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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월 11일 화요일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6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연재에 앞서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

1. 테렌스 주버vs테렌스 홈즈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2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3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4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5


다시 한번 훑어보니 2010년 10월에 1-5를 쓰고 두달이 훨씬 넘게 지났군요;;; 어쨌든 테렌스 주버와 테렌스 홈즈의 대결은 계속됩니다.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6


지난번 글에서 다룬 것 처럼 테렌스 홈즈는 2002년 War In History 9-1호에 발표한 “The Real Thing: A Reply to Terence Zuber’s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을 통해 주버의 반론을 다시 한번 비판합니다. 이에 대해 주버도 다시 재반론을 준비하고 이것을 2003년 War In History 10-1호에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 – Again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습니다.

주버는 먼저 “슐리펜 계획에서 파리 서쪽으로 대규모 우회 기동을 실시하는 것은 고정적인 요소가 아니라 프랑스군 주력이 서쪽으로 성공적으로 철수할 경우 어쩔 수 없이 취해야 하는 것” 이었다는 홈즈의 주장을 비판합니다. ‘슐리펜 계획’이 실재했던 작전계획이라는 전통적인 학설들은 모두 퇴각하는 프랑스군을 추격해 파리 서쪽으로 우회기동 할 것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글에서 주버가 가장 공들여서 비판하고 있는 부분은 이른바 “실재하지 않는 부대”들의 존재입니다. 홈즈는 “The Real Thing: A Reply to Terence Zuber’s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에서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에 나타나는 편성되지 않은 부대들은 전시에 편성될 부대였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주버는 이 점이야 말로 “슐리펜 계획이 실제 작전 계획인 것 처럼 조작하려 한 쿨, 그뢰너, 푀르스터 등의 논리에 홈즈가 말려든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주버는 전시에 동원되는 군단들, 이른바 “Kriegskorps”는 편성할 당시 부터 문제가 많았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Kriegskorps”가 처음 편성된 것은 1902년이라고 합니다. 1902년에 독일 육군을 증강해야 한다는 슐리펜의 주장에 따라 1902년에 21, 22, 23, 24, 그리고 근위예비군단 등 5개의가 편성된 것 입니다. 하지만 새로 전쟁상으로 취임한 아이넴(Karl Wilhelm Georg August Gottfried von Einem)은 Kriegskorps에 대한 평가를 지시했고 그 결과 전시동원에 필요한 장비가 부족하다는 점 때문에 Kriegskorps를 해체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하지만 슐리펜이 모든 Kriegskorps를 해체하는데 반대했기 때문에 23, 24군단만 해체되었습니다. 주버는 3개의 Kriegskorps가 이미 1902년 부터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1906/07년 전개계획에서 이 3개 군단이 포함되었다는 푀르스터의 주장을 그대로 반복한 홈즈는 설득력이 없다고 강조합니다.
한편, 지난번 글에서 살펴본 것 처럼 홈즈는  “The Real Thing: A Reply to Terence Zuber’s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에서 슐리펜이 서부전선에 대한 1904년의 첫번째 참모부연습에서 아직 편성되지 않은 가상의 13개 사단을 동원한 점을 지적하면서 (전시 동원을 고려했을 경우) 실제 전쟁계획에서도 아직 편성되지 않은 사단을 포함시키는 것이 이상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주버는 슐리펜이 실제 워게임에서 아직 편성되지 않은 부대를 포함시킨 것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라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전시에 편성되는 부대들은 즉시 동원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점도 함께지적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슐리펜이 1905년 비망록에서 당시 독일군의 병력이 부족하다고 지적한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홈즈는 “The Real Thing: A Reply to Terence Zuber’s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에서 슐리펜은 독일군의 병력이 부족하지만 8개의 보충군단이 편성되면 작전이 실행 가능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주버는 이에 대해 슐리펜이 실제로 이런 생각을 했다는 근거는 희박하다고 비판합니다. 주버는 홈즈가 단지 게르하르트 리터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8개 보충군단 문제를 제기했을 뿐이며 리터의 주장도 잘못된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주버는 양면전쟁과 러시아군의 전력 문제를 다시 언급합니다. 홈즈는 “The Real Thing: A Reply to Terence Zuber’s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에서 슐리펜은 러시아군이 동원가능한 병력의 규모보다는 러시아군의 질에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에 러일전쟁으로 러시아군이 약체화된 상황에서 러시아의 공세능력을 과소평가한 것은 당연하다고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주버는 러일전쟁에도 불구하고 1905-1906년 시점에서 러시아군의 주력은 유럽지역에 동원 가능한 상태였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서부전선에 주력을 돌리게 된다면 러시아군의 질적 수준이 아무리 형편없더라도 텅 빈 동프로이센을 점령하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을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편, 홈즈는 모로코 위기 당시 수상이었던 뷜로(Bernhard Fürst von Bülow)가 슐리펜의 평가를 받아들여 러시아의 강경 대응 가능성을 낮게 평가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주버는 이에 대해 모로코 위기를 초래한 뷜로가 러시아의 강경 대응 가능성을 낮게 평가하면서도 한발 물러선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묻고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홈즈의 1904년과 1905년의 서부전선에 대한 참모부연습에 대한 해석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주버는 홈즈가 ‘1905년 비망록’이 실제 전쟁계획이라는 가정을 하고 참모부연습을 해석하는 귀납적 오류를 저질렀다고 비판합니다. 주버는 먼저 1904년의 첫번째와 두번째 참모부연습과 1905년의 참모부연습에서 결전이 벌어지는 지역은 아르덴느와 로렌이었다는 점을 재차 강조합니다. 그리고 독일군의 우익으로 공세에 나서는 것은 1904~1905년에 이르러 형성된 개념이 아니라 그 이전 부터 검토되던 방안이었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1910년 경에 이르면 프랑스의 대중 매체들 조차 독일군이 유사시 벨기에를 통해 공격해 올 것이라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점도 덧붙이고 있습니다. 주버는 만약 슐리펜이 이무렵 ‘슐리펜 계획’의 기본개념을 정립했다면 1904년과 1905년의 참모부연습에서 대규모 우회기동을 시험했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런 흔적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고 봅니다. 주버는 오히려 슐리펜이 양면전쟁을 치르기 위해서 최대한 짧은 거리에서 결전을 벌인뒤 내선의 이점을 활용해 동부전선으로 병력을 돌린다는 생각만을 했다고 주장합니다. 주버는 그 무렵 슐리펜이 서부전선에서 신속한 승리를 거둔 뒤 동부전선으로 병력을 이동시키는 연습을 집중적으로 했다고 강조합니다.(이 문제는 주버의 단행본, Inventing the Schlieffen Plan에 더 자세히 언급되어 있으니 연재물에서는 이 단행본을 다룰 때 설명하겠습니다.)
그리고 주버는 1905년의 워게임에 대한 슐리펜의 논평 중 “Wir wurden demnach zu bekampfen haben…”이라는 구절의 해석 문제에 대해서는 자신의 해석이 옳다고 주장합니다. 슐리펜은 양면전쟁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았으며 홈즈는 단지 문법문제로 말꼬리 잡기를 하는 수준에 불과하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주버는 홈즈가 첫 번째 반론이었던 “The Reluctant March on Paris: A Reply to Terence Zuber’s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에서 슐리펜의 후임이었던 소 몰트케가 1911년 슐리펜의 계획과 비슷한(akin) 계획을 채택했다고 지적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합니다. 주버는 먼저 ‘슐리펜 계획’이 실재로 존재한 전쟁 계획이었다고 주장하는 전통적인 학설에서는 소 몰트케가 슐리펜 계획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설명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즉 홈즈가 주장하는 것 처럼 소 몰트케가 1911년에 슐리펜 계획과 유사한 계획을 채택했다면 전통적인 학설과 충돌하게 되는데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고 묻는 것 입니다. 다음으로는 홈즈가 두 번째 반론인 “The Real Thing: A Reply to Terence Zuber’s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에서 이 문제를 더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akin’이라는 개념을 명확하게 설명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홈즈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고 있습니다. 1.슐리펜 계획에서는 우익과 좌익의 병력비율이 7:1인데 몰트케의 계획에서는 3:1이다. 2.슐리펜 계획에서는 우익에 82개 사단이 배치되는데 몰트케의 계획에서는 54개 사단만이 배치되어 있다. 3.슐리펜 계획은 서부전선에 병력을 집중하고 있는데 몰트케의 계획은 양면전쟁을 고려해 병력을 배치하고 있다.

