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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월 11일 화요일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6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연재에 앞서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

1. 테렌스 주버vs테렌스 홈즈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2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3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4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5


다시 한번 훑어보니 2010년 10월에 1-5를 쓰고 두달이 훨씬 넘게 지났군요;;; 어쨌든 테렌스 주버와 테렌스 홈즈의 대결은 계속됩니다.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6


지난번 글에서 다룬 것 처럼 테렌스 홈즈는 2002년 War In History 9-1호에 발표한 “The Real Thing: A Reply to Terence Zuber’s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을 통해 주버의 반론을 다시 한번 비판합니다. 이에 대해 주버도 다시 재반론을 준비하고 이것을 2003년 War In History 10-1호에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 – Again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습니다.

주버는 먼저 “슐리펜 계획에서 파리 서쪽으로 대규모 우회 기동을 실시하는 것은 고정적인 요소가 아니라 프랑스군 주력이 서쪽으로 성공적으로 철수할 경우 어쩔 수 없이 취해야 하는 것” 이었다는 홈즈의 주장을 비판합니다. ‘슐리펜 계획’이 실재했던 작전계획이라는 전통적인 학설들은 모두 퇴각하는 프랑스군을 추격해 파리 서쪽으로 우회기동 할 것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글에서 주버가 가장 공들여서 비판하고 있는 부분은 이른바 “실재하지 않는 부대”들의 존재입니다. 홈즈는 “The Real Thing: A Reply to Terence Zuber’s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에서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에 나타나는 편성되지 않은 부대들은 전시에 편성될 부대였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주버는 이 점이야 말로 “슐리펜 계획이 실제 작전 계획인 것 처럼 조작하려 한 쿨, 그뢰너, 푀르스터 등의 논리에 홈즈가 말려든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주버는 전시에 동원되는 군단들, 이른바 “Kriegskorps”는 편성할 당시 부터 문제가 많았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Kriegskorps”가 처음 편성된 것은 1902년이라고 합니다. 1902년에 독일 육군을 증강해야 한다는 슐리펜의 주장에 따라 1902년에 21, 22, 23, 24, 그리고 근위예비군단 등 5개의가 편성된 것 입니다. 하지만 새로 전쟁상으로 취임한 아이넴(Karl Wilhelm Georg August Gottfried von Einem)은 Kriegskorps에 대한 평가를 지시했고 그 결과 전시동원에 필요한 장비가 부족하다는 점 때문에 Kriegskorps를 해체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하지만 슐리펜이 모든 Kriegskorps를 해체하는데 반대했기 때문에 23, 24군단만 해체되었습니다. 주버는 3개의 Kriegskorps가 이미 1902년 부터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1906/07년 전개계획에서 이 3개 군단이 포함되었다는 푀르스터의 주장을 그대로 반복한 홈즈는 설득력이 없다고 강조합니다.
한편, 지난번 글에서 살펴본 것 처럼 홈즈는  “The Real Thing: A Reply to Terence Zuber’s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에서 슐리펜이 서부전선에 대한 1904년의 첫번째 참모부연습에서 아직 편성되지 않은 가상의 13개 사단을 동원한 점을 지적하면서 (전시 동원을 고려했을 경우) 실제 전쟁계획에서도 아직 편성되지 않은 사단을 포함시키는 것이 이상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주버는 슐리펜이 실제 워게임에서 아직 편성되지 않은 부대를 포함시킨 것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라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전시에 편성되는 부대들은 즉시 동원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점도 함께지적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슐리펜이 1905년 비망록에서 당시 독일군의 병력이 부족하다고 지적한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홈즈는 “The Real Thing: A Reply to Terence Zuber’s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에서 슐리펜은 독일군의 병력이 부족하지만 8개의 보충군단이 편성되면 작전이 실행 가능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주버는 이에 대해 슐리펜이 실제로 이런 생각을 했다는 근거는 희박하다고 비판합니다. 