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유럽여행은 19일 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관광 + 답사 + 지름 이라는 3대 과제를 모두 수행해 보자는 과한 욕심을 부린 탓에 좀 어정쩡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리고 제 여행 방식은 대략적인 계획만 세우고 그때 그때의 상황에 맞춰 여행 일정을 탄력적으로 조정하는 편이어서 약간의 돌발 변수도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답사와 서적구매에만 초점을 맞추고 여행을 했다면 훨씬 알찬 여행이 될 수도 있었을 것 같아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제가 구상한 원래의 일정과 실제 여행의 경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2008년 2월 9일 토요일
2008년 2월 7일 목요일
이번 여행에서 구입한 서적들
이번 여행에서 구한 책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익히 잘 아시는 유명한 저작도 있고 약간 오래된 흥미로운 책도 조금 있습니다. 책 소개는 구매한 지역별로 소개 드리겠습니다. 구매한 서점들은 각 서점의 명함이 다른 짐 속에 들어 있어서 아직 꺼내지 못 한 관계로 생략하겠습니다.
뮌헨
뮌헨은 처음 도착한 곳 이지만 책을 사러 돌아다닌 시간에 비해서 성과가 매우 형편없었습니다. 그 덕에 뮌헨 관광도 좀 시시하게 끝난 편 입니다. 뮌헨에서 건진 것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Erwin Pitsch, Italiens griff über die Alpen Die Fliegerangriffe auf Wien und Tirol im 1. Weltkrieg, Karolinger, 1995
: 이 책은 1차대전 당시 이탈리아군의 오스트리아에 본토 공격과 이에 맞선 오스트리아군의 방공전을 분석한 책 입니다. 이 주제만 다룬 단행본으로는 제가 처음 본 것 입니다.
Arthur Rosenberg, Geschichte der Weimarer Republik, Europäische Verlagsanstalt, 1961
: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통사로 같은 종류의 서적 중 꽤 고참(?)에 속하는 놈 입니다. 위의 책과 같은 헌책방에서 팔고 있었는데 값이 1유로라 상식도 넓힐 겸 샀습니다.
Kurt Finker, Der 20. Juli 1944 : Militärputsch oder Revolution?, Dietz Verlag, 1994
: 이건 뮌헨 시청건물 근처의 헌책방에서 샀습니다.
잉골슈타트
잉골슈타트는 시간이 부족해서 잠시 바이에른 육군 박물관 위치나 파악할 겸 새벽에 다녀왔는데 잉골슈타트역 구내서점이 놀랍게도 새벽 5시에 문을 열었습니다! 역 구내서점의 현대사 코너에 군사서적이 몇 권 있었는데 그 중 특가에 파는 놈을 한 권 질렀습니다.
Andre Uzulis, Die Bundeswehr : Eine politische Geschichte von 1955 bis heute, Mittler&Sohn, 2005
: 바로 이놈입니다. 저는 2차대전 이후의 군사안보문제에 대해서는 매우 무지한 편이라 기초 지식을 습득할 겸 샀습니다. 게다가 특가 판매이기도 하고...
뉘른베르크
뉘른베르크는 관광지인 구 시가지를 중심으로 돌아다니느라 도시의 규모에 비해 건진 게 매우 형편없습니다.
Wolfram Wette(Hrsg), Schule der Gewalt : Militarismus in Deutschland 1871 bis 1945, Aufbau Taschenbuch Verlag, 2005
: 구시가 안에 있는 어떤 서점에서 샀습니다. 일반 서점인데 군사사 코너가 책장 두 칸 이더군요. 책이 많다 보니 뭘 사야 할지 혼란스러워 달랑 이것만 샀습니다. 책은 많은데 여행 초반이라 마구 질러대기도 뭐하고 하니 난감하더군요.
베를린
베를린은 주말에 도착했기 때문에 벼룩 시장 좌판 말고는 책 살 곳이 없었습니다. 베를린에서 건진 책은 아래와 같습니다.
Rudolf Lehmann, Die Leibstandarte Band II, Nation Europa, 1995
: 너무나 유명한 책이지요. 저는 돈이 궁해서 이걸 낱권으로 샀는데 그 덕에 빠진 부분이 있었습니다. 베를린의 페르가몬 박물관 옆에 있는 좌판 중에는 군사서적만 전문으로 취급하는 양반이 있는데 이날 그 양반 한테서 2권을 사서 보충했습니다. 표지가 없긴 하지만 책 자체는 거의 새책 수준이더군요. 역시나 책이 널려 있는데 여행 초반이라는 점이 부담으로 작용했습니다. 물론 여행이 끝난 다음 이날의 소심함에 대해 통렬히 반성했지요.
Wilhelm Adam, Der schwere Entschluß, Verlag der Nation, 1965
: 역시 유명한 책 입니다. 원래 2003년에 구입했던 녀석인데 2년 전에 방을 옮기다 이놈만잃어 버렸습니다. 아주 웃기게도 2003년과 2008년 모두 베를린의 똑같은 좌판에서 구입한 놈 입니다. 참 재미있지요. 이 책은 독일 제6군 작전처에서 제 1 작전장교로 있던 아담 대령의 회고록 입니다. 동독에서 나왔는지라 시각이 조금 묘하긴 합니다만 너무 많이 찍어냈는지라 매물이 풍부합니다. 1유로에 샀습니다.
함부르크
함부르크에는 제가 아는 군사 서적 전문점이 두 곳 있습니다. 그러나 역시 책이 많아도 문제더군요. 산더미 같은 책 속에서 뭘 사야 할지 고민하다가 겨우 세 권 건졌습니다.
Klaus Michaelis, 1938 : Krieg gegen die Tschechoslowakei - Der Fall Grün, Michaelis Verlag, 2004
: 주로 무장친위대 서적(자료집에 가까운)을 찍어내는 Michaelis 출판사에서 다소 색다른 책을 찍은 일이 있습니다. 바로 1938년~1939년의 체코 사태를 군사적인 관점에서 조명한 책인데 독일군의 녹색 계획과 이에 대응하는 체코슬로바키아의 군사적 대응책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앞으로 써먹을 곳이 많을 것 같습니다.
Bernd Hartmann, Geschichte des Panzerregiment 5 1935-1943 und der Panzerabteilung 5 1943-1945, Bernd Hartmann, 2003
: 이 책은 좀 난감합니다. 5년전에 못 사서 이번엔 사야지 하고 벼르던 놈인데 이놈을 사고 난 뒤에 증보개정판이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아이고.
Friedrich Stahl(Hrsg), Heereseinteilung 1939, Podzun, 1954
: 상당히 괜찮은 자료집 입니다. 1939년 전쟁 발발 직전 독일 육군 각 부대의 주둔지와 지휘관 내역이 대대급 부대까지 기재된 자료집 입니다. 앞으로 활용도가 매우 높을 것 같습니다.
킬
킬에는 군항 구경을 하러 간 것인데 돌아오는 길에 꽤 쓸만한 헌책방 두 곳을 발견했습니다.
Jagd in Flanderns Himmel, Knorr Hirth, 1935
: 나치 독일 당시 발행된 놈으로 1차대전 당시 JG 1의 부대사 입니다. 상태는 좋은데 오래되서 그런지 제본이 약간 불안합니다.
Leonid Reschin, Feldmarschall Friedrich Paulus im Kreuzverhör 1943-1953, Bechtermünz Verlag, 1996
: 만슈타인의 능수 능란한 책임전가와 6군의 지휘관이었던 이유로 필요 이상의 욕을 얻어 먹는 파울루스의 항복 이후 행적에 대해 다룬 책 입니다. 매우 상태가 좋은 책인데 4유로에 팔더군요.
Peter Reichel, Der schöne Schein des Dritten Reiches : Faszination und Gewalt des Faschismus, Fischer, 1994
: 나치독일의 문화 정책에 대해 다룬 책 입니다. 제가 군사 안보문제에만 관심이 있다 보니 전반적인 사회 문제에 대해서는 깡통인데 책도 산 김에 잘 공부해 볼까 합니다.
Eugen Kogon, Der SS Staat : Das System der deutschen Konzentrationslager, Wilhelm Heyne Verlag, 1974, 1998
: 이젠 나치 독일의 수용소 문제에 대해 거의 고전이 된 저작입니다. 책의 이름만 듣다가 이번에야 비로소 구입했습니다.
브레멘
브레멘 역의 구내서점 역시 군사서적을 많이 팔고 있더군요.
Karl-Heinz Golla, Der Fall Griechenlands 1941, E. S. Mittler & Sohn, 2007
: 예전에 채승병님이 소개해 주신 독일 공수부대 통사의 저자 중 한 명인 Golla가 쓴 그리스 전역에 대한 작전사 입니다.
코블렌츠
코블렌츠에는 제가 여태까지 독일에 본 것 중 가장 막강한 군사서적 전문점이 있었습니다. 여기서도 역시 소심하게 달랑 두 권만 샀습니다. 역시 수많은 책을 대하니 뭘 살지 혼란스럽더군요. 지금 그날의 결정을 뼈저리게 후회하는 중 입니다.
Johann Ritter von Heilmann, Das Kriegwesen der Kaiserlichen und Schweden zur Zeit des dreißigjährigen Krieges, Verlag Heere der Vorgangheit, 1850, 1977
: 이건 진짜 고전이지요. 그동안 다른 서적들의 참고문헌 목록에서만 보다가 이번에 1977년 발행한 판본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글자체가 고딕체이긴 하지만 그럭 저럭 읽을만은 합니다.