주버는 마지막으로 슐리펜 계획은 프랑스군의 주력을 가능한한 파리-베르덩 사이에서 격멸할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고 파리 서쪽으로 대규모 우회기동을 실시하는 것은 프랑스군 주력이 성공적으로 퇴각할 경우 어쩔 수 없이 취해야 하는 방안이었다는 홈즈의 주장을 비판합니다. 하지만 주버는 전통적인 학설에서 슐리펜의 의도가 프랑스군 주력을 우회 기동으로 포위하기 위해서 파리 서쪽으로 대규모 우회기동을 취하는 것 이었다고 강조했음을 지적합니다. 주버는 홈즈가 슐리펜 계획이 실제 전쟁 계획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강조하기 위해서 전통적인 학설에서 조차 일탈하는 오류를 저질렀다고 비판합니다.

2010년 8월 20일 금요일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



A. 논쟁의 시작

앞서 이야기 했듯 1999년 대학원 박사과정에 있었던 테렌스 주버는 논문 한편으로 군사학계를 술렁이게 했습니다. 주버는 1999년 War In History에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라는 제목의 논문을 기고했는데 이 논문은 10년이 넘는 대논쟁의 문을 열었습니다. 주버는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를 통해 매우 충격적인 주장을 펼쳤습니다. 슐리펜 계획은 실제로 존재했던 작전 계획이 아니라 1차대전 직후 패전의 책임을 지게 된 독일 군부, 특히 총참모부 계열의 장교들이 책임 회피를 위해 만들어낸 허구라는 것 이었습니다.

주버는 1차대전 내내 독일 군부의 전쟁 수행에 비판적이었던 한스 델브뤽(Hans Delbrück)을 필두로 한 민간인들이 패전 이후 더욱 적극적으로 독일 군부, 특히 총참모부의 전쟁수행방식을 비판하기 이전에는 슐리펜계획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슐리펜계획에 대해 공식적으로 언급이 시작된 것이 바로 이러한 비판이 빗발치기 시작한 직후라는 사실도 함께 지적합니다.
그는 1차대전 이후 슐리펜계획에 대한 논쟁이 진행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먼저 위에서 이야기한 것 처럼 한스 델브뤽이 1차대전 중 독일군 수뇌부의 전쟁수행방식을 비판하자 전쟁 이전부터 델브뤽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군부에서 반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슐리펜계획에 대해 처음 언급한 인물은 독일 육군의 장군이었던 헤르만 폰 쿨(Hermann von Kuhl)이었습니다. 그는 1920년에 발표한 1차대전기 독일 총참모부의 전쟁준비와 전쟁수행(Der deutsche Generalstab in Vorbereitung und Durchführung des Weltkrieges)이라는 저작을 통해 1차대전 이전 독일군의 전쟁계획을 다루면서 장교단에 대한 비판에 대응하기 시작했습니다. 쿨은 관련된 글을 발표하면서 1차대전 초기 독일군이 서부전선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은 당시 총참모장이었던 소(小)몰트케가 제1군을 최대한 강화하도록 한 슐리펜의 원안을 수정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쿨의 뒤를 이어 국립문서보관소 소속으로 1차대전 공간사 집필에 참여하고 있던 볼프강 푀르스터(Wolfgang Foerster) 또한 슐리펜이 퇴임 직전 서부전선에 주력을 집중하고 특히 우익을 강화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델브뤽에 대해 반박했습니다. 한편, 1차대전 직전 총참모부에서 부대 전개 및 배치를 담당했던 에리히 루덴도르프 또한 전후의 저작에서 슐리펜의 계획을 언급하며 델브뤽의 비판을 반박했습니다. 또한 1차대전 초 총참모부에서 철도 업무를 담당했으며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전쟁부 장관을 지내게 된 빌헬름 그뢰너(Wilhelm Groener)도 쿨의 견해를 지지하면서 슐리펜계획이 널리 알려지는데 기여를 했습니다.

