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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6월 2일 목요일

美風良俗

대한민국은 동방예의지국이라지요.

전두환 정권시절 주한미국대사를 지낸 리처드 워커는 대한민국의 미풍양속에 꽤 감명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물론 대통령직에 대한 존경이 도를 지나쳐 표출될 때도 있었다.

청와대의 대형 커피 테이블에서 열리는 공식 회의석상에서 전씨가 담배를 꺼낼라치면 각료와 청와대 참모들이 서로 먼저 라이터로 전씨에게 먼저 불을 붙여 주기 위해 올림픽식의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한번은 팀스피리트 훈련 기간 중 군용 텐트에서 김윤호(金潤鎬) 당시 한국군 합참의장이 전씨에게 브리핑하는 자리에서 있었던 일도 기억에 새롭다. 나는 김 의장을 ‘학자 장군’이라 부르곤 했다. 전씨의 자리는 우리가 앉아 있던 테이블보다 30cm 정도 높은 연단에 마치 옥좌와 비슷하게 마련돼 있었다. 이를 본 당시 주한 미군 사령관인 존 위컴 장군은 나를 쳐다보면서 믿어지지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같은 자리 배열은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청와대와 한국군 의전 참모들의 강력한 요구에 따른 것 이었다.

리처드 워커 지음/이종수ㆍ황유석 옮김, 『한국의 추억 : 워커 전 주한 미국대사 회고록』(한국문원, 1998), 31~32쪽

저도 이 부분을 읽고 꽤 감명을 받았습니다. 아무래도 저는 서구화(?)되어 전래의 미풍양속을 망각한 것 같습니다.

2009년 8월 14일 금요일

씁슬함

전두환前대통령, DJ 병상찾아 쾌유기원

씁슬한 기사로군요. 기사의 일부만 발췌해 봅니다.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 때 전직 (대통령) 들이 제일 행복했다"며 "김 전 대통령 재임기간 10년 가까이 초대받아 세상 돌아가는 상황도 상당히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고 도움도 많이 받았다"고 치켜세웠다.

예. 전두환은 역사의 승리자는 될 수 없겠지만 인생에서는 승리를 거둔것 같습니다.

우울하군요.

2008년 8월 30일 토요일

후야오방의 북한에 대한 평가

『정치가는 역사의 법정에 선 피고』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나카소네 대담록을 읽는 중인데 북한에 대한 재미있는 언급이 하나 있더군요. 나카소네가 1984년 중국을 방문해 후야오방(胡耀邦, 호요방)을 만났을 때 후야오방이 했던 이야기라는데 그 부분을 발췌해 봅니다.

사토 : 이야기가 약간 뒤로 돌아갑니다만, 1984년 3월에 중국에 가셨지요?

나카소네 : 네. 최초의 공식방문이었지요. 그때까지는 호요방 씨가 아직 건재하였으므로 대환영을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북경대학에서 강연까지 했고 그것이 중국 전체에 TV로 방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강연이 끝난 다음 학생들이 이것저것 의견을 듣고 싶다기에 30명 정도 학생들과 간담을 했는데 일문일답하는 내용이 방영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학생들이, 야스쿠니신사참배 반대 전단도 뿌리고 데모도 하면서 나카소네 반대운동을 했어요.(웃음)

사토 : 중국에서 북한 문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셨지요?

나카소네 : 그때까지 남북한간의 화합에 대해서는 “결국 중국과 소련, 미국과 일본이 지켜보는 가운데 남과 북이 대화를 하게 하는 방법 밖에 없다. 그러나 그에 앞서서 한국전쟁의 교전국들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좋겠다. 그러니 남북한과 미국, 중국의 4자회담을 하라.”고 권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북한은 “한국은 제외시키고 3자회담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을 고집하고 있었던 것 입니다. 그러니 호요방 씨에게 “그런 불합리한 억지주장은 있을 수 없지 않은가. 중국이 4자회담에 응하도록 설득시켜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왜냐하면 전두환 씨로부터 “당신은 미국과 친하고 중국과도 사이가 좋으니 한국과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알선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있었으므로 그런 이야기를 건냈던 것 입니다. 그랬더니 – 이것은 솔직한 대답이었다고 생각되는데 – 호요방 씨가 “북한은 심리적으로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나라여서 중국도 다루기 힘들다. 그러한 북한에 대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만한 입장이 못 된다.”는 말을 했습니다. 마치 위험한 폭발물을 다루듯 조심스러운 느낌이 그 당시부터 있었어요. 아마 북한은 현재 미국에 대해서 포커게임을 하고 있듯이 중국과도 그런 게임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사토 : 알만합니다.

