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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8월 15일 수요일

냉전기 "독일편향적" 독소전쟁 서술을 비판하는 경향에 대한 잡상

습기찬 여름철 눅눅해지는 헌책들을 정리하다가 빼든 Stalingrad to Berlin 때문에 뻘글 하나 써봅니다.

유명한 군사사가 데이빗 글랜츠David Glantz가 1987년에 발표한 「2차대전기 동부전선에서 전개된 작전에 대한 미국의 시각American Perspectives on Eastern Front Operations in World War II이라는 글은 발표 당시 냉전으로 인한 사료적 한계, 반공적 시각이 결합된 영어권의 2차대전 인식을 날카롭게 비판했습니다. 이 글이 발표된 시점은 마침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정책이 진행되던 시기와 맞물리기도 합니다. 발표된 시점 때문인지 몰라도 이 글은 몇년 뒤 폭발적으로 발전하게 될 독소전쟁사 연구의 신경향을 알리는 나팔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세부적으로 따지자면 글랜츠의 글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영어권 국가를 중심으로 비판하는 것이기에 이 글이 냉전기 서방의 독소전쟁사 연구를 총괄하는 것은 아닙니다.

전체적인 틀에서 25년전 글랜츠가 비판한 내용은 핵심을 정확하게 찌르고 있습니다. 존 에릭슨John Erickson과 같은 걸출한 연구자가 소련의 목소리를 담은 몇 권의 대작을 내기도 했습니다만 냉전기 영어권의 독자들이 접할 수 있던 독소전쟁 관계 서적은 독일의 시각을 반영한 것이 다수였고 소련의 시각을 반영한 것은 소련의 공식출판물을 영어로 번역한 것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따져보면 미국의 독일 편향을 비판한 글랜츠도 몇몇 저작에서 지나친 러시아 편향이라는 문제를 드러냈지요. 더 들어가면 냉전기 소련의 시각을 반영한 저작들도 정치적인 이유로 왜곡이 극심하기는 매한가지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냉전기 영어권에서는 오히려 소련 편향으로 인한 역사인식의 왜곡도 제법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유명한 쿠르스크 전투에 대한 해석이지요. 오늘날에는 매우 잘 알려진 이야기 이기도 합니다만 냉전시기 쿠르스크 전투에 대한 서술은 존 에릭슨의 The Road to Berlin나 쥬크스Geoffrey JukesKursk는 거의 전적으로 소련의 공식서술에 따라 쿠르스크 전투를 재구성했으며 1990년대 까지 쿠르스크 전투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의 틀을 만들었지요.

재미있는 점은 냉전기 쿠르스크 전투에 대한 서술은 독일자료를 활용한 쪽이 더 정확하다는 점 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Stalingrad to Berlin은 글랜츠가 1987년에 쓴 글에서 상당히 높게 평가한 역작입니다. 이 책은 1966년에 출간됐는데 제한적으로 소련 자료들을 활용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사료는 미국이 노획한 독일 문서들이죠. 작전단위에서 서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서술이 세밀하지는 않지만 출간된 시점을 고려하면 걸작이라 칭할만 합니다. Stalingrad to Berlin에서는 쿠르스크 전투의 클라이맥스(???)라 할만한 프로호로프가 방면의 전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짤막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한편 남부집단군의 상황은 호전되고 있었다. 7월 11일 친위대 제2기갑군단은 쁘숄Псёл강 북안에 교두보를 확보했다. 소련군은 아직 독일 제48기갑군단의 작전지역에서는 프숄강 남쪽에서 완강하게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 제4기갑군은 프숄강 남안의 소련군이 버틸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호트Herman Hoth는 프숄강 북쪽으로 진출하는 것은 쉬울 것 같다고 보고했다.바투틴Никола́й Фёдорович Вату́ти은 가용가능한 예비대가 고갈되기 직전이었다. 반면 만슈타인은 아직 쓸수 있는 패가 남아있었다. 만슈타인은 쿠르스크로 향하는 최후의 일격에 무게를 실을 때가 됐다고 판단하고 제24기갑군단(제23기갑사단과 친위대 비킹사단으로 편성)을 제1기갑군 후방의 예비대에서 빼내 벨고로드 지구로 이동시키기 시작했다.켐프 분견군Armee-abteilung Kempf은 도네츠강 동안에서 공세를 시작한 뒤 6일 동안 진격에 큰 어려움을 겪었지만 7월 11일에 필사적으로 공세를 가해 제3기갑군단이 북쪽으로 돌파할 수 있었다. 다음날 바투틴은 스텝전선군에 소속되어 있던 제5근위군과 예비대로 있던 제5근위전차군을 반격에 투입했다. 그러나 제3전차군단은 진격을 계속했으며 13일 밤에는 상당한 규모의 소련군을 제3기갑군단의 측익과 친위대 제2기갑군단의 우익으로 포위할 수 있었다.
Earl A. Ziemke, Stalingrad to Berlin : The German Defeat in the East, (USGPO, 1966), p.137.

