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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16일 토요일

대조국전쟁사 서술에 관한 흥미로운 학위논문

2016년 애리조나 주립대학에서 나온 Yan Mann의 박사학위 논문 Writing the Great Patriotic War's Official History During Khrushchev's Thaw를 읽었습니다. 현재까지 대조국전쟁사 서술을 둘러싸고 계속되는 논쟁의 시발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유익한 글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논문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주장은 소련 체제의 프로파간다에 의해 만들어진 집단 기억이 소련 국민 개개인의 전쟁 체험에 스며들고 심지어는 개인의 기억과 문헌 기록 자체에 영향을 끼치는 단계까지 나갔다는 겁니다. 소련 체제의 특성상 공산당이 정보 유통 수단을 장악하고 집단 기억의 흐름을 통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 정권이 대조국 전쟁의 신화화를 통해 정권의 정당성을 얻으려 했다는 점을 지적하는 점도 주목할 만 합니다. 저자는 오늘날 푸틴 정권 치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관변 역사학의 준동이 소련 시절, 특히 브레즈네프 집권기의 흐름과 유사하다고 봅니다.

이 논문은 크게 여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1장은 스탈린 정권기 대조국 전쟁사의 기본적인 맥락이 형성되는 과정을 다룹니다. 저자는 스탈린 시기에 주로 프로파간다를 통해 형성된 집단 기억이 스탈린 사망 이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고 봅니다. 제2장은 스탈린 사후에서 흐루쇼프 집권 초기까지의 대조국전쟁사 서술을 다룹니다. 흐루쇼프가 정권을 잡은 뒤 스탈린을 공격하고 자신의 정치적 권위를 위해 정부 차원의 공식 대조국전쟁사 서술을 필요로 했다는게 골자입니다. 제3장 부터는 이 논문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3장과 제4장은 흐루쇼프 정권이 대조국전쟁의 공식 역사서의 1권과 2권을 편찬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제3장은 소련 공산당이 대중을 대상으로 한 공식대조국전쟁사 집필을 결정하고 저작의 골격을 잡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오늘날까지 통용되는 대조국전쟁을 3기로 구분하는 시대구분이 바로 흐루쇼프 시기에 완성되었습니다. 4장은 대조국전쟁사의 초기 집필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장에서는 전쟁 초기의 패배에 대한 공식 해석이 만들어지는 과정, 전쟁 초기의 주요 군사작전에 대한 서술, 전쟁 시기 프로파간다를 통해 날조된 영웅담들이 공식 역사의 일부로 포함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제5장은 소련 정부의 공식 대조국전쟁사의 첫 번째 권이 집필된 직후 소련 사회의 반응을 다룹니다. 정치적, 군사이론적, 군사작전에 관한 비평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제6장은 대조국전쟁사 집필 과정에서 스탈린의 역할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 그리고 소련 정치인들의 책임 회피와 대조국전쟁사 편찬이 완결되기 까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제가 이 글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던 이유는 지속적으로 반복된 소련 정권의 프로파간다가 역사 서술에 영향을 끼친 점을 지적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제5장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저자는 키예프 전투에 대한 서술을 예로 들어 소련군의 인명손실을 서술할때 상대적으로 정확한 독일측의 주장을 비난하고 소련군의 피해를 축소하는 경향이 있었음을 지적합니다. 또한 개전 초반 소련군의 장비 대다수가 성능적으로 구식이었다는 서술에 참전자들 상당수가 불쾌감을 드러냈다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참전자들은 소련군의 무기가 성능적으로 뒤떨어졌다는 서술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반발을 했는데 이런 경향은 오늘날의 러시아에서도 나타나고 있지요. 이 밖에도 이 논문에서는 스탈린을 비롯한 소련 정치인과 군인들의 역할을 둘러싼 논쟁, 군사작전과 소련 군사학의 역할을 둘러싼 논쟁 등 대조국전쟁사 집필 과정에서 있었던 수많은 요인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제2차세계대전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한번 읽어보실 필요가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2018년 9월 29일 토요일

러시아 연구자의 '최신 연구'는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 이고르 네볼신의 사례



