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중국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중국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11년 12월 14일 수요일

브레진스키의 중국의 미래에 대한 전망

이번의 해경 순직 사건에서 나타난 것 처럼 중국과의 외교적 마찰이 일어날 때 마다 평소에는 대중의 관심 밖에 있던 중국의 위협적인 측면이 드러납니다. 어느 순간 두려움을 느낄 정도로 거대해진 이 국가가 앞으로 어떤 길을 걷게 될 것인지는 바로 옆에 붙어있는 나라의 국민으로서 결코 관심을 끊을 수 없는 문제이지요. 여전히 불확실성은 많고 중국의 미래에 대해서도 엇갈리는 전망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물론 제 입장이야 중국이 위협적이지 않은 국가가 되는 것 이지만 현실주의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중국의 국력이 신장될 수록 그에 걸맞는 지위를 요구하리라는 것은 피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게 어떠한 것이 될 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재 중국의 행태를 봐서는 도저히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군요.

이번과 같은 사건을 접하고 나면 분노의 뒤에 막연한 공포가 밀려오게 됩니다. 저 괴물은 어디까지 나가게 될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나같이 막연한 물음이고 그에 대한 답은 더 흐릿합니다. 이럴 때는 중국의 패권국화에 대한 회의적인 전망에 귀가 솔깃하게 됩니다. 즈비뉴 브레진스키가 15년 전에 했던 예측이 그에 속하는데 약간 인용해 보지요.

그러나 말 그대로 중국이 세계의 중심국가로 부상하리라고 보는 이 진단은 많은 함정을 가진다. 가장 명백한 것은 그러한 진단이 기계적 통계에 의존해 있다는 점이다. 그와 같은 오류는 오래지 않은 과거에 일본이 미국을 대신해서 세계 경제를 주도하고 새로운 대국이 될 수 밖에 없을 것 이라 예측했던 사람들이 이미 범했던 것이다. 그러한 관점은 일본 경제가 지닌 취약성이라는 변수와 정치적 불연속성이라는 변수를 감안하지 못한 것이다. 똑같은 오류가 중국이 필연적으로 세계 강국이 되리라고 주장하거나 두려워하는 사람들에 의해 되풀이 되고 있는 것이다.

Z 브레진스키 지음, 『거대한 체스판 : 21세기 미국의 세계 전략과 유라시아』,  (삼인, 2000),  209쪽

과연 미래의 중국은 어떤 길을 걷게 될까요?

미래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기는 하겠습니까만 살짝 부족한 조국의 국력에 불안감을 느끼는 입장에서 이런 전망에 귀가 솔깃해 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방금 전 물 한잔 마시러 나갔다가 잠시 보게 된 뉴스에는 이번에 순직한 경찰분의 유가족들이 오열하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착잡한 마음과 함께 중국에 대한 분노, 그리고 약간의 불안감을 느꼈습니다. 굉장히 어수선한 밤 입니다.

2011년 6월 27일 월요일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경계지대?

오전에 포린 폴리시 인터넷판을 잠깐 훑어보니 재미있는 글이 하나 올라왔습니다. 제목하여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경계지대들(The World's Most Dangerous Borders)'. 제목부터 호기심을 자극하여 한번 읽어봤습니다.

 재미있게도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경계지대가 한반도에 두 곳이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당연히 휴전선이고 다른 하나는 북중국경이더군요;;;; 휴전선은 200만이나 되는 대군이 대치하고 있는 곳이니 선정되는게 당연하지만 북중국경은 좀 의외입니다. 포린 폴리시에서는 북중국경은 탈북자가 너무 많아서 북한의 안정성을 흔들지경이기 때문에 북중국경을 선정했더군요.

포린 폴리시에서 선정한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경계지대에는 다음과 같은 곳이 들어가 있습니다.

1. 수단과 남수단의 국경
2. 인도와 파키스탄의 국경
3.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국경
4.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
5. 캄보디아와 태국의 국경
6. 콩고민주공화국과 앙골라의 국경
7. 인도와 방글라데시의 국경
8. 한반도의 휴전선
9. 베네주엘라와 콜롬비아의 국경
10. 차드와 수단의 국경
11. 사우디아라비아와 예멘의 국경
12. 북한과 중국의 국경
13.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국경

 한반도에 이어 인도와 수단이 2관왕을 차지한 것이 눈에 띄입니다. 한반도가 인도와 수단같은 막장의 반열에 올라있다니 참 묘합니다.

2011년 5월 28일 토요일

중국이 파키스탄에 해군 기지를 둘 수 있다는 보도에 대한 로버트 카플란의 평

파키스탄이 중국에게 자국 내에 해군기지를 두는 것을 제안했다는 보도에 대해 로버트 카플란(Robert D. Kaplan)이 매우 흥미로운 평을 했습니다. 재미있는 글이니 아직 안읽으신 분들은 한 번 읽어 보시길.




카플란은 이 글에서 파키스탄의 불안한 국내 정세와 아프가니스탄 문제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파키스탄과의 관계에서 골머리를 앓는 것 처럼 중국도 파키스탄에 깊숙히 개입하는 순간 골머리를 앓을수 있다는 것이죠. 들어갈 때는 마음대로라도;;;;

2009년 7월 8일 수요일

중국∙북한 동맹관계 - 최명해

우리에게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모르겠으나 중국의 대북영향력은 매우 제한적입니다. 북한 핵문제가 장기화 되면서 중국이 북한에 대해 제한적인 영향력만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명백해 졌는데 이것은 꽤 흥미로운 문제입니다.

