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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24일 화요일

전차병의 의지(!?)


전차는 값비싼 장비이기 때문에 중요한 취급을 받고, 특히 전차를 생산할 능력이 없는 국가의 경우는 더욱 더 귀중하게 다루어 집니다. 그래서 군사사를 보다 보면 전차를 함부로 버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전차병에게 좀 엄격한 규율이 가해지는 경우도 있지요. 여기서 소개할 일화는 1972년 북베트남의 공세 때 있었던 일이라고 하는데 꽤 흥미롭습니다.

안 록(An Loc)의 주민들은 북베트남군의 전차가 도착하기 며칠 전 부터 적의 전차가 오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전투가 끝난 뒤 격파되거나 노획된 적 전차들을 검사했을때 탄약이 충분히 적재되어 있는것을 확인했는데, 적 전차들은 안 록에 진입할 때 사격을 하지 않았다. 적 전차병 중 다수가 전차에 사슬로 매여 있는 것이 관측되었다. 포로의 심문에 따르면 쇠사슬을 차는 것은 일종의 의식이었으며, 적 전차병들은 자신이 뛰어나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사슬을 차라는 부추김을 받았다고 한다.(Many of the tank crews were observed to be chained in their tanks. POW's said the chaining was done ceremonially and individuals had been prompted to volunteer for the chaining ceremony as a mark of distinction) 적 전차병 중 다수는 팔에 '맹렬히 돌진하라!' '종심 깊게 공격하라!'와 같은 구호를 문신으로 새기고 있었다. 
Pacification Studies Group, Debriefing 'An Loc Siege Experiences' (1972. 6. 27), p.2. Library of the U.S. Army Heritage and Education Center

이 보고서를 작성한 것은 미군의 Pacification Studies Group에 소속되어 있던 두 명의 베트남인 연구자들인데, 이들은 안 록 전투 당시 2개월간 포위망에 갇혀 있으면서 전투를 목격했다고 합니다. 교차검증할 만한 다른 자료가 있으면 좋겠는데, 어쨌든 꽤 흥미로운 증언입니다. 병사들이 용기를 과시하도록 교묘한 선동을 한 셈인데, 사실이라면 좀 끔찍하군요. 꽤 어리석은 짓 이지만, 집단적으로 부추기는 분위기에서는 선동되는 사람이 나올 수 있었을 겁니다. 뭐, 전차에 불이 붙고 나서는 후회했겠지만 말이죠.

2010년 8월 29일 일요일

남베트남군 보병사단의 편성문제(1955~56)

얼마전 1950년대 베트남군 지원을 다룬 미육군의 공간사를 읽었습니다. 여기서 꽤 재미있게 읽었던 것은 1950년대 중반 베트남공화국(이하 남베트남) 군대의 편성문제였습니다. 제가 베트남전쟁에서 주로 관심을 가진 시기는 베트남화~남베트남 멸망에 이르는 시기이다 보니 베트남전쟁 초기에 대해서는 아주 개략적인 내용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특히 남베트남군의 초기 보병사단편제는 약간 의외였습니다.

 제네바 협정의 결과 1955년 남베트남이 공식적으로 출범했을 때 미국 군사고문단(MAAG, Military Assistance Advisory Group)은 예산상의 문제로 육군의 규모를 10만명으로 제한하려 했습니다. 이때 미국 쪽에서 군대를 감축하기 위해 6천명의 나이는 많지만 경험은 풍부한 고참 부사관을 일거에 전역시키기도 했는데 이건 나중에 미국의 치명적인 실수로 판명되었다지요. 어쨌든 남베트남은 북베트남의 군사적 위협에 맞서기 위해서 10만명 이상의 군대가 필요하다고 요구했고 그 결과 베트남군을 10개 사단 15만명으로 증강시킨다는 타협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시기를 다룬 연구 중에서 제가 처음으로 접했던 크레핀비치(Andrew F. Krepinevich, Jr)의 단행본에서는 초기 남베트남군의 사단 편제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한국전쟁의 영향 때문에 북베트남과 중국 등의 전면공격을 방어하는데 중점을 두었다고 설명하고 있었습니다.1)
그래서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남베트남군의 보병사단 편제는 포병연대를 가진 일반적인 보병사단 편제일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했습니다. 이 당시에는 한국군도 전쟁의 경험으로 사단포병을 연대급으로 확대해 나가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정규전을 염두에둔 편제라면 당연히 이런 편제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입니다.

그런데 얼마전에 미육군 공간사를 읽어봤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더군요. 1956년 당시 남베트남군의 편제는 일반적인 보병사단 편제가 아니라 오히려 한국전쟁 직전 한국군의 편제에 더 가까운 형태였습니다.
먼저 정규전 수행을 고려한 4개 야전사단은 편제상 병력 8,500명에 3개 보병연대, 그리고 ‘1개 포병대대’와 중대급 지원부대를 가지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사단급 편제에서는 한국전쟁 직전 38선에 배치된 한국군 보병사단과 유사한 구조지요. 그리고 6개의 경보병사단은 사단포병 없이 3개 보병연대로만 편성되었습니다.
물론 사단단위 편제에서는 한국전쟁 직전의 한국군과 비슷하더라도 실제로는 한국국전쟁 직전의 한국군 편제 보다는 훨씬 나은 편제였습니다. 연대 단위에서는 오히려 미군의 편제 보다도 나은 부분이 있더군요. BAR는 편제상 미군보병사단 보다 50% 많았고 81mm 박격포는 3분의 1이상 많았습니다. 경보병사단은 편제상 미군보병사단 보다 경기관총은 30% 더 많았고 BAR는 10% 더 많았습니다.2)  사단급 화력의 부족을 연대급 이하의 화력을 강화하는 것으로 메꾸는 구조를 취하고 있지요. 창군 초기 남베트남군대의 보급이나 전투지원능력을 고려한다면 나름대로 타당한 구조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북베트남군은 물론 경우에 따라 중국군과의 정규전도 고려했다는 편제치고는 부족하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편제입니다. 한국전쟁 직전 한국군의 편제가 한국의 경제사정이나 한국군의 능력을 고려하면 적당한 편제였을지 몰라도 정규전에는 부적합한 편제였지요.

크레핀비치의 저작에 남베트남군의 편제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서술이 있었다면 오해가 없었을 텐데 이점이 아쉽군요. 어쨌든 늦게나마 잘못 생각하고 있던 것들을 바로잡을 기회가 있어서 다행입니다.



1) Andrew F. Krepinevich, Jr, The Army and Vietnam(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86), p.22
2) Ronald H. Spector,  Advice and Support, The Early Years(U.S.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 1983), pp.262~2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