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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13일 토요일

강대국 정치의 일면

다들 잘 아시는 내용이겠습니다만.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독일 통일 문제가 다시 떠오르면서 전략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있던 소련은 판을 조금이라도 유리하게 해보자는 계산에서 독일 통일 문제에 소련과 미국은 물론 영국과 프랑스도 참여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미국과 소련,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을 분할 점령하고 분단체제를 형성한 당사국이니 명분은 꽤 그럴싸 했던 셈입니다. 물론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 통일에 부담을 가질 것이고 이 두나라가 문제를 제기한다면 소련으로서는 그만큼 좋은 일이 없었을 것 입니다. 그러나 미국은 독일을 분할 점령했던 4개국이 주도적으로 독일 통일 문제를 다루는 것이 서독에게는 굴욕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미국이 내놓은 절충안은 독일 문제 해결을 위해 당사자인 서독과 동독, 그리고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가 참여한 이른바 "2+4" 방식이었습니다. 물론 4대강국이 독일의 자주적 통일 문제에 끼어드는 모양이긴 했습니다만 소련이 제안한 4대강국 중심의 협의체 보다는 서독에게 훨씬 나은 방안이었을 겁니다.

한편, "2+4"를 통해 독일 통일문제를 협의한다는 방안은 1990년 2월 캐나다의 오타와에서 열린 나토와 바르샤바조약기구 회원국 외무장관 회의에서 다른 국가들에게도 알려집니다. 그런데 이게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다른 유럽 나라들도 판에 끼워달라고 들고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당시 미국 국무부장관이었던 제임스 베이커(James A. Baker III)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습니다.

우리가 오타와 회의에서 당시 추진 중이던 "2+4" 방식의 협상에 대해 발표하기 전 까지는 상황이 나쁘지 않았다. 우리는 이 문제를 나토 회의에서 다룰 생각이었다. 그러자 사태는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네덜란드와 이탈리아, 그리고 다른 나라들도 독일 문제에 끼고 싶었기 때문에 들고 일어났다. 그리고 만약 발언권을 가진 15개, 또는 16개국 대표가 발언을 신청해 독일이 재통일 될 경우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의문을 제기했다면 상황을 어찌 해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오타와에서 열린 나토 회의에서 미국측이 "독일의 재통일에 대한 우리의 계획안을 알려드리겠습니다"라고 발표하자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그때 갑자기 이탈리아 외무장관이었던 지아니 데 미첼리스(Gianni de Michelis)가 발언을 신청했다.

"독일 재통일 문제는 중요합니다. 그 문제는 이탈리아와 관계가 있는 문제이고 유럽의 미래와도 관계된 문제입니다. 우리도 협상에 참가해야 겠습니다."

그러자 겐셔(Hans-Dietrich Genscher)가 일어서서 말했다. "저도 한 마디만 하겠습니다." 그리고 겐셔는 거칠게 쏘아붙였다.

"당신은 이 게임에 끼어들 수 없어!(Sie sind nicht mit im Spiel)"

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위축되지 않았다. 나는 그의 태도에 꽤 놀랐다. 서독과 동독이 협상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다른 유럽국가들도 같은 요구를 하게 된다면 우리는 이 문제를 종결지을 방법이 마땅치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두 독일과 서유럽의 15개국... 아니 14개국, 그리고 소련과 미국, 여기에 캐나다 까지 끼어들었다면 의사 소통도 제대로 할 수 없었을 것이다.*

Alexander von Plato, Die Vereinigung Deutschlands - ein weltpolitisches Machtspiel(2. Aflg)(Bundeszentrale für politische Bildung, 2003), ss.283~284

겐셔는 외교적으로 매우 무례한 발언을 했는데 사실 이건 강대국이 중심이 되는 국제정치의 찝찝한 일면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독일이 보기엔 한 수 아래의 나라들인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통일문제에 끼어드는 것 만으로도 불쾌한데 그 보다 국력이 더 떨어지는 작은 나라들이 끼어들겠다고 나서고 있으니 짜증이 안 날 수 없었겠지요. 근대이후의 국제관계에서는 형식상 모든 나라가 동등한 위치에서 참여합니다만 실제로는 국력이 그대로 반영되지요.

그리고 유럽의 작은 나라들이 아웅다웅 거리는 것은 더 큰 나라들이 보기에 가소롭기 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베이커가 미국의 "2+4" 방안을 제안하기 위해 소련을 방문했을 때 고르바초프는 미국과 소련, 그리고 유럽 각국의 입장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고르바초프가 세바르드나제와는 다른 반응을 보였다는 것은 베이커가 놀랄만한 일이었다. 고르바초프는 역사적으로 위험한 문제였던 독일의 군국주의가 나타날 조짐은 없다고 생각했다. 대신 고르바초프는 이렇게 말했다. "본인도 기본적으로 미국측의 제안에 동의하는 바 이오." 소련은 새로운 현실에 맞춰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통일 독일의 장래를 걱정할 필요도 없을 것이오." 고르바초프는 프랑스나 영국 같은 나라는 유럽 내부의 주도권을 어느 나라가 쥐게 될 것인지 신경쓴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것은 소련이나 미국이 신경쓸 문제는 아니었다.

"소련과 미국은 대국입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세력 균형을 좌우할 능력이 있지요."**

Philip Zelikow and Condoleezza Rice, Germany Unified and Europe Transformed : A Study in Statecraft(Harvard University Press, 2002), p.182.

독일의 통일 과정은 국제 관계에서 강대국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잘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문제가 발생하면 모두가 관심을 가지지만 그 문제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대상은 실력이 뒷받침 되는 소수일 수 밖에 없지요.