최명해의 저작인 『중국∙북한 동맹관계』는 이 문제를 재미있게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저자는 북한과 중국의 관계를 규정하는 중요한 요인을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하는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북한과 중국이 서로 상이한 전략적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점 입니다. 이것은 대외관계에서 흔히 나타나는 일이지요. 두 번째는 중국이 북한을 관리할 수 있을 만큼 강하지 않다는 점 입니다. 이 두번째 문제는 중국에게 꽤 불리하게 작용합니다. 특히 북한과 중국이 서로 상이한 전략적 목표를 가지고 대립할 때 중국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문제점이 처음으로 드러난 것은 흐루쇼프의 집권 이후 중국과 소련의 관계가 악화되었을 때 입니다. 중국은 소련을 중대한 위협으로 간주해 북한과 제휴해 소련에 맞서려 시도합니다. 그러나 북한은 자국에게 핵우산을 포함한 안전보장을 해 줄 수 있는 소련과 공개적으로 대립하는 것은 회피하려 합니다. 중국은 북한에게 그런 것들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실력이 되지 않았지요. 중국은 북한을 회유하기 위해 다양한 당근을 제시하지만 북한은 호락호락하게 걸려들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중국과 미국이 관계개선을 하면서 이런 구조는 더 요상하게 꼬여갑니다. 북한은 중국과 미국이 국교를 수립한 이후 한반도 문제를 공동관리하는 방향으로 나가자 중국의 하위체제에 포섭되지 않기 위해서 80년대에는 소련쪽에 밀착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 소련이 갑자기 망해버리죠;;;; 결국 북한에게 충분한 안전보장을 해 줄수 있는 소련이 망해버리니 북한에게 남은 선택은 두 가지가 됩니다. 중국의 하위 체제로 포섭되느냐 아니면 북한의 자율성을 인정해 줄 수 있는 쓸만한 물주를 찾느냐.

네. 결국 답은 우리 모두가 잘 알 듯 ‘미국밖에 없다’가 됩니다. 누가 보더라도 미국은 안전보장 측면에서 중국보다 우월하지 않겠습니까. 일단 국력 차이부터가 엄청나지요. 이후의 이야기야 우리 모두 잘 알 듯 미국은 중국에게 최대한 많은 역할을 부여하고 싶어하지만 북한이 말을 듣질 않고 있습니다. 어쩌겠습니까. 북한 입장에서는 미국이 중국보다 매력적인 상대인 것을. 문제라면 미국이 북한에게 신경쓰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겠습니다만.

저자는 중국이 북한과 동맹을 형식적이나마 유지할 수 밖에 없는 이유도 근본적으로는 북한을 자신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주 내에 묶어 둘 수 있는 수단이 동맹외에는 없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마치 1950년대에 소련이 그랬던 것 처럼 현재의 미국은 북한에게 제공해 줄 수 있는 것이 중국 보다 더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식적인 동맹마저 폐기된다면 그렇지 않아도 미국에게 들러붙고 싶어 안달 난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동북아시아에서 중국의 위상은 추락할 수 밖에 없으며 그것은 중국 지도부가 결코 원하지 않는 시나리오 일 것입니다.

Ps 1. 저자는 북한과 중국의 관계에서는 기괴하게도 북한보다 더 강대국인 중국이 ‘방기(abandonment)’의 위협을 느끼는 경우가 가끔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꽤 재미있는 해석이지요. 수십년 동안 소련과 미국에게 치어 2인자에 머무르는 것이 중국의 현실인 만큼 그럴듯한 이야기 입니다.

PS 2. 이종석도 북한과 중국의 관계에 대해서 책을 한 권 썼습니다. 이종석의 책과 비교하며 읽으시면 훨씬 재미있습니다. 최명해가 미국과 중국의 협력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이종석은 미국과 중국의 갈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요. 아마도 동북아균형자론이라는 발상이 나온 것도 이종석이 미국과 중국의 갈등을 심각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일 것 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종석 보다는 최명해의 저작이 더 재미있고 읽을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2008년 11월 19일 수요일

Strangers in a Strange Land

'하얼빈지방검열부 통신검열월보' 1942년 11월호를 읽다보니 좀 재미있는 단체의 이름이 나오더군요.


天津猶太國復興運動結成委員會


중국에도 유태인 사회가 형성되어 있었으니 시오니즘 운동이 없지는 않았겠습니다만 2차대전이 발발한 와중에 독일 동맹국의 점령지역에서도 저런 짓을 하고 있었다는건 좀 깨더군요.

예전에 미 극동군사령부 문서를 읽다가 국공내전 와중인 1948년에 만주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독일인들을 독일로 송환하는 문제가 언급된 것을 읽고 재미있게 생각했었는데 이건 그것 보다 약간 더 특이한 것 같습니다.

2008년 10월 5일 일요일

Kenneth Chase가 주장하는 중국의 화기 개발이 낙후된 원인

번동아제님의 글, 「조선 후기 군대의 기본 전투대형인 층진의 개념도」에 달린 댓글을 읽다보니 흥미로운 구절이 하나 눈에 들어왔습니다.

다만 에도시대 일본의 병학이 1700년대까지 여전히 시대불명의 망상세계를 헤메고 있었고, 청나라 또한 화약병기 시대에 걸맞는 진형을 제대로 개발 못해 헤매던데 비하면 그나마 조선은 유럽의 선형 전술과 비슷한 대형을 내놓고 고민하고 있었다는 점에선 부분적이나마 긍정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 번동아제

중국이 조선 보다도 화약무기를 활용한 진형의 개발에서 뒤떨어졌다는 점은 정말 의외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중국은 명-청 교체기 이후로는 화약무기의 활용에서 유럽에게 완전히 추월당하고 말았지요. 중국이 화약무기를 개발한 원조임에도 불구하고 17세기 이후로는 유럽을 따라잡지 못하게 된 이유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는데 제가 가장 재미있다고 생각한 가설은 Kenneth Chase의 주장입니다. Kenneth Chase에 대해서는 이글루에 있을 때 한번 간단히 소개한 적이 있는데 이글루를 닫으면서 해당 글을 날려버렸으니 다시 한번 언급해 볼까 합니다.

Kenneth Chase는 화약무기의 초기 발전단계에서 발전에 영향을 끼치는 요소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기병의 위협이고 두 번째는 보병의 위협입니다. 전자의 위협이 클 경우 초기 단계의 화기로 무장한 보병은 적 기병의 기동성을 상쇄할 만한 수단이 없으므로 전투에 불리할 수 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기병의 위협이 심각한 곳에서는 기병에 대한 대항수단으로 기병을 선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경우 화기의 개발은 우선순위에서 밀리게 됩니다. 보병의 위협이 크다면 조건은 반대가 되겠지요.

