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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 6일 금요일

[번역글] 문서보관소의 전투- 러시아의 감춰진 과거를 밝히다

이 글은 작년(2016) 3월 24일 모스크바 타임즈에 실린 피터 홉슨Peter HobsonBattle in the Archives - Uncovering Russia's Secret Past 를 번역한 것 입니다. 이런 재미있는 글이 있었다는걸 너무 늦게 알아서 아쉽습니다. 러시아인들에게 만연한 스탈린 시대에 대한 향수에 대한 비판은 한국 사회에도 어느 정도 시사점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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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보관소의 전투- 러시아의 감춰진 과거를 밝히다

피터 홉슨

1941년, 나치의 기갑사단들은 독일에서 수백마일 떨어진 곳에서 갓 얼어붙은 땅 위를 질주하고 있었다. 독일군은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에 육박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군의 공세는 일련의 격렬한 전투 끝에 돈좌됐다. 붉은군대 제316소총병사단의 장병 28명은 독일군의 전차 18대를 격파해 나치의 진격을 좌절시키는데 공헌했지만 모두 산화했고 이 소식은 널리 퍼져나갔다. ‘판필로프의 28인의 근위병’ 이야기는 소련의 상징이 됐다. 소련 전역에서 이들을 기리기 위해 거리의 이름을 바꾸고, 기념물을 세웠다. 이들의 이야기는 모스크바시의 시가市歌에도 실렸다. 학교에서는 아동들에게 근위병 28인의 이름을 가르쳤다.

그런데 작년(2015)에 판필로프의 28인의 근위병 이야기가 논쟁의 대상이 됐다. 러시아 국립문서보관소장을 오랫동안 지낸 세르게이 미로넨코는 이 이야기가 날조된 것이라고 주장하며 근거가 되는 문서를 공개했다. 공개된 문서는 28인의 영웅담이 종군기자에 의해 조작된 것임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소련 정부는 사실을 은폐하고 증거를 감추었다. 이 사실이 공개되자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으며 러시아 문화부장관 블라디미르 메딘스키는 미로넨코를 비난했다. 그는 미로넨코가 문서를 주의해서 다뤘어야 하며, 해석은 다른 사람들의 몫이라고 주장했다. 3월 중순에 미로넨코는 좌천됐다. 올해 65세의 미로넨코는 모스크바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직위 변경을 원한 것은 본인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미로넨코의 동료들은 분개했다. 이들은 미로넨코가 정부의 새로운 역사관의 희생양이며, 문화부장관 메딘스키는 정부의 역사관을 옹호한다고 주장한다.

진실이 무엇이건간에 미로넨코의 사임은 한 시대의 끝을 상징한다. 그가 국립문서보관소에서 근무한 24년은 러시아 현대사를 관통한다. 그가 근무하기 시작했을때는 소련 전역에서 개방의 물결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은퇴하는 현재는 국수적이고 권위적인 러시아 정부가 러시아와 소련 역사에 있어 불편한 진실을 은폐하려한다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자유화

미로넨코는 모스크바의 소련 과학아카데미의 역사학자로 있으면서 소련의 붕괴를 목격했다. 그는 낡은 이상에 교조적으로 얽매인 맑시스트 동료들이 얼마나 지루한 사람들이었는지 회고했다. 미로넨코는 이 낡은 사상이 붕괴되는 것을 목격했다. 반체제 성향의 인사들은 고르바초프의 개혁을 이용해 사회의 움직임을 주도하려 했으며 공산당 관료들이 숨기고 있는 비밀들을 공개할 것을 요구했다. 미로넨코는 정권의 검열 체계가 점진적으로 와해되는 것을 목격했다. 수십년간 검열의 대상이었던 책들이 출간되었으며 국민들은 스탈린의 탄압과 수용소의 실상에 대해 알게 되었다.

