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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6월 27일 월요일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경계지대?

오전에 포린 폴리시 인터넷판을 잠깐 훑어보니 재미있는 글이 하나 올라왔습니다. 제목하여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경계지대들(The World's Most Dangerous Borders)'. 제목부터 호기심을 자극하여 한번 읽어봤습니다.

 재미있게도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경계지대가 한반도에 두 곳이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당연히 휴전선이고 다른 하나는 북중국경이더군요;;;; 휴전선은 200만이나 되는 대군이 대치하고 있는 곳이니 선정되는게 당연하지만 북중국경은 좀 의외입니다. 포린 폴리시에서는 북중국경은 탈북자가 너무 많아서 북한의 안정성을 흔들지경이기 때문에 북중국경을 선정했더군요.

포린 폴리시에서 선정한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경계지대에는 다음과 같은 곳이 들어가 있습니다.

1. 수단과 남수단의 국경
2. 인도와 파키스탄의 국경
3.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국경
4.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
5. 캄보디아와 태국의 국경
6. 콩고민주공화국과 앙골라의 국경
7. 인도와 방글라데시의 국경
8. 한반도의 휴전선
9. 베네주엘라와 콜롬비아의 국경
10. 차드와 수단의 국경
11. 사우디아라비아와 예멘의 국경
12. 북한과 중국의 국경
13.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국경

 한반도에 이어 인도와 수단이 2관왕을 차지한 것이 눈에 띄입니다. 한반도가 인도와 수단같은 막장의 반열에 올라있다니 참 묘합니다.

2010년 3월 13일 토요일

강대국 정치의 일면

다들 잘 아시는 내용이겠습니다만.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독일 통일 문제가 다시 떠오르면서 전략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있던 소련은 판을 조금이라도 유리하게 해보자는 계산에서 독일 통일 문제에 소련과 미국은 물론 영국과 프랑스도 참여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미국과 소련,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을 분할 점령하고 분단체제를 형성한 당사국이니 명분은 꽤 그럴싸 했던 셈입니다. 물론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 통일에 부담을 가질 것이고 이 두나라가 문제를 제기한다면 소련으로서는 그만큼 좋은 일이 없었을 것 입니다. 그러나 미국은 독일을 분할 점령했던 4개국이 주도적으로 독일 통일 문제를 다루는 것이 서독에게는 굴욕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미국이 내놓은 절충안은 독일 문제 해결을 위해 당사자인 서독과 동독, 그리고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가 참여한 이른바 "2+4" 방식이었습니다. 물론 4대강국이 독일의 자주적 통일 문제에 끼어드는 모양이긴 했습니다만 소련이 제안한 4대강국 중심의 협의체 보다는 서독에게 훨씬 나은 방안이었을 겁니다.

한편, "2+4"를 통해 독일 통일문제를 협의한다는 방안은 1990년 2월 캐나다의 오타와에서 열린 나토와 바르샤바조약기구 회원국 외무장관 회의에서 다른 국가들에게도 알려집니다. 그런데 이게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다른 유럽 나라들도 판에 끼워달라고 들고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당시 미국 국무부장관이었던 제임스 베이커(James A. Baker III)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습니다.

우리가 오타와 회의에서 당시 추진 중이던 "2+4" 방식의 협상에 대해 발표하기 전 까지는 상황이 나쁘지 않았다. 우리는 이 문제를 나토 회의에서 다룰 생각이었다. 그러자 사태는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네덜란드와 이탈리아, 그리고 다른 나라들도 독일 문제에 끼고 싶었기 때문에 들고 일어났다. 그리고 만약 발언권을 가진 15개, 또는 16개국 대표가 발언을 신청해 독일이 재통일 될 경우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의문을 제기했다면 상황을 어찌 해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오타와에서 열린 나토 회의에서 미국측이 "독일의 재통일에 대한 우리의 계획안을 알려드리겠습니다"라고 발표하자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그때 갑자기 이탈리아 외무장관이었던 지아니 데 미첼리스(Gianni de Michelis)가 발언을 신청했다.

"독일 재통일 문제는 중요합니다. 그 문제는 이탈리아와 관계가 있는 문제이고 유럽의 미래와도 관계된 문제입니다. 우리도 협상에 참가해야 겠습니다."

그러자 겐셔(Hans-Dietrich Genscher)가 일어서서 말했다. "저도 한 마디만 하겠습니다." 그리고 겐셔는 거칠게 쏘아붙였다.

"당신은 이 게임에 끼어들 수 없어!(Sie sind nicht mit im Spiel)"

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위축되지 않았다. 나는 그의 태도에 꽤 놀랐다. 서독과 동독이 협상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다른 유럽국가들도 같은 요구를 하게 된다면 우리는 이 문제를 종결지을 방법이 마땅치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두 독일과 서유럽의 15개국... 아니 14개국, 그리고 소련과 미국, 여기에 캐나다 까지 끼어들었다면 의사 소통도 제대로 할 수 없었을 것이다.*

Alexander von Plato, Die Vereinigung Deutschlands - ein weltpolitisches Machtspiel(2. Aflg)(Bundeszentrale für politische Bildung, 2003), ss.283~284

겐셔는 외교적으로 매우 무례한 발언을 했는데 사실 이건 강대국이 중심이 되는 국제정치의 찝찝한 일면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독일이 보기엔 한 수 아래의 나라들인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통일문제에 끼어드는 것 만으로도 불쾌한데 그 보다 국력이 더 떨어지는 작은 나라들이 끼어들겠다고 나서고 있으니 짜증이 안 날 수 없었겠지요. 근대이후의 국제관계에서는 형식상 모든 나라가 동등한 위치에서 참여합니다만 실제로는 국력이 그대로 반영되지요.

그리고 유럽의 작은 나라들이 아웅다웅 거리는 것은 더 큰 나라들이 보기에 가소롭기 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베이커가 미국의 "2+4" 방안을 제안하기 위해 소련을 방문했을 때 고르바초프는 미국과 소련, 그리고 유럽 각국의 입장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고르바초프가 세바르드나제와는 다른 반응을 보였다는 것은 베이커가 놀랄만한 일이었다. 고르바초프는 역사적으로 위험한 문제였던 독일의 군국주의가 나타날 조짐은 없다고 생각했다. 대신 고르바초프는 이렇게 말했다. "본인도 기본적으로 미국측의 제안에 동의하는 바 이오." 소련은 새로운 현실에 맞춰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통일 독일의 장래를 걱정할 필요도 없을 것이오." 고르바초프는 프랑스나 영국 같은 나라는 유럽 내부의 주도권을 어느 나라가 쥐게 될 것인지 신경쓴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것은 소련이나 미국이 신경쓸 문제는 아니었다.

"소련과 미국은 대국입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세력 균형을 좌우할 능력이 있지요."**

Philip Zelikow and Condoleezza Rice, Germany Unified and Europe Transformed : A Study in Statecraft(Harvard University Press, 2002), p.182.

독일의 통일 과정은 국제 관계에서 강대국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잘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문제가 발생하면 모두가 관심을 가지지만 그 문제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대상은 실력이 뒷받침 되는 소수일 수 밖에 없지요.

불행인지 다행인지 한반도 주변에는 강대국 밖에 없어서 독일 통일 과정에서 처럼 딴지를 걸고 나설 자격미달(???)의 나라는 없습니다. 한반도 통일이 본격적으로 논의 될 때 몽골이나 베트남이 한 자리 요구할 리는 없겠지요^^;;;;

*위에서 인용한 겐셔의 발언은 꽤 유명해서 독일 통일과 관련된 많은 저작들에 실려있습니다. 젤리코와 라이스의 책에도 그 이야기가 있는데 미국 외교문서를 참고했기 때문에 베이커의 구술을 참고한 플라토의 서술과는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고르바초프의 이 발언은 직역하면 별로 재미가 없을 것 같아 의역을 했습니다. 원문은 "We are big countries and have our own weight." 입니다.

