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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3월 12일 수요일

Obama’s Not Carter, He’s Eisenhower

러시아의 크림 반도 침공으로 국제정세가 뒤숭숭합니다. 뭐, 제가 이쪽에 대해 아는건 별로 없지만 워낙 중요한 사태다 보니 시간이 나는대로 외신 보도들을 챙겨보고 있습니다. 물론 정보량이 방대하고 현안에 대해 아는게 적다 보니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많긴 합니다만. 개인적으로 현재 미국의 태도에 다소 불안감을 느끼는 편인데 제 시각과는 방향이 다른 글을 한편 읽게 되어서 번역을 해 봅니다. 포린 폴리시에 제임스 트라웁James Traub이 기고한 Obama’s Not Carter, He’s Eisenhower라는 글인데 “푸틴이 우크라이나에서 이기는 게 뭐 대수냐!”는 담대한 견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뭐, 시각에 따라서는 정신승리로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미국의 입장에서 느긋하게 대응하자는 이야기라서 우리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불편하게 읽히긴 합니다만 이런 시각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질 필요는 있을 것 같습니다.



오바마는 카터가 아니다, 그는 아이젠하워다.

그리고 오바마는 서방이 전쟁에 승리할 것을 알기 때문에 푸틴이 전투는 승리하도록 내버려 둘 것이다.


제임스 트라웁

헝가리 정부가 바르샤바 조약기구에서 탈퇴하겠다고 선언한 직후인 1956년 11월 4일, 소련군의 전차들이 부다페스트로 진격했다. 헝가리의 봉기 군중이 마지막으로 보낸 절망적인 내용의 전문에는 다음과 같이 씌여져 있었다. “그들이 지금 막 미군이 한두시간 내에 부다페스트로 올 것이라는 소문을 전해왔다. … 우리의 상황은 나쁘지 않고 싸우고 있는 중이다.” 미군은 부다페스트로 가지 않았다. 아이젠하워는 소련을 동유럽에서 몰아내겠다고 호언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며 헝가리의 봉기는 분쇄되었다. 공화당과 민주당의 지도부는 아이젠하워가 소련에게 굴종한다고 비난했다.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인 애들레이 스티븐슨Adlai Stevenson은 아이젠하워가 “자유국가들의 동맹이 존립에 위협을 받을 정도로 몰고 가고 있다”는 주장을 하기까지 했다.

러시아가 또 다시  인접국가를 침공하자 미국 대통령도 또 다시 우유부단하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버락 오바마는 아이젠하워와 같은 입장이 아니기 때문에 오바마는 쉽게 재선된 아이젠하워가 받았던 비난 보다 더 심한 강도의 비난을 받고 있다. 푸틴이 우크라이나의 크림 반도를 침공한데 대해 오바마가 신중한 태도를 취하자 그가 나약한 의지를 가진 인물이며, 전 세계의 악당들은 오바마의 불안정한 리더쉽을 보면서  미국의 보복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는 평이 더욱 더 퍼지고 있다. 공화당의 상원의원 린지 그레이엄Lindsey Graham은 얼마전 트위터에 2012년 미국 외교관 크리스 스티븐스Chris Stevens가 리비아에서 살해됐을때 리비아를 공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공격적인 행동”이 초래됐다고 썼다. 그레이엄은 당파적인 입장에서 불평을 늘어놓은 것이지만, 많은 전문가들이 오바마를 비판하는데 동참하고 있다. 수많은 비난에 시달리고 있는 나의 동료 데이빗 로트코프David Rothkopf는 오바마와 지미 카터를 비교하는 글을 쓰면서 허약한 대통령의 기준으로 “카터를 꼽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했다.

여기에 인간 관계와 유사한 점이 있다. 악당들이 말을 알아듣게 하려면 위협을 가하는 수 밖에 없다. 악당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보복을 받을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면 행동을 멈출 것이다. 내 동생을 때리면 나를 상대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국제관계의 영역에서 럼즈펠드의 그 유명한 “나약함이 도발을 불러온다.(Weakness is provocative.)”는 격언의 바탕이 되었다. 럼즈펠드는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면 중동의 다른 모든 악당들에게 경고가 될 것이며 이런 악당들이 미국의 의지를 시험하는 것을 재고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럼즈펠드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이라크 침공의 경험을 통해 호전적인 태도가 나약함 보다도 더 도발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개인의 생활이나 국제 관계를 막론하고 힘을 과시하고자 하는 충동은 참기가 힘들다. 악당들이 제멋대로 날뛰는 것은 멋지게 보이며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악당은 거들먹 거리며 걸어다니고 약한 사람들은 움추려든다. 우리는 잔인한 짓만 빼고 악당들 처럼 자유롭기를 갈망한다. 월터 미티Walter Mitty처럼 말이다. 하지만 당신이 미국처럼 놀이터에서 가장 잘나가는 골목대장이라면 악당들의 이런 행동을 용납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정의의 이름으로 주먹을 휘두르는 빅 브라더에 짜릿함을 느낀다. 미국인들이 “고르바초프! 베를린 장벽을 없애버려요!”라고 절규하도록 만든 로날드 레이건은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을 평화적으로 해체하게 만든 그의 후임자 조지 부시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세계는 부시에게 더 많이 감사해야 한다.