1991년 8월 공산주의 강경파의 쿠데타가 실패하자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움직였다. 보리스 옐친이 집권하자 완전한 투명성이 러시아의 새로운 시대정신이 되었다. KGB와 공산당이 권력을 잃고 소련의 모든 체제가 총체적으로 무너져내리면서 방대한 양의 문헌을 남겼다. 동시에 정부는 과도한 기밀 유지를 폐지하고 문헌을 열람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했다. 대중들은 지식을 원했고 미로넨코는 그것을 제공하는 일을 맡았다. 미로넨코는 1992년 새로운 러시아의 국립문서보관소장이 됐다. 그는 최대한 많은 정보를 대중에게 제공하려고 노력했으며, 언론과 긴밀히 협력하는 한편 수많은 전시회를 기획하고 새롭게 공개되는 문서 목록을 작성했다. 또한 사료에 기반한 수백편의 짧은 TV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핵심은 러시아인들이 ‘팩트’를 직접 대면하도록 하는 것 이었다. “해설보다는 더 많은 문서를 제공하는 것 이었습니다.” 미로넨코는 이렇게 회고했다. “사료가 직접 이야기하도록 하자는 것이죠.” 그는 대대적인 문헌 공개를 감독했다. 1992년 당시 국립문서보관소에 있는 자료의 40%가 기밀로 분류되어 있었다. 1993년 한해에만 30여만건의 문서가 기밀해제됐다. 미로넨코는 그것을 ‘문서보관소의 혁명’이라고 불렀다.


제약

그러나 기밀을 해제한다는것은 말이 쉬웠지 실행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한가지 문제는 기밀해제가 정부 고위층에 의해 시작됐다는 점이었다. 1990년대 초에 생산된지 30년이 넘은 문서는 모두 기밀해제하라는 법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 절차는 자동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역사가 니키타 페트로프는 이렇게 회고했다. “문헌을 공개하기 전에 수백만건에 달하는 문서들에 전문가 검토와 의견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전문가들은 그 문서를 생산한 부서나 소장하고 있는 부서의 의견을 반영해야 했다. 해당 부서들은 기밀을 유지하는 쪽을 선호했는데, 기밀 정보를 다룰 경우 보너스를 받았기 때문이다. 페트로프는 “정부의 의견을 반영하는 전문가들과 계속해서 싸워야 했습니다. 이들은 전반적으로 문서 공개에 소극적이었으니까요.”라고 회고했다.

그리고 문서 공개 규정이 까다로워지기 시작했다. 1993년에 더 까다로운 기밀해제 절차가 도입되었다. 기존에는 문서보관소의 직권으로 기밀해제를 결정할 수 있었다. 1996년에 ‘국가기밀 수호를 위한 위원회’가 기밀해제를 담당하게 됐다. 이 기구의 명칭은 국가의 방침이 변화했음을 보여주었다. 페트로프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이 위원회는 현재 기밀로 분류된 것들을 책임졌습니다. 그리고 기존의 기밀들은 공개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위원회는 기밀해제를 실행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한편, 일부 국가 기관들은 기밀해제를 거부했다. 옐친은 러시아의 모든 문서보관소를 국립문서보관소의 미로넨코가 관할하도록 했지만 러시아 외무부와 국방부, 그리고 KGB의 후신인 연방보안국은 예외가 되었다. 이들 기관들은 1990년대 초반에 약간의 자료만 이관한 뒤 1990년대 중반이 되자 문서 공개를 중단했다. 기밀해제에 대한 저항이 강해지면서 이를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적인 기반이 등장했다. 관계자들은 이런 질문을 던졌다. 우리가 알아야 할 역사는 어떠한 것인가? 영웅적인 이야기인가 아니면 범죄로 가득한 이야기들인가?


이데올로기

옐친 행정부는 이런 문제제기에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페트로프에 따르면 1990년대에 권력을 잡았던 자유주의자들은 이 논쟁의 승자가 자신들이라고 생각했다. 러시아의 자유주의자들은 자유와 개방의 가치에 대해 스스로 내린 결론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들은 틀렸다. 옐친 시대의 혼란과 경제적 궁핍은 민주주의와 러시아 정부에 대한 불신을 키웠다. 역사가 알렉세이 마카로프는 러시아인들이 이미 1990년대 초반에 역사적 진실에 대해 진절머리를 냈다고 회고했다. 역사가와 대중을 연결하는 언론인들은 점차 과거사 문제에 대해 침묵하기 시작했다. 공산당 시대의 범죄에 대한 면죄부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소련의 과거에 대한 진실이 사라진 자리를 신화와 소련에 대한 향수가 채우려 했다.

