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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22일 토요일

[번역글] 러시아의 전쟁이 잊혀져 간다





얼마전 재미있는 칼럼을 한편 읽어서 번역해 봅니다. 카네기재단 모스크바 센터의 안드레이 콜레니코프Андрей Колеников가 쓴  Misremembering Russia’s War라는 제목의 글 입니다. 지난번에 소개했던 글들 처럼 푸틴 집권 이후 퇴행하는 러시아의 역사 인식을 비판하는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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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전쟁이 잊혀져 간다

안드레이 콜레니코프


러시아는 제2차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잠시나마 동맹국과 함께 나치 독일에 맞서고 있다는 인식을 가졌다. 하지만 이런 인식은 금방 사라졌다. 그리고 오늘날 러시아의 지배자들은  현재는 물론 과거에도 러시아가 홀로 적과 맞섰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차르 알렉산드르 3세가 했다는 “러시아의 동맹은 두개다. 육군과 해군이다.”말에 동의하면서 인용하곤 했다.(최근 아사드 부자가 푸틴의 새로운 동맹에 추가된 것 같다.)


러시아의 지배층은 아직도 독일에 맞선 대조국전쟁을 정치적 신화의 도구로 이용하고 있다. 러시아 대통령궁이 1941년 히틀러의 소련 침공일인 6월 22일에 내놓은 기념사는 이런 태도를 아주 잘 보여준다.


최근 수년간 6월 22일은 1945년 소련의 승리를 기념하는 5월 9일에 반대되는 의미를 가지게 됐다. 이 날은 스탈린의 정치적 실책으로 개전 초기 수개월간 일어난 재앙적인 참패와 공황을 되새기는 날이되었다. 스탈린이 군 고위층을 탄압하고 대규모로 숙청했기 때문에 소련군의 전쟁 대비태세는 형편없었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는 올해 6월 22일에 “나치 침략자들과의 전쟁에서 산화한 모국의 수호자들의 추도식”을 거행했다. 이들이 희생된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아직 연구가 충분하지 못한것인가? 푸틴 대통령은 6월 22일을 5월 9일 처럼 또다른 변명의 구실로 삼았다. 대통령은 비서실장 안톤 바이노Антон Эдуардович Вайно와 대법원장 뱌체슬라브 레베데프Вячеслав Михайлович Лебедев를 필두로 도열한 수많은 장군 및 고위 관료들과 흥겹게 악수를 나누었다. 공식 행사는 6월 22일의 비극과는 전혀 맞지 않았다.


1941~1945년의 대조국전쟁에 대한 공식 서술은 다시 스탈린 시절처럼 동맹국들의 존재를 지우는 방향으로 퇴보하고 있다. 2017년 5월 레바다 센터가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러시아인의 65%는 동맹국 없이도 소련이 승리했을 것으로 믿는다.


‘동맹’을 만든다는 개념은 소련의 정치담론에서 일찍부터 삭제됐으며 1946년 시점에서는 대중의 인식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영국과 미국이 ‘동지’였던 때가 잠깐 있긴 했다. 소련의 종군기자 일야 에렌부르그Илья́ Григо́рьевич Эренбу́рг와 콘스탄틴 시모노프Константи́н Миха́йлович Си́монов는 미국을 방문했으며, 러시아 재즈 가수 레오니드 우툐소프Леони́д О́сипович Утёсов와 그의 딸 에디트는 러시아어로 번안한 ‘Comin’ in on a Wing and a Prayer’를 불렀다.


하지만 레바다 센터의 여론조사에는 또 다른 의미심장한 내용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의 인명손실이 엄청나게 컸던 원인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했을때 20년 전에는 34%의 응답자가 소련 정부가 인명 손실에 무감각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2017년 5월의 여론조사에서는 최근 러시아를 휩쓸고 있는 시대에 뒤떨어진 군국적-애국적 히스테리가 합리적이고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인식을 대체하고 있다. 소련의 막대한 인명손실과 패전의 원인이 “나치의 기습 공격 때문”이라는 응답은 20년 전에는 27%였으나 2017년에는 36%로 늘어났다.


