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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27일 일요일

아른헴, Hartenstein 공수박물관

코블렌츠 구경을 마친 다음 네덜란드로 가기 위해 다시 쾰른으로 왔습니다.

쾰른 중앙역

쾰른에서 ICE를 타니 아른헴까지는 금방이더군요. 잠깐 눈좀 붙였다가 일어나니 아른헴에 도착했습니다.

아른헴 도착!

아른헴 역에 도착해서 호텔을 찿아 보니 싼 방은 모두 나가고 70유로대의 방만 남아 있었습니다. 뭐, 이럴땐 밤 바람을 쐬면서 해 뜨길 기다려야죠;;;;;;


다시 아른헴 역으로 돌아와서 배낭을 집어넣으려고 물품 보관함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아른헴 역의 물품보관함은 독일과 달리 매표소에서 카드를 사서 집어넣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새벽 2시가 되어 역무원들은 퇴근한지 오래됐으니.... 결국 배낭을 매고 밤을 새야 했습니다!

북유럽에서 가장 개념없는 네덜란드의 물품보관소. 매표소에서 카드를 사서 쓰라면 새벽에 도착하는 사람은 어쩌라는 거냐!

어쨌건 배낭을 매고 프로스트 다리(John Frost Bridge)로 가기로 했습니다. 역사적인 장소에서 해뜨는걸 구경하는 것도 좋겠더군요.

프로스트 다리 가는 길에 발견한 아른헴 시가도. 알아보기 좋고 깔끔해서 좋더군요

중간 중간 내리는 비를 피하며 어슬렁 어슬렁 걷다 보니 공수부대광장(Airborne Plein)에 도착했습니다. 이제 프로스트 다리도 멀지 않았네요.



그리고 드디어 프로스트 다리에 도착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다 시피 프로스트 다리는 마켓가든 작전 당시 독일군에 맞서 이 다리를 방어한 프로스트 중령(John Dutton Frost)을 기리기 위해 1978년에 아른헴 대교의 이름을 바꾼 것 입니다.

새벽인데도 돌아다니는 사람이 많더군요

다리를 건너고 나니 겨우 네시를 넘기고 있었습니다. 다리 건너편에서 해가 뜨는걸 구경한 뒤 아른헴 역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AM 04:30

AM 05:50

AM 07:40

AM 08:20

해가 뜨는걸 기다리는데 날씨가 흐려서 아무리 기다려도 해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해를 기다리던 이 어린양은 다리 건너편에서 30군단의 전차들을 기다리던 프로스트 중령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해 뜨길 기다리다간 네덜란드에 눌러 살아야 될 것 같아서 날이 대충 밝자 다시 다리를 건너 아른헴 역 쪽으로 되돌아 갔습니다.

독일군의 공격 방향쪽에서 바라본 아른헴

밤에 보지 못했던 표지판


다시 공수부대광장을 지나서...

아른헴 역에 도착했습니다

아른헴 역에 도착해서 간단히 아침식사를 한 뒤 오스터벡(Oosterbeek)에 있는 공수박물관으로 향했습니다. 기차를 기다리자니 기다리는 시간이 더 걸려서 버스를 탔는데 버스요금이 생각보다 싸더군요!(2유로)

오스터벡 도착!

박물관 가는 길

밤 사이에 비가 산발적으로 내려 땅이 조금 질더군요. 걷기에 불편했습니다. 버스정류장에서 내려서 박물관까지 가는데 인적이 너무 드물어서 썰렁했습니다. 날씨가 좋지 않아서 사람들이 밖으로 잘 안나오는 것 같더군요.

박물관 도착!

오스터벡의 공수박물관은 규모에 비해 매우 유명한 박물관이죠. 마켓가든 작전이 "머나먼 다리"로 유명해 진 덕분인지 이 박물관은 꽤 친숙한 느낌입니다. 이 박물관은 원래 호텔로 마켓가든 작전 당시에는 영국 제 1공수사단의 어콰트(Roy Urquhart) 소장의 지휘소로 사용되었습니다. 박물관 앞에는 셔먼과 17파운드 대전차포를 전시해 놓았더군요.

마켓가든 작전 당시 영국 제 1공수사단장 어콰트 소장

승리의 셔먼! 승리의 셔먼!

17파운드 대전차포. 사진으로 볼 때 보다는 작게 느껴집니다

박물관 정문

박물관은 규모에 비해 전시물이 매우 충실했습니다. 작은 건물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관람객들의 이동 동선을 잘 짜 놓았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저는 실수로 관람순서를 거꾸로 구경했습니다.

어콰트 소장과 참모들


영국군을 환영하는 네덜란드 아가씨~


가장 인상 깊었던 전시물은 야전병원을 재현해 놓은 전시물이었습니다. 비록 모형이지만 피로와 허탈감에 빠진 위생병이나 종군목사의 모습에서 절망적인 분위기를 잘 표현했더군요.