아이젠하워는 악당들의 행동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모두의 파멸을 불러올 수 도 있을 정도의 위협을 가해야 할 경우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특히 적국이 우리가 신경쓰는 것 이상으로 희생양에게 신경을 쓰고 있을 경우가 그러했다. 니키타 흐루쇼프는 헝가리를 잃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푸틴이 친서방적인 우크라이나 정부에게 크림 반도를 잃어서는 안된다고 믿는것과 같다. 이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크림 반도는 역사적으로 러시아의 영역이었으며 로시아 흑해함대의 기지였으며, 오랫동안 부동항을 갈망해온 러시아를 만족시키는 지역이다. 푸틴 같은 깡패(thug)는 현재와 같은 수준으로 위협을 받는다면 그가 할 줄 아는 유일한 방식으로 대응할 것이다. 야만적인 폭력말이다. 오바마가 보다 단호한 태도를 취한다면 푸틴이 손을 뗄 것이라는 생각은 공상에 불과하다. 이건 마치 “누구 때문에 중국에서 패배한 것이냐?”와 같은, 미국의 지도자들이 나약해서 공산주의자들에게 승리를 안겨줬다는 비난과 같은 것이다. 요즘에는 이런 식이다. “누구 때문에 벵가지에서 패배한 것이냐?” 아니면 시리아 라던가.

아이젠하워는 결국에는 소련이 서방의 무덤 위에서 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일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오바마 또한 푸틴에 대해서 아이젠하워가 소련에 대해 가졌던 것과 같은 생각을 하는게 아닌가 생각한다. 지금 오바마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푸틴이 탁월한 전략가라고 박수갈채를 보내고 있다. 포린 폴리시의 편집위원인 윌 인보든Will Inboden은 오바마의 행동은 어린아이들이 보드게임을 하는 수준인데 푸틴은 위험을 무릅쓰는 행동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푸틴은 러시아를 핵무기를 가지지 못한 사우디 아라비아로 만들었을 뿐이다. 러시아는 땅에서 캐내는 것 말고는 수출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는 산유국에 불과하다. 푸틴이 잭나이프를 가지고 장난질을 하는 수준이라면, 나머지 세계는 레이저를 사용하는 법을 익히고 있는 수준이다.

오바마의 대외정책 수행을 카터와 같다고 이야기 하지만 아이젠하워와도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젠하워는 오바마처럼 전임자로 부터 물려받은 방대한 국방 예산이 국가 경제에 심각한 부담을 준다고 생각했다. 항상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아이젠하워는 적은 수단으로 더 많은, 혹은 사용하는 수단 만큼의 결과를 얻어내려고 노력했다.(스티븐 세스타노비치Stephen Sestanovich는 맥시멀리스트Maximalist에서 아이젠하워와 오바마를 “긴축” 대통령으로 묘사했다.)  내가 지난주에 기고한 글에서 쓴 것 처럼, 오바마가 대외 정책에서 추구하고 있는 가장 큰 목표는 국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테러와의 전쟁을 포함한 지난 정권에서 이어진 분쟁들을 단계적으로 중단하는 것이다.

오바마가 대외정책을 수행하는데 있어 계속되는 문제는 오바마의 정책에 결단성이 부족해서라기 보다는 갈수록 외골수로, 상상력이 결여된 축소지향적인 방향을 추구하는데 있다. 오바마는 임기를 시작할 때 핵무기 비확산과 기후 변화와 같은 국제적인 문제에 관한 국제 질서를 재편하겠다는 원대한 희망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오바마는 전임 대통령때 부터 시작된 통제할 수 없는 분쟁을 중단할 수 없으며, 미국 국민들은 그의 개혁안에 별 관심이 없다는 점을 알게됐다. 결국 오바마의 열정은 사그러들었고 그의 (사고:역자) 지평은 줄어들었다. 그대신 오바마는 미국이 세계 각지의 분쟁에서 확실하게 거리를 두는 것을 선택했다. 무엇보다도 시리아가 그런 경우였다. 오바마는 시리아에서 자행되는 최악의 만행에 대해 단호해 보이는 제스쳐를 취하는 정도에 만족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런 행동은 나쁜 일이다. 한때 오바마가 제창했던 희망과 그가 안주하기로 선택한 편안한 장소와의 거리는 아이젠하워의 말뿐인 반공주의와 그의 실용적인 타협안 사이의 거리보다 더 멀다. 백악관의 싱크탱크 역할을 하고 있는 미국진보센터Center for American Progress의 브라이언 카툴리스Brian Katulis는 최근 오바마가 더이상 미국 국민들에게 국제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했다. 아마도 오바마는 국제 문제에 대한 논의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듯 싶다.

나는 오바마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오바마가 하는 일이 훌륭하다는 것을 모른다고 지적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바마의 실패는 그의 불안함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고 지적하려는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은 오바마가 초기 부터 러시아에 대해 보다 대결적인 정책을 취했어야 한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오바마가 그렇게 했다면 그는 군비통제나 아프가니스탄, 이란 문제에서 그랬던 것 처럼 동맹국들의 협력을 이끌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푸틴이 꿈꾸는 것 처럼 미국과 러시아가 동등한 입장에서 대결하는 것 같은 상황이 연출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같은 상황이 초래되었다면 푸틴은 우크라이나가 유럽에 통합되는 것 같은 용납할 수 없는 위협에 직면하여  러시아에서 민족주의적인 여론이 거세지도록 선동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진심으로 오바마가 2년 전에 시리아의 반군을 훈련시키고, 군자금을 지원하며, 장비를 제공하는 것을 승인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오바마가 시리아 문제에 개입하지 못한 것이 그의 임기 내내 오점으로 남을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나는 오바마가 푸틴에게 본보기를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리아인들을 압제로 부터 구출하기 위해 개입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제 오바마는 몇가지 제제조치와 올 6월에 소치에서 개최될 예정인 G-8회의에 참석하는 것을 취소하는 등의 조치를 결합하여 러시아를 고립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인들이 계속해서 푸틴 개인에 대한 숭배에 붙들려 있는 이상 오바마가 취하게 될 조치들은 별다른 효과가 없을 것이다. 러시아가 고립된다면 푸틴의 입지만 강화될 것이다. 동구와 서구가 대립하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될 듯 보인다. 그러나 러시아가 동맹국이나 적절한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지 않은 이상 대결은 한쪽에 일방적일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지난 냉전 당시보다 시간이 더 걸린다 하더라도 서구는 꾸준한 인내심을 가지고, 미래는 자유민주주의의 편에 있다는 신념을 확고히 하여 대결을 지속할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이야기 한 것 처럼 저는 이런 시각을 썩 달갑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장기적으로 미국이 유리할 것이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단기적으로 직접적인 피해를 입게 될 국가가 우크라이나 하나로 끝난다는 보장은 없으니 말입니다. 우리는 미국이 냉전에서 승리했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 벌어진 전쟁에서 무너진 작은 국가들의 운명에 대해서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아마 올 여름쯤에 나올 국제관계나 군사전략 관련 저널들이 이 문제를 심층적으로 다룰테니 그때쯤 잘 정리된 재미있어 보이는 글들을 더 번역해 볼까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Journal of Strategic Studies나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에서 특집을 내줬으면 좋겠네요.

