전방송으로 출발한 이후 냉전을 맞으면서 서방측 선전공세의 선봉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소리는 냉전 초기 부터 급진적 민족주의가 확산되고 있던 아시아를 향한 방송을 시작합니다. 특히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남 민족주의 집단이 프랑스를 엿먹이고 있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는 골치 아픈 화약고 였습니다. 이때문에 베트남어 방송은 1940년대 후반에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한가지 있었습니다.

1949년에 아시아지역을 순방한 미국 하원의원단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순방 보고서를 보냅니다. 이 보고서에서는 미국의 소리 베트남어 방송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인도차이나에서는 미국의 소리 방송이 무용지물입니다. 인도차이나 전역에 걸쳐 라디오가 겨우 1만대 정도에 불과한데다 이중 대부분은 프랑스인들이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The Voice of America program in Indo-China are ineffective. There are only some 10,000 radios in the entire conuntry and large percentage of these are French owned.)

"Notes on Recent Observations of Conditions in the Far East"(1949. 11. 19), p.20, RG330 Secretary of Defense, Office, Administrative Secretary Correspondence Control Section Decimal File 1951, CD092 Far East to Greece Box. 229

아아. 대답없는 메아리여~

Sunday, May 2, 2010

노르망디 전역의 연합군 공군과 독일 지상군

 노르망디 전역에서 연합군의 항공부대가 독일 지상군을 상대로 직접적인 타격을 가하는 것에는 실패했다는 점은 이제 잘 알려져 있는 사실입니다. 한국 내에서 이 사실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아마 채승병님이 체터링(Niklas Zetterling)의 Normandy 1944의 제5장, The Effects of Allied Air Power를 번역해서 소개한 이후일 것 입니다. 체터링의 이 글은 독일군과 연합군의 기록을 비교 분석해 연합군 항공전력의 효과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시도했는데 이런 유형의 글이 국내에 처음 소개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을 것 입니다.




 사실 연합군의 항공전력이 독일 지상군을 상대로 신통치 못한 성과를 거뒀다는 것은 비교적 오래전 부터 알려져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예를들어 1952년에 출간된 윌모트(Chester Wilmot)의 The Struggle for Europe에서는 다소 모호하기는 하지만 연합군 항공전력이 지상전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던 사례를 여러차례 언급하고 있습니다.1) 하지만 연구자들에 의해 통계적인 분석이 시도된 것은 1990년대 이후였고 그 이전의 연구들은 엄밀성이 결여된데다 서술도 모호한 편이었습니다. 결정적으로 2차대전 연구에 큰 영향을 끼친 독일군 고위 지휘관들은 대부분 연합군 공군의 위력에 대해 높게 평가했는데 이것은 연합군 공군력의 위력에 대한 과장된 평가가 널리 퍼지는데 일조했을 것 입니다. 이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중폭격기를 동원해 독일 지상군을 폭격한 사례일 것 입니다. 그러나 연합군 공군력의 성과를 높게 평가하는 연구자들 중에도 전략폭격기 부대의 중폭격기들을 전술폭격에 투입해 거둔 성과에 대해서는 의문을 표하는 사례도 종종 있어왔습니다.2)

노르망디 전역에서 연합군 공군이 실제로 어떤 성과를 거두었는지 통계적인 분석을 처음 시도한 것은 구더슨(Ian Gooderson) 이었습니다. 구더슨은 Journal of Strategic Studies에 기고한 두 편의 논문, "Allied Fighter-Bombers versus German Armour in North-West Europe 1944~1945 : Myth and Realities"와 "Heavy and Medium Bombers : How Successful Were They in Tactical Close Air Support During World War II"를 통해 기존에 모호하게 서술되거나 잘못 알려진 사실들에 대한 반박을 시도했습니다. 구더슨의 연구는 미군과 영국군의 자료를 활용해 통계적인 분석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매우 신선한 시도였습니다.

 구더슨의 논문 중 전투폭격기 부대가 거둔 전과에 대한 연구는 연합군의 작전조사반(ORS, Operational Research Section)의 기록을 분석해 연합군의 전투폭격기들이 독일군의 기갑차량을 격파하는데는 효과적이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체터링의 글을 읽어 보신 분들이라면 그 원인을 잘 아실 것 입니다. 노르망디에 투입된 연합군 전투폭격기의 주력은 미육군항공대의 경우 P-47이었고 영국 공군의 경우 타이푼이었습니다. P-47의 경우 8정의 12.7mm기관총이 주무장이고 타이푼은 4문의 20mm기관포가 주무장이었고 이외에 500파운드나 1000파운드 폭탄, 타이푼의 경우는 8발의 3인치 로켓이 있었습니다.
 3인치 로켓의 경우 상당한 위력을 가지고 있어서 1944년 초에 있었던 사격 시험에서 목표물인 판터의 엔진실 상부를 관통해 격파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라면 시험에서 발사한 64발의 로켓탄 중 겨우 세발이 명중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시험에 사용된 판터가 고정 목표였는데 말이지요. 3인치 로켓은 빗나갈 경우 전차와 같은 중장갑 목표물에 거의 효과가 없었습니다. 타이푼 조종사들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직전 3주간에 걸쳐 3인치 로켓 사격 훈련을 받았는데 이정도 훈련으로는 이 까다로운 무기를 제대로 활용하기가 어려웠습니다.3)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로켓을 장비한 타이푼은 대규모로 투입되었습니다. 영국공군은 실전을 통해 획득한 자료를 토대로 1945년에 로켓을 장비한 타이푼에 대한 평가를 내렸습니다. 이 조사에 따르면 실전상황에서 5야드 크기의 포진지에 50%의 명중율을 내기 위해서는 350발의 로켓(44소티)이 필요했으며 10야드 크기의 포진지에 대해서는 88발(11소티), 그리고 판터 정도의 전차에 대해서는 140발의 로켓(18소티)이 필요했습니다.4)