레바다 센터는 나치의 기습공격 때문이라는 선택지에 부가 사항을 추가했다. “나치 독일의 기습을 예측하지 못했다는 주장은 스탈린의 정치적 실책을 덮기 위해 날조한 것인가?” 푸틴이 집권한 2001년만 해도 58%에 달하는 응답자의 다수가 여기에 동의했다. 하지만 2016년에는 그 숫자가 38%로 줄어들었다.


레바다 센터는 설문조사에 대조국전쟁 기간 중 소련이 입은 수백만에 달하는 인명손실에 가장 큰 원인이 무엇이냐는 사항을 꾸준히 포함해 왔다. 2010년에는 “적”이라는 응답이 28%에 불과했다. 하지만 크림 반도 병합 이후인 2016년의 여론조사에서는 47%로 높아졌다. 이런 추세에서 스탈린이 책임져야 한다는 응답이 점차 낮아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2010년에는 30%의 응답자가 스탈린의 책임이라고 대답했지만 2016년에는 21%로 줄어들었다.


물론 이 여론조사 결과를 가지고 러시아 국민이 역사적 팩트를 이해하는 능력이 떨어졌다고 주장하면 안된다. 환경이 변한 것이다. 퍼레이드 행렬의 수많은 군중에 섞여 자동차, 가방, 유모차에 애국심을 상징하는 성 게오르기우스의 리본을 달아 모든 죄를 망각하고 약간의 퇴보를 하는 것이다. 사실 하고자 할 의지만 있다면 역사적 진실을 아는 것은 수 년 전에 비해 훨씬 쉬워졌다.


군사적 행사와 퍼레이드가 잦아지면서 과거를 되새길 필요성은 줄어들었다. 요즘은 공격적인 감성을 북돋고 있다. 1년전 러시아의 공식 여론조사 기관인 러시아여론조사센터Всероссийский центр изучения общественного мнения는 6월 22일에 맞춰 조사한 결과를 발표했다. 이 설문조사에는 충격적인 조항이 들어가 있었다. “만약 내일 인접국가와 전쟁이 난다면 사랑하는 사람이 참전하는 것을 지지하겠습니까?” 65%의 응답자가 그럴 것이라고 답했다. 어떻게 “이웃 국가”가 적대행위를 할 것이라는 전제를 하고 질문 문항을 작성한 것일까?


50여년 전인 1966년 12월 5일, 흐루쇼프 시대의 저명 인사였던 시인 겸 편집자 알렉산드르 트바르도프스키Алекса́ндр Три́фонович Твардо́вский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이 세상의 어떤 군대도, 그리고 어떤 전쟁에서도 대조국전쟁 직전과 전쟁 중의 소련군 처럼 많은 지휘관을 잃지는 않았다. 이런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 최전선이 아니라 미치광이 정권의 감옥과 수용소, 고문실에서 전쟁 이전과 전쟁 중에 희생된 사람들도 전선에서 희생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요즘도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하는게 유감스러울 따름이다.


국민이 역사를 잊는 것은 진정한 비극이다. 지배층은 역사를 망각함으로서 절대적인 도덕적 가치와 정신적 유대를 만들려고 한다. 러시아의 통치자들은 역사학과 사회학에서 사용하는 “추모” 개념 조차 정권의 정당성의 수단으로 이용해 국수주의의 도구로 변질시키고 있다. 정권을 비판하면 대조국전쟁에 대한 성스러운 ‘기억’을 비판한다고 몰아간다.


전쟁을 실제로 겪은 세대는 전쟁을 다르게 기억한다. 내 부모님이 전쟁 시절 영국과 미국의 가요를 러시아어로 번안한 것을 친구들과 함께 부르던 것을 기억한다. 부모님 세대는 1945년에 그랬었고 당시에는 붉은군대 합창단도 번안곡을 불렀었다.