Chase는 이상의 조건에 따라 화기의 발달유형을 다음의 네 가지로 구분합니다.
먼저 기병과 보병의 위협을 모두 받는 경우는 화약무기의 발전이 중간 정도로 일어납니다. 보병위주의 서유럽과 기병위주의 유목민들을 동시에 상대한 오스만 투르크와 동유럽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다음으로 기병의 위협은 크지만 보병의 위협은 적은 경우가 있습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경우가 바로 중국으로 이런 경우 화약무기의 발전은 느리게 진행됩니다.
세 번째는 기병의 위협은 적고 보병의 위협이 큰 경우 입니다. 서유럽이 여기에 해당되며 이 경우에는 화기의 발전이 급속히 진행됩니다.
마지막은 양쪽 모두의 위협이 없는, 전쟁의 위협이 적은 경우인데 이 경우는 이렇다 할 발전이 없습니다. 바로 도쿠가와 막부 시기의 일본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이런 전제 하에서 Chase는 명청교체기 중국의 화약무기 사용에 대한 장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중국이 (화약무기 개발에서) 뒤쳐지게 된 시점이 명 말기인지 또는 청 초기인지는 단언하기가 어렵다. 유럽은 1400년대 후반에 최초의 실용적 화기인 머스켓을 개발 함으로서 처음으로 중국을 앞서는 단초를 마련했지만 중국인들에게 머스켓은 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대안이 아니었다. 명 왕조의 멸망과 청 왕조가 건립된 시기에 있었던 사건들은 중국의 국방에 있어서 유용한 수단은 명 초기와 마찬가지로 기병이었음을 보여준다. 초기의 청 왕조는 (화기의 사용에서) 상대적으로 유럽에 비해 뒤쳐졌지만 유럽의 위협이 닥치기 까지는 아직 2세기나 더 남아 있었다.
화기, 특히 1300~1400년대의 조잡한 수준의 화기는 단독으로 명 왕조가 처한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이 아니었다. 화기가 기병과 싸우는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점은 중국에서 화기의 발달이 별로 이뤄지지 못한 이유를 잘 설명해 준다.

Kenneth Chase, Firearms : A Global History to 1700,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p.171

Chase는 일본이 중국에게 유럽이 오스만 투르크에게 했던 역할을 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르지만 일본은 서유럽에 비해 전쟁수행능력이 부족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임진왜란은 일본의 제한된 정복전쟁 수행능력을 잘 보여줬으며 결국 일본은 이 전쟁의 실패 이후 조용히 고립노선을 걷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중국을 위협하는 존재는 기병을 운용하는 만주족 만이 남게 되어 화약무기 개발에 대한 필요성이 줄어들 수 밖에 없었다는 결론입니다.

2008년 6월 19일 목요일

북한의 전후 복구에 대한 "사회주의 형제국가"들의 지원

비록 북한인민들이 (전후복구에) 엄청난 노력을 쏳아 넣었다지만 "사회주의형제국가"들의 원조가 없었다면 신속한 전후복구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 이미 1952년 11월 경부터 북한의 전후 복구를 위한 다국적 원조계획의 윤곽은 잡혀있었다. 1953년 9월 1일부터 29일까지 김일성이 이끄는 북한대표단은 경제원조를 요청하기 위해 소련을 방문했다. 소련은 북한의 부채 중 절반을 탕감했으며 나머지 절반의 지불도 연기시켰다. 또한 소련은 북한에게 10억루블에 달하는 무상원조를 제공하기로 했다. 총 60만 루블에 달하는 원조가 물자와 설비의 형태로 제공되었으며 나머지는 공장의 재건과 시설설비에 투입되었다. 특히 후자에는 청진, 성진, 남포의 주물공장과 흥남의 화학공장, 수풍의 수력발전소, 마동의 시멘트공장, 평양의 섬유공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소련은 양덕-청성간의 철도를 전력화 하는 것과 남포항의 복구, 평양 중앙 라디오 방송국을 건설하는 것을 지원했으며 평양에 병원 하나를 직접 운영하기도 했다. 또한 북한은 소련으로부터 어선, 버스, 농업기계, 화학비료, 과학서적, 그밖의 소비재를 원조 받았다.
소련 기술자들은 북한에서 그들의 조선인 동료들이 받는 것과 동일한 월급을 받으며 근무했다. 물론 이것은 그들의 노동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것이었기 때문에 나머지는 소련 대사관이 지급했다. 전체적으로 소련 기술자들은 북한인 기술자에 비해 네 배의 월급을 받았다. 또한 소련 기술자들은 북한의 외국인 상점을 이용하기 위해서 위안화를 별도로 지급받았다.

김일성은 (1953년) 11월 12일에서 27일에 걸쳐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 소련정부와 체결했던 것과 같은 조약을 체결했다. 베이징 정부는 한국전쟁 이래 누적된 북한의 채무를 모두 탕감하고 8조 위안에 달하는 경제원조를 제공하기로 했다. 1954년에 북한은 중국으로부터 3조 위안의 원조를 받았으며 이 중 76.14퍼센트는 물자지원, 그리고 23.86%는 재정지원이었다. 중국은 남포의 유리 공장과 한 개의 철물 공장을 포함해 몇 개의 공장을 재건하는 것을 도왔다.
또한 북한에 주둔하고 있던 인민해방군 부대는 북한의 노동력 부족을 완화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예를 들어 인민해방군 병사들은 전쟁 기간 중 파괴된 북한의 외무성 건물과 중앙은행건물을 다시 건설하는데 투입되었으며 철도와 교량, 도로의 보수공사에도 참여했다. 1954년에 총 295명에 달하는 중국인 기술자들이 북한의 공장을 건설하기 위해서 북한에 체류했으며 동시에 2,963명의 북한 기술자들이 실무경험을 쌓기 위해 중국으로 1년 기간의 연수를 떠났다. 중국은 북한에 여러 가지의 기계와 어선, 기관차, 화차, 건축 자재, 그리고 면화를 제공했다. 1950년대 중반에 중국은 북한에 있어 가장 중요한 소비재 공급처였다. 조선인민군 병사들은 중국제 군복을 입었으며 북한의 상점과 백화점에서는 중국제 의류, 방한복, 셔츠, 양말, 속옷, 운동화, 식기, 세면도구등을 판매했다.