 실제로 조종사들은 매우 높은 전과를 기록했다고 믿었지만 전투 뒤의 조사결과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7월 29일 영국공군은 미군의 요청에 따라 가브레(Gavray) 북동쪽 라 발랭(La Baleine)을 지나가는 독일군을 공격했습니다. 영국공군은 이 공격으로 17대의 전차를 격파하고 27대의 전차를 파손시켰다고 보았는데 작전조사반의 조사결과 항공기에 의해 격파된 것이 확실한 것은 타이푼의 로켓에 의해 격파된 판터 1대와 4호전차 1대였고 이밖에 3대의 판터가 자폭, 3대의 판터가 그냥 유기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5) 전투폭격기들이 대 활약을 했다고 알려진 모르탱(Mortain) 전투에서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영국공군 제2전술항공군은 독일 전차 84대를 확실히 격파하고 35대를 미확인 격파했으며 21대에 손상을 입혔다고 보고했습니다. 미 육군항공대 제9항공군은 69대의 격파, 8대의 미확인 격파, 35대에 손상을 입혔다고 보고했습니다. 하지만 전투 뒤 영국육군의 작전조사반과 영국공군의 작전조사반이 모르탱 지구를 조사한 결과 33대의 판터와 10대의 4호전차, 3대의 돌격포가 전장에 남겨졌으며 이 중 항공기에 의해 격파된 것은 판터 6대(로켓에 의해 5대, 폭탄에 의해 1대)와 4호전차 3대(로켓에 의해 2대, 폭탄에 의해 1대)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6) 이 전투에서도 항공기에 의해 격파된 것 보다는 승무원들이 버리고 도망친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항공기에 의해 판터 6대가 격파된 반면 승무원들이 유기하거나 자폭시킨 판터는 10대였다고 하니 말입니다.7) 전투폭격기가 중포보다는 훨씬 신속하고 정확한 대응을 할 수 있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만8) 실전에서 거둔 성과는 다소 실망럽게 보입니다.

 이 점은 중폭격기들도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 처럼 중폭격기들의 효용에 대해서는 전후에도 상당한 논란이 있었습니다. 굿우드(Goodwood) 작전과 코브라(Cobra) 작전 당시의 유명한 사례가 보여주듯 중폭격기에 의한 폭격은 폭격 초기에는 어느 정도 혼란을 일으킬 수 있었지만 독일군은 대개 초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끈질긴 저항을 했습니다. 찬우드(Charnwood) 작전 당시인 1944년 7월 7일 독일군 방어선에 467대의 랭카스터와 핼리팩스 중폭격기가 동원되어 2,560톤의 폭탄을 투하했습니다만9) 그 효과는 매우 미미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영국군의 주공을 상대한 12SS 기갑사단의 경우 이러한 대규모 폭격에도 불구하고 사기에 큰 영향을 받지 않고 격렬하게 저항했으며 오히려 연합군의 폭격으로 캉에 남아있던 민간인 300~400명이 부상을 당하는 등 '부수적 피해'가 발생했습니다.10) 실제로 영국 제21집단군의 작전조사반은 중폭격기를 동원한 폭격의 효율성에 대해 의문을 표하고 있었습니다.11) 이당시 전투에 참여한 영국 육군 장교들도 캉에 대해 폭격을 해야 했는지 회의감을 나타냈을 정도라고 합니다.12) 유사한 사례는 꽤 많이 있는데 잘 알려진 체터링의 저작에 따르면 6월 29일 100대의 중폭격기가 9SS기갑사단의 20기갑척탄병연대 3대대를 폭격했을 때 사망자는 20여명에 그쳤으며 80% 가까운 차량이 그날 저녁까지 가동가능한 상태가 되었다고 합니다. 앞서 언급한 12SS사단의 경우 어느정도 방어선을 구축한 상태였지만 9SS기갑사단의 경우 공격을 위해 집결하고 있어 매우 취약한 상태였음에도 말입니다.13)

 그리고 잘 알려져 있다시피 연합군의 근접항공지원은 상당한 오폭을 일으켰습니다. 가장 유명한 코브라 작전 당시의 오폭은 111명의 미군을 사망하게 했으며 서유럽전선에서 가장 높은 계급의 미군 사망자를 발생시키기도 했지요. 미국측의 조사에 따르면 이날 35대에서 60대 정도의 중폭격기와 42대의 중형폭격기가 미군을 폭격했다고 합니다.14) 사실 아군에 의한 오폭은 꽤 흔한 일이었습니다. 노르망디 전역 초기인 6월 8일에서 18일까지 미 육군항공대의 제9전술항공사령부(Tactical Air Command)는 13건의 오폭이 발생했다고 기록했습니다.15) 이런 오폭은 노르망디 전역 내내 계속되었고 심한 경우에는 한 부대가 계속해서 오폭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모르탱 전투당시 미육군 제30보병사단 120보병연대 본부는 단 하룻동안 아군 항공기에 의해 10번이나 공격받았고 이 공격으로 연대 군수참모가 전사했다고 하지요.16)