전쟁을 경험한 세대는 이제 거의 사라져간다. 그리고 우리가 동맹국과 함께 싸워 승리했으며, 스탈린 덕분에 승리한 것이 아니라 스탈린이 있었음에도 승리한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줄 사람들도 사라져간다. 스탈린은 1945년 5월의 유명한 기념사에서 승리의 영광을 ‘소련 인민’에게 돌렸다. 하지만 오늘날 스탈린 숭배자들은 이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

2012년 5월 18일 금요일

'땅크節'

1946년, 소련은 2차대전에서 기갑병과가 세운 혁혁한 공훈을 기념하기 위하여 매년 9월 11일을 이른바 '전차병의 날(День танкиста)'로 정합니다. 병종도 아니라 육군의 특정 병과를 기념하기 위한 기념일이 제정된 것은 꽤 이례적인 일 입니다. 물론 스탈린이 살아있을 때는 이 전차병의 날도 스탈린의 우상화를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전차병의 날이 오면 소련의 기갑장교들은 스탈린이 어떻게 기갑부대 발전을 위한 교시를 했으며 기갑전술을 발전시켰는가 하는 찬양을 지루하게 늘어놓았다고 하지요.

어쨌든 이 '전차병의 날'은 제법 중요한 행사였기 때문에 소련의 위성국이었던 북한은 이날이 올때마다 기사를 한꼭지 할애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북한에서 День танкиста의 번역어로 사용한 것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땅크節'


땅크절이라니! 뭔가 초월번역의 느낌을 팍팍 풍기지 않습니까! 입에 착착 달라붙는게 엄청난 중독성이 있습니다. 전통명절과 같은 느낌이 들지요.

2010년 3월 13일 토요일

강대국 정치의 일면

다들 잘 아시는 내용이겠습니다만.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독일 통일 문제가 다시 떠오르면서 전략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있던 소련은 판을 조금이라도 유리하게 해보자는 계산에서 독일 통일 문제에 소련과 미국은 물론 영국과 프랑스도 참여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미국과 소련,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을 분할 점령하고 분단체제를 형성한 당사국이니 명분은 꽤 그럴싸 했던 셈입니다. 물론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 통일에 부담을 가질 것이고 이 두나라가 문제를 제기한다면 소련으로서는 그만큼 좋은 일이 없었을 것 입니다. 그러나 미국은 독일을 분할 점령했던 4개국이 주도적으로 독일 통일 문제를 다루는 것이 서독에게는 굴욕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미국이 내놓은 절충안은 독일 문제 해결을 위해 당사자인 서독과 동독, 그리고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가 참여한 이른바 "2+4" 방식이었습니다. 물론 4대강국이 독일의 자주적 통일 문제에 끼어드는 모양이긴 했습니다만 소련이 제안한 4대강국 중심의 협의체 보다는 서독에게 훨씬 나은 방안이었을 겁니다.

한편, "2+4"를 통해 독일 통일문제를 협의한다는 방안은 1990년 2월 캐나다의 오타와에서 열린 나토와 바르샤바조약기구 회원국 외무장관 회의에서 다른 국가들에게도 알려집니다. 그런데 이게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다른 유럽 나라들도 판에 끼워달라고 들고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당시 미국 국무부장관이었던 제임스 베이커(James A. Baker III)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습니다.

우리가 오타와 회의에서 당시 추진 중이던 "2+4" 방식의 협상에 대해 발표하기 전 까지는 상황이 나쁘지 않았다. 우리는 이 문제를 나토 회의에서 다룰 생각이었다. 그러자 사태는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네덜란드와 이탈리아, 그리고 다른 나라들도 독일 문제에 끼고 싶었기 때문에 들고 일어났다. 그리고 만약 발언권을 가진 15개, 또는 16개국 대표가 발언을 신청해 독일이 재통일 될 경우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의문을 제기했다면 상황을 어찌 해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오타와에서 열린 나토 회의에서 미국측이 "독일의 재통일에 대한 우리의 계획안을 알려드리겠습니다"라고 발표하자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그때 갑자기 이탈리아 외무장관이었던 지아니 데 미첼리스(Gianni de Michelis)가 발언을 신청했다.

