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August 29, 2010

남베트남군 보병사단의 편성문제(1955~56)

얼마전 1950년대 베트남군 지원을 다룬 미육군의 공간사를 읽었습니다. 여기서 꽤 재미있게 읽었던 것은 1950년대 중반 베트남공화국(이하 남베트남) 군대의 편성문제였습니다. 제가 베트남전쟁에서 주로 관심을 가진 시기는 베트남화~남베트남 멸망에 이르는 시기이다 보니 베트남전쟁 초기에 대해서는 아주 개략적인 내용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특히 남베트남군의 초기 보병사단편제는 약간 의외였습니다.

 제네바 협정의 결과 1955년 남베트남이 공식적으로 출범했을 때 미국 군사고문단(MAAG, Military Assistance Advisory Group)은 예산상의 문제로 육군의 규모를 10만명으로 제한하려 했습니다. 이때 미국 쪽에서 군대를 감축하기 위해 6천명의 나이는 많지만 경험은 풍부한 고참 부사관을 일거에 전역시키기도 했는데 이건 나중에 미국의 치명적인 실수로 판명되었다지요. 어쨌든 남베트남은 북베트남의 군사적 위협에 맞서기 위해서 10만명 이상의 군대가 필요하다고 요구했고 그 결과 베트남군을 10개 사단 15만명으로 증강시킨다는 타협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시기를 다룬 연구 중에서 제가 처음으로 접했던 크레핀비치(Andrew F. Krepinevich, Jr)의 단행본에서는 초기 남베트남군의 사단 편제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한국전쟁의 영향 때문에 북베트남과 중국 등의 전면공격을 방어하는데 중점을 두었다고 설명하고 있었습니다.1)
그래서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남베트남군의 보병사단 편제는 포병연대를 가진 일반적인 보병사단 편제일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했습니다. 이 당시에는 한국군도 전쟁의 경험으로 사단포병을 연대급으로 확대해 나가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정규전을 염두에둔 편제라면 당연히 이런 편제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입니다.

그런데 얼마전에 미육군 공간사를 읽어봤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더군요. 1956년 당시 남베트남군의 편제는 일반적인 보병사단 편제가 아니라 오히려 한국전쟁 직전 한국군의 편제에 더 가까운 형태였습니다.
먼저 정규전 수행을 고려한 4개 야전사단은 편제상 병력 8,500명에 3개 보병연대, 그리고 ‘1개 포병대대’와 중대급 지원부대를 가지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사단급 편제에서는 한국전쟁 직전 38선에 배치된 한국군 보병사단과 유사한 구조지요. 그리고 6개의 경보병사단은 사단포병 없이 3개 보병연대로만 편성되었습니다.
물론 사단단위 편제에서는 한국전쟁 직전의 한국군과 비슷하더라도 실제로는 한국국전쟁 직전의 한국군 편제 보다는 훨씬 나은 편제였습니다. 연대 단위에서는 오히려 미군의 편제 보다도 나은 부분이 있더군요. BAR는 편제상 미군보병사단 보다 50% 많았고 81mm 박격포는 3분의 1이상 많았습니다. 경보병사단은 편제상 미군보병사단 보다 경기관총은 30% 더 많았고 BAR는 10% 더 많았습니다.2)  사단급 화력의 부족을 연대급 이하의 화력을 강화하는 것으로 메꾸는 구조를 취하고 있지요. 창군 초기 남베트남군대의 보급이나 전투지원능력을 고려한다면 나름대로 타당한 구조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북베트남군은 물론 경우에 따라 중국군과의 정규전도 고려했다는 편제치고는 부족하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편제입니다. 한국전쟁 직전 한국군의 편제가 한국의 경제사정이나 한국군의 능력을 고려하면 적당한 편제였을지 몰라도 정규전에는 부적합한 편제였지요.

크레핀비치의 저작에 남베트남군의 편제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서술이 있었다면 오해가 없었을 텐데 이점이 아쉽군요. 어쨌든 늦게나마 잘못 생각하고 있던 것들을 바로잡을 기회가 있어서 다행입니다.



1) Andrew F. Krepinevich, Jr, The Army and Vietnam(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86), p.22
2) Ronald H. Spector,  Advice and Support, The Early Years(U.S.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 1983), pp.262~268

Thursday, August 26, 2010

그럴싸한 변명

어떤 논문을 읽다가 웃기는 구절이 있어서...

패배한 이탈리아 군대의 장군들은 놀라울 정도로 패배의 원인을 자신들의 부하들에게 돌리는 경향이 있었다. 라 마르모라(Alfonso Ferrero La Màrmora)도 1866년(쿠스토자 전투에서 패배한 뒤)에 패배의 책임을 부하들에게 돌렸다. 바라티에리(Oreste Baratieri)도 아도와 전투에서 참패한 뒤 이탈리아인 부대를 탓했다. 그리고 카도르나(Luigi Cadorna)는 1917년 카포레토 전투에서 패배한 뒤 이렇게 변명했다.

“나는 쿠스토자와 아두와에서 패배했었던 군대를 지휘했을 뿐이다.”

John Gooch, “Italian Military Competence”, Journal of Strategic Studies, 5-2(1982), pp.262-263

비겁한 변명이지만 나름 그럴싸하게 들리는군요.

그럴싸한 변명

어떤 논문을 읽다가 웃기는 구절이 있어서...

패배한 이탈리아 군대의 장군들은 놀라울 정도로 패배의 원인을 자신들의 부하들에게 돌리는 경향이 있었다. 라 마르모라(Alfonso Ferrero La Màrmora)도 1866년(쿠스토자 전투에서 패배한 뒤)에 패배의 책임을 부하들에게 돌렸다. 바라티에리(Oreste Baratieri)도 아도와 전투에서 참패한 뒤 이탈리아인 부대를 탓했다. 그리고 카도르나(Luigi Cadorna)는 1917년 카포레토 전투에서 패배한 뒤 이렇게 변명했다.

“나는 쿠스토자와 아두와에서 패배했었던 군대를 지휘했을 뿐이다.”

John Gooch, “Italian Military Competence”, Journal of Strategic Studies, 5-2(1982), pp.262-263

비겁한 변명이지만 나름 그럴싸하게 들리는군요.

'지원병제 군대에 관한 대통령 위원회 보고서'를 다시 읽으면서

1970년에 나온 ‘지원병제 군대에 관한 대통령 위원회 보고서(The Report of the President’s Commission on an All-Volunteer Armed Froce)’를 다시 읽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몇 년전만 하더라도 이 보고서에서 주장하는 몇몇 논점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 이 보고서가 예측한 많은 사실들이 틀린 것으로 판명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생각은 조금씩 바뀌는 것이라 지금은 약간 다른 생각을 가지고 이 보고서를 읽고 있습니다. 이 보고서는 베트남전쟁을 겪고 있던 미국의 상황을 반영한 것이고 게다가 미국이라는 나라는 근대적인 징병제가 시작된 유럽의 국가들과는 전혀 다른 정치사회적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보고서는 징병제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만큼 현재의 우리들도 한번 읽어볼 만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보고서는 서두에서 모병제 반대진영에서 제기하는 아홉가지 문제들을 열거한 뒤 모병제 반대론자들이 주장하는 것들은 근거가 부족하거나 지나친 걱정이라고 답하고 있습니다. 이 보고서에서 들고 있는 모병제 반대진영의 주요 주장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모병제 문제에 관심을 가지신 분들이라면 쉽게 짐작하실 수 있는 문제들이죠.