1953년 말에 북한정부는 동유럽국가들, 그리고 몽골을 상대로 중국과 맺었던 것과 비슷한 조약을 체결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휘천과 운산에 기계 생산공장을, 덕천에 자동차 공장을 한 개 건설하기로 했다. 그리고 동독은 인쇄소, 디젤엔진공장, 제철소를 건설하기로 했다. 또 폴란드 정부는 원산과 평양에 기관차 및 화차 수리 공장을 건설하는 것과 북한의 광산 세 곳을 기계화 하는데 지원하기로 했다. 헝가리는 구성, 평양, 봉궁에 기계 공장, 저울공장, 페인트 공장을 건설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루마니아는 북한에게 시멘트공장, 제약공장, 어선, 기계류 등 6500만 루블에 해당하는 원조를 제공하기로 했다. 불가리아는 1954년에서 1955년에 걸쳐 2000만 루블의 원조를 했다. 불가리아는 북한에 섬유와 판유리를 보내는 한편 벽돌공장과 제제소에 한 곳에 장비를 제공하기로 했다. 1954년부터 1956년에 걸쳐 동유럽 국가들은 북한에 총 11억3400만 루블에 해당하는 원조를 했다.

게다가 몽골정부도 스스로가 해외 원조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입장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북조선의 재건을 위해 기여를 하기로 결정했다. 몽골은 특별히 북한에 보낼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1만마리의 말을 보내기로 했다.


Balázs Szalontai, Kim Il Sung in the Khrushchev Era : Soviet-DPRK Relations and the Roots of North Korean Despotism 1953-1964(Woodrow Wilson Center Press/Stanford University Press, 2005), pp.45-47

몽골정부의 원조 내역을 보니 뭔가 안습이란 생각이 듭니다. 과연 북조선 인민들은 몽골정부가 어떤 원조를 해 줬는지 알긴 했을까 궁금하군요.

추가 - 아래의 사진은 1957년에 북한에 파견된 동독 기술자 에리히 레셀(Erich Robert Ressel)이 촬영한 사진입니다. 말을 탄 인민군 병사들인데 왠지 이 말들이 몽골에서 보낸 그 놈들이 아닐까 싶군요.

Erich Robert Ressel, 『동독 도편수 레셀의 북한 추억 : 50년대의 북녘, 북녘사람들』, (효형출판, 2000), 245쪽

2008년 5월 17일 토요일

상상속의 베트남인

지난 3월에 sonnet 대인께서 베트남전이 전하는 이라크의 교훈이라는 재미있는 글을 써 주셨습니다. 좀 뒷북이긴 한데 저는 특히 이 부분이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불행하고 그들에게도 불행한 일이지만 그것은 진짜 이라크가 아니었다. … 잘못된 이라크 속에 뛰어든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서도, 미국인들은 진짜 이라크인들은 우리 꿈 속의 이라크인들처럼 행동해야 하며 반드시 그럴 것이라고 고집스럽게 우겨댔다. 그 결과는 좌절과 낙담, 그리고 이라크인들의 '광기'에 대한 분노였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태도는 지난 60년간 별로 변한 것 같지가 않습니다.

공산주의 위협에 대한 대응력 : 바오 다이(Bao Dai)의 지지세력들 중 상당수는 어떠한 형태의 제국주의에도 반대한다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정부는 공산주의에 저항하고 있으며 미국의 군사 및 경제원조를 환영할 것으로 예상된다.
베트남 국민의 대부분은 현재 외부의 위협(중국)에 대항하는 것 보다는 프랑스의 간섭을 제거하는데 더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베트남 국민 대부분이 공산주의의 진정한 실체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만족할 만한 정치적 해결이 이루어 진다면 베트남인 대부분은 중국을 혐오하기 때문에 중국(공산당)의 압박에 대항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1950년 3월 8일, 미국무부 Office of Intelligence Research Report No.5178-2

결과는 다들 잘 아시죠?

2008년 3월 19일 수요일

찝찝한 중국의 민족주의

티벳 문제가 시끄러워 지면서 중국의 민족주의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얼마전에 읽은 책에도 중국의 민족주의와 관련된 흥미로운 사례가 하나 있더군요.

나는 중국에서 민족주의가 떠오르고 있음을 몇 가지 점에서 입증할 수 있다. 내가 집필한 지리학 교과서는 전 세계에 팔렸으며 중국어로도 번역되었다. 미국 및 해외에 있는 학생과 일반 독자들에게서 책에 대한 비판적인 코멘트가 꾸준히 들어오는데, 미국 대학에 다니고 있는 중국 학생들도 자기 나라와 출신 지역을 기술한 방식에 대해 의견을 많이 보내오곤 한다. 중국 독자들은 특히 내 책에 실린 지도에 대해 불쾌해 하는 경향이 있다. 이 지도에는 대만이 중국의 한 지방으로 분명히 표시되어 있지 않으며, 인도와 카자흐스탄의 일부가 중국의 영토로 되어 있지도 않고, 한 성난 기자가 편지에서 써 보냈듯이, 러시아의 태평양 연안 남동부를 ‘도둑맞은 땅’으로 표기하지도, 분쟁 중인 태평양의 섬들을 중국에 귀속시키지도 않았기 대문이다. 그런 사고방식은 중국 못지않게 대만에서도 강한 것 같다. 나는 티베트(시짱) 지역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 세심하게 기술했지만, 대만 쪽에서 격렬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청나라 때 확립된 경계선은 변경할 수 없는 중국 국경입니다. 당신은 우리의 역사적 유산을 판단할 권한이 없습니다.”

