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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 16일 화요일

프로호롭카 전투에 관한 새로운 연구 - A visual examination of the battle of Prokhorovka

JOURNAL OF INTELLIGENCE HISTORY 18-2호에 실린  이스트 앵글리아 대학의 Ben Wheatley의 논문 "A visual examination of the battle of Prokhorovka"를 읽었습니다. 이 논문은 독일공군의 항공사진을 바탕으로 프로호롭카 전투의 전술적 양상을 분석하는 내용입니다. 많은 항공사진과 현대의 위성사진을 바탕으로 논의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다만 잡지의 판형 때문에 항공사진이 매우 작게 실려 있어서 알아보기가 매우 힘듭니다. 필자의 해설이 없으면 항공사진에 실린 전차 잔해의 차종은 커녕 전차인지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입니다. 예를들어 LAH 사단의 4호전차 잔해와 기동중인 티거를 촬영한 항공사진을 보여주는데 논문에 실린 사진 만으로는 차종은 커녕 어디에 전차가 있는지 조차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이런 사진 자료는 큰 판형으로 편집을 해야 알아보기가 쉽죠. 이런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전술적인 상황을 매우 상세하게 분석하고 있어서 프로호롭카 전투와 무장친위대의 작전에 관심을 가지신 분이라면 반드시 읽어보셔야 할 글 입니다.

필자는 결론 부분에서 프로호롭카 전투 직후 만슈타인의 제안 대로 제24기갑군단을 추가로 투입해 공세작전을 지속했다면 소련군의 예비 전력을 섬멸하는 작전적 승리가 가능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물론 그 대신 제24기갑군단을 차출한 지역의 방어가 취약해지는 사태는 피할 수 없었겠지만, 소련군의 주력에게 더 큰 작전적 손실을 강요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2016년 12월 7일 수요일

스탈린그라드 삼부작 번역 기획안을 넣었을 때 제출했던 번역문의 일부


예전에 추진했다가 실패한 일이 떠오른 김에, 6년전 출판사 몇곳에 보냈던 원고의 일부분을 올려봅니다. 스탈린그라드 삼부작의 프롤로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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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수하야 베레이카 강 일대, 1942 7 23

독일군은 리쥬코프(A. I. Liziukov) 소장을 세 방향에서 조여가고 있었다. 리쥬코프의 지휘를 받는 제2 전차군단의 절반은 포위망에 갇혀 있었고 그는 이들을 구해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독일군을 저지하고 있었다.

리쥬코프는 3주전 까지만 하더라도 제5전차군의 지휘관이었다. 소련군은 독일군의 기갑군단에 준하는 대규모 기계화 부대를 만들기 위한 첫 번째 시도로 제5전차군을 편성했다. 소련군 최고사령부(Stavka)는 제5전차군을 전차 641대로 증강했다. 그리고 그 무렵 러시아 남부의 도시 보로네지를 막 점령한 독일 48기갑군단의 후방을 차단하기 위해 제5전차군에게 남진하여 새로운 공세를 시작한 독일군의 측면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돈 강에 인접한 주요 도시였던 보로네지는 독일군이 동쪽의 스탈린그라드와 남쪽의 카프카즈로 진격하는데 아주 적절한 북쪽의 거점이 되었기 때문에 순식간에 전투의 중점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리쥬코프가 상대하고 있는 것은 겨우 독일군의 기갑사단 한 개 뿐이라고 믿었으며, 5전차군은 독일군 기갑부대가 강행군 중인 보병사단들의 증원을 받기 전에 보급선이 지나치게 길어진 독일군의 선봉 기갑부대를 분쇄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시작부터 엉망으로 꼬였다. 소련군 지휘관과 참모 장교 중에는 대규모 기계화 부대를 전투에서 운용하는데 필요한 경험을 갖춘 사람이 소수에 불과했다. 리쥬코프의 전차군 사령부는 편성된 지 겨우 6주 밖에 되지 않았고 전차군 예하의 기갑사단급 부대였던 3개 전차군단은 4월에 막 편성된 상태였다. 소련군은 한 번의 작전에서 3개 전차군단은 커녕 3개 전차여단을 연계시켜 운용할 능력조차 없었다. 세 개의 전차군단은 강력하게 공격을 집중하는 대신 7 6일부터 10일 사이에 따로 따로 전투지역에 도착해 축차적으로 투입되었다. 게다가 소련군은 300대의 전차를 보유한 2개 기갑사단과 맞닥뜨렸으며 곧 수개의 보병사단이 여기에 증원되었다. 독일군의 압도적인 제공권은 리쥬코프의 임무를 더 어렵게 만들었다.