2010년 2월 15일 월요일

엄청난 설득력

미국의 전쟁수행능력에 대한 어떤 군사사학자의 논평.

미국은 1941년 부터 1945년 까지 매우 '모순적인' 전쟁을 치렀다. 미국은 글자그대로 '세계적 차원의' 전쟁을 치른 유일한 참전국이었으나 전쟁수행을 위한 국가적 동원의 정도에 있어서는 동맹국이나 적국의 '총력전' 수준에 한참 모자랐다.

Dennis Showalter, 'Global Yet Not Total : The U.S. War Effort and Its Consequences', Roger Chickering, Stig Förster and Bernd Greiner(Ed.), A World at Total War : Global Conflict and the Politics of Destruction, 1937-1945(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5), p.109

엄청난 설득력이죠. 쇼왈터의 이 글을 읽으면 무신론자도 천조국의 힘을 숭배하는 물신론자로 바뀌게 된다는;;;;;

2009년 7월 8일 수요일

중국∙북한 동맹관계 - 최명해

우리에게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모르겠으나 중국의 대북영향력은 매우 제한적입니다. 북한 핵문제가 장기화 되면서 중국이 북한에 대해 제한적인 영향력만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명백해 졌는데 이것은 꽤 흥미로운 문제입니다.

최명해의 저작인 『중국∙북한 동맹관계』는 이 문제를 재미있게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저자는 북한과 중국의 관계를 규정하는 중요한 요인을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하는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북한과 중국이 서로 상이한 전략적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점 입니다. 이것은 대외관계에서 흔히 나타나는 일이지요. 두 번째는 중국이 북한을 관리할 수 있을 만큼 강하지 않다는 점 입니다. 이 두번째 문제는 중국에게 꽤 불리하게 작용합니다. 특히 북한과 중국이 서로 상이한 전략적 목표를 가지고 대립할 때 중국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문제점이 처음으로 드러난 것은 흐루쇼프의 집권 이후 중국과 소련의 관계가 악화되었을 때 입니다. 중국은 소련을 중대한 위협으로 간주해 북한과 제휴해 소련에 맞서려 시도합니다. 그러나 북한은 자국에게 핵우산을 포함한 안전보장을 해 줄 수 있는 소련과 공개적으로 대립하는 것은 회피하려 합니다. 중국은 북한에게 그런 것들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실력이 되지 않았지요. 중국은 북한을 회유하기 위해 다양한 당근을 제시하지만 북한은 호락호락하게 걸려들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중국과 미국이 관계개선을 하면서 이런 구조는 더 요상하게 꼬여갑니다. 북한은 중국과 미국이 국교를 수립한 이후 한반도 문제를 공동관리하는 방향으로 나가자 중국의 하위체제에 포섭되지 않기 위해서 80년대에는 소련쪽에 밀착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 소련이 갑자기 망해버리죠;;;; 결국 북한에게 충분한 안전보장을 해 줄수 있는 소련이 망해버리니 북한에게 남은 선택은 두 가지가 됩니다. 중국의 하위 체제로 포섭되느냐 아니면 북한의 자율성을 인정해 줄 수 있는 쓸만한 물주를 찾느냐.

네. 결국 답은 우리 모두가 잘 알 듯 ‘미국밖에 없다’가 됩니다. 누가 보더라도 미국은 안전보장 측면에서 중국보다 우월하지 않겠습니까. 일단 국력 차이부터가 엄청나지요. 이후의 이야기야 우리 모두 잘 알 듯 미국은 중국에게 최대한 많은 역할을 부여하고 싶어하지만 북한이 말을 듣질 않고 있습니다. 어쩌겠습니까. 북한 입장에서는 미국이 중국보다 매력적인 상대인 것을. 문제라면 미국이 북한에게 신경쓰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겠습니다만.

저자는 중국이 북한과 동맹을 형식적이나마 유지할 수 밖에 없는 이유도 근본적으로는 북한을 자신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주 내에 묶어 둘 수 있는 수단이 동맹외에는 없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마치 1950년대에 소련이 그랬던 것 처럼 현재의 미국은 북한에게 제공해 줄 수 있는 것이 중국 보다 더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식적인 동맹마저 폐기된다면 그렇지 않아도 미국에게 들러붙고 싶어 안달 난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동북아시아에서 중국의 위상은 추락할 수 밖에 없으며 그것은 중국 지도부가 결코 원하지 않는 시나리오 일 것입니다.

Ps 1. 저자는 북한과 중국의 관계에서는 기괴하게도 북한보다 더 강대국인 중국이 ‘방기(abandonment)’의 위협을 느끼는 경우가 가끔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꽤 재미있는 해석이지요. 수십년 동안 소련과 미국에게 치어 2인자에 머무르는 것이 중국의 현실인 만큼 그럴듯한 이야기 입니다.

PS 2. 이종석도 북한과 중국의 관계에 대해서 책을 한 권 썼습니다. 이종석의 책과 비교하며 읽으시면 훨씬 재미있습니다. 최명해가 미국과 중국의 협력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이종석은 미국과 중국의 갈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요. 아마도 동북아균형자론이라는 발상이 나온 것도 이종석이 미국과 중국의 갈등을 심각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일 것 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종석 보다는 최명해의 저작이 더 재미있고 읽을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2008년 4월 1일 화요일

Nation Building in South Korea : Koreans, Americans, and the Making of a Demcracy - Gregg Brazinsky

서기장 동지께서 이라크 전쟁과 베트남 전쟁의 공통점을 비교한 글을 써 주셔서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제 아무리 천하의 미국이라도 할 수 없는 일은 언제나 있는 법 이지요.

미국은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끌면서 새로운 세계질서를 만들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자신이 만든 세계를 완벽하게 통제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번의 이라크 전쟁은 2차대전 이후 미국이 겪은 수 많은 실패 사례 중 하나로 끝날 것 입니다. 결국 상황이 이 지경에 되고 나니 많은 미국인들은 과거에 대해 좀 더 진지한 접근을 하게 되었습니다. 2차대전 이후 미국이 시도한 수많은 국가 건설 시도 중에서 성공한 사례는 과연 몇 건이나 있는가? 맙소사! 미국이 성공한 사례는 ‘정말로’ 한 손으로 꼽을 정도에 불과하지 않은가! 결국 미국인들은 진지하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미국이 그토록 많은 지원을 했건만 왜 이리 성적표는 시원치 않은 것인가?

저자가 말하고 싶은 바를 그대로 드러내 주는 표지

브래진스키(Gregg Brazinsky)의 Nation Building in South Korea라는 책은 이 물음에 답을 구하기 위해 미국이 사실상 ‘유일하게’ 성공을 거둔 한국의 사례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브래진스키는 미국이 2차 대전 이후 수많은 나라들에게 풍요로운 경제와 민주주의를 이식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퍼부었건만 왜 이렇게 쪽박만 줄줄이 차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물음을 던지고 있습니다. 미국이 이식하고자 하는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도데체 뭐가 문제인 것인가? 브래진스키는 미국은 후진국들에게 바람직한 발전의 방향을 제시할 수는 있지만 결국 그 방향으로 갈 것인가는 각 국가들의 선택이며 미국이 실패하는 이유는 이 점을 간과하고 무조건 미국의 방식을 들이밀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브래진스키는 한국이 성공을 거둔 원인으로 한국의 내재적인 요인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즉 한국은 미국이 실패한 다른 나라들과 배경부터 달랐다는 것 입니다.