문제는 1945년 영국공군이 포츠담을 폭격했을 때  그곳에 있던 독일군의 문서고가 파괴되어 많은 사료가 소실되었다는 점 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쿨, 푀르스터, 그뢰너 등은 당시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은 자료들을 바탕으로 슐리펜계획에 대한 글을 썼는데 그 자료들 중 상당수가 전쟁 중 불타버렸기 때문에 슐리펜계획에 대한 주요 사료 중 2차대전 후 까지 남은 것은 슐리펜이 1906년 퇴임을 전후해 작성한 비망록(Denkschrift) 외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버는 이 비망록 자체가 작전계획으로써 문제가 많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특히 프랑스군이 알자스-로렌 방면으로 공격해올 경우 주공인 우익의 움직임에 대해 매우 혼란스러운 서술을 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습니다. 특히 1차대전 직후 부터 제기되었던 문제 중 하나로 96개 사단을 서부전선에 투입하는 것이 1906년은 물론 1914년에도 불가능했다는 점에 대해서 그때까지의 역사가들이 아무런 의구심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비판합니다.

주버는 독일 통일 이후 공개된 구동독 소유의 문헌들을 활용했는데 그것은 빌헬름 디크만(Wilhelm Dieckmann)의 슐리펜계획에 대한 연구 원고, 그리고 슐리펜과 몰트케가 몇몇 훈련에 대해 남긴 최종논평(Schulßbesprechungen) 등이었습니다.
필자인 주버는 특히 빌헬름 디크만의 원고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디크만은 역사교육을 받은 장교로서 1차대전 공간사 집필에 참여했으며 대략 1930년대 후반에 문제의 원고를 집필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디크만의 원고는 슐리펜이 총참모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시기의 부대전개계획(Aufmarschpläne)과 참모부연습(Generalstabsreise) 등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


B. 디크만의 연구에 대한 검토

이 글에서는 먼저 1차대전 이전 독일군의 부대전개계획을 살펴보고 넘어갑니다. 주버는 대(大) 몰트케에서 발더제(Alfred von Waldersee)가 독일군 총참모장을 역임하던 시기 독일군의 전쟁 계획은 서부전선에 주력을 집중해 방어하고 동부전선에서는 상대적으로 적은 규모의 제한적인 공세를 취하는 것 이었다고 지적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써 대 몰트케의 마지막 계획이었던 1888년의 계획에서는 서부전선의 방어에 11개 군단을, 동부전선의 공세에 7개 군단을 할애하고 있었던 점을 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 서부전선에서도 제한적인 공세를 실시하는 것을 추천하고 있었는데 그 경우 6개 군단으로 낭시(Nancy)를 공격하도록 되어 있엇습니다.
주버는 슐리펜도 기본적으로는 이러한 계획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그의 최초 부대전개계획인 1893/94년 계획에서 48개 사단을 서부전선에, 15개 사단을 동부전선에 두고 동부전선의 15개 사단 중 11개 사단을 실레지엔에서 러시아령 폴란드를 향한 공세에 배정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슐리펜은 1894년 비망록에서 먼저 낭시를 공격한 뒤 그 다음에는 툴(Toul)과 베르덩(Verdun) 사이의 요새선을 공격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주버는 기존의 학설에서 이 비망록을 서부전선에 주력을 집중하는 슐리펜 계획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오류라고 강조합니다. 즉 슐리펜의 최초 계획은 어디까지나 몰트케의 계획을 이어받은 것에 머물렀다고 설명하는 것 입니다.
다음으로는 1895/96년의 부대전개계획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주버는 1895/96년 계획에서 주목할 점은 동부전선에 대한 부분이라고 봅니다. 1895/96년 계획에는 동부전선에 대한 전개계획이 A안과 B안으로 나뉘어 있는데 A안은 동프로이센에서 나레프(Narew) 강을 건너 공격하는 것이고 B안은 1893/94년 계획과 마찬가지로 실레지엔에서 공격을 시작하는 것 이었습니다. 디크만의 분석에 따르면 슐리펜은 1895/96년 계획을 작성한 시점에서 B안 보다는 A안을 선호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1896/97년 부대전개계획에서는 동프로이센에서 15개 사단으로 공세를 개시하는 것이 확립되었다고 합니다. 주버는 이것을 슐리펜의 계획이 완전히 몰트케가 구상한 것으로 회귀한 결과라고 해석합니다.

