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5월 28일 토요일

이승만의 협상술에 대한 논평 하나

이승만은 매우 머리가 잘 돌아가는 정치인이었습니다. 이런 점은 특히 외교적인 협상에서 잘 나타나는데 항상 성공하진 못했어도 복잡한 화술로 상대방을 혼란시키는데 탁월한 재주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주한미국대사였던 무초가 트루먼 기념도서관에서 실시한 구술채록에서 이승만과 미육군부장관 로얄과의 회담에 대해 회고한 내용은 이점에서 꽤 재미있습니다.

헤스(Jerry N. Hess) : 국무부의 관료로서, 선생님이 생각하시기에 (미군정에서 대한민국 정부로의) 권력이행기에 취했어야 하는 조치들에 대해 이견을 보인 미군 지휘관들이나 국방부 관료들과 특별한 문제는 없으셨습니까?

무초 : 예. 그렇게 많지는 않았습니다. 괜찮은 사례라면 1948년 말에 있었던 육군부 장관과 웨드마이어(Albert C. Wedemeyer) 장군의 방한을 들 수 있을 겁니다. 나는 두 사람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안내했고 그 두 사람은 한국의 국방 문제에 대한 요구에 중점을 두면서 미국이 한국의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승만 대통령에게 설명했습니다.

두 사람은 워싱턴으로 돌아가면서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의 제안에 동의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보낸 보고서도 우리가 이대통령의 군사적 요구에 대해 제안한 내용들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이 모두 “좋소, 좋소, 좋소”라고 한 것 처럼 보이도록 하는데 영향을 끼쳤는데 사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군을 철수시켜야 할 때가 되었다는 제안에 대해서 결코 “좋소” 라고 한 적도 없었고 결코 “싫소”라고 한 적도 없었습니다.

Muccio : Well, there were a few. A good example was the visit in late ‘48 of the Secretary of the Army, accompanied by General (Albert C.) Wedemeyer. I escorted the two to President Rhee and they presented to President Rhee U. S. thingking about the Korean situation with stress on Korean needs in defense matters.

When they reported in Washington, they proceeded on the assumption that Rhee had agreed to this U.S. proposal. My report was to the effect that Rhee had said, “Yes, yes, yes,” to all of the things that we offered Rhee for his military needs, but that he had never said, “Yes,” and he never said, “no,” to the suggestion that the time had come for the withdrawal of the U.S. military forces.

“Oral History Interview with Ambassador John J. Muccio”(1971. 2. 10~2.18) by Jerry N. Hess, Harry S. Truman Library, pp.9~10

이승만의 담화문이나 언론과의 회견을 보면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모호하고 다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발언을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점은 이승만이 매우 머리가 좋고 정치감각이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지요. 무초는 이 인터뷰 도중 이승만이 매우 지적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는데 사실 이것은 이승만을 상대한 인물들이라면 대부분 인정하는 사실이었습니다.(주한 미군 사령관 하지의 경우는 이승만의 교활함에 치를 떨 정도였지요.)

이승만 시절 대한민국이 암울했다는 점과 이승만 정부가 많은 실책을 저질렀다는 점 때문에 가끔 이승만을 매우 무능한 인물로 보는 분들도 계신데 사실 저는 이승만이 특정 방면으로 지독하게 머리가 좋은게 문제였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댓글 19개:

  1. 잔머리의 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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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自重自愛12:09 오전

    진짜 조선 선조와 비슷한 케이스인듯. (그럼 이순신은 누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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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niMishel12:39 오전

