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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8월 29일 일요일

남베트남군 보병사단의 편성문제(1955~56)

얼마전 1950년대 베트남군 지원을 다룬 미육군의 공간사를 읽었습니다. 여기서 꽤 재미있게 읽었던 것은 1950년대 중반 베트남공화국(이하 남베트남) 군대의 편성문제였습니다. 제가 베트남전쟁에서 주로 관심을 가진 시기는 베트남화~남베트남 멸망에 이르는 시기이다 보니 베트남전쟁 초기에 대해서는 아주 개략적인 내용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특히 남베트남군의 초기 보병사단편제는 약간 의외였습니다.

 제네바 협정의 결과 1955년 남베트남이 공식적으로 출범했을 때 미국 군사고문단(MAAG, Military Assistance Advisory Group)은 예산상의 문제로 육군의 규모를 10만명으로 제한하려 했습니다. 이때 미국 쪽에서 군대를 감축하기 위해 6천명의 나이는 많지만 경험은 풍부한 고참 부사관을 일거에 전역시키기도 했는데 이건 나중에 미국의 치명적인 실수로 판명되었다지요. 어쨌든 남베트남은 북베트남의 군사적 위협에 맞서기 위해서 10만명 이상의 군대가 필요하다고 요구했고 그 결과 베트남군을 10개 사단 15만명으로 증강시킨다는 타협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시기를 다룬 연구 중에서 제가 처음으로 접했던 크레핀비치(Andrew F. Krepinevich, Jr)의 단행본에서는 초기 남베트남군의 사단 편제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한국전쟁의 영향 때문에 북베트남과 중국 등의 전면공격을 방어하는데 중점을 두었다고 설명하고 있었습니다.1)
그래서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남베트남군의 보병사단 편제는 포병연대를 가진 일반적인 보병사단 편제일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했습니다. 이 당시에는 한국군도 전쟁의 경험으로 사단포병을 연대급으로 확대해 나가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정규전을 염두에둔 편제라면 당연히 이런 편제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입니다.

그런데 얼마전에 미육군 공간사를 읽어봤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더군요. 1956년 당시 남베트남군의 편제는 일반적인 보병사단 편제가 아니라 오히려 한국전쟁 직전 한국군의 편제에 더 가까운 형태였습니다.
먼저 정규전 수행을 고려한 4개 야전사단은 편제상 병력 8,500명에 3개 보병연대, 그리고 ‘1개 포병대대’와 중대급 지원부대를 가지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사단급 편제에서는 한국전쟁 직전 38선에 배치된 한국군 보병사단과 유사한 구조지요. 그리고 6개의 경보병사단은 사단포병 없이 3개 보병연대로만 편성되었습니다.
물론 사단단위 편제에서는 한국전쟁 직전의 한국군과 비슷하더라도 실제로는 한국국전쟁 직전의 한국군 편제 보다는 훨씬 나은 편제였습니다. 연대 단위에서는 오히려 미군의 편제 보다도 나은 부분이 있더군요. BAR는 편제상 미군보병사단 보다 50% 많았고 81mm 박격포는 3분의 1이상 많았습니다. 경보병사단은 편제상 미군보병사단 보다 경기관총은 30% 더 많았고 BAR는 10% 더 많았습니다.2)  사단급 화력의 부족을 연대급 이하의 화력을 강화하는 것으로 메꾸는 구조를 취하고 있지요. 창군 초기 남베트남군대의 보급이나 전투지원능력을 고려한다면 나름대로 타당한 구조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북베트남군은 물론 경우에 따라 중국군과의 정규전도 고려했다는 편제치고는 부족하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편제입니다. 한국전쟁 직전 한국군의 편제가 한국의 경제사정이나 한국군의 능력을 고려하면 적당한 편제였을지 몰라도 정규전에는 부적합한 편제였지요.

크레핀비치의 저작에 남베트남군의 편제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서술이 있었다면 오해가 없었을 텐데 이점이 아쉽군요. 어쨌든 늦게나마 잘못 생각하고 있던 것들을 바로잡을 기회가 있어서 다행입니다.