브래진스키는 먼저 한국이 유럽 국가가 아닌 일본에 의해 식민지배를 받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즉 백인이 아니라 같은 아시아인에 의해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미국이 한반도에 들어왔을 때 일본 같은 제국주의자로 본 것이 아니라 ‘해방자’로 보았고 그 때문에 미국이 큰 부담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는 것 입니다. 베트남과 중동은 백인에 의해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미국도 크게 다르지 않게 보였다는 것이지요. 반면 한국은 미국의 헤게모니가 한국의 전통적 가치를 파괴하지 않을 것으로 인식했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지적합니다.
다음으로는 적절한(?) 독재를 꼽고 있습니다. 즉 이승만은 폭압적이었고 지지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이 너무 컸지만 1948년의 시점에서 땜빵으로 써먹기에는 그럭 저럭 적절한 선택이었고 박정희도 결국 지독한 독재자가 되지만 1960년의 과도기에 미국이 지지했던 온건한 장면 보다 나았다고 보고 있습니다. 특히 브래진스키는 장면 정부가 미국이 기대하는 수준의 경제적 성공을 거둘 수 있었는가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브래진스키는 박정희가 미국식의 완전한 자유시장 노선을 취하지 않고 국가가 통제하는 경제 정책을 펼친 것에 대해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한국의 특수성이 부각됩니다. 즉 식민지 시기에 일본식으로 교육받은 엘리트 집단이 존재했던 것을 한국의 성공 요인 중 하나로 꼽는 것입니다. 브래진스키는 일본식의 권위주의적 교육을 받은 남한의 군사 엘리트들이 미국이 이식하고자 한 것들을 한국(+일본)식으로 한국 실정에 맞게 소화해서 받아들인 것이 성공의 열쇠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저자는 박정희 체제까지는 미국의 지지가 긍정적 영향을 끼쳤지만 박정희 암살 이후의 위기 상황에서 전두환을 지지한 것은 ‘치명적인 실수’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미 박정희 정권에서 경제적 성공을 거둔 상황에서 권위주의적 독재는 효용을 다한 상태였고 전두환을 지지 함으로서 미국의 위신을 실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어쨌건 브래진스키는 전두환을 제외한 독재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대한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점은 한국에서 불편하게 받아들여지겠지요.

다음으로 저자는 한국이 경제 성장 이후 민주화에 성공한 요인은 무엇인가에 주목합니다. 후진국이 민주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중산층이 필요하지만 안정적인 중산층이 절대적 요소는 아닙니다. 브래진스키는 이 점에 대해 싱가포르는 안정적인 중산층을 갖췄지만 정치적인 면에서 후진적이라는 점을 지적 합니다. 그렇다면 한국을 민주화 시킨 동력은 무엇인가? 브래진스키는 민주화에 있어서도 한국의 내재적인 요소가 결정적이었다고 봅니다. 물론 여기서도 미국의 역할을 무시하지는 않습니다. 저자는 미국이 해방 이후 지속적으로 한국의 교육과 사회발전에 투자한 점을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교육에 대한 원조를 통해 한국의 지식인, 정치인들이 미국이 중요시하는 가치, 자유민주주의를 수용하는데 도움을 줬다는 것 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미국의 역할을 인정하면서도 한국인들의 민주화에 대한 갈망이 결정적인 요인이었음은 부인하지 않습니다. 저자는 설사 미국의 교육에 대한 지원이 없었더라도 한국의 청년과 지식인들은 유신 독재에 저항하는 길을 택했을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브래진스키는 경제발전과 민주화에서 한국의 내재적 요소가 기여한 바를 높게 평가하고 미국이 여기서 제 3세계의 국가건설에 대한 교훈을 얻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저자는 미국이 후진국의 국가건설을 지원할 때 미국의 방식을 일방적으로 들이밀 것이 아니라 해당 국가의 선택을 존중하는 것이 더 나은 성과를 거둘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유감스럽게도 이라크의 경우는 이러기에는 너무 늦었으니 다음 국가를 찾아 봐야 될 것 같습니다.

2007년 11월 25일 일요일

키티호크의 홍콩 입항 거부가 달라이 라마 때문?

워싱턴포스트에 재미있는 기사가 하나 있더군요.

China's Naval Rebuff Could Be Reply to Dalai Lama's Medal

이게 사실이라면 정말 웃기는 일 입니다. 중국에게 티벳 문제가 민감한 줄은 알겠는데 이런 식으로 유치하게 굴 필요까지야..

2007년 11월 3일 토요일

킹덤

역시나 국내의 평론가들은 “미국 만세다” 아니면 “아랍인들을 무능하게 묘사했다”는 등 부정적인 평을 내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영화를 보고 나니 그런 비난이 일리가 없는 건 아니지만 좀 과하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이 영화의 도입 부분은 꽤 재미있게 잘 만들어 졌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건국에서 911테러까지의 역사적 사건 전개를 압축적으로 정리하고 지나가는데 마치 잘 만든 브리핑을 보는 듯한 느낌입니다. 특히 세계 1위의 산유국과 세계 1위의 석유 소비국인 사우디아라비아와 미국의 관계를 그래픽으로 묘사한 것은 아주 재미있는 장면이었습니다. 이렇게 영화의 배경 설정을 설명하고 넘어가는 것은 괜찮은 방식 같습니다.

국내 평론가들이 지적했듯 후반부에 FBI의 수사요원들이 일당백의 총잡이로 돌변하는게 약간 깨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총격전 장면이 잘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정도는 충분히 애교로 봐 줄 수 있습니다. 도로에서 테러리스트들에게 기습을 받은 뒤 그대로 그들의 근거지까지 추격해 벌이는 마지막 결전은 매우 박진감 넘치고 신납니다. 그리고 상영시간이 두 시간도 안되니 만큼 피곤하더라도(???) 주인공들이 수사도 하고 총도 쏘는 쪽이 역할을 나눠 더 많은 등장인물을 출연시키는 것 보다 나은 것 같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평론가들이 동의했듯 영화 후반부의 총격전 장면은 압권입니다. 여주인공인 제니퍼 가너는 남자들이 돌격소총이나 카빈 종류를 사용하는 것과는 달리 MP5를 사용하는데 이건 여성임을 고려한게 아닌가 합니다. 제작자가 총기 매니아인 마이클 만이니 충분히 그럴 듯 싶더군요. 영화 막판에 주인공들이 엄청난 전투력을 발휘해 테러범들을 일방적으로 학살하는 게 좀 그렇긴 하지만 재미는 있더군요.

사우디인에 대한 묘사가 부정적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 하기가 조금 그렇습니다. 이 영화에서 사우디인들은 미국인들이 없으면 기초적인 수사도 못하고 피의자에 대한 고문이나 하는 등 한심하게 그려지고 있긴 한데 만약 사우디인들이 미국인들 없이도 수사를 잘 하는 것으로 묘사되면 주인공들이 개입할 여지도 없어지니 영화 자체를 만들 수 없지 않겠습니까?

영화는 매우 비관적인 전망을 담으며 끝납니다. 결국 석유로 인한 미국과 사우디의 괴이한 관계는 계속해서 엉망으로 전개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암시하며 끝나는데 유치한 해피엔딩으로 때우지 않았다는 점에서 후하게 평가할 수 있을 듯 합니다.

2007년 9월 13일 목요일

오늘 산 책 한권


길을 가다가 우연히 범한서적이라는 서적 수입회사에서 책을 저가에 처분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뭘 팔고 있나 해서 가 보니 주로 해리포터같은 것들이 많이 나와 있더군요. 그런데 그 중에서 유독 튀는 책이 하나 있었습니다.

네. 바로 이 책입니다.

이 책을 잠깐 뒤적이고 있으니 책 파는 아주머니(?)가 "5,000원에 드릴테니 사가세요" 라고 하시더군요.

헉. 5,000원? 아무리 페이퍼백이라지만 깨끗한 새책을 이정도 가격에 구할 기회가 또 오기는 쉽지 않을터.

그래서 얼씨구나~ 하고 샀습니다.