Werner Kortenhaus, 21. Panzerdivision 1943-1945, Schneider Armor Research, 2007
: 독일군의 기갑부대사를 열심히 찍어내는 Schneider Armor Research에서 작년 12월에 나온 따끈 따끈한 신작입니다.
빈
빈에서 건진 책은 다음과 같습니다. 빈에는 3일간 체류했는데 비참하게도 좋은 헌책방들을 일요일에 발견하는 경험을 했습니다.
Roland Kaltenegger, Schicksalsweg und Kampf der Bergschuh Division Die Kriegschronik der 7. Gebirgsdivision vormals 99.leichte Infanteriedivision, Leopold Stocker Verlag, 1985
: 산악전에 대한 책을 열심히 찍어내는 Leopold Stocker 출판사에서 80년대에 야심차게 쏟아낸 2차대전 중 독일군 산악부대사 시리즈 중 한 놈 입니다. 저는 이 시리즈 중에서 1, 4 산악사단사 등 두 권을 가지고 있는데 이번에 한 놈 더 늘었습니다.
Horst Adalbert Koch, Die Geschichte der Deutschen Flakartillerie 1935 1945, Podzun
: 이건 같은 출판사가 1954년에 출간한 FLAK의 축약본 입니다. 자료집으로 꽤 쓸만할 듯 싶습니다.
Thomas Chorherr(Hrsg) : 1938 – Anatomie eines Jahres, Ueberreuter, 1987
: 이놈은 토요일에 벼룩시장에서 구했습니다. 오스트리아 병합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Heiy Schön, Ostsee 45 Menschen, Schiffe, Schicksale, Motorbuch Verlag, 1998
: 역시 같은 좌판에서 샀습니다.
Militärwissenschaftlichen Istitute Wien, Die Streitkräfte der Republik Österreich 1918 1968, Militärwissenschaftlichen Istitute Wien, 1968
: 이건 오스트리아 육군박물관이 창군 50주년 기념으로 주최한 전시회와 함께 나온 책 입니다. 독일과의 합병 직전의 오스트리아 육군에 대한 내용이 쓸만한데 좋은 참고가 될 듯 합니다.
원래 이번 여행에는 책을 담을 가방을 따로 가져가려 했는데 정신 없는 와중에 출발하다 보니 그 가방을 집에 두고 갔습니다. 여행 내내 책을 짊어지고 다니는 것이 골치아픈 문제였는데 그 가방만 있었어도 열 권 정도 더 사올 수 있지 않았을까 싶군요.
그리고 독일을 여행 초반 일정으로 잡아 놓은 것은 치명적 실수였습니다. 여행 후반기에 돈이 부족하지나 않을까 걱정하다 보니 지르는데 신중해 지더군요. 다음에 유럽을 돌아다닐 일이 생기면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제일 뒤로 미룰 생각입니다.
뮌헨
뮌헨은 처음 도착한 곳 이지만 책을 사러 돌아다닌 시간에 비해서 성과가 매우 형편없었습니다. 그 덕에 뮌헨 관광도 좀 시시하게 끝난 편 입니다. 뮌헨에서 건진 것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Erwin Pitsch, Italiens griff über die Alpen Die Fliegerangriffe auf Wien und Tirol im 1. Weltkrieg, Karolinger, 1995
: 이 책은 1차대전 당시 이탈리아군의 오스트리아에 본토 공격과 이에 맞선 오스트리아군의 방공전을 분석한 책 입니다. 이 주제만 다룬 단행본으로는 제가 처음 본 것 입니다.
Arthur Rosenberg, Geschichte der Weimarer Republik, Europäische Verlagsanstalt, 1961
: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통사로 같은 종류의 서적 중 꽤 고참(?)에 속하는 놈 입니다. 위의 책과 같은 헌책방에서 팔고 있었는데 값이 1유로라 상식도 넓힐 겸 샀습니다.
Kurt Finker, Der 20. Juli 1944 : Militärputsch oder Revolution?, Dietz Verlag, 1994
: 이건 뮌헨 시청건물 근처의 헌책방에서 샀습니다.
잉골슈타트
잉골슈타트는 시간이 부족해서 잠시 바이에른 육군 박물관 위치나 파악할 겸 새벽에 다녀왔는데 잉골슈타트역 구내서점이 놀랍게도 새벽 5시에 문을 열었습니다! 역 구내서점의 현대사 코너에 군사서적이 몇 권 있었는데 그 중 특가에 파는 놈을 한 권 질렀습니다.
Andre Uzulis, Die Bundeswehr : Eine politische Geschichte von 1955 bis heute, Mittler&Sohn, 2005
: 바로 이놈입니다. 저는 2차대전 이후의 군사안보문제에 대해서는 매우 무지한 편이라 기초 지식을 습득할 겸 샀습니다. 게다가 특가 판매이기도 하고...
뉘른베르크
뉘른베르크는 관광지인 구 시가지를 중심으로 돌아다니느라 도시의 규모에 비해 건진 게 매우 형편없습니다.
Wolfram Wette(Hrsg), Schule der Gewalt : Militarismus in Deutschland 1871 bis 1945, Aufbau Taschenbuch Verlag, 2005
: 구시가 안에 있는 어떤 서점에서 샀습니다. 일반 서점인데 군사사 코너가 책장 두 칸 이더군요. 책이 많다 보니 뭘 사야 할지 혼란스러워 달랑 이것만 샀습니다. 책은 많은데 여행 초반이라 마구 질러대기도 뭐하고 하니 난감하더군요.
베를린
베를린은 주말에 도착했기 때문에 벼룩 시장 좌판 말고는 책 살 곳이 없었습니다. 베를린에서 건진 책은 아래와 같습니다.
Rudolf Lehmann, Die Leibstandarte Band II, Nation Europa, 1995
: 너무나 유명한 책이지요. 저는 돈이 궁해서 이걸 낱권으로 샀는데 그 덕에 빠진 부분이 있었습니다. 베를린의 페르가몬 박물관 옆에 있는 좌판 중에는 군사서적만 전문으로 취급하는 양반이 있는데 이날 그 양반 한테서 2권을 사서 보충했습니다. 표지가 없긴 하지만 책 자체는 거의 새책 수준이더군요. 역시나 책이 널려 있는데 여행 초반이라는 점이 부담으로 작용했습니다. 물론 여행이 끝난 다음 이날의 소심함에 대해 통렬히 반성했지요.
Wilhelm Adam, Der schwere Entschluß, Verlag der Nation, 1965
: 역시 유명한 책 입니다. 원래 2003년에 구입했던 녀석인데 2년 전에 방을 옮기다 이놈만잃어 버렸습니다. 아주 웃기게도 2003년과 2008년 모두 베를린의 똑같은 좌판에서 구입한 놈 입니다. 참 재미있지요. 이 책은 독일 제6군 작전처에서 제 1 작전장교로 있던 아담 대령의 회고록 입니다. 동독에서 나왔는지라 시각이 조금 묘하긴 합니다만 너무 많이 찍어냈는지라 매물이 풍부합니다. 1유로에 샀습니다.
함부르크
함부르크에는 제가 아는 군사 서적 전문점이 두 곳 있습니다. 그러나 역시 책이 많아도 문제더군요. 산더미 같은 책 속에서 뭘 사야 할지 고민하다가 겨우 세 권 건졌습니다.
Klaus Michaelis, 1938 : Krieg gegen die Tschechoslowakei - Der Fall Grün, Michaelis Verlag, 2004
: 주로 무장친위대 서적(자료집에 가까운)을 찍어내는 Michaelis 출판사에서 다소 색다른 책을 찍은 일이 있습니다. 바로 1938년~1939년의 체코 사태를 군사적인 관점에서 조명한 책인데 독일군의 녹색 계획과 이에 대응하는 체코슬로바키아의 군사적 대응책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앞으로 써먹을 곳이 많을 것 같습니다.
Bernd Hartmann, Geschichte des Panzerregiment 5 1935-1943 und der Panzerabteilung 5 1943-1945, Bernd Hartmann, 2003
: 이 책은 좀 난감합니다. 5년전에 못 사서 이번엔 사야지 하고 벼르던 놈인데 이놈을 사고 난 뒤에 증보개정판이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아이고.
Friedrich Stahl(Hrsg), Heereseinteilung 1939, Podzun, 1954
: 상당히 괜찮은 자료집 입니다. 1939년 전쟁 발발 직전 독일 육군 각 부대의 주둔지와 지휘관 내역이 대대급 부대까지 기재된 자료집 입니다. 앞으로 활용도가 매우 높을 것 같습니다.
킬
킬에는 군항 구경을 하러 간 것인데 돌아오는 길에 꽤 쓸만한 헌책방 두 곳을 발견했습니다.
Jagd in Flanderns Himmel, Knorr Hirth, 1935
: 나치 독일 당시 발행된 놈으로 1차대전 당시 JG 1의 부대사 입니다. 상태는 좋은데 오래되서 그런지 제본이 약간 불안합니다.
Leonid Reschin, Feldmarschall Friedrich Paulus im Kreuzverhör 1943-1953, Bechtermünz Verlag, 1996
: 만슈타인의 능수 능란한 책임전가와 6군의 지휘관이었던 이유로 필요 이상의 욕을 얻어 먹는 파울루스의 항복 이후 행적에 대해 다룬 책 입니다. 매우 상태가 좋은 책인데 4유로에 팔더군요.