"독일 재통일 문제는 중요합니다. 그 문제는 이탈리아와 관계가 있는 문제이고 유럽의 미래와도 관계된 문제입니다. 우리도 협상에 참가해야 겠습니다."

그러자 겐셔(Hans-Dietrich Genscher)가 일어서서 말했다. "저도 한 마디만 하겠습니다." 그리고 겐셔는 거칠게 쏘아붙였다.

"당신은 이 게임에 끼어들 수 없어!(Sie sind nicht mit im Spiel)"

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위축되지 않았다. 나는 그의 태도에 꽤 놀랐다. 서독과 동독이 협상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다른 유럽국가들도 같은 요구를 하게 된다면 우리는 이 문제를 종결지을 방법이 마땅치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두 독일과 서유럽의 15개국... 아니 14개국, 그리고 소련과 미국, 여기에 캐나다 까지 끼어들었다면 의사 소통도 제대로 할 수 없었을 것이다.*

Alexander von Plato, Die Vereinigung Deutschlands - ein weltpolitisches Machtspiel(2. Aflg)(Bundeszentrale für politische Bildung, 2003), ss.283~284

겐셔는 외교적으로 매우 무례한 발언을 했는데 사실 이건 강대국이 중심이 되는 국제정치의 찝찝한 일면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독일이 보기엔 한 수 아래의 나라들인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통일문제에 끼어드는 것 만으로도 불쾌한데 그 보다 국력이 더 떨어지는 작은 나라들이 끼어들겠다고 나서고 있으니 짜증이 안 날 수 없었겠지요. 근대이후의 국제관계에서는 형식상 모든 나라가 동등한 위치에서 참여합니다만 실제로는 국력이 그대로 반영되지요.

그리고 유럽의 작은 나라들이 아웅다웅 거리는 것은 더 큰 나라들이 보기에 가소롭기 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베이커가 미국의 "2+4" 방안을 제안하기 위해 소련을 방문했을 때 고르바초프는 미국과 소련, 그리고 유럽 각국의 입장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고르바초프가 세바르드나제와는 다른 반응을 보였다는 것은 베이커가 놀랄만한 일이었다. 고르바초프는 역사적으로 위험한 문제였던 독일의 군국주의가 나타날 조짐은 없다고 생각했다. 대신 고르바초프는 이렇게 말했다. "본인도 기본적으로 미국측의 제안에 동의하는 바 이오." 소련은 새로운 현실에 맞춰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통일 독일의 장래를 걱정할 필요도 없을 것이오." 고르바초프는 프랑스나 영국 같은 나라는 유럽 내부의 주도권을 어느 나라가 쥐게 될 것인지 신경쓴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것은 소련이나 미국이 신경쓸 문제는 아니었다.

"소련과 미국은 대국입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세력 균형을 좌우할 능력이 있지요."**

Philip Zelikow and Condoleezza Rice, Germany Unified and Europe Transformed : A Study in Statecraft(Harvard University Press, 2002), p.182.

독일의 통일 과정은 국제 관계에서 강대국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잘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문제가 발생하면 모두가 관심을 가지지만 그 문제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대상은 실력이 뒷받침 되는 소수일 수 밖에 없지요.

불행인지 다행인지 한반도 주변에는 강대국 밖에 없어서 독일 통일 과정에서 처럼 딴지를 걸고 나설 자격미달(???)의 나라는 없습니다. 한반도 통일이 본격적으로 논의 될 때 몽골이나 베트남이 한 자리 요구할 리는 없겠지요^^;;;;

*위에서 인용한 겐셔의 발언은 꽤 유명해서 독일 통일과 관련된 많은 저작들에 실려있습니다. 젤리코와 라이스의 책에도 그 이야기가 있는데 미국 외교문서를 참고했기 때문에 베이커의 구술을 참고한 플라토의 서술과는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고르바초프의 이 발언은 직역하면 별로 재미가 없을 것 같아 의역을 했습니다. 원문은 "We are big countries and have our own weight." 입니다.