지하에서 관람을 마친 뒤 위로 올라갔습니다. 위층의 전시물은 박물관의 규모 때문에 소화기나 개인 장비, 제복 위주였습니다. 작은 디오라마도 있었는데 그다지 인상적이지는 않더군요. 폴란드 망명정부의 시코르스키 중장의 제복도 전시되어 있었는데 꽤 흥미로웠습니다.

시코르스키 중장의 제복

미 82공수사단의 강하병

네덜란드 망명군 조종사

독일군 마네킹도 흥미로웠습니다. 마켓가든 작전 당시 반격을 위해 투입된 잡다한 종류의 독일군 부대들을 잘 묘사해 놓았더군요. 무장친위대와 일반 육군은 물론이고 공군 지상부대와 해군보병들도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박물관 구경을 마친 뒤 다시 박물관 건물을 찍었습니다.

2008년 2월 9일 토요일

2008년 유럽여행 경과 보고

이번 유럽여행은 19일 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관광 + 답사 + 지름 이라는 3대 과제를 모두 수행해 보자는 과한 욕심을 부린 탓에 좀 어정쩡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리고 제 여행 방식은 대략적인 계획만 세우고 그때 그때의 상황에 맞춰 여행 일정을 탄력적으로 조정하는 편이어서 약간의 돌발 변수도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답사와 서적구매에만 초점을 맞추고 여행을 했다면 훨씬 알찬 여행이 될 수도 있었을 것 같아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제가 구상한 원래의 일정과 실제 여행의 경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2007년 6월 6일 수요일

1차대전 당시 네덜란드의 중립

네덜란드는 1차대전 당시 독일의 침공을 면할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네덜란드가 가진 경제적,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이었습니다. 슐리펜 계획에 따른 보급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네덜란드도 점령해 버리면 편하지만 그렇게 되면 잃어 버리는 것이 더 많았기 때문입니다. 독일군 수뇌부는 전쟁계획을 수립하면서 영국이 중립을 지키지 않는다면 해상봉쇄는 피할 수 없기 때문에 독일의 무역을 위해서라도 대서양의 출입에 용이한 중립국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전쟁이 벌어질 경우 독일과 외부와의 무역을 중개해 줄 수 있는 대서양 국가는 사실상 네덜란드 밖에 없지요. 특히 로테르담은 미국에서 수입하는 밀을 독일로 공급하는 주요 항구였기 때문에 독일로서는 네덜란드와 중립을 유지하는 것이 필수적이었습니다.
독일은 네덜란드가 독일에 우호적인 중립을 지키도록 많은 신경을 썼다고 합니다. 몰트케는 1차대전 발발 이전부터 외교 채널을 통해 독일은 전쟁 시 네덜란드의 중립을 보장할 것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고 하지요. 네덜란드는 벨기에가 독일군의 목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또한 독일의 의도에 대해 많은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고 독일측의 중립 보장은 너무나도 중요했습니다.

전쟁이 발발하자 네덜란드는 독일에 대한 식료품 공급처로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1914년 8월 전쟁이 발발하자 네덜란드 정부는 식량 비축분을 확보하기 위해서 네덜란드에 수입된 곡물을 외국으로 재수출 하는 것을 금지 시켰는데 이때 독일 정부는 즉시 외교적 공갈을 통해 수출 금지 조치를 해제 시켰습니다.
지정학적 위치상 네덜란드는 미국과 독일간의 밀 중개무역을 독점하게 되는데 그 결과 독일은 네덜란드를 통한 식료품 공급에 크게 의존하게 됩니다. 1915년에는 독일이 수입하는 식료품의 50%가 네덜란드를 통해 공급될 정도였다고 하지요. 네덜란드가 1916년에 독일에 수출한 식량은 독일인 120만명이 하루에 3,500칼로리를 섭취할 수 있게 하는 양이었다고 합니다. 독일은 해상봉쇄 때문에 네덜란드는 물론 덴마크, 스위스, 노르웨이, 스웨덴을 통한 식량수입을 늘렸고 네덜란드는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습니다. Marc Frey의 Bullying the Neutrals : The Case of the Netherlands에 따르면 네덜란드는 1914년 1~6월에 독일로 감자 및 밀가루 11,411톤, 버터 7,671톤, 치즈 6,312톤, 달걀 7,868톤, 고기 5,820톤을 수출했는데 이것이 1916년 1~6월에는 각각 51,201톤, 19,026톤, 45,969톤, 20,328톤, 40,248톤으로 증가했다고 합니다.