불행인지 다행인지 한반도 주변에는 강대국 밖에 없어서 독일 통일 과정에서 처럼 딴지를 걸고 나설 자격미달(???)의 나라는 없습니다. 한반도 통일이 본격적으로 논의 될 때 몽골이나 베트남이 한 자리 요구할 리는 없겠지요^^;;;;

*위에서 인용한 겐셔의 발언은 꽤 유명해서 독일 통일과 관련된 많은 저작들에 실려있습니다. 젤리코와 라이스의 책에도 그 이야기가 있는데 미국 외교문서를 참고했기 때문에 베이커의 구술을 참고한 플라토의 서술과는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고르바초프의 이 발언은 직역하면 별로 재미가 없을 것 같아 의역을 했습니다. 원문은 "We are big countries and have our own weight." 입니다.

2007년 12월 3일 월요일

영국인 교사 일단은 위기를 모면

곰인형 덕분에 요단강을 건널 위기에 처했던 영국 교사가 수단 대통령에 의해 사면 받았다고 하는 군요.

Sudans Präsident begnadigt britische Lehrerin

그런데 이제 수단 대통령 각하가 대신 욕을 먹게 생겼군요. 이제 이 양반에게 애도를.

2007년 12월 2일 일요일

곰 인형이 사람을 잡는다!

워싱턴타임즈에 아주 난감한 기사가 하나 실렸습니다.

Militants demand teacher's death

사연인 즉슨 영국인 여교사가 애들에게 곰인형의 이름을 무함마드로 짓도록 해서 수단인들이 분개했다는 군요. 분노한 무슬림들이 이 여교사를 처형하라고 대규모로 시위를 하고 있답니다.

푸아. 광신도들이란. 이슬람은 도통 호감이 안가는 종교입니다.

2007년 11월 13일 화요일

영국 해군의 팔레스타인 검역 작전

쓸데 없이 책값이 비싼 Frank Cass에서 나온 The Royal Navy and Maritime Power in the Twentieth Century를 읽는 중 입니다. 돈이 궁한지라 지금 다니는 학교에 신청을 했더니 바로 사주더군요.

역시 이 출판사에서 나오는 이와 유사한 종류의 책들이 그렇듯 개론적인 내용들을 종합해 놓았습니다. 전체적으로 요약이 잘 되어 있다는 점이 장점이지만 익숙한 내용들이 많더군요. 그렇지만 단행본으로 묶여 나오기는 어려운 글들도 같이 실려 있다는 점은 아주 좋습니다.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Geoffrey Till이 쓴 “Quarantine Operations : The Royal Navy and the Palestine Patrol” 입니다. 말 그대로 1945년부터 1948년까지 영국 해군이 팔레스타인으로 밀입국하는 유태인 난민들을 단속하기 위해 벌인 검역 작전에 대해 개괄적으로 설명해 놓은 부분입니다. 이 시기를 다루는 팔레스타인 문제의 경우 꽤 많은 시각들이 밀입국 하는 유태인의 시각으로 사태를 보고 있는지라 이를 단속하는 영국 해군의 시각에서 쓰여진 점은 상당한 매력이 있더군요.

Till이 지적하는 영국의 가장 큰 문제는 1차 대전 이후의 유태인에 대한 탄압, 특히 나치의 유태인 대량 학살로 시오니즘에 대한 국제적인 동정여론이 높아졌다는 것 입니다. 이미 30년대부터 팔레스타인으로 몰려드는 유태인 문제는 영국의 중동 지배에 골칫거리가 되고 있었지요. 여기에 히틀러가 기름을 부어줬으니 영국으로는 죽을 맛이었습니다. 영국은 아랍인들의 반발 때문에 유태인의 이주를 제한하려 노력했지만 곳곳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유태인들을 막는 것은 어려웠다고 합니다. 특히 프랑스의 정보기관은 영국을 엿먹이기 위해 유태인들의 밀입국을 지원하며 유태인들에게 영국의 검역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다고 하지요. 프랑스가 아닌 다른 유럽국가들도 굳이 영국을 지원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나가는 유태인들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영국의 새로운 큰형님이 된 미국은 유태인의 팔레스타인 이주에 부채질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으로서는 죽을 맛이었습니다. 미국의 유태인들은 선박을 지원하면서 유태인들을 열심히 실어 날랐다지요.

영국 해군은 1945년 10월에 공식적으로 유태인 검역 작전을 시작하고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한 해군 감축에도 불구하고 이 임무에 필요한 병력을 증강합니다. 이 임무가 시작될 당시 영국 지중해 함대는 14척의 구축함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중 6척이 1946년 초 까지 유태인 검역 임무에 투입되었습니다. 최종적으로 1948년에 유태인 검역작전이 중단될 때 까지 영국 해군은 이 임무에 순양함 10척, 구축함 20척, 프리킷 9척, 소해함 11척, 기타 소형함정 20척을 투입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지중해 전체를 담당하기에는 검역작전에 투입되는 군함의 수가 너무 적었고 유태인들은 이 점을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검역 작전 초기에 유태인들은 아주 간단하게 영국의 봉쇄망을 뚫었는데 그것은 한번에 여러척의 선박을 출항시키는 것 이었습니다. 자고로 숫자 앞에 장사 없다지요. 영국은 부족한 군함을 지원하기 위해서 영국 공군을 초계 임무에 증강했고 이것은 검역의 효율성을 높였다고 합니다.

전술적인 면에서도 꽤 흥미로운 발전이 있었습니다. 선박 검역 임무들이 다 그렇듯 유태인을 실은 선박들은 영국 해군이 검역을 위해 승선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저지하려 했습니다. 1947년의 엑소더스호 사건에서는 사망자까지 나올 정도였지요. 유태인들은 영국군이 선박에 오르지 못하도록 뜨거운 기름을 뿌리고 그래도 올라탈 경우 숫적으로 불리한 영국군들을 포위하고(!) 쇠막대기나 칼 같은 물건을 휘둘러 댔다고 합니다. 이건 무슨 중국 어선 단속하는 한국 해경의 고난을 연상케 하는 군요. 이런 근접전에서 영국 해군이 쓰는 리-엔필드 소총은 너무 길어 불편했고 그 결과 검역임무에는 기관단총이 대량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유태인들이 휘두르는 무기를 방어하기 위해 방패도 지급되었다고 합니다. 이 외에도 영국 해군은 선박에 쉽게 올라탈 수 있도록 특수 제작한 사다리 등을 만드는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보통은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핵심 인물들만 분리해서 제압할 경우 선박내의 저항은 쉽게 붕괴되었다고 합니다. 난민들이 정규군에게 조직적으로 저항하는건 무리겠지요.