2009년 8월 14일 금요일

미국 정부의 동방부대 소속 포로 처리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포로 관리에 대한 자료를 찾던 중 좀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를 찾았습니다. 한국전쟁과는 전혀 상관없는 내용입니다만. 2차 대전 중 동방부대(Osttruppen) 포로에 대한 내용입니다. 대략적인 줄거리는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그래도 참고할 만한 내용이 조금 있는 것 같습니다.

격리를 하기 이전인 전쟁 초기에 수많은 독일 포로가 수용을 위해 미국으로 이송되었다. 이들 포로 중 약 4,300명이 뒤에 소련 국적자로 판명되었다. 이들의 존재가 밝혀지자 이 포로들은 곧 다른 독일인 포로들과 격리되었으며 소련으로 송환시키기 위해서 미국에 파견된 소련 대표단의 심사를 받을 특수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소련정부가 이들의 존재를 부인하였다. 그래서 이들은 다시 일반 (독일) 포로와 동일하게 취급되었다. 소련은 뒤에 가서야 이들을 소련인으로 취급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들 포로들은 소련 당국이 선박편을 준비하는 것에 맞춰 소련으로 송환되었다.

George G. Lewis and John Mewha(1955), History of Prisoner of War Utilization by the United States Army, 1776-1945, Department of the Army, p.148

소련 국적의 독일군 포로에 대한 내용은 이게 전부여서 매우 아쉽습니다만 그래도 흥미로운 점이 있긴 합니다. 먼저 미국으로 이송된 동방부대 소속의 포로가 4,300명 정도라는 겁니다. 생각보다는 적은 숫자이고 외교적으로 특별한 사례이기 때문에 만약 뒤에 관련 연구를 한다면 의외로 수월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입니다. 소련정부와 송환 협상도 이루어 졌으니 관련 문서가 별도로 분류되어 있을 것 같네요.

두 번째는 소련 정부가 초기에 이들의 존재를 부인했다는 점 입니다. 한 두명도 아니고 수천명의 자국 국민들이 독일군의 편에 서서 총을 들었다는게 알려지면 이래 저래 난감할 것 입니다. 그래도 반역자들을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니 최대한 빨리 송환하려고 한 모양입니다.

2009년 7월 24일 금요일

데자뷰? - (5)

BigTrain님 블로그에서 불라바 미사일의 실험 실패와 이에 따른 러시아의 대응에 대한 소식을 접했습니다.

러시아 정보당국은 불라바 미사일이 사보타지의 표적이 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고 RIA Novosti가 보도했다.

러시아 정보당국의 소식통은 RIA Novosti에 제조사의 효율적인 품질 관리 부족이나 제작 과정 때문에 미사일이 세부적인 결함을 가지고 완성되었다고 밝혔다.

이 소식통은 제작 과정상의 태만은 사보타지와 동급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고 밝혔다.

또한 이 소식통은 경쟁상대인 러시아의 미사일 개발회사도 사보타지의 책임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소식통은 고체연료 로켓과 액체연료 로켓 개발사간의 경쟁은 치열하며 “그들은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는데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Sabotage behind Bulava failure?(2009. 07. 20)

이 기사를 읽고 나니 러시아는 소련 시절의 전통을 21세기에도 잘 계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숙청은 설계자, 기술자, 그리고 항공산업의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확대되었으며 연구기관들도 대량 검거의 대상이 되어 고위 행정인력에서 말단 행정직원까지 희생되었다. 예를 들어, 중앙항공역학연구소(Центра́льный аэрогидродинами́ческий институ́т)는 제멋대로 자행되는 공안탄압의 여파를 받았다. 소련의 저명한 항공기 설계자인 투폴레프(А. Н. Туполев) 조차 구제받지 못했다. 그는 체포된 뒤 잠시 수감되었다가 비밀 수용소에서 연구를 계속하게 되었다. 그의 수용소 설계국은 전쟁 기간 중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약 450명의 항공 기술자와 설계자가 체포되었으며 살아남은 300명은 비밀경찰이 감독하는 설계국에서 연구를 계속했다.