블라디미르 푸틴은 2000년에 집권하자마자 변화된 분위기를 이용하려 했다. 페트로프는 “러시아 정부는 돌연 러시아와 소련은 역사의 밝은면과 어두운 면을 가지고 있으니 굳이 어두운 면을 부각할 필요는 없다고 선언했습니다.”고 말했다. 역사의 밝은면에 대한 답은 빨리 나왔다. 러시아의 상징으로서, 그리고 소련에 대한 정당화의 일환으로 나치에 맞선 영웅적인 투쟁의 이야기가 다시 힘을 얻었다. 판필로프의 근위대원 이야기 같은 것들이 다시 힘을 얻었다. 스탈린이 나치의 기습 공격을 예측하는데 실패한 것이나, 소련이 히틀러와 불가침 조약을 맺은 것, 그리고 붉은군대가 동유럽에서 저지른 폭력 같은 것은 은폐되었다.

정치인이자 대중 역사서적 저술가였던 블라디미르 메딘스키가 2012년 문화부장관에 임명됐다. 페트로프는 메딘스키의 문화부장관 임명은 반계몽주의의 정점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역사가 아스콜드 이반칙은 메딘스키의 역사관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메딘스키는 민간단체인 ‘개방된 러시아’가 주최한 좌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역사적 진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대조국전쟁 당시의 영웅적 행위들을 교회에서 성인들의 삶을 가르치는 것 처럼 대해야 합니다.”

메딘스키는 예산 지원과 발언의 수위를 조절하는 방식으로 러시아의 예술과 문화, 역사학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메딘스키 휘하의 문화부는 영웅들을 다룬 영화와 전시회가 꾸준히 나오도록 예산을 지원하고 여러가지 후원을 했다. 이러한 것들은 대부분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루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지난해에 개봉할 예정이었던 판필로프의 28인의 근위병 이야기였다. 마카로프는 정부의 전략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정부당국이 영광된 역사에 매달리는 이유는 이것 말고는 의존할게 없기 때문입니다.”


과거를 수호하기

역사에 대한 무관심은 비밀을 지키려는 사람들에게 완벽한 환경이다. 대중이 실질적으로 압력을 가하지 않는한 정부 당국은 앞으로도 자료 공개를 막을 것이다.
현재 러시아 국립문서보관소의 소장 자료중 ‘비밀’로 분류된 것은 5퍼센트에 불과하다. 미로넨코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기준에서 4~5퍼센트라고 한다. 하지만 국방 및 안보 관계 기관이 소장하고 있는 기밀문서들은 여기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문서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수조자 없다.

30년이 지난 문서를 자동적으로 기밀해제하는 법령은 밥먹듯이 무시된다. 자료 공개를 위한 싸움은 법정으로 옮겨갔지만 관계 기관들은 자료 공개를 거부하기가 일수다. 페트로프는 1940년대 후반에 생산된 문서중 국가 기밀이 아니거나 자료명이 없는 것들을 공개하라는 소송을 냈으나 2010년에 패소했다. 페트로프는 정부 당국이 그들의 정보 통제를 제약하는 선례를 남기지 않으려 한다고 생각한다.
정보 기구들은 역사적인 문서들이 보복 공격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여지껏 없었다. 마카로프에 따르면 이들 기관들은 과거의 문서에도 현재 사용되는 방식이 기록되어 있다고 주장한다고 한다. 이것은 참으로 괴상한 주장이다. 그렇다면 현재 러시아의 보안조직들이 여전히 스탈린의 비밀경찰 NKVD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운영된다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이때문에 소련의 역사는 부분적으로 모호한 부분이 많다. 공산정권 시기의 대외정책의 전모는 여전히 국가 기밀이다. 소련의 정보 조직을 연구하는 페트로프에 따르면 특히 20세기 초~중반에 서구 제국주의 질서를 타도하기 위해 이루어진 사보타지와 체제 전복 공작에 관한 정보가 특히 비공개라고 한다. 러시아 정부는 검열을 통해 공산당이 중동과 라틴 아메리카의 테러 조직을 지원한 사실과, 붉은군대가 나치를 물리치면서 동유럽을 장악한 과정에 관한 정보를 차단하고 있다.
역사가들은 아직도 1940년 카틴에서 2만명의 폴란드 장교들을 학살한 사건의 개요 조차 잡지 못하고 있다. 러시아 정부는 1990년에 수행한 카틴 학살에 대한 조사 자료를 2004년에 다시 기밀로 분류했고, 학살 피해자들의 개인 정보 공개도 중지했다. 러시아 정부가 이러는 이유가 프로파간다 목적 때문인지, 아니면 책임 소재를 밝히지 않으려는 것 때문인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러시아 정부가 정보를 완전히 공개할 생각이 없는 것은 확실하다.

