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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월 17일 금요일

체코슬로바키아가 이스라엘에 판매하려 한 9톤 전차는???

잡동사니들을 정리하다가 예전에 이면지에 중동전쟁에 관해 끄적거린 것을 하나 찾았습니다. Uri Bialer가 Journal of Strategic Studies 8-3에 기고한 "The Czech-Israeli Arms Deal Revisited에 나오는 내용이 이해가 안가서 따로 메모를 해 놓은것 이었는데 체코슬로바키아가 이스라엘에 기갑차량을 판매하려 한 내용이었습니다.

이 논문 308쪽에는 벤구리온의 1948년 5월 말의 일기에서 인용한 내용이 실려 있는데 체코슬로바키아 정부가 이스라엘 측에 30대의 16톤 전차와 20대의 9톤 전차를 판매하려는 제안을 했다는 것 입니다. 16톤 전차는 대략 체코슬로바키아가 생산하고 있던 헤처, 즉 ST-1이 맞는데 문제는 9톤 전차라는 녀석의 정체가 뭐냐 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때에도 9톤 전차의 정체를 몰라서 나중에 찾아 보자하고 덮어 놨는데 다시 보게 되는군요.

그래서 예전의 메모를 다시 보게 된 김에 혹시나 하고 구글링을 해 봤는데 뭔가 마땅한 후보가 보이지 않습니다. Uri Bialer가 벤 구리온의 일기를 잘못 번역해서 장갑차량을 일괄적으로 Tank로 옮긴 것이라면 다른 후보를 생각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2008년 6월 19일 목요일

북한의 전후 복구에 대한 "사회주의 형제국가"들의 지원

비록 북한인민들이 (전후복구에) 엄청난 노력을 쏳아 넣었다지만 "사회주의형제국가"들의 원조가 없었다면 신속한 전후복구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 이미 1952년 11월 경부터 북한의 전후 복구를 위한 다국적 원조계획의 윤곽은 잡혀있었다. 1953년 9월 1일부터 29일까지 김일성이 이끄는 북한대표단은 경제원조를 요청하기 위해 소련을 방문했다. 소련은 북한의 부채 중 절반을 탕감했으며 나머지 절반의 지불도 연기시켰다. 또한 소련은 북한에게 10억루블에 달하는 무상원조를 제공하기로 했다. 총 60만 루블에 달하는 원조가 물자와 설비의 형태로 제공되었으며 나머지는 공장의 재건과 시설설비에 투입되었다. 특히 후자에는 청진, 성진, 남포의 주물공장과 흥남의 화학공장, 수풍의 수력발전소, 마동의 시멘트공장, 평양의 섬유공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소련은 양덕-청성간의 철도를 전력화 하는 것과 남포항의 복구, 평양 중앙 라디오 방송국을 건설하는 것을 지원했으며 평양에 병원 하나를 직접 운영하기도 했다. 또한 북한은 소련으로부터 어선, 버스, 농업기계, 화학비료, 과학서적, 그밖의 소비재를 원조 받았다.
소련 기술자들은 북한에서 그들의 조선인 동료들이 받는 것과 동일한 월급을 받으며 근무했다. 물론 이것은 그들의 노동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것이었기 때문에 나머지는 소련 대사관이 지급했다. 전체적으로 소련 기술자들은 북한인 기술자에 비해 네 배의 월급을 받았다. 또한 소련 기술자들은 북한의 외국인 상점을 이용하기 위해서 위안화를 별도로 지급받았다.

김일성은 (1953년) 11월 12일에서 27일에 걸쳐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 소련정부와 체결했던 것과 같은 조약을 체결했다. 베이징 정부는 한국전쟁 이래 누적된 북한의 채무를 모두 탕감하고 8조 위안에 달하는 경제원조를 제공하기로 했다. 1954년에 북한은 중국으로부터 3조 위안의 원조를 받았으며 이 중 76.14퍼센트는 물자지원, 그리고 23.86%는 재정지원이었다. 중국은 남포의 유리 공장과 한 개의 철물 공장을 포함해 몇 개의 공장을 재건하는 것을 도왔다.
또한 북한에 주둔하고 있던 인민해방군 부대는 북한의 노동력 부족을 완화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예를 들어 인민해방군 병사들은 전쟁 기간 중 파괴된 북한의 외무성 건물과 중앙은행건물을 다시 건설하는데 투입되었으며 철도와 교량, 도로의 보수공사에도 참여했다. 1954년에 총 295명에 달하는 중국인 기술자들이 북한의 공장을 건설하기 위해서 북한에 체류했으며 동시에 2,963명의 북한 기술자들이 실무경험을 쌓기 위해 중국으로 1년 기간의 연수를 떠났다. 중국은 북한에 여러 가지의 기계와 어선, 기관차, 화차, 건축 자재, 그리고 면화를 제공했다. 1950년대 중반에 중국은 북한에 있어 가장 중요한 소비재 공급처였다. 조선인민군 병사들은 중국제 군복을 입었으며 북한의 상점과 백화점에서는 중국제 의류, 방한복, 셔츠, 양말, 속옷, 운동화, 식기, 세면도구등을 판매했다.