다른 사람들, 실험기 K4를 설계한 칼리닌(К. А. Калинин) 같은 사람들은 운이 없었다. K4가 하리코프 근처에서 시험 비행 중 추락해 네 명의 당원이 사망하자 칼리닌은 체포되어 사보타지 혐의로 총살되었다. 1930년대 초에 설계한 최초의 델타익 항공기와 같이 그가 과거에 했던 훌륭한 연구들도 고참 볼셰비키나 레닌의 혁명 동지들 조차 “파괴자”, “트로츠키주의 반동분자” 또는 “인민의 적”으로 몰리는 정치적 상황에서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Von Hardesty, Red Phoenix : The Rise of Soviet Air Power, 1941-1945, Smithsonian Institution Press, 1982, p.54

현재의 러시아가 1930년대의 소련 보다 나은 점은 사보타지 혐의자들이 총살 당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 정도같습니다.

2009년 7월 8일 수요일

중국∙북한 동맹관계 - 최명해

우리에게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모르겠으나 중국의 대북영향력은 매우 제한적입니다. 북한 핵문제가 장기화 되면서 중국이 북한에 대해 제한적인 영향력만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명백해 졌는데 이것은 꽤 흥미로운 문제입니다.

최명해의 저작인 『중국∙북한 동맹관계』는 이 문제를 재미있게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저자는 북한과 중국의 관계를 규정하는 중요한 요인을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하는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북한과 중국이 서로 상이한 전략적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점 입니다. 이것은 대외관계에서 흔히 나타나는 일이지요. 두 번째는 중국이 북한을 관리할 수 있을 만큼 강하지 않다는 점 입니다. 이 두번째 문제는 중국에게 꽤 불리하게 작용합니다. 특히 북한과 중국이 서로 상이한 전략적 목표를 가지고 대립할 때 중국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문제점이 처음으로 드러난 것은 흐루쇼프의 집권 이후 중국과 소련의 관계가 악화되었을 때 입니다. 중국은 소련을 중대한 위협으로 간주해 북한과 제휴해 소련에 맞서려 시도합니다. 그러나 북한은 자국에게 핵우산을 포함한 안전보장을 해 줄 수 있는 소련과 공개적으로 대립하는 것은 회피하려 합니다. 중국은 북한에게 그런 것들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실력이 되지 않았지요. 중국은 북한을 회유하기 위해 다양한 당근을 제시하지만 북한은 호락호락하게 걸려들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중국과 미국이 관계개선을 하면서 이런 구조는 더 요상하게 꼬여갑니다. 북한은 중국과 미국이 국교를 수립한 이후 한반도 문제를 공동관리하는 방향으로 나가자 중국의 하위체제에 포섭되지 않기 위해서 80년대에는 소련쪽에 밀착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 소련이 갑자기 망해버리죠;;;; 결국 북한에게 충분한 안전보장을 해 줄수 있는 소련이 망해버리니 북한에게 남은 선택은 두 가지가 됩니다. 중국의 하위 체제로 포섭되느냐 아니면 북한의 자율성을 인정해 줄 수 있는 쓸만한 물주를 찾느냐.

네. 결국 답은 우리 모두가 잘 알 듯 ‘미국밖에 없다’가 됩니다. 누가 보더라도 미국은 안전보장 측면에서 중국보다 우월하지 않겠습니까. 일단 국력 차이부터가 엄청나지요. 이후의 이야기야 우리 모두 잘 알 듯 미국은 중국에게 최대한 많은 역할을 부여하고 싶어하지만 북한이 말을 듣질 않고 있습니다. 어쩌겠습니까. 북한 입장에서는 미국이 중국보다 매력적인 상대인 것을. 문제라면 미국이 북한에게 신경쓰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겠습니다만.

저자는 중국이 북한과 동맹을 형식적이나마 유지할 수 밖에 없는 이유도 근본적으로는 북한을 자신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주 내에 묶어 둘 수 있는 수단이 동맹외에는 없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마치 1950년대에 소련이 그랬던 것 처럼 현재의 미국은 북한에게 제공해 줄 수 있는 것이 중국 보다 더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식적인 동맹마저 폐기된다면 그렇지 않아도 미국에게 들러붙고 싶어 안달 난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동북아시아에서 중국의 위상은 추락할 수 밖에 없으며 그것은 중국 지도부가 결코 원하지 않는 시나리오 일 것입니다.