Peter Reichel, Der schöne Schein des Dritten Reiches : Faszination und Gewalt des Faschismus, Fischer, 1994
: 나치독일의 문화 정책에 대해 다룬 책 입니다. 제가 군사 안보문제에만 관심이 있다 보니 전반적인 사회 문제에 대해서는 깡통인데 책도 산 김에 잘 공부해 볼까 합니다.
Eugen Kogon, Der SS Staat : Das System der deutschen Konzentrationslager, Wilhelm Heyne Verlag, 1974, 1998
: 이젠 나치 독일의 수용소 문제에 대해 거의 고전이 된 저작입니다. 책의 이름만 듣다가 이번에야 비로소 구입했습니다.
브레멘
브레멘 역의 구내서점 역시 군사서적을 많이 팔고 있더군요.
Karl-Heinz Golla, Der Fall Griechenlands 1941, E. S. Mittler & Sohn, 2007
: 예전에 채승병님이 소개해 주신 독일 공수부대 통사의 저자 중 한 명인 Golla가 쓴 그리스 전역에 대한 작전사 입니다.
코블렌츠
코블렌츠에는 제가 여태까지 독일에 본 것 중 가장 막강한 군사서적 전문점이 있었습니다. 여기서도 역시 소심하게 달랑 두 권만 샀습니다. 역시 수많은 책을 대하니 뭘 살지 혼란스럽더군요. 지금 그날의 결정을 뼈저리게 후회하는 중 입니다.
Johann Ritter von Heilmann, Das Kriegwesen der Kaiserlichen und Schweden zur Zeit des dreißigjährigen Krieges, Verlag Heere der Vorgangheit, 1850, 1977
: 이건 진짜 고전이지요. 그동안 다른 서적들의 참고문헌 목록에서만 보다가 이번에 1977년 발행한 판본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글자체가 고딕체이긴 하지만 그럭 저럭 읽을만은 합니다.
Werner Kortenhaus, 21. Panzerdivision 1943-1945, Schneider Armor Research, 2007
: 독일군의 기갑부대사를 열심히 찍어내는 Schneider Armor Research에서 작년 12월에 나온 따끈 따끈한 신작입니다.
빈
빈에서 건진 책은 다음과 같습니다. 빈에는 3일간 체류했는데 비참하게도 좋은 헌책방들을 일요일에 발견하는 경험을 했습니다.
Roland Kaltenegger, Schicksalsweg und Kampf der Bergschuh Division Die Kriegschronik der 7. Gebirgsdivision vormals 99.leichte Infanteriedivision, Leopold Stocker Verlag, 1985
: 산악전에 대한 책을 열심히 찍어내는 Leopold Stocker 출판사에서 80년대에 야심차게 쏟아낸 2차대전 중 독일군 산악부대사 시리즈 중 한 놈 입니다. 저는 이 시리즈 중에서 1, 4 산악사단사 등 두 권을 가지고 있는데 이번에 한 놈 더 늘었습니다.
Horst Adalbert Koch, Die Geschichte der Deutschen Flakartillerie 1935 1945, Podzun
: 이건 같은 출판사가 1954년에 출간한 FLAK의 축약본 입니다. 자료집으로 꽤 쓸만할 듯 싶습니다.
Thomas Chorherr(Hrsg) : 1938 – Anatomie eines Jahres, Ueberreuter, 1987
: 이놈은 토요일에 벼룩시장에서 구했습니다. 오스트리아 병합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Heiy Schön, Ostsee 45 Menschen, Schiffe, Schicksale, Motorbuch Verlag, 1998
: 역시 같은 좌판에서 샀습니다.
Militärwissenschaftlichen Istitute Wien, Die Streitkräfte der Republik Österreich 1918 1968, Militärwissenschaftlichen Istitute Wien, 1968
: 이건 오스트리아 육군박물관이 창군 50주년 기념으로 주최한 전시회와 함께 나온 책 입니다. 독일과의 합병 직전의 오스트리아 육군에 대한 내용이 쓸만한데 좋은 참고가 될 듯 합니다.
원래 이번 여행에는 책을 담을 가방을 따로 가져가려 했는데 정신 없는 와중에 출발하다 보니 그 가방을 집에 두고 갔습니다. 여행 내내 책을 짊어지고 다니는 것이 골치아픈 문제였는데 그 가방만 있었어도 열 권 정도 더 사올 수 있지 않았을까 싶군요.
그리고 독일을 여행 초반 일정으로 잡아 놓은 것은 치명적 실수였습니다. 여행 후반기에 돈이 부족하지나 않을까 걱정하다 보니 지르는데 신중해 지더군요. 다음에 유럽을 돌아다닐 일이 생기면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제일 뒤로 미룰 생각입니다.
2008년 1월 13일 일요일
산업화된 전쟁의 비산업적 요소 : 독일육군의 마필 사용 1939~1942
2차 대전당시의 독일 육군이 마필에 수송수단을 크게 의존했다는 사실은 너무나 유명하니 좀 식상한 이야기 입니다. 그렇지만 2차대전 당시 독일군의 마필 사용은 그 규모의 방대함에서 매우 흥미로운 사례입니다. 산업화된 전쟁에서 산업화와는 거리가 먼 말 이라는 동물 조차도 전쟁의 규모에 걸맞게 대량으로 사용되고 소모된다는 점이 꽤 재미있더군요.
독일이 2차대전에 돌입한 1939년 9월에 독일 육군이 보유한 마필은 약 59만 마리였습니다. 비록 오스트리아 병합과 체코슬로바키아 합병으로 대규모의 마필이 입수되긴 했지만 전쟁 발발과 함께 신규부대 편성이 대규모로 이뤄지면서 마필의 입수는 상당히 골치아픈 일이 되고 있었습니다. 이 당시 독일 육군의 1개 보병사단은 약 4,800필 정도의 말을 필요로 하고 있었는데 당시 독일군의 1개월 보충량으로는 3개 사단 정도의 소요량을 맞추는 정도에 그쳤다고 합니다. 다행히 폴란드 전은 단시일 내에 종결되었고 독일군은 아주 쓸만한 말 공급처를 확보하게 됐습니다. 1940년 초부터 폴란드는 독일군에 1주일 평균 4,000마리의 말을 공급하기 시작했습니다.
1940년의 서부전역은 비교적 단기일에 끝났지만 이 짧은 기간 동안 많은 기동이 이뤄진 까닭에 마필의 소모가 컸습니다. 제 4군의 경우 1940년 5월 10일 말 52,700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프랑스 전역이 종결될 무렵에는 44,000마리로 줄어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부 전역이 순식간에 종결되면서 독일군은 폴란드에 이어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라는 새로운 말 공급처를 얻게 됩니다.
독일의 다음 목표는 소련이었는데 소련은 독일군의 기계화 부대는 물론 말들에게도 매우 어려운 도전이 되었습니다. 독일군은 바르바로사 작전을 위해 625,000마리의 말을 동원했으며 이 중 13만 마리는 중부집단군의 주력 야전군인 제 4군에 소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소련 전장은 독일군의 말들에게는 아주 지독한 곳이 되었습니다. 넓은 땅 만큼이나 신속한 진격이 거듭되다 보니 보급로는 길어지고 이것은 말 사료의 전방 추진을 어렵게 했습니다. 폴란드와 서유럽산의 덩치 큰 말들은 독일군의 철제 달구지와 보병사단의 주력인 105mm 포를 견인할 만큼 튼튼했지만 동시에 먹어대는 사료의 양도 엄청났습니다. 사료 추진이 제때 되지 않으니 픽픽쓰러지는 말들이 매우 많았고 그 숫자는 소련 깊숙이 진격할수록 늘어났습니다. 독일군의 마필 손실 중 폐사는 1941년 7월 1일부터 7월 10일까지는 2,839마리였는데 8월 1일부터 8월 10일에는 9,847마리로 급증했습니다. 마필의 보충은 인력과 장비의 보충 만큼이나 더뎠는데 7월 1일~10일 기간 동안 폐사 2,839마리, 부상 및 질병 9,442마리 등 총 12,281마리를 상실하는 동안 보충된 것은 1,500마리에 불과했습니다.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어 11월 1일부터 10일 사이에는 폐사 11,605마리, 부상 및 질병 7,991마리에 보충은 1,700마리로 마필의 상황은 크게 악화되어 보병사단들이 제대로 보급추진을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됐습니다. 겨울로 접어들면서 말의 손실은 더욱 높아졌고 독일군의 수의 부대는 질병에 걸리거나 쇠약해진 말들이 급증해 기능이 마비될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보통 야전군급 수의부대는 최대 550마리의 말을 치료할 수 있었는데 41년 겨울이 되면 2,000마리에서 많게는 3,000마리 이상을 치료해야 했다고 합니다.
물론 소련군으로 부터도 많은 말을 노획했고 현지 징발로도 보충이 가능하긴 했지만 문제는 러시아산 말은 튼튼하기는 했으나 폴란드와 서유럽산 말들에 비해 덩치가 작고 체력이 떨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러시아산 말들은 독일군의 표준형 철제 달구지를 끌 수 없었기 때문에 러시아 농촌에서 사용하는 전통적인 목재 달구지를 사용해야 했는데 이것은 보통 독일군용 달구지보다 수송량이 적었다고 합니다. 러시아산 말로 105mm포를 견인하려면 포 1문당 더 많은 말이 필요했습니다.