결국 판필로프의 28인의 근위병 이야기로 돌아가게 된다. 페트로프는 “러시아도 변해가고 지배 엘리트들의 시각도 변해갑니다. 하지만 미로넨코만은 변하지 않았지요”라고 말했다. 현재 미로넨코는 러시아 국립문서보관소의 연구과장이다. 역사적인 기록물을 널리 공개하려는 그의 열정은 여전하다. 사실 미로넨코는 여전히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더 많은 문서들을 공개하고 있다. 최근 미로넨코는 스탈린에 관한 단행본과 나치에 협력한 부역자들에 대한 단행본을 내놓았다. 미로넨코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 “사람들의 관점은 다양합니다. 이 다양한 관점들을 모두 침울한 색깔로 물들일 수는 없지요. ”

하지만 여전히 러시아 사회의 일각에서는 자국의 역사를 외면하려는 경향이 있다. 미로넨코는 이 문제점을 이렇게 분석한다. “예를들어 스탈린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핵심은 사람들이 스탈린에 대해 모르는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 당시를 잊으려 한다는 것이죠. 스탈린을 옹호하는 것은 항의하는 목소리입니다. 부정부패와 공정하지 못한 사법부, 관료제에 항의하는 것이죠. 사람들은 단순하게 생각합니다. ‘만약 스탈린이 지금 살아있다면 너희 썅놈의 새끼들에게 본때를 보여줄텐데!”

그는 잘못된 세계관을 비판하는데 거리낌이 없다. 코메르산트의 기자 한명은 미로넨코를 인터뷰하면서 자신은 판필로프의 근위대원들을 영웅으로 생각하면서 자라왔으며 지금에 와서 견해를 바꾸기는 싫다고 말했다. 미로넨코는 딱 잘라 이야기 했다.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관심이 없습니다. 여기 사료가 뒷받침 하는 역사적 진실이 있습니다. 나머지는 심리학자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죠.”

2008년 8월 10일 일요일

소련-러시아 장교단의 붕괴와 그 후유증 : 1987~

올림픽이 조용히 치러지나 했더니 러시아가 그루지아를 공격해서 꽤 시끄러워 졌습니다. 때마침 라피에사쥬님이 이번 사태에 대해 잘 정리된 글을 올려주셔서 흥미롭게 잘 읽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사태와 관련해서 밀리터리 매니아(???) 들이 인터넷 게시판들에 올려놓은 의견을 보면 실제 이상으로 현재 러시아의 행동이나 능력을 과장되게 인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아직도 러시아가 군사적으로 미국과 맞먹는 강대국이라고 인식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진짜’ 충격이었습니다. 러시아의 군사력은 1990년대 초반 소련의 해제와 뒤이은 군대의 구조적 붕괴의 충격에서 겨우 회복되는 단계에 있을 뿐입니다. 국경을 인접한 작은 나라와 군사분쟁을 벌이는 것을 가지고 소련의 부활이니 푸짜르가 어쩌고 하는 이야기들을 보면 어이가 없을 지경입니다.