다음으로 흥미로운 것은 1897년 비망록에 대한 분석입니다. 프랑스가 국경지대의 요새선을 강화하면서 독일 내에서는 벨기에를 침공해 프랑스의 요새선을 우회하는 방안을 취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는데 위에서 언급한 디크만의 연구에 따르면 슐리펜은 1896년 경에 이 방안을 고려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슐리펜의 1897년 비망록에서는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1897년 비망록에서는 요새지대를 우회하는데 두 가지 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툴과 에피날(Epinal) 사이를 돌파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베르덩 북쪽으로 돌파하는 것 이었습니다. 첫번째 안은 해당 지역이 부대기동에 곤란했기 때문에 부적합했던 반면 베르덩 북쪽으로 돌파하는 두번째 안은 해당지역이 대규모 부대의 기동에 적당하다는 점 때문에 현실적으로 적합했습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침공해야했습니다. 1897년 비망록에서는 베르덩 북쪽으로 돌파하는 주력에 2개 군을, 주력의 좌익을 엄호하기 위해서 1개 군을, 그리고 프랑스군을 묶어두기 위해 3개 군을 배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버는 이것을 실제 작전으로 옮기기에는 독일군의 병력이 부족했기 대문에 1897년 비망록의 연구내용은 1897/98년과 1898/99년의 부대전개계획에 반영되지 못했다고 지적합니다.  오히려 당시 독일군의 배치를 보면 서부와 동부의 사단비율이 2:1로써 서부전선에서 대공세를 펼칠 수 있는 배치가 아니었다고 합니다.(서부에 48~46개 사단, 동부에 20~22개 사단) 그렇기 때문에 주버는 슐리펜이 1897년 부터 서부전선에서 공세를 계획하고 있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대로 1899/1900년 부대전개계획에도 이어지는데 이 계획에 따르면 두 개의 안 중 두 번째 안(Aufmarsch II)은 기존 계획의 연장선 상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합니다.

한 편, 슐리펜은 1898년 말에 작성한 비망록에서는 먼저 프랑스군의 공격을 기다린 뒤 반격에 나서는 방안을 연구했다고 합니다. 주버는 1898년 비망록이 매우 실험적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즉 슐리펜은 서부와 동부의 사단비율을 2:1로 한 기존 계획으로는 어느 방면에서건 프랑스군과 러시아군에게 숫적으로 압도당해 선제공격이 어려우므로 독일군의 병력동원이 완료될 때 까지 방어를 한 뒤 서부전선에서 반격에 나서는 방안을 구상했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반격을 시작할 때 독일군의 주공은 (아마도 프랑스군의 좌익이 치고올) 아르덴느를 향하도록 계획되었습니다. 반격시 독일군의 주공은 2개 군으로 구성되었는데 주버는 여기서 한가지 사실을 강조합니다. 즉 아르덴느를 통한 반격에서 포위망의 규모는 제한적이었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주버는 1898년 비망록에서 나타난 ‘반격’의 개념이야 말로 슐리펜이 가장 선호한 전략이었으며 그가 퇴임할 때 까지 계속되었다고 강조합니다. 주 버가 인용한 디크만의 연구에 따르면 1898년 비망록의 내용은 1899/1900년 부대전개계획의 첫번째 안(Aufmarsch I)을 수정할 때 반영되었지만 여전히 동부에 10개 사단을 배치하는 등 기존 계획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합니다. 1900/01년의 부대전개계획 중 Aufmarsch I의 병력배치는 1899/1900년 안과 큰 차이가 없으나 구체적인 병력 배치에 있어서는 변화가 있었습니다. 즉 베르덩 북쪽의 주공을 3개 군으로 강화하고 주공의 좌익을 방어하는 3개 군을 1개 군으로 축소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 리고 주버는 1900년 1월 18일 당시 총참모부 제3부참모장(Oberquartiermeister III)으로 재직 하고 있었던 베셀러(Hans Hartwig Beseler)의 작전연구(Operationsstudie)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베셀러의 작전연구는 서부전선에서의 공세를 강조하면서 주공을 우익에 둘 것을 명시하고 있었습니다. 베셀러는 주공을 리에쥬(Liege)-나무르(Namur)와 베르덩 사이의 약 90km에 이르는 정면에 집중시켜 독일국경에 집결한 프랑스군 주력을 단기간에 격파할 것을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주 버는 그렇기 때문에 서부에 대한 작전은 슐리펜과 베셀러가 공동으로 완성한 것이며 슐리펜의 1897년, 1898년 비망록과 베셀러의 1900년 작전연구가 이후 서부전선에 대한 슐리펜의 전략구상을 지배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학계에서  ‘슐리펜 계획’으로 본 1905년 비망록의 중요성은 과대평가되었다고 주장합니다.

한 편, 주버는 1900/01년 부대전개계획의 Aufmarsch II 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1900/01년 Aufmarsch II는 44개 사단을 동부전선에 집중해 오스트리아군 40개 사단과 함께  러시아를 상대로 전략적인 대공세를 펼치는 내용이었습니다. 주버는 슐리펜이 서부 뿐 아니라 동부에서도 공세에 나서는 방안을 연구했다는 사실은 슐리펜이 서부에 대한 공격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였다는 기존의 설이 잘못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봅니다.

