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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8월 30일 화요일

러시아식 무상의료

러시아는 헌법에 무상의료를 명시하고 있는 국가입니다. 러시아 헌법의 근본 취지는 고상하다 하겠으나 돈이 없으면 그냥 구호에 그칠 뿐이지요. Foreign Policy 인터넷 사이트에 러시아 의료체계의 현실을 보여주는 화보가 실렸는데 많이 암담해 보입니다.




음. 그런데 이 화보에는 재미있는 사진이 몇 장 있습니다.


환자와 질병이 동시에 쓰러질 듯
그리고 역시 Foreign Policy에 실린 한 여성이 러시아 병원에서 출산한 경험도 읽어 볼 만 합니다. 이런 놀라운 시스템(?!)으로 산모 사망률을 꾸준히 낮춰왔다니 러시아인들은 여러 모로 사람을 놀라게 하는군요.


이 기사에 실린 사진은 더 무섭습니다.

애 잡을 기세

2009년 7월 24일 금요일

데자뷰? - (5)

BigTrain님 블로그에서 불라바 미사일의 실험 실패와 이에 따른 러시아의 대응에 대한 소식을 접했습니다.

러시아 정보당국은 불라바 미사일이 사보타지의 표적이 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고 RIA Novosti가 보도했다.

러시아 정보당국의 소식통은 RIA Novosti에 제조사의 효율적인 품질 관리 부족이나 제작 과정 때문에 미사일이 세부적인 결함을 가지고 완성되었다고 밝혔다.

이 소식통은 제작 과정상의 태만은 사보타지와 동급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고 밝혔다.

또한 이 소식통은 경쟁상대인 러시아의 미사일 개발회사도 사보타지의 책임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소식통은 고체연료 로켓과 액체연료 로켓 개발사간의 경쟁은 치열하며 “그들은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는데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Sabotage behind Bulava failure?(2009. 07. 20)

이 기사를 읽고 나니 러시아는 소련 시절의 전통을 21세기에도 잘 계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숙청은 설계자, 기술자, 그리고 항공산업의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확대되었으며 연구기관들도 대량 검거의 대상이 되어 고위 행정인력에서 말단 행정직원까지 희생되었다. 예를 들어, 중앙항공역학연구소(Центра́льный аэрогидродинами́ческий институ́т)는 제멋대로 자행되는 공안탄압의 여파를 받았다. 소련의 저명한 항공기 설계자인 투폴레프(А. Н. Туполев) 조차 구제받지 못했다. 그는 체포된 뒤 잠시 수감되었다가 비밀 수용소에서 연구를 계속하게 되었다. 그의 수용소 설계국은 전쟁 기간 중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약 450명의 항공 기술자와 설계자가 체포되었으며 살아남은 300명은 비밀경찰이 감독하는 설계국에서 연구를 계속했다.

다른 사람들, 실험기 K4를 설계한 칼리닌(К. А. Калинин) 같은 사람들은 운이 없었다. K4가 하리코프 근처에서 시험 비행 중 추락해 네 명의 당원이 사망하자 칼리닌은 체포되어 사보타지 혐의로 총살되었다. 1930년대 초에 설계한 최초의 델타익 항공기와 같이 그가 과거에 했던 훌륭한 연구들도 고참 볼셰비키나 레닌의 혁명 동지들 조차 “파괴자”, “트로츠키주의 반동분자” 또는 “인민의 적”으로 몰리는 정치적 상황에서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Von Hardesty, Red Phoenix : The Rise of Soviet Air Power, 1941-1945, Smithsonian Institution Press, 1982, p.54

현재의 러시아가 1930년대의 소련 보다 나은 점은 사보타지 혐의자들이 총살 당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 정도같습니다.

2008년 11월 3일 월요일

최종보스 부시

Russians With Pumpkins Protest Many U.S. Plots

러시아인들 중에서는 부시 행정부가 매케인의 당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 그루지야 분쟁을 도발했다는 음모론을 믿는 사람이 더러 있는 모양입니다. 사실 올해 알게 된 음모론 떡밥 중 가장 썰렁한 떡밥이기도 하군요.

하지만 기사에서 이 부분은 마음에 들었습니다.

“When that will happen, we will totally control all humanity,” said the actor playing Mr. Bush, swigging a beer, as a picture of the globe in chains glowed behind him.

직접 봤다면 얼마나 재미있었겠습니까.

역시 황상폐하는 최종보스!

2008년 9월 19일 금요일

라이스에게 어울리는 일

Rice ruft zu Widerstand gegen "russische Aggression" auf

그간 대동강 촌놈들 같이 격에도 맞지 않는 것들을 상대하느라 얼마나 굴욕이셨습니까. 비록 레이건 각하 시절 만큼 흉폭하진 못하지만 곰돌이의 재롱 정도는 되어야 귀하의 그릇에 걸맞을 겁니다. 하필 현재 대통령의 치세 말에 이런 일이 터져서 곰돌이들을 상대할 시간이 몇 달 남지 않은게 아쉽다면 아쉽겠습니다.

2008년 3월 19일 수요일

찝찝한 중국의 민족주의

티벳 문제가 시끄러워 지면서 중국의 민족주의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얼마전에 읽은 책에도 중국의 민족주의와 관련된 흥미로운 사례가 하나 있더군요.

나는 중국에서 민족주의가 떠오르고 있음을 몇 가지 점에서 입증할 수 있다. 내가 집필한 지리학 교과서는 전 세계에 팔렸으며 중국어로도 번역되었다. 미국 및 해외에 있는 학생과 일반 독자들에게서 책에 대한 비판적인 코멘트가 꾸준히 들어오는데, 미국 대학에 다니고 있는 중국 학생들도 자기 나라와 출신 지역을 기술한 방식에 대해 의견을 많이 보내오곤 한다. 중국 독자들은 특히 내 책에 실린 지도에 대해 불쾌해 하는 경향이 있다. 이 지도에는 대만이 중국의 한 지방으로 분명히 표시되어 있지 않으며, 인도와 카자흐스탄의 일부가 중국의 영토로 되어 있지도 않고, 한 성난 기자가 편지에서 써 보냈듯이, 러시아의 태평양 연안 남동부를 ‘도둑맞은 땅’으로 표기하지도, 분쟁 중인 태평양의 섬들을 중국에 귀속시키지도 않았기 대문이다. 그런 사고방식은 중국 못지않게 대만에서도 강한 것 같다. 나는 티베트(시짱) 지역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 세심하게 기술했지만, 대만 쪽에서 격렬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청나라 때 확립된 경계선은 변경할 수 없는 중국 국경입니다. 당신은 우리의 역사적 유산을 판단할 권한이 없습니다.”

하름 데 블레이, 유나영 번역, 분노의 지리학 – 공간으로 읽는 21세기 세계사(Why Geography Matters), 천지인, 2007, 204~205쪽

주변에 이런 덜 떨어진 이웃이 있다는 것은 참 찝찝한 일 입니다.

2008년 2월 18일 월요일

독빠의 전통은 유구하다

독일은 그때만 하여도 훌륭하드군요. 입으로 핥은것 같아요. 산이니 사람이나 집이나 길이나 모다 기름칠한 것 같이 반지르하고 윤택(潤澤)이 나요. 그러나 노서아에 들어서니 천양지판(天壤之判)이드군요. 빈민이 많고 길이 좁고 똑 원시시대 같습니다.

윤치호, 니콜라이 2세 즉위식에 참석할 무렵의 러시아를 회상하며. 조광 1937년 5월호 38쪽

독빠의 전통은 참으로 유구합니다.;;;;;

2007년 10월 8일 월요일

어떤 정치인의 공산주의관

강원룡 목사에 따르면 김규식 박사는 공산주의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고 합니다.

내가 알기에는 공산주의라는 것은 천하에 몹쓸 것이고, 특히 한국에서는 공산주의를 받아들이면 안 된다. 내가 만주나 러시아에서 러시아 사람을 많이 사귀어 보았는데, 러시아 사람들은 원래 대단히 선량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레닌이 일어나서 공산혁명을 일으킨 후에는 러시아 사람들이 대단히 잔인해 졌다. 이것은 왜냐하면 결국 공산당이 잔인하고 가혹한 것이기 때문이다. 옛날 알바니아에서 공산혁명을 할 때에 하룻밤에 만 명을 죽인 바가 있는데, 결국 공산주의라는 것은 이렇게 잔인한 것이다. 그런데 한민족은 내가 알기에는 상당히 잔인한 민족이다. 그러니 공산주의만 되면 러시아 정도가 아닐 것이고 더욱 더 잔인해 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는 공산주의가 들어오면 안 된다. 또 공산주의에 한번 빠진 사람은 거기서 나올 수 없다.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 일조각, 2006, 406~407에서 재인용

뭐랄까, 언뜻 보면 대단히 극우적인 인사의 발언 같은데 김규식 박사와 같이 온건하고 중립적인 지식인이 저런 말을 했다는 것이 잘 이해가 안 가는군요. 그런데 한민족이 대단히 잔인하고 그 때문에 공산주의가 되면 러시아 보다 더 잔인해 질 것이라는 예상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실제로 입증되었으니 김박사의 생각이 제법 잘 들어맞은 것 같기도 합니다.

2007년 6월 29일 금요일

붉은군대는 추수전투에도 강하다!

