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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4월 10일 수요일

김일성은 1971년의 대선을 어떻게 봤는가?

2010년에 나온 윌슨 센터의 North Korea International Documentation Project Working Paper 2호를 읽었습니다. 이글이 막 발표됐을 때 아는 분이 흥미로운 글이니 한번 읽어보란 말을 하셨는데 한참을 잊어버리고 있다가 뒤늦게 읽게 되는군요. 이 논문에서는 1971년 6월 10일에 있었던 김일성과 차우세스쿠의 회담 녹취록을 인용하고 있어서 함께 읽어 봤습니다. 전반적으로 김일성의 자기 중심적인 세계관이 드러나는 재미있는 내용이더군요. 슬슬 경제 성장의 동력도 떨어져 가고 경제개발 계획도 꼬여가고 있는 상황인데 차우세스쿠 앞에서 엄청난 자신감을 보여줍니다. 사실 김일성은 1980년대 까지도 한국의 경제성장을 역전할 수 있다는 허세를 부리고 있을 정도로 상황 판단력에 문제가 있었으니 그러려니 하겠습니다.


1971년 대선에 대한 김일성의 평가가 재미있어서 조금 인용해 봅니다.


(전략)


박정희는 헌법을 고쳐서 대통령 선거에 세번째로 출마하려 했습니다. 이 상황에서 야당들은 선거를 보이콧 했고 박정희는 단독으로 선거를 진행하려 했습니다. 박정희는 헌법을 개정하려 하면서도 언제든지 자신의 입장을 철회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 선거에서 그게 아니라는게 드러났습니다. 야당들은 힘을 합쳐서 진보적이고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민주전선을 조직했습니다.


학생들도 자체적으로 조직화했고 모든 대중단체도 그렇게 했습니다. 이렇게 박정희를 제거하고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한 통일 전선이 구축된 것 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김대중이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었습니다. 김대중은 훌륭한 공약을 몇개 내걸었는데 통일에 관한 부분은 우리의 입장과도 비슷합니다. 김대중은 대통령이 된다면 이 지역의 모든 분쟁을 해소할 것이며 이북과의 통일을 지지할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다음으로는 경찰과 중앙정보부를 개혁하고, 군대를 감축하는 한편 문민정부를 세울 것이며, 외국 자본의 침투를 줄이는 한편 민족자본을 보호 육성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대외정책과 관련해서는 미국 및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는 한편 중화인민공화국 및 소련과도 외교관계를 가질 것이라 하였습니다. 김대중은 남조선의 모든 대중단체 및 사회단체에 광범위한 민주적 가능성을 제시했습니다. 김대중의 공약에서 빠진 것이 한가지 있다면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는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의 공약은 남조선의 민중들을 움직였습니다. 심지어 박정희는 지난 선거에서 패배할 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졌습니다.


이러한 선거 분위기에서 김대중은 서울시에서 전체 득표의 80%를 차지했습니다. 김대중은 시골에서도 많은 표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박정희가 당선 가능성에 위협을 느끼고 경찰과 군대를 동원하는 한편 선거를 조작해 120만표 차로 승리를 했습니다.


대선이 끝난 뒤에는 총선이 열렸습니다. 총선에서도 선거전은 매우 치열했습니다. 박정희는 총선에서도 승리할 수 없을 것으로 보였지만 또다시 부정선거를 자행했습니다. 총선에서 박정희 측은 113석을 확보했고 민주진영은 89석을 확보했습니다.