노르망디 전역에서 연합군 공군의 전술항공지원은 직접적인 타격 보다는 간접적으로 피해를 입혔다는 견해가 많습니다. 특히 연합군 항공력의 전과에 대해 낮게 평가하는 연구자들도 심리적인 영향에 대해서는 높게 평가하고 있지요. 실제로 영국군이 독일군 포로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저공비행하는 전투폭격기의 기총소사나 로켓 사격은 지상부대의 사기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17) 체터링도 그의 저작에서 연합군 공군이 독일 지상군에게 심리적으로 영향을 끼쳤다고 서술하고 있지요.18) 부대의 이동과 집결에 지장을 끼친 것도 중요한 성과라고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독일측 기록을 활용한 체터링의 경우는 연합군 공군이 부대의 이동과 집결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 보다 회의적인 입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를들어 교도기갑사단 사단장 바이어라인은 6월 8일 전선으로 이동하던 중 공습으로 5대의 전차와 84대의 보병수송장갑차 및 견인용 하프트랙, 자주포와 130대의 자동차를 상실했다고 회고한 바 있습니다.19) 이에 대해 체터링은 6월 10일의 보고서에는 교도기갑사단이 노르망디로의 행군 중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들어 바이어라인의 회고는 오류일 가능성을 제기합니다.20)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이야기 이긴 합니다만 2차대전 당시 전투폭격기나 폭격기에 의한 근접항공지원은 적군에게 직접적인 타격을 입히기에는 능력이 부족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장갑화 되지 않은 차량이나 포병에 대해서는 상당한 위력을 발휘했고 심리적인 위력이 크긴 했지만 공군력 단독으로는 결정적인 요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1) Chester Wilmot, The Struggle for Europe(London, Collins, 1952)
2) Alan Wilt, "The Air Campaign", Theodore A. Wilson(ed.) D-Day 1944(Lawrence, University Press of Kansas, 1971/1994), pp.150~151
3) Ian Gooderson, "Allied Fighter-Bombers versus German Armour in North-West Europe 1944~1945 : Myth and Realities", Journal of Strategic Studies 14-2(1991), pp.211~212
4) Ian Gooderson, 1991, p.213
5) Ian Gooderson, 1991, pp.217~218
6) Ian Gooderson, 1991, pp.221~222
7) Ian Gooderson, 1991, p.222; Mark J. Reardon, Victory at Mortain : Stopping Hitler's Panzer Counteroffensive(Lawrence,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2), p.137
8) Alan Wilt, ibid., p.149
9) Chester Wilmot, ibid., p.351
10) Hubert Meyer, Kriegsgeschichte der 12.SS-Panzerdivision Hitlerjugend, band I(Coburg, Nation Europa, 1999), ss.253~254
11) Ian Gooderson, "Heavy and Medium Bombers : How Successful Were They in Tactical Close Air Support During World War II", Journal of Strategic Studies 15-3(1992)
12) Carlo D'Este, Decision in Normandy(Old Saybrook, Konecky&Konecky, 1983/1994), p.315
13) Niklas Zetterling, Normandy 1944 : German Military Organization, Cobat Power and Organizational Effectiveness(Winnipeg, Fedorowicz, 2000), p.44
14) Richard G. Davis, Carl A. Spaatz and the Air War in Europe(Washington, Center for Air Force History, 1993), p.474
15) Alan Wilt, ibid., p.151
16) Mark J. Reardon, ibid., p.113
17) Ian Gooderson, 1991, p.216
18) Niklas Zetterling, ibid., p.37
19) Ian Gooderson, 1991, p.216
20) Niklas Zetterling, ibid., p.46

노르망디 전역의 연합군 공군과 독일 지상군

 노르망디 전역에서 연합군의 항공부대가 독일 지상군을 상대로 직접적인 타격을 가하는 것에는 실패했다는 점은 이제 잘 알려져 있는 사실입니다. 한국 내에서 이 사실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아마 채승병님이 체터링(Niklas Zetterling)의 Normandy 1944의 제5장, The Effects of Allied Air Power를 번역해서 소개한 이후일 것 입니다. 체터링의 이 글은 독일군과 연합군의 기록을 비교 분석해 연합군 항공전력의 효과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시도했는데 이런 유형의 글이 국내에 처음 소개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을 것 입니다.




 사실 연합군의 항공전력이 독일 지상군을 상대로 신통치 못한 성과를 거뒀다는 것은 비교적 오래전 부터 알려져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예를들어 1952년에 출간된 윌모트(Chester Wilmot)의 The Struggle for Europe에서는 다소 모호하기는 하지만 연합군 항공전력이 지상전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던 사례를 여러차례 언급하고 있습니다.1) 하지만 연구자들에 의해 통계적인 분석이 시도된 것은 1990년대 이후였고 그 이전의 연구들은 엄밀성이 결여된데다 서술도 모호한 편이었습니다. 결정적으로 2차대전 연구에 큰 영향을 끼친 독일군 고위 지휘관들은 대부분 연합군 공군의 위력에 대해 높게 평가했는데 이것은 연합군 공군력의 위력에 대한 과장된 평가가 널리 퍼지는데 일조했을 것 입니다. 이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중폭격기를 동원해 독일 지상군을 폭격한 사례일 것 입니다. 그러나 연합군 공군력의 성과를 높게 평가하는 연구자들 중에도 전략폭격기 부대의 중폭격기들을 전술폭격에 투입해 거둔 성과에 대해서는 의문을 표하는 사례도 종종 있어왔습니다.2)

노르망디 전역에서 연합군 공군이 실제로 어떤 성과를 거두었는지 통계적인 분석을 처음 시도한 것은 구더슨(Ian Gooderson) 이었습니다. 구더슨은 Journal of Strategic Studies에 기고한 두 편의 논문, "Allied Fighter-Bombers versus German Armour in North-West Europe 1944~1945 : Myth and Realities"와 "Heavy and Medium Bombers : How Successful Were They in Tactical Close Air Support During World War II"를 통해 기존에 모호하게 서술되거나 잘못 알려진 사실들에 대한 반박을 시도했습니다. 구더슨의 연구는 미군과 영국군의 자료를 활용해 통계적인 분석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매우 신선한 시도였습니다.