지도도 충실하고 내용도 재미있게 서술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미리견 태조 폐하의 치적을 담고 있으니 경건한 마음으로 일독할 생각입니다. 히히히.

2007년 8월 15일 수요일

위대한 USA! 400대의 트럭으로 모스크바를 구하다!

3일전에 렌드-리스(Lend-Lease)가 소련의 교통-운수 체계에서 차지하는 역할이라는 글을 썼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아주 어이없는 댓글이 하나 달렸습니다.


물론 미국이 1941년에 소련으로 보낸 원조 물자 중에는 트럭이 있는게 맞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달랑 400대라는 점이지요. 고작 400대의 트럭으로 서부전선군 예하 사단들의 기동력을 높일 수 있다니 미국 자동차들은 무안단물이라도 발랐나 봅니다. 게다가 이것들은 부품상태로 도착해서 소련에서 조립을 했기 때문에 부대에 지급된 것은 1942년 1월이 넘어서 였습니다.

어이가 없어서 다음과 같은 댓글을 달았습니다.


그랬더니 다음과 같은 댓글이 달리는군요.


거참. 남의 블로그에 맞춤법도 틀린 헛소리나 늘어놓는 주제에 예의를 찾다니 어이가 화성탐사 나갈 지경입니다.

게다가 논리도 엉망이지요. 결국 증원군을 극동에서 러시아 서부까지 이동시킨게 철도라고 시인을 했는데 그렇다면 자동차는 별 도움이 안됐다는 결론아닙니까.

기초적인 역사적 사실에도 무지한 주제에 맞춤법도 틀리고 논리도 맞지 않는 헛소리를 지껄이면서 남의 블로그에다 예의를 논하니 뭐하는 인간인지는 몰라도 낮짝도 두껍습니다.

2007년 8월 12일 일요일

렌드-리스(Lend-Lease)가 소련의 교통-운수 체계에서 차지하는 역할

참으로 오래된 퀴퀴하고 눅눅하고 식상하기 짝이 없는 낡은 떡밥입니다. 읽으시는 분들의 양해를 구하는 바 입니다.

독소전쟁에서 소련의 역할이 어느정도 였는가 하는 해묵은 떡밥은 여전히 인터넷에서 인기있는 주제 중 하나입니다. 이 이야기가 나오면 대개 소빠(?)와 소까(?)가 대립하는 양상으로 전개되는데 소까(?)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렌드-리스(Lend-Lease)의 역할이 과소 평가된다고 이야기 하지요. 그렇다면 렌드-리스는 실제로 어느 정도의 역할을 했을까요?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에는 소련 체제를 혐오하고 친서방적인 경향을 보이는 연구자들이 등장했습니다. 제가 자주 인용하는 보리스 소콜로프(Борис Соколов)도 그런 경향의 사람인데 이 양반이 썼던 렌드-리스에 대한 글 중 하나가 1994년에 Lend-Lease in Soviet Military Effort, 1941~1945 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에 실렸습니다. 여기에는 렌드-리스로 받은 품목에 대한 통계가 잘 정리되어 있어서 매우 활용하기가 편리합니다. 저자가 소련 혐오자이기는 하지만 통계 자체는 충분히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군요. 여기에 차량 지원에 초점을 맞춘 그리바노프(Станислав Грибанов)와 던(Walter S. Dunn)의 글도 약간 덧붙이려고 합니다.

렌드-리스 품목은 매우 종류가 방대하니 여기서는 간단히 교통-수송과 관련된 부분만 짤막하게 이야기 하겠습니다.

1. 연료

1-1. 항공연료

소련은 1941년 전쟁 발발 당시까지 Б-78 항공유 소요량의 4%만 재고로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소련의 정유산업이 매우 수준이 뒤떨어져 있어서 항공유 생산이 적었기 때문입니다. 독일 공군이 노획한 소련군의 항공유가 너무 저질이어서 난방용 기름으로나 써야 한다고 평가했다는 일화가 있는데 어느 정도 사실에 부합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1940년부터 1941년까지 소련이 생산한 항공유의 양은 다음과 같습니다.(단위 미터톤)

1940년 : 889,000톤
1941년 : 1,269,000톤
1942년 : 912,000톤
1943년 : 1,007,000톤
1944년 : 1,334,000톤
1945년 : 1,017,000톤

렌드-리스로 지원된 항공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미국 : 628,000톤
영국 : 14,700톤
캐나다 : 573,000톤

여기에 렌드-리스로 light fraction gasoline(이 용어를 어떻게 번역해야 하나요?)도 지원됐습니다. light fraction gasoline은 거의 대부분 소련이 항공유를 제조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미국 : 732,300톤
영국 : 902,100톤

소콜로프는 항공유 제조에 사용된 light fraction gasoline을 포함하면 렌드-리스로 원조된 항공유는 1941~1945년 기간 동안 소련이 사용한 항공유의 51.5%에 상당하는 양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1-2. 차량용 연료

소련이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생산한 차량용 연료는 10,923,000톤이고 렌드-리스로 원조된 차량용 연료는 242,300톤입니다.

2. 운송수단

2-1. 차량

제 개인적으로 생각했을 때 렌드-리스에서 가장 결정적이었던 것은 미국제 트럭이 아닐까 합니다. 미국의 차량 지원이 없었다면 소련이 1944~45년 전역에서 독일군을 결코 기동력으로 압도할 수 없었을 것 입니다.

소련의 차량 생산량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940년 : 145,390대
1941년 : 124,176대(이 중 1941년 7~12월의 생산량은 46,100대)
1942년 : 34,976대
1943년 : 49,266대
1944년 : 60,549대
1945년 : 74,657대

즉 전쟁 기간 중에 소련이 생산한 차량은 265,548대입니다. 그리고 미국이 렌드-리스로 지원한 차량은 409,500대로 압도적입니다. 특히 이 중 상당수가 1943~44년의 결정적인 시기에 지원되었다는 점은 미국의 차량 지원이 없었을 경우 소련 육군이 1944년의 대규모 기동전을 펼치기 어려웠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던은 미국의 차량 원조로 인해 소련군이 대규모 기동전에서 보급 지원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일반적인 마차 수송의 경우 하루 최대 30km가 한계고 운송량도 제한적이지만 트럭의 경우 일반적으로 하루 100km 정도의 거리를 충분히 담당할 수 있다는 점 입니다. 특히 포장도로가 극히 드물었기 때문에 미제 트럭이 부여한 기동력은 엄청난 것 이었습니다.


1942~1943년 소련의 차량 생산량이 격감한 것에서 볼 수 있듯 소련은 막대한 전차의 소모를 보충하기 위해서 차량 생산을 희생하면서 까지 전차 생산에 역량을 집중시켰습니다. 미국의 차량 지원이 없었다면 소련의 전차 생산은 격감했을 것 입니다.

여기에 미국이 원조한 견인용 트랙터 8,701대와 오토바이 35,170대도 기동수단으로 포함되어야 할 것 입니다.

또한 미국은 소련 원조를 위해서 이란에 세 곳의 차량 조립공장을 세웠는데 이것도 꽤 대단한 투자라고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리바노프에 따르면 이 세 곳의 조립공장에서 생산되어 소련에 원조된 차량은 184,112대에 달합니다.

렌드-리스 중 자동차에 대한 부분은 그리바노프의 글이 꽤 자세하고 통계가 잘 정리되어 있는데 이것은 기회가 되면 따로 소개를 할까 합니다.

2-2. 철도

철도 부문에 있어서도 렌드-리스는 결정적 입니다.