이 때문에 남조선에서는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 더욱 더 강해졌습니다. 거의 2개월에 걸쳐 수많은 학생과 청년들이 치열한 투쟁에 가세하여 거리로 쏟아져 나와 시위를 했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 한 것에서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겠습니까? 만약 미국이 남조선에 계속 주둔한다면 선거를 통한 승리는 불가능합니다. 이 때문에 통일 문제는 미군 문제와 연동되어 있는 것 입니다. 결론을 내리자면 남조선에서 미국이나 다른 나라의 군대가 사라진다면 남조선 인민들은 주체적으로 민주적이고 진보적인 정권을 세울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리고 민주적이고 진보적인 정부가 들어선다면 북남간의 관계가 가까워 질 것이고 전쟁을 하지 않고도 조국을 통일할 수 있을 것 입니다. 우리는 통일을 원하지 않는게 아닙니다. 우리는 미국이 물러가고 일본이 미국을 대신하지 않을 경우에 통일이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사실 일본은 남조선에 대한 경제적 투자 같은 방식으로 침투해 들어오고 있습니다. 사토(佐藤榮作)는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을 가장 반기는 사람일 것 입니다. 박정희는 식민지 시기 일본군의 간부였습니다. 이 때문에 사토는 박정희를 높게 평가합니다. 사토는 7월 1일에 있을 박정희의 취임식에 참석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사토가 참석한다는 사실이 공표되자 서울 대학교와 다른 고등교육기관은 물론 국회에서도 이를 성토하는 선언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남조선의 정세는 이렇습니다. 동지께서는 최근 최고인민회의에서 남조선의 혁명적인 활동을 지원하는 문제와 통일에 대한 선언이 채택된 것을 알고 계실 겁니다. 박정희만 몰아낸다면 우리는 통일을 원하는 모든 세력과 통일 문제를 논의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정세는 이렇습니다. 남조선의 정세 변화는 민주적인 세력의 투쟁과 남조선 인민의 투쟁에 달려있습니다.


해당 인용문을 모두 읽으면 느끼시겠지만 뭐랄까요. 모든 상황을 자신이 유리한대로 해석하려는 김일성의 사고방식은 참 대단합니다. 이런 인간이 지도자로 수십년을 통치했으니 북한이란 국가가 제대로 될 수 있었겠습니까.

2011년 6월 2일 목요일

美風良俗

대한민국은 동방예의지국이라지요.

전두환 정권시절 주한미국대사를 지낸 리처드 워커는 대한민국의 미풍양속에 꽤 감명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물론 대통령직에 대한 존경이 도를 지나쳐 표출될 때도 있었다.

청와대의 대형 커피 테이블에서 열리는 공식 회의석상에서 전씨가 담배를 꺼낼라치면 각료와 청와대 참모들이 서로 먼저 라이터로 전씨에게 먼저 불을 붙여 주기 위해 올림픽식의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한번은 팀스피리트 훈련 기간 중 군용 텐트에서 김윤호(金潤鎬) 당시 한국군 합참의장이 전씨에게 브리핑하는 자리에서 있었던 일도 기억에 새롭다. 나는 김 의장을 ‘학자 장군’이라 부르곤 했다. 전씨의 자리는 우리가 앉아 있던 테이블보다 30cm 정도 높은 연단에 마치 옥좌와 비슷하게 마련돼 있었다. 이를 본 당시 주한 미군 사령관인 존 위컴 장군은 나를 쳐다보면서 믿어지지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같은 자리 배열은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청와대와 한국군 의전 참모들의 강력한 요구에 따른 것 이었다.

리처드 워커 지음/이종수ㆍ황유석 옮김, 『한국의 추억 : 워커 전 주한 미국대사 회고록』(한국문원, 1998), 31~32쪽

저도 이 부분을 읽고 꽤 감명을 받았습니다. 아무래도 저는 서구화(?)되어 전래의 미풍양속을 망각한 것 같습니다.

2011년 5월 28일 토요일

이승만의 협상술에 대한 논평 하나

이승만은 매우 머리가 잘 돌아가는 정치인이었습니다. 이런 점은 특히 외교적인 협상에서 잘 나타나는데 항상 성공하진 못했어도 복잡한 화술로 상대방을 혼란시키는데 탁월한 재주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주한미국대사였던 무초가 트루먼 기념도서관에서 실시한 구술채록에서 이승만과 미육군부장관 로얄과의 회담에 대해 회고한 내용은 이점에서 꽤 재미있습니다.

헤스(Jerry N. Hess) : 국무부의 관료로서, 선생님이 생각하시기에 (미군정에서 대한민국 정부로의) 권력이행기에 취했어야 하는 조치들에 대해 이견을 보인 미군 지휘관들이나 국방부 관료들과 특별한 문제는 없으셨습니까?

무초 : 예. 그렇게 많지는 않았습니다. 괜찮은 사례라면 1948년 말에 있었던 육군부 장관과 웨드마이어(Albert C. Wedemeyer) 장군의 방한을 들 수 있을 겁니다. 나는 두 사람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안내했고 그 두 사람은 한국의 국방 문제에 대한 요구에 중점을 두면서 미국이 한국의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승만 대통령에게 설명했습니다.