 구더슨의 논문 중 전투폭격기 부대가 거둔 전과에 대한 연구는 연합군의 작전조사반(ORS, Operational Research Section)의 기록을 분석해 연합군의 전투폭격기들이 독일군의 기갑차량을 격파하는데는 효과적이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체터링의 글을 읽어 보신 분들이라면 그 원인을 잘 아실 것 입니다. 노르망디에 투입된 연합군 전투폭격기의 주력은 미육군항공대의 경우 P-47이었고 영국 공군의 경우 타이푼이었습니다. P-47의 경우 8정의 12.7mm기관총이 주무장이고 타이푼은 4문의 20mm기관포가 주무장이었고 이외에 500파운드나 1000파운드 폭탄, 타이푼의 경우는 8발의 3인치 로켓이 있었습니다.
 3인치 로켓의 경우 상당한 위력을 가지고 있어서 1944년 초에 있었던 사격 시험에서 목표물인 판터의 엔진실 상부를 관통해 격파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라면 시험에서 발사한 64발의 로켓탄 중 겨우 세발이 명중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시험에 사용된 판터가 고정 목표였는데 말이지요. 3인치 로켓은 빗나갈 경우 전차와 같은 중장갑 목표물에 거의 효과가 없었습니다. 타이푼 조종사들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직전 3주간에 걸쳐 3인치 로켓 사격 훈련을 받았는데 이정도 훈련으로는 이 까다로운 무기를 제대로 활용하기가 어려웠습니다.3)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로켓을 장비한 타이푼은 대규모로 투입되었습니다. 영국공군은 실전을 통해 획득한 자료를 토대로 1945년에 로켓을 장비한 타이푼에 대한 평가를 내렸습니다. 이 조사에 따르면 실전상황에서 5야드 크기의 포진지에 50%의 명중율을 내기 위해서는 350발의 로켓(44소티)이 필요했으며 10야드 크기의 포진지에 대해서는 88발(11소티), 그리고 판터 정도의 전차에 대해서는 140발의 로켓(18소티)이 필요했습니다.4)

 실제로 조종사들은 매우 높은 전과를 기록했다고 믿었지만 전투 뒤의 조사결과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7월 29일 영국공군은 미군의 요청에 따라 가브레(Gavray) 북동쪽 라 발랭(La Baleine)을 지나가는 독일군을 공격했습니다. 영국공군은 이 공격으로 17대의 전차를 격파하고 27대의 전차를 파손시켰다고 보았는데 작전조사반의 조사결과 항공기에 의해 격파된 것이 확실한 것은 타이푼의 로켓에 의해 격파된 판터 1대와 4호전차 1대였고 이밖에 3대의 판터가 자폭, 3대의 판터가 그냥 유기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5) 전투폭격기들이 대 활약을 했다고 알려진 모르탱(Mortain) 전투에서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영국공군 제2전술항공군은 독일 전차 84대를 확실히 격파하고 35대를 미확인 격파했으며 21대에 손상을 입혔다고 보고했습니다. 미 육군항공대 제9항공군은 69대의 격파, 8대의 미확인 격파, 35대에 손상을 입혔다고 보고했습니다. 하지만 전투 뒤 영국육군의 작전조사반과 영국공군의 작전조사반이 모르탱 지구를 조사한 결과 33대의 판터와 10대의 4호전차, 3대의 돌격포가 전장에 남겨졌으며 이 중 항공기에 의해 격파된 것은 판터 6대(로켓에 의해 5대, 폭탄에 의해 1대)와 4호전차 3대(로켓에 의해 2대, 폭탄에 의해 1대)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6) 이 전투에서도 항공기에 의해 격파된 것 보다는 승무원들이 버리고 도망친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항공기에 의해 판터 6대가 격파된 반면 승무원들이 유기하거나 자폭시킨 판터는 10대였다고 하니 말입니다.7) 전투폭격기가 중포보다는 훨씬 신속하고 정확한 대응을 할 수 있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만8) 실전에서 거둔 성과는 다소 실망럽게 보입니다.

 이 점은 중폭격기들도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 처럼 중폭격기들의 효용에 대해서는 전후에도 상당한 논란이 있었습니다. 굿우드(Goodwood) 작전과 코브라(Cobra) 작전 당시의 유명한 사례가 보여주듯 중폭격기에 의한 폭격은 폭격 초기에는 어느 정도 혼란을 일으킬 수 있었지만 독일군은 대개 초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끈질긴 저항을 했습니다. 찬우드(Charnwood) 작전 당시인 1944년 7월 7일 독일군 방어선에 467대의 랭카스터와 핼리팩스 중폭격기가 동원되어 2,560톤의 폭탄을 투하했습니다만9) 그 효과는 매우 미미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영국군의 주공을 상대한 12SS 기갑사단의 경우 이러한 대규모 폭격에도 불구하고 사기에 큰 영향을 받지 않고 격렬하게 저항했으며 오히려 연합군의 폭격으로 캉에 남아있던 민간인 300~400명이 부상을 당하는 등 '부수적 피해'가 발생했습니다.10) 실제로 영국 제21집단군의 작전조사반은 중폭격기를 동원한 폭격의 효율성에 대해 의문을 표하고 있었습니다.11) 이당시 전투에 참여한 영국 육군 장교들도 캉에 대해 폭격을 해야 했는지 회의감을 나타냈을 정도라고 합니다.12) 유사한 사례는 꽤 많이 있는데 잘 알려진 체터링의 저작에 따르면 6월 29일 100대의 중폭격기가 9SS기갑사단의 20기갑척탄병연대 3대대를 폭격했을 때 사망자는 20여명에 그쳤으며 80% 가까운 차량이 그날 저녁까지 가동가능한 상태가 되었다고 합니다. 앞서 언급한 12SS사단의 경우 어느정도 방어선을 구축한 상태였지만 9SS기갑사단의 경우 공격을 위해 집결하고 있어 매우 취약한 상태였음에도 말입니다.13)