주버는 홈즈가 단지 게르하르트 리터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8개 보충군단 문제를 제기했을 뿐이며 리터의 주장도 잘못된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주버는 양면전쟁과 러시아군의 전력 문제를 다시 언급합니다. 홈즈는 “The Real Thing: A Reply to Terence Zuber’s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에서 슐리펜은 러시아군이 동원가능한 병력의 규모보다는 러시아군의 질에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에 러일전쟁으로 러시아군이 약체화된 상황에서 러시아의 공세능력을 과소평가한 것은 당연하다고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주버는 러일전쟁에도 불구하고 1905-1906년 시점에서 러시아군의 주력은 유럽지역에 동원 가능한 상태였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서부전선에 주력을 돌리게 된다면 러시아군의 질적 수준이 아무리 형편없더라도 텅 빈 동프로이센을 점령하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을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편, 홈즈는 모로코 위기 당시 수상이었던 뷜로(Bernhard Fürst von Bülow)가 슐리펜의 평가를 받아들여 러시아의 강경 대응 가능성을 낮게 평가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주버는 이에 대해 모로코 위기를 초래한 뷜로가 러시아의 강경 대응 가능성을 낮게 평가하면서도 한발 물러선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묻고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홈즈의 1904년과 1905년의 서부전선에 대한 참모부연습에 대한 해석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주버는 홈즈가 ‘1905년 비망록’이 실제 전쟁계획이라는 가정을 하고 참모부연습을 해석하는 귀납적 오류를 저질렀다고 비판합니다. 주버는 먼저 1904년의 첫번째와 두번째 참모부연습과 1905년의 참모부연습에서 결전이 벌어지는 지역은 아르덴느와 로렌이었다는 점을 재차 강조합니다. 그리고 독일군의 우익으로 공세에 나서는 것은 1904~1905년에 이르러 형성된 개념이 아니라 그 이전 부터 검토되던 방안이었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1910년 경에 이르면 프랑스의 대중 매체들 조차 독일군이 유사시 벨기에를 통해 공격해 올 것이라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점도 덧붙이고 있습니다. 주버는 만약 슐리펜이 이무렵 ‘슐리펜 계획’의 기본개념을 정립했다면 1904년과 1905년의 참모부연습에서 대규모 우회기동을 시험했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런 흔적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고 봅니다. 주버는 오히려 슐리펜이 양면전쟁을 치르기 위해서 최대한 짧은 거리에서 결전을 벌인뒤 내선의 이점을 활용해 동부전선으로 병력을 돌린다는 생각만을 했다고 주장합니다. 주버는 그 무렵 슐리펜이 서부전선에서 신속한 승리를 거둔 뒤 동부전선으로 병력을 이동시키는 연습을 집중적으로 했다고 강조합니다.(이 문제는 주버의 단행본, Inventing the Schlieffen Plan에 더 자세히 언급되어 있으니 연재물에서는 이 단행본을 다룰 때 설명하겠습니다.)
그리고 주버는 1905년의 워게임에 대한 슐리펜의 논평 중 “Wir wurden demnach zu bekampfen haben…”이라는 구절의 해석 문제에 대해서는 자신의 해석이 옳다고 주장합니다. 슐리펜은 양면전쟁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았으며 홈즈는 단지 문법문제로 말꼬리 잡기를 하는 수준에 불과하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주버는 홈즈가 첫 번째 반론이었던 “The Reluctant March on Paris: A Reply to Terence Zuber’s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에서 슐리펜의 후임이었던 소 몰트케가 1911년 슐리펜의 계획과 비슷한(akin) 계획을 채택했다고 지적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합니다. 주버는 먼저 ‘슐리펜 계획’이 실재로 존재한 전쟁 계획이었다고 주장하는 전통적인 학설에서는 소 몰트케가 슐리펜 계획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설명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즉 홈즈가 주장하는 것 처럼 소 몰트케가 1911년에 슐리펜 계획과 유사한 계획을 채택했다면 전통적인 학설과 충돌하게 되는데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고 묻는 것 입니다. 다음으로는 홈즈가 두 번째 반론인 “The Real Thing: A Reply to Terence Zuber’s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에서 이 문제를 더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akin’이라는 개념을 명확하게 설명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홈즈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고 있습니다. 1.슐리펜 계획에서는 우익과 좌익의 병력비율이 7:1인데 몰트케의 계획에서는 3:1이다. 2.슐리펜 계획에서는 우익에 82개 사단이 배치되는데 몰트케의 계획에서는 54개 사단만이 배치되어 있다. 3.슐리펜 계획은 서부전선에 병력을 집중하고 있는데 몰트케의 계획은 양면전쟁을 고려해 병력을 배치하고 있다.