러시아의 군사력이 미국과 비교했을 때 얼마나 취약한 상황에 처해있는 가는 조금 부지런히 관련 자료들을 구해보면 쉽게 알 수 있는 것 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러시아군 장교단의 현실이 이 점을 가장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러시아의 장교단은 구소련 시절과 비교하면 형편없는 규모로 줄어들었고 이것을 다시 소련 시절의 규모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정말 엄청난 과업이라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러시아 장교단이 처한 현실을 다루기 위해서는 먼저 고르바초프 말기의 소련 장교단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소련에서 장교라는 직업은 1970년대 까지는 매우 선호되고 있었지만 1980년대로 들어가면서 조금씩 기피되는 직업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 1980년대 중반의 시점에서 장교라는 직업이 경제적으로 큰 매력이 없었다는 점이 큰 문제였습니다. 장교의 낮은 생활수준은 소련이 건국된 이후 붕괴될 때 까지 여전했기 때문에 중견 간부급 이상의 부패문제는 근절할 수 없는 문제일 정도였습니다.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1980년대로 들어가면 도시 중산층들이 장교에 지원하는 비율은 계속 낮아졌고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오려 한 것은 교육수준이 상대적으로 낮은 농촌출신들이었습니다. 물론 군사기술의 발전으로 장교가 되기는 더 어려워 졌기 때문에 농촌출신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결국 1980년대로 들어가면 장교의 정원을 채우는 것이 매우 어려워 집니다. 예를 들면 모스크바 군관구는 1987년에 새로 임관하는 장교가 정원에서 19% 부족했는데 1988년에는 무려 43%가 부족할 정도였습니다. Roger Reese가 지적하듯 1980년대의 장교단은 군인으로서의 자부심 보다는 안정적인 급여 등 현실적인 이유에서 장교를 택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마나 장교라는 직종의 매력이었던 안정성이 사라지자 소련 장교단은 순식간에 붕괴하기 시작합니다. 이미 1988년부터 위관급 장교들이 대량으로 전역을 신청하고 있었고 이것은 그대로 소련이 붕괴할 때 까지 지속됩니다. 소련 장교단의 열악한 생활 수준은 고르바초프의 방어 중심의 군사정책으로 동유럽에서 철수한 병력이 본토로 들어오면서 더 심각해 집니다. 대표적인 것이 주택 부족문제였는데 1990년 2월 경에는 집이 없는 장교가 128,100명에 달할 지경이었습니다. 또 장교의 급여수준도 매우 형편없었습니다. 1990년 소위의 월급은 270 루블이었는데 당시 자녀 없는 부부의 최저 한달 생계비는 290루블이었습니다. 게다가 개혁개방 정책으로 서방, 특히 미국 장교들이 어떻게 생활하는지에 대한 정보가 장교단 사이에 퍼지면서 소련 장교단의 사기는 급강하해 버립니다. 이런 형편이었기 때문에 소련이 붕괴되기 전에 국가를 지켜야 할 장교단이 먼저 붕괴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소련의 붕괴는 이미 시작된 소련-러시아 군대의 붕괴를 가속화 시켰는데 특히 장교단에 가해진 타격은 엄청났습니다. 이미 소련이 붕괴되기 전부터 열악한 생활수준 때문에 장교단은 급속히 감소하고 있었는데 소련의 붕괴로 그나마 보장되던 안정성 조차 사라지자 장교단의 해체는 제동을 걸 수 없을 정도로 진행됩니다.
가장 큰 원인은 역시 경제적 곤란이었습니다. 이미 군대가 형편없이 쪼그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정부는 경제난으로 그나마 남아있는 장교들 조차 제대로 대우해 줄 수 없었습니다. 1994년에도 집없는 장교가 12만명에 달했는데 이것은 훨씬 많은 장교가 있었던 1990년과 비슷한 수준이었습니다. 상황이 이 지경이었으니 장교를 지망하는 사람은 급격히 감소합니다. 1989년의 경우 장교를 지원하는 경쟁률이 1:1.9였는데 1993년에는 1:1.35가 됩니다. 여기에 장교를 지원하는 지원자의 자질도 1980년대 이래로 꾸준히 하락하고 있었으니 통계에 가려진 내용은 더욱 더 참담했습니다. 1992년 러시아 국방부가 병력 감축을 위해 36,000명을 조기전역 시키겠다고 발표하자 59,163명이 전역을 신청했고 1993년에 다시 19,674명을 전역시키려 했을 때는 무려 60,033명이 전역해 버립니다. 1992년부터 1994년 사이 러시아 국방부는 71,000명의 장교를 감축하려 했는데 실제로는 155,000명이 자발적으로 전역해 버렸고 게다가 그 절반이 30세 미만의 청년 장교들이었습니다. 러시아 군의 미래를 짊어질 중핵이 무너져 버린 것 입니다. 게다가 이 시기는 암울했던 옐친 행정부가 경제난 때문에 군사비를 계속해서 삭감하고 있었으니 달력이 넘어갈수록 장교 부족은 심각해 졌습니다. 1995년에는 사관학교 생도의 50%가 임관 전에 자퇴할 정도였고 이것은 초급장교의 부족을 가져왔습니다. 같은해에 장교 부족은 정원의 25%였는데 위관급의 경우는 정원에서 50%가 미달이었습니다. 이 해의 군축에서 위관급 장교는 2,500명을 전역시킬 예정이었는데 실제 전역한 인원은 11,000명이었습니다. 젊은 장교들은 늦기전에 사회에서 기회를 잡기 위해 주저않고 군대를 떠났습니다. 1998년 유가 폭락으로 인한 경제난은 정부의 월급에 의존하는 장교들에게 최악의 고난이었습니다. 같은 해 기준으로 소위의 월급은 354루블, 중령은 2,135루블이었는데 당시 러시아에서 빈곤층으로 분류되는 3인 가족 가구의 평균 소득은 2,600 루블이었습니다. 즉 중령 조차도 빈곤층 수준의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 입니다. 이것은 장교들의 대규모 자살을 불러왔는데 1998년 러시아 전체 자살자의 60%가 장교였다는 통계는 이 시기 러시아 장교단이 얼마나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었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국내에도 번역된 『How to Make War』의 1995년판에서 저자인 James F. Dunnigan은 당시 러시아 군대가 처한 문제점을 수습하는데 수년은 걸릴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이것은 아직까지 진행 중이란 점에서 꽤 잘 맞은 예언 같습니다.