오늘의 이야기는 대인배의 본산지 노서아 천지에 "소잡는 소리와 돼지 멱따는 소리가 진동하던 때"의 이야기랍니다.

1930년, 대기근으로 인해 일선부대에 대한 배급량이 30% 감축되자 혁명군사평의회(RVS, Революционными Военный Совет)는 각 부대들에게 식량을 보충할 보조농장(подсобное Хозяиство, 직역하면 보조생산시설이지만 대부분 농장이므로 보조농장으로 옮겼음)을 만들도록 했다. 이때부터 붉은군대에 있어 “자급자족”은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됐다. 그렇지만 부대농장은 1930년대에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니었다. 제정러시아 시기에도 육군은 예산 부족 때문에 부대 농장을 운영해야 했다. 산업계도 마찬가지였다. 각 공장들은 공장 농장을 만들어 공장노동자들이 농사를 지었다.
붉은군대는 사병들의 급식과 장교들의 부식을 충당하는데 있어서 부대농장을 군협동조합 (이하 ZVK, Закрытый Военный Кооперативный)과 경쟁하는 체제로 만들려고 했다. 장교들은 식료품을 자신의 급여를 가지고 부대농장에서 구매하도록 하자는 것 이었다. 연대 보급장교는 사병 식당용 식재료를 부대 농장이나 ZVK에서 구매하게 됐는데 이렇게 해서 부대농장은 ZVK와 직접 경쟁하는 관계가 돼 버렸다. 그러나 부대농장의 운영 책임자는 종종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부대농장에서 경작한 농산물을 해당 부대에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시장에 판매하는 경우도 있었다.
일부 부대들은 혁명군사평의회의 지시가 내려오기도 전에 부대농장을 운영하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부대농장 설치 명령이 내려오자 농장이 없는 부대들도 재빨리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1932년에 한 연대는 이미 200마리의 돼지와 60마리의 소, 토끼 100마리와 벌통 40개를 가지고 있었다. 혁명군사평의회는 1개 사단 당 소 400마리, 돼지 3,200마리, 토끼 20,000마리, 그리고 1,000헥타르의 농지(귀리, 밀, 또는 과일)를 운영하도록 방침을 정했다.
대부분의 부대 농장은 병사들이 농사를 지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일부 연대는 민간인을 고용해 농사를 짓고 농장에서 재배한 작물이나 우유를 팔아 얻은 수입으로 임금을 지급했다. 한 포병대대에서는 부대가 하계 훈련을 위해 주둔지를 떠나면 장교의 부인들이 농사를 지었다. 또 다른 연대에서는 아예 장교의 부인들이 봄 파종기에 밭을 갈았다. 어떤 경우에는 제대한 병사들이 자신들이 원래 근무하던 연대의 농장에 고용돼 농사를 지었다.
많은 경우 연대 농장은 매우 효율성이 높았으며 ZVK의 수입을 줄이는데 일조했다. 제 87소총병연대의 농장은 1kg의 감자를 5코페이카에 팔았는데 해당 지역의 ZVK의 감자가격은 1kg에 10코페이카였다. 일부 농장들의 성과는 엄청났다. 예를 들어 한 연대는 농장을 처음 만들 때 3,500루블을 투자했는데 그 해 연말에는 20만루블에 해당하는 농작물을 생산했다. 니콜라이 보로노프의 회고에 따르면 그가 복무한 포병연대는 1932년에 버려진 국영농장 하나를 인수했는데 운영이 매우 잘 돼서 연대 소속 장교와 병사들에게 우유를 시장 가격보다 더 싼 1리터당 30코페이카에 팔 수 있었다고 한다. 1930년대에 소련은 너무 가난해 병사들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충분히 공급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부대농장 외에도 ZVK가 존재했던 것은 다행이었다. 모든 부대농장이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었다. 제때에 추수를 하지 못 하거나 아니면 농사에 시간을 많이 들이지 못 해서 농사를 망치기는 일이 많았다.
1932~33년의 대기근 기간에 식량은 군사훈련 만큼이나 중요한 요소였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훈련 대신 농사를 짓는데 쓰였는지는 불확실하다. 제87소총병연대의 부연대장은 연대농장의 책임자였는데 이 사람의 경우는 매우 재미있는 사례이다. 이 장교는 부대농장 운영에 열성적이어서 연대 농장에 있는 소 38마리의 이름을 모두 알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부대농장과 ZVK 체제는 특히 대기근 동안에 붉은군대는 그 자체를 먹여살리는데 집중해야 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군 보급체계나 ZVK 체제 모두 부대가 요구하는 최저한도의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부대농장은 엄청난 공헌을 했다. 부대농장은 너무나 중요했기 때문에 많은 부대들은 붉은군대가 확장기에 들어가 훈련이 가장 중요해 진 1930년대 후반에서 40년대까지도 훈련보다는 농사에 시간을 더 배분했다. 결국 부대농장은 소련군에 있어 일반적인 부대 활동으로서 제도적으로 자리잡게 됐고 최근까지도 유지되었다.

Roger R. Reese, Stalin’s Reluctant Soldiers : A social history of the Red Army, 1925~1941, University Press of Kansas, 1996, pp.49~51

붉은군대는 추수전투에도 강합니다!

2007년 6월 21일 목요일

신뢰도 높은 러시아 인터넷 서점 Ozon

채승병님께서 러시아 인터넷 서점오존을 추천하신 댓글을 읽었습니다. 확실히 오존은 제가 생각하기에도 안정성 면에서 가장 신뢰할 만한 러시아 인터넷 서점입니다.

러시아와 관련된 분야에 관심을 가지신 분들이라면 당연히 러시아에 가지 않고 러시아 서적을 구매할 수 있는 방법에 관심을 가시신 분들이 많으실 것 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러시아가 한국과는 거리가 있는(???) 국가이다 보니 이쪽 물건들을 구한다는게 약간 불편한게 사실이었습니다. 게다가 러시아인들에겐 미안하지만 러시아라면 뭔가 불안하다는 느낌도 들고 안정성이 의심도 가니 말 다했지요. 저도 안정성의 문제 때문에 작년 여름까지만 하더라도 지독하게 바가지를 씌우는 Eastview의 러시아 서적 구매대행 서비스를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이 양반들은 바가지가 너무 지독하니 애용하기는 부담이 많이 가더군요.

그러던 차에 작년 말 쯤 아는 선배에게서 추천 받은 곳이 바로 오존 입니다. 올해 초에 이곳을 처음으로 사용하고 확인 삼아 주문을 조금 더 해 본 뒤 듣던대로 믿을만 하다고 생각되던 차에 마침 채승병님도 이 사이트를 추천하시는군요.
저도 러시아어는 겨우 겨우 배우고 있는 수준이라 이런 글을 쓰는게 좀 민망하긴 하지만 혹시라도 필요하신 분들이 계시지 않을까 싶어서 씁니다.

일단 오존 또한 다른 영어권이나 독일어권 인터넷 서점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처음 사용하시는 분 들은 오른쪽 메뉴에 이름과 이메일주소, 비밀번호를 넣고 가입하시면 됩니다.

오존의 배송체계는 아래에서 보시듯 세 가지가 있습니다. 일반우편(2-10주), 항공우편(1-5주), TNT(5-10일) 입니다.


저는 2-10주 배송만 써 봤는데 지금까지의 경험으로는 잘 도착합니다. 5-10일짜리를 선택하면 책값 보다 배송료가 3-4배는 높게 나오더군요. 저는 가난한지라 당연히 이건 써 본 일이 없습니다. 제 주변의 다른 분들도 오존의 안정성에 대해서는 호평하시는지라 믿고 쓰셔도 좋을것 같습니다.

※혹시나 해서 적는 건데 주문 메뉴에 корея와 같이 뜨는 корея кндр는 북한이랍니다...

2007년 5월 29일 화요일

1924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경계 설정 문제

sonnet님의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한 글에 첨부된 마지막 지도를 보니 꽤 재미있는 사례가 떠올랐습니다. 예전에 잠시 언급했었던 F. Hirsh의 Empire of Nations : Ethnographic knowledge and the making of the Soviet Union을 보면 소연방의 형성 초기 연방 내 각 공화국간의 경계 확정을 둘러싼 이야기가 소개돼 있습니다. 그 중에서 우크라이나의 사례는 꽤 재미있습니다.