소련의 철도용 레일 생산은 다음과 같았습니다.(단위 미터톤)

1940년 : 1,360,000톤
1941년 : 874,000톤
1942년 : 112,000톤
1943년 : 115,000톤
1944년 : 129,000톤
1945년 : 308,000톤

미국과 영국이 렌드-리스로 원조한 철도용 레일은 총 685,700 미국톤(short ton)으로 미터톤으로 환산하면 622,100톤이 됩니다. 이것은 소련이 전쟁 기간 중 생산한 철도용 레일의 거의 60%에 육박하는 막대한 양 입니다. 게다가 소련이 생산한 철도 레일의 많은 수는 협궤용 레일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미국이 원조한 양은 소련의 생산량의 80%를 가뿐히 능가합니다.

기관차에 있어서는 더욱 더 압도적입니다.

소련의 기관차 생산량은 다음과 같았습니다.(소형 기관차 제외)

1940년 : 914대 + 디젤 5대
1941년 : 706대 + 디젤 1대
1942년 : 9대
1943년 : 43대
1944년 : 32대
1945년 : 8대

전쟁 기간 중 렌드-리스로 원조된 기관차는 증기 기관차 1,900대, 디젤 기관차 66대로 소련이 1941~1945년 기간에 생산한 기관차의 2.5배를 넘으며 특히 전쟁이 벌어진 이후 소련이 생산한 양과 비교하면 압도적 입니다.
철도 화차와 비교하면 더욱 더 결정적입니다. 소련이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생산한 철도 화차는 총 1,087대인데 같은 기간 렌드-리스로 원조된 화차는 무려 11,075대에 달하고 있습니다.

즉 미국의 원조가 없었다면 소련의 철도 교통은 전쟁 기간 중 파탄이 났을 것이며 후방 지원은 거의 불가능 했을 것 입니다.

교통수단과 관련해서 결론을 내리자면 렌드-리스의 역할은 너무나 결정적이었으며 렌드-리스가 없었다면 소련의 교통-운수 체계가 조기에 파탄나거나(1916~17년의 러시아처럼) 또 전차와 야포 같은 전투용 장비의 생산을 크게 감소시켰을 것 입니다.

2007년 6월 6일 수요일

1차대전 당시 네덜란드의 중립

네덜란드는 1차대전 당시 독일의 침공을 면할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네덜란드가 가진 경제적,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이었습니다. 슐리펜 계획에 따른 보급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네덜란드도 점령해 버리면 편하지만 그렇게 되면 잃어 버리는 것이 더 많았기 때문입니다. 독일군 수뇌부는 전쟁계획을 수립하면서 영국이 중립을 지키지 않는다면 해상봉쇄는 피할 수 없기 때문에 독일의 무역을 위해서라도 대서양의 출입에 용이한 중립국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전쟁이 벌어질 경우 독일과 외부와의 무역을 중개해 줄 수 있는 대서양 국가는 사실상 네덜란드 밖에 없지요. 특히 로테르담은 미국에서 수입하는 밀을 독일로 공급하는 주요 항구였기 때문에 독일로서는 네덜란드와 중립을 유지하는 것이 필수적이었습니다.
독일은 네덜란드가 독일에 우호적인 중립을 지키도록 많은 신경을 썼다고 합니다. 몰트케는 1차대전 발발 이전부터 외교 채널을 통해 독일은 전쟁 시 네덜란드의 중립을 보장할 것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고 하지요. 네덜란드는 벨기에가 독일군의 목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또한 독일의 의도에 대해 많은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고 독일측의 중립 보장은 너무나도 중요했습니다.

전쟁이 발발하자 네덜란드는 독일에 대한 식료품 공급처로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1914년 8월 전쟁이 발발하자 네덜란드 정부는 식량 비축분을 확보하기 위해서 네덜란드에 수입된 곡물을 외국으로 재수출 하는 것을 금지 시켰는데 이때 독일 정부는 즉시 외교적 공갈을 통해 수출 금지 조치를 해제 시켰습니다.
지정학적 위치상 네덜란드는 미국과 독일간의 밀 중개무역을 독점하게 되는데 그 결과 독일은 네덜란드를 통한 식료품 공급에 크게 의존하게 됩니다. 1915년에는 독일이 수입하는 식료품의 50%가 네덜란드를 통해 공급될 정도였다고 하지요. 네덜란드가 1916년에 독일에 수출한 식량은 독일인 120만명이 하루에 3,500칼로리를 섭취할 수 있게 하는 양이었다고 합니다. 독일은 해상봉쇄 때문에 네덜란드는 물론 덴마크, 스위스, 노르웨이, 스웨덴을 통한 식량수입을 늘렸고 네덜란드는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습니다. Marc Frey의 Bullying the Neutrals : The Case of the Netherlands에 따르면 네덜란드는 1914년 1~6월에 독일로 감자 및 밀가루 11,411톤, 버터 7,671톤, 치즈 6,312톤, 달걀 7,868톤, 고기 5,820톤을 수출했는데 이것이 1916년 1~6월에는 각각 51,201톤, 19,026톤, 45,969톤, 20,328톤, 40,248톤으로 증가했다고 합니다.

물론 네덜란드가 이렇게 전략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면서 연합군의 해상봉쇄가 제 역할을 할 수 없게 만드니 영국의 눈치도 안 볼 수는 없었습니다. 네덜란드 외교부는 1916년 11월에 영국 정부에게 독일에 대한 식료품 수출을 늘리는 것은 독일의 침공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영국 정부가 양해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특히 무역에 대한 국가의존도가 높은 만큼 네덜란드가 독일에 대한 무역제제에 동참할 경우 독일 해군이 네덜란드 상선을 공격할 가능성도 높았기 때문에 네덜란드는 영국 측을 설득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영국의 인내심도 한계는 있는지라 영국 정부는 네덜란드 측에 독일에 대한 식량 수출을 50%이상 감축하라는 압력을 가합니다. 여기에 미국이 참전하자 상황은 더욱 꼬이게 됩니다. 미국은 영국보다 한술 더 떠서 독일에 대한 수출을 완전히 금지할 것을 요구합니다. 1917년 10월, 미국이 독일에 대한 무역 금지 요구에 합류하자 네덜란드 정부는 굉장히 골치 아픈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독일은 1916년 말부터 유사시에 대비해 네덜란드를 침공하는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고 네덜란드 역시 독일이 어떤 움직임을 보일지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도 독일은 양면전쟁의 여파로 네덜란드 침공에 투입할 만한 병력을 확보할 수 없어 침공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영국으로 부터의 석탄 공급이 감소했기 때문에 독일의 석탄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다는 점도 독일과의 무역을 계속해야 하는 원인이었습니다.
네덜란드는 미국이 참전한 이후 미국과 영국 양측의 압력에 못 이겨 독일에 대한 수출을 감축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석탄공급을 확보하기 위해서 미국, 영국과의 협상을 통해 독일에 대한 식량 수출을 중단하지는 않았습니다. 네덜란드가 독일에 대한 수출을 완전히 중단한 것은 1918년 9월로 독일의 패전이 확실해 진 뒤 였고 바로 휴전이 이어진 뒤 네덜란드는 다시 독일에 대한 수출을 재개할 수 있었습니다.

1차대전 당시 네덜란드는 융통성있는 외교와 약간의 행운의 덕택으로 중립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미국과 독일을 잇는 중개 무역을 통해 경제적으로도 상당한 이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네덜란드의 금 비축량은 1914년 6월 30일 기준으로 3억620만 굴덴이었는데 1918년 12월 31일에는 10억6890만 굴덴에 달했다고 하지요.

2007년 6월 1일 금요일

캔자스주립대 출판부에서 나올 2007년 하반기 기대작

재미있는 군사서적을 많이 출간하는 캔자스 대학 출판부에서는 꾸준히 재미있어 보이는 서적을 내놓고 있습니다. 2007년 3/4분기에 나올 서적들을 보니 꽤 재미있어 보이는게 두 권 보이는군요.