2011년 1월 24일 월요일

어떤 정치인의 기록정신


언제나 그렇듯 밀린 RSS피드를 확인하다 보면 며칠 지난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접하게 됩니다. 뉴욕타임즈 1월 19일자에서는 2003년 이라크에서 노획한 이라크 정부 자료 몇 건을 공개했는데 이게 꽤 재미있습니다.

관련기사 : Hussein Wanted Soviets to Head Off U.S. in 1991

이 기사와 함께 영어로 번역된 노획자료도 함께 실렸습니다.  위기 상황에서 고르바초프에게 중재를 요청했다가 강대국 정치의 쓴맛을 제대로 맛보는 후세인의 모습을 보니 안구에 습기가 차는 동시에 만약 우리가 저 꼴이 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등골이 서늘해 집니다;;;;

뉴욕타임즈가 공개한 번역문을 읽다 보니 재미있는 구절도 눈에 띄는데 특히 사담 후세인의 투철한 기록 정신이 재미있군요. 걸프전쟁 당시 후세인과 이라크 공보장관 하마디(Hamid Yusuf Hammadi) 간에 이런 대화가 오고 갔다고 합니다.(이 문서의 10쪽을 보십시오)

후세인 : 전쟁 중인 만큼, 중요한 문서들은 두 개의 사본을 만들어서 각기 다른 두 군데의 장소에 보관해야 하네. 만약 여기가 폭격을 받거나 불에 타버리면 어쩌겠는가.

하마디 : 각하. 저는 서류보관함과 금고를 하나씩 가지고 있습니다.

후세인 : 하지만 아직 한 군데에 있지 않은가. 두 개의 사본을 각기 다른 두 군데의 장소에 보관하도록 하게.

하마디 : 알겠습니다. 각하.

후세인 : 이런 자료들은 반드시 최소 두 개의 사본이 있어야 하네. 하나는 대통령궁으로 보내고 다른 하나는 자네가 보관하도록 하게.

하마디 : 알겠습니다. 각하.

히틀러도 그랬지만 이런 자료들을 남겨주는 독재자들은 호사가들에게 고마운 존재입니다. 만약 후세인이 스탈린 처럼 기록을 남기는 걸 싫어하는 인간이었다면;;;;

2010년 12월 17일 금요일

날 구걸한다고 놀리는 건 참을 수 없다!

헬무트 콜 회고록을 읽다가 고르바초프의 경제 원조 요구에 대한 부분에 눈길이 갔습니다. 해당 부분이 꽤 재미있어서 한번 인용을 해 보겠습니다.

9 월 7일 오전 나는 고르바초프와 전화 통화를 했다. 코카서스 회담 이후 처음 갖는 대화였다. 고르바초프는 전화에서 나를 압박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그는 인생이 그렇게 간단치 않다고 말문을 열고는 보다 편안한 마음으로 함께 등산을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런 다음 고르바초프는 본래의 관심사로 화제를 옮겨 소련군의 동독 지역 주둔 비용 협상이 제대로 진척되지 않고 있다고 전해왔다.

나는 소련군 철수 병력을 위해 대규모 지원을 하기로 양국간에 이미 합의했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철수 때 까지의 주둔 비용과 거기다 철수 비용까지 요구하고 나오면 어떻게 하느냐고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자 고르바초프는 통일 조약이라는 역사적 합의가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한 이견으로 위기에 빠지지 않기를 바란다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소련은 그렇게 좀스럽지 않다고 했다 .그것은 자신의 의사를 전하기 위한 노골적인 암시였다.

나는 고르바초프에게 소련에 대한 서독의 호의를 강조하고는 80억 마르크 지원 계획을 되풀이해 전했다. 그러자 그는 그 같은 액수로는 협상이 더 이상 진척되지 않는다면서 자기들 계산으로는 주택 건설과 그에 따른 사회 간접자본에만도 110억 마르크가 필요하다는 것 이었다. 고르바초프는 아주 노골적으로 “독일 측의 제안은 이제 까지 이룩해 낸 공동 작업 결과를 허물어 뜨리게 될 것 입니다. 소련의 요구는 결코 구걸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솔직히 얘기하자고 하고는 장애물을 만들어 그동안 이룩해 놓은 것을 다 날려버려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고르바초프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운명을 결정하는 소련군 체류 및 철수 문제”를 자신이 요구하는 지원 액수와 직접 연계시키고 나왔다. 그는 곧 있을 2+4자 회담과 관련해 외무장관인 셰바르드나제에게 어떤 훈령을 내렸으면 좋겠냐고 나에게 물으면서 이렇게 얘기했다.