우크라이나 사회주의공화국 수립 후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북카프카즈 지방(край)과 돈 주(타간로그~샤흐티를 포함하는 지역)가 어느 쪽의 영역이 되어야 하는가를 놓고 대립했습니다. 인종적으로 돈 주는 우크라이나인이 거주하는게 맞긴 했는데 러시아 사회주의공화국의 주장은 돈 주의 주민들이 대부분 우크라이나계가 맞긴 하지만 우크라이나어를 사용하지 않으며 우크라이나에 포함되는 것도 원하지 않고 결정적으로 경제적으로는 북카프카즈와 더 가깝다는 논리를 폅니다.
소연방 중앙정부는 돈 주를 북카프카즈에 포함시키는 쪽으로 압력을 넣는데 우크라이나 사회주의 공화국은 돈 주를 북카프카즈에 포함시키는 반대 급부로 쿠르스크와 보로네시, 브랸스크를 우크라이나에 포함시켜 줄 것을 요구합니다. 이 지역도 인종적으로 우크라이나 인이라는 논리였지요. 그러자 당연히 러시아 사회주의 공화국이 여기에 강력히 반발합니다. 그 결과 소련방 중앙집행위원회(Центра́льный Исполни́тельный Комите́т СССР) 지역위원회에서 이 문제를 담당하게 됩니다. 러시아 사회주의 공화국 측의 대표 볼디레프(Михаил Болдырев)는 쿠르스크와 보로네시, 브랸스크의 거주민들에게서 우크라이나 인으로 간주할 만한 문화적 특성이 전혀 없다며 우크라이나의 주장을 반박합니다. 그리고 이 지역에 거주하는 극 소수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의 발언은 무시해도 된다는 발언을 합니다.(여기에 대부분의 "우크라이나계" 주민들은 러시아로 남아있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주장도 곁들여 집니다) 여기에 러시아 경제학자들이 가세하는데 이들은 쿠르스크와 보로네시가 러시아 사회주의 공화국, 특히 모스크바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곡창지대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양측의 주장이 모두 말도 안되는 것이 이 지역은 인종적으로 혼합되어 있어 딱히 어느 인종이라고 잘라 말하기가 어려웠다고 합니다. 접경지대에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죠. 우크라이나의 경우가 문제가 됐던 것은 벨라루스와 달리 우크라이나인들은 민족적 정체성이 강했다는 점 입니다. 그러니 벨라루스같이 민족주의적 경향이 약하고 모스크바에 비교적 순종적인 곳과는 달리 최대한 "우크라이나"의 이익을 챙기는 방향으로 나갈 수 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의견이 평행선을 달리다 보니 아예 러시아 지역의 우크라이나인들을 우크라이나로 이주시켜 버리는 것은 어떻겠느냐 하는 현실성 없는 이야기 까지 나올 정도였다고 합니다.

결국 원만한 문제 해결을 위해서 러시아 사회주의 공화국은 우크라이나 어를 사용하는 우크라이나계 주민이 사는 지역을 우크라이나에 양도하는 안을 내 놓았고 우크라이나는 돈 주를 러시아에 양보하는 대신 러시아로부터 일부 지역을 양도 받는 것으로 문제는 마무리 됩니다.

민족문제란 이래 저래 골치 아픈 것 같습니다. 만약 대한민국에 일본어나 중국어만 쓰는 "한국계"가 인구의 상당수를 차지한다면 나라꼴이 볼만할 것 입니다. 그 점에서 언어와 인종이 단일하다고 할 수 있는 한국에 사는 것은 그럭 저럭 복 받은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2007년 3월 8일 목요일

대인배의 꿈을 키웁시다

아래의 이야기는 매우 유명한 일화이지요.

(전략) 그러나 7월 2일에 시작된 협상은 거의 시작하자 마자 난항에 부딛혔다. 스탈린이 소련의 국가안보에 있어서 외몽골의 중요성을 강조했기 때문이었다. 스탈린은 15년 혹은 20년 내에 일본이 다시 국력을 회복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소련의 안보에 심각한 위협이 될 것이므로 외몽골을 소련의 영향력 안에 둬야 한다는 것 이었다. 스탈린은 송자문(宋子文)에게 말을 계속했다.

“만약 우리가 일본과 전쟁을 시작한다면 인민들이 뭐라 하겠습니까? 우리는 이제 막 4년에 걸친 전쟁을 끝냈는데 왜 또 전쟁을 시작하냐고 할 것 입니다. 그리고 일본은 우리를 공격하지 않았는데 왜 소련이 먼저 전쟁을 시작하냐고 하겠지요. 그러니 우리 인민들에게 전쟁을 벌이는 이유가 소련의 안보를 더 굳건히 하기 위해서라고 하는 것 말고 더 좋은 구실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송자문은 외몽골 문제에 대해서는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으려 했다. 외몽골은 중국의 고유한 영토이기 때문에 외몽골을 독립시키는 것은 중국의 자존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것 이라는 것 이었다.

그러나 장개석은 스탈린이 국민당 정부에 대한 지지를 공개적으로 표명하자 만약 소련이 만주에서도 국민당의 우위를 보장하고 여기에 덧붙여 중국 공산당에 대한 지원도 중단할 경우 외몽골을 소련에 넘기기로 결정했다. 7월 9일, 송자문은 이에 따라 스탈린에게 새로운 제안을 했다. 송자문은 중국이 외몽골을 포기하는 대가로 소련이 중국 공산당에 대한 지원을 중단할 경우 국민당 정부는 소련에게 뤼순과 다롄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주겠다고 제의했다. 또 만주 철도는 중국이 소유권을 가지되 운영은 중국과 소련이 공동으로 하자는 제안을 내 놓았다. 스탈린은 이 제안을 받자 즉시 중국 공산당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만주 문제에 있어서는 이견이 있었다. 스탈린은 뤼순은 소련이 소유권을 가져야 하며 또 만주 철도 역시 소련이 소유권을 가져야 한다는 것 이었다. 왜냐하면 “만주 철도를 건설한 것은 러시아 였기” 때문이었다.

스탈린은 빨리 국민당 정부와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뤼순과 만주 철도 문제에 있어서는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으려 했다. 7월 11일 회담에서 스탈린은 “내가 베를린으로 출발하기 전에 빨리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고 했으나 결국 양측의 이견을 좁히지는 못했다. 7월 12일 회담에서도 양측은 평행선을 달렸고 결국 스탈린이 먼저 포기했다. 협상은 일시 중단됐으며 스탈린은 중국측과 포츠담 회담 이후 회담을 재개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이것은 앞으로 스탈린이 겪게 될 여러 문제 중 하나에 불과했다.

Tsuyoshi Hasegawa, Racing the enemy : Stalin, Truman, and surrender of Japan, Harvard University Press, 2005, p129

한때는 우리의 마오 주석도 대인배들의 거스름 돈 이었다고 합니다. 자. 우리도 대인배의 꿈을 키웁시다!

2007년 2월 24일 토요일

1차 대전 동부전선의 전쟁포로

2차 대전 당시의 동부전선은 서부전선에 비해 그 영향력이 과소 평가되는 경향이 강하다고 이야기 돼 왔습다만 탄넨베르크 전투나 브루실로프 공세 같은 몇몇 전투를 제외하면 그다지 언급되지 않는 1차 대전의 동부전선에 비하면 양반인 셈입니다. 오죽하면 독일애들이 1차 대전 당시의 동부전역을 Die vergessene Front라고 하겠습니까.

2차 대전 당시의 동부전선도 엄청난 인력과 물량이 동원된 전장이었지만 1차 대전 당시의 동부전선도 규모가 크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1차 대전 동안 포로가 된 교전국들의 군인이 약 900만 명인데 이 중 대략 500만 명이 동부전선에서 발생한 포로라고 하니까요.
무엇보다 2차 대전당시에는 주로 소련측의 포로가 압도적으로 많이 잡힌데 비해 1차 대전당시에는 대규모 육군을 보유했으나 전투력은 부실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있었기 때문에 양측이 모두 사이 좋게 많은 포로를 잡았다는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1차 대전 당시 동부전선의 전황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전체적으로 독일-오스트리아군이 계속해서 승리를 거두면서 우세를 보이지만 간간히 러시아군의 강력한 반격도 이어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는 서로 승리와 패배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난타전의 양상을 보이고 있고 독일은 거의 일방적으로 승리만을 거두는 형국입니다.

이렇다 보니 포로의 비율을 보면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가 서로 비슷한 규모로 엄청난 포로를 내고 있고 독일은 상대적으로 극히 적은 포로만을 내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러시아군은 1918년 초까지 독일에 240만 명, 오스트리아-헝가리에 186만 명, 그리고 오스만투르크와 불가리아에 3만~4만명이 포로로 잡힌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독일은 17만 명, 오스트리아-헝가리가 185만 명, 오스만투르크와 불가리아 두 나라가 합쳐서 8만 명 가량이 러시아군의 포로가 됐습니다. 오스트리아는 근소한 차로 적자를 면했고 오스만투르크와 불가리아는 적자를 낸 셈이군요.
이 중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주목할 만한 점은 전쟁 초-중반에 엄청나게 많은 포로를 발생시켰다는 것 입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전체 포로 중 73만 명은 개전 첫 1년에 잡힌 것이고 1915년 12월까지 포로 숫자는 97만 명으로 늘어납니다. 즉 1년 만에 전체 포로의 50%가 발생한 것 입니다. 1916년 6월의 브루실로프 공세에서 38만의 포로가 발생한 것을 제외하면 전쟁 후기에는 포로가 되는 숫자는 크게 감소합니다. 하긴, 초반에 원체 많이 잡히다 보니 1916년 이후가 되면 더 잡힐 만큼의 병력도 없었다지요.

