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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2일 일요일

대륙의 기상

중국의 환경 파괴를 다룬 사피로(Judith Shapiro)의 Mao's War Against Nature : Politics and the Environment in Revolutionary China는 꽤 재미있는 저작입니다. 분량도 그리 많지 않은데다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 같이 무한한 떡밥거리를 가진 시기를 다루고 있다보니 꽤 재미있게 읽을 수 있지요.

아무래도 가장 황당한 이야기는 대약진운동 시기에 많은 것 같습니다. 대약진운동의 상징이라면 제철량 증대를 위한 토법로(土法爐)가 되겠습니다. 이 책의 81~83쪽은 토법로 건설로 인한 환경파괴를 다루고 있는데 난감한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이 책에 따르면 1958년 10월 말까지 6천만명(;;;;)이 토법로에 투입되어 제철작업을 했고 같은해 12월에는 이 숫자가 9천만명(;;;;;;;;)으로 늘어났다고 합니다. 노동가능인구의 상당수를 여기에 쏟아넣은 셈인데 이러고도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길 바란다면 문제겠지요. 게다가 토법로는 노동력만 빨아들이는게 아니라 제철을 위해 엄청난 양의 연료를 필요로 했습니다. 석탄이 풍부한 지역이라면 걱정이 없겠지만 그렇지 못한 지역이라면 나무를 써야지요. 대약진 운동시기 토법로로 인한 환경파괴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어서 사피로가 인터뷰한 중국 전문가들은 대약진운동 첫 해에 중국 전체 숲의 10%가 토법로의 밥이 되었다는데 의견이 일치한다고 합니다(;;;;) 근방의 숲을 모두 베어버린 다음에는 사찰이나 도교사원을 파괴해서 연료로 썼다는데 이쯤되면 그냥 막장이죠(;;;;) 문화대혁명 이전에 상당수의 문화재가 토법로의 밥이 되었으니 이것 참(;;;;)

2009년 1월 7일 수요일

가카의 대약진운동 2

정부의 일자리 대책에 대해서 언론들이 재원 조달 방안이 미흡하다며 비판하고 있습니다.

[녹색 뉴딜] 급한 일자리+친환경 성장 '한국형 뉴딜'

조선일보도 비판적인 사설을 실었군요.

[사설] '녹색 뉴딜'로 정말 96만 개 일자리 창출 가능한가

이번 대책은 정책적 고려가 부족한 상태로 상부의 지시에 의해 졸속으로 수립된 것이 거의 확실해 보입니다. 역사적 경험에 따르면 이런 불황 상태에서는 정부 지출로 이런 임시적인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도 많은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을 하건 일단 재원 조달 방안은 확실해야 믿을 수 있지요. 그런데 정부의 계획은 도통 믿음이 가지 않는군요.




뭐 어떻습니까. 일자리만 늘어나면 되는거죠!

한국일보에서 퍼왔습니다.




중국이 철 생산량을 늘린 것 처럼 말입니다!

2009년 1월 6일 화요일

가카의 대약진운동

지하철 가판대에서 한국일보를 사보니 1면에 아주 멋진 기사가 실려 있었습니다.

올해는 완전고용 시대?

가카께서 명령을 하달하니 각 부처들이 경쟁적으로 일자리를 만들겠다고 한 모양입니다. 이건 무슨 대약진운동 시기의 농민대회를 보는 것 같군요;;;;


공업에서의 대약진에 앞서 먼저 식량 생산에서 증산 경쟁 운동이 일어났다. 1958년에 ‘최고의 수확을 다짐하는 농민대회’가 열렸다. 과거 밀 수확량은 1에이커 당 500근에 불과했으나 이날 출전한 첫번째 인민공사 대표는 1에이커 당 3,000근을 목표로 내세웠다. 두번째 대표는 4,000근을, 세번째 대표는 5,000근을 다짐했으며 결국 대회에서는 모두 10,000근을 달성할 것을 결의했다.

차문석, 『반노동의 유토피아 – 산업주의에 굴복한 20세기 사회주의』, 박종철출판사, 2001, 244쪽

넵. 물론 결과는 다들 잘 아시는 바와 같습니다.

과연, 우리의 가카는 마오주석 부럽지 않은 양반입니다. 가카께서 일자리를 만들라고 하시니 각 부처별로 일자리 만들기 경쟁을 하는군요. 벌써 일자리가 100만개를 넘어섰다고 하니 남조선은 구원받았습니다!