 그리고 잘 알려져 있다시피 연합군의 근접항공지원은 상당한 오폭을 일으켰습니다. 가장 유명한 코브라 작전 당시의 오폭은 111명의 미군을 사망하게 했으며 서유럽전선에서 가장 높은 계급의 미군 사망자를 발생시키기도 했지요. 미국측의 조사에 따르면 이날 35대에서 60대 정도의 중폭격기와 42대의 중형폭격기가 미군을 폭격했다고 합니다.14) 사실 아군에 의한 오폭은 꽤 흔한 일이었습니다. 노르망디 전역 초기인 6월 8일에서 18일까지 미 육군항공대의 제9전술항공사령부(Tactical Air Command)는 13건의 오폭이 발생했다고 기록했습니다.15) 이런 오폭은 노르망디 전역 내내 계속되었고 심한 경우에는 한 부대가 계속해서 오폭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모르탱 전투당시 미육군 제30보병사단 120보병연대 본부는 단 하룻동안 아군 항공기에 의해 10번이나 공격받았고 이 공격으로 연대 군수참모가 전사했다고 하지요.16)

노르망디 전역에서 연합군 공군의 전술항공지원은 직접적인 타격 보다는 간접적으로 피해를 입혔다는 견해가 많습니다. 특히 연합군 항공력의 전과에 대해 낮게 평가하는 연구자들도 심리적인 영향에 대해서는 높게 평가하고 있지요. 실제로 영국군이 독일군 포로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저공비행하는 전투폭격기의 기총소사나 로켓 사격은 지상부대의 사기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17) 체터링도 그의 저작에서 연합군 공군이 독일 지상군에게 심리적으로 영향을 끼쳤다고 서술하고 있지요.18) 부대의 이동과 집결에 지장을 끼친 것도 중요한 성과라고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독일측 기록을 활용한 체터링의 경우는 연합군 공군이 부대의 이동과 집결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 보다 회의적인 입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를들어 교도기갑사단 사단장 바이어라인은 6월 8일 전선으로 이동하던 중 공습으로 5대의 전차와 84대의 보병수송장갑차 및 견인용 하프트랙, 자주포와 130대의 자동차를 상실했다고 회고한 바 있습니다.19) 이에 대해 체터링은 6월 10일의 보고서에는 교도기갑사단이 노르망디로의 행군 중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들어 바이어라인의 회고는 오류일 가능성을 제기합니다.20)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이야기 이긴 합니다만 2차대전 당시 전투폭격기나 폭격기에 의한 근접항공지원은 적군에게 직접적인 타격을 입히기에는 능력이 부족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장갑화 되지 않은 차량이나 포병에 대해서는 상당한 위력을 발휘했고 심리적인 위력이 크긴 했지만 공군력 단독으로는 결정적인 요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1) Chester Wilmot, The Struggle for Europe(London, Collins, 1952)
2) Alan Wilt, "The Air Campaign", Theodore A. Wilson(ed.) D-Day 1944(Lawrence, University Press of Kansas, 1971/1994), pp.150~151
3) Ian Gooderson, "Allied Fighter-Bombers versus German Armour in North-West Europe 1944~1945 : Myth and Realities", Journal of Strategic Studies 14-2(1991), pp.211~212
4) Ian Gooderson, 1991, p.213
5) Ian Gooderson, 1991, pp.217~218
6) Ian Gooderson, 1991, pp.221~222
7) Ian Gooderson, 1991, p.222; Mark J. Reardon, Victory at Mortain : Stopping Hitler's Panzer Counteroffensive(Lawrence,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2), p.137
8) Alan Wilt, ibid., p.149
9) Chester Wilmot, ibid., p.351
10) Hubert Meyer, Kriegsgeschichte der 12.SS-Panzerdivision Hitlerjugend, band I(Coburg, Nation Europa, 1999), ss.253~254
11) Ian Gooderson, "Heavy and Medium Bombers : How Successful Were They in Tactical Close Air Support During World War II", Journal of Strategic Studies 15-3(1992)
12) Carlo D'Este, Decision in Normandy(Old Saybrook, Konecky&Konecky, 1983/1994), p.315
13) Niklas Zetterling, Normandy 1944 : German Military Organization, Cobat Power and Organizational Effectiveness(Winnipeg, Fedorowicz, 2000), p.44
14) Richard G. Davis, Carl A. Spaatz and the Air War in Europe(Washington, Center for Air Force History, 1993), p.474
15) Alan Wilt, ibid., p.151
16) Mark J. Reardon, ibid., p.113
17) Ian Gooderson, 1991, p.216
18) Niklas Zetterling, ibid., p.37
19) Ian Gooderson, 1991, p.216
20) Niklas Zetterling, ibid., p.46

노르망디 전역의 연합군 공군과 독일 지상군

 노르망디 전역에서 연합군의 항공부대가 독일 지상군을 상대로 직접적인 타격을 가하는 것에는 실패했다는 점은 이제 잘 알려져 있는 사실입니다. 한국 내에서 이 사실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아마 채승병님이 체터링(Niklas Zetterling)의 Normandy 1944의 제5장, The Effects of Allied Air Power를 번역해서 소개한 이후일 것 입니다. 체터링의 이 글은 독일군과 연합군의 기록을 비교 분석해 연합군 항공전력의 효과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시도했는데 이런 유형의 글이 국내에 처음 소개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을 것 입니다.