한권은 일전에 채승병님이 "전격전의 실체란 무엇인가"라는 글에 소개한 Robert M. Citino의 신간 Death of the Wehrmacht: The German Campaigns of 1942입니다. 독일군의 1942년 전역에 대해 분석한 서적이로군요. 이건 지름 1순위로 넣어야 겠습니다. 2007년 10월 출간예정이라는군요.

두번째 녀석은 미육군 제1보병사단사, The Big Red One
America’s Legendary 1st Infantry Division from World War I to Desert Storm
입니다. 워낙 유명한 부대라 사단사가 많긴 한데 이것도 나름대로 쓸만하지 않을까 싶군요. 출간되고 서평을 본 뒤에 결정해야 겠습니다. 이건 2007년 11월 출간예정이랍니다.

지름신께서는 항상 지갑의 충만함을 시험하시니 역시 믿음의 길을 가는데 잠시라도 나태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2007년 2월 14일 수요일

창의력 넘치는 어떤 장군

Conrad C. Crane의 Bombs, Cities and Civilians를 읽고 있는데 아놀드(Henry H. Arnold)의 무한한 상상력에 대한 부분이 나왔습니다. 뭔가 기묘한 느낌을 들게 하더군요. 해당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놀드는 전문가들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 놓는 것을 좋아했다. 기발하고 창의적인 발상은 그를 흥분시키는 요소였다. 아놀드의 초기 저작들을 읽으면 그에게 폭격기만 충분했다면 어떤 일이든지 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아놀드는 도쿄 주변의 화산을 폭격하는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일본 연안의 물고기를 몰살 시키는 것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또 그는 독일의 V-1과 유사한 무인비행폭탄에 열띤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독일군이 부비트랩을 사용하는데 대해 만년필이나 작은 책으로 위장한 폭탄을 독일 본토에 투하하는 것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그와 그의 참모진은 일본인들 보다 먼저 풍선에 소이탄을 매달아 일본을 공격하는 것을 구상했다.

Conrad C. Crane, Bombs, Cities and Civilians : American Airpower Strategy in World War II, University Press of Kansas, 1993, p35

B-29들이 후지산 분화구에 폭탄을 쏟아 넣는걸 생각하니 뭔가 난감한 느낌이 드는군요.

2007년 2월 8일 목요일

전형적인 약소국 외교

895A.00R/1-2050

동북아시아국의 존 Z 윌리엄스의 면담록.

대외비, 1950년 1월 20일 [워싱턴]

참석자 : 주미한국대사 장면(John M. Chang), 극동담당차관보 W. 월튼 버터워스(W. Walton Butterworth), 존 Z 윌리엄스

국무부 장관이 하원 청문회에 참석해야 한다고 알렸기 때문에 장 대사는 대신 오후 5시 30분에 버터워스 차관보와 만났다.

장면 대사는 먼저 어제 경제협력처의 대한 원조에 우호적인 법안이 통과되지 않았다는 점이 한국내에 미칠 영향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고 국무부에서 이에 대해 재검토해 줄 수 있는가를 질문했다. 버터워스 차관보는 국무장관과 대통령이 곧 이 문제에 대해서 성명을 낼 것으로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현재 시점에서 행정부가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지만 현재 고려중인 방안이 의회로부터 하나 혹은 다른 형태의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버터워스 차관보는) 장면 대사의 질문에 대한 답변 중 대통령의 재량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중국 지역에 대한 상호방위원조계획(MDAP) 예산으로 책정된 7500만 달러 중 한국 원조에 전용할 수 있는 예산은 어제도 밝혔듯 하원의 동의를 이끌어 내지 않는 한 1달러도 없다는 점을 확실히 했다. 장면 대사는 국무부 장관이 최근 프레스클럽 연설에서 한국이 미국의 극동지역의 이익선(line of U.S. interest in the Far East)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한 발언에 대해 기자들이 자신에게 질문해서 매우 난처한 상황에 처했다고 난색을 표명했다. 장면 대사는 한국이 미국의 이익선 바깥으로 분류된데다 어제 하원이 한국에 대한 원조법안을 통과시키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미국이 한국을 포기하려 하는 것인가에 대해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버터워스 차관보는 그런 시각에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는 미국 정부는 한국을 존중해서 UN의 다른 회원국들과의 협조하에 한국의 정통성(cause)을 지지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한국의 위치는 어떤 선을 설정하던 간에 그 것을 넘어선다고 말했다.

버터워스 차관보는 이승만 대통령이 어제 하원의 행동에 대해 한 발언에 대해 이야기 하고 업무문제 때문에 최근 장면대사가 한국의 재정문제에 대해 보낸 서신을 검토하지 못 했다고 말했다. 장면 대사는 한국정부에 최근 버터워스 차관보가 한국의 인플레이션에 대해 표명한내용을 한국 정부에 보냈으며 한국 정부는 인플레이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강력한 대응을 할 것이라고 알려왔다고 말했다. 버터워스 차관보는 장면 대사에게 의회는 결국에는 1950년 회계연도 한국에 대한 ECA 원조 금액 중 나머지를 승인할 것이지만 1951년 회계연도의 원조 프로그램은 매우 상세하게 검토될 것이며 이 때문에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인플레이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장면 대사는 기자들이 문 밖에서 자신의 발언을 취재하려고 기다리고 있으니 국무부가 하원의 행동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확답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버터워스 차관보는 그런 발언은 국무부 장관과 대통령에게 예기치 못한 부담을 줄 수 있으며 하는 일 마다 편견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그런 발언을 할 수는 없다고 대답했다. 버터워스 차관보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대응은, 특히 언론을 상대로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한국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고 하는 것으로 이렇게 하면 미국측이 한국을 걱정하고 있다고 보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장면 대사는 자리를 뜨기 전에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국무부와 백악관이 한국에 대해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각료들에게 확신시키고 미국이 한국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답을 받기 위해 국무부장관을 면담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말했다. 버터워스 차관보는 국무부장관의 일정이 너무 바쁘기 때문에 다음주 중에는 어떻게 해서든지 국무부장관 면담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확답했다. 장면박사는 국무부장관과의 면담은 5분 이상 끌지 않겠다고 말했다.

장면대사는 버터워스 차관보가 떠난뒤 기자들과 인터뷰를 가지고 버터워스 차관보와 대화한 것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던 도중 국무부가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이다(going to do something)”라고 말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러나 장면대사는 기자들이 이승만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질문하지 않도록 그 사본은 주미한국대사관과 프레스클럽에 있다고 말을 돌렸다.

FRUS 1950 Vol. VII Korea, pp11-14, USGPO 1976

뭐, 지금도 어떤 경우 구걸에 가까운 행태를 보이는 건 별반 차이는 없을 듯 싶습니다만.... 요즘은 미국이나 중국같은 강대국 뿐 아니라 북한같은 동네에도 구걸을 한다지요.

2007년 1월 29일 월요일

멋지다(?) 이란!

뉴욕 타임즈에 재미있는 기사가 실렸더군요.

Iranian Reveals Plan to Expand Role in Iraq

제법 능글능글하게 나오는군요. 이러다가 대한민국에 이란빠들이 생기지 말라는 법도 없겠습니다.

미국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매우 궁금하군요.