독일군은 1942년 공세를 준비하면서 동부전선으로 보낼 약 21만 마리의 보충용 말을 징발했고 이 중 109,000 마리가 1942년 5월 1일까지 전선에 도착했습니다. 마필의 보충은 서부전선으로 이동하는 사단들로부터 인계받는 방식으로도 이뤄졌는데 전차와 같은 중장비처럼 서부전선으로 이동하는 부대들은 보유한 마필을 전선에 있는 부대에 넘겨주고 이동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2년 하계전역 개시당시 평균적인 보병사단들의 마필 보유량은 3,000마리 선에 그쳤다고 합니다. 다른 장비와 물자처럼 말 또한 동부전선의 지독한 소모전 앞에서는 배겨낼 재주가 없었고 일선 부대의 말 보유량은 계속 줄어듭니다. 1944년 봄에 가면 보병사단 1개의 평균 마필 보유량은 2,000마리 선으로 떨어진다고 하지요.
독일이 2차대전에 돌입한 1939년 9월에 독일 육군이 보유한 마필은 약 59만 마리였습니다. 비록 오스트리아 병합과 체코슬로바키아 합병으로 대규모의 마필이 입수되긴 했지만 전쟁 발발과 함께 신규부대 편성이 대규모로 이뤄지면서 마필의 입수는 상당히 골치아픈 일이 되고 있었습니다. 이 당시 독일 육군의 1개 보병사단은 약 4,800필 정도의 말을 필요로 하고 있었는데 당시 독일군의 1개월 보충량으로는 3개 사단 정도의 소요량을 맞추는 정도에 그쳤다고 합니다. 다행히 폴란드 전은 단시일 내에 종결되었고 독일군은 아주 쓸만한 말 공급처를 확보하게 됐습니다. 1940년 초부터 폴란드는 독일군에 1주일 평균 4,000마리의 말을 공급하기 시작했습니다.
1940년의 서부전역은 비교적 단기일에 끝났지만 이 짧은 기간 동안 많은 기동이 이뤄진 까닭에 마필의 소모가 컸습니다. 제 4군의 경우 1940년 5월 10일 말 52,700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프랑스 전역이 종결될 무렵에는 44,000마리로 줄어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부 전역이 순식간에 종결되면서 독일군은 폴란드에 이어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라는 새로운 말 공급처를 얻게 됩니다.
독일의 다음 목표는 소련이었는데 소련은 독일군의 기계화 부대는 물론 말들에게도 매우 어려운 도전이 되었습니다. 독일군은 바르바로사 작전을 위해 625,000마리의 말을 동원했으며 이 중 13만 마리는 중부집단군의 주력 야전군인 제 4군에 소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소련 전장은 독일군의 말들에게는 아주 지독한 곳이 되었습니다. 넓은 땅 만큼이나 신속한 진격이 거듭되다 보니 보급로는 길어지고 이것은 말 사료의 전방 추진을 어렵게 했습니다. 폴란드와 서유럽산의 덩치 큰 말들은 독일군의 철제 달구지와 보병사단의 주력인 105mm 포를 견인할 만큼 튼튼했지만 동시에 먹어대는 사료의 양도 엄청났습니다. 사료 추진이 제때 되지 않으니 픽픽쓰러지는 말들이 매우 많았고 그 숫자는 소련 깊숙이 진격할수록 늘어났습니다. 독일군의 마필 손실 중 폐사는 1941년 7월 1일부터 7월 10일까지는 2,839마리였는데 8월 1일부터 8월 10일에는 9,847마리로 급증했습니다. 마필의 보충은 인력과 장비의 보충 만큼이나 더뎠는데 7월 1일~10일 기간 동안 폐사 2,839마리, 부상 및 질병 9,442마리 등 총 12,281마리를 상실하는 동안 보충된 것은 1,500마리에 불과했습니다.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어 11월 1일부터 10일 사이에는 폐사 11,605마리, 부상 및 질병 7,991마리에 보충은 1,700마리로 마필의 상황은 크게 악화되어 보병사단들이 제대로 보급추진을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됐습니다. 겨울로 접어들면서 말의 손실은 더욱 높아졌고 독일군의 수의 부대는 질병에 걸리거나 쇠약해진 말들이 급증해 기능이 마비될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보통 야전군급 수의부대는 최대 550마리의 말을 치료할 수 있었는데 41년 겨울이 되면 2,000마리에서 많게는 3,000마리 이상을 치료해야 했다고 합니다.
물론 소련군으로 부터도 많은 말을 노획했고 현지 징발로도 보충이 가능하긴 했지만 문제는 러시아산 말은 튼튼하기는 했으나 폴란드와 서유럽산 말들에 비해 덩치가 작고 체력이 떨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러시아산 말들은 독일군의 표준형 철제 달구지를 끌 수 없었기 때문에 러시아 농촌에서 사용하는 전통적인 목재 달구지를 사용해야 했는데 이것은 보통 독일군용 달구지보다 수송량이 적었다고 합니다. 러시아산 말로 105mm포를 견인하려면 포 1문당 더 많은 말이 필요했습니다.
독일군은 1942년 공세를 준비하면서 동부전선으로 보낼 약 21만 마리의 보충용 말을 징발했고 이 중 109,000 마리가 1942년 5월 1일까지 전선에 도착했습니다. 마필의 보충은 서부전선으로 이동하는 사단들로부터 인계받는 방식으로도 이뤄졌는데 전차와 같은 중장비처럼 서부전선으로 이동하는 부대들은 보유한 마필을 전선에 있는 부대에 넘겨주고 이동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2년 하계전역 개시당시 평균적인 보병사단들의 마필 보유량은 3,000마리 선에 그쳤다고 합니다. 다른 장비와 물자처럼 말 또한 동부전선의 지독한 소모전 앞에서는 배겨낼 재주가 없었고 일선 부대의 말 보유량은 계속 줄어듭니다. 1944년 봄에 가면 보병사단 1개의 평균 마필 보유량은 2,000마리 선으로 떨어진다고 하지요.
2007년 10월 30일 화요일
독일육군의 흑역사 - 1938년 오스트리아 병합시의 사례
1938~1939년 시기에 실시된 육군의 대규모 기동은 어느 나라나 엉망이었던 것 같습니다. 소련이 폴란드 침공을 앞두고 실시한 동원에서 벌인 삽질은 특히 전설의 경지에 다다른 것 이지요. 그런데 그럭저럭 정예로 간주되는 독일군도 평시의 기동에서 삽질을 한 사례가 있으니 그것은 그 유명한 오스트리아 합병 당시의 기동입니다.
뭐, 사실 3월 10일 이전까지 독일육군은 제대로 된 오스트리아 진주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 일이 제대로 풀리는게 더 이상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건 총통의 명령을 받은 당시 육군참모총장 베크(Ludwig Beck)는 다시 자신의 똘마니(?)인 작전의 천재 만슈타인에게 총통의 명령을 하달합니다. 그러나 역시 천재는 천재인지 이 황당한 명령을 받은 만슈타인은 3월 10일 오후에 동원 및 기동계획을 거의 완성하는 재주를 부립니다. 그리고 베크는 만슈타인의 계획에 따라 이날 늦게 보크(Fedor von Bock)를 오스트리아로 진격할 제8군 사령관에 임명합니다.
이렇게 해서 보크가 지휘할 제 8군은 예하에 다음과 같은 병력을 배속 받았습니다.
제7군단 : 제7보병사단, 제27보병사단, 제25기갑연대 1대대, 제1산악사단
제13군단 : 제10보병사단, 제17보병사단
제16차량화군단 : 제2기갑사단, SS-VT
군직할 : 헤르만괴링연대, 제97향토사단(Landwehr-division)
그리고 제8군은 이틀 뒤인 12일에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게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이 시기의 독일군은 팽창기에 있는지라 인력, 특히 장교와 부사관이 부족했습니다. 이 때문에 오스트리아로 진격할 부대들을 편성하는 것이 상당한 문제였습니다.
먼제 제8군의 예하 부대들을 통제할 통신부대인 제507통신연대는 히틀러가 동원령을 내린 지 6일 뒤에야 편성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또 제16차량화군단의 직할 의무부대는 동원 5일차에야 집결지에 도착할 수 있었으며 소집명령을 받고 집결지에 도착한 예비역들은 소속부대를 찾지 못해 우왕좌왕하고 있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제97향토사단의 한 연대의 경우 동원 1일차에 부대에 제대로 도착한 장교는 단 한명 뿐이었다고 합니다. 동원계획 이라는게 만슈타인이 반나절 만에 뚝딱 완성한 것이었으니 혼란이 없었다면 거짓말 이었겠지요. 오스트리아로 진주할 부대들을 편성하고 있던 제13군관구(Wehrkreis)의 경우 60먹은 노인들에게 소집영장을 발부하는 황당한 착오도 범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제빵병들이 포병부대로 배치되거나 보병사단의 수색대에 배치된 병사가 말을 탈 줄 모르는 등 동원소집은 시작부터 엉망이었습니다. 제1산악사단의 경우 4개 대대는 전혀 투입할 수 없는 상태였으며 이 사단의 사단장은 최소한 14일은 걸려야 동원된 예비역들을 쓸만하게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인력 뿐 아니라 장비 상태도 엉망이었습니다. 제2기갑사단이 동원명령을 받고 사단 소속의 전차들을 점검했을 때 무려 30% 이상이 가동불능 이거나 수리를 요하는 상태였습니다. 여기에 제8군 전체를 통틀어 2,800대의 차량이 부족했습니다. 주력인 육군의 상태가 개판이었기 때문에 당시만 해도 2선급으로 취급받던 SS-VT나 헤르만괴링연대는 구할 수 있는 운송수단을 닥치는대로 긁어 모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문제는 여기서 그치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엉망진창으로 동원이 계속되고 있던 3월 12일 오전 08시, 그런대로 동원이 완료된 부대들이 국경을 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행군은 개판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로 진입하는 몇 안되는 도로에 여러 사단 소속의 부대들이 뒤죽박죽으로 굴러들어가니 행군은 시작부터 엉망이었습니다. 제10보병사단과 제2기갑사단은 사단 예하 지원부대 없이 전투부대만 먼저 출발했고 제7보병사단은 행군 도중 사단 전체가 대대 단위로 분해되어 버렸습니다. 심한 경우 같은 사단 소속의 부대들이 10km 이상 씩 떨어져 버려 행군 도중 사단들이 뒤섞이는 사례가 다반사였습니다.