두 사람은 워싱턴으로 돌아가면서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의 제안에 동의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보낸 보고서도 우리가 이대통령의 군사적 요구에 대해 제안한 내용들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이 모두 “좋소, 좋소, 좋소”라고 한 것 처럼 보이도록 하는데 영향을 끼쳤는데 사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군을 철수시켜야 할 때가 되었다는 제안에 대해서 결코 “좋소” 라고 한 적도 없었고 결코 “싫소”라고 한 적도 없었습니다.

Muccio : Well, there were a few. A good example was the visit in late ‘48 of the Secretary of the Army, accompanied by General (Albert C.) Wedemeyer. I escorted the two to President Rhee and they presented to President Rhee U. S. thingking about the Korean situation with stress on Korean needs in defense matters.

When they reported in Washington, they proceeded on the assumption that Rhee had agreed to this U.S. proposal. My report was to the effect that Rhee had said, “Yes, yes, yes,” to all of the things that we offered Rhee for his military needs, but that he had never said, “Yes,” and he never said, “no,” to the suggestion that the time had come for the withdrawal of the U.S. military forces.

“Oral History Interview with Ambassador John J. Muccio”(1971. 2. 10~2.18) by Jerry N. Hess, Harry S. Truman Library, pp.9~10

이승만의 담화문이나 언론과의 회견을 보면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모호하고 다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발언을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점은 이승만이 매우 머리가 좋고 정치감각이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지요. 무초는 이 인터뷰 도중 이승만이 매우 지적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는데 사실 이것은 이승만을 상대한 인물들이라면 대부분 인정하는 사실이었습니다.(주한 미군 사령관 하지의 경우는 이승만의 교활함에 치를 떨 정도였지요.)

이승만 시절 대한민국이 암울했다는 점과 이승만 정부가 많은 실책을 저질렀다는 점 때문에 가끔 이승만을 매우 무능한 인물로 보는 분들도 계신데 사실 저는 이승만이 특정 방면으로 지독하게 머리가 좋은게 문제였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2009년 6월 19일 금요일

만만한게 제주도...

서산돼지님이 '닉슨 前부통령의 '1박 2일' : 푸대접과 오뉴월 서리 복수'라는 글을 쓰셔서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 글에서 특히 흥미있었던 부분은 박정희가 미국측에 제주도를 미군 기지로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부분입니다. 재미있게도 이승만도 미국측에 제주도를 해군기지로 제공할 것을 제안한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미육군부 차관 드레이퍼(William H. Draper. Jr)는 주한미군철수와 남한 단독선거 문제로 1948년 3월 서울을 방문합니다. 이때 드레이퍼는 향후 수립될 단독정부의 수반으로 유력했던 이승만을 만나 회견을 가집니다. 이 두 사람의 회견은 1948년 3월 28일 조선호텔에서 있었는데 이때 이승만은 꽤 재미있는 제안을 하게 됩니다.

두 사람의 회견에는 훗날 군사사가로 유명해지는 듀푸이(Trevor N. Dupuy) 중령이 육군부차관 보좌관으로 동석하고 있었습니다. 듀푸이 중령이 남긴 비망록에 따르면 이승만은 이렇게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이박사는 미국정부가 제주도에 해군기지를 두는 것을 고려할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정부가 수립되면 한국인들은 미국정부가 제주도에 영구 기지를 설치하는 것을 매우 반길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드레이퍼 차관보는 이에 대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Dr. Rhee said that he had heard it suggested that the United States might wish to have a Naval Base on Cheju Island. He Said that he felt confident that when a Korean Government is established, that the Koreans would be very willing to have the United States establish a permanent base there. (Mr. Draper made no comment).

Conference between Under Secretary Draper and Mr. Syngman Rhee, on 28 March 1948(1948. 4. 10), RG 319 Army Staff Plans & Operations Division Decimal File 1946-48 091.Korea Box 20 (Folder #3-1)

물론 미국은 제주도에 해군기지를 둘 생각은 커녕 하루라도 빨리 주한미군을 모조리 철수시킬 계획 뿐이었습니다. 이승만은 노련한 정치가 답게 미군을 계속 주둔시키고 싶다는 뜻을 돌려서 밝힌 것이죠. 물론 인용문에 나와 있듯 드레이퍼는 이승만의 떡밥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정말 만만하게 제주도라는 느낌입니다. 말 그대로 수난의 섬이로군요.

2009년 5월 10일 일요일

Mission Accomplished???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되자 트루먼 대통령은 주한미군 사령관 하지 중장에게 다음과 같은 축하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백악관, 워싱턴
1948년 8월 15일.