주버는 마지막으로 슐리펜 계획은 프랑스군의 주력을 가능한한 파리-베르덩 사이에서 격멸할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고 파리 서쪽으로 대규모 우회기동을 실시하는 것은 프랑스군 주력이 성공적으로 퇴각할 경우 어쩔 수 없이 취해야 하는 방안이었다는 홈즈의 주장을 비판합니다. 하지만 주버는 전통적인 학설에서 슐리펜의 의도가 프랑스군 주력을 우회 기동으로 포위하기 위해서 파리 서쪽으로 대규모 우회기동을 취하는 것 이었다고 강조했음을 지적합니다. 주버는 홈즈가 슐리펜 계획이 실제 전쟁 계획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강조하기 위해서 전통적인 학설에서 조차 일탈하는 오류를 저질렀다고 비판합니다.

2010년 10월 25일 월요일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5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2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3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4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5

 주버가 War In History 8-4호에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라는 논문을 기고해 홈즈의 비판에 반박하자 홈즈도 다시 재반론을 합니다. 사실 주버의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는 제목부터 그렇고 내용에서도 도발하는 면이 없지않았는데 홈즈도 새로운 반론에서 날을 살짝 더 세웁니다. 홈즈는 2002년 War In History 9-1호에 발표한 “The Real Thing: A Reply to Terence Zuber’s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을 통해 주버의 반론을 다시 한번 비판합니다.

  홈즈는 반박문의 도입부에서 주버가 1914년 여름 소 몰트케가 취한 전략에 대한 자신의 반론에 대해 비판하는게 아니라 주버 자신이 잘못 해석한 것을 비판하고 있다고 빈정거립니다. 홈 즈 자신은 소 몰트케가 국경지대에서 단기간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할 경우 슐리펜이 구상한 것과 비슷하게 우익을 통한 포위기동을 실시하려 했다고 설명했는데 주버는 이것을 싹 무시하고 홈즈는 소 몰트케가 국경지대에서 결전을 벌이는 것을 완전히 포기하고 그냥 슐리펜 계획으로 회귀한 것으로 오독했다는 것 입니다. 게다가 자신은 8월 27일 소 몰트케가 제1군에게 파리 서쪽으로 우회하라고 명령했다고 주장한 일이 없는데 주버는 쓰지도 않은 내용을 제멋대로 주장한다고 지적합니다.

 홈즈의 반론은 처음에 했던 반론과 동일합니다. 주버가 계속해서 사료를 오독하고 자신의 반론을 이해하지 못하는 원인은 슐리펜 계획이 무조건 파리를 우회 포위하는 것 이라고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 입니다. 슐리펜의 계획은 매우 융통성이 강한데 주버는 이 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죠. 주버는 슐리펜이 작성한 1905년 비망록에는 홈즈가 주장한 것과 같은 내용이 전혀 없다고 강조했는데 홈즈는 주버야 말로 사료를 제대로 분석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홈즈는 다시 한번 1905년 비망록을 분석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슐리펜은 1905년 비망록을 작성할 초기 부터 우익에 주력을 두고 베르덩-벨포르(Belfort) 를 잇는 프랑스군의 요새선을 포위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초기안에서는 돌파의 중점이 메지에흐(Mézières)-라 페레(La Fère) 방면이었다고 거듭 강조합니다. 하지만 프랑스군이 서쪽으로 계속 후퇴할 경우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파리 서쪽으로 대규모 우회기동을 실시하는 것 외에는 없었다는 것 이지요.