프랑스의 대미 군사원조 : 1917~1918

1917년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할 당시 미국의 전쟁 준비는 해군을 빼면 전혀 돼 있지 않았습니다. 국가 전체가 고립주의에 빠져 19세기 후반기 내내 전쟁에 대한 특별한 생각 없이 살고 있었으니 어쩔 수 없는 결과였습니다. E. Glaser는 1차 대전 당시 미국의 전시 동원체제에 대한 짧은 논문에서 미국의 군수공업위원회가 1918년 초까지도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E. Glaser의 논문 제목도 아예 Better late than Never입니다. ‘아예 안하느니 늦는게 낫다’ 정도…)

1917년, 퍼싱이 유럽 원정군을 1918년 6월까지 1백만 수준으로 증강시키고 최종적으로 2백만으로 증강시킨다는 계획을 전쟁부(Department of War)에 제출했을 때 미국 유럽 전선에 보낸 장비 중 현대적인 야포는 120문의 M1903 3인치 유탄포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실상 미국에 제대로 된 군수공장이 드물다 보니 새로 개발하는 M1916 3인치 유탄포는 프랑스군의 75mm 포탄을 사용할 수 있도록 개발 도중에 설계를 변경해야 했습니다. 결국 미국의 공장들은 프랑스로부터 75mm 유탄포의 생산면허를 도입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게 됩니다. M1916을 양산할 수 있을 때 까지 기다리다간 전쟁이 끝날 판이었으니…

1차 대전이 끝난 뒤 미 육군 포병감 스노우(William J. Snow) 소장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전쟁 기간에 우리는 우리 군대에 대포를 보급할 능력도 없었고 보급하지도 못했다고 말해도 틀리진 않을 것이다."

지금이라면 꿈도 꿀 수 없는 일 이겠지만, 프랑스 정부가 미국의 딱한 사정을 보고 나서게 됩니다. 1917년 5월 22일, 조프레는 미국 전쟁성에 미육군의 병력 동원을 앞당기기 위해 미국이 필요로 하는 자동화기와 야포를 모두 프랑스 정부가 원조한다는 안을 제안했습니다.
또 같은 달 25일에 프랑스 정부는 미국 측에 1백만발의 75mm 포탄과 10만발의 155mm 포탄을 먼저 원조하고 그 다음으로 매일 3만발의 75mm 포탄과 6천발의 155mm 포탄을 원조하겠다는 제안을 하게 됩니다.

마침내 미국 정부는 1917년 6월 9일에 프랑스 측에 미국제 3인치, 6인치 유탄포 생산을 취소하고 그 대신 프랑스로부터 75mm, 155mm 유탄포를 원조 받겠다고 통보합니다. 당장 포탄부터 얻어 써야 할 판이니 대안이 없었던 것이죠.

결국 이 덕분에 오늘날 수많은 제 3세계 국가가 155mm를 주력 야포로 쓰고 있지요. 만약 미국이 원래 계획대로 3인치와 6인치 유탄포를 양산할 수 있었다면 오늘날 야포의 표준 구경은 6인치가 됐을 텐데 말입니다.

부족한 것은 대포 말고도 많았습니다.

1차 대전의 필수품, 기관총도 매우 적었던 것 입니다. 퍼싱은 기관총 부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프랑스에 처음 도착한 사단들은 미국 본토에서 기관총 사용을 충분히 훈련 받지 못했고 많은 사단들은 프랑스에 도착하기 전 까지 기관총을 지급받지 못한 상태였다. 전쟁에 참전할 당시 각 사단은 기관총 92정만 보유했는데 실제 편제상으로는 기관총 260정과 자동소총 768정이 필요했다. 기관총이 부족해서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됐는지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결국 퍼싱은 1917년 6월 21일, 프랑스에 기관총도 원조해 줄 것을 요청하도록 전쟁부에 문서를 보냈고 프랑스 정부는 즉시 미국에 기관총과 탄약 일체를 원조하겠다는 답신을 보냅니다.

항공기의 경우도 마찬가지 입니다. J. H. Morrow. Jr의 The Great War in the Air에는 전쟁 발발당시 말 그대로 안습이었던 미 육군항공대의 비참한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미 미국은 1909년 이후 군사 항공에서 독일과 프랑스에 큰 차이로 뒤진데다가 전쟁이 발발한 이후 유럽의 항공기술이 급속히 발전해 미국으로서는 이 격차를 쉽게 줄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 결과 당연하게도(?) 미국 육군항공대는 프랑스가 만든 비행기로 도배를 하고 맙니다.

그러나 미국은 프랑스에 철강, 화약 등을 지원했기 때문에 프랑스에 대해 저자세를 취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미국은 1917년에 영국과 프랑스를 합친 것 보다 더 많은 무연화약을 생산했습니다. 그리고 이 차이는 1918년에는 더 벌어지지요. 프랑스 역시 자원이 부족한데다 장기간의 전쟁으로 자본이 거덜날 지경이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미국으로부터 많은 것을 얻어내려고 혈안이 돼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미국측에 파격적인 선심공세를 퍼붓게 됩니다.

1차 대전기간 중 미육군이 프랑스와 영국으로부터 원조받은 장비는 다음과 같습니다.

(프랑스 / 영국)

야포 : 3,532 / 160
열차포 : 140 / 0
탄약차(Caisson) : 2,658 / 0
박격포 : 237 / 1,427
자동화기 : 40,884 / 0
전차 : 227 / 26
항공기 : 4,874 / 258

R. Bruce, A Fraternity of Arms : America & France in the Great War, p.105

거의 대부분의 군 장비를 원조에 의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나마 차량은 생산기반이 어느 정도 있었기 때문에 중화기 보다는 조금 나은 편이었다지요.

저런 일들이 불과 90년 전 일 이라는게 믿어지지 않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저 때로부터 불과 30년 만에 경쟁자가 없는 절대 강국으로 떠오른 것을 보면 미국은 좋건 나쁘건 간에 역사상 유례가 없는 괴물 국가임에 틀림 없습니다.

2007년 1월 12일 금요일

천하무적(?) 미 해병대

어느 나라나 해병대는 드센 모양입니다.

다음의 이야기는 그레나다 침공당시 미국인 대학생들을 구출하러 출동했던 슈워츠코프(Norman Schwarzkopf, 당시 소장)가 해병대에 헬리콥터 지원을 요청했을 때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그 명령은 따를 수 없습니다.”

“이봐, 지금 무슨 소릴 하는건가?”

“우리 해병대는 육군을 해병대의 헬리콥터에 태울 수 없습니다.”

“이봐, 대령. 지금 상황 파악을 못 한 모양인데 우린 수행해야 할 임무가 있다. 인질로 잡힌 학생들을 지금 당장 구출해야 한단 말이다. 지금 해병대 전투 병력은 그렌빌을 확보하러 이동 중이고 해병대 헬리콥터는 바로 지금 여기 있지 않나? 학생들을 당장 구출하려면 해병대 헬리콥터로 레인저를 수송해야 한단 말이다.”

“지금 헬기를 투입하겠다면 해병대를 동원하겠습니다. 우리 해병대가 학생들을 구출하면 되지요.”

그 해병 대령은 완강히 저항했다.

“그럼 해병대를 투입하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나?”

그 대령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대답했다.

“최소 24시간 입니다.”

“내 말 똑똑히 들어라, 대령. 이건 메칼프(Joseph Metcalf) 제독의 지시에 따라 소장인 내가 대령인 너에게 직접 명령하는 것이다. 내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면 군법회의에 회부할 줄 알아라.”

해병대 대령은 그제서야 내 명령을 따르기로 했다.

Dale R Herspring, The Pentagon and the Presidency : Civil-Military Relations from FDR to George W. Bush p.289, Norman Schwarzkopf, It doesn’t take a Hero, p.246에서 재 인용


육군 소장에게 대드는 해병대 대령이라.

2006년 12월 23일 토요일

The Pentagon and the Presidency - by Dale R. Herspring

The Pentagon and the Presidency : Civil-Military Relations from FDR to George W. Bush

Dale R. Herspring의 이 저작은 꽤 흥미로운 저작입니다. 먼저 민군관계(Civil-Military Relations)와 문민통제(Civilian Control) 문제를 군의 시각에서 바라봤다는 점이 참신합니다. 기존의 유명한 저작들, 특히 새뮤얼 헌팅턴의 연구는 탁월하긴 하지만 주로 민간관료집단의 관점에서 민군관계와 문민통제를 설명했지요.