 사실 연합군의 항공전력이 독일 지상군을 상대로 신통치 못한 성과를 거뒀다는 것은 비교적 오래전 부터 알려져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예를들어 1952년에 출간된 윌모트(Chester Wilmot)의 The Struggle for Europe에서는 다소 모호하기는 하지만 연합군 항공전력이 지상전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던 사례를 여러차례 언급하고 있습니다.1) 하지만 연구자들에 의해 통계적인 분석이 시도된 것은 1990년대 이후였고 그 이전의 연구들은 엄밀성이 결여된데다 서술도 모호한 편이었습니다. 결정적으로 2차대전 연구에 큰 영향을 끼친 독일군 고위 지휘관들은 대부분 연합군 공군의 위력에 대해 높게 평가했는데 이것은 연합군 공군력의 위력에 대한 과장된 평가가 널리 퍼지는데 일조했을 것 입니다. 이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중폭격기를 동원해 독일 지상군을 폭격한 사례일 것 입니다. 그러나 연합군 공군력의 성과를 높게 평가하는 연구자들 중에도 전략폭격기 부대의 중폭격기들을 전술폭격에 투입해 거둔 성과에 대해서는 의문을 표하는 사례도 종종 있어왔습니다.2)

노르망디 전역에서 연합군 공군이 실제로 어떤 성과를 거두었는지 통계적인 분석을 처음 시도한 것은 구더슨(Ian Gooderson) 이었습니다. 구더슨은 Journal of Strategic Studies에 기고한 두 편의 논문, "Allied Fighter-Bombers versus German Armour in North-West Europe 1944~1945 : Myth and Realities"와 "Heavy and Medium Bombers : How Successful Were They in Tactical Close Air Support During World War II"를 통해 기존에 모호하게 서술되거나 잘못 알려진 사실들에 대한 반박을 시도했습니다. 구더슨의 연구는 미군과 영국군의 자료를 활용해 통계적인 분석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매우 신선한 시도였습니다.

 구더슨의 논문 중 전투폭격기 부대가 거둔 전과에 대한 연구는 연합군의 작전조사반(ORS, Operational Research Section)의 기록을 분석해 연합군의 전투폭격기들이 독일군의 기갑차량을 격파하는데는 효과적이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체터링의 글을 읽어 보신 분들이라면 그 원인을 잘 아실 것 입니다. 노르망디에 투입된 연합군 전투폭격기의 주력은 미육군항공대의 경우 P-47이었고 영국 공군의 경우 타이푼이었습니다. P-47의 경우 8정의 12.7mm기관총이 주무장이고 타이푼은 4문의 20mm기관포가 주무장이었고 이외에 500파운드나 1000파운드 폭탄, 타이푼의 경우는 8발의 3인치 로켓이 있었습니다.
 3인치 로켓의 경우 상당한 위력을 가지고 있어서 1944년 초에 있었던 사격 시험에서 목표물인 판터의 엔진실 상부를 관통해 격파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라면 시험에서 발사한 64발의 로켓탄 중 겨우 세발이 명중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시험에 사용된 판터가 고정 목표였는데 말이지요. 3인치 로켓은 빗나갈 경우 전차와 같은 중장갑 목표물에 거의 효과가 없었습니다. 타이푼 조종사들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직전 3주간에 걸쳐 3인치 로켓 사격 훈련을 받았는데 이정도 훈련으로는 이 까다로운 무기를 제대로 활용하기가 어려웠습니다.3)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로켓을 장비한 타이푼은 대규모로 투입되었습니다. 영국공군은 실전을 통해 획득한 자료를 토대로 1945년에 로켓을 장비한 타이푼에 대한 평가를 내렸습니다. 이 조사에 따르면 실전상황에서 5야드 크기의 포진지에 50%의 명중율을 내기 위해서는 350발의 로켓(44소티)이 필요했으며 10야드 크기의 포진지에 대해서는 88발(11소티), 그리고 판터 정도의 전차에 대해서는 140발의 로켓(18소티)이 필요했습니다.4)

 실제로 조종사들은 매우 높은 전과를 기록했다고 믿었지만 전투 뒤의 조사결과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7월 29일 영국공군은 미군의 요청에 따라 가브레(Gavray) 북동쪽 라 발랭(La Baleine)을 지나가는 독일군을 공격했습니다. 영국공군은 이 공격으로 17대의 전차를 격파하고 27대의 전차를 파손시켰다고 보았는데 작전조사반의 조사결과 항공기에 의해 격파된 것이 확실한 것은 타이푼의 로켓에 의해 격파된 판터 1대와 4호전차 1대였고 이밖에 3대의 판터가 자폭, 3대의 판터가 그냥 유기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5) 전투폭격기들이 대 활약을 했다고 알려진 모르탱(Mortain) 전투에서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영국공군 제2전술항공군은 독일 전차 84대를 확실히 격파하고 35대를 미확인 격파했으며 21대에 손상을 입혔다고 보고했습니다. 미 육군항공대 제9항공군은 69대의 격파, 8대의 미확인 격파, 35대에 손상을 입혔다고 보고했습니다. 하지만 전투 뒤 영국육군의 작전조사반과 영국공군의 작전조사반이 모르탱 지구를 조사한 결과 33대의 판터와 10대의 4호전차, 3대의 돌격포가 전장에 남겨졌으며 이 중 항공기에 의해 격파된 것은 판터 6대(로켓에 의해 5대, 폭탄에 의해 1대)와 4호전차 3대(로켓에 의해 2대, 폭탄에 의해 1대)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6) 이 전투에서도 항공기에 의해 격파된 것 보다는 승무원들이 버리고 도망친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항공기에 의해 판터 6대가 격파된 반면 승무원들이 유기하거나 자폭시킨 판터는 10대였다고 하니 말입니다.7) 전투폭격기가 중포보다는 훨씬 신속하고 정확한 대응을 할 수 있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만8) 실전에서 거둔 성과는 다소 실망럽게 보입니다.