리쥬코프의 상급자들은 그를 도울 방도가 없었다. 소련군 최고사령부는 늘 하던대로 전투를 미시적인 부분 까지 통제하려 했으며 소련군 기갑국장을 포함한 고급 장교들과 함께 구체적인 지침을 연달아 내려 리쥬코프의 행동을 직접 감독하게 했다. 그동안 제5전차군을 지휘하는 전선군 사령부(집단군에 해당하는 소련군 부대단위)는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명령을 바꾸고 있었다. 브랸스크 전선군 사령관은 연달아 세명이 교체됐다. 리쥬코프와 그의 예하 지휘관들이 이 와중에 교체된 지휘관이 내렸던 지시를 따르려고 조치를 취하면 소련군 최고사령부가 비판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리쥬코프는 독일군의 주의를 끄는데 성공했고 독일군은 북쪽 측면을 방어하기 위해서 대규모의 병력과 항공기를 집결시켜야 했다. 스탈린은 이러한 성공을 전혀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7 15일에 전차군 사령부를 해체하고 리쥬코프를 전차군단 사령관으로 좌천시켰다.

하지만 이것은 고난의 끝이 아니었다. 브랸스크 전선군은 모스크바로부터 끊임없이 시달림을 받으면서도 독일군에 대한 반격을 계속했는데 독일군은 북쪽 측면을 방어하기 위해서 7 20일이 되자 제9기갑사단의 지원을 받는 보병사단들로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했다. 소련군은 여러 차례의 반격 끝에 7 21일에서 22일에 걸쳐 소규모의 돌파구를 열 수 있었으나 한 개의 소총병사단과 선봉을 맡은 리쥬코프의 제2전차군단에 소속된 두 개 전차여단으로 편성된 공격 부대는 곧 독일군의 보병 및 기갑 부대에게서 세 방향으로 포위당했다.

알렉산드르 일리치 리쥬코프는 유능하고 용감한 지휘관으로 1941년 모스크바 전투 당시 서부전선군의 제20군 사령관 블라소프(A. A. Vlasov) 중장의 부사령관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한 것을 통해 처음으로 소연방영웅의 칭호를 받은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러나 7 23, 리쥬코프는 1942년 한여름에 3주 동안 실패만 거듭한 끝에 마침내 막다른 골목에 몰리고 말았다. 브랸스크 전선군이 반격을 위해 편성한 특수작전집단 지휘관인 치비소프(N. E. Chibisov) 중장은 리쥬코프에게 독일군의 후방 깊숙히 고립된 제2전차군단의 두 전차여단을 찾아내 후방으로 안전하게 이끌고 나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리쥬코프는 7 23일 오전 9시에 군단 정치위원과 함께 KV 중전차에 올라탔다. 그는 볼샤야 베레이카에 있는 군단사령부에서 직접 전차를 지휘해 남쪽으로 향했고 수하야 베레이카 강을 건너 그의 두 전차여단을 구출하기 위해서 독일군의 보병과 기갑부대를 돌파하려 했다. 리쥬코프의 전차는 독일군 방어선에서 조금 못 미친, 188.5 고지에서 서쪽으로 몇 백미터 떨어져 있는 레뱌즈예 마을 남쪽의 숲에서 대전차포에 맞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옴싹달싹 못하게 된 전차는 독일군의 집중 포화를 맞게 되었고 리쥬코프는 전차 승무원들에게 탈출하라고 명령했다. 해치를 열고 탈출하던 도중 조종수는 기관총에 부상을 입었고 무전수는 전사했다. 리쥬코프는 전차에서 탈출하다가 포화에 휩쓸려 전사했다.

독일군은 제5전차군과 그 예하의 군단과 여단이 지리멸렬한 상태로 제각각 공격을 감행한 것을 보고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소련군의 참모 역량과 지휘관들의 능력에 대한 경멸감을 더 굳혔을 것이다. 그러나 소련군이 이런 식으로 반격을 거듭했기 때문에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에 도착하기도 전에 진격의 기세가 둔화되고 약화되었다. 그리고 리쥬코프가 자살적인 돌격을 감행한 지 불과 네 달도 지나지 않아 살아남은 소련군 기갑부대 지휘관들은 그들이 독일의 적수들과 충분히 맞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게 되었다.

2012년 8월 15일 수요일

냉전기 "독일편향적" 독소전쟁 서술을 비판하는 경향에 대한 잡상

습기찬 여름철 눅눅해지는 헌책들을 정리하다가 빼든 Stalingrad to Berlin 때문에 뻘글 하나 써봅니다.