1) Andrew F. Krepinevich, Jr, The Army and Vietnam(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86), p.22
2) Ronald H. Spector,  Advice and Support, The Early Years(U.S.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 1983), pp.262~268

2008년 8월 31일 일요일

한 베트남 여성의 병역기피에 대한 견해

베트남 전쟁 말기 볼티모어 선(Baltimore Sun)의 홍콩 특파원이었던 아놀드 아이작(Arnold R. Isaacs)이 베트남에 취재 갔을 때의 일화라는 군요.

전투에서 한 명의 청년이 죽어갈 때 또 반대편에는 징집을 피하기 위해 때로는 수년간 잠적한 사람들도 있었다 – 그 수가 얼마나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정부군이 우리 마을에 오는 경우는 병역기피자를 색출할 때 였습니다.” (빈 안 Bihn An) 마을의 한 주민은 이렇게 증언했다. “정부군은 한 번 왔다가 한참 뒤에 다시 오거나 때로는 일주일에서 이주일 정도 매일 왔습니다. 보통 한 두 명 정도를 적발하거나 아니면 허탕을 치기도 했지요.” 비록 빈 안 마을의 청년들 중 상당수는 군대에 징집되지는 않았으나 그에 대한 대가는 치러야 했다. “청년들이 군대를 피해 숨을 때 그들은 집에 숨어야 했기 때문에 밖에서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마을의 한 여성은 이렇게 증언했다. “그래서 그들의 가족은 고통을 겪어야 했지요.”

빈 안 마을에서 몇 마일 더 떨어진 국경을 인접한 짜우 독(Chau Doc) 주에 위치한 하안(河岸) 지대의 호아 하오(Hoa Hao) 마을의 촌장은 마을 사람들이 공산주의에 반감은 가지고 있었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청년들은 징병을 거부하려 했고 실제로 병역을 회피했다고 말했다. “아주 가난한 청년들 만이 군대에 자원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숫자는 별로 많지 않았지요.”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군대가 와서 그들을 체포할 때만 군대에 갔습니다. 그래서 군대가 징집하러 오지 않는 이상 군대에 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군대도 병역 기피자들을 모두 잡아들이지는 못 했습니다. 기피자의 수가 너무 많았거든요.” 그는 마치 농부들이 호랑이나 태풍 같은 자연재해를 다루는 것 처럼 병역 문제를 이야기 했다. 촌장의 집 1층에서 촌장 주위에 쭈그리고 앉아 이야기를 듣던 마을 사람들도 고개를 그덕이며 그 말에 동의했다.

뒤에 나는 한 베트남인 친구에게 베트남 사람들은 병역을 기피하면서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하냐고 물어봤다. 그런데 그녀는 황당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 이렇게 대답했다.

“병역기피는 밥 먹는 것과 같아. 병역 기피는 살기 위해서 하는 거잖아. 그게 다야. 너는 식사를 할 때 부끄러움을 느끼니?”

Arnold R. Isaacs, Without Honor : Defeat in Vietnam and Cambodia(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83), p.298

아이작이 베트남 취재를 갔던 1973년은 미군의 철수 이후 격화된 북베트남의 공세로 전사자가 급증하고 있었습니다. 1973년에만 25,473명의 남베트남군이 전사했는데 이것은 1968년과 1972년을 제외하면 베트남전쟁 기간 중 남베트남군이 가장 많은 전사자를 낸 것 이었습니다. 전쟁은 언제 끝날 지 모르는 판에 사망자는 늘어나고 있었으니 병역기피는 꾸준히 증가했습니다. 위에서 인용한 한 베트남 여성의 말 처럼 살아남는 것이 중요해 지니 다른 것은 부차적인 것이 되는 것 이죠. 결국 남베트남이 패배한 가장 큰 원인은 장기전을 수행하면서 국민동원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는 점에 있는데 그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은 부패한 정부에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 입니다.