그렇지만 독일군의 고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제2기갑사단은 국경의 집결지까지 이동할 연료는 있었는데 그 이후의 연료는 준비하지 않은 상태로 국경을 넘었습니다. 제8군 사령부는 4일 뒤에야 제2기갑사단에 충분한 연료를 보급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사단이 보유한 전차 중 39대가 빈으로 진격하는 도중 고장나서 길바닥에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보병사단들은 황급히 징발한 늙은 말들이 보급품 수레나 야포를 견인하지 못해 골탕을 먹었습니다. 많은 군사사가들이 지적하듯 만약 오스트리아군이 조금이라도 저항을 했다면 독일군은 심각한 곤란에 직면했을 것 입니다.
행군이 엉망으로 꼬여버렸기 때문에 헌병도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이 됐습니다. 독일군 내에서는 이 난감한 상황을 교통의 무질서(Verkehrsanarchie)라고 불렀다지요. 3월 14일이 되면 이 혼란은 극에 달합니다. 제10보병사단의 경우 각 보병연대간의 간격이 60km(!!!!)에 달했고 포병이나 기타 직할대는 마지막 보병연대의 훨씬 후방에서 따라오는 지경이었습니다. 제10보병사단은 하루 평균 43km를 행군했지만 이 속도는 사단이 전투부대로서 대형을 유지했을 때나 의미가 있는 것 이었습니다. 이 사단의 직할대들은 160km 후방에서 도로 정체에 시달리며 어떻게든 전진하려 했지만 이미 혼란한 상황을 통제할 능력을 잃은 사단사령부는 뒤에 처진 사단직할대는 거의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이 참상을 목도한 제13군단 사령부가 제10사단의 직할대들을 철도로 수송해 볼까 했지만 철도는 제27보병사단을 수송하는 것 때문에 만원이었습니다. 결국 제10보병사단의 직할대들은 오스트리아 병합이 끝날 때 까지 본대와 합류하지 못 했다고 합니다.(;;;;;)
제7보병사단은 하루당 최저 15km의 속도로 전진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단 전체가 분해되어 선두의 대대는 제10보병사단의 사이에 끼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참다 못한 사단장은 군사령부에게 하루 동안 행군을 정지하고 부대를 수습하겠다고 요청했습니다.
예비역들을 대규모로 보충받은 제1산악사단은 나이먹은 예비역들이 행군도중 줄줄이 뻗어나가는 통에 행군이 엉망으로 변했습니다. 제100산악연대의 경우 오스트리아로 진입한 첫날에만 40%에 달하는 예비역들이 행군으로 나가떨어지는 참극(?!?!)을 연출했습니다.
오스트리아 진주는 엉망진창으로 진행됐고 군사적으로는 재앙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이 독일군을 환영했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독일군은 더 난처한 상황에 처했을지도 모릅니다. 빈 주재 이탈리아 무관이 독일군의 행군을 관찰한 뒤 “행군군기가 결여돼 있다”라고 평가한 것은 독일군에게는 망신살이 뻗치는 일 이었을 겁니다.
뭐, 사실 3월 10일 이전까지 독일육군은 제대로 된 오스트리아 진주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 일이 제대로 풀리는게 더 이상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건 총통의 명령을 받은 당시 육군참모총장 베크(Ludwig Beck)는 다시 자신의 똘마니(?)인 작전의 천재 만슈타인에게 총통의 명령을 하달합니다. 그러나 역시 천재는 천재인지 이 황당한 명령을 받은 만슈타인은 3월 10일 오후에 동원 및 기동계획을 거의 완성하는 재주를 부립니다. 그리고 베크는 만슈타인의 계획에 따라 이날 늦게 보크(Fedor von Bock)를 오스트리아로 진격할 제8군 사령관에 임명합니다.
이렇게 해서 보크가 지휘할 제 8군은 예하에 다음과 같은 병력을 배속 받았습니다.
제7군단 : 제7보병사단, 제27보병사단, 제25기갑연대 1대대, 제1산악사단
제13군단 : 제10보병사단, 제17보병사단
제16차량화군단 : 제2기갑사단, SS-VT
군직할 : 헤르만괴링연대, 제97향토사단(Landwehr-division)
그리고 제8군은 이틀 뒤인 12일에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게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이 시기의 독일군은 팽창기에 있는지라 인력, 특히 장교와 부사관이 부족했습니다. 이 때문에 오스트리아로 진격할 부대들을 편성하는 것이 상당한 문제였습니다.
먼제 제8군의 예하 부대들을 통제할 통신부대인 제507통신연대는 히틀러가 동원령을 내린 지 6일 뒤에야 편성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또 제16차량화군단의 직할 의무부대는 동원 5일차에야 집결지에 도착할 수 있었으며 소집명령을 받고 집결지에 도착한 예비역들은 소속부대를 찾지 못해 우왕좌왕하고 있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제97향토사단의 한 연대의 경우 동원 1일차에 부대에 제대로 도착한 장교는 단 한명 뿐이었다고 합니다. 동원계획 이라는게 만슈타인이 반나절 만에 뚝딱 완성한 것이었으니 혼란이 없었다면 거짓말 이었겠지요. 오스트리아로 진주할 부대들을 편성하고 있던 제13군관구(Wehrkreis)의 경우 60먹은 노인들에게 소집영장을 발부하는 황당한 착오도 범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제빵병들이 포병부대로 배치되거나 보병사단의 수색대에 배치된 병사가 말을 탈 줄 모르는 등 동원소집은 시작부터 엉망이었습니다. 제1산악사단의 경우 4개 대대는 전혀 투입할 수 없는 상태였으며 이 사단의 사단장은 최소한 14일은 걸려야 동원된 예비역들을 쓸만하게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인력 뿐 아니라 장비 상태도 엉망이었습니다. 제2기갑사단이 동원명령을 받고 사단 소속의 전차들을 점검했을 때 무려 30% 이상이 가동불능 이거나 수리를 요하는 상태였습니다. 여기에 제8군 전체를 통틀어 2,800대의 차량이 부족했습니다. 주력인 육군의 상태가 개판이었기 때문에 당시만 해도 2선급으로 취급받던 SS-VT나 헤르만괴링연대는 구할 수 있는 운송수단을 닥치는대로 긁어 모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문제는 여기서 그치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엉망진창으로 동원이 계속되고 있던 3월 12일 오전 08시, 그런대로 동원이 완료된 부대들이 국경을 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행군은 개판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로 진입하는 몇 안되는 도로에 여러 사단 소속의 부대들이 뒤죽박죽으로 굴러들어가니 행군은 시작부터 엉망이었습니다. 제10보병사단과 제2기갑사단은 사단 예하 지원부대 없이 전투부대만 먼저 출발했고 제7보병사단은 행군 도중 사단 전체가 대대 단위로 분해되어 버렸습니다. 심한 경우 같은 사단 소속의 부대들이 10km 이상 씩 떨어져 버려 행군 도중 사단들이 뒤섞이는 사례가 다반사였습니다.
그렇지만 독일군의 고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제2기갑사단은 국경의 집결지까지 이동할 연료는 있었는데 그 이후의 연료는 준비하지 않은 상태로 국경을 넘었습니다. 제8군 사령부는 4일 뒤에야 제2기갑사단에 충분한 연료를 보급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사단이 보유한 전차 중 39대가 빈으로 진격하는 도중 고장나서 길바닥에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보병사단들은 황급히 징발한 늙은 말들이 보급품 수레나 야포를 견인하지 못해 골탕을 먹었습니다. 많은 군사사가들이 지적하듯 만약 오스트리아군이 조금이라도 저항을 했다면 독일군은 심각한 곤란에 직면했을 것 입니다.
행군이 엉망으로 꼬여버렸기 때문에 헌병도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이 됐습니다. 독일군 내에서는 이 난감한 상황을 교통의 무질서(Verkehrsanarchie)라고 불렀다지요. 3월 14일이 되면 이 혼란은 극에 달합니다. 제10보병사단의 경우 각 보병연대간의 간격이 60km(!!!!)에 달했고 포병이나 기타 직할대는 마지막 보병연대의 훨씬 후방에서 따라오는 지경이었습니다. 제10보병사단은 하루 평균 43km를 행군했지만 이 속도는 사단이 전투부대로서 대형을 유지했을 때나 의미가 있는 것 이었습니다. 이 사단의 직할대들은 160km 후방에서 도로 정체에 시달리며 어떻게든 전진하려 했지만 이미 혼란한 상황을 통제할 능력을 잃은 사단사령부는 뒤에 처진 사단직할대는 거의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이 참상을 목도한 제13군단 사령부가 제10사단의 직할대들을 철도로 수송해 볼까 했지만 철도는 제27보병사단을 수송하는 것 때문에 만원이었습니다. 결국 제10보병사단의 직할대들은 오스트리아 병합이 끝날 때 까지 본대와 합류하지 못 했다고 합니다.(;;;;;)
제7보병사단은 하루당 최저 15km의 속도로 전진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단 전체가 분해되어 선두의 대대는 제10보병사단의 사이에 끼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참다 못한 사단장은 군사령부에게 하루 동안 행군을 정지하고 부대를 수습하겠다고 요청했습니다.