“나는 지금 불안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덫에 걸려 있는 느낌입니다.”

헬무트 콜/김주일 옮김, 『헬무트 콜 총리 회고록 : 나는 조국의 통일을 원했다』(해냄, 1998), 314~315쪽

요즘 생각하는 문제 때문에 독일 통일과 관련된 책들을 다시 조금씩 뒤적이고 있는데 진지한 생각보다는 장난스러운 생각이 더 많이 일어납니다;;; 자잘한 일화들을 읽으면서 이런 저런 망상이 피어나더군요. 여기서 인용한 고르바초프의 이야기는 우리 시대의 거장 김화뷁님의 명대사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바로 이거;;;

고르바초프 : 아까 전에 날 보고 구걸한다고 했었지? 난 그 말이 좋아 사실이니까.

콜 : !!!

고르바초프 :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날 구걸한다고 놀리는 건 참을 수 없다!!!

콜 : !

부시 : 무... 무슨 소리야!

고르바초프의 진짜 심정은 이런게 아니었을지... 망상은 그만두고 좀 진지한 생각을 해야 할텐데 말입니다. ㅋ

2010년 3월 13일 토요일

강대국 정치의 일면

다들 잘 아시는 내용이겠습니다만.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독일 통일 문제가 다시 떠오르면서 전략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있던 소련은 판을 조금이라도 유리하게 해보자는 계산에서 독일 통일 문제에 소련과 미국은 물론 영국과 프랑스도 참여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미국과 소련,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을 분할 점령하고 분단체제를 형성한 당사국이니 명분은 꽤 그럴싸 했던 셈입니다. 물론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 통일에 부담을 가질 것이고 이 두나라가 문제를 제기한다면 소련으로서는 그만큼 좋은 일이 없었을 것 입니다. 그러나 미국은 독일을 분할 점령했던 4개국이 주도적으로 독일 통일 문제를 다루는 것이 서독에게는 굴욕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미국이 내놓은 절충안은 독일 문제 해결을 위해 당사자인 서독과 동독, 그리고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가 참여한 이른바 "2+4" 방식이었습니다. 물론 4대강국이 독일의 자주적 통일 문제에 끼어드는 모양이긴 했습니다만 소련이 제안한 4대강국 중심의 협의체 보다는 서독에게 훨씬 나은 방안이었을 겁니다.

한편, "2+4"를 통해 독일 통일문제를 협의한다는 방안은 1990년 2월 캐나다의 오타와에서 열린 나토와 바르샤바조약기구 회원국 외무장관 회의에서 다른 국가들에게도 알려집니다. 그런데 이게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다른 유럽 나라들도 판에 끼워달라고 들고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당시 미국 국무부장관이었던 제임스 베이커(James A. Baker III)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습니다.

우리가 오타와 회의에서 당시 추진 중이던 "2+4" 방식의 협상에 대해 발표하기 전 까지는 상황이 나쁘지 않았다. 우리는 이 문제를 나토 회의에서 다룰 생각이었다. 그러자 사태는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네덜란드와 이탈리아, 그리고 다른 나라들도 독일 문제에 끼고 싶었기 때문에 들고 일어났다. 그리고 만약 발언권을 가진 15개, 또는 16개국 대표가 발언을 신청해 독일이 재통일 될 경우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의문을 제기했다면 상황을 어찌 해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오타와에서 열린 나토 회의에서 미국측이 "독일의 재통일에 대한 우리의 계획안을 알려드리겠습니다"라고 발표하자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그때 갑자기 이탈리아 외무장관이었던 지아니 데 미첼리스(Gianni de Michelis)가 발언을 신청했다.

"독일 재통일 문제는 중요합니다. 그 문제는 이탈리아와 관계가 있는 문제이고 유럽의 미래와도 관계된 문제입니다. 우리도 협상에 참가해야 겠습니다."

그러자 겐셔(Hans-Dietrich Genscher)가 일어서서 말했다. "저도 한 마디만 하겠습니다." 그리고 겐셔는 거칠게 쏘아붙였다.

"당신은 이 게임에 끼어들 수 없어!(Sie sind nicht mit im Spiel)"

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위축되지 않았다. 나는 그의 태도에 꽤 놀랐다. 서독과 동독이 협상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다른 유럽국가들도 같은 요구를 하게 된다면 우리는 이 문제를 종결지을 방법이 마땅치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두 독일과 서유럽의 15개국... 아니 14개국, 그리고 소련과 미국, 여기에 캐나다 까지 끼어들었다면 의사 소통도 제대로 할 수 없었을 것이다.*

Alexander von Plato, Die Vereinigung Deutschlands - ein weltpolitisches Machtspiel(2. Aflg)(Bundeszentrale für politische Bildung, 2003), ss.283~284

겐셔는 외교적으로 매우 무례한 발언을 했는데 사실 이건 강대국이 중심이 되는 국제정치의 찝찝한 일면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독일이 보기엔 한 수 아래의 나라들인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통일문제에 끼어드는 것 만으로도 불쾌한데 그 보다 국력이 더 떨어지는 작은 나라들이 끼어들겠다고 나서고 있으니 짜증이 안 날 수 없었겠지요. 근대이후의 국제관계에서는 형식상 모든 나라가 동등한 위치에서 참여합니다만 실제로는 국력이 그대로 반영되지요.