Till은 검역작전에 투입된 병력을 고려하면 영국 해군의 검역임무는 전체적으로 효과적이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특히 육지의 영국 육군이 죽을 쑨 것과 비교하면 말이지요.

2007년 10월 21일 일요일

북한의 50~60년대 경제성장에 대한 잡상

남북한의 경제를 비교할 때 흔히 하는 말 중 하나가 북한이 60년대까지 남한보다 경제가 잘나갔다고 하는 것 입니다. 사실 통계수치 같은걸 보더라도 북한은 전후복구 과정에서 상당히 인상적인 기록들을 보여준게 사실입니다. 북한의 공식통계에 따르면 1957~60년도에는 GNP 증가율이 연평균 21%에 달했다고 하지요. 1970년대 중반까지도 연평균 10%가 넘는 성장세를 보였다고 추정되니 대단한 성과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어차피 저런 고도성장은 소련과 중국의 경제원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입니다. 북한 체제 자체가 자력갱생 노선이었고 경제에 필수적인 원자재나 연료 등은 상당수가 소련의 원조로 충당되었으니 경제를 일정수준까지 성장시키는게 가능했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60년대 후반부터 사실상 공짜에 가까웠던 원조가 줄어들면서 결국 일본, 프랑스, 서독 등의 “자본주의” 국가에게 손을 벌리게 된 것 입니다.

사실 경공업 제품이라도 수출하던 남한과 달리 북한이 팔아먹을 것은 납, 아연 같은 원자재류에 불과했는데 오일쇼크 이전까지만 해도 아연의 가격이 높았으니 이것을 믿고 차관을 들여온 것 입니다. 아마 북한 쪽은 수출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길 때 까지 원자재 수출로 공백을 메울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모양입니다.

이 상황에서 오일쇼크가 터진 것이 문제였습니다. 남한은 60년대에 뭔가 팔아먹을 수 있는 산업을 만들어 놨는데 비해 북한은 “잘 나가던” 50~60년대에 자력갱생 노선을 추구하느라 그런 것을 갖추지 못했던 것 입니다. 결과적으로 볼 때 공짜원조가 들어오던 50~60년대에 헛다리를 짚었다고 해야 되나요. 다들 잘 아시다 시피 수출할게 없다 보니 서방과의 교역은 적자였습니다. 일본, 프랑스, 서독 등의 차관을 들여와 대규모 플랜트 건설을 시작한 것이 1972년 부터인데 벌써 1974년이 되면 채무불이행 이라는 추태를 보이기 시작하지요.
양문수 교수가 지적했듯 북한이 70년대 중반에 경제적 어려움을 겪은 것은 오일쇼크가 1차적인 원인이긴 하지만 본질적인 위기의 원인은 원자재를 제외하면 주력 수출상품이라고 할 만한 물건이 없었다는 것 입니다. 북한의 경제당국이 수출할 수 있는 능력을 과신하고 남한과의 자존심 경쟁을 위해 대규모 차관을 들여와 공업건설에 나선 것이 결국 그 자체의 목을 조른 것 입니다. 물론 남쪽도 70년대 말에 엄청난 경제적 어려움을 겪긴 했지만 구조조정을 통해 80년대에는 어느 정도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북한은 소위 “잘나가던” 50~60년대에 개방을 위한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구조조정이건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이건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 결과 70년대 중반부터 21세기 초반까지 계속해서 경제가 내리막 길 이지요. 이미 1973년에 김일성은 공장들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아 생산이 정상화 되지 못한다고 공개적으로 문제점을 시인하지요.

제가 보기에는 이미 이 무렵 남북한의 게임은 끝난 것 같습니다.

결국 북한의 50~60년대의 경이적인 경제성장은 소련의 대규모 무상원조가 결정적이었으며 북한인들은 이 좋은 기회를 제대로 살리지 못 했습니다. 결과론적인 비판에 불과하지만 북한이 자랑한 경이적인 성장은 사실 그 자체가 무상원조 없이는 성립될 수 없는 허깨비였던 셈입니다. 결국 북한은 아무리 좋게 보더라도 건국 이후 단 한번도 원조경제 수준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고 생각됩니다.

2007년 6월 6일 수요일

1차대전 당시 네덜란드의 중립

네덜란드는 1차대전 당시 독일의 침공을 면할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네덜란드가 가진 경제적,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이었습니다. 슐리펜 계획에 따른 보급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네덜란드도 점령해 버리면 편하지만 그렇게 되면 잃어 버리는 것이 더 많았기 때문입니다. 독일군 수뇌부는 전쟁계획을 수립하면서 영국이 중립을 지키지 않는다면 해상봉쇄는 피할 수 없기 때문에 독일의 무역을 위해서라도 대서양의 출입에 용이한 중립국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전쟁이 벌어질 경우 독일과 외부와의 무역을 중개해 줄 수 있는 대서양 국가는 사실상 네덜란드 밖에 없지요. 특히 로테르담은 미국에서 수입하는 밀을 독일로 공급하는 주요 항구였기 때문에 독일로서는 네덜란드와 중립을 유지하는 것이 필수적이었습니다.
독일은 네덜란드가 독일에 우호적인 중립을 지키도록 많은 신경을 썼다고 합니다. 몰트케는 1차대전 발발 이전부터 외교 채널을 통해 독일은 전쟁 시 네덜란드의 중립을 보장할 것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고 하지요. 네덜란드는 벨기에가 독일군의 목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또한 독일의 의도에 대해 많은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고 독일측의 중립 보장은 너무나도 중요했습니다.