유명한 군사사가 데이빗 글랜츠David Glantz가 1987년에 발표한 「2차대전기 동부전선에서 전개된 작전에 대한 미국의 시각American Perspectives on Eastern Front Operations in World War II이라는 글은 발표 당시 냉전으로 인한 사료적 한계, 반공적 시각이 결합된 영어권의 2차대전 인식을 날카롭게 비판했습니다. 이 글이 발표된 시점은 마침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정책이 진행되던 시기와 맞물리기도 합니다. 발표된 시점 때문인지 몰라도 이 글은 몇년 뒤 폭발적으로 발전하게 될 독소전쟁사 연구의 신경향을 알리는 나팔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세부적으로 따지자면 글랜츠의 글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영어권 국가를 중심으로 비판하는 것이기에 이 글이 냉전기 서방의 독소전쟁사 연구를 총괄하는 것은 아닙니다.

전체적인 틀에서 25년전 글랜츠가 비판한 내용은 핵심을 정확하게 찌르고 있습니다. 존 에릭슨John Erickson과 같은 걸출한 연구자가 소련의 목소리를 담은 몇 권의 대작을 내기도 했습니다만 냉전기 영어권의 독자들이 접할 수 있던 독소전쟁 관계 서적은 독일의 시각을 반영한 것이 다수였고 소련의 시각을 반영한 것은 소련의 공식출판물을 영어로 번역한 것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따져보면 미국의 독일 편향을 비판한 글랜츠도 몇몇 저작에서 지나친 러시아 편향이라는 문제를 드러냈지요. 더 들어가면 냉전기 소련의 시각을 반영한 저작들도 정치적인 이유로 왜곡이 극심하기는 매한가지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냉전기 영어권에서는 오히려 소련 편향으로 인한 역사인식의 왜곡도 제법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유명한 쿠르스크 전투에 대한 해석이지요. 오늘날에는 매우 잘 알려진 이야기 이기도 합니다만 냉전시기 쿠르스크 전투에 대한 서술은 존 에릭슨의 The Road to Berlin나 쥬크스Geoffrey JukesKursk는 거의 전적으로 소련의 공식서술에 따라 쿠르스크 전투를 재구성했으며 1990년대 까지 쿠르스크 전투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의 틀을 만들었지요.

재미있는 점은 냉전기 쿠르스크 전투에 대한 서술은 독일자료를 활용한 쪽이 더 정확하다는 점 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Stalingrad to Berlin은 글랜츠가 1987년에 쓴 글에서 상당히 높게 평가한 역작입니다. 이 책은 1966년에 출간됐는데 제한적으로 소련 자료들을 활용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사료는 미국이 노획한 독일 문서들이죠. 작전단위에서 서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서술이 세밀하지는 않지만 출간된 시점을 고려하면 걸작이라 칭할만 합니다. Stalingrad to Berlin에서는 쿠르스크 전투의 클라이맥스(???)라 할만한 프로호로프가 방면의 전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짤막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한편 남부집단군의 상황은 호전되고 있었다. 7월 11일 친위대 제2기갑군단은 쁘숄Псёл강 북안에 교두보를 확보했다. 소련군은 아직 독일 제48기갑군단의 작전지역에서는 프숄강 남쪽에서 완강하게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 제4기갑군은 프숄강 남안의 소련군이 버틸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호트Herman Hoth는 프숄강 북쪽으로 진출하는 것은 쉬울 것 같다고 보고했다.바투틴Никола́й Фёдорович Вату́ти은 가용가능한 예비대가 고갈되기 직전이었다. 반면 만슈타인은 아직 쓸수 있는 패가 남아있었다. 만슈타인은 쿠르스크로 향하는 최후의 일격에 무게를 실을 때가 됐다고 판단하고 제24기갑군단(제23기갑사단과 친위대 비킹사단으로 편성)을 제1기갑군 후방의 예비대에서 빼내 벨고로드 지구로 이동시키기 시작했다.켐프 분견군Armee-abteilung Kempf은 도네츠강 동안에서 공세를 시작한 뒤 6일 동안 진격에 큰 어려움을 겪었지만 7월 11일에 필사적으로 공세를 가해 제3기갑군단이 북쪽으로 돌파할 수 있었다. 다음날 바투틴은 스텝전선군에 소속되어 있던 제5근위군과 예비대로 있던 제5근위전차군을 반격에 투입했다. 그러나 제3전차군단은 진격을 계속했으며 13일 밤에는 상당한 규모의 소련군을 제3기갑군단의 측익과 친위대 제2기갑군단의 우익으로 포위할 수 있었다.
Earl A. Ziemke, Stalingrad to Berlin : The German Defeat in the East, (USGPO, 1966), p.137.