예비역들을 대규모로 보충받은 제1산악사단은 나이먹은 예비역들이 행군도중 줄줄이 뻗어나가는 통에 행군이 엉망으로 변했습니다. 제100산악연대의 경우 오스트리아로 진입한 첫날에만 40%에 달하는 예비역들이 행군으로 나가떨어지는 참극(?!?!)을 연출했습니다.
오스트리아 진주는 엉망진창으로 진행됐고 군사적으로는 재앙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이 독일군을 환영했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독일군은 더 난처한 상황에 처했을지도 모릅니다. 빈 주재 이탈리아 무관이 독일군의 행군을 관찰한 뒤 “행군군기가 결여돼 있다”라고 평가한 것은 독일군에게는 망신살이 뻗치는 일 이었을 겁니다.
2007년 2월 24일 토요일
1차 대전 동부전선의 전쟁포로
2차 대전 당시의 동부전선은 서부전선에 비해 그 영향력이 과소 평가되는 경향이 강하다고 이야기 돼 왔습다만 탄넨베르크 전투나 브루실로프 공세 같은 몇몇 전투를 제외하면 그다지 언급되지 않는 1차 대전의 동부전선에 비하면 양반인 셈입니다. 오죽하면 독일애들이 1차 대전 당시의 동부전역을 Die vergessene Front라고 하겠습니까.
2차 대전 당시의 동부전선도 엄청난 인력과 물량이 동원된 전장이었지만 1차 대전 당시의 동부전선도 규모가 크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1차 대전 동안 포로가 된 교전국들의 군인이 약 900만 명인데 이 중 대략 500만 명이 동부전선에서 발생한 포로라고 하니까요.
무엇보다 2차 대전당시에는 주로 소련측의 포로가 압도적으로 많이 잡힌데 비해 1차 대전당시에는 대규모 육군을 보유했으나 전투력은 부실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있었기 때문에 양측이 모두 사이 좋게 많은 포로를 잡았다는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1차 대전 당시 동부전선의 전황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전체적으로 독일-오스트리아군이 계속해서 승리를 거두면서 우세를 보이지만 간간히 러시아군의 강력한 반격도 이어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는 서로 승리와 패배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난타전의 양상을 보이고 있고 독일은 거의 일방적으로 승리만을 거두는 형국입니다.
이렇다 보니 포로의 비율을 보면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가 서로 비슷한 규모로 엄청난 포로를 내고 있고 독일은 상대적으로 극히 적은 포로만을 내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러시아군은 1918년 초까지 독일에 240만 명, 오스트리아-헝가리에 186만 명, 그리고 오스만투르크와 불가리아에 3만~4만명이 포로로 잡힌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독일은 17만 명, 오스트리아-헝가리가 185만 명, 오스만투르크와 불가리아 두 나라가 합쳐서 8만 명 가량이 러시아군의 포로가 됐습니다. 오스트리아는 근소한 차로 적자를 면했고 오스만투르크와 불가리아는 적자를 낸 셈이군요.
이 중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주목할 만한 점은 전쟁 초-중반에 엄청나게 많은 포로를 발생시켰다는 것 입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전체 포로 중 73만 명은 개전 첫 1년에 잡힌 것이고 1915년 12월까지 포로 숫자는 97만 명으로 늘어납니다. 즉 1년 만에 전체 포로의 50%가 발생한 것 입니다. 1916년 6월의 브루실로프 공세에서 38만의 포로가 발생한 것을 제외하면 전쟁 후기에는 포로가 되는 숫자는 크게 감소합니다. 하긴, 초반에 원체 많이 잡히다 보니 1916년 이후가 되면 더 잡힐 만큼의 병력도 없었다지요.
※ 브루실로프 공세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것은 당시 러시아측의 보고서에는 포로가 19만으로 돼 있다는 것 입니다. 1차 대전 연구자들은 이렇게 된 원인이 러시아측의 포로 집계가 잘못된 것 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위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독일-러시아간의 대결에서는 독일이 꾸준하게 승리를 거두면서 적당히(?) 많은 숫자의 포로를 잡고 있습니다. 간단히 1914-1915년 전역, 즉 1914년 탄넨베르크 전투부터 1915년의 제 2차 마주리아 호수 전투까지 여러 차례의 전투가 적당한 사례가 되겠습니다. 독일군은 탄넨베르크에서 10만, 1차 마주리아 호수 전투에서 3만, 2차 마주리아 호수 전투에서 9만2천명의 포로를 잡았습니다. 상당한 성과이긴 하지만 결정타를 먹이지는 못해서 러시아군은 계속 밀려나면서도 붕괴되지 않고 저항을 하지요.
반면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의 대결은 그야말로 난타전의 표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전쟁 초기인 1914년 9월의 갈리치아 전역에서 10만에 달하는 포로를 냈다고 하지요. 그리고 1915년 1월~2월에 걸쳐 프세미우(Przemysl) 구원을 위해 감행한 공격에서는 러시아군 6만을 생포했지만 오스트리아군도 4만(!)의 포로를 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3월 23일 프세미우가 함락되면서 11만9천명의 포로가 발생했습니다. 하지만 다시 독일군이 증원된 뒤 갈리치아에서 벌어진 5월 전역에서는 러시아가 포로만 14만에 달하는 패배를 당합니다. 이건 뭐 난장판이 따로 없군요.
이렇게 난타전이 벌어지면 인구가 부족한 쪽이 결정적으로 부족한데 1차 대전 당시에는 오스트리아가 바로 그런 꼴이었습니다. 특히 1914-1915년 전역에서 숙련된 장교와 부사관을 대규모로 잃어 버렸다는 점은 오스트리아의 전쟁 역량을 결정적으로 약화 시켰습니다. 1915년 중반부터 대규모로 투입된 속성으로 양성한 장교단은 대학물을 너무 많이 먹어서인지 전쟁 이전의 직업군인들에 비해 체제에 대한 충성심이 부족한 편이었다지요.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다민족 국가라는 점 때문에 특히 포로가 더 많이 발생했습니다. 브루실로프 공세 당시 체코인으로 편성된 제 8보병사단은 사단전체가 항복해 버려 마치 2차 대전당시 소련군 소속의 에스토니아인 부대의 이야기를 연상시킵니다. 특히 체코계 부대는 “슬라브 형제”들과 싸우는 것을 별로 선호하는 편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헝가리나 크로아티아계 국민을 제외하면 전쟁에 별다른 열의가 없었다고 하지요. 슬라브계 국민들은 오히려 러시아에 더 친근감을 느낄 정도였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 입니다.
더 흥미로운 점은 러시아인을 증오하는 폴란드인 역시 강대국의 전쟁에 목숨을 내던지는 것은 별로 선호하지 않았다는 점 입니다. 독일이 1916년에 “해방(?)” 시킨 폴란드 지역에서 러시아와 싸울 의용병을 모집했을 때 당초 목표는 1917년 상반기 까지 폴란드 인으로 15개 보병사단을 편성하는 것 이었는데 지원자는 동부 폴란드 전역에서 4천명을 약간 넘는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폴란드인의 입장에서는 독일인이나 러시아인이나 그놈이 그놈 이었겠지요.
이런 강대국들간의 난타전 말고도 루마니아와 같은 어중간한 나라의 흥미로운 사례도 있습니다. 루마니아는 1916년 9월 헝가리를 침공했다가 바로 독일-오스트리아 연합군의 반격으로 박살이 나는데 독일군의 11월 공세에서 루마니아군은 14만명의 포로 외에도 그냥 집으로 돌아간 병사가 9만명에 달해 말 그대로 군대가 분해돼 버렸다고 전해집니다.(한편, 같은 기간 루마니아군의 전사자는 14,000명이었다고 합니다.) 이후 루마니아군은 사실상 증발해 버리고 러시아군이 루마니아에 들어와 독일군과 싸우는 양상으로 전개가 됩니다.
전쟁포로의 처우는 아주 개판이었습니다. “서부전선 이상없다”에는 독일에 포로가 된 러시아 포로들의 비참한 모습이 짧지만 인상적으로 묘사돼 있습니다. 그렇지만 러시아에 포로가 된 독일, 오스트리아 포로에 비하면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 잡힌 러시아 포로는 “아주 약간” 나은 편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1914/15년 겨울과 1915/16년 겨울에 유행한 티푸스로 러시아군에 포로가 된 인원 중 30만 명이 사망했고 이 외에도 강제노동으로 인한 사망자도 엄청났습니다. 무르만스크 철도 공사에서는 2만5천명이 중노동과 영양실조로 사망했습니다.
동부전선에서 이렇게 대규모의 포로가 발생한 것은 양측 모두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먼저 오스트리아는 1916년 여름이 되자 전쟁 수행능력을 거의 상실해 더 이상 대규모 공세작전을 펼칠 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에 따라 독일에 의존하는 경향이 더욱 강해지지요. 러시아는 다들 잘 아시다시피 짜르 체제가 붕괴돼 버리죠.
이런 것을 볼 때 2차 대전당시 소련이 1차 대전당시의 러시아보다 더 짧은 기간동안 더 많은 손실을 입고도 전쟁에 승리한 것을 보면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2차 대전 때도 짜르 체제였다면 러시아는 1941년에 전쟁에 졌을지도 모릅니다.