동 부에서 전략적인 공세를 펼친다면 서부에서는 방어를 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주버는  이러한 배경이 슐리펜에게 서부에서 프랑스군의 공격을 먼저 막아낸 뒤 반격하는 방안을 계속 연구하도록 했다고 해석합니다. 슐리펜은 1899년에 작성한 비망록에서 프랑스군이 숫적 우세를 바탕으로 공세를 감행할 경우 프랑스군의 좌익에 대해 역습을 감행할 것을 언급했다고 합니다. 즉 서부에서 적은 병력으로 방어를 하게 될 경우 숫적으로 우세한 프랑스군은 독일군의 고정방어를 우회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고정방어 대신 반격을 통한 기동방어를 해야 한다는 것 이었습니다.
주버는 이런 인식이 1900년과 1901년의 참모부연습에 그대로 반영되었다고 봅니다. 특히 1901년의 참모부연습에서는 동원 4주차에 국경지대에서 프랑스군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뒤 9개 군단을 동부로 이동시킬 수 있을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그러나 1901년 참모부연습에서는 프랑스군에 승리를 거둔 뒤에도 38개 사단을 서부전선에 남겨둬야 했는데 그 이유는 국경지대 전투에서 격파할 수 있는 프랑스군은 2개 야전군 규모로 프랑스군을 완전히 격멸하는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즉 주버는 ‘슐리펜 계획’에서 나타나는 프랑스군의 철저한 격멸이 1901년 연습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 입니다.
한 편 1901/02년의 Aufmarsch II 에서는 동부에 배치할 사단을 41개로 줄이고 다시 1902/03년의 Aufmarsch II 에서는 이것을 다시 24개 사단으로 줄여버리는데 이것은 대 몰트케의 구상으로 다시 회귀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다음으로 분석하고 있는 것은 1902/03년 Aufmarsch I 입니다. 1902/03년의 Aufmarsch  I은 프랑스군이 자신들의 좌익에 대한 독일군의 반격을 예측할 것을 상정하고 프랑스군 좌익을 공격하는 대신 프랑스군 우익을 공격하는 계획이었습니다. 이 계획에서는 3개군이 공격에 동원되고 이 중 제4군이 베르덩 방면으로, 제5군과 6군이 낭시와 트루에 드 샤흐므(trouée de Charmes) 방면을 담당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주버가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슐리펜이  서부전선에서 우익에 주공을 집중하는 방식만 고려한 것이 아니라는 점 입니다. 이점은 슐리펜이 1902년 5월 16일에 작성한 글을 인용하는데서 더 잘 드러납니다. 주버에 따르면 슐리펜은 이 글에서 베르덩 북쪽으로 주공을 지향하더라도 좌익과 보조를 맞추지 못하면 압도적인 프랑스군에게 격파당할 위험이 높으며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드러냈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주버는 1902/03년의 Aufmarsch II는 슐리펜이 여전히 동부에도 신경을 쓰고 있었던 근거로 봅니다. 주버는 1902/03년의 Aufmarsch II는 비록 전쟁 발발시 동부전선에서 제한적인 공세작전을 실시하는 것 이었지만 슐리펜이 1902년에 작성한 비망록에서는 13개 군단과 10개 예비사단을 동원한 대규모 공세를 고려하고 있었다는 점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주버는 이 당시 슐리펜의 구상을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먼저 동부전선에 압력을 가하면 러시아의 동맹인 프랑스가 러시아를 지원하기 위해 공세에 나서게 되고 그렇게 된다면 강력한 요새선에서 나온 프랑스군을 독일군의 철도망이 지원할 수 있는 국경에서 격파할 수 있다는 것 입니다.
디크만의 원고는 마지막으로 1903/04년의 부대전개계획을 언급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65개 사단을 서부에, 10개사단을 동부에 배정하고 있습니다. 주버는 1903/04년의 부대전개계획 I에 대해서는 특별한 설명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주버는 디크만의 연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기 존의 통설은 슐리펜이 동부전선에 주력하는 방안에서 서부전선에 주력하는 방안을 취하면서 슐리펜 계획이 등장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실제로 슐리펜은 1903~4년에 이르기 까지 동부전선에 대한 공세를 포기하지 않았으며 서부전선에서는 제한적인 규모의 공세만을 계획했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독일군이 선제공격에 나서는 경우는 대부분 프랑스군이 공세로 나오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 였다고 봅니다.  물 론 주버는 디크만의 한계도 동시에 지적합니다. 즉  디크만이 원고를 집필할 당시 부대전개계획 이외의 자료는 접근할 수 없었으며 특히 실제 부대전개명령(Aufmarschanweisungen)과 같은 자료는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대신 비망록과 참모부연습(Stabsreisen)의 결론을 활용해 총참모부의 의도를 분석할 수 밖에 없었다는 점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버는 디크만의 연구가 담고 있는 내용으로도 슐리펜 계획에 대한 기존의 통설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강력히 주장합니다.


C. 참모부연습에 대한 슐리펜의 최종논평

주 버가 다음으로 제시하는 자료는 슐리펜이 1904년 실시한 참모부 연습에 대해 남긴 최종논평(Schulßbesprechungen)입니다. 주버는 이 자료가 슐리펜이 서부전선에 대해 가지고 있던 전략개념을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슐 리펜은 1904년의 첫 번째 참모부연습(Generalstabsreise West)에 대한 논평에서 흥미로운 점을 몇 가지 언급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병력 문제입니다. 1904년의 첫 번째 참모부연습에서는 현역 부대 외에 16개 예비군단(Reserve Korps), 즉 32개 예비사단과 14개 향토사단(Landwehr-divisionen)도 동원된 것으로 상정하고 있었는데 당시 실제로 동원 가능한 것은 19개 동원사단에 불과했습니다. 슐리펜은 이에 대해 전시 총력전 상황에서는 동원가능한 병력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벨기에 침공에 대해 논의하고 있습니다. 슐리펜은 대부분의 국가들이 독일이 벨기에를 거쳐 공격해 올 것을 기정사실화 하고 있는 반면 프랑스는 독일이 국경지대에 정면 공격을 감행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으며 독일군의 공세를 둔화 시킨뒤 반격에 나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의 예상 반격로는 벨기에를 경유하는 것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슐리펜은 이 논평에서 서부전역이 시작될 경우 프랑스의 요새선을 우회하는 방안을 두가지 제시하고 있는데 첫 번째는 메지에흐(Mézières) 북쪽으로 돌파하는 것 이었습니다. 슐리펜은 이 방안의 문제점은 뮤즈강을 건넌 주력과 국경지대를 방어하는 부대가 분리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두 번째는 베르덩-릴(Lille) 사이를 돌파하는 것으로 이 지역은 베르덩-벨포르를 연결하는 지역과 달리 요새화 정도가 낮다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슐리펜은 이 지역을 공격하기 위해 대규모 부대를 이동시키는 것은 은폐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기습의 효과가 떨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슐리펜은 몇몇 장교들에게 독일군이 프랑스군의 방어선을 우회하기 위해 라인강 하류 지역으로 병력을 집중시킬 경우 프랑스군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판단하도록 했는데 크게 두가지 안이 나왔습니다. 일부는 프랑스군도 독일군의 재배치에 맞서 병력을 좌익에 집중할 것이라고 본 반면 다른 일부는 독일군의 취약한 좌익을 먼저 공격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슐리펜은 후자의 의견에 동의했습니다. 슐리펜은 프랑스군이 독일군의 좌익을 칠 경우 이에 대응하기 위해 우익과 중앙에 집결한 병력을 남쪽으로 이동시켜야 하며 최악의 경우 로이텐 전투가 보다 큰 규모로 재현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결과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역시 독일이 메츠와 스트라스부르 등의 국경에 만들어 놓은 요새선 이었습니다.