친애하는 하지 장군.

남한에 합법적 정부를 건설함으로서 장군에게 부여된 어려운 임무가 완결되었습니다. 귀관의 임무는 크나큰 성공으로서 완료되었습니다.

이 지역의 정권이 한국인들에게 이양된 것은 우리 정부가 그렇듯 귀관도 매우 만족스럽게 생각할 것이며 귀관은 박해 받는 민족이 자유를 되찾는데 크나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귀관은 미합중국 군대를 지휘해 한국을 잔인무도한 지배자들의 폭정으로부터 해방시켰습니다. 장군이 담당한 이 불행한 나라의 국민들은 투표권을 가진 유권자들이 대규모로 참여한 자유 선거를 치렀습니다. 해방된 국민들이 선출한 대표에게 부여한 그들 자신의 운명에 대한 책임은 매우 막중합니다.

장군은 자신의 수완, 솔선, 외교적 재능으로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았던 문제들을 극복했으며 미국과 한국 국민은 장군에게 고마움을 느낄 것 입니다.

해리 트루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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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hite House, Washington,
August 15, 1948

My dear General Hodge

The Achivement of constitutional government in southern Korea completes the difficult task that was assigned to you. Your mission has been accomplished with outstanding success.

As the government of this area is turned over to the Korean people, it must be very satisfying to you, as it is to our Government, to know that you have been largely instrumental in restoring freedom to a persecuted nation.

You led United Stataes troops to liberate Korea form the tyranny of a ruthless conqueror. The people of your area of this troubled country have held a free election in which a remarkably high percentage of the qualified voters participated. How the responsibility for their own destiny rests with the elected representatives of a free people.

By your skill, initiative and diplomacy you have overcome seemingly insurmountable obstacles and you have earned the gratitude of the people, both of the United States and of Korea.

Very sincerely yours.

Harry Truman

August 17, 1948, Press Release on Replacement of Commanding General, US Armed Forces in Korea, RG 319 Army Staff Plans & Operations Division Decimal File 1946-48 091.Korea TS Sec. IV & V Box 22 (Folder #2)

그러나 본 게임은 이제부터 시작이었으니...

2009년 3월 27일 금요일

박정희 전역식에 동원된 부대의 규모

박정희는 1963년의 제5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기 위해서 군에서 예편합니다. 군부는 대내외적인 압력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민정이양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태였고 국가재건최고회의는 1962년 12월에 헌법을 개정해 대통령 선거를 국민직선제로 바꿉니다. 이것은 꽤 현명한 선택이었는데 만약 제2공화국과 같이 대통령 간선제를 채택한다면 군부출신이 집권하는 데는 애로사항이 제법 꽃 피었을 것 입니다.

하여튼 군부가 지지하는 유력한 카드인 박정희는 대통령선거에 대비하기 위해서 급히 전역합니다. 박정희의 전역식에 대해서 육군본부가 발간한 『육군발전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963년 8월 30일에는 백척간두에 선 조국을 구출하기 위하여 5∙16군사혁명을 통수한 박정희 대장의 역사적인 전역식이 당 군단 관할지역인 강원도 철원 지포리의 TCPC사격장에서 성대히 거행되었다.
이 전역식에는 제3사단 예하의 3개연대와 포병 11 및 833대대 1개 포대, 제 3전차대대 제 1중대 및 2중대(M-47 27대), 4.2중포 1개 포대, 제 6대전차유도탄 소대의 병력과 장비가 동원되었다.
이 식전의 참가인원은 3부요인, 주한 외교사절, 3군 참모총장 및 해병대사령관, 주한 미 8군사령관 외에 600여명이 참석하였다.

육군본부, 『육군발전사』2권, 1970, 191쪽

그리고 아래는 전역식 동영상입니다.



인용한 글에 언급된 동원 부대나 링크한 동영상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사실상의 대선출정식을 겸한 행사여서 그런지 군부의 과시욕이 느껴집니다. 거의 사단급 병력이 동원된 셈인데 뉴스를 통해 접하는 외국의 4성급 장성들의 전역식 중에서 저 정도 규모의 전역식은 아직 보지를 못 했습니다.

저런 과시성 행사를 위해 동원된 사병들이 불쌍하군요.

참고로, 주한미군 사령관을 역임한 버웰 벨(Burwell B. Bell) 대장의 전역식 동영상을 링크합니다. 박정희의 전역식과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군요.