  다음으로는 1905년 비망록에 대한 주버의 주장을 다시 한번 비판하고 있습니다. 주버는 1905년 비망록을 작성한 가장 큰 목적은 독일군의 병력 부족을 강조하는데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주버는 일단 존재하지 않는 사단으로 작전을 실시하는 것이 타당한지 의문을 제기한 것 입니다. 즉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에 따르면 서부전선의 작전을 위해서는 80개 보병사단과 16개 보충사단(Ersatz-division)이 필요한데 1905/06년 부대전개계획(Aufmarschpläne)에 따르면 서부전선의 작전에는 72개 사단만이 배정되어 있었다는 것 이지요. 홈즈는 이에 대해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은 1906/07년 부대전개 계획에 기반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독일군의 부대전개계획은 일반적으로 해당 년도의 4월 1일부터 효력을 발휘합니다. 즉 1906/07년 부대전개계획은 1906년 4월 1일부터 효력을 발휘하는 것 입니다. 하지만 실제 계획의 작성은 그 전해의 11월 1일부터 시작됩니다. 즉 슐리펜이 1905년 비망록을 작성하고 있었던 1905년 12월 경에는 이미 1906/07년의 부대전개계획의 윤곽은 잡혀있었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1906/07년 부대전개계획에 따르면 서부전선에는 26개 군단과 12개 예비군단, 3개 예비사단 등 총 79개 사단이 배당되었다고 지적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문제는 이미 볼프강 푀르스터의 선행 연구에서 지적된 것이라는 점 입니다. 즉 주버가 선행연구 검토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나머지 8개 군단에 해당되는 병력은 어떻게 충당하는가? 홈즈는 전시에 동원되는 예비병력으로 부족한 8개 군단을 편성하는 것이 슐리펜의 생각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슐리펜은 이미 1891년부터 이와 유사한 구상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평시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전쟁성은 예산 문제로 이 문제에 부정적이었지만 전쟁이 발발하면 총참모부가 권한을 행사할 수 있으므로 8개 군단의 편성이 가능하다는 설명이지요. 홈즈는 슐리펜이 전시에 예비군을 대량으로 동원해 신규부대를 편성할 생각을 했다는 점은 1904년의 첫번째 참모부연습에서도 잘 나타난다고 지적합니다. 이 연습에서 슐리펜은 당시 동원 가능했던 19개 예비사단 대신 16개 예비군단(32개 예비사단)을 투입했습니다.
그리고 주버는 슐리펜이 96개 사단이 있더라도 서부전선의 작전을 수행하기에는 불충분하다고 지적한 점을 들어 1905년 비망록이 실제 작전계획일 가능성을 부정했는데 홈즈는 이것도 주버가 전후인과관계를 잘못 해석한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슐리펜이 불충분하다고 지적한 것은 8개 보충군단(Ersatzkorps)이 편성되지 않은 상태의 독일군이며 8개 보충군단만 편성되면 서부전선에서 공세작전을 전개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았다는 것 입니다. 즉 슐리펜은 1905년 비망록을 실제 작전계획으로 생각하고 작성했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양면전쟁문제를 다시 제기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들러주시는 분들이라면 대부분 아시겠지만 슐리펜계획은 러시아가 전쟁준비를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프랑스에게 전력을 다한 일격을 먹이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버는 러일전쟁 직후에도 독일 정보당국이 러시아군의 동원능력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는 점을 들어 문제를 제기한 바 있습니다. 홈즈는 여기에 대해서 이렇게 반박합니다. 슐리펜이 가장 신경쓴 것은 러시아군이 동원 가능한 병력의 규모가 아니라 그 질이었다. 홈즈는 그 근거로 슐리펜이  러일전쟁의 전황을 지켜보면서 러시아군을 평가한 몇 편의 문건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슐리펜이 남긴 문서를 보면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군에 대해 공세작전을 펼치기에는 질적으로 수준이 낮다고 평가했다는 사실이 명확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905년 비망록은 러일전쟁이 종결된 뒤 작성이 되지요. 홈즈는 슐리펜이 러시아군의 능력을 낮게 평가했기 때문에 당시 수상이었던 뷜로(Bernhard Fürst von Bülow)가 모로코 위기 당시 러시아가 전쟁에 나서지 않을 것으로 확신했다고 강조합니다.