1998년은 지금까지 러시아 장교단이 겪었던 최악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장교단은 계속해서 축소되었고 새로 보충되는 인력의 질적 수준도 80년대에 비해 크게 낮아졌습니다. 게다가 남아있는 장교의 80%도 미래에 대해 비관하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최악이라 할 만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넘기면서 상황은 조금씩 개선되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큰 원인은 푸틴 집권 이후 군인의 생활수준 개선을 위한 직접적인 조치, 예를 들어 급여 인상 등이 적극적으로 시행된 것이 주효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교단의 생활수준은 민간인에 비해 여전히 낮았으며 푸틴 집권 초기인 2001년의 경우 여전히 92,000명의 장교가 관사를 지급받지 못했으며 이 중 45,000명은 아예 거주할 집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러시아의 경제가 유가 회복에 힘입어 조금씩 개선되고 있었지만 경제에 대한 불안감은 여전했기 때문에 장교단은 특히 더 큰 불안감을 느꼈습니다. 예를 들어 2004년에 장교 급여가 인상되지 않는다는 소문이 퍼지자 위관급 장교의 대량 전역사태가 다시 벌어졌던 것이 대표적입니다. 장교단의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해서 2005년 러시아 의회는 소위의 월급을 7,485 루블로 인상하겠다는 발표를 했는데 같은 해 3인 가족의 최저 생계비는 7,594 루블이었습니다. 장교의 열악한 생활수준을 개선하기 위해서 2006년에 푸틴 대통령은 3년에 걸쳐 장교의 급여를 67% 인상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았고 현재 이 공약은 고유가를 바탕으로 착실히 이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2008년 현재까지도 러시아 장교단의 생활수준은 민간사회에 비해 조금 뒤떨어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의견이며 체첸과 같은 위험지역 근무를 지원하는 장교가 많은 것도 추가수당을 받아 조금이라도 생계를 개선하기 위한 것 입니다.
푸틴 행정부가 옐친 시기의 군사적 붕괴상태를 다소 나마 개선시킨 것은 사실인데 어떻게 보면 러시아의 장교단 자체가 붕괴될 대로 붕괴되어 최저점에 도달했기 때문에 개선된 것으로 보일 뿐이지 소련군이 전성기에 달했던 시절의 장교단 수준에는 발끝조차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현재 상태의 러시아로서는 지금 있는 장교단의 생활수준을 유지, 또는 향상시키면서 장교단을 확충할 수단이 뾰족하지 않다는 것 입니다. 장교단의 확충 없이 군사력을 증강하기는 어렵습니다. 러시아가 현재 규모의 군대를 유지하면서 준비태세와 숙련도를 높이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겠지만 다시 병력을 증강시켜 미국과 맞설만한 수준으로 만드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현재의 러시아 군 병력이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그 중 장교는 얼마인지는 웹에서 검색해도 충분히 나오는 것들이니 더 부연설명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러시아의 군사력 증강이 어떻게 될 것인지는 장기적으로 지켜봐야 할 문제이지 국내 언론 기사에 가끔씩 보도되는 자극적인 몇 줄의 기사만 가지고 호들갑 떠는 것은 좀 그렇습니다.


참고문헌
James F. Dunnigan/김병관 역, 『현대전의 실체』, 현실적 지성, 1995
Dale R. Herspring, 『The Kremlin and the High Command : Presidential Impact on the Russian Military from Gorbachev to Putin』,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6
William E. Odom, 『The Collapse of the Soviet Military』, Yale University Press, 1998
Roger. R. Reese, 『Red Commanders : A Social History of the Soviet Army Officer Corps, 1918~1991』,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5
Brian D. Taylor, 『Politics and the Russian Army : Civil-Military Relations, 1689~2000』,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Anne C Aldis, Roger N McDermott(ed), 『Russian Military Reform, 1992-2002』, Routledge,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