1. 지원병 만으로 군대를 편성할 경우 유지비가 매우 많이 들어 국가가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2. 지원병 만으로 군대를 편성할 경우 갑작스러운 위기시에 신속하게 규모를 늘릴 수 있는 유연성이 부족해 질 것이다.
3. 지원병 만으로 군대를 편성할 경우 모든 시민은 국가에 헌신해야 하는 도덕적 의무가 있다는 전통적인 믿음을 약화시켜 애국심을 약화시킬 것이다.
4. 징집병은 (군에 대한) 민의 우위, 자유, 그리고 민주적 제도들을 위협하는 독립된 군사문화가 성장하는 것을 막아준다.
5. 지원병제에서 제시하는 높은 급여는 상대적으로 가난한 계층(미국의 경우 흑인)을 군대에 집중적으로 끌어들일 것이며 이것은 계급적인 약자들에게 국방의 부담을 전가하는 것이 될 수 있다.
6. 지원병제 하에서는 경제적으로 가장 취약한 계층이 주를 이룰 것이며 이들은 애국심이 아닌 금전적 보상을 바라고 입대하는 사실상의 용병에 불과할 것이다.
7. 지원병 만으로 군대를 편성할 경우 해외에 대한 군사적 모험을 부추기고 무책임한 대외정책을 조성하는 한편 군사력 사용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을 약화시킬 것이다.
8. 지원병으로 편성한 군대에는 유능한 인재가 들어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군대의 효율성이 저하할 것이다. 군인의 자질이 저하되면 군대의 권위와 존엄성도 떨어지고 이것은 다시 모병에 어려움을 가져올 것이다.
9. 완전한 지원병제를 실시할 만큼 국방예산을 늘리기 어렵기 때문에 결국 다른 국방 부문의 예산을 삭감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전반적인 국방 태세를 약화 시킬 것이다.

물론 보고서 작성자들은 이 아홉가지 문제 모두가 실제와는 거리가 있으며 지원병제 추진에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예언은 틀리기 마련입니다. 언급된 아홉가지 문제 중 아마 2번과 5, 6번 문제는 어느 정도 현실화 된 문제로 볼 수 있을 겁니다. 어쩌면 8번도 해당될 수 있겠군요. 어쨌든 지원병제가 직접적인 경제적 부담이 더 크다는 점과 징병제에 비해 우수한 인력을, 특히 낮은 계급에 충당하는게 어려워진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미국과 달리 인구와 경제력에서 여유가 없는 한국같은 나라는 더 위험하겠지요. 위에서 언급한 문제들이 더 노골적으로 드러날 수 도 있을 겁니다. 게다가 경제적, 안보적 환경은 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징병제를 계속 유지시키는 구실이 되고 있지요. 사실 저도 아직까지는 한국에서 징병제를 불가피하게 유지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강합니다. 한국의 현실에서는 장기적으로 군 복무 단축을 계속해서 12개월에서 18개월 사이로 줄일수만 있어도 다행이겠지요.

하지만 미국의 징병제 폐지론자들이 강하게 주장한 것 처럼 징병제란 아무리 좋게 포장하더라도 국가가 시민의 자유를 강제로 빼앗는 제도입니다. 어쩌면 프리드먼(Milton Friedman)이나 그린스펀(Alan Greenspan)이 주장한 것 처럼 서구의 근대적인 징병제도 실상은 중세의 군역과 다를바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한국의 징병제 처럼 불합리하게 운영되는 제도는 어떻게 변호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이상적인 근대적 징병제라면 무엇보다 한 사람의 시민으로써 시민의 권리를 보장하는 국가에 봉사하는 것이 되어야 할 텐데 한국의 실상은 정말 군역에 불과한 수준이니 말입니다. 필요성은 절감하는데 옹호하기 참 어렵습니다.

이 보고서를 처음 읽었을 무렵에는 자유주의적인 관점에서 근대적인 징병제를 비판하는 것이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강했는데 요즘은 제 생각도 조금 바뀌었습니다. 얼마전 군복무기간을 다시 24개월로 늘리자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반사적으로 화가 치밀더군요. 우리의 현실을 바라보면 징병제에 부정적인 생각이 드는 게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Monday, August 23, 2010

악마를 보았다

얼마전 CGV 포인트가 조금 있어서 포인트를 쓸 겸 악마를 보았다를 봤습니다. 한 번 보고 나니 생각보다는 나쁘지 않은 것 같아 남은 포인트로 한 번 더 봤습니다.

역시 이 영화에서 제일 재미있는 것은 최민식이 연기한 연쇄살인범 장경철입니다. 열등감에 찌들어 그 불만을 약자에게 쏟아넣는 전형적인 살인마를 재미있게 연기했더군요. 장경철이라는 인물은 큰소리는 뻥뻥치지만 실제로는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역겨운 인물입니다. 영화에 묘사되는 모습을 보면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별 볼일 없는 인물인데다 가족과도 사이가 나빠 보입니다. 하지만 영화 중간 중간 묘사되는 모습에서 나타나듯 자기 자신에 제법 대단한 인물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고 허세도 쩔죠. 실제로는 아닙니다만. 자신은 잘났지만 세상이 문제가 있어서 꼬였다고 착각하는 인물 같으니 그 불만을 엉뚱한 약자들에게 쏟아 넣을 수 밖에 없을 겁니다. 여태까지 세상에 알려진 한국의 연쇄살인범들과 비슷한 캐릭터입니다. 다소 과장되긴 했지만 꽤 그럴싸 합니다. 한국 영화에 한니발 렉터같은 고상하고 “강한” 연쇄살인범을 등장시키면 정말 어색하고 병신같았겠죠. 개인적으로는 이 찌질한 살인마의 살인행각을 더 많이 보여줬더라면 좋았겠습니다만 영화의 핵심은 이병헌이 연기한 김수현의 복수에 있으니 어쩔 수 없겠습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영화 중반에 나오는 장경철의 친구도 재미있었습니다. 세븐데이즈에서는 강간살인범을 연기했는데 이번 영화에서는 사람을 잡아먹더군요. 특이한 식성에다가 특이한 동거녀(정황상 살인은 같이 하는 모양이더군요)를 달고 다니는데 이 커플을 가지고 스핀오프를 하나 만들어도 좋을 듯 싶었습니다.

이야기 구조는 논리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았는데 뭐 대충 넘어가 줄 만 합니다. 한국에서 만드는 스릴러 치고 이야기 구조가 논리적으로 매끄럽게 만들어진 물건이 별로 없잖습니까. 이미 세븐데이즈나 용서는 없다 같이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스릴러들이 많았던지라 이 영화는 충분히 봐줄 만 합니다.

이곳 저곳의 영화평을 보니 좀 더 세게 나갔어야 했다는 의견이 꽤 많던데 대한민국의 주류 영화계에서 이 정도 물건을 내놓은 것만 해도 장족의 발전 같습니다. 앞으로 좀 더 유능하고 막나가는 감독이 나타나 한 술 더 뜨는 물건을 내놓았으면 싶군요. 뭐, 사실 제 개인적으로도 감독이 막 나가려다 못 나간듯한 느낌이 들긴 했습니다. 이번 부산영화제에 무삭제판을 내놓는다던데 시간이 된다면 한 번 보러가고 싶군요. 대한민국의 제멋대로 심의기준을 생각하면 DVD판도 무사히 나올 수 있을지 의심스럽습니다.

Friday, August 20, 2010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2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1


에. 1-2라고 번호를 달긴 했습니다만 사실 특별한 내용은 아니고 사용되는 용어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하려고 합니다.

먼저 2009년 10월에 「테렌스 주버(Terence Zuber)와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을 썼을 때는 Aufmarschpläne를 ‘기동계획’으로 옮겼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을 다시 정리하기 위해서 예전에 읽었던 글들을 다시 읽다 보니 ‘기동계획’이 아닌 다른 용어로 옮기는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단 1차대전을 전후한 시기 독일군 총참모부 내에 Aufmarschabteilung이라는 부서가 존재하는데 이것을 ‘기동계획과’로 옮기자니 적당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부서가 부대 이동과 배치를 담당하기 때문에 단순히 기동계획으로 옮기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겠더군요. 그래서 Aufmarschpläne도 다른 용어로 옮기는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금 생각을 하다가 영어권에서 Aufmarsch를 Deployment로 옮기는 것을 보고 ‘전개’로 옮기면 좋겠다 싶더군요. 실제 부서의 역할을 고려하면 좀 더 적당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Aufmarschpläne를 ‘부대전개계획’으로 바꾸게 되었습니다.