Tennessee: Gen. Bell changes command

2009년 2월 6일 금요일

주한미군의 성병 발병율 - 1948년의 통계에 대해서

필요한 자료가 있어서 하루 종일 하지(John R. Hodge) 중장 문서철을 뒤졌는데 쓸만한 것을 전혀 찾지 못했습니다. 허탕을 치면 정말 허무하고 우울해지죠;;;;;

그런데 자료를 뒤지다 보니 1949년에 작성된 주한미군 의무감실의 문서가 한 건 있었습니다. 1948년도의 의무활동 결산 보고서인데 잠깐 쉬어가는 셈 치고 보고서를 훑어 보다 보니 1948년도 성병 발병율에 대한 통계가 있더군요. 이 통계를 보니 작년에 John Willoughby의 논문을 언급하면서 인용한 표 하나가 생각났습니다. Willoughby가 인용한 미 제3군의 성병 발병율 통계에 따르면 유색인종이 백인에 비해 성병에 걸리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높았다고 하지요. 주한미군은 독일주둔 미군과 비교했을때 어떠했을까 궁금해 지더군요. 호기심에 해당 통계를 복사해서 비교해 보니 주한미군의 경우도 백인에 비해 유색인종의 성병 발병율이 높게 나타나더군요.

해당 보고서에 실린 1948년도 주한미군의 성병 발병율은 다음과 같습니다.



비록 독일 주둔 미군과 비교하면 낮지만 유색인종이 백인 보다 두 배 정도 높은 성병 발병율을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체 환자 중 82%에 달하는 2924명이 임질(Gonorrhea)에 감염되었고 10%인 360명이 매독(Syphilis) 환자입니다. 나머지 8%인 284명은 기타 성병으로 분류되어있고 구체적인 병명은 기록되어 있지 않군요.

이 문서 외에 역시 하지 중장 문서군에 들어있는 13번 Box의 문서철 두건은 모두 1947년부터 1948년 기간의 주한미군 의무관계 문건들인데 제가 확인해 본 바로는 70% 가까이가 성병관계(;;;;) 기록이었습니다. 특히 두 번째 문서철은 모두 성병관계 기록이더군요. 한번 구체적으로 읽어 볼까 하다가 시간이 없어서 덮었습니다. 이걸 일일이 분석해 본다면 아주 흥미로운 글을 한 편 쓸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당장 필요한 문건은 아니라서 분석은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했습니다.


잡담 1. 그러고 보니 빨리 스캐너를 하나 사야 겠습니다. 표 만드는 것 보다 그냥 스캔하는게 더 편할 것 같군요.

잡담 2. 그런데 역시 골치 아픈 물건들은 통신부호가 가득 섞인 전문들이죠. 어디 까지가 통신부호인지 알기 어려운 경우도 많습니다.

2008년 11월 8일 토요일

Gunpowder - 1948년 3차대전이 발발했다면 한국은 어떻게 되었을까?

냉전이 시작되면서 소련이 새로운 가상적이 되자 미군 수뇌부는 매우 심각한 전략적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2차대전이 종결된 뒤 병력 감축이 급속히 이루어진 결과 재래식 전력으로는 유럽과 아시아에서 동시에 소련을 상대하기가 버겁게 된 것 이었습니다. 스탈린은 미국이 핵실험에 성공하자 핵무기에서의 열세를 재래식 전력으로 만회한다는 전략을 세우고 재래식 전력의 강화에 힘을 쏟고 있었기 때문에 1947년에 들어오면 재래식 전력에서 육군의 격차는 엄청나게 벌어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전략적 상황에서 미합동참모본부(JCS)는 1948년 5월 소련과의 전쟁을 상정한 반달(Halfmoon) 계획을 작성합니다. 반달계획은 소련과의 전면전 발발시 아시아 전선에서는 지상군으로 방어가 어려운 중국과 한국의 미군 병력을 철수하고 그 대신 일본은 사수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상황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국민당 정부를 군사적으로 지원할 것이었습니다. 반달계획에 이어서 1949년 1월 28일에는 다시 트로잔(Trojan) 계획이 수립되는데 이 계획은 소련과의 전면전 발발시 전쟁 첫 해는 재래식 전력을 축적하고 소련에 대한 공격은 공군 주도의 핵폭격으로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었습니다.
이렇게 미국은 소련이 1949년 8월 핵실험에 성공하기 전 까지는 전쟁 초기에는 핵 전력을 중심으로 소련을 상대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재래전 측면에서는 주 전장은 독일을 중심으로 한 서유럽이고 아시아는 부차적 전장으로 전략적 방어를 수행할 계획이었습니다. 아시아에서의 전략적 방어는 대규모 지상군이 필요한 중국과 한국은 포기하고 해군과 공군으로 방어가 용이한 일본을 방어하는 다소 소극적인 측면이 보입니다.