물론 네덜란드가 이렇게 전략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면서 연합군의 해상봉쇄가 제 역할을 할 수 없게 만드니 영국의 눈치도 안 볼 수는 없었습니다. 네덜란드 외교부는 1916년 11월에 영국 정부에게 독일에 대한 식료품 수출을 늘리는 것은 독일의 침공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영국 정부가 양해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특히 무역에 대한 국가의존도가 높은 만큼 네덜란드가 독일에 대한 무역제제에 동참할 경우 독일 해군이 네덜란드 상선을 공격할 가능성도 높았기 때문에 네덜란드는 영국 측을 설득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영국의 인내심도 한계는 있는지라 영국 정부는 네덜란드 측에 독일에 대한 식량 수출을 50%이상 감축하라는 압력을 가합니다. 여기에 미국이 참전하자 상황은 더욱 꼬이게 됩니다. 미국은 영국보다 한술 더 떠서 독일에 대한 수출을 완전히 금지할 것을 요구합니다. 1917년 10월, 미국이 독일에 대한 무역 금지 요구에 합류하자 네덜란드 정부는 굉장히 골치 아픈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독일은 1916년 말부터 유사시에 대비해 네덜란드를 침공하는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고 네덜란드 역시 독일이 어떤 움직임을 보일지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도 독일은 양면전쟁의 여파로 네덜란드 침공에 투입할 만한 병력을 확보할 수 없어 침공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영국으로 부터의 석탄 공급이 감소했기 때문에 독일의 석탄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다는 점도 독일과의 무역을 계속해야 하는 원인이었습니다.
네덜란드는 미국이 참전한 이후 미국과 영국 양측의 압력에 못 이겨 독일에 대한 수출을 감축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석탄공급을 확보하기 위해서 미국, 영국과의 협상을 통해 독일에 대한 식량 수출을 중단하지는 않았습니다. 네덜란드가 독일에 대한 수출을 완전히 중단한 것은 1918년 9월로 독일의 패전이 확실해 진 뒤 였고 바로 휴전이 이어진 뒤 네덜란드는 다시 독일에 대한 수출을 재개할 수 있었습니다.

1차대전 당시 네덜란드는 융통성있는 외교와 약간의 행운의 덕택으로 중립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미국과 독일을 잇는 중개 무역을 통해 경제적으로도 상당한 이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네덜란드의 금 비축량은 1914년 6월 30일 기준으로 3억620만 굴덴이었는데 1918년 12월 31일에는 10억6890만 굴덴에 달했다고 하지요.

2007년 3월 15일 목요일

독일의 점령지역 산업시설 활용 1939-1945 - 항공산업의 사례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전시 동원과 관련해 자주 논의되는 이야기 중 하나는 1940년 독일이 장악한 서유럽의 공업기반이 독일의 전쟁 수행능력에 어느 정도의 도움을 줬는가 하는 점 입니다.

가장 먼저…

전후 연합국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2차 대전 기간 중 독일에 점령된 국가들이 독일 공군에 공급하기 위해 생산한 항공기는 다음과 같았다고 합니다.

국 가1941194219431944총 계
프랑스626681,2855022,517
체코슬로바키아8195688051,9554,147
네덜란드1675414442947
헝가리0073344417
이탈리아003279111
Richard Overy, The Luftwaffe and the European Economy 1939-1945, Militärgeschichtliche Mitteilungen, 1979/2


통계에도 나타나 있듯 독일이 가장 재미를 본 국가는 체코였습니다. 일단 오스트리아를 제외하면 가장 먼저 독일의 수중에 들어온 산업화된 국가였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제국항공성(RLM) 내에는 체코의 기업들에게는 항공기 완제품 생산대신 부품과 반조립 정도만 맡겨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우데트(Ernst Udet)가 체코의 공업시설 활용을 적극적으로 밀어 붙였기 때문에 이미 1939년 말에 체코의 항공기 제조업체들은 독일공군으로부터 총 1,797대의 항공기 생산을 수주 받습니다. AVIA가 이때의 경험으로 전후에도 Bf 109의 짝퉁(?)을 생산한 것은 유명하지요.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체코의 군수 산업체들은 독일 점령지역에서 가장 생산성이 높고 기여도가 컸다는 점 입니다. 체코의 기술 좋은 노동자들은 비교적 말도 잘 듣고 사보타지에 취미가 없었다지요. 군수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도 경호를 위해 무장 병력을 붙여줘야 했던 유고슬라비아에 비하면 체코는 독일 기업들이 털어먹기 좋은 낙원이었다고 합니다.

슬로바키아는 명색은 독립국이었지만 실제 사정은 옆 동네인 체코와 같아서 거의 일방적으로 독일에 털립니다. 독일의 공군사절단(Luftwaffenmission)은 슬로바키아 정부로부터 국영 항공기 공장의 설립과 운영에 대한 권리를 얻어내는데 사실 이건 반 강제적인 것이었지요. 독일은 슬로바키아 정부에게 슬로바키아의 국영 공장이 생산한 항공기의 75%는 독일 공군이 인수하고 25%만 슬로바키아 공군에 공급한다는 조항을 강요해서 아주 재미를 봅니다.