  한편, 홈즈는 첫번째 반론에서 1904년에 실시한 참모부연습들에 대한 슐리펜의 논평을 분석하면 슐리펜이 이 무렵부터 우익을 강화해 포위섬멸전을 펼치는 방안을 고려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주버는 이에 대한 재반론에서 자신의 원래 주장을 되풀이 하면서 슐리펜은 프랑스군이 로렌 방면으로 공격해 올 때 반격을 통해 격파하는 방안을 더 중요시 했다고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홈즈는 슐리펜이 참모부연습을 실시한 뒤 프랑스군을 로렌에서 격파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고 오히려 프랑스군은 독일군의 반격에 직면할 경우 국경의 요새선으로 퇴각할 것으로 보았다고 해석합니다. 이 경우 독일은 신속한 승리를 거둘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슐리펜은 1904년 참모부연습의 결과 다른 대안을 모색하게 되었고 그것이 강력한 우익으로 포위기동을 실시하는 것 이었다는 것 이지요.
1904년의 두 번째 참모부연습에 대해서도 간략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주버는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에서 홈즈가 1904년의 두번째 참모부연습에 대해서는 제대로 분석하지 않았다고 비판한 바 있습니다. 홈즈는 이런 비판에 대해 두 번째 참모부 연습은 1905년 비망록과 연결점을 찾기 어렵다고 인정합니다. 하지만 홈즈는 슐리펜이 우려한 것은 프랑스군이 로렌 방면으로 공격해 올 경우 독일측에서 로렌 방면을 지원하기 위해 우익의 공세를 중단하는 것 이었다고 봅니다.
 이런 지적은 1905년 참모부연습에 대한 해석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슐리펜은 1905년 참모부연습에서 프랑스군이 로렌 방면으로 공격해 오자 우익에서 2개 군을 차출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3개 군에 약간 못미치는 병력으로 공격을 강행했습니다. 하지만 주버는 1905년 참모부연습에서 독일군 우익이 맡은 임무는 프랑스군의 2선급-3선급 부대에 대한 견제 정도에 불과했다고 해석했습니다. 하지만 홈즈는 주버의 해석이야 말로 사료적 근거가 없으며 슐리펜이 3개 군에 약간 못미치는 우익만 가지고 공세를 펼치려 했다는 쵤너의 해석은 타당하다고 주장합니다. 쵤너는 1905년 참모부연습에 대한 슐리펜의 논평을 직접 인용하고 있으며 이에 따르면 이 연습에서 독일군 우익의 임무는 라 페레, 랭스 방면까지 공격하는 것이 명백하며 이것은 프랑스군의 후방을 위협하기에 충분하다는 것 입니다.

  한편, 슐리펜이 1905년 11-12월에 실시한 마지막 워게임, 즉 서부와 동부 양면에서 전략적 방어를 취했던 워게임에 대해서는 주버의 설명이 일정한 타당성을 지니지만 본질적으로는 자신의 해석이 옳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홈즈는 무엇보다 주버가 1905년 겨울의 워게임에 대한 슐리펜의 논평을 오독한 것이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슐리펜의 논평 중에서 “Wir würden demnach zu bekämpfen haben…”이라는 구절을 주버는 "Therefore we will have to fight against..."로 번역하는 오독을 했다는 것입니다. 즉 제대로 해석하면 "Thus we would have to fight against..."가 되는데 이렇게 되면 슐리펜은 양면전쟁이 반드시 일어날 것으로 본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훈련에서 가정한 상황이 모두 현실화 될 경우에 양면전쟁을 치를 수도 있을 것으로 본 것이 되는 것 입니다. 게다가 슐리펜은 논평에서 이러한 상황은 실제로 일어나기 어려운 것으로 보았다고 합니다.

 홈즈의 주장을 다시 한번 요약하면 슐리펜은 1905년 비망록을 작성할 당시에는 양면전쟁의 가능성을 낮게 보았으며 서부전선에서 신속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우익에 주력을 집중해 프랑스군의 주력을 포위섬멸해야 한다는 점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905년 비망록은 이를 위한 실제 전쟁계획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