1996년에 출간되어 화제가 되었던 나이페George NipeDecision in the Ukraine를 읽으신 분들이라면 바로 아시겠지만 사실상 나이페의 저작은 친위대 제2기갑군단에 중점을 두고 전술단위로 자세한 분석을 했라는 점을 제외하면 짐케가 30년 전에 했던 서술의 틀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사실 냉전기 소련의 공식서술 보다는 객관적인 서술이었던 셈 입니다.

짐케는 그 뒤에 쓴 Moscow to Stalingrad : Decision in the East에서도 마찬가지로 독일측 사료를 중심으로 독소전쟁의 작전사를 서술했는데 여기서도 냉전기 소련의 연구가 외면하거나 놓친 부분들을 독일 사료를 활용해 잘 잡아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주코프가 1942년 겨울 중부집단군을 상대로 감행한 “마르스” 작전에 대해 서술한 것 입니다. 서방측 문헌에서 이 작전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은 대부분 독일자료에 의존한 짐케가 처음이었던 것 입니다. 이렇게 냉전기의 “독일편향”적인 저술들은 소련측이 외면하거나 왜곡한 사실들에 균형을 맞춰주는 기능을 어느정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냉전기 독소전쟁 서술에서 “독일편향”을 비판하는 것이 때로는 너무 야박한건 아닐까 하는 잡생각도 들곤 합니다.

2007년 11월 29일 목요일

The Red Army 1918~1941 : From Vanguard of World Revolution to US Ally - Earl F. Ziemke

현재는 비참할 정도로 쪼그라들어 과거의 위용이라곤 찾아 보기 힘든 러시아군이지만 불과 20년 전만 하더라도 이 군대는 소련군이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를 공포에 떨게 했었습니다. 요즘도 가끔씩 텔레비전 뉴스에서 방송되던 소련군의 붉은광장 퍼레이드를 지켜보며 전율을 느끼던 때가 생각나는군요.
특히 소련군대는 역사상 최대의 전쟁인 독소전쟁을 통해 세계 최고의 군대였던 독일군을 실력으로 격파한 사실상 유일한 군대였기 때문에 그 명칭이 가지는 압도감이란 단순한 통계 이상의 것 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냉전시기 소련군대는 중요한 연구의 대상이었고 특히 그 군대의 기원은 매우 흥미로운 주제였습니다. 러일전쟁과 1차대전에 연달아 패배했던 군대가 불과 20년 만에 세계 최강의 군대로 일어섰다는 점은 대단한 매력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냉전시기 창군 초기의 소련군에 대한 서방측의 최고의 연구는 에릭슨(John Erickson)의 The Soviet High Command : A Military-Political History, 1918-1941이었습니다. 이 책은 분량이나 서술의 치밀함에서 그야말로 압도적인 물건이었고 걸작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는 저작이었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도 이 책은 현재로서도 비교할 만한 대상을 찾기 힘든 걸작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출간된 시기가 있기 때문에 세부적인 측면에서 부족한 점은 분명히 있습니다. 특히 고르바초프의 집권 이후 공개된 수많은 1차 사료들은 몇몇 사건들에 대해서는 근본적인 재평가를 불러오기도 했으니 이런 점들을 수용한 새로운 연구가 필요해 진 것은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2004년에 출간된 짐케(Earl F. Ziemke)의 The Red Army 1918~1941 : From Vanguard of World Revolution to US Ally는 그간의 새로운 연구성과를 대폭 반영해 쓰여진 창군부터 독소전 초기까지의 소련군의 역사를 다룬 저작입니다. 이 책은 짐케가 구상한 독소전 3부작의 가장 앞 부분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는 저작입니다.
특이하게도 짐케의 3부작은 그 마지막인 Stalingrad to Berlin이 먼저 나왔으며 그 다음으로 2부인 Moscow to Stalingrad가 나왔습니다. 짐케는 원래 1부에 해당하는 독소전 계획부터 모스크바 전투까지를 다룬 저작 또한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주로 독일측의 시각에서 서술할 계획이었는데 소련의 붕괴로 대량의 소련측 1차 사료를 사용할 수 있게 된 결과 계획을 변경했다고 합니다. 즉 기존의 저작들과 달리 소련의 시각에서 독소전 초기까지를 다루는 책이 나오게 된 것 입니다.