※ 브루실로프 공세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것은 당시 러시아측의 보고서에는 포로가 19만으로 돼 있다는 것 입니다. 1차 대전 연구자들은 이렇게 된 원인이 러시아측의 포로 집계가 잘못된 것 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위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독일-러시아간의 대결에서는 독일이 꾸준하게 승리를 거두면서 적당히(?) 많은 숫자의 포로를 잡고 있습니다. 간단히 1914-1915년 전역, 즉 1914년 탄넨베르크 전투부터 1915년의 제 2차 마주리아 호수 전투까지 여러 차례의 전투가 적당한 사례가 되겠습니다. 독일군은 탄넨베르크에서 10만, 1차 마주리아 호수 전투에서 3만, 2차 마주리아 호수 전투에서 9만2천명의 포로를 잡았습니다. 상당한 성과이긴 하지만 결정타를 먹이지는 못해서 러시아군은 계속 밀려나면서도 붕괴되지 않고 저항을 하지요.

반면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의 대결은 그야말로 난타전의 표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전쟁 초기인 1914년 9월의 갈리치아 전역에서 10만에 달하는 포로를 냈다고 하지요. 그리고 1915년 1월~2월에 걸쳐 프세미우(Przemysl) 구원을 위해 감행한 공격에서는 러시아군 6만을 생포했지만 오스트리아군도 4만(!)의 포로를 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3월 23일 프세미우가 함락되면서 11만9천명의 포로가 발생했습니다. 하지만 다시 독일군이 증원된 뒤 갈리치아에서 벌어진 5월 전역에서는 러시아가 포로만 14만에 달하는 패배를 당합니다. 이건 뭐 난장판이 따로 없군요.

이렇게 난타전이 벌어지면 인구가 부족한 쪽이 결정적으로 부족한데 1차 대전 당시에는 오스트리아가 바로 그런 꼴이었습니다. 특히 1914-1915년 전역에서 숙련된 장교와 부사관을 대규모로 잃어 버렸다는 점은 오스트리아의 전쟁 역량을 결정적으로 약화 시켰습니다. 1915년 중반부터 대규모로 투입된 속성으로 양성한 장교단은 대학물을 너무 많이 먹어서인지 전쟁 이전의 직업군인들에 비해 체제에 대한 충성심이 부족한 편이었다지요.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다민족 국가라는 점 때문에 특히 포로가 더 많이 발생했습니다. 브루실로프 공세 당시 체코인으로 편성된 제 8보병사단은 사단전체가 항복해 버려 마치 2차 대전당시 소련군 소속의 에스토니아인 부대의 이야기를 연상시킵니다. 특히 체코계 부대는 “슬라브 형제”들과 싸우는 것을 별로 선호하는 편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헝가리나 크로아티아계 국민을 제외하면 전쟁에 별다른 열의가 없었다고 하지요. 슬라브계 국민들은 오히려 러시아에 더 친근감을 느낄 정도였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 입니다.
더 흥미로운 점은 러시아인을 증오하는 폴란드인 역시 강대국의 전쟁에 목숨을 내던지는 것은 별로 선호하지 않았다는 점 입니다. 독일이 1916년에 “해방(?)” 시킨 폴란드 지역에서 러시아와 싸울 의용병을 모집했을 때 당초 목표는 1917년 상반기 까지 폴란드 인으로 15개 보병사단을 편성하는 것 이었는데 지원자는 동부 폴란드 전역에서 4천명을 약간 넘는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폴란드인의 입장에서는 독일인이나 러시아인이나 그놈이 그놈 이었겠지요.

이런 강대국들간의 난타전 말고도 루마니아와 같은 어중간한 나라의 흥미로운 사례도 있습니다. 루마니아는 1916년 9월 헝가리를 침공했다가 바로 독일-오스트리아 연합군의 반격으로 박살이 나는데 독일군의 11월 공세에서 루마니아군은 14만명의 포로 외에도 그냥 집으로 돌아간 병사가 9만명에 달해 말 그대로 군대가 분해돼 버렸다고 전해집니다.(한편, 같은 기간 루마니아군의 전사자는 14,000명이었다고 합니다.) 이후 루마니아군은 사실상 증발해 버리고 러시아군이 루마니아에 들어와 독일군과 싸우는 양상으로 전개가 됩니다.

전쟁포로의 처우는 아주 개판이었습니다. “서부전선 이상없다”에는 독일에 포로가 된 러시아 포로들의 비참한 모습이 짧지만 인상적으로 묘사돼 있습니다. 그렇지만 러시아에 포로가 된 독일, 오스트리아 포로에 비하면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 잡힌 러시아 포로는 “아주 약간” 나은 편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1914/15년 겨울과 1915/16년 겨울에 유행한 티푸스로 러시아군에 포로가 된 인원 중 30만 명이 사망했고 이 외에도 강제노동으로 인한 사망자도 엄청났습니다. 무르만스크 철도 공사에서는 2만5천명이 중노동과 영양실조로 사망했습니다.

동부전선에서 이렇게 대규모의 포로가 발생한 것은 양측 모두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먼저 오스트리아는 1916년 여름이 되자 전쟁 수행능력을 거의 상실해 더 이상 대규모 공세작전을 펼칠 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에 따라 독일에 의존하는 경향이 더욱 강해지지요. 러시아는 다들 잘 아시다시피 짜르 체제가 붕괴돼 버리죠.

이런 것을 볼 때 2차 대전당시 소련이 1차 대전당시의 러시아보다 더 짧은 기간동안 더 많은 손실을 입고도 전쟁에 승리한 것을 보면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2차 대전 때도 짜르 체제였다면 러시아는 1941년에 전쟁에 졌을지도 모릅니다.

참고서적

Holger Herwig, The first world war : Germany and Austria-Hungary 1914-1918, Arnold, 1997
Reinhard Nachtigal, Die Kriegsgefangenen-verluste an der Ostfront, Die vergessene Front – Der Osten 1914/1915, Schoningh, 2006
Dennis E. Showalter, Tannenberg : Clash of Empires, Brassey’s, 2004
Norman Stone, The Eastern Front 1914-1917, Penguin Books, 1998

2007년 2월 20일 화요일

합리적 수익분배 유형 - 1944년 동유럽 분할 문제

태양계적 대인배 푸틴좌의 한 말씀(sonnet)

※ 오늘(2월 26일) sonnet님이 쓰신 글을 보니 제가 앞 부분에서 심각한 오타를 냈습니다. 잘못 쓴 부분을 수정했습니다.

우리 같은 거스름돈 입장에서는 불쾌하지만 사실 저게 살벌하고 정나미 떨어지는 국제정치의 현실이지요.

발트 3국이 거스름 돈이라면 동유럽은 부수입 정도는 될 것입니다. 1994년에 출간된 Origins of the Cold War : an international history에 실려 있는 Charles Gati의 Hegemony and Repression : Eastern에는 이 부수입 분배를 둘러싼 처칠과 스탈린이라는 두 대인배의 거래에 대해 실려있습니다.

1944년 10월, 처칠은 전후 동유럽 5개국의 처리 문제를 결정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했습니다. 첫 번째 회담은 10월 9일 처칠과 이든, 스탈린과 몰로토프 참석하에 치러졌는데 이날 회의에서 처칠이 소련측에 제시한 세력 분할안은 다음과 같았다고 합니다.

헝가리 – 소련 50%, 영국 50%
유고슬라비아 – 소련 50%, 영국 50%
불가리아 – 소련 75%, 영국 25%
루마니아 – 소련 90%, 영국 10%
그리스 – 소련 10%, 영국 90%

처칠의 첫번째 제안은 그리스에서 영국의 압도적 우위를 달성하는 대신 불가리아와 루마니아에서는 소련의 우위를 인정하고 헝가리, 그리고 유고슬라비아는 적당히 세력 균형을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 이었습니다. 사실 이때는 소련군이 루마니아와 불가리아를 휩쓸고 헝가리에 육박하던 시점이었고 영국은 발칸반도에 별다른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지요. 스탈린은 처칠의 제안에 대해서 큰 이견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0월 10일에는 이든과 몰로토프간에 회담이 이뤄 집니다. 그런데 이든은 루마니아에서 소련의 지배적 위치를 인정하게 된다면 헝가리와 불가리아에서는 영국이 조금 더 많은 지분을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몰로토프 또한 이날 좀 더 센 제안을 내놓습니다. 이날 몰로토프가 처음 제시한 분할안은 다음과 같았다고 합니다.

헝가리 – 소련 50%, 영국 50%
유고슬라비아 – 소련 50%, 영국 50%
불가리아 – 소련 90%, 영국 10%
루마니아 – 소련 90%, 영국 10%
그리스 – 소련 10%, 영국 90%

그리고 이든의 제안을 접한 뒤 다시 다음과 같이 제안을 수정합니다.

헝가리 – 소련 75%, 영국 25%
유고슬라비아 – 소련 75%, 영국 25%
불가리아 – 소련 75%, 영국 25%
루마니아 – 소련 90%, 영국 10%
그리스 – 소련 10%, 영국 90%

몰로토프는 이날 두 번 더 수정안을 제안하는데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가 협상 대상이었습니다. 몰로토프가 세 번째 수정안에서 제시한 세 국가에 대한 세력분할안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헝가리 – 소련 75%, 영국 25%
유고슬라비아 – 소련 60%, 영국 40%
불가리아 – 소련 75%, 영국 25%

이든이 여기에 대해 다시 내놓은 안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헝가리 – 소련 75%, 영국 25%
유고슬라비아 – 소련 50%, 영국 50%
불가리아 – 소련 80%, 영국 20%

몰로토프는 이든의 수정안에서 헝가리 부분은 동의하고 유고슬라비아와 불가리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변경안을 제시합니다.