프랑스의 경우는 꽤 흥미로운 경우입니다.
먼저 독일 점령지역의 공장과 비시 정부 관할 지역의 공장을 다루는 주체가 달랐습니다. 비시 정부 관할 지역은 1943년 점령 이전까지는 스위스, 스웨덴과 함께 중립국으로 분류돼 독일항공산업위원회(DELIKO, Deutsche Luftfahrtindustriekommision)의 담당이었습니다. 반면 독일 점령지역은 제국항공성의 관할하에 있었습니다.
프랑스는 특히 항공기 완성품 뿐 아니라 중간 부품의 공급에도 많은 기여를 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는 유럽 대륙에서는 독일 다음으로 항공 산업이 발달한 나라였기 때문에 많은 독일 기업들이 침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제국항공성이 나서기 전에 기업들이 먼저 작업을 시작했다고 하지요. 많은 수의 항공 기업(특히 융커스)들은 아직 프랑스와의 휴전이 체결되지 않은 상태(즉 이론적인 교전상태)에서 프랑스 기업들과 사업계약을 체결하러 인력을 파견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프랑스는 전체적인 항공기 생산에서는 슬로바키아에 뒤지긴 하지만 독일 공군의 중요한 해외 파트너(?) 였습니다. 1942년 까지 독일 공군과 납품 계약을 체결한 프랑스 기업은 192개사였다고 합니다.(같은 기간 독일 육군은 60개사, 해군은 9개사)
프랑스는 휴전 이후에도 자국 정부를 위해서 항공기 생산을 계속했는데 가끔은 독일이 제 3국에 공여할 목적으로 프랑스제 항공기를 주문하는 경우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1943년에 불가리아 정부는 독일측에게 Dewoitine D.520(도데체 왜 이걸 독일에?) 96대를 구매하겠다는 의사를 타전했는데 무슨 이유인지 이건 취소되고 Bf 109 16대가 공여 됩니다.

폴란드의 경우는 말 그대로 안습 입니다. 국가사회주의 강도단의 두목인 괴링 부터가 폴란드는 산업적으로 가치가 없으며 약탈할 건덕지가 없다고 공언할 정도였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인켈은 크라쿠프에, 융커스는 포즈난에 부품 생산 공장을 확보합니다. 물론 폴란드의 경우 서유럽과 달리 항공기 완성품을 조립할 수 있는 공장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폴란드와 유사한 국가로는 유고슬라비아도 있습니다. 유고슬라비아의 항공 기업들은 독일 점령과 동시에 독일 항공기업들의 자회사로 강제 흡수됩니다. 전쟁 이전 유고슬라비아의 대표적인 항공기업이었던 Aeroput은 루프트한자의 정비공장으로 바뀌고 Rakovica는 융커스의 엔진 부품 공장으로 전환됐다고 합니다.

그러나 독일이 가장 재미를 보지 못한 곳은 이탈리아였습니다.
독일은 이탈리아를 점령한 뒤 이탈리아의 항공기업들을 독일의 항공기 생산에 활용하려 했으나 성과가 매우 시원치 않았다고 하지요. 항공기 생산이 1943년에 32대, 1944년에 79대로 독일의 한달 치 생산도 안 되는 규모였습니다.

독일이 해외의 산업 기반을 활용한 것은 이렇게 외형적으로나마 합법의 탈을 쓴 것도 많았지만 아예 노골적인 약탈로 나가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많았습니다.
먼저 체코슬로바키아가 점령된 다음 접수된 장비와 시설은 불가리아로 매각됐고 폴란드 점령 후 압수된 항공기와 기자재는 루마니아, 불가리아, 스웨덴 등지로 매각, 또는 공여 됐습니다.
독일 공군은 점령지로부터 산업 시설을 인수하는데 필사적이었기 때문에 소련 침공을 앞두고는 제국항공성 내에 산업시설 노획을 위한 조직(Beute-Sonderkommando)를 만들었습니다. 이 조직은 1941년 한 해 동안 소련의 점령 지역내에서 8,400여대의 대형 공작기계를 약탈해서 독일로 보냈다고 합니다.
뭐, 어쨌건 소련도 전쟁이 끝난 뒤 실레지엔과 동프로이센의 기계들을 잔뜩 뜯어 갔으니 피장 파장이려나요?

전체적으로 봤을 때 항공산업 부문만 놓고 보면 독일인들은 2차 대전기간 동안 충분히 재미를 봤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쟁으로 거덜직전까지 가긴 했지만 그것 조차 미국의 경제원조로 피해가니 말 다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