이런 점을 보면 만약 한국전쟁이 베트남 만큼이나 장기화 되었을 때 이승만 정권은 생존할 수 있었을 까 의문이 들더군요. 사실 요즘도 사회부조리에 대한 환멸의 목소리가 많이 들리다 보니 유사시 한국의 생존여부가 의심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비록 완벽한 해결책은 아닐지라도 시민들의 동의를 이끌어 낼 수 있는 합리적이고 상식적으로 운영되는 정부가 필요한데 지금 정부는;;;;;;

2006년 12월 27일 수요일

원숭이 꽃신의 모범사례 - 1974년의 남베트남군

이번 작통권 논쟁에 대한 어떤 분의 트랙백에 달린 sonnet님의 댓글을 보니 생각나서 올립니다.

그러나 이 작전의 성공은 얼마 가지 못했고 스바이 리엥(Svay Rieng) 전역은 남베트남 군의 마지막 대규모 공세가 됐다. 1974년은 남베트남 정부에 있어 치명적인 해가 되고 말았다. 티우의 “전 지역 절대 사수” 전략은 다른 두개의 요인과 결합해 남베트남의 운명을 결정짓고 만 것이다. 두 개의 요인은 미국의 원조 감소와 이에 따른 남베트남군의 사기 저하였다. 이 두개 요소는 결국 사이공 함락을 가져오고 주권국가로서의 남베트남을 붕괴시키고 말았다. 남베트남은 1975년에 붕괴했지만 사실 운명의 주사위는 이때 던져졌고 붕괴는 이미 시작된 것이었다.

미군의 철수는 남베트남군의 증강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인들으로서는 결코 채울 수 없는 공백을 만들었다. 1969년 베트남에는 미군과 남베트남군을 합쳐 22개 사단이 있었지만 1974년에는 남베트남군 13개 사단 뿐이었다. 반면 남베트남에 침투한 북베트남군은 1969년 352개 대대였으나 1974년 초에는 646개 대대로 증강됐다. 즉 양군의 전력 비율은 북쪽에 유리하게 기울었으며 그것도 계속해서 격차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미군의 철수로 항공지원이 격감한 것이었는데 남베트남으로서는 이것을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항상 미국의 공군력에 의존해 왔기 때문에 이것이 없어지자 그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닉슨의 베트남화 정책은 남베트남군에게 미국식으로, 즉 공중기동, 강력한 항공화력지원, 막대한 보급지원하에서 싸우는데 익숙하게 만들어 버렸다. 이제 남베트남군은 항공지원, 탄약, 장비, 보급품 부족에 시달리면서 과거에 배운 방식대로 싸워야 했다. 이미 북베트남과의 전쟁은 결정적인 단계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남베트남군대는 미국의 원조가 격감한 상황에 맞춰 전력 구조와 작전 개념을 개편할 여유가 없었다.

(중략)