1953년 말에 북한정부는 동유럽국가들, 그리고 몽골을 상대로 중국과 맺었던 것과 비슷한 조약을 체결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휘천과 운산에 기계 생산공장을, 덕천에 자동차 공장을 한 개 건설하기로 했다. 그리고 동독은 인쇄소, 디젤엔진공장, 제철소를 건설하기로 했다. 또 폴란드 정부는 원산과 평양에 기관차 및 화차 수리 공장을 건설하는 것과 북한의 광산 세 곳을 기계화 하는데 지원하기로 했다. 헝가리는 구성, 평양, 봉궁에 기계 공장, 저울공장, 페인트 공장을 건설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루마니아는 북한에게 시멘트공장, 제약공장, 어선, 기계류 등 6500만 루블에 해당하는 원조를 제공하기로 했다. 불가리아는 1954년에서 1955년에 걸쳐 2000만 루블의 원조를 했다. 불가리아는 북한에 섬유와 판유리를 보내는 한편 벽돌공장과 제제소에 한 곳에 장비를 제공하기로 했다. 1954년부터 1956년에 걸쳐 동유럽 국가들은 북한에 총 11억3400만 루블에 해당하는 원조를 했다.

게다가 몽골정부도 스스로가 해외 원조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입장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북조선의 재건을 위해 기여를 하기로 결정했다. 몽골은 특별히 북한에 보낼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1만마리의 말을 보내기로 했다.


Balázs Szalontai, Kim Il Sung in the Khrushchev Era : Soviet-DPRK Relations and the Roots of North Korean Despotism 1953-1964(Woodrow Wilson Center Press/Stanford University Press, 2005), pp.45-47

몽골정부의 원조 내역을 보니 뭔가 안습이란 생각이 듭니다. 과연 북조선 인민들은 몽골정부가 어떤 원조를 해 줬는지 알긴 했을까 궁금하군요.

추가 - 아래의 사진은 1957년에 북한에 파견된 동독 기술자 에리히 레셀(Erich Robert Ressel)이 촬영한 사진입니다. 말을 탄 인민군 병사들인데 왠지 이 말들이 몽골에서 보낸 그 놈들이 아닐까 싶군요.

Erich Robert Ressel, 『동독 도편수 레셀의 북한 추억 : 50년대의 북녘, 북녘사람들』, (효형출판, 2000), 245쪽

2008년 1월 13일 일요일

산업화된 전쟁의 비산업적 요소 : 독일육군의 마필 사용 1939~1942

2차 대전당시의 독일 육군이 마필에 수송수단을 크게 의존했다는 사실은 너무나 유명하니 좀 식상한 이야기 입니다. 그렇지만 2차대전 당시 독일군의 마필 사용은 그 규모의 방대함에서 매우 흥미로운 사례입니다. 산업화된 전쟁에서 산업화와는 거리가 먼 말 이라는 동물 조차도 전쟁의 규모에 걸맞게 대량으로 사용되고 소모된다는 점이 꽤 재미있더군요.