전쟁이 발발하자 네덜란드는 독일에 대한 식료품 공급처로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1914년 8월 전쟁이 발발하자 네덜란드 정부는 식량 비축분을 확보하기 위해서 네덜란드에 수입된 곡물을 외국으로 재수출 하는 것을 금지 시켰는데 이때 독일 정부는 즉시 외교적 공갈을 통해 수출 금지 조치를 해제 시켰습니다.
지정학적 위치상 네덜란드는 미국과 독일간의 밀 중개무역을 독점하게 되는데 그 결과 독일은 네덜란드를 통한 식료품 공급에 크게 의존하게 됩니다. 1915년에는 독일이 수입하는 식료품의 50%가 네덜란드를 통해 공급될 정도였다고 하지요. 네덜란드가 1916년에 독일에 수출한 식량은 독일인 120만명이 하루에 3,500칼로리를 섭취할 수 있게 하는 양이었다고 합니다. 독일은 해상봉쇄 때문에 네덜란드는 물론 덴마크, 스위스, 노르웨이, 스웨덴을 통한 식량수입을 늘렸고 네덜란드는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습니다. Marc Frey의 Bullying the Neutrals : The Case of the Netherlands에 따르면 네덜란드는 1914년 1~6월에 독일로 감자 및 밀가루 11,411톤, 버터 7,671톤, 치즈 6,312톤, 달걀 7,868톤, 고기 5,820톤을 수출했는데 이것이 1916년 1~6월에는 각각 51,201톤, 19,026톤, 45,969톤, 20,328톤, 40,248톤으로 증가했다고 합니다.

물론 네덜란드가 이렇게 전략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면서 연합군의 해상봉쇄가 제 역할을 할 수 없게 만드니 영국의 눈치도 안 볼 수는 없었습니다. 네덜란드 외교부는 1916년 11월에 영국 정부에게 독일에 대한 식료품 수출을 늘리는 것은 독일의 침공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영국 정부가 양해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특히 무역에 대한 국가의존도가 높은 만큼 네덜란드가 독일에 대한 무역제제에 동참할 경우 독일 해군이 네덜란드 상선을 공격할 가능성도 높았기 때문에 네덜란드는 영국 측을 설득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영국의 인내심도 한계는 있는지라 영국 정부는 네덜란드 측에 독일에 대한 식량 수출을 50%이상 감축하라는 압력을 가합니다. 여기에 미국이 참전하자 상황은 더욱 꼬이게 됩니다. 미국은 영국보다 한술 더 떠서 독일에 대한 수출을 완전히 금지할 것을 요구합니다. 1917년 10월, 미국이 독일에 대한 무역 금지 요구에 합류하자 네덜란드 정부는 굉장히 골치 아픈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독일은 1916년 말부터 유사시에 대비해 네덜란드를 침공하는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고 네덜란드 역시 독일이 어떤 움직임을 보일지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도 독일은 양면전쟁의 여파로 네덜란드 침공에 투입할 만한 병력을 확보할 수 없어 침공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영국으로 부터의 석탄 공급이 감소했기 때문에 독일의 석탄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다는 점도 독일과의 무역을 계속해야 하는 원인이었습니다.
네덜란드는 미국이 참전한 이후 미국과 영국 양측의 압력에 못 이겨 독일에 대한 수출을 감축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석탄공급을 확보하기 위해서 미국, 영국과의 협상을 통해 독일에 대한 식량 수출을 중단하지는 않았습니다. 네덜란드가 독일에 대한 수출을 완전히 중단한 것은 1918년 9월로 독일의 패전이 확실해 진 뒤 였고 바로 휴전이 이어진 뒤 네덜란드는 다시 독일에 대한 수출을 재개할 수 있었습니다.

1차대전 당시 네덜란드는 융통성있는 외교와 약간의 행운의 덕택으로 중립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미국과 독일을 잇는 중개 무역을 통해 경제적으로도 상당한 이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네덜란드의 금 비축량은 1914년 6월 30일 기준으로 3억620만 굴덴이었는데 1918년 12월 31일에는 10억6890만 굴덴에 달했다고 하지요.

2007년 4월 1일 일요일

28 weeks later 예고편

28 weeks later 예고편

올 여름에 개봉하는 모양입니다.

예고편 내용을 보니 쑥대밭이 된 영국을 재건하기 위해서 "미국"이 개입하는데 뭔가 꼬여버리는 모양입니다. 런던 시가지를 폭격하는 미군 비행기도 나오는 걸 보면 좀비와 미군이 시가전을 벌이는 내용도 꽤 많을 것 같습니다. 흐흐흐.

1편의 주인공들은 나오지 않는 것 같군요.

개인적으로는 피 튀기지 않는 이런 형식의 좀비영화를 좋아하기 때문에 꽤 기대가 됩니다.

2007년 2월 20일 화요일

합리적 수익분배 유형 - 1944년 동유럽 분할 문제

태양계적 대인배 푸틴좌의 한 말씀(sonnet)

※ 오늘(2월 26일) sonnet님이 쓰신 글을 보니 제가 앞 부분에서 심각한 오타를 냈습니다. 잘못 쓴 부분을 수정했습니다.

우리 같은 거스름돈 입장에서는 불쾌하지만 사실 저게 살벌하고 정나미 떨어지는 국제정치의 현실이지요.

발트 3국이 거스름 돈이라면 동유럽은 부수입 정도는 될 것입니다. 1994년에 출간된 Origins of the Cold War : an international history에 실려 있는 Charles Gati의 Hegemony and Repression : Eastern에는 이 부수입 분배를 둘러싼 처칠과 스탈린이라는 두 대인배의 거래에 대해 실려있습니다.

1944년 10월, 처칠은 전후 동유럽 5개국의 처리 문제를 결정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했습니다. 첫 번째 회담은 10월 9일 처칠과 이든, 스탈린과 몰로토프 참석하에 치러졌는데 이날 회의에서 처칠이 소련측에 제시한 세력 분할안은 다음과 같았다고 합니다.