그리고 유럽의 작은 나라들이 아웅다웅 거리는 것은 더 큰 나라들이 보기에 가소롭기 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베이커가 미국의 "2+4" 방안을 제안하기 위해 소련을 방문했을 때 고르바초프는 미국과 소련, 그리고 유럽 각국의 입장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고르바초프가 세바르드나제와는 다른 반응을 보였다는 것은 베이커가 놀랄만한 일이었다. 고르바초프는 역사적으로 위험한 문제였던 독일의 군국주의가 나타날 조짐은 없다고 생각했다. 대신 고르바초프는 이렇게 말했다. "본인도 기본적으로 미국측의 제안에 동의하는 바 이오." 소련은 새로운 현실에 맞춰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통일 독일의 장래를 걱정할 필요도 없을 것이오." 고르바초프는 프랑스나 영국 같은 나라는 유럽 내부의 주도권을 어느 나라가 쥐게 될 것인지 신경쓴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것은 소련이나 미국이 신경쓸 문제는 아니었다.

"소련과 미국은 대국입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세력 균형을 좌우할 능력이 있지요."**

Philip Zelikow and Condoleezza Rice, Germany Unified and Europe Transformed : A Study in Statecraft(Harvard University Press, 2002), p.182.

독일의 통일 과정은 국제 관계에서 강대국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잘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문제가 발생하면 모두가 관심을 가지지만 그 문제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대상은 실력이 뒷받침 되는 소수일 수 밖에 없지요.

불행인지 다행인지 한반도 주변에는 강대국 밖에 없어서 독일 통일 과정에서 처럼 딴지를 걸고 나설 자격미달(???)의 나라는 없습니다. 한반도 통일이 본격적으로 논의 될 때 몽골이나 베트남이 한 자리 요구할 리는 없겠지요^^;;;;

*위에서 인용한 겐셔의 발언은 꽤 유명해서 독일 통일과 관련된 많은 저작들에 실려있습니다. 젤리코와 라이스의 책에도 그 이야기가 있는데 미국 외교문서를 참고했기 때문에 베이커의 구술을 참고한 플라토의 서술과는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고르바초프의 이 발언은 직역하면 별로 재미가 없을 것 같아 의역을 했습니다. 원문은 "We are big countries and have our own weight." 입니다.

2009년 4월 21일 화요일

독일 군사사 연구자들의 공통적인 불만

요즘 읽는 책 중에 폴리(Robert T. Foley)의 German Strategy and the Path to Verdun : Erich von Falkenhayn and the Development of Attrition - 1870~1916이 있습니다. 독일의 군사상에서 다소 특이한 위치에 있는 소모전 전략의 등장과 퇴조를 다룬 연구인데 팔켄하인에 대한 조금 다른 해석이 재미있군요.

그리고 역시 두 세계대전을 다루는 연구 답게 2차대전 말기 연합군의 폭격으로 소실된 독일 사료의 문제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독일 군사사 연구자들이 공통적으로 토로하는 불만 중 하나가 1945년의 포츠담 폭격으로 이곳에 소장 중이던 프로이센군 및 제3제국기 독일육군의 1차사료들이 대량으로 유실되었다는 점 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폭격에서 살아남은 문서들은 소련군이 수집해 갔고 이것들은 1988년 고르바초프 정권기에 동독정부에 반환되었다는 정도 입니다. 소련이 문서를 반환한 뒤 1차대전과 관련된 새로운 연구가 여럿 발표되었지요.

육군 뿐 아니라 공군의 경우도 전쟁 말기 문서가 대량으로 파기되어 골치아프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이에 대한 언급을 처음 접한 것은 코럼(James Corum)의 독일 공군 창설기에 대한 연구 였는데 읽는 입장에서도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미군의 경우는 많은 자료가 남아 있기 때문에 독일군에 비해서 훨씬 미시적인 부분까지도 서술이 가능합니다. 대대 단위의 전투일지를 종합해 일일 전투식량 재고량까지 파악할 수 있으니 크레벨드(Martin van Creveld)가 지적한 것 처럼 미군은 자료가 많아 문제고 독일군은 자료가 적어 문제라는 말이 허언은 아닙니다.

군사사에 많은 관심을 가진 입장인지라 자료의 소실을 아쉬워하는 연구자들의 한탄을 읽을 때 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독일인들이 마이크로 필름 사본이라도 만들어서 별도로 보관했다면 전쟁통에 중요한 사료들이 완전히 소실되는 참사는 피할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의문을 품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기도 하지요.

쿠르스크 전투와 관련해서 소련군이 프로호로브카 전투에서 전술적 승리를 거뒀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진 이유도 전투에 참여한 무장친위대의 일지가 1980년대 까지도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찾아보면 1차대전의 경우도 비슷한 문제가 있을 것 입니다.

잡담을 조금 더 하자면.

이런 문제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 인데 한국전쟁 초기에 서울이 순식간에 함락되다 보니 국방부의 주요 문서들을 이송하지 못한 채 상당수를 잃어 버린 경험이 있습니다. 결국 빈 공백을 미국 군사고문단의 문서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하는데 그럴 때 마다 우리가 남긴 기록이 단 한 장만 더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백선엽 장군도 한국전쟁 당시 우리가 남긴 기록이 너무 없어서 아쉽다는 이야기를 한 일이 있지요.

조지 오웰이 남긴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는 말은 정말 핵심을 찌르는 것 같습니다. 미군 기록에 많이 의존하다 보니 어떤 경우에는 정말 미국의 시각으로만 문제를 바라보게 되더군요. 그럴때는 정말 식은 땀이 흐르는 것 같았습니다.