유고슬라비아 – 소련 50%, 영국 50%
불가리아 – 소련 90%, 영국 10%

그리고 다음날인 10월 11일, 몰로토프가 마지막으로 제안한 것은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영국측의 요구를 수용하는 것 이었습니다. 몰로토프의 최종 수정안은 영국측도 암묵적으로 동의한 것으로 보입니다. 몰로토프의 최종안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헝가리 – 소련 80%, 영국 20%
유고슬라비아 – 소련 50%, 영국 50%
불가리아 – 소련 80%, 영국 20%
루마니아 – 소련 90%, 영국 10%
그리스 – 소련 10%, 영국 90%

전쟁이 끝난 뒤 유고슬라비아는 제멋대로의 길을 걸었고 헝가리, 불가리아, 루마니아는 소련의 지분이 100%가 돼 버리고 그리스는 거꾸로가 돼 버립니다.

결과가 어찌 됐건 도박판의 판돈 신세를 면한 것은 유고슬라비아 정도였고 나머지 네 나라는 그 운명을 바꾸지 못 합니다. 티토는 개인적으로는 별로 좋아하지 않은 인물이지만 유고슬라비아가 강대국의 노름판에서 판돈으로 전락하는 것은 막았으니 그럭저럭 쓸만한 지도자 인 것은 부인할 수 없지 않나 싶습니다.

2007년 2월 15일 목요일

데자뷰?

볼스키 소장은 낮은 직급의 장교들에게 비판적이었다. 그는 기계화군단장, 전차사단장, 전차연대장, 그리고 각 제대의 참모장교들이 “기동전”을 수행할 만한 “작전적-전술적 식견”을 갖추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소련군 기계화부대의) 장교들은 전투에서 주도권을 쥐려고 하지도 않았고 부대가 보유한 기동수단을 제대로 동원하지 못했으며, 전투에서는 부대의 기동력을 잘 살리지 못했다. 게다가 많은 장교들은 정면공격만 거듭했으며 모든 제대에 걸쳐 정찰이라고는 할 줄 몰랐다. 위로는 군단장부터 아래로는 중대장에 이르기 까지 소련 장교들의 지휘 통제 능력은 한심한 수준이었다. 많은 장교들이 지도를 가지고 있지 않아 전투가 한창인 와중에 부대 전체가 길을 잃는 것이 다반사였다. 볼스키 소장은 기계화군단의 장교들이 “자신들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 하고 있으며 부대를 어떻게 지휘할 것인가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다”고 신랄하게 비난했다.

1941년 8월 1일, 전선시찰을 나간 붉은군대 총참모부 볼스키 소장의 이야기
Roger. R. Reese, Stalin’s Reluctant Soldiers : A Social History of the Red Army, 1925-1941, University Press of Kansas, 1996, p.201

그리고 4년 후.

“젊은 장교들은 실전 경험이 부족한데다 자신의 부대를 어떻게 통솔해야 할 지 전혀 모르는 상태다. 사단급 부대들은 전반적으로 훈련이 부족해 통합된 부대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야전 부대들의 경우 연대급의 제병협동 전투나 보전협동 전투를 제대로 수행할 능력이 없다. 운전병들은 야지 주행이나 야간 주행을 제대로 하지 못하며 전차병들도 마찬가지 수준이다. (중략) 전차, 보병수송장갑차, 차량은 거의 대부분 신품이어서 이것을 조종하는 병사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상태이다.

1945년 3월 7일, 독일 제 9군 사령관의 보고서 중에서.
Andreas Kunz, Wehrmacht und Niederlage : Die bewaffnete Macht in der Endphase der nationalalsozialistischen Herrschaft 1944 bis 1945, Oldenbourg, 2005, s.213에서 재인용.

흔히 싸우면서 닮아 간다고 하는데 정말 그런가 봅니다. 그나마 독일쪽은 전쟁 전에 준비한게 있다보니 전쟁 말기까지도 쓸만한 지휘관들이 꽤 많긴 했습니다만 하위 전술제대로 내려가면 내려갈 수록 난감한 상황이었다고 하지요.

2007년 2월 8일 목요일

진정한 대인배 니키타 흐루쇼프

(전 략)

(핵병기의 등장) 이전에는 전략적으로 적에게 직접적인 압력을 가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전략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여러 병종을 동원해 여러 차례의 연속적인 작전을 펼쳐야 했다. 이제는 적국의 전략적 목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 있다. 그것들은 바로 장거리 항공기와 원자탄, 또는 열핵병기를 장착할 수 있는 장거리 로켓, 그리고 같은 무기를 장비한 잠수함이다.
N. S. 흐루쇼프 동지께서는 미국의 언론 및 출판기업인 허스트(W. R. Hearst)와 가진 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셨다.

“만약 미국의 호전적인 집단이 전쟁을 도발한다면 전장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로 한정되지 않을 것 입니다. 전쟁은 바로 직접 미국 본토에서 치러 질 것 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대륙간탄도미사일이 지구의 어떤 곳이든 타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미국 인민들은 막대한 희생을 치르게 될 것 입니다. 우리는 대륙간탄도미사일, 잠수함발사미사일을 비롯해 다양한 수단을 가지고 있으며 전쟁이 벌어지면 이 모든 수단을 총 동원할 것 입니다.”

(후 략)

П. Ротмистров, О современом советском войеном искусстве и его характерных чертах(현대 소련의 전쟁술과 그것의 특징), 1958(영어번역본), Harold S. Orenstein 번역

가끔 생각하는 것이 노서아 국왕 흐루쇼프야 말로 진정한 공갈협박의 본좌가 아닌가 합니다. 북한같은 변방의 오랑캐들이야 백날 불바다 타령을 해 봐야 아무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이 양반은 정말로 서방 세계를 공포에 떨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2007년 1월 23일 화요일

주코프의 굴욕 : 1941년 6월 29일의 일화

주코프는 스탈린에게 직언을 하고도 스탈린 보다 오래 산 매우 드문 사람 중 한명입니다. 그러나 주코프가 스탈린에게 직언을 잘 했다고는 해도 최소한의 대가는 치뤄야 했습니다. 다음은 독소전 개전 초기에 두 사람간에 있었다는 일화입니다.

모스크바에서 민스크에 포위된 부대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확실하게 확인한 것은 6월 29일 아침이었다. 스탈린은 이 소식을 듣자 격노했다. 민스크는 전략적으로는 별로 가치가 없었지만 연방의 슬라브 민족 공화국, 벨로루시아의 수도라는 점 때문에 국제적 대도시로 육성할 도시였다.(스탈린은 그루지야인 이었지만 짜르들이 그러했듯 슬라브 민족을 제국의 중핵으로 삼았다.) 스탈린은 시니컬한 인물이었지만 그 자신이 만들어낸 선전구호들을 그대로 믿어버리는 독재자적인 위험한 습성을 가지고 있었다. 스탈린은 민스크의 함락 소식에 리투아니아의 카우나스(Kaunas)나 우크라이나의 리보프(L’vov)가 함락당했을 때 처럼 슬퍼하지도 않았고 드네프르 강의 방어준비에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았다. 스탈린은 그 대신 민스크의 함락이 매우 중대한 전략적 패배라고 간주하고 분노에 찬 목소리로 티모센코에게 전화를 걸었다.

“민스크에 도데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스탈린이 질문했다.

“아직 충분한 답변을 드리기 어렵습니다. 스탈린 동지.”

티모센코는 불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티모센코가 대답을 주저한 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아직 파블로프가 항복했는지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동지는….”

스탈린은 무엇인가를 말하려다 그만뒀다. 그 자리에 동석한 몰로토프, 말렌코프, 미코얀, 베리야는 뭔가 말할 것을 찾느라 고민하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스탈린이 말꼬를 텄다.

“나는 이 애매모호한 보고가 마음에 들지 않소. 즉시 참모부에 가서 각 전선군 사령부의 보고를 확인해 봐야 겠소.”

몇 분 뒤 소련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진 다섯 사람이 총참모부의 황동으로 된 문을 열고 들어섰다. 경비를 서던 병사는 너무 놀라 말도 못한 채 얼어 붙었다. 다섯 사람은 아무말 없이 경비병을 지나쳐서 티모센코의 집무실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그들이 방에 들어섰을 때 티모센코는 주코프와 다른 여러명의 장군들과 함께 테이블 위에 상황도를 펴 놓고 토의를 하고 있었다.
스탈린이 나타나자 방안에 있던 모든 장군들이 부동자세를 취했다. 티모센코는 하얗게 질렸지만 어쨌건 스탈린에게 다가가 보고했다.

“스탈린동지. 국방인민위원회와 총참모부는 현재 전선의 상황을 분석 중이며 지시를 따르고 있습니다.”

스탈린은 한마디도 대꾸하지 않았다. 스탈린은 테이블로 가서 서부전선군 지구의 상황도를 찾았다. 스탈린은 서부전선군의 상황도를 찾은 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동안 지도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마침내 스탈린이 장군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좋소. 보고하시오. 우리는 현재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듣고 싶소.”

“스탈린동지. 시간이 부족해 아직 전선의 상황을 충분히 분석하지 못 했습니다. 많은 정보들이 아직 확인 못 한 상태입니다. 현재까지 종합된 것들은 매우 모호합니다. 보고를 드리기엔 정보가 부족합니다.”