헝가리 – 소련 50%, 영국 50%
유고슬라비아 – 소련 50%, 영국 50%
불가리아 – 소련 75%, 영국 25%
루마니아 – 소련 90%, 영국 10%
그리스 – 소련 10%, 영국 90%

처칠의 첫번째 제안은 그리스에서 영국의 압도적 우위를 달성하는 대신 불가리아와 루마니아에서는 소련의 우위를 인정하고 헝가리, 그리고 유고슬라비아는 적당히 세력 균형을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 이었습니다. 사실 이때는 소련군이 루마니아와 불가리아를 휩쓸고 헝가리에 육박하던 시점이었고 영국은 발칸반도에 별다른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지요. 스탈린은 처칠의 제안에 대해서 큰 이견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0월 10일에는 이든과 몰로토프간에 회담이 이뤄 집니다. 그런데 이든은 루마니아에서 소련의 지배적 위치를 인정하게 된다면 헝가리와 불가리아에서는 영국이 조금 더 많은 지분을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몰로토프 또한 이날 좀 더 센 제안을 내놓습니다. 이날 몰로토프가 처음 제시한 분할안은 다음과 같았다고 합니다.

헝가리 – 소련 50%, 영국 50%
유고슬라비아 – 소련 50%, 영국 50%
불가리아 – 소련 90%, 영국 10%
루마니아 – 소련 90%, 영국 10%
그리스 – 소련 10%, 영국 90%

그리고 이든의 제안을 접한 뒤 다시 다음과 같이 제안을 수정합니다.

헝가리 – 소련 75%, 영국 25%
유고슬라비아 – 소련 75%, 영국 25%
불가리아 – 소련 75%, 영국 25%
루마니아 – 소련 90%, 영국 10%
그리스 – 소련 10%, 영국 90%

몰로토프는 이날 두 번 더 수정안을 제안하는데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가 협상 대상이었습니다. 몰로토프가 세 번째 수정안에서 제시한 세 국가에 대한 세력분할안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헝가리 – 소련 75%, 영국 25%
유고슬라비아 – 소련 60%, 영국 40%
불가리아 – 소련 75%, 영국 25%

이든이 여기에 대해 다시 내놓은 안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헝가리 – 소련 75%, 영국 25%
유고슬라비아 – 소련 50%, 영국 50%
불가리아 – 소련 80%, 영국 20%

몰로토프는 이든의 수정안에서 헝가리 부분은 동의하고 유고슬라비아와 불가리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변경안을 제시합니다.

유고슬라비아 – 소련 50%, 영국 50%
불가리아 – 소련 90%, 영국 10%

그리고 다음날인 10월 11일, 몰로토프가 마지막으로 제안한 것은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영국측의 요구를 수용하는 것 이었습니다. 몰로토프의 최종 수정안은 영국측도 암묵적으로 동의한 것으로 보입니다. 몰로토프의 최종안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헝가리 – 소련 80%, 영국 20%
유고슬라비아 – 소련 50%, 영국 50%
불가리아 – 소련 80%, 영국 20%
루마니아 – 소련 90%, 영국 10%
그리스 – 소련 10%, 영국 90%

전쟁이 끝난 뒤 유고슬라비아는 제멋대로의 길을 걸었고 헝가리, 불가리아, 루마니아는 소련의 지분이 100%가 돼 버리고 그리스는 거꾸로가 돼 버립니다.

결과가 어찌 됐건 도박판의 판돈 신세를 면한 것은 유고슬라비아 정도였고 나머지 네 나라는 그 운명을 바꾸지 못 합니다. 티토는 개인적으로는 별로 좋아하지 않은 인물이지만 유고슬라비아가 강대국의 노름판에서 판돈으로 전락하는 것은 막았으니 그럭저럭 쓸만한 지도자 인 것은 부인할 수 없지 않나 싶습니다.

2006년 12월 3일 일요일

1940~41년 독일 공군의 런던 폭격

이른바 영국 본토 방공전에서 영국 공군을 제압하지 못한 독일은 다들 잘 아시다시피 런던에 대한 폭격을 1941년 봄 까지 줄기차게 실시합니다. 그러나 육군이 1940년 10월부터 소련 침공을 본격적으로 준비하면서 결과적으로 독일 공군의 런던 폭격은 쓸데없이 영국의 민간인만 희생시켜 적개심만 고취시키는 삽질로 끝나 버렸지요.

생각없는 전쟁 지도층의 삽질의 대표 사례가 아마도 이 런던 공습이 아닐까 합니다.

런던 공습기간 독일 공군의 공격 패턴은 상당히 재미있는데 1941년 1월 까지는 소이탄의 비율도 특별히 높지 않고 출격 빈도가 잦은 대신 출격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습니다. 그런데 소련 침공이 임박한 1941년 봄, 특히 3월 말~5월에는 출격 빈도가 줄어드는 대신 공격 규모가 커지고 소이탄 사용이 크게 늘어나는 것이 특징입니다.

아래의 통계는 Ulf Balke, Die Einsätze des Kampfgeschwaders 2, 422~425쪽에서 발췌한 것 입니다.