러시아 연구자의 연구들이 영어로 번역되면서 2차대전기 소련군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최신연구 중에도 여전히 교차검증에 소홀하고 냉전기 소련의 주장만을 답습하는 저서도 있어서 주의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고르 네볼신이라는 러시아 연구자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7 6 오전 14군은 전선군예비대로 있던 15근위소총병군단과 17근위소총병군단을 증원받았다. 군단은 2근위전차군 전방의 2방어선에 전개해 전차군 예하 전차군단들을 엄호했다. 1943 7 6 오전 5시경 16전차군단은 예하의 2 전차군단을 투입해 올호바트카(Ольховатка)-스텝(Степь)-부틔르키(Бутыркий) 방면으로 반격을 감행했다. 반격은 제대로 조직되지 못했다. 4포병돌파군단과 2개의 자주포연대가 반격을 지원했다. 스노바(Снова)-포드소보로브카(Подсоборовка)선에 전개한 107전차여단이 선봉에 서서 231.1고지-스텝-오코프(Окоп) 방면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반격이 시작된 직후 독일군의 야포와 자주포가 107전차여단에 포격을 가했다. 전차를 후속하던 보병 부대가 손실을 입었다. 여단이 진격을 계속하자 적은 아군을 자신의 방어진지 깊숙이 끌어들였다. 여단은 티거 16대와 중형전차 경전차 70여대와 격돌했다. 페르디난트 구축전차도 맹렬한 포화를 퍼부었다. 107전차여단은 순식간에 T-34 29대와 T-70 17대를 잃었다. 살아남은 전차 4대는 보병부대의 후방으로 철수해 오시노븨이(Осиновый) 서쪽의 숲에 집결했다.107전차여단의 공격이 실패하고 1시간 카샤라(Кашара)-사모두로브카(Самодуровка) 선에 전개한 164전차여단이 포드소보로브카-스텝 방면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여단은 전차 150여대와 격돌했다. 여단은 압도적으로 우세한 적과 싸우다가 T-34 17대와 T-60 6대를 잃고 공격개시선까지 퇴각했다.16전차군단과 19전차군단이 조율된 강력한 반격을 가하지 못하고 대신 107전차여단과 164전차여단이 축차투입된 결과 막대한 손실(전차 89) 발생했다.  
Igor Nebolsin(Author), Stuart Britton(Trans), Stalin’s Favorite: The Combat History of the 2nd Guards Tank Army from Kursk to Berlin, Vol 1: January 1943-June 1944, Helion, 2015, pp.96~97.

네볼신은 소련군 107전차여단과 164전차여단이 각각 90여대, 150여대의 우세한 독일군 기갑전력과 격돌해 불리한 상황에서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합니다. 네볼신의연구 주석이 제대로 달려있지 않아 주장의 출처를 정확히 없습니다. 하지만 쿠르스크 전투는 매우 유명한 전투이다 보니 2차문헌 만으로도 어느정도 교차검증이 가능합니다. 독일군의 작전일지등 1차사료를 충실히 활용한 Martin Nevshemal 연구에도 해당 전투에 대한 서술이 있습니다. 이것을 인용하겠습니다.

2전차군 예하부대의 반격은 오전 02 50 이그나토프(Николай Васильевич Игнатов) 소장이 지휘하는 4포병돌파군단이 10분간의 공격준비사격을 가한 시작됐다. 독일 6보병사단은은 소련군이 반격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한채 베른하르트 자우반트(Bernhard Sauvant) 소령이 지휘하는 505중전차대대를 비롯한 지원 부대와 함께 집결지점에 대기하면서 04시로 예정된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소련군의 공격 준비사격이 6보병사단의 집결지역을 타격했다. 
 적은 우리 보병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엄청난 규모의 로켓포와 규모를 없는 []보병화기로 사격을 가했다.”  
하지만 독일군의 공격부대를 타격할 소련군 부대들이 모두 집결하지 못한 상태였다. 오직 16전차군단만이 계획대로 부틔르키-포늬리2 서쪽을 잇는 공격개시선에 전개했다. 17근위소총병군단은 계획대로 공격개시선에 전개하지 못해 소련군의 반격은 성공할 없었다. 
 17근위소총병군단은 7 5 하루종일 적의 공습을 받아 행군이 지연되었다. 군단의 주력부대는 20 30분이 되어서야 스노바-사모두로브카를 잇는 공격개시선에 전개할 있었다. 이때문에 전차부대와의 협동 작전을 펼치고 보병 부대의 공격을 준비하는데 문제가 발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격은 예정대로 시작됐다. 오전 04 16전차군단은 아침 햇살을 받으며 독일군의 전초진지를 돌파하고 드루자베츠키-스텝-사보로브카 선에 도달하는데 성공했다. 선봉에는 텔랴코프(Николай Матвеевич Теляков) 중령이 지휘하는 중형전차 30대와 경전차 20대로 편성된 107전차여단이 서고, 코릘로프(Н. В. Корылов) 중령이 지휘하는 동일하게 편성된 164전차여단이 좌익에 배치되었다. 
소련군이 진입한 지역은 우익으로는 비티우그-드루자베츠키를 따라 남북방향으로 깊은 도랑이 이어지고 좌익으로는 스노바강이 흐르고 있었다. 두개의 자연적 장애물 사이에는 상대적으로 평탄한 4km 폭의 공간이 있었다. 16전차군단은 이곳을 따라 북쪽으로 공격했다. 독일군의 방어선에 이르는 지역은 전차가 기동하기에 완벽한 조건을 갖추었다. 지형은 대체로 평탄한 편이었고 나무를 비롯한 장애물도 많지 않았다. 그러나 소련군에게는 불행하게도 지역은 강력한 티거 전차와 245, 904돌격포 대대의 돌격포들이 방어 태세를 갖추는데도 완벽한 지형이었다. 독일 기갑부대도 공격을 위해 지역에 집결한 상태였다. 
소련군 전차부대는 독일 6보병사단의 좌익(58척탄병연대) 방어선을 강타했다. 227.9고지를 둘러싸고 짧고 일방적인 전차전이 벌어졌다. 107전차여단은 독일 보병의 방어선을 돌파했지만 티거와 여러대의 돌격포의 매복 공격을 받았다. 여단은 불과 몇분만에 보유한 전차 50 46대를 잃었다. 코릘로프 중령의 164전차여단이 뒤이어 돌입했으나 일방적인 전투 끝에 전차 23대를 잃었다. 소련 전차부대의 공격은 시작하자 마자 끝나고 말았다공격에 나선 2 전차여단은 완전히 격파됐으며 보유한 전차의 거의 75% 잃었다. 
 Martin Nevshemal, Objective Ponyri!: The Defeat of XXXXI. Panzerkorps at Ponyri Train Station, Leaping Horseman Books, 2015, p.63.