나카소네 : 그러므로 중국으로서도 북한문제는 귀찮고 다루기 힘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소련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패권주의에 반대하는…

나카소네 야스히로, 이토 다카시, 사토 세이사부로, 성완종 번역,『정치가는 역사의 법정에 선 피고』, 한송, 1998, 384~385쪽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북한은 확실히 ‘자율성’이 강한 국가입니다. 사실 자폐적이라고부르는 것이 보다 적절할 것 같긴 합니다만…. 소련으로부터 복구원조를 받아먹던 50년대 중반에도 소련의 통제가 제대로 먹히지 않았고 천리마운동 이후로는 그야말로 독자노선을 걷기 시작했지요. 지루한 핵 협상과정을 통해 잘 나타났듯 북한에 대한 중국과 러시아의 영향력은 제한적이었습니다. 그러니 80년대 초반에는 인용한 글에서 후야오방이 밝혔듯 중국이나 소련의 말이 더욱 더 먹히지 않았을 것 입니다.
북한의 자율성(또는 자폐증)은 북한을 상대하는데 있어서 아주 골치 아픈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 처럼 북한과 그럭 저럭 말이 통하는 국가가 필요한 것이겠지요. 북한에 대한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이 높아졌으니 정치적 영향력도 어느 정도는 높아지지 않았을까 싶은데 또 50년대의 경우를 보면 그렇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솔직히 잘 모르겠군요.;;;; 물론 미국이나 일본보다는 중국이 미치는 영향력이 크겠지만 어떤 때는 북한 문제에서 중국의 역할이 종이전화기에 달린 실 밖에 안되는 것 처럼 보이니 말입니다.

2008년 4월 1일 화요일

Nation Building in South Korea : Koreans, Americans, and the Making of a Demcracy - Gregg Brazinsky

서기장 동지께서 이라크 전쟁과 베트남 전쟁의 공통점을 비교한 글을 써 주셔서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제 아무리 천하의 미국이라도 할 수 없는 일은 언제나 있는 법 이지요.

미국은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끌면서 새로운 세계질서를 만들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자신이 만든 세계를 완벽하게 통제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번의 이라크 전쟁은 2차대전 이후 미국이 겪은 수 많은 실패 사례 중 하나로 끝날 것 입니다. 결국 상황이 이 지경에 되고 나니 많은 미국인들은 과거에 대해 좀 더 진지한 접근을 하게 되었습니다. 2차대전 이후 미국이 시도한 수많은 국가 건설 시도 중에서 성공한 사례는 과연 몇 건이나 있는가? 맙소사! 미국이 성공한 사례는 ‘정말로’ 한 손으로 꼽을 정도에 불과하지 않은가! 결국 미국인들은 진지하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미국이 그토록 많은 지원을 했건만 왜 이리 성적표는 시원치 않은 것인가?

저자가 말하고 싶은 바를 그대로 드러내 주는 표지

브래진스키(Gregg Brazinsky)의 Nation Building in South Korea라는 책은 이 물음에 답을 구하기 위해 미국이 사실상 ‘유일하게’ 성공을 거둔 한국의 사례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브래진스키는 미국이 2차 대전 이후 수많은 나라들에게 풍요로운 경제와 민주주의를 이식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퍼부었건만 왜 이렇게 쪽박만 줄줄이 차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물음을 던지고 있습니다. 미국이 이식하고자 하는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도데체 뭐가 문제인 것인가? 브래진스키는 미국은 후진국들에게 바람직한 발전의 방향을 제시할 수는 있지만 결국 그 방향으로 갈 것인가는 각 국가들의 선택이며 미국이 실패하는 이유는 이 점을 간과하고 무조건 미국의 방식을 들이밀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브래진스키는 한국이 성공을 거둔 원인으로 한국의 내재적인 요인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즉 한국은 미국이 실패한 다른 나라들과 배경부터 달랐다는 것 입니다.