참고서적
Holger Herwig, The first world war : Germany and Austria-Hungary 1914-1918, Arnold, 1997
Reinhard Nachtigal, Die Kriegsgefangenen-verluste an der Ostfront, Die vergessene Front – Der Osten 1914/1915, Schoningh, 2006
Dennis E. Showalter, Tannenberg : Clash of Empires, Brassey’s, 2004
Norman Stone, The Eastern Front 1914-1917, Penguin Books, 1998
2차 대전 당시의 동부전선도 엄청난 인력과 물량이 동원된 전장이었지만 1차 대전 당시의 동부전선도 규모가 크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1차 대전 동안 포로가 된 교전국들의 군인이 약 900만 명인데 이 중 대략 500만 명이 동부전선에서 발생한 포로라고 하니까요.
무엇보다 2차 대전당시에는 주로 소련측의 포로가 압도적으로 많이 잡힌데 비해 1차 대전당시에는 대규모 육군을 보유했으나 전투력은 부실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있었기 때문에 양측이 모두 사이 좋게 많은 포로를 잡았다는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1차 대전 당시 동부전선의 전황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전체적으로 독일-오스트리아군이 계속해서 승리를 거두면서 우세를 보이지만 간간히 러시아군의 강력한 반격도 이어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는 서로 승리와 패배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난타전의 양상을 보이고 있고 독일은 거의 일방적으로 승리만을 거두는 형국입니다.
이렇다 보니 포로의 비율을 보면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가 서로 비슷한 규모로 엄청난 포로를 내고 있고 독일은 상대적으로 극히 적은 포로만을 내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러시아군은 1918년 초까지 독일에 240만 명, 오스트리아-헝가리에 186만 명, 그리고 오스만투르크와 불가리아에 3만~4만명이 포로로 잡힌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독일은 17만 명, 오스트리아-헝가리가 185만 명, 오스만투르크와 불가리아 두 나라가 합쳐서 8만 명 가량이 러시아군의 포로가 됐습니다. 오스트리아는 근소한 차로 적자를 면했고 오스만투르크와 불가리아는 적자를 낸 셈이군요.
이 중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주목할 만한 점은 전쟁 초-중반에 엄청나게 많은 포로를 발생시켰다는 것 입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전체 포로 중 73만 명은 개전 첫 1년에 잡힌 것이고 1915년 12월까지 포로 숫자는 97만 명으로 늘어납니다. 즉 1년 만에 전체 포로의 50%가 발생한 것 입니다. 1916년 6월의 브루실로프 공세에서 38만의 포로가 발생한 것을 제외하면 전쟁 후기에는 포로가 되는 숫자는 크게 감소합니다. 하긴, 초반에 원체 많이 잡히다 보니 1916년 이후가 되면 더 잡힐 만큼의 병력도 없었다지요.
※ 브루실로프 공세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것은 당시 러시아측의 보고서에는 포로가 19만으로 돼 있다는 것 입니다. 1차 대전 연구자들은 이렇게 된 원인이 러시아측의 포로 집계가 잘못된 것 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위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독일-러시아간의 대결에서는 독일이 꾸준하게 승리를 거두면서 적당히(?) 많은 숫자의 포로를 잡고 있습니다. 간단히 1914-1915년 전역, 즉 1914년 탄넨베르크 전투부터 1915년의 제 2차 마주리아 호수 전투까지 여러 차례의 전투가 적당한 사례가 되겠습니다. 독일군은 탄넨베르크에서 10만, 1차 마주리아 호수 전투에서 3만, 2차 마주리아 호수 전투에서 9만2천명의 포로를 잡았습니다. 상당한 성과이긴 하지만 결정타를 먹이지는 못해서 러시아군은 계속 밀려나면서도 붕괴되지 않고 저항을 하지요.
반면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의 대결은 그야말로 난타전의 표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전쟁 초기인 1914년 9월의 갈리치아 전역에서 10만에 달하는 포로를 냈다고 하지요. 그리고 1915년 1월~2월에 걸쳐 프세미우(Przemysl) 구원을 위해 감행한 공격에서는 러시아군 6만을 생포했지만 오스트리아군도 4만(!)의 포로를 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3월 23일 프세미우가 함락되면서 11만9천명의 포로가 발생했습니다. 하지만 다시 독일군이 증원된 뒤 갈리치아에서 벌어진 5월 전역에서는 러시아가 포로만 14만에 달하는 패배를 당합니다. 이건 뭐 난장판이 따로 없군요.
이렇게 난타전이 벌어지면 인구가 부족한 쪽이 결정적으로 부족한데 1차 대전 당시에는 오스트리아가 바로 그런 꼴이었습니다. 특히 1914-1915년 전역에서 숙련된 장교와 부사관을 대규모로 잃어 버렸다는 점은 오스트리아의 전쟁 역량을 결정적으로 약화 시켰습니다. 1915년 중반부터 대규모로 투입된 속성으로 양성한 장교단은 대학물을 너무 많이 먹어서인지 전쟁 이전의 직업군인들에 비해 체제에 대한 충성심이 부족한 편이었다지요.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다민족 국가라는 점 때문에 특히 포로가 더 많이 발생했습니다. 브루실로프 공세 당시 체코인으로 편성된 제 8보병사단은 사단전체가 항복해 버려 마치 2차 대전당시 소련군 소속의 에스토니아인 부대의 이야기를 연상시킵니다. 특히 체코계 부대는 “슬라브 형제”들과 싸우는 것을 별로 선호하는 편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헝가리나 크로아티아계 국민을 제외하면 전쟁에 별다른 열의가 없었다고 하지요. 슬라브계 국민들은 오히려 러시아에 더 친근감을 느낄 정도였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 입니다.
더 흥미로운 점은 러시아인을 증오하는 폴란드인 역시 강대국의 전쟁에 목숨을 내던지는 것은 별로 선호하지 않았다는 점 입니다. 독일이 1916년에 “해방(?)” 시킨 폴란드 지역에서 러시아와 싸울 의용병을 모집했을 때 당초 목표는 1917년 상반기 까지 폴란드 인으로 15개 보병사단을 편성하는 것 이었는데 지원자는 동부 폴란드 전역에서 4천명을 약간 넘는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폴란드인의 입장에서는 독일인이나 러시아인이나 그놈이 그놈 이었겠지요.
이런 강대국들간의 난타전 말고도 루마니아와 같은 어중간한 나라의 흥미로운 사례도 있습니다. 루마니아는 1916년 9월 헝가리를 침공했다가 바로 독일-오스트리아 연합군의 반격으로 박살이 나는데 독일군의 11월 공세에서 루마니아군은 14만명의 포로 외에도 그냥 집으로 돌아간 병사가 9만명에 달해 말 그대로 군대가 분해돼 버렸다고 전해집니다.(한편, 같은 기간 루마니아군의 전사자는 14,000명이었다고 합니다.) 이후 루마니아군은 사실상 증발해 버리고 러시아군이 루마니아에 들어와 독일군과 싸우는 양상으로 전개가 됩니다.
전쟁포로의 처우는 아주 개판이었습니다. “서부전선 이상없다”에는 독일에 포로가 된 러시아 포로들의 비참한 모습이 짧지만 인상적으로 묘사돼 있습니다. 그렇지만 러시아에 포로가 된 독일, 오스트리아 포로에 비하면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 잡힌 러시아 포로는 “아주 약간” 나은 편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1914/15년 겨울과 1915/16년 겨울에 유행한 티푸스로 러시아군에 포로가 된 인원 중 30만 명이 사망했고 이 외에도 강제노동으로 인한 사망자도 엄청났습니다. 무르만스크 철도 공사에서는 2만5천명이 중노동과 영양실조로 사망했습니다.
동부전선에서 이렇게 대규모의 포로가 발생한 것은 양측 모두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먼저 오스트리아는 1916년 여름이 되자 전쟁 수행능력을 거의 상실해 더 이상 대규모 공세작전을 펼칠 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에 따라 독일에 의존하는 경향이 더욱 강해지지요. 러시아는 다들 잘 아시다시피 짜르 체제가 붕괴돼 버리죠.
이런 것을 볼 때 2차 대전당시 소련이 1차 대전당시의 러시아보다 더 짧은 기간동안 더 많은 손실을 입고도 전쟁에 승리한 것을 보면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2차 대전 때도 짜르 체제였다면 러시아는 1941년에 전쟁에 졌을지도 모릅니다.
참고서적
Holger Herwig, The first world war : Germany and Austria-Hungary 1914-1918, Arnold, 1997
Reinhard Nachtigal, Die Kriegsgefangenen-verluste an der Ostfront, Die vergessene Front – Der Osten 1914/1915, Schoningh, 2006
Dennis E. Showalter, Tannenberg : Clash of Empires, Brassey’s, 2004
Norman Stone, The Eastern Front 1914-1917, Penguin Books, 1998
2007년 1월 29일 월요일
1차대전 이전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민족문제
Sonnet님이 쓰신 최근 레바논 현황에 대한 글을 보니 다음의 구절이 눈에 쏙 들어왔습니다.
확실히 민족, 정파 구성이 복잡한 국가에서 멀쩡한 단일 통치체제를 확립하는 것은 어려운 과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런 문제는 19세기 민족주의의 창궐 이후 여러 국가들을 엿 먹였지요.
근대 민족주의의 최대 피해자라면 역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제국과 오스만 제국을 꼽을 수 있을 것 입니다. 두 국가 모두 민족주의가 제국이 붕괴되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지요.