다음은 Stabsreisen이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을 영어로 옮기면 Staff Ride가 되는데 이것을 한국군에서는 ‘전적지 답사’로 옮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의 내용을 보면 아시겠지만 독일군 총참모부에서 실시한  Stabsreisen은 단순히 ‘전적지 답사’로 옮기면 영 어색하지요;;;; 결과적으로 ‘참모부 연습’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독일어 용어를 옮길 때 고민되는 경우가 꽤 많은데 앞으로도 고민되는 용어에 대해서는 따로 이야기 해 볼 생각입니다.

이게 다 셔먼 때문이다

어제 패튼과 셔먼 이야기가 나온 김에...

패튼은 별종이라 치고 셔먼을 대표로 하는 미영 연합군의 전차들이 한심하다는 것은 많은 장군들이 공감하고 있었습니다. 지난번에 소개한 브래들리의 경험담도 그렇고 전후 회고록을 쓴 연합군측 장군들은 한두마디라도 이 문제를 언급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전쟁 중 영국군 30군단을 지휘한 호럭스(Brian Horrocks)의 회고록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더군요. 아래 인용문이 포함된 장은 호럭스가 아닌 다른 사람이 집필했는데 호럭스의 검토를 거쳤으니 호럭스도 비슷한 생각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폴란드 기갑사단장 마첵(Stanisław  Maczek) 장군은 작전에 차질을 초래한 다양한 원인들을 지적했는데 이것들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었다. 마첵 장군은 기갑부대가 좁은 회랑으로 쇄도해 들어가면서 융통성 없는 정면 공격만을 할 수 밖에 없었으며 이것은 가장 위험한 과정이라고 강조했다. 마첵 장군은 이 핵심적인 지구에서 독일군의 방어 체계는 계속해서 강화되었으며 애초에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종심이 깊었다고 지적했다. 나는 작전 지역 전체에 걸쳐 ‘매우 세심한 노력을 기울여 완벽하게 구축된 독일군의 참호를 찾아낼 수 있었으며 이중 많은 수가 길가에 위치해 있었으며 또한 통나무로 보강되었다’고 적었다. 폭격은 이곳과 다른 대부분의 독일군 거점에 대해 효과가 미미했다. 독일군의 진지들은 상대적으로 장애물이 적은 이 일대에 널려있는 숲, 과수원, 생울타리(보카쥬), 그리고 석조 건물들 사이에 잘 은폐되어 있었으며 독일군의 전차병과 대전차포 사수들에게 양호한 사격진지가 되었다.

마첵 장군은 연합군에게는 가벼운 크롬웰과 셔먼 전차 밖에 없다는 것이 약점이라고 지목했다.(두 전차는 각각 27톤과 30톤이었다) 이 전차들은 보다 무거운 독일군의 판터나 티거(이것들은 각각 45톤과 54~68톤 이었다) 를 격파하기 위해서는 500미터 이내로 접근해야 했는데 그 반면 티거에 탑재되었거나 야포로 쓰인 88mm는 2킬로미터 밖에서 연합군 전차들을 해치울 수 있었다. 판터의 주포와 무장도 크롬웰과 셔먼 보다 월등히 우월했으며 4호전차 정도가 비슷한 성능이었다. 그래서 연합군 전차는 독일군의 전차를 숫적으로 압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론상 우세하다는 기동성 조차 형편없는 성능 때문에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다. 토 탈라이즈(Totalize) 작전 중 폴란드군은 65대의 전차를 잃었으며 캐나다군은 그보다 더 많은 전차를 잃었다. 시몬즈(Guy Simonds, 캐나다군 2군단장) 장군은 토탈라이즈 작전이 실패한 원인이 두 기갑사단(캐나다 4기갑, 폴란드 1기갑)의 전투 경험 부족에 있다고 탓했지만, 영국에 망명해 폴란드 1기갑사단을 편성하고 훈련시키기 전에 폴란드에서 실전을 경험한 바 있는 49세의 마첵 장군은 두 기갑사단이 그들의 여건에 비해 너무나 과도한 임무를 수행해야 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Sir Brian Horrocks, Corps Commander, (Charles Scribner’s Sons, 1977), p.43

한줄요약 - 셔먼은 숫자가 많아도 신통찮다;;;;

[공지사항] 당분간은 이대로 가기로 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이달 초에 블로그의 스킨을 교체하다가 2009년 12월 이후 댓글란에 달린 이름들이 모두 제 이름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Echo쪽에 몇 번 연락을 해 봤는데 그쪽도 문제의 원인을 정확하게 모르는 것 같더군요. 일단 스킨을 교체한 이후 달리는 댓글들은 정상적으로 달리는 것 같으니 당분간 2009년 12월 부터 2010년 8월 초 까지 달린 이름이 바뀐 댓글들은 그냥 둘 생각입니다. 2006년 부터 2009년 12월 까지의 댓글들은 멀쩡하더군요. 어쨌든 지금까지 달린 댓글들을 모두 갈아엎고 시작하는 것도 그다지 구미가 당기진 않으니 말입니다.

하여튼 이제는 방문객들 께서 댓글을 다셔도 되겠습니다.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



A. 논쟁의 시작

앞서 이야기 했듯 1999년 대학원 박사과정에 있었던 테렌스 주버는 논문 한편으로 군사학계를 술렁이게 했습니다. 주버는 1999년 War In History에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라는 제목의 논문을 기고했는데 이 논문은 10년이 넘는 대논쟁의 문을 열었습니다. 주버는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를 통해 매우 충격적인 주장을 펼쳤습니다. 슐리펜 계획은 실제로 존재했던 작전 계획이 아니라 1차대전 직후 패전의 책임을 지게 된 독일 군부, 특히 총참모부 계열의 장교들이 책임 회피를 위해 만들어낸 허구라는 것 이었습니다.

주버는 1차대전 내내 독일 군부의 전쟁 수행에 비판적이었던 한스 델브뤽(Hans Delbrück)을 필두로 한 민간인들이 패전 이후 더욱 적극적으로 독일 군부, 특히 총참모부의 전쟁수행방식을 비판하기 이전에는 슐리펜계획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슐리펜계획에 대해 공식적으로 언급이 시작된 것이 바로 이러한 비판이 빗발치기 시작한 직후라는 사실도 함께 지적합니다.
그는 1차대전 이후 슐리펜계획에 대한 논쟁이 진행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먼저 위에서 이야기한 것 처럼 한스 델브뤽이 1차대전 중 독일군 수뇌부의 전쟁수행방식을 비판하자 전쟁 이전부터 델브뤽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군부에서 반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슐리펜계획에 대해 처음 언급한 인물은 독일 육군의 장군이었던 헤르만 폰 쿨(Hermann von Kuhl)이었습니다. 그는 1920년에 발표한 1차대전기 독일 총참모부의 전쟁준비와 전쟁수행(Der deutsche Generalstab in Vorbereitung und Durchführung des Weltkrieges)이라는 저작을 통해 1차대전 이전 독일군의 전쟁계획을 다루면서 장교단에 대한 비판에 대응하기 시작했습니다. 쿨은 관련된 글을 발표하면서 1차대전 초기 독일군이 서부전선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은 당시 총참모장이었던 소(小)몰트케가 제1군을 최대한 강화하도록 한 슐리펜의 원안을 수정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쿨의 뒤를 이어 국립문서보관소 소속으로 1차대전 공간사 집필에 참여하고 있던 볼프강 푀르스터(Wolfgang Foerster) 또한 슐리펜이 퇴임 직전 서부전선에 주력을 집중하고 특히 우익을 강화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델브뤽에 대해 반박했습니다. 한편, 1차대전 직전 총참모부에서 부대 전개 및 배치를 담당했던 에리히 루덴도르프 또한 전후의 저작에서 슐리펜의 계획을 언급하며 델브뤽의 비판을 반박했습니다. 또한 1차대전 초 총참모부에서 철도 업무를 담당했으며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전쟁부 장관을 지내게 된 빌헬름 그뢰너(Wilhelm Groener)도 쿨의 견해를 지지하면서 슐리펜계획이 널리 알려지는데 기여를 했습니다.