하름 데 블레이, 유나영 번역, 분노의 지리학 – 공간으로 읽는 21세기 세계사(Why Geography Matters), 천지인, 2007, 204~205쪽

주변에 이런 덜 떨어진 이웃이 있다는 것은 참 찝찝한 일 입니다.

2007년 12월 8일 토요일

대자연을 떡실신 시키는 위대한 마오주석의 한마디

주말에는 블랙코메디를..

참새에 대한 공격을 위해 어린이 전사들이 자연과의 전쟁에 대거 투입되었으며 특히 학교에 재학중인 연령대의 어린이들은 ‘해악’에 대한 공세의 주력군이었다. 마오는 1958년 5월 18일에 열린 제 8기 전국인민대표대회 2차회의에서 이 전쟁에 참여할 최저 연령대를 설정했다.

“다섯살 어린이를 포함한 모든 인민은 ‘네 가지 해악을 격멸(除四害)’하기 위해 총궐기해야 할 것입니다.”

당시 학교를 다녔던 사람들은 이 전쟁이 학교 수업을 땡땡이 치는 즐거운 경험이라고 회고했다. 사천지방의 한 사람은 자신의 초등학교 시절 참새 박멸 경험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네 가지 해악을 격멸’하는 것은 너무 신났습니다. 학교의 학생 전체가 참새를 죽이기 위해 동원되었지요. 우리는 사다리를 만들어 참새 둥지를 부수고 참새들이 쉬기 위해서 돌아오는 저녁에는 종을 쳐댔습니다. 참새가 유익한 동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죠. 우리는 그때만 해도 참새가 곡식을 축내는 동물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군사작전과 마찬가지로 이 전쟁에서도 합동 전술이 기본이었다. 참가자들은 일제히 공격을 퍼부었고 참새들은 보다 조용한 장소로 피신해야 했다. 그러나 모든 연령대의 중국인 수백만명이 온 들판에 산개해 동시에 난리 법석을 떨어댔기 때문에 참새들은 안전한 피신처를 찾을 수 없었다. 참새와의 전쟁에서 보인 동시성은 이 전쟁의 결과만큼이나 충격적인 수준이었다. 중경의 남서농업대학에 재직하던 한 농업화학 전문가는 베이베이(北碚)구의 모든 인민들이 야간에 소집되어 언덕에 투입됐던 때를 회고했다.

우리는 불쌍한 참새들이 지쳐 떨어질 때 까지 솥을 두들겼습니다. 우리는 며칠 동안 이 짓을 계속했습니다. 그 뒤로는 참새가 눈에 띌 정도로 줄어들었습니다. 나는 항일전쟁 당시 서주에서 중경으로 옮겨온 한 유명한 식당을 알고 있습니다. 그 식당의 별미는 소금에 절인 참새 두 마리를 꼬치로 만든 것 이었습니다. 하지만 ‘네 가지 해악을 박멸’하는 투쟁 이후로는 더 이상 그 요리를 맛 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1959년이 되자 더 많은 해충이 생겨났습니다. 사람들은 쉽게 눈치채지 못 했지만 우리 대학의 농작물보호연구소에 따르면 곡식에 대한 병충해가 더욱 증가했습니다.”

(중략)

농부들은 뒤늦게야 참새야 말로 병충해 퇴치에 있어 가장 큰 아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960년 4월에는 참새를 대신해서 빈대가 네 가지 해악 중 하나로 지정되었지만 이미 이 무렵 중국의 많은 지역에서는 참새의 씨가 마르고 말았다. 운남지역의 한 식물학자는 마오가 참새를 박멸하자는 선동을 한 뒤 갑자기 이것을 중단하라고 한 일을 이렇게 기억했다.

“우리는 참새의 둥지를 부수고 알을 깨 버리고 새끼들을 죽였습니다. 뒤에서야 과학자들은 참새가 벌레도 먹는다는 사실을 발표했고 중국과학원은 참새가 먹는 벌레와 곡식의 비율을 계산한 보고서를 내 놓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참새 사냥을 멈췄습니다. 마오 주석은 그냥 ‘이제 그만하면 됐어(算了)'라고 말했답니다. 이 때는 이 한 사람의 말이 모든 것을 규정하던 때였지요.”

Judith Shapiro, Mao’s War Against Nature : Politics and the Environment in Revolutionary China(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1), pp.86~88

과연. '마오주석의 말은 매 구절이 진리이고 한 구절이 우리의 일만 구절을 초월한다'는 린뱌오 동지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습니다. 말 한마디로 한 생물종을 멸종의 위기로 몰고가는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랍니까.

2007년 11월 25일 일요일

키티호크의 홍콩 입항 거부가 달라이 라마 때문?

워싱턴포스트에 재미있는 기사가 하나 있더군요.

China's Naval Rebuff Could Be Reply to Dalai Lama's Medal

이게 사실이라면 정말 웃기는 일 입니다. 중국에게 티벳 문제가 민감한 줄은 알겠는데 이런 식으로 유치하게 굴 필요까지야..

2007년 8월 19일 일요일

중국 항공박물관

중국 항공박물관은 꽤 전시물이 많은 편이지만 교통이 불편했습니다. 먼저 버스로 베이징 외곽의 샤허까지 나간 뒤에 샤허에서 버스를 갈아타야 하는데 샤허까지 나가려면 보통 버스를 두 번 갈아타거나 택시를 잡아타야 했습니다.

그리고 버스에서 내린 뒤 수백미터를 더 걸어들어가야 합니다.

이 썰렁한 건물이 매표소입니다. 원래 입장료는 50원인데 해방군 창군 80주년이라고 2원에 들여보내주더군요.

야외 전시물의 상당수가 중국제 Mig-19였습니다. 다양한 파생형이 전시되어 있더군요. Mig-19가 너무 많아 박물관이 아니라 퇴역장비 폐기장인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Mig-19 떼샷!



실내 전시관은 과거에 격납고(?)로 쓰이던 곳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좋은 전시물이 많았는데 이상하게 사진이 제대로 안 찍혀서 쓸만한 사진을 별로 못 건졌습니다.


역시 박물관에는 모형이 있어야 합니다. 왜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Bf-109와 P-38 같은 2차대전 항공기 모형이 있더군요.