스탈린은 격분했다.

“동지는 지금 내게 사실을 말하는 게 무서운 거 아니오! 동지는 벨로루시아를 잃었소. 이제 또 뭘 가지고 날 실망시킬 작정이오? 우크라이나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소? 발트 3국은! 동지는 지금 지휘를 하는거요 아니면 그냥 몇 명 죽었나 숫자만 세고 있는거요?”

주코프가 끼어들었다.

“우리가 상황 분석을 마치도록 내버려 두시지요.”

베리야는 어이가 없다는 투로 물어봤다.

“우리가 방해가 됩니까?”

“각 전선군의 상황은 매우 심각하고 우리의 명령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코프가 맞받아쳤다.

“베리야 동지. 명령을 내릴게 있다면 좀 도와주시지요?”

베리야는 불쾌한 어투로 대답했다.

“당의 지시가 있다면 그렇게 하겠소.”

주코프는 다시 대답했다.

“네. 그렇다면 당의 지시가 내려올 때 까지는 참모부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리고 주코프는 그의 “보스”에게 말을 꺼냈다.

“스탈린 동지. 총참모부가 해야 할 가장 시급한 임무는 전선군 지휘관들을 돕는 것 입니다. 보고는 그 뒤에 하겠습니다.”

스탈린은 다시 분노를 터트렸다.

“먼저! 동지가 지금 우리를 대하는 태도는 큰 실수라는 걸 아시오! 두 번째로, 전선군 지휘관들을 어떻게 도울 건지는 지금부터 우리가 생각하겠소!”

스탈린은 독설을 쏟아 낸 뒤 다시 조용해 졌다. 장군들에게 발언할 것이 있으면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잠시 뒤, 주코프가 벨로루시아의 야전군 지휘관들과 통신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고 대답하자 스탈린은 또다시 격분했다. 스탈린은 주코프가 아무 쓸모없는 인간이고 패배자라고 소리쳤다.
주코프는 눈물을 글썽이며 티모센코의 집무실에서 나갔다. 몰로토프가 주코프를 따라 나갔다. 잠시 뒤 주코프가 다시 티모센코의 집무실로 들어왔을 때 그의 눈가는 새빨갛게 돼 있었다.

스탈린은 그를 따라온 사람들에게 말했다.

“동지들, 돌아갑시다. 좋지 않은 상황에 여길 온 것 같소.”

스탈린은 총참모부 건물을 나서면서 침울하게 말했다.

“레닌은 우리에게 위대한 유산을 남겨줬소. 그런데 우리가 이걸 다 말아먹어 버렸구만.”

Constantine Pleshakov, Stalin’s Folly : The Tragic First Ten Days of World War II on the Eastern Front, (Houghton Mifflin), p.212-214

스탈린 동지의 일갈에 눈물을 글썽이는 우리의 불패의 장군. 정말 안구에 습기가 찹니다.

2007년 1월 21일 일요일

싱거운 위기(?) - 1887년 독일의 러시아 선제 공격계획

독일은 비스마르크의 뛰어난 외교력에 힘입어 1890년까지 러시아와 동맹을 유지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1881년에 알렉산드르 3세가 즉위한 이후부터는 그 동맹이 다소 불안하게 유지됐습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알렉산드르 2세는 독일과의 동맹을 중시한 반면 대슬라브주의자였던 알렉산드르 3세는 황태자 시절부터 공공연히 프랑스에 우호적이었습니다.

알렉산드르 3세의 즉위는 특히 독일 육군내에 러시아라는 새로운 가상 적국에 대해 경계를 가지게 만들었습니다. 알렉산드르 3세는 황태자 시절 터키와의 전쟁에서 직접 야전군을 지휘한 바 있었고 베를린회의에서 비스마르크에게 농락당했다는 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르 3세 즉위 이후 러시아는 터키와의 전쟁에서 드러난 육군의 문제점을 개혁하기 위해서 동원체제 개편, 신형 장비 도입에 박차를 가하는데 이것은 그대로 독일측에 불안감을 조성했습니다.

[이 시기 러시아의 육군 개혁에 대해서는 러시아 육군의 개혁 1880-1914을 참고 하시고.]

그리고 1887년 하반기부터 발칸반도, 특히 불가리아 문제 때문에 러시아에서는 반독, 반오스트리아 감정이 고조됐습니다.

일이 터진 것은 1887년 11월이었습니다. 독일 육군참모본부는 러시아가 비밀리에 병력동원을 시작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것은 발칸반도 문제 때문에 독일을 선제공격하기 위한 것이라고 판단을 내립니다. 몰트케는 러시아군의 공격 시기는 1888년 봄이 될 것으로 예상하고 비스마르크에게 참모본부의 정세분석을 보고합니다.

독일은 러시아군의 총 병력이 824,000명이고 동원체제의 개편으로 전쟁이 개시되면 2,424,800명의 예비군이 동원 가능할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었습니다. 몰트케는 러시아가 독일 전선에 투입 가능한 최대 병력을 약 250만 명 내외로 추산하고 있었는데 이것만 하더라도 제대로 동원만 되면 독일로서는 부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특히 훈련이 개선된 점과 보병화기와 포병이 개선된 점, 그리고 폴란드와 러시아 내륙간의 철도망이 확대된 점은 독일측이 가장 큰 불안요인으로 꼽고 있었습니다. 독일 육군참모본부는 1882년에 러시아의 서부 철도망에 대해 비밀리에 조사를 실시해 폴란드의 철도 수송능력이 크게 향상됐다는 것을 파악했습니다. 러시아의 철도망 확충으로 병력 동원 시간이 어느 정도가 걸릴지 모른다는 점은 러시아와의 전쟁계획의 문제 중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독일의 가장 큰 동맹인 오스트리아-헝가리가 군사적으로 약체라는 점도 동부에서 전쟁이 발발할 경우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몰트케는 러시아도 오스트리아 육군, 특히 보병 전력이 형편없다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전쟁을 도발한다면 가능한 이른 시기가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몰트케는 비스마르크에게 당장 병력 동원을 실시해 12월에서 1888년 1월 중으로 오스트리아와 연합해 러시아를 선제 공격하는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몰트케는 1884년에 이미 독일이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를 선제 공격한다면 러시아의 동원 체제가 갖춰지기 전에 병력 우세를 점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독일의 1885년 대 러시아 전쟁 계획은 제 4군(3개 군단, 4개 예비사단)과 제 3군(6개 군단, 5개 예비사단)으로 동원 개시 10일차에 국경을 돌파해 제 4군은 Kovno에 집결하고 있는 러시아군에 파쇄공격을 감행하고 제 3군은 Pulutsk 방면으로 공격하는 것 이었습니다. 이렇게 폴란드에 배치된 러시아군을 격파해 전선을 단축한 뒤 서부전선에서 프랑스를 무너뜨릴 때 까지 전략적으로 방어를 취하는 것이 1885년 계획의 기본적인 골격이었습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몰트케의 주장에 대해 1887년 체결된 오스트리아와의 동맹조약은 러시아가 오스트리아를 선제 공격할 경우에 효력을 발휘하도록 되어 있었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즉 독일이 러시아를 선제공격 할 경우 오스트리아는 동맹의 의무가 없었다는 점이고 독일 단독으로 러시아와 전쟁을 치루는 위험을 떠안게 된다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러시아와 전쟁을 하게 된다면 프랑스와도 전쟁을 하게 되는데 이렇게 양면 전쟁을 치루는 경우 프랑스 우선 전략에 따라 서부전선에 주력을 집결시켜야 하고 당연히 러시아에 대한 선제 공격은 근본적으로 불가능 하다는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무엇보다 비스마르크는 러시아가 독일을 공격하는 일은 프랑스와 독일간에 전쟁이 발발할 경우에만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맹기간이 유효한 마당에 성급하게 러시아를 도발하는 것을 꺼렸습니다.

러시아에 대한 선제 공격은 정치적, 군사적으로 실행이 어려웠기 때문에 1887년 겨울의 전쟁 위기는 얼렁뚱땅 넘어가고 얼마 있지 않아 러시아가 비밀리에 병력을 동원하고 있다는 것도 잘못된 정보로 밝혀집니다.

1887년의 선제공격 계획은 이렇게 용두사미로 끝나 버렸습니다. 독일은 알렉산드르 3세의 즉위 이후 러시아와의 전쟁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고 판단합니다만 다행히도 알렉산드르 3세가 살아있을 때는 약간의 신경전을 제외하면 별다른 충돌이 없었습니다.

결국 1914년에 전쟁이 발발해 독일과 러시아 두 제국은 간판을 내리게 되긴 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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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Eric D. Brose, The Kaiser’s Army – The Politics of Military Technology in Germany during the Machine Age 1870-1918, Oxford University Press
Bruce W. Menning, Bayonets before Bullets : The Imperial Russian Army, 1861–1914, ndiana University Press
Konrad Kanis, Miliärführung und Grundfragen der Außenpolitik, Das Miliär und der Aufbruch in die Moerne 1860-1890, Oldenbourg
Terence Zuber, Inventing the Schlieffen Plan : German War Planning 1871-1914, Oxford University Press

2007년 1월 14일 일요일

붉은군대의 간부 계급체계 : 1919~1941

1. 적백내전기~1935년

붉은군대의 군 계급체계는 적백내전과 2차 대전을 거치면서 여러 차례 개편됐습니다.