브래진스키는 먼저 한국이 유럽 국가가 아닌 일본에 의해 식민지배를 받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즉 백인이 아니라 같은 아시아인에 의해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미국이 한반도에 들어왔을 때 일본 같은 제국주의자로 본 것이 아니라 ‘해방자’로 보았고 그 때문에 미국이 큰 부담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는 것 입니다. 베트남과 중동은 백인에 의해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미국도 크게 다르지 않게 보였다는 것이지요. 반면 한국은 미국의 헤게모니가 한국의 전통적 가치를 파괴하지 않을 것으로 인식했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지적합니다.
다음으로는 적절한(?) 독재를 꼽고 있습니다. 즉 이승만은 폭압적이었고 지지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이 너무 컸지만 1948년의 시점에서 땜빵으로 써먹기에는 그럭 저럭 적절한 선택이었고 박정희도 결국 지독한 독재자가 되지만 1960년의 과도기에 미국이 지지했던 온건한 장면 보다 나았다고 보고 있습니다. 특히 브래진스키는 장면 정부가 미국이 기대하는 수준의 경제적 성공을 거둘 수 있었는가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브래진스키는 박정희가 미국식의 완전한 자유시장 노선을 취하지 않고 국가가 통제하는 경제 정책을 펼친 것에 대해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한국의 특수성이 부각됩니다. 즉 식민지 시기에 일본식으로 교육받은 엘리트 집단이 존재했던 것을 한국의 성공 요인 중 하나로 꼽는 것입니다. 브래진스키는 일본식의 권위주의적 교육을 받은 남한의 군사 엘리트들이 미국이 이식하고자 한 것들을 한국(+일본)식으로 한국 실정에 맞게 소화해서 받아들인 것이 성공의 열쇠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저자는 박정희 체제까지는 미국의 지지가 긍정적 영향을 끼쳤지만 박정희 암살 이후의 위기 상황에서 전두환을 지지한 것은 ‘치명적인 실수’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미 박정희 정권에서 경제적 성공을 거둔 상황에서 권위주의적 독재는 효용을 다한 상태였고 전두환을 지지 함으로서 미국의 위신을 실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어쨌건 브래진스키는 전두환을 제외한 독재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대한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점은 한국에서 불편하게 받아들여지겠지요.

다음으로 저자는 한국이 경제 성장 이후 민주화에 성공한 요인은 무엇인가에 주목합니다. 후진국이 민주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중산층이 필요하지만 안정적인 중산층이 절대적 요소는 아닙니다. 브래진스키는 이 점에 대해 싱가포르는 안정적인 중산층을 갖췄지만 정치적인 면에서 후진적이라는 점을 지적 합니다. 그렇다면 한국을 민주화 시킨 동력은 무엇인가? 브래진스키는 민주화에 있어서도 한국의 내재적인 요소가 결정적이었다고 봅니다. 물론 여기서도 미국의 역할을 무시하지는 않습니다. 저자는 미국이 해방 이후 지속적으로 한국의 교육과 사회발전에 투자한 점을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교육에 대한 원조를 통해 한국의 지식인, 정치인들이 미국이 중요시하는 가치, 자유민주주의를 수용하는데 도움을 줬다는 것 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미국의 역할을 인정하면서도 한국인들의 민주화에 대한 갈망이 결정적인 요인이었음은 부인하지 않습니다. 저자는 설사 미국의 교육에 대한 지원이 없었더라도 한국의 청년과 지식인들은 유신 독재에 저항하는 길을 택했을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브래진스키는 경제발전과 민주화에서 한국의 내재적 요소가 기여한 바를 높게 평가하고 미국이 여기서 제 3세계의 국가건설에 대한 교훈을 얻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저자는 미국이 후진국의 국가건설을 지원할 때 미국의 방식을 일방적으로 들이밀 것이 아니라 해당 국가의 선택을 존중하는 것이 더 나은 성과를 거둘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유감스럽게도 이라크의 경우는 이러기에는 너무 늦었으니 다음 국가를 찾아 봐야 될 것 같습니다.

2007년 5월 19일 토요일

각하의 찬란한 존안 - (2)

어제 명동에 나갔다가 입수했습니다.


각하의 전 재산 290,000원의 600분의 1을 넘는 500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입수한 각하의 찬란한 존안입니다. 그러나 무려 레이건 선황폐하까지 덤으로 영접하는 영광을 안았으니 어찌 500원이 아깝다 하겠습니까.