1974년이 되자 우물도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미국의 군사원조는 1972-73년 회계연도에 22억 달러였으나 1973-74년 회계연도에는 그 절반도 안되는 9억6400만 달러로 격감했다. 1974년 초 사이공 DAO(Defense Attache Office)의 머레이 소장은 마틴 주월대사에게 장차 닥칠 붕괴를 모면하기 위해서 티우와 남베트남군 장군들에게 제한된 원조에 맞춰 전쟁을 수행하는 것을 권고하도록 말했다. 마틴 대사는 머레이 소장에게 이것이 정치적으로 너무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에 절대로 이 문제가 밖으로 새 나가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언뜻 보기에는 남베트남 정부는 전쟁을 수행하기에 충분한 원조를 받은 것 처럼 보였다. 남베트남 정부는 ENHANCE와 ENHANCE PLUS 계획에 따라 7억5300만 달러에 상당하는 항공기, 헬리콥터, 전차, 야포, 그리고 기타 장비를 원조 받았다. 그러나 많은 장비들은 남베트남군의 요구에 미달하거나 또는 남베트남측이 유지할 능력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미국측도 인정했듯 많은 장비가 “방치된 채로 고철이 되어가고” 있었다. 더욱 불행하게도 남베트남 측은 미국이 막대한 장비를 원조해 줬기 때문에 여기 필요한 예비부품과 연료, 탄약을 계속해서 원조해 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비록 군 수뇌부는 원조 감소 때문에 물자 절약을 시도했지만 일선 지휘관들은 계속해서 미국으로부터 배운 방식대로 싸우고 있었다. 남베트남군 지휘관들은 화력 및 항공지원으로 대표되는 기존의 기본 전술과 작전 개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지침이 전혀 먹히지 않았다. 남베트남군 지휘관들은 탄약과 연료가 확보대는 대로 모조리 소모해 버렸다. 1974년 초가 되자 물자는 고갈되고 보급 체계는 회복 불능으로 붕괴됐다. 남베트남은 기존에 미국의 우산 밑에서 누리던 모든 것이 부족했다. 그 결과 베트남군의 전투력은 급감했고 사기도 함께 저하됐다. 1974년 중순, 포병 탄약이 크게 부족해 지자 주요 작전이 장애에 부딛히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중부 고원지대의 포병 포대들은 미군이 주둔할 때는 하루 평균 100발의 탄약을 소모했으나 1974년에는 하루 평균 4발로 줄어들었다. 1974년 여름이 되자 남베트남군 보병은 한달에 불과 85발의 소총탄을 지급받는 실정이 됐다. 수류탄과 기타 공용화기 탄약의 지급도 줄어들었다. 무전기의 배터리도 부족했기 때문에 통신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연료의 부족은 전투력과 기동력을 저하시켰다. 연료의 부족으로 남베트남군은 보유한 차량과 장비의 55%만 운용할 수 있었고 또 운용하는 것 자체도 작전단위에서 제한 되었다. 남베트남군의 트럭 중 50%가 연료 및 부품 부족으로 보관상태에 있었다. 당시 남베트남 제 1군단의 한 장군은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연료가 부족해 구급차의 운용도 지장을 받고 있다. 부상병을 수송하기 위해서 2½톤 트럭 한대로 구급차 네 대를 견인해야 했다.”

남베트남 해군은 연료가 부족해 메콩강 삼각주에서 작전하는 부대의 절반을 해체해야 했다. 남베트남 공군은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연료와 예비부품 부족으로 헬리콥터 및 수송기의 가동률은 50~70%까지 줄어들었다.

1974년 중순, 남베트남군 제 3군단장 팜 꾸옥 투안(Pham Quoc Thuan) 장군은 물자 부족이 미친 영향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1973년 4/4분기에… 연료 및 탄약 보급은 3/4 분기의 30% 수준, 1972년 4/4분기의 60% 수준에 불과했다. 1974년 1/4분기가 되자 보급은 30% 더 줄어들었고 2/4분기에는 20%가 더 줄어들었다… 1973년 초 3군단은 하루 평균 전술항공지원에 200소티를 할당받았으나 1973년 말이 되자 80소티로 줄어들었고 1974년 전반기에는 30소티에서 최대 60소티 정도가 됐다. 항공지원의 감소는 항공기가 부족해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연료, 폭탄, 탄약이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남베트남군은 확보하고 있는 전 지역을 사수하기 위해 최대의 화력을 사용했기 때문에 사태는 더욱 더 악화일로를 걸었다.


James H. Willbanks, abandoning Vietnam : How America left and South Vietnam Lost its War, p.201-203


한국의 사정은 남베트남 보다는 많이 나아 보이지만 이번 전작권 환수 문제에서 드러났듯 꽃신이 없으면 못할 일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전시작전권을 서둘러 돌려 받아야 할 타당한 이유가 무었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전시작전권은 우리의 권리이니 돌려받는 것이 원칙적으로는 옳다는데는 이견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게 지금 당장 시급한 사안인지는 의문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