다음으로는 연습 과정에 대한 논평이 이어졌습니다. 이 훈련에서 독일군은 17개 군단(34개 사단)을 아헨-베젤-쾰른 일대에 집결시키고 아이펠에 집결한 6개 군단이 그 측면을 엄호했습니다. 그리고 아이펠 남쪽으로는 다시 메츠에 집결한 6개 군단이 마찬가지 임무를 맡았고 9개 군단의 예비가 팔츠(Pfalz)에 집결해 있었습니다. 독일군의 가장 좌익인 스트라스부르 일대에는 예비군으로 편성한 사단과 3개 군단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이 연습에서 프랑스군은 40개 사단을 동원해 메츠-스트라스부르 지구를 공격했고 이와 별도로 조공 18개 사단이 트리에 방면으로 공격하는 것으로 설정되었습니다. 이 연습에서는 프랑스군이 취약한 독일군의 좌익에 주공을 지향한 상황을 극복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훈련에서 상정한 상황은 동원 16일 차에 1, 2, 3군이 네덜란드-벨기에의 국경을 넘은 상황에서 프랑스군이 취약한 좌익을 타격한 것 이었습니다. 독일측은 우익의 병력은 아르덴느를 통해 남진시키고 프랑스군이 독일 영내로 침입해 오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팔츠에 집결해 있는 예비대를 포함해 3개 군을 반격에 투입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군은 동원 19일 째에 메츠-쯔바이브뤼켄(Zweibrücken)을 잇는 선에 방어선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반격에 나선 독일군은 프랑스군 보다 우세한 포병의 지원에 힘입어 방어로 전환한 프랑스군의 좌익을 돌파하고 결국 포위망을 완성하는데 성공합니다. 이 연습은 동원 21일차에 프랑스군을 섬멸하는 것으로 종결됩니다.

주버는 이 연습과정이 겉보기에는 1905년 비망록, 즉 이른바 슐리펜 계획과 유사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첫 번째로는 3개 군에 해당되는 대병력이 아헨-베젤-쾰른 일대에 집결해 있다는 점이 슐리펜 계획과 유사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병력이 프랑스와의 국경 일대에 골고루 분산 배치되어 있다는 것 입니다. 두 번째는 슐리펜 계획에서는 대규모 우회 기동을 통한 대규모 섬멸전을 명시하고 있는데 1904년 연습에서는 1~3군이 네덜란드-벨기에 국경을 넘긴 하지만 소규모 우회기동에 그치고 있다는 점 입니다. 주 버는 마지막으로 1904년 연습에는 아직 편성되지 않은 다수의 부대가 등장하는데 이점은 1905년 비망록과 유사하다고 봅니다. 즉 ‘슐리펜 계획’으로 알려진 1905년 비망록은 실제 작전계획이 아니라 훈련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 입니다.

주버는 다음으로 1904년에 실시된 두번째 참모부연습에 대한 슐리펜의 최종논평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 두번째 연습은 첫번째 연습과 유사하지만 투입하는 병력 규모가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이 연습에는 향토사단은 한 개도 상정되지 않았고 단지 23개 예비사단 만이 명시되었을 뿐 입니다. 두 번째 연습에서 프랑스군은 동원 13일 차에 23개 군단을 투입해 상(上) 알자스 방면으로 공격하는 상황이 설정되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군은 독일군이 우익에 병력을 집결시킨다는 정보를 입수하더라도 공격을 강행하기 때문에 독일군은 베르덩-릴 방면으로의 돌파를 중지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슐리펜은 논평에서 프랑스군은 독일측이 우익에 병력을 집중해 병력을 집결한 것을 알게 된다면 공세에 나서지 않을 것이며 프랑스군이 공격을 계속하는 것은 스스로 독일군에게 유리한 상황을 조성하는 것이 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두번째 연습에서 독일군은 첫 번째 연습과 마찬가지로 프랑스군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우익의 병력을 남진시켰습니다. 그리고 국경을 돌파한 프랑스군 우익은 라인강을 도하해 충분한 병력(8개 군단)을 전개시킬 공간을 확보할 목적으로 튀빙엔 까지 진출하는 것으로 설정했습니다. 동시에 아르덴느로 진입한 프랑스군 좌익은 모젤 방면으로 진출하는데 메츠의 독일군은 바로 이 프랑스군 좌익에 대해 반격을 감행해 격파하는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연습에서는 메츠의 독일군이 아르덴느로 진입한 프랑스군 좌익을 격파하는데 성공합니다. 이때 프랑스군 중앙의 6개 군단과 라인강을 도하한 우익의 8개 군단은 공격을 계속 실시하고 독일군은 두개의 프랑스군 집단에 대해 내선의 우위를 가지고 상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연습에서 독일군을 맡은 지휘관이 프랑스군 중앙과 우익의 압박 때문에 프랑스군 좌익을 상대하던 병력을 빼돌려 프랑스군 좌익은 포위 섬멸되는 것을 면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이 연습에서 독일군은 프랑스군 좌익을 섬멸하는데 실패한 상태에서 프랑스군 중앙과 우익에 의해 포위당하는 결과를 맞게 됩니다.
주버는  이 두 번째 연습 또한 ‘슐리펜 계획’ 과는 동떨어진 내용이었다고 강조합니다.