문제는 1945년 영국공군이 포츠담을 폭격했을 때  그곳에 있던 독일군의 문서고가 파괴되어 많은 사료가 소실되었다는 점 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쿨, 푀르스터, 그뢰너 등은 당시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은 자료들을 바탕으로 슐리펜계획에 대한 글을 썼는데 그 자료들 중 상당수가 전쟁 중 불타버렸기 때문에 슐리펜계획에 대한 주요 사료 중 2차대전 후 까지 남은 것은 슐리펜이 1906년 퇴임을 전후해 작성한 비망록(Denkschrift) 외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버는 이 비망록 자체가 작전계획으로써 문제가 많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특히 프랑스군이 알자스-로렌 방면으로 공격해올 경우 주공인 우익의 움직임에 대해 매우 혼란스러운 서술을 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습니다. 특히 1차대전 직후 부터 제기되었던 문제 중 하나로 96개 사단을 서부전선에 투입하는 것이 1906년은 물론 1914년에도 불가능했다는 점에 대해서 그때까지의 역사가들이 아무런 의구심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비판합니다.

주버는 독일 통일 이후 공개된 구동독 소유의 문헌들을 활용했는데 그것은 빌헬름 디크만(Wilhelm Dieckmann)의 슐리펜계획에 대한 연구 원고, 그리고 슐리펜과 몰트케가 몇몇 훈련에 대해 남긴 최종논평(Schulßbesprechungen) 등이었습니다.
필자인 주버는 특히 빌헬름 디크만의 원고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디크만은 역사교육을 받은 장교로서 1차대전 공간사 집필에 참여했으며 대략 1930년대 후반에 문제의 원고를 집필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디크만의 원고는 슐리펜이 총참모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시기의 부대전개계획(Aufmarschpläne)과 참모부연습(Generalstabsreise) 등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


B. 디크만의 연구에 대한 검토

이 글에서는 먼저 1차대전 이전 독일군의 부대전개계획을 살펴보고 넘어갑니다. 주버는 대(大) 몰트케에서 발더제(Alfred von Waldersee)가 독일군 총참모장을 역임하던 시기 독일군의 전쟁 계획은 서부전선에 주력을 집중해 방어하고 동부전선에서는 상대적으로 적은 규모의 제한적인 공세를 취하는 것 이었다고 지적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써 대 몰트케의 마지막 계획이었던 1888년의 계획에서는 서부전선의 방어에 11개 군단을, 동부전선의 공세에 7개 군단을 할애하고 있었던 점을 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 서부전선에서도 제한적인 공세를 실시하는 것을 추천하고 있었는데 그 경우 6개 군단으로 낭시(Nancy)를 공격하도록 되어 있엇습니다.
주버는 슐리펜도 기본적으로는 이러한 계획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그의 최초 부대전개계획인 1893/94년 계획에서 48개 사단을 서부전선에, 15개 사단을 동부전선에 두고 동부전선의 15개 사단 중 11개 사단을 실레지엔에서 러시아령 폴란드를 향한 공세에 배정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슐리펜은 1894년 비망록에서 먼저 낭시를 공격한 뒤 그 다음에는 툴(Toul)과 베르덩(Verdun) 사이의 요새선을 공격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주버는 기존의 학설에서 이 비망록을 서부전선에 주력을 집중하는 슐리펜 계획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오류라고 강조합니다. 즉 슐리펜의 최초 계획은 어디까지나 몰트케의 계획을 이어받은 것에 머물렀다고 설명하는 것 입니다.
다음으로는 1895/96년의 부대전개계획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주버는 1895/96년 계획에서 주목할 점은 동부전선에 대한 부분이라고 봅니다. 1895/96년 계획에는 동부전선에 대한 전개계획이 A안과 B안으로 나뉘어 있는데 A안은 동프로이센에서 나레프(Narew) 강을 건너 공격하는 것이고 B안은 1893/94년 계획과 마찬가지로 실레지엔에서 공격을 시작하는 것 이었습니다. 디크만의 분석에 따르면 슐리펜은 1895/96년 계획을 작성한 시점에서 B안 보다는 A안을 선호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1896/97년 부대전개계획에서는 동프로이센에서 15개 사단으로 공세를 개시하는 것이 확립되었다고 합니다. 주버는 이것을 슐리펜의 계획이 완전히 몰트케가 구상한 것으로 회귀한 결과라고 해석합니다.

다음으로 흥미로운 것은 1897년 비망록에 대한 분석입니다. 프랑스가 국경지대의 요새선을 강화하면서 독일 내에서는 벨기에를 침공해 프랑스의 요새선을 우회하는 방안을 취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는데 위에서 언급한 디크만의 연구에 따르면 슐리펜은 1896년 경에 이 방안을 고려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슐리펜의 1897년 비망록에서는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1897년 비망록에서는 요새지대를 우회하는데 두 가지 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툴과 에피날(Epinal) 사이를 돌파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베르덩 북쪽으로 돌파하는 것 이었습니다. 첫번째 안은 해당 지역이 부대기동에 곤란했기 때문에 부적합했던 반면 베르덩 북쪽으로 돌파하는 두번째 안은 해당지역이 대규모 부대의 기동에 적당하다는 점 때문에 현실적으로 적합했습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침공해야했습니다. 1897년 비망록에서는 베르덩 북쪽으로 돌파하는 주력에 2개 군을, 주력의 좌익을 엄호하기 위해서 1개 군을, 그리고 프랑스군을 묶어두기 위해 3개 군을 배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버는 이것을 실제 작전으로 옮기기에는 독일군의 병력이 부족했기 대문에 1897년 비망록의 연구내용은 1897/98년과 1898/99년의 부대전개계획에 반영되지 못했다고 지적합니다.  오히려 당시 독일군의 배치를 보면 서부와 동부의 사단비율이 2:1로써 서부전선에서 대공세를 펼칠 수 있는 배치가 아니었다고 합니다.(서부에 48~46개 사단, 동부에 20~22개 사단) 그렇기 때문에 주버는 슐리펜이 1897년 부터 서부전선에서 공세를 계획하고 있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대로 1899/1900년 부대전개계획에도 이어지는데 이 계획에 따르면 두 개의 안 중 두 번째 안(Aufmarsch II)은 기존 계획의 연장선 상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합니다.

한 편, 슐리펜은 1898년 말에 작성한 비망록에서는 먼저 프랑스군의 공격을 기다린 뒤 반격에 나서는 방안을 연구했다고 합니다. 주버는 1898년 비망록이 매우 실험적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즉 슐리펜은 서부와 동부의 사단비율을 2:1로 한 기존 계획으로는 어느 방면에서건 프랑스군과 러시아군에게 숫적으로 압도당해 선제공격이 어려우므로 독일군의 병력동원이 완료될 때 까지 방어를 한 뒤 서부전선에서 반격에 나서는 방안을 구상했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반격을 시작할 때 독일군의 주공은 (아마도 프랑스군의 좌익이 치고올) 아르덴느를 향하도록 계획되었습니다. 반격시 독일군의 주공은 2개 군으로 구성되었는데 주버는 여기서 한가지 사실을 강조합니다. 즉 아르덴느를 통한 반격에서 포위망의 규모는 제한적이었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주버는 1898년 비망록에서 나타난 ‘반격’의 개념이야 말로 슐리펜이 가장 선호한 전략이었으며 그가 퇴임할 때 까지 계속되었다고 강조합니다. 주 버가 인용한 디크만의 연구에 따르면 1898년 비망록의 내용은 1899/1900년 부대전개계획의 첫번째 안(Aufmarsch I)을 수정할 때 반영되었지만 여전히 동부에 10개 사단을 배치하는 등 기존 계획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합니다. 1900/01년의 부대전개계획 중 Aufmarsch I의 병력배치는 1899/1900년 안과 큰 차이가 없으나 구체적인 병력 배치에 있어서는 변화가 있었습니다. 즉 베르덩 북쪽의 주공을 3개 군으로 강화하고 주공의 좌익을 방어하는 3개 군을 1개 군으로 축소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 리고 주버는 1900년 1월 18일 당시 총참모부 제3부참모장(Oberquartiermeister III)으로 재직 하고 있었던 베셀러(Hans Hartwig Beseler)의 작전연구(Operationsstudie)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베셀러의 작전연구는 서부전선에서의 공세를 강조하면서 주공을 우익에 둘 것을 명시하고 있었습니다. 베셀러는 주공을 리에쥬(Liege)-나무르(Namur)와 베르덩 사이의 약 90km에 이르는 정면에 집중시켜 독일국경에 집결한 프랑스군 주력을 단기간에 격파할 것을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주 버는 그렇기 때문에 서부에 대한 작전은 슐리펜과 베셀러가 공동으로 완성한 것이며 슐리펜의 1897년, 1898년 비망록과 베셀러의 1900년 작전연구가 이후 서부전선에 대한 슐리펜의 전략구상을 지배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학계에서  ‘슐리펜 계획’으로 본 1905년 비망록의 중요성은 과대평가되었다고 주장합니다.