고폭탄(톤) / 소이탄(개) / 당일 출격 기수

1940년 9월

5/6일 야간 : 68.80 / 112 / 68
6/7일 야간 : 22.35 / 38 / 23
7/8일 야간 : 655.00 / 806 / 625
8/9일 야간 : 206.50 / 327 / 290
9/10일 야간 : 336.75 / 307 / 286
10/11일 야간 : 151.00 / 400 / 148
11일 : ? / ? / 73
11/12일 야간 : 216.80 / 148 / 178
13일 : 130.00 / 250 / 53
13/14일 야간 : 123.50 / 200 / 105
14일 : 12.00 / 0 / 49
14/15일 야간 : 55.40 / 43 / 38
15일 : 133.00 / 108 / 148
15/16일 야간 : 224.00 / 279 / 181
16일 : 40.00 / 90 / 38
16/17일 야간 : 172.00 / 318 / 170
17일 : 12.75 / 0 / 13
17/18일 야간 : 333.50 / 591 / 268
18일 : ? / ? / 30
18/19일 야간 : 349.75 / 628 / 280
19/20일 야간 : 310.20 / 533 / 255
20/21일 야간 : 153.70 / 79 / 109
21/22일 야간 : 164.37 / 329 / 113
22/23일 야간 : 95.85 / ? / 103
23/24일 야간 : 310.25 / 611 / 249
24/25일 야간 : 256.30 / 384 / 96
25/26일 야간 : 260.20 / 441 / 220
26/27일 야간 : 162.00 / 101 / 155
27/28일 야간 : 168.50 / ? / 163
28/29일 야간 : 325.05 / 303 / 249
29/30일 야간 : 294.00 / 136 / 246
30/10월 1일 야간 : 113.00 / 109 / 104

1940년 10월

1일 : 6.95 / 0 / 27
1/2일 야간 : 250.10 / 115 / 214
2/3일 야간 : 130.95 / 300 / 105
3일 : 49.40 / 32 / 46
3/4일 야간 : 61.40 / 0 / 44
4일 : 65.15 / 12 / 66
4/5일 야간 : 189.50 / 236 / 134
5일 : 11.65 / 0 / 44
5/6일 야간 : 242.10 / 176 / 177
6일 : 55.95 / 0 / 57
6/7일 야간 : 8.50 / 0 / 7
7일 : 23.00 / 0 / 96 (Jabo)
7/8일 야간 : 210.55 / 143 / 179
8일 : 24.00 / 0 / ? (Jabo)
8/9일 야간 : 257.00 / 264 / 208
9일 : 22.25 / 0 / 78 (Jabo)
9/10일 야간 : 263.50 / 245 / 216
10/11일 야간 : 269.00 / 718 / 222
11일 : 12.00 / 0 / 47
11/12일 야간 : 213.00 / 126 / 152
12일 : 34.00 / 0 / 135 (Jabo)
12/13일 야간 : 148.00 / 24 / 119
13/14일 야간 : 248.40 / 131 / 255
14일 : 19.00 / 0 / 19
14/15일 야간 : 304.00 / 292 / 242
15일 : 46.00 / 0 / 185 (Jabo)
15/16일 야간 : 538.00 / 177 / 410
16/17일 야간 : 346.00 / 187 / 280
17/18일 야간 : 322.00 / 134 / 254
18/19일 야간 : 172.00 / 132 / 125
19/20일 야간 : 386.00 / 192 / 202
20/21일 야간 : 356.00 / 192 / 298
21일 : 37.00 / 0 / 37
21/22일 야간 : 115.00 / 52 / 100
22/23일 야간 : 98 / 40 / 85
23/24일 야간 : 55.00 / 0 / 64
24/25일 야간 : 75.00 / 0 / 64
25일 : 46.00 / 0 / 186 (Jabo)
25/26일 야간 : 193.00 / 193 / 159
26/27일 야간 : 253.00 / 176 / 203
27일 : 53.00 / 0 / 159 (Jabo)
27/28일 야간 : 127.00 / 0 / 114
28일 : 16.00 / 0 / 61 (Jabo)
28/29일 야간 : 176.00 / 111 / 146
29일 : 25.00 / 0 / 77 (Jabo)
29/30일 야간 : 236.00 / 109 / 186
30일 : 13.00 / 0 / 52 (Jabo)
30/31일 야간 : 178.00 / 92 / ?
31일/11월 1일 야간 : 48.00 / 83 / 67

1940년 11월

1/2일 야간 : 215.00 / 130 / 171
2일 : 11.00 / 0 / 33 (Jabo)
2/3일 야간 : 117.00 / 126 / 102
3일 : 17.00 / 0 / 11
4/5일 야간 : 184.00 / 16 / 157
5/6일 야간 : 139.00 / 0 / 119
6/7일 야간 : 223.00 / 4 / 192
7/8일 야간 : 242.00 / 9 / 193
8일 : 7.00 / 0 / 25 (Jabo)
8/9일 야간 : 133.00 / 0 / 125
9일 : 19.00 / 0 / 24
9/10일 야간 : 124.00 / 0 / 125
10/11일 야간 : 212.00 / 7 / 171
12/13일 야간 : 165.00 / 92 / 126
13/14일 야간 : 28.00 / 0 / 25
14/15일 야간 : 24.00 / 2 / 21
15일 : 5.35 / 0 / 33 (Jabo)
15/16일 야간 : 413.50 / 1142 / 358
16/17일 야간 : 104.00 / 68 / 87
17/18일 야간 : 56.00 / 64 / 49
18/19일 야간 : 5.00 / 0 / 10
19/20일 야간 : 33.00 / 0 / 37
20/21일 야간 : 48.00 / 32 / 45
21/22일 야간 : 31.00 / 32 / 40
22/23일 야간 : 34.00 / 20 / 43
24/25일 야간 : 37.00 / 0 / ?
27일 : 15.00 / 0 / 18
28/29일 야간 : 22.00 / 44 /21
29/30일 야간 : 380.00 / 820 / 335

1940년 12월

1/2일 야간 : 31.00 / 0 / 17
4/5일 야간 : 48.00 / 39 / 42
5/6일 야간 : 33.00 / 0 / 29
8/9일 야간 : 387.00 / 3,188 / 413
11/12일 야간 : 17.00 / 0 / 15
19/20일 야간 : 39.65 / 36 / 49
22/23일 야간 : 11.20 / 0 / 28
27/38일 야간 : 111.20 / 393 / 108
29/30일 야간 : 127.00 / 613 / 136