Ps 1. 저자는 북한과 중국의 관계에서는 기괴하게도 북한보다 더 강대국인 중국이 ‘방기(abandonment)’의 위협을 느끼는 경우가 가끔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꽤 재미있는 해석이지요. 수십년 동안 소련과 미국에게 치어 2인자에 머무르는 것이 중국의 현실인 만큼 그럴듯한 이야기 입니다.

PS 2. 이종석도 북한과 중국의 관계에 대해서 책을 한 권 썼습니다. 이종석의 책과 비교하며 읽으시면 훨씬 재미있습니다. 최명해가 미국과 중국의 협력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이종석은 미국과 중국의 갈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요. 아마도 동북아균형자론이라는 발상이 나온 것도 이종석이 미국과 중국의 갈등을 심각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일 것 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종석 보다는 최명해의 저작이 더 재미있고 읽을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2008년 7월 8일 화요일

2차대전 중 소련군의 민족별 포상내역

채승병님이 쓰신 '독소전쟁기 소련군 야전부대의 민족분포'라는 글을 읽고 나니 저도 재미있는 통계가 하나 생각났습니다. 아래의 표는 Народы Кавказа и Красная Армия : 1918-1945 Годы라는 책의 292쪽에서 293쪽에 걸쳐 실려있는 통계인데 1942년 3월 2일 시점에서 정리한 민족별 포상 내역입니다.

표. 2차대전 초기 민족별 포상 내역(1941.6~1942.3)

소련방영웅
레닌훈장
적기훈장
적성훈장
공훈기장
참전기장
총계
러시아인
95
765
7,106
8,815
6,650
4,369
27,800
우크라이나인
28
209
1,910
2,438
1,652
1,230
7,497
유태인
3
21
234
366
216
225
1,065
타타르인
2
6
114
123
124
122
491
벨로루시인
2
35
323
410
294
185
1,249
그루지야인
0
10
71
76
72
39
268
아르메니아인
0
5
53
73
27
30
188
아제르바이잔인
1
3
18
14
16
18
70
카자흐인
0
3
41
51
59
41
195
추바시인
1
1
26
57
41
26
152
라트비아인
0
7
61
59
16
9
152
우즈벡인
0
1
20
25
32
14
92
타지크인
0
4
1
3
7
3
18
키르기스인
0
1
4
3
5
5
18
투르크멘인
1
0
4
3
2
1
11
마리인
0
1
10
9
13
5
38
에스토니아인
1
1
4
3
6
1
16
리투아니아인
0
0
1
1
1
1
4
레즈기인
0
0
4
3
2
0
9
카바르디인
0
0
5
3
3
3
14
체르케스인
0
0
0
0
1
2
3
카라차이인
0
0
1
3
3
4
11
체첸인
0
0
4
3
3
2
12
아디게야인
0
1
3
5
1
3
13
쿠묵인
0
0
1
2
0
0
3
라크치인
0
1
1
1
0
0
3
다르긴인
0
0
0
0
0
1
1
타바사란인
0
0
0
0
1
0
1
잉구시인
0
0
0
0
0
1
1
[표 출처: А. Ю. Безугольный, Народы Кавказа и Красная Армия : 1918-1945 Годы, (ВЕЧЕ, 2007), 292~293]

역시 재미있는 점 이라면 유대인이 포상에서도 상대적으로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 입니다. 전쟁 종결 시점의 통계도 궁금하긴 한데 여기서 인용한 책에는 달랑 1942년 3월의 통계만 실려있더군요.

추가 – 소련의 민족 분류는 약간 괴상하게 이뤄진 것이 사실입니다. 전에 제가 올렸던 “주머니안에 있는 거스름돈의 처리”라는 포스팅에도 나와 있지만 소련의 민족 구분은 인구조사가 실시 될 때 마다 여러 차례 바뀌었습니다. 즉 과학의 탈을 뒤집어쓴 정치였던 셈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