레닌과 많은 혁명가들은 전문적인 장교집단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인민위원이었던 트로츠키는 붉은군대를 차별 없는 “사회주의”적인 군대로 만드는데 주력했습니다. 역시 차별의 대표적인 상징은 “계급”이 될 수 밖에 없었지요.

그 결과 붉은군대는 기존의 계급제도와 장교(Офицер)라는 명칭을 폐지하는 대신 직위별 호칭과 “지휘관(Командир)”이라는 명칭을 도입했습니다. 직위별 호칭 제도는 부사관과 장교계급의 상징성을 없애는 것이 목표였고 혁명 이후 도입돼 1924년에 그 기틀이 잡혔습니다.

직위별 호칭 제도는 군 간부의 호칭을 계급대신 “중대지휘관”, “연대지휘관”등 직위에 따라 불렀습니다. 물론 제국 시절부터 군대물을 먹은 장교들은 여기에 대해 불만이 많았지만 시절이 시절인지라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했다지요.

혁명 이후의 간부 계급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분대지휘관(Командир отделения)
소대부지휘관(Помощник Командир взвода)
중대선임부사관(Старшина роты)
소대지휘관(Командир взвода)
중대지휘관(Командир роты)
대대지휘관(Командир батальона)
연대지휘관(Командир полка)
여단지휘관(Командир бригады)
사단지휘관(Начальник дивизии)
야전군지휘관(Командующий армией)
전선군지휘관(Командующий фронтом)

보시면 군단지휘관이 빠져있는데 내전기의 야전군 규모는 1차 대전 당시의 군단 수준을 약간 밑도는 수준이었습니다. 마치 독소전쟁 초반인 1941년 말부터 1942년 말 처럼 야전군 사령부가 직접 사단을 지휘하는 형태였기 때문에 군단지휘관이라는 계급이 필요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내전이 끝난 뒤 1924년에 정립된 직위별 호칭 제도는 군대의 직위를 1등급부터 14등급까지 구분했는데 다음과 같았습니다.

초급지휘관
1등급 : 분대지휘관(Командир отделения) / 반지휘관(Командир звена)
2등급 : 소대 부(副)지휘관(Помощник Командир взвода) / 중대 선임부사관(Старшина роты)

중급지휘관
3등급 : 소대지휘관(Командир взвода)
4등급 : 중대 부지휘관(Помощник Командир роты) / 독립소대지휘관(Командир отдельного взвода)
5등급 : 중대지휘관(Командир роты)
6등급 : 대대 부지휘관(Помощник Командир батальона) / 독립중대지휘관(Командир otdel’noy roty)

고급지휘관
7등급 : 대대지휘관(Командир батальона, 약칭 Комбат)
8등급 : 연대 부지휘관(Помощник Командира полка) / 독립대대지휘관(Командир отдельного батальона)
9등급 : 연대지휘관(Командир полка, 약칭 Компол)

상급지휘관
10등급 : 사단 부지휘관(Помощник Командир дивизии) / 여단지휘관(Командир бригады, 약칭 Комбриг)
11등급 : 사단지휘관(Командир дивизии, 약칭 Комдив)
12등급 : 군단지휘관(Командир корпуса, 약칭 Комкор)
13등급 : 야전군 부지휘관(Помощник командующего армией) / 군관구 부지휘관(Помощник командующего округа) / 전선군 부지휘관(Помощник командующего фронтом)
14등급 : 야전군지휘관(Командующий армией, 약칭 Комарм) / 군관구지휘관(Командующий округом) / 전선군지휘관(Командующий фронтом)

2. 1935년~1941년

소련은 1930년대 중반까지 적백내전기 트로츠키가 확립한 체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1930년대부터 군 병력이 증가하고 또 전문적인 장교집단의 필요성이 증대되면서 적백내전 시기에 확립된 제도로는 계속해서 팽창하는 군대를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해 졌습니다. ‘평등한’ 계급 내에서 직위만 가지고 지휘를 한다는 게 생각 만큼 비효율 적이었고 가뜩이나 생활수준도 열악한 장교들에게 권위 없이 책임만 지워놓고 있으니 잘 돌아가는게 좀 비정상 이었겠지요.
마침내 국방인민위원회는 1935년 9월 22일 직위별 호칭제도를 폐지하고 계급 제도를 부활시켰습니다.
그러나 공산당 정치국은 장군 계급에 대해서는 직위별 호칭제도를 계속 유지하도록 했고 특수 병과의 경우 직위별 호칭제도를 계속 유지해 1935년의 계급제도는 뭔가 어정쩡한 형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1935년 도입된 붉은 군대의 장교 계급 체계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소위(Лейтенант)
중위(Старший лейтенант)
대위(Капитан,)
소령(Майор)
대령(Полковник)
여단지휘관(Комбриг)
사단지휘관(Комдив)
군단지휘관(Комкор)
2급 야전군지휘관(Командарм 2-го ранга)
1급 야전군지휘관(Командарм 1-го ранга)
소비에트연방원수(Маршал Советского Союза)

1935년 개편안에 따른 특수 병과의 계급 체계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소위급
: 2급 군기술관(Воентехник 2-го ранга)
2급 기술-보급관(Техник-интендант 2-го ранга)
보조군의관(Военфельдшер)
보조수의관(Военветфельдшер)
하급군법무관(Младший военный юрист)

중위급
: 1급 군기술관(Воентехник 1-го ранга)
1급 기술-보급관(Техник-интендант 1-го ранга)
상급보조군의관(Старший военфельдшер)
상급보조수의관(Старший военветфельдшер)
군법무관(Военный юрист)

대위급
: 3급 공병관(Военинженер 3-го ранга)
3급 보급관(Интендант 3-го ранга)
군의관(Военврач)
수의관(Военветврач)
상급군법무관(Старший военюрист)

소령급
: 2급 공병관(Военинженер 2-го ранга)
2급 보급관(Интендант 2-го ранга)
2급 군의관(Военврач 2-го ранга)
2급 수의관(Военветврач 2-го ранга)
2급 군법무관(Военный юрист 2-го ранга)

대령급
: 1급 공병관(Военинженер 1-го ранга)
1급 보급관(Интендант 1-го ранга)
1급 군의관(Военврач 1-го ранга)
1급 수의관(Военветврач 1-го ранга)
1급 군법무관(военный юрист 1-го ранга)

여단지휘관급
: 여단공병지휘관(Бригинженер)
여단군수관(Бригинтендант)
여단군의관(Бригнврач)
여단수의관(Бригветврач)
여단법무관(Бригвоенюрист)

사단지휘관급
: 사단공병지휘관(Дивинженер)
사단군수관(Дивинтендант)
사단군의관(Дивврач)
사단수의관(Дивветрач)
사단법무관(Диввоенюрист)

군단지휘관급
: 군단공병지휘관(Коринженер)
군단군수관(Коринтендант)
군단군의관(Корврач)
군단수의관(Корветврач)
군단법무관(Корвоенюрист)

2급 야전군지휘관급
: 야전군공병지휘관(Арминженер)
야전군군수참모(Арминтендант)
야전군군의관(Армврач)
야전군수의관(Армветврач)
야전군법무관(Армвоенюрист)

한편, 1935년 이후의 군 정치위원 계급 체계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소위급 : 하급군정치원(Младший политрук)
중위급 : 군정치원(Политрук)
대위급 : 상급군정치원(Старший политрук)
소령급 : 대대정치위원(Батальонный комиссар)
대령급 : 연대정치위원(Полковой комиссар)
여단지휘관급 : 여단정치위원(Бригадный комиссар)
사단지휘관급 : 사단정치위원(Дивизионный комиссар)
군단지휘관급 : 군단정치위원(Корпусной комиссар)
2급 야전군지휘관급 : 2급 야전군정치위원(Армейский комиссар 2-го ранга)
1급 야전군지휘관급 : 1급 야전군정치위원(Армейский комиссар 1-го ранга)

새로 개편된 계급체계에는 소비에트연방원수 계급이 신설됐는데 부존늬, 예고로프, 보로실로프, 블뤼헤르, 투하체프스키가 1935년 11월 20일자로 소연방원수로 임명됐습니다.

1937년 8월 20일에는 소위의 바로 아래에 준위(Младший лейтенант), 준기술관(Младший воентехник) 계급이 신설 됐습니다.

계급제도는 다시 1940년 5월 7일 개편됩니다. 이 개편의 특징은 마침내 붉은군대에 “장군”과 “제독”의 호칭이 다시 도입됐다는 것이었습니다. 1940년 새로 도입된 장군 호칭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여단지휘관 -> 해당 계급 없음
사단지휘관 -> 소장(Генерал-майор)
군단지휘관 -> 중장(Генерал-лейтенант)
2급 야전군지휘관 -> 상장(Генерал-полковник)
1급 야전군지휘관 -> 대장(Генерал армии)

그리고 같은 해 11월 2일에는 중령(Подполковник) 계급과 이에 준하는 상급대대정치위원(Старший батальонный комиссар) 계급이 새로 신설됐으며 부사관 계급의 직위별 호칭이 폐지됐습니다. 이렇게 1940년에 확립된 계급 체계는 전쟁 기간 중 부분적인 변화를 제외하면 큰 변동 없이 유지됐습니다.