※ 역시 한국일보는 돈 주고 사 볼 가치가 있는 신문입니다. 같은 내용으로 이렇게 재미있는 기사를 뽑아낸다는게 쉬운 일이겠습니까.

2007년 12월 8일 토요일

대자연을 떡실신 시키는 위대한 마오주석의 한마디

주말에는 블랙코메디를..

참새에 대한 공격을 위해 어린이 전사들이 자연과의 전쟁에 대거 투입되었으며 특히 학교에 재학중인 연령대의 어린이들은 ‘해악’에 대한 공세의 주력군이었다. 마오는 1958년 5월 18일에 열린 제 8기 전국인민대표대회 2차회의에서 이 전쟁에 참여할 최저 연령대를 설정했다.

“다섯살 어린이를 포함한 모든 인민은 ‘네 가지 해악을 격멸(除四害)’하기 위해 총궐기해야 할 것입니다.”

당시 학교를 다녔던 사람들은 이 전쟁이 학교 수업을 땡땡이 치는 즐거운 경험이라고 회고했다. 사천지방의 한 사람은 자신의 초등학교 시절 참새 박멸 경험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네 가지 해악을 격멸’하는 것은 너무 신났습니다. 학교의 학생 전체가 참새를 죽이기 위해 동원되었지요. 우리는 사다리를 만들어 참새 둥지를 부수고 참새들이 쉬기 위해서 돌아오는 저녁에는 종을 쳐댔습니다. 참새가 유익한 동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죠. 우리는 그때만 해도 참새가 곡식을 축내는 동물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군사작전과 마찬가지로 이 전쟁에서도 합동 전술이 기본이었다. 참가자들은 일제히 공격을 퍼부었고 참새들은 보다 조용한 장소로 피신해야 했다. 그러나 모든 연령대의 중국인 수백만명이 온 들판에 산개해 동시에 난리 법석을 떨어댔기 때문에 참새들은 안전한 피신처를 찾을 수 없었다. 참새와의 전쟁에서 보인 동시성은 이 전쟁의 결과만큼이나 충격적인 수준이었다. 중경의 남서농업대학에 재직하던 한 농업화학 전문가는 베이베이(北碚)구의 모든 인민들이 야간에 소집되어 언덕에 투입됐던 때를 회고했다.

우리는 불쌍한 참새들이 지쳐 떨어질 때 까지 솥을 두들겼습니다. 우리는 며칠 동안 이 짓을 계속했습니다. 그 뒤로는 참새가 눈에 띌 정도로 줄어들었습니다. 나는 항일전쟁 당시 서주에서 중경으로 옮겨온 한 유명한 식당을 알고 있습니다. 그 식당의 별미는 소금에 절인 참새 두 마리를 꼬치로 만든 것 이었습니다. 하지만 ‘네 가지 해악을 박멸’하는 투쟁 이후로는 더 이상 그 요리를 맛 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1959년이 되자 더 많은 해충이 생겨났습니다. 사람들은 쉽게 눈치채지 못 했지만 우리 대학의 농작물보호연구소에 따르면 곡식에 대한 병충해가 더욱 증가했습니다.”

(중략)

농부들은 뒤늦게야 참새야 말로 병충해 퇴치에 있어 가장 큰 아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960년 4월에는 참새를 대신해서 빈대가 네 가지 해악 중 하나로 지정되었지만 이미 이 무렵 중국의 많은 지역에서는 참새의 씨가 마르고 말았다. 운남지역의 한 식물학자는 마오가 참새를 박멸하자는 선동을 한 뒤 갑자기 이것을 중단하라고 한 일을 이렇게 기억했다.

“우리는 참새의 둥지를 부수고 알을 깨 버리고 새끼들을 죽였습니다. 뒤에서야 과학자들은 참새가 벌레도 먹는다는 사실을 발표했고 중국과학원은 참새가 먹는 벌레와 곡식의 비율을 계산한 보고서를 내 놓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참새 사냥을 멈췄습니다. 마오 주석은 그냥 ‘이제 그만하면 됐어(算了)'라고 말했답니다. 이 때는 이 한 사람의 말이 모든 것을 규정하던 때였지요.”

Judith Shapiro, Mao’s War Against Nature : Politics and the Environment in Revolutionary China(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1), pp.86~88

과연. '마오주석의 말은 매 구절이 진리이고 한 구절이 우리의 일만 구절을 초월한다'는 린뱌오 동지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습니다. 말 한마디로 한 생물종을 멸종의 위기로 몰고가는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랍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