2008년 8월 10일 일요일

소련-러시아 장교단의 붕괴와 그 후유증 : 1987~

올림픽이 조용히 치러지나 했더니 러시아가 그루지아를 공격해서 꽤 시끄러워 졌습니다. 때마침 라피에사쥬님이 이번 사태에 대해 잘 정리된 글을 올려주셔서 흥미롭게 잘 읽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사태와 관련해서 밀리터리 매니아(???) 들이 인터넷 게시판들에 올려놓은 의견을 보면 실제 이상으로 현재 러시아의 행동이나 능력을 과장되게 인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아직도 러시아가 군사적으로 미국과 맞먹는 강대국이라고 인식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진짜’ 충격이었습니다. 러시아의 군사력은 1990년대 초반 소련의 해제와 뒤이은 군대의 구조적 붕괴의 충격에서 겨우 회복되는 단계에 있을 뿐입니다. 국경을 인접한 작은 나라와 군사분쟁을 벌이는 것을 가지고 소련의 부활이니 푸짜르가 어쩌고 하는 이야기들을 보면 어이가 없을 지경입니다.

러시아의 군사력이 미국과 비교했을 때 얼마나 취약한 상황에 처해있는 가는 조금 부지런히 관련 자료들을 구해보면 쉽게 알 수 있는 것 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러시아군 장교단의 현실이 이 점을 가장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러시아의 장교단은 구소련 시절과 비교하면 형편없는 규모로 줄어들었고 이것을 다시 소련 시절의 규모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정말 엄청난 과업이라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러시아 장교단이 처한 현실을 다루기 위해서는 먼저 고르바초프 말기의 소련 장교단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소련에서 장교라는 직업은 1970년대 까지는 매우 선호되고 있었지만 1980년대로 들어가면서 조금씩 기피되는 직업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 1980년대 중반의 시점에서 장교라는 직업이 경제적으로 큰 매력이 없었다는 점이 큰 문제였습니다. 장교의 낮은 생활수준은 소련이 건국된 이후 붕괴될 때 까지 여전했기 때문에 중견 간부급 이상의 부패문제는 근절할 수 없는 문제일 정도였습니다.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1980년대로 들어가면 도시 중산층들이 장교에 지원하는 비율은 계속 낮아졌고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오려 한 것은 교육수준이 상대적으로 낮은 농촌출신들이었습니다. 물론 군사기술의 발전으로 장교가 되기는 더 어려워 졌기 때문에 농촌출신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결국 1980년대로 들어가면 장교의 정원을 채우는 것이 매우 어려워 집니다. 예를 들면 모스크바 군관구는 1987년에 새로 임관하는 장교가 정원에서 19% 부족했는데 1988년에는 무려 43%가 부족할 정도였습니다. Roger Reese가 지적하듯 1980년대의 장교단은 군인으로서의 자부심 보다는 안정적인 급여 등 현실적인 이유에서 장교를 택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마나 장교라는 직종의 매력이었던 안정성이 사라지자 소련 장교단은 순식간에 붕괴하기 시작합니다. 이미 1988년부터 위관급 장교들이 대량으로 전역을 신청하고 있었고 이것은 그대로 소련이 붕괴할 때 까지 지속됩니다. 소련 장교단의 열악한 생활 수준은 고르바초프의 방어 중심의 군사정책으로 동유럽에서 철수한 병력이 본토로 들어오면서 더 심각해 집니다. 대표적인 것이 주택 부족문제였는데 1990년 2월 경에는 집이 없는 장교가 128,100명에 달할 지경이었습니다. 또 장교의 급여수준도 매우 형편없었습니다. 1990년 소위의 월급은 270 루블이었는데 당시 자녀 없는 부부의 최저 한달 생계비는 290루블이었습니다. 게다가 개혁개방 정책으로 서방, 특히 미국 장교들이 어떻게 생활하는지에 대한 정보가 장교단 사이에 퍼지면서 소련 장교단의 사기는 급강하해 버립니다. 이런 형편이었기 때문에 소련이 붕괴되기 전에 국가를 지켜야 할 장교단이 먼저 붕괴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소련의 붕괴는 이미 시작된 소련-러시아 군대의 붕괴를 가속화 시켰는데 특히 장교단에 가해진 타격은 엄청났습니다. 이미 소련이 붕괴되기 전부터 열악한 생활수준 때문에 장교단은 급속히 감소하고 있었는데 소련의 붕괴로 그나마 보장되던 안정성 조차 사라지자 장교단의 해체는 제동을 걸 수 없을 정도로 진행됩니다.
가장 큰 원인은 역시 경제적 곤란이었습니다. 이미 군대가 형편없이 쪼그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정부는 경제난으로 그나마 남아있는 장교들 조차 제대로 대우해 줄 수 없었습니다. 1994년에도 집없는 장교가 12만명에 달했는데 이것은 훨씬 많은 장교가 있었던 1990년과 비슷한 수준이었습니다. 상황이 이 지경이었으니 장교를 지망하는 사람은 급격히 감소합니다. 1989년의 경우 장교를 지원하는 경쟁률이 1:1.9였는데 1993년에는 1:1.35가 됩니다. 여기에 장교를 지원하는 지원자의 자질도 1980년대 이래로 꾸준히 하락하고 있었으니 통계에 가려진 내용은 더욱 더 참담했습니다. 1992년 러시아 국방부가 병력 감축을 위해 36,000명을 조기전역 시키겠다고 발표하자 59,163명이 전역을 신청했고 1993년에 다시 19,674명을 전역시키려 했을 때는 무려 60,033명이 전역해 버립니다. 1992년부터 1994년 사이 러시아 국방부는 71,000명의 장교를 감축하려 했는데 실제로는 155,000명이 자발적으로 전역해 버렸고 게다가 그 절반이 30세 미만의 청년 장교들이었습니다. 러시아 군의 미래를 짊어질 중핵이 무너져 버린 것 입니다. 게다가 이 시기는 암울했던 옐친 행정부가 경제난 때문에 군사비를 계속해서 삭감하고 있었으니 달력이 넘어갈수록 장교 부족은 심각해 졌습니다. 1995년에는 사관학교 생도의 50%가 임관 전에 자퇴할 정도였고 이것은 초급장교의 부족을 가져왔습니다. 같은해에 장교 부족은 정원의 25%였는데 위관급의 경우는 정원에서 50%가 미달이었습니다. 이 해의 군축에서 위관급 장교는 2,500명을 전역시킬 예정이었는데 실제 전역한 인원은 11,000명이었습니다. 젊은 장교들은 늦기전에 사회에서 기회를 잡기 위해 주저않고 군대를 떠났습니다. 1998년 유가 폭락으로 인한 경제난은 정부의 월급에 의존하는 장교들에게 최악의 고난이었습니다. 같은 해 기준으로 소위의 월급은 354루블, 중령은 2,135루블이었는데 당시 러시아에서 빈곤층으로 분류되는 3인 가족 가구의 평균 소득은 2,600 루블이었습니다. 즉 중령 조차도 빈곤층 수준의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 입니다. 이것은 장교들의 대규모 자살을 불러왔는데 1998년 러시아 전체 자살자의 60%가 장교였다는 통계는 이 시기 러시아 장교단이 얼마나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었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국내에도 번역된 『How to Make War』의 1995년판에서 저자인 James F. Dunnigan은 당시 러시아 군대가 처한 문제점을 수습하는데 수년은 걸릴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이것은 아직까지 진행 중이란 점에서 꽤 잘 맞은 예언 같습니다.