1941년 1월

5/6일 야간 : 67.00 / 24 / 63
7일 : 17.10 / 0 / 25
9/10일 야간 : 65.60 / 470 / 67
11/12일 야간 : 144.00 / 598 / 137
12/13일 야간 : 155.00 / 823 / 141
15/16일 야간 : 15.00 / 20 / 15
19/20일 야간 : 48.00 / 160 / 54
28일 : 5.90 / 28 / 19
29/30일 : 58.25 / 86 / 37
30일 : 18.50 / 38 / 26
31일 : 22.80 / 19 / 32

1941년 2월

5/6일 야간 : 17.60 / 70 / 30
26/27일 야간 : 80.00 / 0 / 53

1941년 3월

4/5일 야간 : 10.00 / 0 / 10
8/9일 야간 : 130.00 / 693 / 131
9/10일 야간 : 95.00 / 444 / 126
15/16일 야간 : 107.70 / 388 / 101
18/19일 야간 : 35.00 / 70 / 33
19/20일 야간 : 467.00 / 3,398 / 479
20/21일 야간 : 24.00 / 222 / 32

1941년 4월

16/17일 야간 : 890,00 / 4,200 / 685
19/20일 야간 : 1,026.00 / 4,252 / 712

1941년 5월

10/11일 야간 : 711.00 / 2,409 / 507

독일이 1940년 8월 1일부터 1941년 3월 31일까지 런던에 투하한 폭탄은 총 19,634톤이라고 합니다. 2위인 버밍엄(Birmingham)은 1,822톤 으로 1위의 10%에도 못 미치는군요. 그만큼 단기결전에 실패한 독일군, 특히 독일 공군은 영국을 압박하기 위해 수도에 공격을 집중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것은 이후 1943년부터 1945년까지 미 육군항공대의 중폭격기들이 쏟아 부은 폭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참고로, 독일 공군이 1944년 1월 21일부터 개시한 런던 공습작전인 Steinbock 작전에서 가장 많은 폭탄을 투하한 날은 2월 18일~19일의 야간 공습으로 총 178톤을 투하했다고 하는군요.

2006년 11월 25일 토요일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 대한 뒷북 감상

제 취향이 고상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보니 정치적으로 진지한 영화를 본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습니다. 이 영화를 본지 한달이 넘어가지만 감상을 어떻게 쓸지 고민한 것도 사실은 너무나 오랫만에 진지한 영화를 봤는지라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서 입니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The Wind That Shakes the Barley)은 몇 가지 점에서 랜드 앤 프리덤(Land and Freedom)을 생각나게 합니다. 혁명가 집단 내부의 갈등을 그리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겠지요.

개인적으로는 전작보다는 이번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 좀 더 마음에 들었습니다. 약소민족의 독립투쟁이라는 가슴 뭉클한(?) 소재에다가 무엇보다 저는 아일랜드 가수들을 좋아하거든요. 사실 개인적으로 대부분의 정치 사상에 대해 알레르기가 있다보니 쓸데없이 남의 전쟁에 끼어들어 죽어나가는 랜드 앤드 프리덤의 주인공들은 그다지 호감이 가지 않았습니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서 가장 큰 갈등의 축은 형과 동생인 것 같습니다. 좀 단순하게 분리하면 동생인 데이미언이 좀 더 급진적인 정치성향을 가지고 있지요. 영화 초반만 하더라도 데이미언은 런던에 가서 의사가 되는 것을 아일랜드 독립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청년이지만 갑자기 열렬한 투쟁가로 돌변합니다. 이렇게 급작스럽게 감정의 변화를 일으키는게 좀 어색하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영화 후반부에서 영국과의 협정에 따라 영연방 내의 자치국으로 남는다는 결정이 내려지자 두 형제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전개됩니다. 마치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이 1920년대에 정치사상에 따라 분열돼 갔던 것 과 유사합니다. 이런 독립 운동의 방법론에 따른 분열은 우리에게는 결코 남의 이야기 같이 들리지 않지요.

이렇게 20세기에 들어와서야 민족국가 형성을 시작해야 했던 후발 국가들은 준비 단계에서 부터 골치아픈 내부 투쟁을 겪게 됩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과정을 거쳐 분단되고 결국에는 두 국가로 나뉘어 전쟁을 벌이게 됐지요. 이런 비극은 많은 후발 민족 국가들이 겪는 비극인 것 같습니다. 민족 해방과 계급 해방을 갈등 없이 추진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지요. 이 때문에 우리나라와 중국은 두 체제간의 전쟁을 거쳐 두 국가가 됐고 베트남은 30년에 걸친 긴 내전을 겪어야 했습니다.

심각한 남의 나라 이야기를 보면서 동질감을 느껴 보기는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좀 더 고상한 평을 해 보고는 싶은데 지식이 부족하다 보니 힘들군요. 하핫.

2006년 9월 11일 월요일

영국 본토 방공전 기간 중 영국 공군에 격추된 독일 공군의 구조용 수상기

영국 본토 방공전 기간 중 독일공군은 영국측이 구조용 수상기도 공격한다고 비난한 바 있다. 이것 때문에 그 유명한 괴링 아저씨의 낙하산으로 탈출하는 영국군 조종사를 쏘라는 명령과 여기에 갈란트가 대놓고 대든 일화도 발생했다.