그리고 라이벌인 F-86과 Mig-15입니다. F-86은 당연히 노획한 것일리는 없고 파키스탄 공군이 기증한 기체입니다.




국민당 공군이 사용한 I-16과 플라잉 타이거즈의 P-40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P-40은 실물크기 목업이더군요.




격추당한 대만공군 U-2의 잔해입니다.



다시 야외 전시장으로 나갔습니다.

여기서 마오 주석과 저우언라이 동지의 전용기를 구경하는 광영(???)을 누렸습니다.

마오주석 전용기입니다. 마오주석 전용기는 한 대가 더 있더군요.

주은래 동지 전용기입니다.

야외 전시실의 전시물 상당수는 보존 상태가 엉망이었습니다. 대부분 이 85mm 대공포와 비슷하게 녹이 잔뜩 슬어 있더군요.


레이더 같은 대형 장비도 있었습니다.



야외 전시실의 전시물도 굉장히 방대했습니다. 너무 많아 제대로 구경도 못하고 사진도 조금 밖에 찍지 못 했습니다. 나중에 다시 가면 그때는 사진을 많이 찍을 생각입니다.

2007년 8월 13일 월요일

중국에서 지른 물건 중...

이번에 중국에서 지른 물건 중에는 이런 것도 있었습니다.


왜 질렀느냐면 가격이 한국과 비교해 너무나 싸더군요. 처음에는 가격이 한국보다 훨씬 싸서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타미야의 3호전차 75mm 탑재형은 대충 14,000원 정도입니다. 국내에서는 20,000원이 넘지요.


KV중전차는 대충 13,500원 정도입니다. 이것도 국내에서는 19,000원을 넘습니다.

중국의 모형점을 처음 갔을 때는 수입 모형 가격이 한국 보다도 훨씬 싸다는 점에 놀랐습니다. 그리고 순간 지름 충동이 일었더군요. 하지만 한국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을 중국에서 사가지고 들어갈 필요가 있을까 고민하다가 마지막날 남은 돈으로 질렀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제가 좋아하는 하비보스의 물건들은 제가 가본 베이징의 모형점들에서는 취급하지 않더군요.

중국이 한국보다 일제 모형이 싼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환율문제인지 아니면 한국이 쓸데없이 바가지가 심한건지...

2007년 8월 8일 수요일

국공내전 기간 중 양군의 인명피해

이번 중국행에서 사온 책 중에는 중국 국방대학교가 출간한 중국인민해방군전사간편(中国人民解放军战史简编)이 있습니다. 중국인민해방군의 창군부터 국공내전 종결 까지 인민해방군의 주요 작전을 간략하게 정리한 책인데 1983년에 제 1판이 나왔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이 책에 대해 잘 아실 것 같습니다. 제가 이번에 산 것은 2003년에 출간된 제4판입니다. 지도와 통계가 잘 정리되어 있어 마음에 들기는 하는데 종이가 너무 얇아 신경이 쓰이는군요.

이 책의 마지막 장은 인민해방전쟁, 즉 우리가 말하는 국공내전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마지막 부분에는 지도와 함께 인민해방전쟁시기 양군의 인명손실에 대해서 정리해 놓고 있는데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구 분
1946.7 ~ 1947.6
1947.7 ~ 1948. 6
1948. 7 ~ 1949. 6
1949. 7 ~ 1950. 6
합 계
인민해방군 사상자
336,000
407,600
490,000
79,100
1,312,700
국민당군 사상자
426,000
540,200
571,610
173,300
1,711,110
인민해방군 포로
2,500
5,300
2,600
3,300
13,700
국민당군 포로
677,000
953,000
1,834,010
1,122,740
4,586,750
국민당군 귀순
?
?
242,780
390,730
633,510
국민당군 집단전향
17,000
28,200
130,600
671,150
846,950
국민당군 재개편
?
?
271,000
22,030
293,030
인민해방군 실종
19,500
40,000
129,400
7,200
196,100
(표 출처 : 国防大学<战史简编>编写组, 『中国人民解放军战史简编』, (解放军出版社, 2003), p.641)

가장 흥미로운 점은 사상자 자체는 양군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점 입니다. 물론 양군의 전력차를 감안해 보면 인민해방군이 상당히 선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만. 비록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국민당군의 손실 대부분이 포로, 또는 귀순에 의한 것이라는 점은 꽤 재미있는 점입니다. 이것을 직접 통계로 보니 느낌이 색다르군요. 내전 초기 단계부터 60만이 넘는 포로가 발생했다는 점도 특기할 만 합니다. 1946년 7월부터 1947년 6월까지는 국민당군이 공산군을 압박하면서 전략적으로 유리한 상황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포로만 60만이 넘었다는 점은 굉장히 의외였습니다. 포로의 숫자는 전쟁 후기로 갈수록 급증하며 여기에 더해 자발적인 투항, 즉 귀순하는 비율도 월등히 높아지고 있습니다. 특히 개인 귀순이나 집단 귀순만 150만 가까이 된다는 점은 국민당군이 내부적으로 결속력이 떨어지는 집단이었다는 점을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잘 정리된 통계를 보는 것은 또 색다른 느낌입니다. 통계 작성과정의 신뢰성은 둘째 치고라도 상당히 재미있는 자료입니다.

2007년 8월 7일 화요일

베이징 군사박물관

저는 관심사가 관심사이다 보니 어디를 여행하건 전쟁과 관련된 박물관, 기념관이 있으면 최대한 관람을 하는 편 입니다. 게다가 올해는 인민해방군 창군 80주년이니 군사박물관에 뭔가 더 재미있는게 있지 않을까 싶더군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 보다 사람이 많아 돌아버리는 줄 알았습니다.



해방군 창군 80주년이라고 무료관람 행사를 하는 통에 가뜩이나 사람 많은 중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공짜 박물관에 몰려든 것이었습니다. 돈을 내지 않는 것은 멋진 일 이었지만 박물관 입구에서부터 사람들에게 떠밀려 들어가는 것은 아주 고역이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금속탐지기로 소지품 검사 같은 것은 일일이 다 하더군요. 그 덕분에 사람도 많은데 대기하는 줄은 더욱 길었습니다.