1998년은 지금까지 러시아 장교단이 겪었던 최악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장교단은 계속해서 축소되었고 새로 보충되는 인력의 질적 수준도 80년대에 비해 크게 낮아졌습니다. 게다가 남아있는 장교의 80%도 미래에 대해 비관하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최악이라 할 만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넘기면서 상황은 조금씩 개선되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큰 원인은 푸틴 집권 이후 군인의 생활수준 개선을 위한 직접적인 조치, 예를 들어 급여 인상 등이 적극적으로 시행된 것이 주효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교단의 생활수준은 민간인에 비해 여전히 낮았으며 푸틴 집권 초기인 2001년의 경우 여전히 92,000명의 장교가 관사를 지급받지 못했으며 이 중 45,000명은 아예 거주할 집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러시아의 경제가 유가 회복에 힘입어 조금씩 개선되고 있었지만 경제에 대한 불안감은 여전했기 때문에 장교단은 특히 더 큰 불안감을 느꼈습니다. 예를 들어 2004년에 장교 급여가 인상되지 않는다는 소문이 퍼지자 위관급 장교의 대량 전역사태가 다시 벌어졌던 것이 대표적입니다. 장교단의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해서 2005년 러시아 의회는 소위의 월급을 7,485 루블로 인상하겠다는 발표를 했는데 같은 해 3인 가족의 최저 생계비는 7,594 루블이었습니다. 장교의 열악한 생활수준을 개선하기 위해서 2006년에 푸틴 대통령은 3년에 걸쳐 장교의 급여를 67% 인상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았고 현재 이 공약은 고유가를 바탕으로 착실히 이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2008년 현재까지도 러시아 장교단의 생활수준은 민간사회에 비해 조금 뒤떨어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의견이며 체첸과 같은 위험지역 근무를 지원하는 장교가 많은 것도 추가수당을 받아 조금이라도 생계를 개선하기 위한 것 입니다.
푸틴 행정부가 옐친 시기의 군사적 붕괴상태를 다소 나마 개선시킨 것은 사실인데 어떻게 보면 러시아의 장교단 자체가 붕괴될 대로 붕괴되어 최저점에 도달했기 때문에 개선된 것으로 보일 뿐이지 소련군이 전성기에 달했던 시절의 장교단 수준에는 발끝조차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현재 상태의 러시아로서는 지금 있는 장교단의 생활수준을 유지, 또는 향상시키면서 장교단을 확충할 수단이 뾰족하지 않다는 것 입니다. 장교단의 확충 없이 군사력을 증강하기는 어렵습니다. 러시아가 현재 규모의 군대를 유지하면서 준비태세와 숙련도를 높이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겠지만 다시 병력을 증강시켜 미국과 맞설만한 수준으로 만드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현재의 러시아 군 병력이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그 중 장교는 얼마인지는 웹에서 검색해도 충분히 나오는 것들이니 더 부연설명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러시아의 군사력 증강이 어떻게 될 것인지는 장기적으로 지켜봐야 할 문제이지 국내 언론 기사에 가끔씩 보도되는 자극적인 몇 줄의 기사만 가지고 호들갑 떠는 것은 좀 그렇습니다.


참고문헌
James F. Dunnigan/김병관 역, 『현대전의 실체』, 현실적 지성, 1995
Dale R. Herspring, 『The Kremlin and the High Command : Presidential Impact on the Russian Military from Gorbachev to Putin』,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6
William E. Odom, 『The Collapse of the Soviet Military』, Yale University Press, 1998
Roger. R. Reese, 『Red Commanders : A Social History of the Soviet Army Officer Corps, 1918~1991』,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5
Brian D. Taylor, 『Politics and the Russian Army : Civil-Military Relations, 1689~2000』,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Anne C Aldis, Roger N McDermott(ed), 『Russian Military Reform, 1992-2002』, Routledge, 2003

2007년 11월 29일 목요일

The Red Army 1918~1941 : From Vanguard of World Revolution to US Ally - Earl F. Ziemke