 이 점은 중폭격기들도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 처럼 중폭격기들의 효용에 대해서는 전후에도 상당한 논란이 있었습니다. 굿우드(Goodwood) 작전과 코브라(Cobra) 작전 당시의 유명한 사례가 보여주듯 중폭격기에 의한 폭격은 폭격 초기에는 어느 정도 혼란을 일으킬 수 있었지만 독일군은 대개 초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끈질긴 저항을 했습니다. 찬우드(Charnwood) 작전 당시인 1944년 7월 7일 독일군 방어선에 467대의 랭카스터와 핼리팩스 중폭격기가 동원되어 2,560톤의 폭탄을 투하했습니다만9) 그 효과는 매우 미미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영국군의 주공을 상대한 12SS 기갑사단의 경우 이러한 대규모 폭격에도 불구하고 사기에 큰 영향을 받지 않고 격렬하게 저항했으며 오히려 연합군의 폭격으로 캉에 남아있던 민간인 300~400명이 부상을 당하는 등 '부수적 피해'가 발생했습니다.10) 실제로 영국 제21집단군의 작전조사반은 중폭격기를 동원한 폭격의 효율성에 대해 의문을 표하고 있었습니다.11) 이당시 전투에 참여한 영국 육군 장교들도 캉에 대해 폭격을 해야 했는지 회의감을 나타냈을 정도라고 합니다.12) 유사한 사례는 꽤 많이 있는데 잘 알려진 체터링의 저작에 따르면 6월 29일 100대의 중폭격기가 9SS기갑사단의 20기갑척탄병연대 3대대를 폭격했을 때 사망자는 20여명에 그쳤으며 80% 가까운 차량이 그날 저녁까지 가동가능한 상태가 되었다고 합니다. 앞서 언급한 12SS사단의 경우 어느정도 방어선을 구축한 상태였지만 9SS기갑사단의 경우 공격을 위해 집결하고 있어 매우 취약한 상태였음에도 말입니다.13)

 그리고 잘 알려져 있다시피 연합군의 근접항공지원은 상당한 오폭을 일으켰습니다. 가장 유명한 코브라 작전 당시의 오폭은 111명의 미군을 사망하게 했으며 서유럽전선에서 가장 높은 계급의 미군 사망자를 발생시키기도 했지요. 미국측의 조사에 따르면 이날 35대에서 60대 정도의 중폭격기와 42대의 중형폭격기가 미군을 폭격했다고 합니다.14) 사실 아군에 의한 오폭은 꽤 흔한 일이었습니다. 노르망디 전역 초기인 6월 8일에서 18일까지 미 육군항공대의 제9전술항공사령부(Tactical Air Command)는 13건의 오폭이 발생했다고 기록했습니다.15) 이런 오폭은 노르망디 전역 내내 계속되었고 심한 경우에는 한 부대가 계속해서 오폭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모르탱 전투당시 미육군 제30보병사단 120보병연대 본부는 단 하룻동안 아군 항공기에 의해 10번이나 공격받았고 이 공격으로 연대 군수참모가 전사했다고 하지요.16)

노르망디 전역에서 연합군 공군의 전술항공지원은 직접적인 타격 보다는 간접적으로 피해를 입혔다는 견해가 많습니다. 특히 연합군 항공력의 전과에 대해 낮게 평가하는 연구자들도 심리적인 영향에 대해서는 높게 평가하고 있지요. 실제로 영국군이 독일군 포로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저공비행하는 전투폭격기의 기총소사나 로켓 사격은 지상부대의 사기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17) 체터링도 그의 저작에서 연합군 공군이 독일 지상군에게 심리적으로 영향을 끼쳤다고 서술하고 있지요.18) 부대의 이동과 집결에 지장을 끼친 것도 중요한 성과라고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독일측 기록을 활용한 체터링의 경우는 연합군 공군이 부대의 이동과 집결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 보다 회의적인 입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를들어 교도기갑사단 사단장 바이어라인은 6월 8일 전선으로 이동하던 중 공습으로 5대의 전차와 84대의 보병수송장갑차 및 견인용 하프트랙, 자주포와 130대의 자동차를 상실했다고 회고한 바 있습니다.19) 이에 대해 체터링은 6월 10일의 보고서에는 교도기갑사단이 노르망디로의 행군 중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들어 바이어라인의 회고는 오류일 가능성을 제기합니다.20)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이야기 이긴 합니다만 2차대전 당시 전투폭격기나 폭격기에 의한 근접항공지원은 적군에게 직접적인 타격을 입히기에는 능력이 부족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장갑화 되지 않은 차량이나 포병에 대해서는 상당한 위력을 발휘했고 심리적인 위력이 크긴 했지만 공군력 단독으로는 결정적인 요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1) Chester Wilmot, The Struggle for Europe(London, Collins, 1952)
2) Alan Wilt, "The Air Campaign", Theodore A. Wilson(ed.) D-Day 1944(Lawrence, University Press of Kansas, 1971/1994), pp.150~151
3) Ian Gooderson, "Allied Fighter-Bombers versus German Armour in North-West Europe 1944~1945 : Myth and Realities", Journal of Strategic Studies 14-2(1991), pp.211~212
4) Ian Gooderson, 1991, p.213
5) Ian Gooderson, 1991, pp.217~218
6) Ian Gooderson, 1991, pp.221~222
7) Ian Gooderson, 1991, p.222; Mark J. Reardon, Victory at Mortain : Stopping Hitler's Panzer Counteroffensive(Lawrence,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2), p.137
8) Alan Wilt, ibid., p.149
9) Chester Wilmot, ibid., p.351
10) Hubert Meyer, Kriegsgeschichte der 12.SS-Panzerdivision Hitlerjugend, band I(Coburg, Nation Europa, 1999), ss.253~254
11) Ian Gooderson, "Heavy and Medium Bombers : How Successful Were They in Tactical Close Air Support During World War II", Journal of Strategic Studies 15-3(1992)
12) Carlo D'Este, Decision in Normandy(Old Saybrook, Konecky&Konecky, 1983/1994), p.315
13) Niklas Zetterling, Normandy 1944 : German Military Organization, Cobat Power and Organizational Effectiveness(Winnipeg, Fedorowicz, 2000), p.44
14) Richard G. Davis, Carl A. Spaatz and the Air War in Europe(Washington, Center for Air Force History, 1993), p.474
15) Alan Wilt, ibid., p.151
16) Mark J. Reardon, ibid., p.113
17) Ian Gooderson, 1991, p.216
18) Niklas Zetterling, ibid., p.37
19) Ian Gooderson, 1991, p.216
20) Niklas Zetterling, ibid., p.46

대륙의 기상

중국의 환경 파괴를 다룬 사피로(Judith Shapiro)의 Mao's War Against Nature : Politics and the Environment in Revolutionary China는 꽤 재미있는 저작입니다. 분량도 그리 많지 않은데다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 같이 무한한 떡밥거리를 가진 시기를 다루고 있다보니 꽤 재미있게 읽을 수 있지요.