들어서니 위대하신 마오 주석께서 맞이하시는 군요.


사람이 매우 많아서 제대로 구경은 못 했지만 마음에 드는 전시물이 매우 많았습니다.


일본의 97식 전차도 이렇게 보니 그럭 저럭 봐 줄만 하더군요. 역시 배경화면의 힘이 큰 것 같습니다.


고대 중국의 전차는 아무리 봐도 뭔가 모자란 느낌입니다. 도데체 뭘까요?


이건 당나라 기병이랍니다.


중국군함 중에서는 가장 유명할 듯한 정원(定遠)의 모형입니다. 사진이 잘 안 나왔지만 모형은 꽤 괜찮게 만들었더군요.


신해혁명때 봉기군이 사용한 대포와 같은 모델이랍니다. 관람객들이 열심히 만지고 가동되는 부분은 움직여 대서 불쌍하더군요.


항일전쟁 전시관의 이 조형물은 꽤 흥미로웠습니다. 중국 드라마에 나오는 망나니칼(???) 휘두르는 홍군이 전혀 뻥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긴 1차대전 때는 철퇴도 만들어 썼으니 현대전에서 망나니칼(???) 휘두르지 말라는 법은 없겠네요.


이건 그 북새통에도 사람이 거의 없어 한가했던 해방군 장군 서화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별로 볼만하지는 않더군요. 여기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한동안 쉬었습니다. 사람이 득시글 대는 건물은 정말 고역이더군요.


야외에는 80주년 특별 전시인지 99식 전차 같은 현용 장비들이 대거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99식을 실제로 보니 사진 보다는 포탑이 조금 더 길어 보이더군요. 물론 그래도 포탑이 너무 작다는 인상은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사진으로만 보다가 실물을 처음 보니 뭔가 느낌(?)이 오는 것 같더군요. 참고로 같이 전시된 장비중에서 99식이 가장 인기가 있었습니다. 의외로 전차팬이 많은가 봅니다.


이건 해방군 창군 80주년 특별 전시실에 있던 물건인데 미육군 31보병연대의 연대기라고 합니다.

사람이 지독하게 많아서 구경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점을 제외하면 만족스러웠습니다. 한가할 때 천천히 관람해 보면 좋겠더군요.

2007년 8월 5일 일요일

중국군사서점과 일반 서점의 군사관련 코너

중국에 도착한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베이징에 있다는 인민해방군 직영서점을 찾는 일이었습니다. 말은 안 통하고 중국어를 할 줄 아는 한국인들은 이게 어디에 있는지 모르니 무작정 찾아보기로 하고 길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횡재인지 나가서 베이징 시내를 세시간 정도 걸어 다니다가 해방군 직영서점을 발견했습니다!


서점은 핑안리(平安里)라는 곳에 있는데 인민해방군 문예출판사와 같은 건물에 있었습니다.


서점의 첫 인상은 조금 별로였습니다. 일단 짧은 중국어로 훑어보니 군사 이론과 관련된 서적과 외국 저작의 번역물이 많이 보이더군요. 제법 유명한 저작들은 번역되어 있는 것 처럼 보였습니다.


어디선가 많이 보신 것들이지요?

1층은 군사서적을 전문적으로 취급하고 2층에는 좀 요상한(?) 책들이 같이 섞여 있었습니다.


이건 1층입니다.


조금 썰렁한 여기가 2층입니다.

하지만 그 후로 세 번 더 가 보니 상당히 흥미로운 책들이 많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중국어 학습에 대한 의욕을 불태우게 하더군요.

해방군 직영서점이 좋은 점은 모든 서적을 10% 할인해 준다는 점 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서 영수증을 출력해주는 도트 프린터의 출력음도 정겹더군요.

그 외에 베이징 시내의 대형 서점들은 모두 규모가 제법 있는 군사서적 코너를 갖추고 있어서 군사관련 서적을 구하기는 매우 쉽습니다. 몇몇 서점은 회원카드가 있으면 책에 따라 20% 까지 할인을 해 주더군요.


그리고 중국은 일반 대학에서도 군사사 연구가 활발하기 때문에 해방군 서점에서는 못 구하고 일반 서점에서만 구할 수 있는 군사서적도 제법 있었습니다.

일반 대학 출판부에서도 군사사 서적을 많이 출간할 정도로 연구가 활발하다는 점은 굉장히 부러웠습니다. 중국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점이 아닐까 싶군요. 앞으로는 중국어를 더 공부해서 기회가 되는 대로 책을 사러 중국에 갈 계획입니다.

다녀왔습니다.

토요일 오후에 귀국했습니다.

중국은 처음에는 큰 기대를 하지 않고 갔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멋진 점이 많은 곳이었습니다. 역시 편견은 좋지 않은 것이더군요.

중국에 있는 동안 Blogspot이 전혀 접속이 되지 않아 뭔가 쓰려고 해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귀국을 했으니 썰렁한 글로 도배질을 재개할까 합니다.

2007년 7월 8일 일요일

중국에 갔다 오겠습니다

이 어린양이 중국에 갈 일이 생겼습니다.

사적으로는 그다지 가고 싶은 곳이 아니지만 공적으로 갈 일이 생기더군요.

가는 김에 뭐 재미있는게 없나 잘 찾아 보고 오겠습니다.

2007년 5월 22일 화요일

The People in Arms : Military Myth and National Mobilization since the French Revolution

군사사에서 제가 가장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부분은 “동원” 입니다. 이렇게 말하기는 아직 공부가 부족하고 읽은 것도 부족하긴 하지만 확실히 전쟁과 “동원”은 매우 흥미로운 주제입니다. 징병제가 꾸준히 유지되고 있는 국가에서 살고 있으니 “동원”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어찌보면 매우 자연스러운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 동안에는 주로 경제적 동원에 관한 책을 몇 권 읽은 정도였고 “인적 동원”에 대해서는 부분적으로 언급된 서적을 일부 읽은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석달 전에 The People in Arms라는 서적을 구매했습니다. 이 책은 2003년에 출간됐는데 IAS(Institute for Advanced Study)에서 열린 “역사에서의 무장력(Force in History)”라는 세미나에서 발표된 논문들을 엮은 것 입니다.