독일측 기록에 따르면 영국 공군이 독일군의 구조용 수상기를 처음 격추시킨 것은 1940년 7월 1일이라고 한다. 영국측은 일단 비행기가 군용 위장무늬를 했고 독일군 마크를 달았기 때문에 군용기로 보고 격추했다고 하는데 뭐, 사실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영국 본토 방공전이 절정에 달했던 1940년 7월부터 9월까지 영국 공군에 격추된 독일 공군의 인명구조용 수상기는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van Ishoven, The Luftwaffe in the Battle of Britain, 32쪽에서 발췌)

격추일시 / 소속부대 / 기종 / 피해 원인

7월 1일 / SK 3 / He59 / 스핏파이어에 격추
7월 9일 / SK 1 / He59 / 스핏파이어에 격추
7월 11일 / SK 1 / He 59 / 기종 불명의 전투기에 격추
7월 20일 / SK 1 / He59 / 허리케인에 격추
7월 20일 / SK 4 / He59 / 허리케인에 격추
7월 25일 / SK 3 / He59 / 허리케인에 격추
7월 28일 / SK 1 / He59 / 허리케인에 격추
7월 28일 / SK 3 / He59 / 허리케인에 격추
8월 8일 / SZ Cherbourg / He59 / 허리케인에 격추
8월 11일 / SZ Cherbourg / He59 / 허리케인에 격추
8월 11일 / SZ Cherbourg / He59 / 블렌하임에 격추
8월 15일 / SK 4 / He59 / 스핏파이어에 격추
8월 23일 / SZ Boulogne / He59 / 영국군에 격추(상세 사항 불명)
8월 23일 / SZ Boulogne / He59 / 영국군에 격추(상세 사항 불명)
8월 26일 / SK 2 / He59 / 스핏파이어에 격추
8월 28일 / SK 3 / He59 / 허리케인에 격추
8월 28일 / SK 3 / He59 / 허리케인에 격추
9월 13일 / SK 3 / He59 / 영국군에 격추(상세 사항 불명)

2006년 9월 3일 일요일

The Military legacy of the Civil War : The European Inheritance by Jay Luvaas

전쟁은 당사자들에게는 고역이지만 제 3자의 입장에서는 매우 흥미로운 관찰 대상이다. 외국의 전쟁은 자국의 교리와 군사 기술에 대해 평가하고 문제점을 개선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유럽의 열강들은 남북전쟁에 큰 관심을 기울였고 북부연방과 남부연합 양측에 많은 수의 무관단을 파견했다. 이 책은 1988년에 발간된 물건인데 남북전쟁 시기 유럽 각국 무관단의 활동과 유럽 열강들이 남북 전쟁에서 얻은 교훈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였는가에 대해 다루고 있다.
저자는 무관단을 파견한 유럽 각국 중 3강이라고 할 수 있는 영국, 독일, 프랑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특히 독일의 경우 20만에 달하는 인원이 연방군에 복무 했고 이들 중 상당수가 귀국해 고급 장교로 진급 했기 때문에 이들이 미국에서 겪은 경험이 이후 독일군의 발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는 매우 흥미로운 내용이다.

저자는 책을 두 부분으로 나눠서 1부는 남북전쟁 시기 영국, 독일, 프랑스 무관단, 혹은 자원병들의 활동에 대해서 다루고 있고 2부는 1870년대 이후 남북전쟁의 교훈이 이들 국가의 교리, 장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를 다루고 있다.
이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독일의 사례이다. 독일의 고급 장교단은 남북전쟁을 아마추어들의 전쟁이라고 폄하했고 철도의 운용 외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동시에 독일인들은 남북전쟁에 참전한 외국인으로는 가장 많았기 때문에 그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 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남북전쟁에 직접 참여한 독일 장교들이 이 전쟁에서 어떤 교훈을 얻었고 이것을 독일의 군사 교리에 어떻게 적용하려고 했는지에 대해서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책의 부록 중에는 남북전쟁을 주제로 한 독일 소설의 주인공이 누구를 모티브로 한 것인가에 대해서 짤막하게 다루고 있는데 꽤 재미있다.

2006년 9월 1일 금요일

루이 14세 - 프랑스 보병의 현대화를 가로 막다

굳이 말 안해도 다들 잘 아시겠지만 성능이 좋은 신무기가 나온다고 하더라도 높은데 계신 분들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말짱 황인 것이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프랑스의 자아도취 지존 루이 14세는 전쟁을 일으키는 것 뿐 아니라 군대에 대한 세부적인 사항까지 챙기는 것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이런 간섭은 늘 긍정적인 결과를 불러오진 않았는데 프랑스 군대가 수발총으로 무장을 교체하는 것이 다른 국가들 보다 뒤졌던 이유 중 하나가 루이 14세의 간섭 때문이라고 한다.

프랑스 군대는 9년 전쟁 이전까지도 각 연대의 척탄병 중대만이 완전히 수발총을 장비 했을 뿐 일반 보병의 수발총 장비는 네덜란드 보다도 뒤지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리슐리외 시기인 1640년대에 수발총을 도입한 것을 감안하면 지독하게 보급이 느렸다고 할 수 있다.

루이 14세가 수발총 보급에 부정적이었던 이유는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 때문이었다고 한다. 1680년대 중반 기준으로 프랑스에서는 수발총의 가격이 16리브르, 기존 머스켓은 9리브르였다. 여기에 루이 14세가 수발총의 신뢰도에 의문을 품고 있었던 점도 한 몫 했으며 전쟁상 루부아가 이런 국왕의 성향에 부채질을 했던 모양이다.
무엇 보다 대규모 육군을 유지하는데 인건비만도 장난이 아니게 들어갔기 때문에 비싼 무기를 대량으로 도입하는 것은 사치로 여겨졌다.
그 결과 일반 보병 중대의 수발총 장비율은 극도로 낮았는데 1670년 편제에 따르면 일반 보병 중대는 수발총 사수가 네 명에 불과했고 이들은 척탄병이었다.

그러다가 9년 전쟁에서 수발총을 대량으로 장비한 적들에게 여러 차례 쓴 맛을 본 뒤에야 뒤늦게 수발총 보급을 늘리라는 명령을 내리게 됐다.

흥미롭게도 프랑스의 골치거리인 영국 또한 수발총의 보급이 상대적으로 느렸는데 1690년대 까지도 영국군 보병의 약 40%는 화승식 머스켓을 장비했다고 한다.

꽤 재미있는 것은 루이 14세가 젊은 시절 무기 설계에 관심이 많아 몇 종류의 머스켓을 직접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부르봉 왕가의 왕들은 다들 손재주가 있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