이 어린양 앞으로도 각하를 받들어 모시는데 소홀함이 없을 것을 맹세합니다. 크하하핳

각하의 찬란한 존안
전략우표 비축계획 - sonnet

2007년 3월 25일 일요일

[海東高僧傳] 卷一 日海居士 全斗換

海東高僧傳 卷一 日海居士 全斗換

해동고승전 권1 일해거사 전두환

일해거사 전두환은 본시 한국의 국왕이었다. 왕위에서 물러난 뒤 출가하여 2년 만에 득도하였다.

전두환은 합천 사람으로 후버3년 1월 18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한가지를 가르치면 몰라도 될 것 까지 깨치니 모두가 범상한 아이가 아니라고 하였다. 전두환은 아이젠하워 3년에 군관이 되었는데 이때 이미 흉중에 큰 뜻을 품고 있었으나 그 뜻을 펼칠 도리가 없었다.

케네디 원년 5월 16일 장군 박정희가 반정을 일으켜 전횡을 일삼던 문하시중 장면을 잡아들이고 사직을 반석에 세웠다. 전두환이 이 소식을 듣고 무과에 합격한 장사들을 모아 박정희를 찾았다.

“소장 비록 무반의 말석에 불과하나 장군께서 이렇게 의로운 군사를 일으키셨으니 어찌 가만히 앉아 보고 있겠사옵니까?”

박정희가 감격하여 전두환을 비장으로 삼았다. 케네디 황제가 박정희를 한국 국왕에 봉한 뒤 전두환은 박정희의 총애를 받아 여러 요직을 거치다가 마침내 닉슨 5년에는 장군의 반열에 올랐다.

카터3년 10월 26일, 상장군 김재규가 자객을 이끌고 국왕 박정희를 시해하였다. 이때 견룡대정 차지철은 삼십육계를 하려다 목숨을 잃었다.

황제가 문하시중 최규하를 한국 국왕에 봉했으나 최규하는 글만 아는 선비인지라 용맹과 위엄이 없어 백성들이 심히 불안하게 생각하였다. 이때 북쪽의 홍건적들이 준동할 기미를 보이니 민심이 더욱 더 흉흉하였다. 국왕 최규하가 도원수 정승화에게 군율로서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으라 하였으나 정승화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전두환이 나라의 형세가 바람 앞의 등불과 같다 여기고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국왕 최규하를 알현하였다. 최규하는 평소 스스로 국왕 될 재목이 아님을 알고 양위 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전두환을 만나 그의 뜻을 들으니 크게 기뻐하며 양위 할 뜻을 비추었다. 전두환이 황공해 하며 거듭 사양하였으나 수천명의 선비들이 모여 왕위에 오를 것을 간청하니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전두환은 본시 덕이 많아 그를 따르는 무리가 많았다. 국왕이 된 뒤 옛 일을 잊지 않고 따르던 무리들에게 관직과 재물을 후하게 내리니 많은 이들이 과연 전두환은 신의를 지킨다며 감탄하였다.
전두환이 국왕에 오르자 북괴의 김일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자객을 보냈으나 실패하였다. 김일성은 혹여 전두환이 군사를 일으킬까 두려워 조공으로 쌀과 시멘트를 바쳤다. 한국의 여러 국왕 중 북괴로부터 조공을 받은 것은 전두환이 처음이었다. 이로서 전두환의 명성이 더욱 높아지니 레이건 황제도 크게 기뻐하며 전두환에게 “平北傀保國大將軍韓國國王”의 작위를 내렸다.

레이건 8년, 전두환이 노태우에게 양위를 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전두환은 본시 불심이 깊어 항상 출가할 뜻을 품고 있었는데 마침내 왕위에서 물러 난 뒤 출가할 마음을 굳혔다. 전두환이 출가할 것을 결심하니 그의 처 이씨가 따르기를 간청하였다. 전두환이 대비 이씨와 함께 출가하여 백담사로 가니 많은 이들이 놀랐다. 전두환이 출가하니 본시 머리 숱이 거의 없어 따로 삭발할 필요가 없었다.

조지 부시 2년 12월, 마침내 전두환이 도를 얻었다. 사람들은 석가모니도 득도하는데 7년이 걸렸는데 전두환은 2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하여 크게 놀랐다. 이때부터 전두환은 여러 신이(神異)한 일을 행하였다.