아무래도 가장 황당한 이야기는 대약진운동 시기에 많은 것 같습니다. 대약진운동의 상징이라면 제철량 증대를 위한 토법로(土法爐)가 되겠습니다. 이 책의 81~83쪽은 토법로 건설로 인한 환경파괴를 다루고 있는데 난감한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이 책에 따르면 1958년 10월 말까지 6천만명(;;;;)이 토법로에 투입되어 제철작업을 했고 같은해 12월에는 이 숫자가 9천만명(;;;;;;;;)으로 늘어났다고 합니다. 노동가능인구의 상당수를 여기에 쏟아넣은 셈인데 이러고도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길 바란다면 문제겠지요. 게다가 토법로는 노동력만 빨아들이는게 아니라 제철을 위해 엄청난 양의 연료를 필요로 했습니다. 석탄이 풍부한 지역이라면 걱정이 없겠지만 그렇지 못한 지역이라면 나무를 써야지요. 대약진 운동시기 토법로로 인한 환경파괴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어서 사피로가 인터뷰한 중국 전문가들은 대약진운동 첫 해에 중국 전체 숲의 10%가 토법로의 밥이 되었다는데 의견이 일치한다고 합니다(;;;;) 근방의 숲을 모두 베어버린 다음에는 사찰이나 도교사원을 파괴해서 연료로 썼다는데 이쯤되면 그냥 막장이죠(;;;;) 문화대혁명 이전에 상당수의 문화재가 토법로의 밥이 되었으니 이것 참(;;;;)

Saturday, May 1, 2010

차베스의 키보드 워리어들

그동안 정신이 없다보니 RSS 리더에 읽지 않은 기사들이 가득 찼습니다.

밀린 글들을 대략 훑어보다 보니 골때리는 기사가 하나 눈에 들어오더군요. 4월 20일자로 된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의 기사는 바로 차베스가 진짜 "키보드 워리어"들을 세금으로 양성하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Eine Kinderarmee für Hugo Chávez -Operation Kommunikationsdonner

이 기사에 따르면 차베스는 자신의 사회주의 혁명에 대해 중상모략을 일삼는 민영 언론에 반격하기 위하여 13세에서 17세의 청소년들을 동원하기로 결정했으며 그 결과 지난 2월 부터 수도 카라카스에서 시범적으로 선발된 79명의 청소년들에게 언론 교육을 시키고 있다고 합니다. 이들의 임무는 핸드폰, 인터넷, 트위터, 페이스북 등을 이용해 민영 언론에 반격을 가하는 것 이라고 합니다. 세금으로 키보드 워리어를 양성하겠다는 것이니 정말 차베스도 막장이로군요.

차베스는 이미 이라크전에 큰 감명을 받아 대규모 민병대를 조직해 놓았는데 이제는 선전 선동을 위해 키보드 민병대를 조직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차베스를 찬양하던 사람들은 이 정신나간 짓에 대해서는 뭐라고 평할까요?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다 시피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이하 FRUS)는 미국 국무부가 발행하는 대외정책 관계 사료집입니다. 인용도도 높고 그만큼 유명하지요.

이 사료집은 꽤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연대기순으로 정리되어 있기 때문에 미국의 대외정책이 입안되어 시행되는 흐름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물론 기본적으로 1차사료를 편집하여 가공한 사료집이기 때문에 편집자의 평가에 따라 생략되는 부분도 가끔 있습니다만. 두 번째는 국무부를 중심으로 필요에 따라 대외정책에 영향을 끼치는 국방부, 중앙정보국 등의 문서도 함께 편집되기 때문에 한 사안에 대한 각 부처의 입장을 개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각 부처의 문서를 일일이 뒤져보는 것 보다 편리한 게 사실이지요.

물론 어디까지나 미국의 입장을 옹호하기 위해서 미국의 시각으로 만들어지는 자료집인 것은 사실입니다. 중국 정부가 공개하고 있는 사료집들과 마찬가지 이지요.(물론 미국은 중국처럼 조작한 사료집을 내놓지는 않는다고 합니다만;;;;) 그래도 다른 참고자료들과 함께 비판적으로 읽어나가면 꽤 유용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 처럼 정리가 잘 되어 있다보니 급히 글을 쓸때 굉장히 유용합니다.

하지만 역시 가장 큰 장점은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다 시피 온라인에 많은 부분이 공개되어 있다는 점 입니다. 그만큼 쉽게 사용할 수 있지요.

예를들어 1863년 부터 1960년 까지의 FRUS는 위스콘신 대학 전자도서관을 통해 공개되어 있습니다. 방대한 분량이지요.

University of Wisconsin Digital Collections -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위스콘신 대학 전자도서관에서 공개하는 FRUS의 문제라면 파일당 크기가 지나치게 커서 저장공간이 충분치 못한 분들에게는 좀 고약하다는 것 정도겠습니다.

그리고 1961년 이후의 분량은 미국 국무부 사이트에서 공개하고 있습니다.

U.S. Department of State - Office of the Historian

원래 자료 자체의 이용 편의성이 높은데다 전산화까지 잘 되어 있으니 글쓰는 사람 입장에서는 매우 고맙기 그지없는 일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