합참의 전략에 따라 아시아에서 전략방어를 수행할 극동군 사령부는 건파우더(Gunpowder) 라는 개념계획을 작성합니다. 이것은 정식 작전계획은 아니고 개념 연구로서 반달계획이 수립되고 4개월이 지난 1948년 9월 8일에 수립되었습니다. 극동군사령부가 소련과의 전쟁에 대비해 개념계획 몇 가지를 연구하고 있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올해 초 RG 554의 극동군사령부 정보참모부 문서를 보던 중 1948년 12월에 작성된 건파우더 계획의 수정안을 찾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읽어 보니 흥미로운 점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합참의 거시적 전략의 틀 안에서 수립된 계획이다 보니 중국과 한국에서의 철수, 핵무기 사용 등에 대한 흥미로운 내용이 일부 있더군요. 제가 재미있게 읽었던 부분들을 조금 발췌해 봅니다.

먼저 전쟁초기 미군과 그 동맹국의 능력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b) 아군 :
(1) 미군은 한국에 대한 침공을 격퇴할 수 없을 것이다.
(2) 태평양함대는 Y일로부터 15일이 지난 뒤에야 제한적인 작전이 가능할 것 이다.
(3) 극동공군(FEAF)은 Y일로부터 3일에서 9일이 지나기 이전에는 대한해협에서 소규모의해상 활동을 보호하는 제한적인 역할을 수행할 것이며 (이 기간 동안) 제공권을 장악하지는 못 할 것이다.
(4) 일본정부와 일본국민은 일본 본토 방위를 전력으로 지원할 것이다.
(5) 국민당정부는 (소련에) 선전포고를 하겠으나 만주와 화북, 산동반도의 주요 철도노선과 항구를 적이 이용하는 것을 저지하지는 못 할 것이다.
(6) 블라디보스톡, 부산, 뤼순(旅順)과 다롄(大連)은 각각 한 발의 핵폭탄으로 핵 폭격을 실시하면 이후 90일간 주요 항구로서 기능하지 못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b) Own Forces:
(1) That US forces will be unable to repel the invasion of Korea
(2) That Pacific Fleet units will be available for limited operations on or before Y plus 15 days.
(3) That FEAF will be unable to maintain air superiority over the Korea-Tsushima Straits area except for limited ability to protect ship movements from Y plus 3 through Y plus 9 days.
(4) That the Japanese Government and people will wholeheartedly support the defense of Japan.
(5) That the National Government of China will declare war and will be unable to prevent hostile use of the principal rail lines and ports of Manchuria, North China and the Shantung Peninsula.
(6) That one atomic bomb at each port can effectively deny Vladivostok, Pusan, and Port Arthur-Dairen as major embarkation points for 90 days after detonation.

December 31, 1948, 「Memorandum for General Almond, Status of Gunpowder」, RG 554, Records of the Office of the Assistant Chief of Staff, G-2, Intelligence, Subject File, 1945-52, Entry 2, Box 5

이 연구안 에서는 한국은 방어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으며 국민당 정부의 능력에 대해서도 낮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비록 연구 단계의 계획이지만 부산에 대한 핵폭격이 고려되고 있습니다. 만약 이때 3차대전이 났다면 부산에도 평화공원이 하나 생겼겠군요;;;;

작전에서는 일본 본토의 방어를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습니다. 관련 내용들만 발췌해 보겠습니다.