한 편, 주버는 1900/01년 부대전개계획의 Aufmarsch II 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1900/01년 Aufmarsch II는 44개 사단을 동부전선에 집중해 오스트리아군 40개 사단과 함께  러시아를 상대로 전략적인 대공세를 펼치는 내용이었습니다. 주버는 슐리펜이 서부 뿐 아니라 동부에서도 공세에 나서는 방안을 연구했다는 사실은 슐리펜이 서부에 대한 공격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였다는 기존의 설이 잘못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봅니다.

동 부에서 전략적인 공세를 펼친다면 서부에서는 방어를 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주버는  이러한 배경이 슐리펜에게 서부에서 프랑스군의 공격을 먼저 막아낸 뒤 반격하는 방안을 계속 연구하도록 했다고 해석합니다. 슐리펜은 1899년에 작성한 비망록에서 프랑스군이 숫적 우세를 바탕으로 공세를 감행할 경우 프랑스군의 좌익에 대해 역습을 감행할 것을 언급했다고 합니다. 즉 서부에서 적은 병력으로 방어를 하게 될 경우 숫적으로 우세한 프랑스군은 독일군의 고정방어를 우회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고정방어 대신 반격을 통한 기동방어를 해야 한다는 것 이었습니다.
주버는 이런 인식이 1900년과 1901년의 참모부연습에 그대로 반영되었다고 봅니다. 특히 1901년의 참모부연습에서는 동원 4주차에 국경지대에서 프랑스군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뒤 9개 군단을 동부로 이동시킬 수 있을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그러나 1901년 참모부연습에서는 프랑스군에 승리를 거둔 뒤에도 38개 사단을 서부전선에 남겨둬야 했는데 그 이유는 국경지대 전투에서 격파할 수 있는 프랑스군은 2개 야전군 규모로 프랑스군을 완전히 격멸하는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즉 주버는 ‘슐리펜 계획’에서 나타나는 프랑스군의 철저한 격멸이 1901년 연습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 입니다.
한 편 1901/02년의 Aufmarsch II 에서는 동부에 배치할 사단을 41개로 줄이고 다시 1902/03년의 Aufmarsch II 에서는 이것을 다시 24개 사단으로 줄여버리는데 이것은 대 몰트케의 구상으로 다시 회귀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다음으로 분석하고 있는 것은 1902/03년 Aufmarsch I 입니다. 1902/03년의 Aufmarsch  I은 프랑스군이 자신들의 좌익에 대한 독일군의 반격을 예측할 것을 상정하고 프랑스군 좌익을 공격하는 대신 프랑스군 우익을 공격하는 계획이었습니다. 이 계획에서는 3개군이 공격에 동원되고 이 중 제4군이 베르덩 방면으로, 제5군과 6군이 낭시와 트루에 드 샤흐므(trouée de Charmes) 방면을 담당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주버가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슐리펜이  서부전선에서 우익에 주공을 집중하는 방식만 고려한 것이 아니라는 점 입니다. 이점은 슐리펜이 1902년 5월 16일에 작성한 글을 인용하는데서 더 잘 드러납니다. 주버에 따르면 슐리펜은 이 글에서 베르덩 북쪽으로 주공을 지향하더라도 좌익과 보조를 맞추지 못하면 압도적인 프랑스군에게 격파당할 위험이 높으며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드러냈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주버는 1902/03년의 Aufmarsch II는 슐리펜이 여전히 동부에도 신경을 쓰고 있었던 근거로 봅니다. 주버는 1902/03년의 Aufmarsch II는 비록 전쟁 발발시 동부전선에서 제한적인 공세작전을 실시하는 것 이었지만 슐리펜이 1902년에 작성한 비망록에서는 13개 군단과 10개 예비사단을 동원한 대규모 공세를 고려하고 있었다는 점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주버는 이 당시 슐리펜의 구상을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먼저 동부전선에 압력을 가하면 러시아의 동맹인 프랑스가 러시아를 지원하기 위해 공세에 나서게 되고 그렇게 된다면 강력한 요새선에서 나온 프랑스군을 독일군의 철도망이 지원할 수 있는 국경에서 격파할 수 있다는 것 입니다.
디크만의 원고는 마지막으로 1903/04년의 부대전개계획을 언급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65개 사단을 서부에, 10개사단을 동부에 배정하고 있습니다. 주버는 1903/04년의 부대전개계획 I에 대해서는 특별한 설명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주버는 디크만의 연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기 존의 통설은 슐리펜이 동부전선에 주력하는 방안에서 서부전선에 주력하는 방안을 취하면서 슐리펜 계획이 등장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실제로 슐리펜은 1903~4년에 이르기 까지 동부전선에 대한 공세를 포기하지 않았으며 서부전선에서는 제한적인 규모의 공세만을 계획했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독일군이 선제공격에 나서는 경우는 대부분 프랑스군이 공세로 나오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 였다고 봅니다.  물 론 주버는 디크만의 한계도 동시에 지적합니다. 즉  디크만이 원고를 집필할 당시 부대전개계획 이외의 자료는 접근할 수 없었으며 특히 실제 부대전개명령(Aufmarschanweisungen)과 같은 자료는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대신 비망록과 참모부연습(Stabsreisen)의 결론을 활용해 총참모부의 의도를 분석할 수 밖에 없었다는 점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버는 디크만의 연구가 담고 있는 내용으로도 슐리펜 계획에 대한 기존의 통설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강력히 주장합니다.


C. 참모부연습에 대한 슐리펜의 최종논평

주 버가 다음으로 제시하는 자료는 슐리펜이 1904년 실시한 참모부 연습에 대해 남긴 최종논평(Schulßbesprechungen)입니다. 주버는 이 자료가 슐리펜이 서부전선에 대해 가지고 있던 전략개념을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슐 리펜은 1904년의 첫 번째 참모부연습(Generalstabsreise West)에 대한 논평에서 흥미로운 점을 몇 가지 언급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병력 문제입니다. 1904년의 첫 번째 참모부연습에서는 현역 부대 외에 16개 예비군단(Reserve Korps), 즉 32개 예비사단과 14개 향토사단(Landwehr-divisionen)도 동원된 것으로 상정하고 있었는데 당시 실제로 동원 가능한 것은 19개 동원사단에 불과했습니다. 슐리펜은 이에 대해 전시 총력전 상황에서는 동원가능한 병력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벨기에 침공에 대해 논의하고 있습니다. 슐리펜은 대부분의 국가들이 독일이 벨기에를 거쳐 공격해 올 것을 기정사실화 하고 있는 반면 프랑스는 독일이 국경지대에 정면 공격을 감행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으며 독일군의 공세를 둔화 시킨뒤 반격에 나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의 예상 반격로는 벨기에를 경유하는 것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슐리펜은 이 논평에서 서부전역이 시작될 경우 프랑스의 요새선을 우회하는 방안을 두가지 제시하고 있는데 첫 번째는 메지에흐(Mézières) 북쪽으로 돌파하는 것 이었습니다. 슐리펜은 이 방안의 문제점은 뮤즈강을 건넌 주력과 국경지대를 방어하는 부대가 분리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두 번째는 베르덩-릴(Lille) 사이를 돌파하는 것으로 이 지역은 베르덩-벨포르를 연결하는 지역과 달리 요새화 정도가 낮다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슐리펜은 이 지역을 공격하기 위해 대규모 부대를 이동시키는 것은 은폐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기습의 효과가 떨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슐리펜은 몇몇 장교들에게 독일군이 프랑스군의 방어선을 우회하기 위해 라인강 하류 지역으로 병력을 집중시킬 경우 프랑스군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판단하도록 했는데 크게 두가지 안이 나왔습니다. 일부는 프랑스군도 독일군의 재배치에 맞서 병력을 좌익에 집중할 것이라고 본 반면 다른 일부는 독일군의 취약한 좌익을 먼저 공격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슐리펜은 후자의 의견에 동의했습니다. 슐리펜은 프랑스군이 독일군의 좌익을 칠 경우 이에 대응하기 위해 우익과 중앙에 집결한 병력을 남쪽으로 이동시켜야 하며 최악의 경우 로이텐 전투가 보다 큰 규모로 재현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결과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역시 독일이 메츠와 스트라스부르 등의 국경에 만들어 놓은 요새선 이었습니다.