전투는 독일 58척탄병연대 구역에서 일어났음을 있습니다. Martin Nevshemal 58척탄병연대에 배속된 돌격포 부대는 245돌격포대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505중전차대대는 완편되지 못한 상태여서 1중대와 2중대, 티거 31대만이 이날 전투에 참가한 상태였습니다.1)  245돌격포대대의 전력은 1943 7 4 기준으로 돌격포 22대와 105mm 돌격곡사포 9대로 31대였습니다.2) 소련군 107전차여단과 교전한 ‘70대의 중형전차와 경전차’, 164전차여단과 교전한 ‘150대의 전차 해당 구역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입니다. 독일군의 모든 기갑장비가 가동 상태였다 해도 최대 62대를 넘지 못하는데 네볼신은 독일군 기갑전력이 150대에 달했다는 과장된 서술을 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네볼신은 58척탄병연대에 배속되지도 않은페르디난트까지 있었다는 잘못된 서술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네볼신의 잘못된 서술은 어디에 근거를 하고 있을까요? 네볼신은 자신의연구 주석을 달지 않았으나 전반적인 내용은 소련 시절의 문헌과 동일함을 쉽게 파악할 있습니다. 소련군 총참모부의 쿠르스크 전투 연구에서 해당 전투에 관한 서술을 인용합니다.

작전 2일째의 전투는 16전차군단의 투입으로 시작됐다. 군단은 오전 4 스텝과 부틔르키 방면으로 107전차여단과 164전차여단을 투입해 반격을 감행했다. 107전차여단이 선봉에, 164전차여단이 후방 좌익에 배치되었다. 4포병돌파군단과 자주포 2 연대가 반격을 지원했다. 
반격이 시작되자 마자 독일군의 포병과 자주포가 107전차여단에 포격을 가했다. 여단을 지원하던 보병부대에 피해가 누적됐다. 하지만 선봉 부대는 2시간에 걸친 전투 끝에 적군을 몰아내고 포늬리 1(Поныри 1)-스텝-사보로브카(Саборовка) 잇는 선에 도달했다. 107여단은 진격을 계속하던 호를 파고 방어태세를 취하고 있던 티거 16대를 비롯해 수많은 중형전차와 경전차로 부터 집중사격을 받았다. 여단은 순식간에 46대의 전차를 잃었다. 살아남은 4대의 전차는 지원 보병 부대의 후방으로 후퇴했다.107전차여단이 퇴각한 164전차여단은 진격을 계속하다가 독일군 전차 150대와 조우했다. 여단은 적과 교전하다가 전차 23대를 잃고 공격개시선까지 퇴각했다. 
19전차군단장은 107전차여단과 164전차여단의 반격에 대한 정보가 들어오자 계획했던 공격을 취소했다. 대신 132소총병사단과 15소총병사단에 연락해서 사단포병으로 19전차군단을 지원해 것을 요청했다. 이로인해 16전차군단과 19전차군단이 동시에 강력한 반격을 가한다는 계획은 실현되지 못하고 단지 107전차여단과 164전차여단이 축차투입되는 결과만 초래했다.  
David M. Glantz and Harold S. Orenstein(Trans and Edit), The Battle for Kursk 1943: The Soviet General Staff Study, Frank Cass, 1999, pp.203~204.

네볼신의 서술이 소련의 공식 역사 서술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음을 쉽게 있습니다. 독일측 1차사료들은 거의 대부분 일반인에게 공개되어 있어 쉽게 교차검증이 가능함에도 소련 시기의 역사서술을 답습하고 있는 입니다. 아마존등에는 이고르 네볼신의 저작에 대해 호의적인 평이 많은데, 이렇게 좋은 평을 남긴 사람들이 교차검증을 봤는지 궁금합니다. 소련 시기의 잘못된 역사서술을 바로잡고자 노력하는 러시아 연구자들도 많지만 푸틴 집권 이후의 쇼비니즘적 풍토에서 소련 시기의 잘못된 역사서술을 되풀이하는연구자 여전히 존재합니다. 러시아 연구를 읽을때 주의해야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석
1) Martin Nevshemal, Objective Ponyri!: The Defeat of XXXXI. Panzerkorps at Ponyri Train Station, Leaping Horseman Books, 2015, p.57.
2) Niklas Zetterling and Anders Frankson, Kursk 1943: A Statistical Analysis, Frank Cass, 2000, p.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