다음으로는 슐리펜 계획의 구상이 그대로 드러났다고 이야기되는 1905년 참모부 연습에 대해서 분석하고 있습니다. 1905년 참모부연습은 1905/06년의 부대전개계획과 동일한 부대 배치에 슐리펜이 직접 독일군쪽을 맡아 진행했다고 합니다. 이 연습에서는 23개 군단과 15개 예비사단으로 이루어진 6개 군이 메츠에서 베젤에 이르는 지역에 전개되었고 메츠 이남의 좌익에는 3개 군단과 5개 예비사단만이 배치되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군은 각각 세명의 참모장교가 맡아 세차례의 연습이 실시되었습니다.
첫 번째로 프라이탁-로링호벤(Freiherr von Freytag-Loringhoven) 중령이 프랑스군을 맡이 실시한 연습에서 프랑스군은 독일군 우익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곧바로 주력을 벨기에로 돌리고 벨기에에서 벌어진 결전에서 독일군이 프랑스군을 격파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때 슐리펜은 메츠에 집결된 병력으로 프랑스군의 측면을 공격해 격파했는데 주버는 메츠는 ‘슐리펜 계획’에서는 별다른 역할이 없는 지역이었다고 지적합니다.
두 번째 연습에서는 슈토이벤(von Steuben) 대령이 프랑스군을 맡았는데 이 연습에서는 프랑스군이 메츠-자르부르크 방면으로 주공을 실시했습니다. 그런데 슐리펜은 우익의 공격을 계속하는 대신 우익의 병력 상당수를 프랑스군 주공을 저지하는데 돌립니다. 결과적으로 두번째 연습도 슐리펜 계획과는 동떨어진 결론으로 끝났습니다.
세 번째로 당시 소령이었던 쿨이 프랑스군을 맡은 연습에서는 프랑스군이 메츠 방면으로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슐리펜은 이에 대해 두번째 연습과 마찬가지로 프랑스군의 주력을 맞상대하는 선택을 했습니다.
주버는 1905년의 참모부 연습이 ‘슐리펜 계획’ 과는 동떨어진 내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슐리펜 계획의 일부로 해석되온 원인은 1930년대 후반에는 이미 ‘슐리펜 계획’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확고해 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주버는 슐리펜이 퇴임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실시한 1905년 겨울의 워게임(Kriegsspiel)에 대해서도 주목하고 있습니다. 주버는 ‘슐리펜 계획’ 이라는 것이 실재했다면 슐리펜이 자신의 퇴임 직전 마지막으로 실시하는 대규모 연습에서 이 계획을 시험했어야 정상이라는 가정을 깔고 있습니다. 주버는 슐리펜이 이 마지막 연습에서 서부전선과 동부전선 모두 전략방어를 취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슐리펜은 1905년의 워게임에서 먼저 동부전선으로 침공해 온 러시아군을 격퇴한 뒤 그 병력을 서부로 돌렸습니다. 한편 서부 전선의 상황은 조금 재미있게 설정되어 있었습니다. 1905년 겨울 워게임에서는 프랑스가 먼저 벨기에를 침공해 벨기에가 독일편에 서는 상황을 가정하고 있었던 것이죠. 서부전선에서는  먼저 침공해온 프랑스군을 동원 26일째 까지 격퇴한 뒤 제한적인 반격이 실시되었습니다. 그리고 동부전선에서 차출된 부대와 추가로 동원되는 부대와 함께 동원 42일 차에 프랑스군 주력을 아르덴느에서 포위 격멸하는 것으로 작전은 종결됩니다.
주버는 슐리펜이 총참모장 재직 말기에 실시한 여러 연습들은 하나같이 슐리펜 계획과는 동떨어진 내용이었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D. 1905년 비망록에 대한 비평

주버는 이제 ‘슐리펜 계획’ 문건인 1905년 비망록에 대해서 비판의 칼날을 돌립니다. 주버는 기존의 연구들은 러일전쟁의 결과 슐리펜이 러시아군을 과소평가했기 때문에 1905년 비망록에서 동부전선을 거의 무시한 것으로 해석했지만 이것은 실제 역사적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다고 비판합니다. 오히려 1906년 독일군의 정보기관은 러시아군이 전쟁에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발발할 경우 독일 방면에 25개 사단을, 오스트리아 방면에 22개 사단을 투입할 능력이 있다고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 입니다.
주버는 1950년대 슐리펜 계획에 대한 비판적인 연구가 처음 시작된 이후 모든 역사가들이 슐리펜 계획이 실존한 계획이었다는 가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었다고 비판합니다. 주버가 보기에 1905년 비망록은 프랑스와 러시아라는 두 육군 강국을 두고 병력 부족으로 고심해야 했던 슐리펜의 문제점을 보여주는 여러 문건들 중 하나일 뿐입니다. 주버는 파리까지 진격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슐리펜이 상정한 ‘최악의 시나라오’ 였을 뿐 슐리펜의 실제 의도는 아르덴느와 같이 독일 국경 근처에서 프랑스군을 결전으로 격파하는 것 이었다고 주장합니다.