이 책에 실린 논문의 저자는 John Whiteclay Chambers II, Owen Connelly, Alan Forrest, Michael Geyer, John Horne, Greg Lockhart, Daniel Moran, Douglas Porch, Mark von Hagen, Arthur Waldron 등인데 이 중 Alan Forrest, John Horne, Mark von Hagen 등 세 사람을 제외하면 모두 이 책에서 처음 접한 사람들입니다.
Chambers는 서문과 19세기 후반 독일의 영향을 받은 미국의 징병제 논의에 대한 글을 썼으며 Forrest와 Connelly는 1793년 혁명당시 프랑스의 국민 동원에 대해서, Moran은 18세기 중반 독일의 국민 동원 논의에 대해서, Horne은 보불전쟁부터 세계대전기 사이의 국민 동원 논의에 대해서, Geyer는 1차 대전 말기 패전에 직면한 독일 사회 내부의 국민 총동원 논의에 대해서, Hagen은 19세기 후반에서 스탈린에 이르는 시기 러시아와 소련의 사례를, Waldron은 신해혁명부터 중일전쟁 시기까지 중국 군사사상가들(주로 국민당 계열)의 동원에 대한 논의와 결론부를, Lockhart는 베트남 사회주의자들의 사례를, Porch는 알제리 전쟁시기 FLN과 OAS에 대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제가 가장 재미있게 읽은 부분은 Mark von Hagen과 Arthur Waldron의 글 인데 Hagen의 글은 러시아 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약간은 익숙한 내용도 있었던 반면 Waldron의 글은 거의 아는게 없는 중국 현대사인지라 매우 생소하고 한편으로는 재미있었습니다.
Waldron은 신해혁명 이후 근대교육을 받은 중국의 군사사상가들이 새로 습득한 근대 군사사상, 특히 “동원”의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실천에 옮기려 했는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글은 청나라 말기 양무운동 같이 외형만 유럽을 모방한 개혁의 실패를 경험한 중국의 사상가들이 근대체제를 확립하기 위해서 유럽식의 국민 동원에 주목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저자는 유럽, 특히 프랑스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중국의 군사사상가들이 중국의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국민을 동원하는 체제를 만들고자 노력했으나 중국의 사회체제는 유럽식의 국민 동원을 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없었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중국의 사례는 근대화를 타율적으로 경험한 국가의 시민으로서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었습니다.

2007년 3월 8일 목요일

대인배의 꿈을 키웁시다

아래의 이야기는 매우 유명한 일화이지요.

(전략) 그러나 7월 2일에 시작된 협상은 거의 시작하자 마자 난항에 부딛혔다. 스탈린이 소련의 국가안보에 있어서 외몽골의 중요성을 강조했기 때문이었다. 스탈린은 15년 혹은 20년 내에 일본이 다시 국력을 회복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소련의 안보에 심각한 위협이 될 것이므로 외몽골을 소련의 영향력 안에 둬야 한다는 것 이었다. 스탈린은 송자문(宋子文)에게 말을 계속했다.

“만약 우리가 일본과 전쟁을 시작한다면 인민들이 뭐라 하겠습니까? 우리는 이제 막 4년에 걸친 전쟁을 끝냈는데 왜 또 전쟁을 시작하냐고 할 것 입니다. 그리고 일본은 우리를 공격하지 않았는데 왜 소련이 먼저 전쟁을 시작하냐고 하겠지요. 그러니 우리 인민들에게 전쟁을 벌이는 이유가 소련의 안보를 더 굳건히 하기 위해서라고 하는 것 말고 더 좋은 구실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송자문은 외몽골 문제에 대해서는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으려 했다. 외몽골은 중국의 고유한 영토이기 때문에 외몽골을 독립시키는 것은 중국의 자존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것 이라는 것 이었다.

그러나 장개석은 스탈린이 국민당 정부에 대한 지지를 공개적으로 표명하자 만약 소련이 만주에서도 국민당의 우위를 보장하고 여기에 덧붙여 중국 공산당에 대한 지원도 중단할 경우 외몽골을 소련에 넘기기로 결정했다. 7월 9일, 송자문은 이에 따라 스탈린에게 새로운 제안을 했다. 송자문은 중국이 외몽골을 포기하는 대가로 소련이 중국 공산당에 대한 지원을 중단할 경우 국민당 정부는 소련에게 뤼순과 다롄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주겠다고 제의했다. 또 만주 철도는 중국이 소유권을 가지되 운영은 중국과 소련이 공동으로 하자는 제안을 내 놓았다. 스탈린은 이 제안을 받자 즉시 중국 공산당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만주 문제에 있어서는 이견이 있었다. 스탈린은 뤼순은 소련이 소유권을 가져야 하며 또 만주 철도 역시 소련이 소유권을 가져야 한다는 것 이었다. 왜냐하면 “만주 철도를 건설한 것은 러시아 였기” 때문이었다.

스탈린은 빨리 국민당 정부와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뤼순과 만주 철도 문제에 있어서는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으려 했다. 7월 11일 회담에서 스탈린은 “내가 베를린으로 출발하기 전에 빨리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고 했으나 결국 양측의 이견을 좁히지는 못했다. 7월 12일 회담에서도 양측은 평행선을 달렸고 결국 스탈린이 먼저 포기했다. 협상은 일시 중단됐으며 스탈린은 중국측과 포츠담 회담 이후 회담을 재개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이것은 앞으로 스탈린이 겪게 될 여러 문제 중 하나에 불과했다.

Tsuyoshi Hasegawa, Racing the enemy : Stalin, Truman, and surrender of Japan, Harvard University Press, 2005, p129

한때는 우리의 마오 주석도 대인배들의 거스름 돈 이었다고 합니다. 자. 우리도 대인배의 꿈을 키웁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