다음으로는 연습 과정에 대한 논평이 이어졌습니다. 이 훈련에서 독일군은 17개 군단(34개 사단)을 아헨-베젤-쾰른 일대에 집결시키고 아이펠에 집결한 6개 군단이 그 측면을 엄호했습니다. 그리고 아이펠 남쪽으로는 다시 메츠에 집결한 6개 군단이 마찬가지 임무를 맡았고 9개 군단의 예비가 팔츠(Pfalz)에 집결해 있었습니다. 독일군의 가장 좌익인 스트라스부르 일대에는 예비군으로 편성한 사단과 3개 군단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이 연습에서 프랑스군은 40개 사단을 동원해 메츠-스트라스부르 지구를 공격했고 이와 별도로 조공 18개 사단이 트리에 방면으로 공격하는 것으로 설정되었습니다. 이 연습에서는 프랑스군이 취약한 독일군의 좌익에 주공을 지향한 상황을 극복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훈련에서 상정한 상황은 동원 16일 차에 1, 2, 3군이 네덜란드-벨기에의 국경을 넘은 상황에서 프랑스군이 취약한 좌익을 타격한 것 이었습니다. 독일측은 우익의 병력은 아르덴느를 통해 남진시키고 프랑스군이 독일 영내로 침입해 오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팔츠에 집결해 있는 예비대를 포함해 3개 군을 반격에 투입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군은 동원 19일 째에 메츠-쯔바이브뤼켄(Zweibrücken)을 잇는 선에 방어선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반격에 나선 독일군은 프랑스군 보다 우세한 포병의 지원에 힘입어 방어로 전환한 프랑스군의 좌익을 돌파하고 결국 포위망을 완성하는데 성공합니다. 이 연습은 동원 21일차에 프랑스군을 섬멸하는 것으로 종결됩니다.

주버는 이 연습과정이 겉보기에는 1905년 비망록, 즉 이른바 슐리펜 계획과 유사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첫 번째로는 3개 군에 해당되는 대병력이 아헨-베젤-쾰른 일대에 집결해 있다는 점이 슐리펜 계획과 유사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병력이 프랑스와의 국경 일대에 골고루 분산 배치되어 있다는 것 입니다. 두 번째는 슐리펜 계획에서는 대규모 우회 기동을 통한 대규모 섬멸전을 명시하고 있는데 1904년 연습에서는 1~3군이 네덜란드-벨기에 국경을 넘긴 하지만 소규모 우회기동에 그치고 있다는 점 입니다. 주 버는 마지막으로 1904년 연습에는 아직 편성되지 않은 다수의 부대가 등장하는데 이점은 1905년 비망록과 유사하다고 봅니다. 즉 ‘슐리펜 계획’으로 알려진 1905년 비망록은 실제 작전계획이 아니라 훈련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 입니다.

주버는 다음으로 1904년에 실시된 두번째 참모부연습에 대한 슐리펜의 최종논평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 두번째 연습은 첫번째 연습과 유사하지만 투입하는 병력 규모가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이 연습에는 향토사단은 한 개도 상정되지 않았고 단지 23개 예비사단 만이 명시되었을 뿐 입니다. 두 번째 연습에서 프랑스군은 동원 13일 차에 23개 군단을 투입해 상(上) 알자스 방면으로 공격하는 상황이 설정되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군은 독일군이 우익에 병력을 집결시킨다는 정보를 입수하더라도 공격을 강행하기 때문에 독일군은 베르덩-릴 방면으로의 돌파를 중지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슐리펜은 논평에서 프랑스군은 독일측이 우익에 병력을 집중해 병력을 집결한 것을 알게 된다면 공세에 나서지 않을 것이며 프랑스군이 공격을 계속하는 것은 스스로 독일군에게 유리한 상황을 조성하는 것이 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두번째 연습에서 독일군은 첫 번째 연습과 마찬가지로 프랑스군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우익의 병력을 남진시켰습니다. 그리고 국경을 돌파한 프랑스군 우익은 라인강을 도하해 충분한 병력(8개 군단)을 전개시킬 공간을 확보할 목적으로 튀빙엔 까지 진출하는 것으로 설정했습니다. 동시에 아르덴느로 진입한 프랑스군 좌익은 모젤 방면으로 진출하는데 메츠의 독일군은 바로 이 프랑스군 좌익에 대해 반격을 감행해 격파하는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연습에서는 메츠의 독일군이 아르덴느로 진입한 프랑스군 좌익을 격파하는데 성공합니다. 이때 프랑스군 중앙의 6개 군단과 라인강을 도하한 우익의 8개 군단은 공격을 계속 실시하고 독일군은 두개의 프랑스군 집단에 대해 내선의 우위를 가지고 상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연습에서 독일군을 맡은 지휘관이 프랑스군 중앙과 우익의 압박 때문에 프랑스군 좌익을 상대하던 병력을 빼돌려 프랑스군 좌익은 포위 섬멸되는 것을 면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이 연습에서 독일군은 프랑스군 좌익을 섬멸하는데 실패한 상태에서 프랑스군 중앙과 우익에 의해 포위당하는 결과를 맞게 됩니다.
주버는  이 두 번째 연습 또한 ‘슐리펜 계획’ 과는 동떨어진 내용이었다고 강조합니다.