문제의 1905년 문건에 대한 분석도 꽤 흥미로운 편 입니다. 주버는 먼저 1905년 비망록에 포함된 지도들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1905년 비망록 파일에는 총 11개의 지도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 중 1:800,000축적의 6번 지도가 ‘슐리펜 계획’을 전체적으로 보여주는 것 입니다. 그리고 이 6번 지도는 1:300,000축적의 2번지도(동원 22일차)와 3번지도(동원 22일차에서 31일차까지)를 요약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주버는 이 지도들에는 단지 독일군이 특정 일자에 진출해야 할 목표만이 표시되어 있을 뿐 프랑스군의 배치나 전개 상황에 대한 정보가 전무하다고 지적합니다.
특히 지도3은 파리까지의 이동이 표시되어 있는데 정작 파리까지 도달하는데 어느 정도 소요 되는지에 대한 정보는 전무하다고 합니다. 기존의 연구들은 40일 이내에 전역이 종결된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주버는 슐리펜이 1905년 비망록에 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주버는 40일 이내에 전역을 종결한다는 것은 소(小)몰트케의 발언인데 연구자들이 이것을 슐리펜 계획에도 있는 것 처럼 잘못 이야기 했다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도3은 독일군의 주공을 릴(Lille) 남쪽에 두고 있는데 이것은 흔히 알려진 슐리펜 계획의 내용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 입니다.
다 음으로는 1:800,000축적의 지도5와 지도5a를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 지도들은 프랑스군이 로렌 방면으로 공격해 올 경우를 가정한 지도인데 흥미롭게도 1904년과 1905년 참모부연습 처럼 프랑스군이 공격해 올 경우 우익의 병력 일부를 남쪽으로 돌리도록 되어 있다고 합니다. 즉 역시 ‘슐리펜 계획’과는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 입니다.
주버는 이런 문제점 때문에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 중 슐리펜이 직접 작성한 것 이외의 것은 이후에 추가된 문서일 것으로 추정합니다. 즉 슐리펜 계획의 개요를 보여주는 지도 2, 3, 6, 7은 몰트케의 것 이라는 것 입니다.


E. 소(小) 몰트케 시기의 참모부연습

주버는 다음으로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이 ‘작전계획’이 맞다면 슐리펜의 후임인 소 몰트케가 이에 따라 훈련을 진행했는지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주버가 이 글에서 사례로 든 것은 1906년과 1908년의 연습입니다.

먼저 1906년의 참모부연습에서는 프로이센에 6개 군단(12개사단)과 9개 예비사단 등 총 21개 사단을 배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부전선에서는 우익에 15개군단(30개 사단), 메츠에 1개 군단, 로렌에 7개 군단, 스트라스부르에 2개 군단, 알자스에 2개 군단을 배치해 놓고 있습니다. 즉 1905년 비망록과는 완전히 다른 부대 배치인 것입니다.  그리고 몰트케는 이 연습에서 벨기에를 통해 우익의 30개 사단을 투입하는 대신 이들을 메츠 방면의 반격에 투입하는 방안을 취했습니다. 결전을 국경지대에서 치른다는 것 입니다.

1908년의 참모부 연습은 프랑스가 로렌으로 직접 공격해 오는 상황과 함께 벨기에의 협조를 얻어 아르덴느를 통해 공격해 오는 상황을 상정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가 아르덴느로 공격을 해 올 경우 2개 군이 동원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이에 대한 독일군의 배치는 4개 군을 메츠와 아헨 사이에 두고 1개 군을 메츠 동쪽에, 1개 군을 로렌에, 1개 군을 로렌 남부-알자스에 두는 것 이었습니다. 이 경우 독일군은 아르덴느를 향해 공격을 시작할 것이었지만 결전을 치를 곳은 프랑스군 주력이 출현하는 곳 이었습니다. 소 몰트케는 만약 프랑스군 주력이 메츠-스트라스부르 방면으로 향한다면 4개 군을 메츠-코블렌츠 일대에 집결시킨 뒤 남서 방향으로 반격을 실시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1군과 2군은 주공의 우익을 방어하는 임무를 수행할 것 이었습니다. 그리고 만약 프랑스군의 주공이 좌익이라면 1군과 2군이 상대하거나 4군과 5군이 대응하도록 했습니다. 또한 프랑스군 주공이 메츠로 향한다면 1군과 2군이 남진해서 이를 상대하도록 했습니다.

주버는 1906년과 1908년의 연습을 통해 소 몰트케는 프랑스 침공 보다는 프랑스의 선제공격을 상대하는데 중점을 두었다고 해석합니다.


주버의 결론은 매우 충격적입니다. 주버는 이 논문의 마지막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립니다.

지금까지 정설이었던 게르하르트 리터(Gerhard Ritter)의 해석은 슐리펜이 처음에는 동부에 주력하는 계획을 세우다가 점차 서부전선에 중점을 두는 방향으로 선회했으며 그 결정판이 바로 ‘슐리펜 계획’ 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틀린 해석이다. 슐리펜이 1898년 부터 1905년까지 쓴 글과 그가 실시한 여러 연습들을 보면 그의 의도는 어디까지나 국경지대에서 제한적인 반격을 실시하는 것 이었다. 슐리펜에서 소 몰트케에 이르기 까지 독일군은 서부전선에서 전략적 차원의 대규모 섬멸전을 계획한 사실이 없다.


이 결론은  꽤 충격적인 것 이었고 후폭풍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10년에 걸친 논쟁의 막이 오르게 된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