1996년에 출간되어 화제가 되었던 나이페George NipeDecision in the Ukraine를 읽으신 분들이라면 바로 아시겠지만 사실상 나이페의 저작은 친위대 제2기갑군단에 중점을 두고 전술단위로 자세한 분석을 했라는 점을 제외하면 짐케가 30년 전에 했던 서술의 틀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사실 냉전기 소련의 공식서술 보다는 객관적인 서술이었던 셈 입니다.

짐케는 그 뒤에 쓴 Moscow to Stalingrad : Decision in the East에서도 마찬가지로 독일측 사료를 중심으로 독소전쟁의 작전사를 서술했는데 여기서도 냉전기 소련의 연구가 외면하거나 놓친 부분들을 독일 사료를 활용해 잘 잡아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주코프가 1942년 겨울 중부집단군을 상대로 감행한 “마르스” 작전에 대해 서술한 것 입니다. 서방측 문헌에서 이 작전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은 대부분 독일자료에 의존한 짐케가 처음이었던 것 입니다. 이렇게 냉전기의 “독일편향”적인 저술들은 소련측이 외면하거나 왜곡한 사실들에 균형을 맞춰주는 기능을 어느정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냉전기 독소전쟁 서술에서 “독일편향”을 비판하는 것이 때로는 너무 야박한건 아닐까 하는 잡생각도 들곤 합니다.

2011년 5월 7일 토요일

판처파우스트의 괴력;;;;

심란해서 책 몇권을 끄적이던 중 이사예프(Алексей Исаев)의 Берлин 45-го에서 재미있는 표를 몇 개 보게 되었습니다. 1945년 4~5월 소련군의 기갑장비 손실과 그 원인을 정리한 표 였는데 꽤 흥미로운 통계라 한번 올려봅니다. 완전손실이 따로 구분된 표만 올렸습니다.


1. 제3근위전차군(1945. 4. 15~5. 2, 완전손실/파손)
포격
항공기
판처파우스트
지뢰
기타
T-34
97/198
0/1
65/105
49
IS-2
2/6
2
ISU-122
6/19
1/3
0/1
8
SU-100
4/11
5
SU-85
4/11
1/6
0/1
9
SU-76
2/12
6/11
0/2
6
SU-57
3/6
3/4
[표: Алексей Исаев, Берлин 45-го(Эксмо, 2007), с.681]


2. 제4근위전차군(1945. 4. 23~5. 2, 완전손실/파손)
포격
항공기
판처파우스트
지뢰
기타
T-34
20/50
14/16
1
6
IS-2
1/8
3
ISU-122
1/3
1
SU-100
3/11
2
SU-85
0/1
SU-76
0/7
2/1
1
SU-57
2/11
3/1
[표: Алексей Исаев, Берлин 45-го(Эксмо, 2007), сс.681~682]


3. 제11전차군단(1945. 4. 16~5. 2, 완전손실/파손)
포격
항공기
판처파우스트
지뢰
기타
T-34
42/121
0/1
23/13
1/3
IS-2
4/14
1/0
SU-85/100
2/16
2/2
SU-76
2/6
[표: Алексей Исаев, Берлин 45-го(Эксмо, 2007), с.678]


제가 위에서 인용한 세 개의 표는 베를린 전투에서 소련군이 상실한 기갑장비 중 일부 만을 보여줍니다. 다른 소련군 기갑부대들의 손실/완전손실과 구체적인 손실원인에 대한 통계도 있으면 좋겠지만 일단은 이 세 개의 표 만으로도 재미있는 사실 몇 가지가 보입니다.

그 중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것은 판쩌파우스트의 성과입니다. 피해 원인으로는 포격(전차포/대전차포) 다음으로 많은 것이 판처파우스트인데 완전손실이 차지하는 비율을 놓고 보면 판쩌파우스트가 정말 엄청난 물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포격에 비해서 완전손실의 비중이 높게 나타나는데 제11전차군단의 T-34의 경우 판처파우스트로 인한 완전손실이 파손의 두 배 가까이 될 정도입니다. 물론 이 표는 베를린 작전에 참가한 소련 기갑전력의 일부이기 때문에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판처파우스트가 꽤 치명적인 무기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단 맞으면 확실히 골로갈 확률이 높으니 말입니다.

소련 전차병들이 판처파우스트를 두려워 할 만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