1940년 장군(Генерал) 호칭이 도입됨에 따라 직위별 호칭제도는 폐지됐습니다. 그렇지만 20년 가까이 계속된 직위별 호칭제도의 잔재는 1945년 종전 시 까지도 계속 남아 고참 병사들의 경우 장교들을 기존의 직위별 호칭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1941년 독일과의 전쟁이 발발한 뒤 계급체계의 변화 중 특기할 만한 것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942년에는 장교 호칭이 통일 되면서 특수병과에 남아있던 직위별 호칭이 폐지됐으며 같은해 10월에는 이중지휘체계가 폐지되면서 정치위원의 계급이 없어졌습니다.
마지막으로, “장교”라는 호칭이 1943년부터 공식적으로 다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로서 트로츠키가 구상했던 “사회주의적 군대”의 잔재는 완전히 청산되고 소련의 장교단은 전문적인 군인집단으로, 사회의 엘리트 층을 구성하게 됩니다.

2007년 1월 11일 목요일

투하체프스키 - 가끔 지나치게 높게 평가되는 장군

이상하게도 역사에 관심을 가진 분 들 중에서는 특정 인물을 지나치게 과대 평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2차 대전과 관련된 인물 중 한국에서 괴이할 정도로 과대평가 되는 인물을 몇 명 꼽아 보면 롬멜, 주코프 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 좀 더 추가하면 투하체프스키 정도가 되겠군요.

투하체프스키는 그의 비극적 최후 때문인지 몰라도 실제 능력 이상으로 과대 평가됐다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특히 독소전 초기의 패배는 투하체프스키가 있었다면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은 난감하기 그지없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독소전 초기의 대 패배는 소련의 구조적인 문제가 가장 큰 원인이었지 지휘관들이 특출나게 무능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투하체프스키가 필요 이상으로 높게 평가되는 것은 그가 독소전 이전에 죽어서 2차 대전에서 능력을 검증받을 일이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제가 인터넷에서 읽었던 국내의 투하체프스키에 대한 글 중에는 투하체프스키가 살아 있었다면 독소전쟁 초반에 독전대 같은 무자비한 방법을 쓰지 않고 군대를 지휘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글쎄요?

제가 자주 우려먹는 책에서 한 구절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전략)

소련 정부는 진압작전을 위해서 투하체프스키를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사기저하로 와해 상태에 빠진 제 7군을 대신해 간부후보생에서 선발된 인원이 공격을 지휘하게 됐다. 참모대학을 졸업한 디벤코, 페드코, 우리츠키가 페트로그라드에 배치됐다. 제 10차 전당대회에서 선출된 대표단은 정치 공작을 준비하기 위해 동원했다.

투하체프스키의 공격은 3월 7일 새벽에 시작됐다. 공격 부대는 간단한 위장을 한 채 해안포대의 지원을 받으며 반란군의 진지를 향해 돌격했다. 크론슈타트에 배치된 야포와 기관총은 빙판을 따라 공격해오는 진압군을 분쇄해 버렸다. 공격부대의 제 2파도 반란군의 야포에 큰 피해를 입자 병사들은 돌격 명령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간부들은 권총으로 병사들을 위협해서 겨우 앞으로 내몰 수 있었다. 바르민의 증언에 따르면 보르쉐프스키는 병사들이 빙판위에 있는 작은 보트의 뒤에 엄폐하고 움직이지 않자 병사 중 두 명을 끌어내 그 자리에서 총살해 버리고 공격을 명령했다. 이렇게 되자 진압군에 소속된 병사들 중 일부는 반란군에 합류해 버렸다.

투하체프스키는 자신의 첫번째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3월 17일, 방법을 바꿔 공격을 재개했다.

John Erickson, The Soviet High Command : A Military-Political History, 1918-1941, p.122


이 글은 비록 짧고 단편적인 글 이지만 투하체프스키 역시 내전과 그 이후의 혼란기에는 다른 소련 지휘관들과 마찬가지로 저런 과격한 방식에 의존했음을 잘 보여줍니다. 사실 저런 전술단위의 문제는 그야말로 하급 지휘관들과 병사들의 자질 문제에 달려 있는 것이지 고급지휘관의 역량이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마 투하체프스키가 독소전 발발 당시 까지 살아 있었더라도 붉은 군대 자체가 구조적인 결함 상태를 못 벗어났다면 그 역시 신통한 활약을 펼치긴 어려웠을 겁니다. 갑작스레 두 세 단계씩 진급한 중간 간부들에 기본적인 교육도 받지 못하고 임관된 초급 장교들, 그리고 훈련 부족의 사병들로 만들어진 군대를 가지고 실전경험이 풍부하고 잘 훈련된 독일군을 맞아 참패를 모면했다면 그건 정말 놀라운 일이었겠지요. 하지만 과연 1941년에 어떤 고급 지휘관이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투하체프스키는 분명히 매우 유능한 군인이긴 하지만 국가와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까지 뒤바꿀 정도로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아니, 그런 사람이 있다면 인간이 아니라 신이라고 불러도 되겠지요.

역사 문제를 인식하는데 특정 인물에 절대적인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 아닌가 합니다.

2007년 1월 5일 금요일

R. Reese의 소련 장교 집단 구분

제가 자주 울궈먹는 러시아 군사사 연구자인 Reese는 건국 초기 소련의 장교집단을 크게 세 그룹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보리스 샤포쉬니코프”로 대표되는 “순수한 전문 군인 집단”입니다. 리즈는 이 집단에 바실레프스키와 충격군 이론의 제창자인 트리안다필로프, 스베친 등을 포함 시키고 있습니다. 이 집단의 특징은 주로 짜르 체제에서 영관급 정도의 계급에 고급 군사교육을 받았으며 정치적 성향을 가지지 않아 군대는 당의 도구라는 관점에 충실하고 당의 의사결정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는 것 입니다. 이 중 스베친은 공산당에 가입은 하지만 당 내에서 어떤 요직도 노리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는 “미하일 투하체프스키”로 대표되는 “준 전문 군인 집단”입니다.
리즈는 이 준 전문 군인 집단은 공산당에 가입한 비중이 높으며 당의 정치 활동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투하체프스키는 당과 국가 정책에 영향력을 끼치려는 시도를 많이 했습니다. 그 덕에 레닌그라드 군관구로 좌천(?) 당하기도 하고 끝내는 골로 가지요.
이 집단에는 야키르, 초창기 전차 개발에 공헌한 칼렙스키, 아이데만, 우보레비치 등이 포함됩니다. 이들 집단의 특징은 1차 대전 당시 주로 부사관, 위관급 장교로 참전했으며 정치와 신기술에 관심이 많았다는 점 입니다. 혁명 직후 공산당에 가입한 경우가 많으며 투하체프스키와 우보레비치, 야키르는 당 중앙위원까지 올라가지요. 칼렙스키는 나중에 통신위원장으로 정부 요직을 차지합니다.

세 번째 집단은 보로실로프로 대표되는 “비 전문 군인 집단”입니다.
이 집단은 주로 스탈린이라는 든든한 정치적 “빽”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경우이고 대부분 농민출신에 고등 군사교육이 부족했던 편 입니다. 여기에는 독소전 초기 키예프 피박의 주인공인 부존늬 같이 능력이 의문시되는 인사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스탈린이 전문 군인 집단을 매우 불신했기 때문에 보로실로프 집단은 스탈린의 비호 하에 상당한 입지를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재미있는 점 하나는 21세기의 미국인 리즈의 분석은 혁명 당시 보로쉴로프의 구분과 비슷하다는 것 입니다. 보로쉴로프는 1920년대 초 붉은 군대의 장교 집단을 1. 노동계급 출신의 "혁명적 지휘관"과 2. 짜르 체제에서 하급 간부였던 혁명적 농민 출신의 지휘관, 3. 짜르 체제의 엘리트 군 간부 출신 지휘관으로 구분했습니다.
약간 억지스럽긴 해도 리즈의 구분과 보로쉴로프의 구분이 얼추 비슷하게 맞아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또 Reese의 연구가 흥미로운 점은 John Erickson이 The Soviet High Command에서 장교집단을 “전문 군인 집단”과 “비 전문 군인 집단”으로 구분한 것에서 좀 더 세분화를 시도했다는 점 입니다. 즉 전문 직업군인 집단을 다시 “순수한” 직업군인 집단과 “정치 지향적” 직업군인 집단으로 구분 함으로서 1937년의 군 숙청에서 왜 투하체프스키 집단이 집중적으로 거덜이 났는가를 좀 더 잘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샤포쉬니코프와 바실레프스키는 정치 불개입과 당의 명령에 대한 복종에 충실했기 때문에 스탈린과 충돌할 일이 거의 없었고 자신들의 업무 범위 내에서 일정한 자율성을 인정 받을 수 있었습니다. 반면 투하체프스키 집단은 당의 중공업화에 찬성하면서도 군대가 차지하는 비중을 높이기 위해 끊임없이 당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려고 했고 스탈린 세력의 불쾌감을 자극합니다.

그 후의 결론은 다들 잘 아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