노태우의 뒤를 이어 국왕이 된 김영삼은 야소교도로 불도를 탄압하였다. 마침내 상황 전두환과 노태우도 불교를 숭상한다 하여 잡아들였다. 이때 전두환은 감옥에서 일절 음식을 먹지 않고 참선하였는데 그 기운이 범상치 않으니 옥리들이 함부로 대하지 못 하였다.

클린턴 5년, 한국에 큰 환란이 닥치니 많은 이들이 이것은 김영삼이 불도를 탄압한 때문이라 하였다. 클린턴 황제가 김대중을 국왕에 봉했다.

김대중은 국왕이 되어 다시 전두환과 노태우를 상왕으로 복위시켰다.

이때 전두환은 김영삼이 모든 재물을 빼앗아 전 재산이라고는 29만원 밖에 없었다. 전두환은 덕망이 높아 왕위에서 물러난 뒤에도 많은 이들이 흠모하여 찿아왔다. 하루는 대비 이씨가 근심어린 표정으로 말하였다.

“찿아오는 객은 많은데 지금 있는 돈이라고는 29만원 뿐이라 세뱃돈이 부족하니 이를 어찌 하면 좋겠사옵니까?”

전두환이 만면에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답하였다.

“걱정하지 마시오. 객이 오는대로 세뱃돈을 듬뿍 주어 보내도록 하오.”

대비 이씨가 반신 반의하며 손님이 오는 대로 출금하여 세뱃돈을 주었는데 통장에는 여전히 29만원이 남아 있었다. 이 소식이 알려지니 더욱 더 전두환의 이름이 높아졌다.

[海東高僧傳] 卷一 日海居士 全斗換

海東高僧傳 卷一 日海居士 全斗換

해동고승전 권1 일해거사 전두환

일해거사 전두환은 본시 한국의 국왕이었다. 왕위에서 물러난 뒤 출가하여 2년 만에 득도하였다.

전두환은 합천 사람으로 후버3년 1월 18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한가지를 가르치면 몰라도 될 것 까지 깨치니 모두가 범상한 아이가 아니라고 하였다. 전두환은 아이젠하워 3년에 군관이 되었는데 이때 이미 흉중에 큰 뜻을 품고 있었으나 그 뜻을 펼칠 도리가 없었다.

케네디 원년 5월 16일 장군 박정희가 반정을 일으켜 전횡을 일삼던 문하시중 장면을 잡아들이고 사직을 반석에 세웠다. 전두환이 이 소식을 듣고 무과에 합격한 장사들을 모아 박정희를 찾았다.

“소장 비록 무반의 말석에 불과하나 장군께서 이렇게 의로운 군사를 일으키셨으니 어찌 가만히 앉아 보고 있겠사옵니까?”

박정희가 감격하여 전두환을 비장으로 삼았다. 케네디 황제가 박정희를 한국 국왕에 봉한 뒤 전두환은 박정희의 총애를 받아 여러 요직을 거치다가 마침내 닉슨 5년에는 장군의 반열에 올랐다.

카터3년 10월 26일, 상장군 김재규가 자객을 이끌고 국왕 박정희를 시해하였다. 이때 견룡대정 차지철은 삼십육계를 하려다 목숨을 잃었다.

황제가 문하시중 최규하를 한국 국왕에 봉했으나 최규하는 글만 아는 선비인지라 용맹과 위엄이 없어 백성들이 심히 불안하게 생각하였다. 이때 북쪽의 홍건적들이 준동할 기미를 보이니 민심이 더욱 더 흉흉하였다. 국왕 최규하가 도원수 정승화에게 군율로서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으라 하였으나 정승화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전두환이 나라의 형세가 바람 앞의 등불과 같다 여기고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국왕 최규하를 알현하였다. 최규하는 평소 스스로 국왕 될 재목이 아님을 알고 양위 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전두환을 만나 그의 뜻을 들으니 크게 기뻐하며 양위 할 뜻을 비추었다. 전두환이 황공해 하며 거듭 사양하였으나 수천명의 선비들이 모여 왕위에 오를 것을 간청하니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전두환은 본시 덕이 많아 그를 따르는 무리가 많았다. 국왕이 된 뒤 옛 일을 잊지 않고 따르던 무리들에게 관직과 재물을 후하게 내리니 많은 이들이 과연 전두환은 신의를 지킨다며 감탄하였다.
전두환이 국왕에 오르자 북괴의 김일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자객을 보냈으나 실패하였다. 김일성은 혹여 전두환이 군사를 일으킬까 두려워 조공으로 쌀과 시멘트를 바쳤다. 한국의 여러 국왕 중 북괴로부터 조공을 받은 것은 전두환이 처음이었다. 이로서 전두환의 명성이 더욱 높아지니 레이건 황제도 크게 기뻐하며 전두환에게 “平北傀保國大將軍韓國國王”의 작위를 내렸다.