    No라고 말하지 않는 일본인 또는 Yes라고 말하지 않는 일본인이라는 말이 1980년대 일본 버블경제 시기에 유행했던 시기가 있었죠. 세계사와 뒤섞인 여러가지 복합적 요인으로 경제적인 성장을 이루어 미국 영화사나 대형 부동산을 사들이는 등 미국인들의 경제를 위협한 일본인들에 대한 거부와 공포를 이론적으로 이해하려던 미국의 인문학자나 경제학자들이 조금 구차하게(?) 내세운 이론 중 하나가 일본인은 영어를 못 하는... 척 하며 어버버 하면서 진짜 목적을 가리고 쏼라쏼라하는 코쟁이들을 현혹시키고 협상 석상에서 상대방이 못 알아듣게 일본어로 지들끼리 쑐라쑐라하는 식으로 행동하면서 협상을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이끌어 간 것이 일본이 미국을 '따먹은(!)' 이유 중 하나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이클 크라이튼의 라이징 선(숀 커넬리와 웨슬리 스나입스 주연의 영화로도 나온)나 다이하드 같은 영화가 나온 배경도 그런 것이었죠.
    시마과장 작가 히로카네 겐시의 이런저런 만화에도 태평양 전쟁 후 미국과 일본의 교섭 과정에서 일어난 언어충돌 에피소드에 기반을 둔 에피소드가 꽤 여럿 나옵니다. ㅋ
    오버하는 경향이 있긴 합니다만 영어를 잘 하는 서구권 교섭인들이 상대적으로 영어를 못 하는 제3국 교섭인들과 영어로 대화하다가 말이 안 통해서 지치는 경우는 꽤 흔한 경우인 듯 합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저도 영어를 잘 못 해서; 저랑 대화하는 서양인들을 짜증나게 하고, 의도하지 않게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업무를 진행한 적이 있거든요.
    그런데 이게 전략적으로 좋은 컨셉트가 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아는 모 회장님은 외국어를 잘 하지만 못 하는 척 하고 꼭 통역을 동행시킵니다. 그리고 자기가 못 알아듣는다고 생각하고 말을 내뱉는 외국인들을 매의 눈으로 쳐다보시죠.
    반대로 영어 좀 하는 친구들은 상대에게 자기가 영어 잘 한다고 쏼라쏼라 과시하다가 되려 영어의 늪에 빠져 자기가 해야 할 거래를 성사시키지 못 하는 경우가 있더군요.
    한국같은 제3세계 국가 사람에게 영어를 잘 하는 게 능력이 될 수는 있지만 영어를 잘 한다고 과시할 필요는 없겠죠. 그 당시의 회의록이 없으니 제대로 알기는 어렵지만 하와이 교민이었던 이승만 전 대통령이라면 국적이 다른 나라 사람끼리 영어로 대화할 때의 요령을 이용할 줄 알았던 게 아닐까 싶어지기도 하네요.
    아, 어쩌면 조선인민공화국 사람들도 그런 테크닉을 구사하는 게 아닐까요? 힛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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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런데 이승만은 영어를 너무 잘해서 통역을 쓰는 경우가 별로 없었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통역을 겸하는 경우까지 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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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niMishel12:40 오전

    헐 리플 무지 기네요. 쓸 땐 몰랐는데. 용서해 주세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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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이네스5:03 오후

    물건너에 있다가 대통령이 될정도였으니 정치력은 근현대사 최강급이지요.

    정치만 잘해서 문제지요.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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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치감각이 꽤 좋습니다. 귀국해서 단기간만에 우익 내에서 큰 지분을 확보한 걸 보면 굉장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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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골치아픈 문제에 대해서 모호하게 말을 하는 것도 처세술의 하나일 수는 있겠지요. 그런데 '그분'께서는 처세술 레벨만 높으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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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아래에 自重自愛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이것은 정확히 선조의 재림(아 씁쓸하다).

    선조는 서예에도 능했다는데 리박께서도 혹시 펜글씨에라도 능하셨는지 궁금합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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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원래 지적기반이 전통 교육에 바탕을 둬서 기본은 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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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YaPenguin11:02 오후

    예로부터 전해내려오는 좋은 한줄요약이 있지요...

    외교지능신 내정지등신...    

    정객으로서는 9단인데 행정가로서는 시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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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오그드루 자하드11:54 오후

    <span>마케도니아 왕조 이후의 비잔티움 제국이 떠오르는군요. 두카스 가문을 위시한 문벌 귀족들이 온갖 잔머리와 술수로 정적들을 제거하고, 제국을 장악했지만 정작 통치는...... 아 망했어요 -_-</s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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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다행히도 남조선에는 아메리카의 반공 십자군이.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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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특정 방면으로 지독하게 머리가 좋은게 문제' ---> OxzTL

    그런데 당시 상황에서는 그렇지 않으면 한국 대통령이 되기는 누구건 어려웠고 (정치) 선택 과정에 따라 대통령이 된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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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예. 확실히 의지는 있는데 능력은 받쳐주지 않은 김구와 비교해 보면 그 점이 더 잘보인다고 생각합니다. 해방공간은 모두가 빈약한 정통성을 가지고 아웅다웅하던 시절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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