Herspring은 프랭클린 루즈벨트부터 현재의 행정부에 이르기 까지 대통령을 중심으로한 행정부와 군의 관계를 군대가 민간통제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는가를 중심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저자는 책의 첫 머리에 브래들리의 유명한 “There is no place in a democratic state for the attitude that would elevate each military hero above public reproach simply because he did the job he has been trainded for and is paid to do.”라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전통적인 미국의 직업군인의 가치관이 국방부 자체가 새로운 관료집단으로 등장하면서 변화하고 있으며 군 엘리트들이 행정부의 정책결정과정에 적극적으로 영향력을 미치려고 노력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각 행정부의 민군관계를 대통령과 고위 장성들에 초점을 맞춰 주요 정책에 있어 군 엘리트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중요 군사문제에 있어 정부의 정책 수행과 군대의 군사적 요구는 어떻게 상호작용했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정치외교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의 개설서로 사용하기에 적절할 정도로 정리가 잘 돼 있고 2차대전과 그 이후 미국이 수행한 중요한 군사작전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도 기본적인 지식을 제공해 줍니다. 그럭저럭 합격점을 줄 만한 수준입니다.

그러나 1차 사료의 인용이 제한적이라는 점은 매우 불만입니다. 특히 상당수의 1차 사료가 이용 가능한 70년 이전의 행정부들에 대해서도 신문, 회고록 수준에서 자료 접근이 끝나고 있는데 이 점은 아쉽습니다. 이런 문제점은 비교적 당대의 문제, 특히 레이건 이후 행정부들에 대한 분석에서 두드러지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 언론에 공개된 내용이기 때문에 자료적인 측면에서는 이렇다 할 장점이 없습니다. 자료의 제약 때문에 뭔가 허전하다는 느낌이 많이 듭니다.

저자는 카터와 클린턴 시기의 민군관계에 대해서 좋지 않은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뭐, 사실 이 두 대통령이 군대와 많이 충돌했고 특히 후자는 예산을 무기로 군대를 압박하는 만행(?)을 별 생각없이(?) 저지르기도 했지요.

개설서로는 훌륭하지만 추후 이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려는 사람에게는 부족한 점이 많을 듯 합니다. 그래도 상당히 흥미로운 책이고 저자의 접근 방식도 좋다고 생각됩니다.

2006년 12월 18일 월요일

만약 독립운동가들이 아편 밀매를 했다면...

안창호 선생의 1920년 1월 30일자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옥관빈(玉觀彬)군이 내방하여 왈 미국에 아편을 밀매할 방책을 언(言)하며 동의를 요(要)함에 절대불가라고 왈(曰) 여(余)의 주장하는 도덕은 주색잡기 등(等)보다 인류의 해독을 주는 허기적(許欺的) 행위를 대죄악으로 봄으로 하허(何許)한 점으로든지 차등사(此等事)를 철저(徹底)하게 행(行)치 않을 터이오, 또 군(君)에게도 차(此)를 권하노라고 하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궁색한 경제적 현실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아닌가 합니다. 그나마 안창호와 같이 최소한의 도덕적 기준을 지키려 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다행입니다.

만약 저때 옥관빈의 제안을 받아 들여 아편밀매를 했다면 임시정부를 계승했다고 자처하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매우 난감했을겁니다. 아마도 싸구려 마약을 팔아먹는 북조선과 50보 100보인 상황이 됐을지도 모르겠군요.

2006년 12월 11일 월요일

J. Nagl 중령의 이라크군 육성에 대한 견해

이라크전의 이라크화에 대한 sonnet님의 글을 읽으니 J. Nagl 중령이 2005년에 Learning to Eat Soup with a Knife 개정판에 썼던 이라크군 육성의 필요성에 대한 글이 생각나는군요. 사실 누구나 알 법한(?) 뻔한 내용으로 가득차 있지만 실전과 이론을 겸비한 군인의 견해는 어떤지 한번 읽어 보시는 것도 딱히 해로울 것 같지는 않습니다.

참고로 J. Nagl 중령은 2003년 9월부터 2004년 9월까지 이라크에서 근무했습니다. 무려 2년이나 지났군요.

내가 이 책을 쓰기 시작했을 때는 비정규전을 목적으로 훈련받은 부대를 동시에 정규전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도 갖추도록 훈련시키는 문제를 과소 평가하고 있었다. 또 현지인으로 부대를 편성, 훈련, 무장시켜 비정규전에서 승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도 과소 평가했다. 비정규전 상황에서 적은 현지 군과 경찰 뿐 아니라 그들의 가족도 공격 목표로 삼기 때문에 신뢰할 수 있고 임무에 헌신적인 현지 전력을 육성하는 것은 말 그대로“나이프로 스프를 먹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현지인 부대는 비정규전에서 외부 세력이 결코 가질 수 없는 타고난 장점을 가지고 있다. 현지 전력은 대중의 지원을 통해 정보를 획득할 수 있는데 이런 지지는 해당 국가의 군대가 아니면 얻기 어려운 것이다. 또 정찰 임무에 따로 통역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리고 부족내의 충성, 가족간의 유대관계에 대해서도 잘 이해하는데 이런 요소들은 대부분의 개발도상국의 정치, 경제적 문제에 영향을 미친다. 또한 외부 세력은 알지 못하는 현지의 관습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이런 장점들은 현지인 부대를 비정규전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로 만들어 주고 있다. 아마도, 약간 과장해서 설명하면 외부의 세력은 결코 비정규전에서 승리할 수 없다. 외부 세력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은 현지인 부대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정도 일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외부의 세력이 현지의 세력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것도 많이 있다. 서방의 군대는 통신 수단과 훈련 프로그램, 포병 화력 및 근접항공지원, 의무 지원, 그리고 신속대응전력이다. 이 중에서 신속대응전력은 현지 전력에게 신뢰감을 불어주고 사기를 높여주고 전투력을 향상시킨다. 특히 고문단이 함께 있을 경우 효과가 더 크다.

게릴라들이 현지인 부대를 공격하는 점을 보면 현지 전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다. 34기갑연대 1대대 TF는 칼리디야(Khalidiyah)에 주둔하는 동안 이라크 경찰과 이라크 군 2개 대대를 열심히 지원했다. 이라크인들은 미군의 지도와 물자, 재정 지원 수준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을 필요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라크 군을 모병, 편성, 훈련, 무장 시키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이라크군과 합동작전을 펼치고 위험을 공동으로 부담해 나가면서 서로간에 일정한 신뢰가 형성 됐으며 일부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수준이 되긴 했지만 대대의 주둔 기한이 지나 후속 부대인 506연대 1대대 TF와 교대할 때 까지도 지역 치안을 확보할 수 있을 정도의 전력을 육성하지 못 했다. 현지인 부대를 편성, 훈련, 무장 시키는 과정은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지만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영국은 미국이 베트남에 참전하기 이전 말라야에서 성공을 거둔 바 있으며 베트남의 미군도 최소한 1군단 지구에서는 해병대가 Combined Action Platoon Program을 실시해 성과를 거뒀다. 이라크의 미군이 이라크를 대내외적인 위협에서 방어하기 위해서 이라크 군을 육성하는데 노력을 기울이는 현 시점에서 말라야의 영국군과 베트남의 미 해병대의 사례는 유용한 교훈이 될 수 있다. 이라크군을 육성하는 것은 현재 이라크에서 승리를 거두는데 핵심적인 요소가 될 것이다. 이라크인에 의한, 이라크인의 승리 말이다.


대략 1년 전 쯤 이런 이야기를 했지만 아직까지도 특출난 성과가 없는걸 보면 역시 "괴뢰군(?)"을 육성하는 것은 어려운 과업인 것 같습니다.

아. 그리고 Combined Action Platoon은 우리말로 어떻게 옮기는 것이 알려 주실 분 계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