레이건 8년, 전두환이 노태우에게 양위를 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전두환은 본시 불심이 깊어 항상 출가할 뜻을 품고 있었는데 마침내 왕위에서 물러 난 뒤 출가할 마음을 굳혔다. 전두환이 출가할 것을 결심하니 그의 처 이씨가 따르기를 간청하였다. 전두환이 대비 이씨와 함께 출가하여 백담사로 가니 많은 이들이 놀랐다. 전두환이 출가하니 본시 머리 숱이 거의 없어 따로 삭발할 필요가 없었다.

조지 부시 2년 12월, 마침내 전두환이 도를 얻었다. 사람들은 석가모니도 득도하는데 7년이 걸렸는데 전두환은 2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하여 크게 놀랐다. 이때부터 전두환은 여러 신이(神異)한 일을 행하였다.

노태우의 뒤를 이어 국왕이 된 김영삼은 야소교도로 불도를 탄압하였다. 마침내 상황 전두환과 노태우도 불교를 숭상한다 하여 잡아들였다. 이때 전두환은 감옥에서 일절 음식을 먹지 않고 참선하였는데 그 기운이 범상치 않으니 옥리들이 함부로 대하지 못 하였다.

클린턴 5년, 한국에 큰 환란이 닥치니 많은 이들이 이것은 김영삼이 불도를 탄압한 때문이라 하였다. 클린턴 황제가 김대중을 국왕에 봉했다.

김대중은 국왕이 되어 다시 전두환과 노태우를 상왕으로 복위시켰다.

이때 전두환은 김영삼이 모든 재물을 빼앗아 전 재산이라고는 29만원 밖에 없었다. 전두환은 덕망이 높아 왕위에서 물러난 뒤에도 많은 이들이 흠모하여 찿아왔다. 하루는 대비 이씨가 근심어린 표정으로 말하였다.

“찿아오는 객은 많은데 지금 있는 돈이라고는 29만원 뿐이라 세뱃돈이 부족하니 이를 어찌 하면 좋겠사옵니까?”

전두환이 만면에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답하였다.

“걱정하지 마시오. 객이 오는대로 세뱃돈을 듬뿍 주어 보내도록 하오.”

대비 이씨가 반신 반의하며 손님이 오는 대로 출금하여 세뱃돈을 주었는데 통장에는 여전히 29만원이 남아 있었다. 이 소식이 알려지니 더욱 더 전두환의 이름이 높아졌다.

2007년 2월 3일 토요일

각하의 말씀

일 때문에 대구에 내려갔다가 남산동에 있는 책방골목에 들렀습니다. 그곳에 있는 월계서점에서 다음의 물건을 입수했습니다.

바로.

두둥!




각하의 말씀!




각하의 친필 서명!


아아아! 이 어린양. 10년은 더 싸울수 있습니다!

2006년 10월 8일 일요일

각하의 찬란한 존안

인터넷의 좌경화가 극에 달한 와중에도 여전히 넷에는 수많은 우국지사들이 활동하고 있다. 몇 개월전 에는 sonnet님이 각하의 존안을 담은 우표를 수집하여 소장하고 계신다하여 많은 우국지사들의 마음에 훈훈한 감동을 전한바 있다.

그리하여 이 어린양도 우국지사들의 활동에 감명받아 각하를 받들어 모시는데 힘을 쏟기로 하였다.

자. 그래서 얼마전 입수한 물건 하나를 공개하고자 한다.

문제의 물건은 바로 이것!



바로 지난날 각하께서 평화통일정책자문위원들에게 하사하신 물건이다.



그러나 아직 감동의 눈물을 흘리기엔 이르다.

뒷면을 보라!



각하의 존안이 메달의 재질과 맞물려 찬란한 빛을 더하고 있다.

아아.... 각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