다음으로는 슐리펜 계획의 구상이 그대로 드러났다고 이야기되는 1905년 참모부 연습에 대해서 분석하고 있습니다. 1905년 참모부연습은 1905/06년의 부대전개계획과 동일한 부대 배치에 슐리펜이 직접 독일군쪽을 맡아 진행했다고 합니다. 이 연습에서는 23개 군단과 15개 예비사단으로 이루어진 6개 군이 메츠에서 베젤에 이르는 지역에 전개되었고 메츠 이남의 좌익에는 3개 군단과 5개 예비사단만이 배치되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군은 각각 세명의 참모장교가 맡아 세차례의 연습이 실시되었습니다.
첫 번째로 프라이탁-로링호벤(Freiherr von Freytag-Loringhoven) 중령이 프랑스군을 맡이 실시한 연습에서 프랑스군은 독일군 우익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곧바로 주력을 벨기에로 돌리고 벨기에에서 벌어진 결전에서 독일군이 프랑스군을 격파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때 슐리펜은 메츠에 집결된 병력으로 프랑스군의 측면을 공격해 격파했는데 주버는 메츠는 ‘슐리펜 계획’에서는 별다른 역할이 없는 지역이었다고 지적합니다.
두 번째 연습에서는 슈토이벤(von Steuben) 대령이 프랑스군을 맡았는데 이 연습에서는 프랑스군이 메츠-자르부르크 방면으로 주공을 실시했습니다. 그런데 슐리펜은 우익의 공격을 계속하는 대신 우익의 병력 상당수를 프랑스군 주공을 저지하는데 돌립니다. 결과적으로 두번째 연습도 슐리펜 계획과는 동떨어진 결론으로 끝났습니다.
세 번째로 당시 소령이었던 쿨이 프랑스군을 맡은 연습에서는 프랑스군이 메츠 방면으로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슐리펜은 이에 대해 두번째 연습과 마찬가지로 프랑스군의 주력을 맞상대하는 선택을 했습니다.
주버는 1905년의 참모부 연습이 ‘슐리펜 계획’ 과는 동떨어진 내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슐리펜 계획의 일부로 해석되온 원인은 1930년대 후반에는 이미 ‘슐리펜 계획’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확고해 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주버는 슐리펜이 퇴임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실시한 1905년 겨울의 워게임(Kriegsspiel)에 대해서도 주목하고 있습니다. 주버는 ‘슐리펜 계획’ 이라는 것이 실재했다면 슐리펜이 자신의 퇴임 직전 마지막으로 실시하는 대규모 연습에서 이 계획을 시험했어야 정상이라는 가정을 깔고 있습니다. 주버는 슐리펜이 이 마지막 연습에서 서부전선과 동부전선 모두 전략방어를 취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슐리펜은 1905년의 워게임에서 먼저 동부전선으로 침공해 온 러시아군을 격퇴한 뒤 그 병력을 서부로 돌렸습니다. 한편 서부 전선의 상황은 조금 재미있게 설정되어 있었습니다. 1905년 겨울 워게임에서는 프랑스가 먼저 벨기에를 침공해 벨기에가 독일편에 서는 상황을 가정하고 있었던 것이죠. 서부전선에서는  먼저 침공해온 프랑스군을 동원 26일째 까지 격퇴한 뒤 제한적인 반격이 실시되었습니다. 그리고 동부전선에서 차출된 부대와 추가로 동원되는 부대와 함께 동원 42일 차에 프랑스군 주력을 아르덴느에서 포위 격멸하는 것으로 작전은 종결됩니다.
주버는 슐리펜이 총참모장 재직 말기에 실시한 여러 연습들은 하나같이 슐리펜 계획과는 동떨어진 내용이었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D. 1905년 비망록에 대한 비평

주버는 이제 ‘슐리펜 계획’ 문건인 1905년 비망록에 대해서 비판의 칼날을 돌립니다. 주버는 기존의 연구들은 러일전쟁의 결과 슐리펜이 러시아군을 과소평가했기 때문에 1905년 비망록에서 동부전선을 거의 무시한 것으로 해석했지만 이것은 실제 역사적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다고 비판합니다. 오히려 1906년 독일군의 정보기관은 러시아군이 전쟁에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발발할 경우 독일 방면에 25개 사단을, 오스트리아 방면에 22개 사단을 투입할 능력이 있다고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 입니다.
주버는 1950년대 슐리펜 계획에 대한 비판적인 연구가 처음 시작된 이후 모든 역사가들이 슐리펜 계획이 실존한 계획이었다는 가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었다고 비판합니다. 주버가 보기에 1905년 비망록은 프랑스와 러시아라는 두 육군 강국을 두고 병력 부족으로 고심해야 했던 슐리펜의 문제점을 보여주는 여러 문건들 중 하나일 뿐입니다. 주버는 파리까지 진격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슐리펜이 상정한 ‘최악의 시나라오’ 였을 뿐 슐리펜의 실제 의도는 아르덴느와 같이 독일 국경 근처에서 프랑스군을 결전으로 격파하는 것 이었다고 주장합니다.

문제의 1905년 문건에 대한 분석도 꽤 흥미로운 편 입니다. 주버는 먼저 1905년 비망록에 포함된 지도들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1905년 비망록 파일에는 총 11개의 지도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 중 1:800,000축적의 6번 지도가 ‘슐리펜 계획’을 전체적으로 보여주는 것 입니다. 그리고 이 6번 지도는 1:300,000축적의 2번지도(동원 22일차)와 3번지도(동원 22일차에서 31일차까지)를 요약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주버는 이 지도들에는 단지 독일군이 특정 일자에 진출해야 할 목표만이 표시되어 있을 뿐 프랑스군의 배치나 전개 상황에 대한 정보가 전무하다고 지적합니다.
특히 지도3은 파리까지의 이동이 표시되어 있는데 정작 파리까지 도달하는데 어느 정도 소요 되는지에 대한 정보는 전무하다고 합니다. 기존의 연구들은 40일 이내에 전역이 종결된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주버는 슐리펜이 1905년 비망록에 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주버는 40일 이내에 전역을 종결한다는 것은 소(小)몰트케의 발언인데 연구자들이 이것을 슐리펜 계획에도 있는 것 처럼 잘못 이야기 했다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도3은 독일군의 주공을 릴(Lille) 남쪽에 두고 있는데 이것은 흔히 알려진 슐리펜 계획의 내용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 입니다.
다 음으로는 1:800,000축적의 지도5와 지도5a를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 지도들은 프랑스군이 로렌 방면으로 공격해 올 경우를 가정한 지도인데 흥미롭게도 1904년과 1905년 참모부연습 처럼 프랑스군이 공격해 올 경우 우익의 병력 일부를 남쪽으로 돌리도록 되어 있다고 합니다. 즉 역시 ‘슐리펜 계획’과는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 입니다.
주버는 이런 문제점 때문에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 중 슐리펜이 직접 작성한 것 이외의 것은 이후에 추가된 문서일 것으로 추정합니다. 즉 슐리펜 계획의 개요를 보여주는 지도 2, 3, 6, 7은 몰트케의 것 이라는 것 입니다.


E. 소(小) 몰트케 시기의 참모부연습

주버는 다음으로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이 ‘작전계획’이 맞다면 슐리펜의 후임인 소 몰트케가 이에 따라 훈련을 진행했는지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주버가 이 글에서 사례로 든 것은 1906년과 1908년의 연습입니다.

먼저 1906년의 참모부연습에서는 프로이센에 6개 군단(12개사단)과 9개 예비사단 등 총 21개 사단을 배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부전선에서는 우익에 15개군단(30개 사단), 메츠에 1개 군단, 로렌에 7개 군단, 스트라스부르에 2개 군단, 알자스에 2개 군단을 배치해 놓고 있습니다. 즉 1905년 비망록과는 완전히 다른 부대 배치인 것입니다.  그리고 몰트케는 이 연습에서 벨기에를 통해 우익의 30개 사단을 투입하는 대신 이들을 메츠 방면의 반격에 투입하는 방안을 취했습니다. 결전을 국경지대에서 치른다는 것 입니다.

1908년의 참모부 연습은 프랑스가 로렌으로 직접 공격해 오는 상황과 함께 벨기에의 협조를 얻어 아르덴느를 통해 공격해 오는 상황을 상정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가 아르덴느로 공격을 해 올 경우 2개 군이 동원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이에 대한 독일군의 배치는 4개 군을 메츠와 아헨 사이에 두고 1개 군을 메츠 동쪽에, 1개 군을 로렌에, 1개 군을 로렌 남부-알자스에 두는 것 이었습니다. 이 경우 독일군은 아르덴느를 향해 공격을 시작할 것이었지만 결전을 치를 곳은 프랑스군 주력이 출현하는 곳 이었습니다. 소 몰트케는 만약 프랑스군 주력이 메츠-스트라스부르 방면으로 향한다면 4개 군을 메츠-코블렌츠 일대에 집결시킨 뒤 남서 방향으로 반격을 실시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1군과 2군은 주공의 우익을 방어하는 임무를 수행할 것 이었습니다. 그리고 만약 프랑스군의 주공이 좌익이라면 1군과 2군이 상대하거나 4군과 5군이 대응하도록 했습니다. 또한 프랑스군 주공이 메츠로 향한다면 1군과 2군이 남진해서 이를 상대하도록 했습니다.

주버는 1906년과 1908년의 연습을 통해 소 몰트케는 프랑스 침공 보다는 프랑스의 선제공격을 상대하는데 중점을 두었다고 해석합니다.


주버의 결론은 매우 충격적입니다. 주버는 이 논문의 마지막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립니다.