그래서 다인종으로 구성된 국가의 문제점을 언급할 때 많이 언급되는 사례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제국이 항상 끼는 것도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제국은 당장 큼지막한 덩어리로 쪼개더라도 독일인, 헝가리인, 폴란드인, 체코인, 슬로바키아인, 크로아티아인, 루테니아인 등으로 나뉘고 발칸 반도의 그저 그런(?) 민족들 까지 넣으면 더욱 더 골치가 아파집니다.
민족 구성이 복잡했던 덕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제국의 군대에서는 사용 언어가 명령어(Kommandosprache)와 직무어(Dienstsprache), 그리고 지휘 및 통신용 언어로 나뉘고 있었습니다. 제국의 신민들 중 상당수가 황제폐하가 사용하시는 Deutsch를 한마디도 할 줄 몰랐으니 당연한 결과였을 것 입니다.
명령어, 그리고 지휘 및 부대간 통신 언어는 독일어였지만 직무어는 민족별로 차이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빈이나 짤즈부르크 등에서 편성되는 독일인 부대의 경우 명령어와 직무어가 모두 독일어 였지만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인 부대는 명령어는 독일어, 직무어는 헝가리어, 크로아티아어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Erwin A. Schmidl의 짧은 에세이, Die k.u.k Armee : intergrierendes Element eines zerfallenden Staates? 에는 1차대전 발발 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육군 참모부에서 각 부대별 사용 언어를 조사한 결과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때의 조사에 따르면 오스트리아-헝가리 육군의 각 연대 및 독립대대 중 단일 언어를 사용하는 부대는 142개 였고 2개의 언어를 사용하는 부대는 163개, 그리고 3개 이상의 언어를 사용하는 부대가 24개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런 경향은 국경지대, 혹은 민족별 접경지역에서 심했는데 예를 들어 프세미시우(Przemysl) 10보병연대는 연대 병력 중 47%가 루테니아어, 43%가 폴란드어, 10%가 기타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고 66보병연대는 46%가 슬로바키아어, 25%가 헝가리어(magyarische), 22%가 루테니아어, 7%가 기타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경우 부사관의 임무에는 병사들 간의 ‘통역’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고 하며 또 전쟁이전 임관한 장교들은 배치된 연대의 공식어를 배워야 했다고 합니다.
언어에 따른 지휘계통상의 문제가 기술적인 것 이었다면 민족주의는 그 자체로 아주 골치 아픈 물건이었습니다. 평화시에 입대한 직업군인 장교나 부사관들은 민족에 상관없이 황제에 충성하는 편 이었지만 전쟁이 발발하고 소집된 장교나 부사관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전쟁 기간 중 대학생이나 아비투어 합격자는 장교로 소집됐는데 이들 중 많은 수는 대학에서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은 채 들어왔다는 점 입니다. 당연히 많은 수가 말도 안통하는 황제에게 충성할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대학생이나 아비투어 합격자의 20%가 유대인이었다는 점 도 문제였습니다. 유대인은 민족을 불문하고 경멸과 혐오의 대상이었죠. 유대인들이 장교로 충원되니 반유대정서를 가지고 있는 병사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 지는 뻔 했습니다.
결국 이런 사회적인 문제는 군대의 편제, 교리, 장비 만큼이나 전쟁 초-중반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연달아 참패를 당하는 원인으로 작용합니다. 러시아군의 공세가 개시되면 폴란드나 체코인 부대는 대규모로 항복해 버렸다고 하지요.
그러나 sonnet님의 중동문제에 대한 글들을 계속 보다 보니 21세기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대신 레바논같은 나라의 이야기를 하는 쪽이 더 좋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어쨌든, 대한민국 군대에 민족문제가 없다는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지역 문제가 있다고는 해도 최소한 경상도 말이나 전라도 말이 서로 못 알아먹을 수준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럭저럭 균질적인 사회구성을 가진 덕에 이런 저런 문제가 많아도 국가가 유지되는게 아닐까 가끔씩 생각해 봅니다.
레바논 정부군의 병사들은 각각 소속 종파를 찾아 탈영했다. 슈프 산악지대에서는 드루즈파가 팔랑헤당을 무참히 부수었다. 이스라엘군과 레바논 정부군이 지원하지 않으면 팔랑헤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미 해병대가 재건한 레바논 정부와 정부군은 와해되고 있었다.
확실히 민족, 정파 구성이 복잡한 국가에서 멀쩡한 단일 통치체제를 확립하는 것은 어려운 과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런 문제는 19세기 민족주의의 창궐 이후 여러 국가들을 엿 먹였지요.
근대 민족주의의 최대 피해자라면 역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제국과 오스만 제국을 꼽을 수 있을 것 입니다. 두 국가 모두 민족주의가 제국이 붕괴되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지요.
그래서 다인종으로 구성된 국가의 문제점을 언급할 때 많이 언급되는 사례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제국이 항상 끼는 것도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제국은 당장 큼지막한 덩어리로 쪼개더라도 독일인, 헝가리인, 폴란드인, 체코인, 슬로바키아인, 크로아티아인, 루테니아인 등으로 나뉘고 발칸 반도의 그저 그런(?) 민족들 까지 넣으면 더욱 더 골치가 아파집니다.
민족 구성이 복잡했던 덕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제국의 군대에서는 사용 언어가 명령어(Kommandosprache)와 직무어(Dienstsprache), 그리고 지휘 및 통신용 언어로 나뉘고 있었습니다. 제국의 신민들 중 상당수가 황제폐하가 사용하시는 Deutsch를 한마디도 할 줄 몰랐으니 당연한 결과였을 것 입니다.
명령어, 그리고 지휘 및 부대간 통신 언어는 독일어였지만 직무어는 민족별로 차이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빈이나 짤즈부르크 등에서 편성되는 독일인 부대의 경우 명령어와 직무어가 모두 독일어 였지만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인 부대는 명령어는 독일어, 직무어는 헝가리어, 크로아티아어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Erwin A. Schmidl의 짧은 에세이, Die k.u.k Armee : intergrierendes Element eines zerfallenden Staates? 에는 1차대전 발발 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육군 참모부에서 각 부대별 사용 언어를 조사한 결과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때의 조사에 따르면 오스트리아-헝가리 육군의 각 연대 및 독립대대 중 단일 언어를 사용하는 부대는 142개 였고 2개의 언어를 사용하는 부대는 163개, 그리고 3개 이상의 언어를 사용하는 부대가 24개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런 경향은 국경지대, 혹은 민족별 접경지역에서 심했는데 예를 들어 프세미시우(Przemysl) 10보병연대는 연대 병력 중 47%가 루테니아어, 43%가 폴란드어, 10%가 기타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고 66보병연대는 46%가 슬로바키아어, 25%가 헝가리어(magyarische), 22%가 루테니아어, 7%가 기타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경우 부사관의 임무에는 병사들 간의 ‘통역’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고 하며 또 전쟁이전 임관한 장교들은 배치된 연대의 공식어를 배워야 했다고 합니다.
언어에 따른 지휘계통상의 문제가 기술적인 것 이었다면 민족주의는 그 자체로 아주 골치 아픈 물건이었습니다. 평화시에 입대한 직업군인 장교나 부사관들은 민족에 상관없이 황제에 충성하는 편 이었지만 전쟁이 발발하고 소집된 장교나 부사관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전쟁 기간 중 대학생이나 아비투어 합격자는 장교로 소집됐는데 이들 중 많은 수는 대학에서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은 채 들어왔다는 점 입니다. 당연히 많은 수가 말도 안통하는 황제에게 충성할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대학생이나 아비투어 합격자의 20%가 유대인이었다는 점 도 문제였습니다. 유대인은 민족을 불문하고 경멸과 혐오의 대상이었죠. 유대인들이 장교로 충원되니 반유대정서를 가지고 있는 병사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 지는 뻔 했습니다.
결국 이런 사회적인 문제는 군대의 편제, 교리, 장비 만큼이나 전쟁 초-중반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연달아 참패를 당하는 원인으로 작용합니다. 러시아군의 공세가 개시되면 폴란드나 체코인 부대는 대규모로 항복해 버렸다고 하지요.
그러나 sonnet님의 중동문제에 대한 글들을 계속 보다 보니 21세기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대신 레바논같은 나라의 이야기를 하는 쪽이 더 좋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어쨌든, 대한민국 군대에 민족문제가 없다는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지역 문제가 있다고는 해도 최소한 경상도 말이나 전라도 말이 서로 못 알아먹을 수준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럭저럭 균질적인 사회구성을 가진 덕에 이런 저런 문제가 많아도 국가가 유지되는게 아닐까 가끔씩 생각해 봅니다.
2006년 12월 21일 목요일
David Irving 석방
영국의 조갑제(?) 데이빗 어빙이 석방됐다는 소식입니다.
작년 11월에 체포됐으니 1년 만이군요.
오스트리아에서 체포된 뒤 한동안 여러 극우 단체에서 석방 활동을 펴는 통에 심지어 저같은 Untermensch에게도 석방을 위한 기금 모금 메일이 온 적이 있었다지요.
그러나 저러나 이 양반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기존의 견해를 바꾸게 됐다고 말했는데 과연 앞으로 무슨 소리를 하려는지?
작년 11월에 체포됐으니 1년 만이군요.
오스트리아에서 체포된 뒤 한동안 여러 극우 단체에서 석방 활동을 펴는 통에 심지어 저같은 Untermensch에게도 석방을 위한 기금 모금 메일이 온 적이 있었다지요.
그러나 저러나 이 양반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기존의 견해를 바꾸게 됐다고 말했는데 과연 앞으로 무슨 소리를 하려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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