독일이 2차대전에 돌입한 1939년 9월에 독일 육군이 보유한 마필은 약 59만 마리였습니다. 비록 오스트리아 병합과 체코슬로바키아 합병으로 대규모의 마필이 입수되긴 했지만 전쟁 발발과 함께 신규부대 편성이 대규모로 이뤄지면서 마필의 입수는 상당히 골치아픈 일이 되고 있었습니다. 이 당시 독일 육군의 1개 보병사단은 약 4,800필 정도의 말을 필요로 하고 있었는데 당시 독일군의 1개월 보충량으로는 3개 사단 정도의 소요량을 맞추는 정도에 그쳤다고 합니다. 다행히 폴란드 전은 단시일 내에 종결되었고 독일군은 아주 쓸만한 말 공급처를 확보하게 됐습니다. 1940년 초부터 폴란드는 독일군에 1주일 평균 4,000마리의 말을 공급하기 시작했습니다.
1940년의 서부전역은 비교적 단기일에 끝났지만 이 짧은 기간 동안 많은 기동이 이뤄진 까닭에 마필의 소모가 컸습니다. 제 4군의 경우 1940년 5월 10일 말 52,700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프랑스 전역이 종결될 무렵에는 44,000마리로 줄어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부 전역이 순식간에 종결되면서 독일군은 폴란드에 이어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라는 새로운 말 공급처를 얻게 됩니다.

독일의 다음 목표는 소련이었는데 소련은 독일군의 기계화 부대는 물론 말들에게도 매우 어려운 도전이 되었습니다. 독일군은 바르바로사 작전을 위해 625,000마리의 말을 동원했으며 이 중 13만 마리는 중부집단군의 주력 야전군인 제 4군에 소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소련 전장은 독일군의 말들에게는 아주 지독한 곳이 되었습니다. 넓은 땅 만큼이나 신속한 진격이 거듭되다 보니 보급로는 길어지고 이것은 말 사료의 전방 추진을 어렵게 했습니다. 폴란드와 서유럽산의 덩치 큰 말들은 독일군의 철제 달구지와 보병사단의 주력인 105mm 포를 견인할 만큼 튼튼했지만 동시에 먹어대는 사료의 양도 엄청났습니다. 사료 추진이 제때 되지 않으니 픽픽쓰러지는 말들이 매우 많았고 그 숫자는 소련 깊숙이 진격할수록 늘어났습니다. 독일군의 마필 손실 중 폐사는 1941년 7월 1일부터 7월 10일까지는 2,839마리였는데 8월 1일부터 8월 10일에는 9,847마리로 급증했습니다. 마필의 보충은 인력과 장비의 보충 만큼이나 더뎠는데 7월 1일~10일 기간 동안 폐사 2,839마리, 부상 및 질병 9,442마리 등 총 12,281마리를 상실하는 동안 보충된 것은 1,500마리에 불과했습니다.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어 11월 1일부터 10일 사이에는 폐사 11,605마리, 부상 및 질병 7,991마리에 보충은 1,700마리로 마필의 상황은 크게 악화되어 보병사단들이 제대로 보급추진을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됐습니다. 겨울로 접어들면서 말의 손실은 더욱 높아졌고 독일군의 수의 부대는 질병에 걸리거나 쇠약해진 말들이 급증해 기능이 마비될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보통 야전군급 수의부대는 최대 550마리의 말을 치료할 수 있었는데 41년 겨울이 되면 2,000마리에서 많게는 3,000마리 이상을 치료해야 했다고 합니다.
물론 소련군으로 부터도 많은 말을 노획했고 현지 징발로도 보충이 가능하긴 했지만 문제는 러시아산 말은 튼튼하기는 했으나 폴란드와 서유럽산 말들에 비해 덩치가 작고 체력이 떨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러시아산 말들은 독일군의 표준형 철제 달구지를 끌 수 없었기 때문에 러시아 농촌에서 사용하는 전통적인 목재 달구지를 사용해야 했는데 이것은 보통 독일군용 달구지보다 수송량이 적었다고 합니다. 러시아산 말로 105mm포를 견인하려면 포 1문당 더 많은 말이 필요했습니다.

독일군은 1942년 공세를 준비하면서 동부전선으로 보낼 약 21만 마리의 보충용 말을 징발했고 이 중 109,000 마리가 1942년 5월 1일까지 전선에 도착했습니다. 마필의 보충은 서부전선으로 이동하는 사단들로부터 인계받는 방식으로도 이뤄졌는데 전차와 같은 중장비처럼 서부전선으로 이동하는 부대들은 보유한 마필을 전선에 있는 부대에 넘겨주고 이동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2년 하계전역 개시당시 평균적인 보병사단들의 마필 보유량은 3,000마리 선에 그쳤다고 합니다. 다른 장비와 물자처럼 말 또한 동부전선의 지독한 소모전 앞에서는 배겨낼 재주가 없었고 일선 부대의 말 보유량은 계속 줄어듭니다. 1944년 봄에 가면 보병사단 1개의 평균 마필 보유량은 2,000마리 선으로 떨어진다고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