현재는 비참할 정도로 쪼그라들어 과거의 위용이라곤 찾아 보기 힘든 러시아군이지만 불과 20년 전만 하더라도 이 군대는 소련군이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를 공포에 떨게 했었습니다. 요즘도 가끔씩 텔레비전 뉴스에서 방송되던 소련군의 붉은광장 퍼레이드를 지켜보며 전율을 느끼던 때가 생각나는군요.
특히 소련군대는 역사상 최대의 전쟁인 독소전쟁을 통해 세계 최고의 군대였던 독일군을 실력으로 격파한 사실상 유일한 군대였기 때문에 그 명칭이 가지는 압도감이란 단순한 통계 이상의 것 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냉전시기 소련군대는 중요한 연구의 대상이었고 특히 그 군대의 기원은 매우 흥미로운 주제였습니다. 러일전쟁과 1차대전에 연달아 패배했던 군대가 불과 20년 만에 세계 최강의 군대로 일어섰다는 점은 대단한 매력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냉전시기 창군 초기의 소련군에 대한 서방측의 최고의 연구는 에릭슨(John Erickson)의 The Soviet High Command : A Military-Political History, 1918-1941이었습니다. 이 책은 분량이나 서술의 치밀함에서 그야말로 압도적인 물건이었고 걸작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는 저작이었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도 이 책은 현재로서도 비교할 만한 대상을 찾기 힘든 걸작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출간된 시기가 있기 때문에 세부적인 측면에서 부족한 점은 분명히 있습니다. 특히 고르바초프의 집권 이후 공개된 수많은 1차 사료들은 몇몇 사건들에 대해서는 근본적인 재평가를 불러오기도 했으니 이런 점들을 수용한 새로운 연구가 필요해 진 것은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2004년에 출간된 짐케(Earl F. Ziemke)의 The Red Army 1918~1941 : From Vanguard of World Revolution to US Ally는 그간의 새로운 연구성과를 대폭 반영해 쓰여진 창군부터 독소전 초기까지의 소련군의 역사를 다룬 저작입니다. 이 책은 짐케가 구상한 독소전 3부작의 가장 앞 부분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는 저작입니다.
특이하게도 짐케의 3부작은 그 마지막인 Stalingrad to Berlin이 먼저 나왔으며 그 다음으로 2부인 Moscow to Stalingrad가 나왔습니다. 짐케는 원래 1부에 해당하는 독소전 계획부터 모스크바 전투까지를 다룬 저작 또한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주로 독일측의 시각에서 서술할 계획이었는데 소련의 붕괴로 대량의 소련측 1차 사료를 사용할 수 있게 된 결과 계획을 변경했다고 합니다. 즉 기존의 저작들과 달리 소련의 시각에서 독소전 초기까지를 다루는 책이 나오게 된 것 입니다.

결국 원래 의도했던 바와는 달리 짐케의 이 책은 소련군의 초기 역사를 다루는 저작이 되어 버렸는데 그 덕분에 에릭슨의 연구와 직접적으로 비교될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에릭슨의 저작 또한 창군부터 모스크바 전투까지를 다루고 있어서 두 저작이 다루는 시기 또한 겹치게 됐습니다.
개인적으로 평가하면 짐케의 저작도 매우 훌륭하지만 에릭슨의 저작과 비교하면 다소 부족하다는 생각입니다. 짐케의 입장에서 수십년 먼저 나온 에릭슨의 저작을 당연히 의식하고 썼을 텐데 결과는 약간 기대에 못 미치는 게 아니었을까 하는 느낌입니다. 일단 짐케의 저작은 분량이 에릭슨의 저작보다 적은데다가 내용의 배분에 있어 균형이 다소 안 맞는 느낌입니다. 특히 붉은군대의 창군과 적백내전에 대한 서술이 풍부한데 비해 20~30년대의 발전과정은 다소 부족한 느낌입니다. 이 책은 총 21개 장으로 되어 있는데 1장부터 8장까지가 1917~1921년 시기를 다루고 있는 반면 1922~1939년까지의 시기는 9장부터 14장까지에 불과합니다. 물론 1917~21년은 붉은군대의 기본 골격이 형성되었고 또한 붉은군대의 군사교리의 골간을 이루는 중요한 경험이 축적된 시기이니 만큼 상세한 설명이 필요하겠지만 서술에 있어 균형이 다소 안맞는 다는 점은 아쉽습니다.

하지만 2004년에 출간된 만큼 이 저작은 시기적인 이점을 잘 활용하고 있습니다. 출간된 시기가 늦은 만큼 최신의 연구성과들이 많이 반영되어 있지요. 특히 독소전 발발 직전 소련의 준비태세와 동원에 대한 설명은 에릭슨의 저작보다 뛰어납니다. 책의 후반부에서 다뤄지는 독소전 초기의 전황에 대한 기술도 간결하면서도 재미있습니다. 이 책에서 묘사하는 공황상태에 빠진 스탈린의 반응은 다른 저작에서도 많이 접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다소 아쉬운 점이라면 에릭슨의 저작에 있는 풍부한 통계가 이 책에는 없다는 점 입니다. 물론 이 시기의 통계자료야 글랜츠나 다른 연구자들의 저작들에 많이 들어있긴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간 아쉽긴 하더군요. 통계와 도표가 없다보니 꽤 복잡한 소련군의 편제개편을 글로만 이해해야 하는 불편이 있습니다.
책의 뒷 부분에는 전쟁 이후 소련의 독소전쟁에 대한 시각 변화에 대해 정리를 해 놓았는데 이게 참 재미있습니다. 특히 흐루쇼프 시기 스탈린의 격하운동과 맞물린 새로운 역사해석에 대한 부분이 좋습니다. 전반적으로 부록이 매우 부실한데 이 점은 매우 아쉽습니다.

전체적으로 2004년까지의 새로운 연구성과가 대폭 반영되어 있다는 점에서 좋습니다. 그리고 분량도 에릭슨의 저작 보다 적은 편이니 읽는데도 부담이 적은 편 입니다. 에릭슨의 저작은 너무 방대하다 보니 베게로 쓰기에도 불편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