4. 작전
a. 생략(작전지역)
b. 작전은 일본 본토와 류쿠에 대한 전략적 방어를 기본으로 한다.
c. 총괄 기동계획에 따라 한국과 화북에의 병력 철수를 신속히 하고 극동군 병력을 규슈 북부와 혼슈에 집결시키고 홋카이도는 가능한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 방어하되 극동군사령부의 특정한 명령이 있을 경우 포기한다.
d. 간토(関東) 평야는 일본의 핵심적인 지역이기 때문에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사수해야 한다.
e. 극동군 사령부의 지도하에 일본정부는 다음의 지역에 전반적인 방어시설을 건설할 것이다. : 가고시마(鹿児島), 고베(神戶)-오사카(大阪), 나고야(名古屋), 도쿄-요코하마(橫濱), 센다이(仙台)
f. 중국에 주둔한 미군은 해로를 통한 철수를 고려하여 칭타오(靑島)를 가능한 장기간 방어해야 한다.
g. 중국에 파견된 군사고문단은 가능한 오랫동안 활동을 지속해야 한다.
h. 제5공군은 초기에는 방공 임무에 주력하며 서부 내해 지역(동해)에서 아군 측 선박 항행에 대한 적의 공습을 저지하고 24군단의 철수를 보호하며 홋카이도-쓰가루(津輕) 해협 지구에서도 동일한 임무를 수행한다.
i. 오키나와에 전개한 중(中)폭격비행단들은 가능할 경우 간토 평야 지대로 이동해 극동에서의 전략 폭격 임무에 참가한다.
j. 해군은 위에서 언급한 해상 철수 임무를 수행하며 극동 지역에서의 기뢰 부설, 극동 해역의 제해권 확보를 수행한다.

4. Operations
a. –
b. Operations are based upon a strategic defense of Japan and the Ryukyus.
c. The general scheme of maneuver visualizes a precipitate evacuation of Korea and North China, a concentration of CINCFE forces in north Kyushu and Hinshu, and the defense of Hokkaido to the maximum effort practicable, to be abandoned only upon specific order of CINCFE.
d. The Kanto plain in considered the vital area of Japan, to be defended at all costs.
e. All-round field defenses will be constructed by the Japanese government under general CINCFE direction in the following areas : Kagoshima, Kobe-Osaka, Nagoya, Tokyo-Yokohama, and Sendai.
f. US forces in china will hold Tsingtao as long as practicable consistent with Water withdrawal.
g. The Military Advisory Group in China will continue their functions as long as practicable.
h. The 5th Air Force is initially employed in air defense, in preventing hostile air attacks on friendly ship movement in the western inland seas area, in protecting the withdrawal of XXIV Corps, and similar mission in the Hokkaido-Tsugaru Straits area.
i. Medium bomb groups are concentrated on Okinawa, are displaced to the Kanto Plain area as feasible, and will participate in the Far East Strategic Air Offensive.
j. Naval forces will conduct evacuation as indicated above, will participate in the Far East minig campaign, and secure control of seas in Far East waters.

「Memorandum for General Almond, Status of Gunpowder」, 위의 문서

위에 언급된 내용들은 한 줄로 요약이 가능합니다.


일본을 공격방어한다.


한국에 주둔한 미군은 무조건 철수고 중국에서도 필요한 인원을 제외하면 철수. 그리고 일본은 결사 방어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소련에 대한 공격은 공군에 의해 주도되며 해군에 의한 해상봉쇄가 함께 수행될 계획입니다.

그리고 주한미군으로 있었던 24군단에는 다음과 같은 임무를 부여하는 것이 고려되고 있습니다.

(a) 24군단
(1) 지연전 수행.
(2) 인천과 부산의 항만 시설 파괴.
(3) 한국에서 민간인 철수.
(4) 한국에 잔류 시킬 정보조직의 구성.

(a) XXIV Corps
(1) Delaying Action
(2) Destruction of port facilities of Inchon and Pusan
(3) Evacuation of civilians from Korea.
(4) An intelligence establishment to remain in Korea.

「Memorandum for General Almond, Status of Gunpowder」, 위의 문서

역시 한 줄 요약이 가능합니다.


한국에서 발을 뺀다(;;;;)


네. 만약 이 개념계획이 정식 작전계획으로 승격되었다면 주한미군은 정말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존재가 되었을 겁니다.(;;;;;) 물론 소련과의 재래식 전력 격차를 감안하면 어쩔 수 없는 군사적 선택이긴 합니다만. 당시 한국인들이 미군 내부에서 저런 이야기가 오간다는 걸 알았다면 매우 실망했을 것 입니다.

결국 위기상황에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선택하게 되는데 1948년 무렵미국에게 있어 일본은 전자에 속했고 한국은 후자에 속했습니다. sonnet님이 예전에 태풍이 몰아치면 차라리 태풍의 눈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게 낫다는 이야길 하셨었는데 이 경우가 딱 그런 경우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