지금까지 정설이었던 게르하르트 리터(Gerhard Ritter)의 해석은 슐리펜이 처음에는 동부에 주력하는 계획을 세우다가 점차 서부전선에 중점을 두는 방향으로 선회했으며 그 결정판이 바로 ‘슐리펜 계획’ 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틀린 해석이다. 슐리펜이 1898년 부터 1905년까지 쓴 글과 그가 실시한 여러 연습들을 보면 그의 의도는 어디까지나 국경지대에서 제한적인 반격을 실시하는 것 이었다. 슐리펜에서 소 몰트케에 이르기 까지 독일군은 서부전선에서 전략적 차원의 대규모 섬멸전을 계획한 사실이 없다.


이 결론은  꽤 충격적인 것 이었고 후폭풍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10년에 걸친 논쟁의 막이 오르게 된 것 입니다.

Thursday, August 19, 2010

패튼의 셔먼 사랑?

우리가 생각하기엔 참 이해가 안가는 일이지만 패튼은 많은 사람이 형편없다고 생각한 셔먼 전차를 이상하게도 높게 평가했습니다. 미군이나 영국군 지휘관들의 2차대전 회고록을 보면 셔먼의 불쌍한 성능에 대한 한탄(?)이 꽤 많은데 만약 패튼이 오래 살아남아 회고록을 썼다면 셔먼에 대해 어떤 평을 했을지 궁금하군요.

어쨌든 2차대전 중 패튼은 기이할 정도로 셔먼에 대해 높은 신뢰를 보였습니다. 황당하게 들리지만 패튼은 전쟁 중 셔먼에 대해 “세계 최고의 전차”라고 평하기도 했다지요.*  물론 속으로는 그렇지 않더라도 허세를 부렸던 것 같습니다. 패튼은 독일 전차에 대한 ‘루머’가 전차병들은 물론 미국 본토에서 전차를 생산하는 노동자들의 사기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 우려해서 허세를 부렸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패튼과 셔먼에 관련된 이야기들을 읽다 보면 정말 패튼의 진심이 뭐였을지 궁금합니다. 전쟁이 끝나기 직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죠.

노년에 밴(플리트)은 일부 사람들이 뛰어나지만 기이하다고 생각한 패튼 장군의 뛰어난 쇼맨십 사례를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패튼 장군은 밴 플리트와 함께 이동하던 중, 밴의 제7기갑사단 전차가 포탑 전면에 모래자루를 덮은 채 지나가는 것을 목격하였다. 패튼 장군은 행렬을 정지시키고 마구 욕을 퍼부어 대며 대열의 첫번째 전차로 뛰어가 동체에 덮여 있던 모래 자루들을 길가로 던져 버렸다.

“너희 지휘관들은 모래자루가 전차의 포탄 충격을 증폭시켜 전차 승무원들이 모두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른단 말이냐?”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모든 전차가 모래주머니를 치우고 출발하였으며, 패튼 장군은 이 광경을 지프 위에 올라서서 쳐다보았다. 모래자루의 필요성은 논란거리가 될 수 있겠지만 패튼 장군의 이러한 행동은 모든 장병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것 만은 틀림없다.

폴 F. 브레임/육군교육사령부 번역실 옮김, 『승리의 신념 : 밴 플리트 장군 일대기』(봉명, 2002), 205쪽

제 개인적으로는 저게 전쟁이 거의 끝날 무렵에 일어났으니 말이지 만약 1944년에 미군 전차병들이 독일 전차에 골머리를 앓던 때 저런 짓을 했다면 전차병들이 가만히 있진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 패튼은 미국 전차의 성능에 대한 혹평이 이어지자 셔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We’ve got the finest tanks in the World!”. Daivd E. Johnson, Fast Tanks and Heavy Bombers : Innovation in the U. S. Army 1917-1945(Cornell University, 1998), p.196

Tuesday, August 3, 2010

문제가 생겼습니다

황당한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블로거에 새로 추가된 기능인 템플릿 디자이너를 사용한 뒤 다시 Echo의 덧글서비스를 설치했더니 2009년 12월 이후, 그러니까 Echo 설치 후에 다른 분들이 달아주신 댓글이 모두 제 이름으로 변경되어 버렸습니다;;;; 다시 옛날 스킨을 설치했는데도 그대로여서 어이가 가출한 상태입니다.

지금 댓글창을 눌러보시면 아시겠지만 댓글의 다른분들 닉네임이 모두 "길 잃은 어린양"으로 바뀌어 혼잣말하는 모양이 되고 말았습니다;;;;; Echo 사이트에 들어가봤더니 할로스캔에서 Echo로 업그레이드 한 사용자들이 비슷한 문제로 고생하는 모양입니다. 댓글이 모두 날아갔다는 사람도 더러 있고;;;;

일단 문제를 해결할 때 까지는 댓글을 달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는 조언은 대환영입니다. 일단 문제가 해결될 때 까지는 다른 댓글을 달지 말아주십시오;;;;

만약 구제불능의 상황이라면 이대로 그냥 갈 생각입니다;;;; 그 때는 따로 공지를 하겠습니다.

다시한번 이야기 하지만 당분간은 새 댓글을 허용하지 않겠습니다. 문제가 해결된 뒤 공지를 하겠습니다. 주의사항을 올린 뒤에도 자꾸 댓글이 새로 올라오니까 Echo 서포트 쪽에서 아무 이상없는데 무슨 소리냐고 하고 있습니다. 문제가 해결되기 전 까지는 댓글 달지 마십시오. 댓글이 달리면 무조건 삭제합니다.

스타2를 해 봤습니다

지난 주에 스타2 오픈베타를 한다길래 호기심에 설치를 해 봤습니다.

제 컴퓨터는 성능이 나빠 안될 줄 알았는데 사양을 조금 낮추니(중간정도 사양?) 쌩쌩 잘 돌아가더군요.

싱글캠페인을 정신없이 하다 보니 주말이 지나 월요일이 됐습니다.

생각해보니 너무 무서워서 지워버렸습니다.

썰렁한 이야기 하나

1987년에 나온 구판 항미원조전사(抗美援朝戰史)의 부록에 있는 사상자 통계를 다시 보니 꽤흥미롭더군요. 처음 읽었을 때는 허풍이 좀 세다 싶었는데 다시 읽으니 허풍을 떠는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아주 심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구판 항미원조전사에서는 중국군이 1951년 4월 22일 부터 6월 10일까지 계속된 5차 전역에서 미군 31,926명을 살상하고 포로 958명을 잡는 대승을 거두었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많은분들이 아시겠지만 실제 이 기간 동안 미군이 입은 손실은 중국이 주장하는 것 처럼 많지 않습니다. 미국쪽에서는 중국의 5차 전역을 두개의 중국군 공세와 미군의 반격작전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먼저 4월 22일 부터 29일까지를 중국군의 1차 춘계공세로, 5월 17일 부터 22일 까지를 중국군의 2차 춘계공세로 구분하고 이 외에 5월 16일 부터 20일까지의 소양강전투, 5월 20일 부터 6월 8일 까지의 데터네이트(Detonate) 작전, 6월 3일 부터 6월 12일 까지의 파일드라이버(Piledriver) 작전 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시기 미군의 사상자는 대략 이렇습니다.

중국군 1차 춘계공세 : 전사 314, 부상 1,600
소양강전투 : 전사 406, 부상 ?
중국군 2차 춘계공세 : 전사 333, 부상 888
데터네이트작전 : 전사 530, 부상 3,195
파일드라이버작전 : 전사 231, 부상 1,787

유감스럽게도 제가 참고한 자료에는 소양강전투 당시 미2사단의 부상자 통계가 빠져있는데 이걸 제외하고 합산하면 중국군의 5차전역 당시 미군의 손실은 전사 1,814명, 부상 7,470+α 가 됩니다. 대략 1만명 내외의 미군 사상자가 발생한 것인데 중국측의 주장과 비교하면 대략 1/3 정도입니다.

같은 기간 동안 중국측은 약 8만5천명의 손실을 입었다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비교하려면 여기서 한국군과의 전투에서 입은 손실을 빼야 하는데 자료가 없어서 조금 어렵군요.

이상 알맹이 없는 썰렁한 이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