결국 원래 의도했던 바와는 달리 짐케의 이 책은 소련군의 초기 역사를 다루는 저작이 되어 버렸는데 그 덕분에 에릭슨의 연구와 직접적으로 비교될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에릭슨의 저작 또한 창군부터 모스크바 전투까지를 다루고 있어서 두 저작이 다루는 시기 또한 겹치게 됐습니다.
개인적으로 평가하면 짐케의 저작도 매우 훌륭하지만 에릭슨의 저작과 비교하면 다소 부족하다는 생각입니다. 짐케의 입장에서 수십년 먼저 나온 에릭슨의 저작을 당연히 의식하고 썼을 텐데 결과는 약간 기대에 못 미치는 게 아니었을까 하는 느낌입니다. 일단 짐케의 저작은 분량이 에릭슨의 저작보다 적은데다가 내용의 배분에 있어 균형이 다소 안 맞는 느낌입니다. 특히 붉은군대의 창군과 적백내전에 대한 서술이 풍부한데 비해 20~30년대의 발전과정은 다소 부족한 느낌입니다. 이 책은 총 21개 장으로 되어 있는데 1장부터 8장까지가 1917~1921년 시기를 다루고 있는 반면 1922~1939년까지의 시기는 9장부터 14장까지에 불과합니다. 물론 1917~21년은 붉은군대의 기본 골격이 형성되었고 또한 붉은군대의 군사교리의 골간을 이루는 중요한 경험이 축적된 시기이니 만큼 상세한 설명이 필요하겠지만 서술에 있어 균형이 다소 안맞는 다는 점은 아쉽습니다.

하지만 2004년에 출간된 만큼 이 저작은 시기적인 이점을 잘 활용하고 있습니다. 출간된 시기가 늦은 만큼 최신의 연구성과들이 많이 반영되어 있지요. 특히 독소전 발발 직전 소련의 준비태세와 동원에 대한 설명은 에릭슨의 저작보다 뛰어납니다. 책의 후반부에서 다뤄지는 독소전 초기의 전황에 대한 기술도 간결하면서도 재미있습니다. 이 책에서 묘사하는 공황상태에 빠진 스탈린의 반응은 다른 저작에서도 많이 접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다소 아쉬운 점이라면 에릭슨의 저작에 있는 풍부한 통계가 이 책에는 없다는 점 입니다. 물론 이 시기의 통계자료야 글랜츠나 다른 연구자들의 저작들에 많이 들어있긴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간 아쉽긴 하더군요. 통계와 도표가 없다보니 꽤 복잡한 소련군의 편제개편을 글로만 이해해야 하는 불편이 있습니다.
책의 뒷 부분에는 전쟁 이후 소련의 독소전쟁에 대한 시각 변화에 대해 정리를 해 놓았는데 이게 참 재미있습니다. 특히 흐루쇼프 시기 스탈린의 격하운동과 맞물린 새로운 역사해석에 대한 부분이 좋습니다. 전반적으로 부록이 매우 부실한데 이 점은 매우 아쉽습니다.

전체적으로 2004년까지의 새로운 연구성과가 대폭 반영되어 있다는 점에서 좋습니다. 그리고 분량도 에릭슨의 저작 보다 적은 편이니 읽는데도 부담이 적은 편 입니다. 에릭슨의 저작은 너무 방대하다 보니 베게로 쓰기에도 불편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