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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 26일 토요일

이승만 시기 수출정책에 대한 잡상

지난번에 sonnet님이 올리신 「미국의 대한원조와 경제성장의 시작」이라는 포스팅에 반론이 하나 달렸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sonnet님이 「일본이 가진 모든 것을 우리에게 달라, 그것도 내일 당장 달라」라는 포스팅으로 다시 반론을 제기해 주셨으니 저는 사족을 조금 더 달아볼까 합니다.

박정희 시기의 경제개발도 그렇지만 이승만시기 수출정책에 대해서도 당연히 평가가 상이합니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한국전쟁 이후 이승만의 하야까지 한국의 수출은 큰 증가 없이 정체상태에 있었습니다. 이미 sonnet님의 글에서 지적되었지만 한국의 수출은 1958년까지 계속해서 내리막길에 있었고 1958년 이후 부터의 성장도 겨우 1953년 수준의 수출을 회복하는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이승만정부의 수출5개년계획의 목표는 1961년까지 1억달러 수출을 돌파하는 것 이었는데 실제로는 1961년의 수출액은 3864만6천달러로 목표의 3분의 1 수준에 그쳤고 겨우 1953년의 수출실적과 비슷한 수준이었습니다. 1959년의 실적과 1960년의 실적도 목표치를 한참 밑돌고 있었으니 사실상 이승만정부의 수출5개년계획은 대실패였습니다. 이걸 단순히 성장률로 평가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승만 정부하의 수출5개년계획에도 불구하고 수출 실적은 형편없었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이대근의 지적이 귀담아 들을 만 합니다. 이대근은 『해방후ㆍ1950년대의 경제』라는 저서에서 이승만 정부하에서 이뤄졌던 수출 계획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승만 정부의 수출5개년 계획은 농수산물 등 1차 산품을 위주로 한 것이었는데 수출의 핵심이었던 미국에 대한 텅스텐 수출이나 일본에 대한 수산물 수출은 정책적인 요인에 의해서 좌우되는 경향이 강해 정부의 수출 의지만으로는 목표를 기대하기 어려웠다는 것 입니다. 이대근은 경제적 요소에 대해서는 크게 고려하지 않고 수출 상대국의 정책적 요소에 좌우되었다는 점에서 수출5개년계획은 확고한 실현가능성이 크게 부족한 상태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목표를 달성하기 어려웠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왜 이렇게 이승만 정권 하에서는 수출이 제자리 걸음을 했는가 하는 문제도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많은 경제사 연구자들이 직접적인 수출진흥책이 부족했다는 점을 이유로 들고 있습니다. 이승만 정부의 수출5개년계획이 1960년대 이후 수출에 필요한 잠재력을 축적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이상철 조차도 이승만 정부하에서는 적극적인 수출진흥책이 사실상 전무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또한 산업 육성에 필요한 자금은 거의 절대적으로 원조에 의존해야 했는데 원조자금은 수출산업이 아니라 수입대체산업을 중심으로 배분되었다는 점도 많은 경제사 연구자들이 지적하는 부분입니다.
이승만 정권기에 적극적인 수출 지원책이 부족했다는 근거로 연구자들에게 많이 이용되는 것이 바로 수출보조금입니다. 수출5개년계획이 진행 중이던 1958년~1960년까지 수출 보조금은 1달러당 1.2원에서 1.3원에 불과했는데 이것은 군사정권이 들어선 직후인 1962년에는 1달러당 21.5원으로 폭증합니다. 그리고 1963년을 제외하면 수출보조금은 계속 증가하는데 1964년에는 27.4원이던 것이 1966년에는 51.6원으로 가파르게 상승합니다. 군사정권과 제 3공화국 초기에 급격한 수출 증가가 있었던 원인으로는 이렇게 직접적인 수출지원정책이 중요한 요인이었습니다. 게다가 수출5개년계획 기간인 1957년부터 1961년까지의 대외원조액이 2억7400만 달러였는데 적극적인 수출진흥책이 시행된 1962년부터 1966년까지의 대외원조액은 1억6800만 달러로 이승만 정권은 돈이 없어 적극적인 수출진흥책을 시행하지 못했다고는 보기 어려울 것 입니다.
물론 이승만 정권하에서는 직접적인 수출보조금 지급의 부족을 외화예치제도를 통한 프리미엄으로 대신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도 김낙년 같은 연구자들은 외화예치제도를 통한 프리미엄이 실제로는 수출해서 벌어들인 달러를 시세로 매도해서 얻는 것이었기 때문에 결국은 과대평가된 공정환율에게 기대는 것은 마찬가지였다고 그 한계를 지적합니다.

이승만 정부가 전후 복구과정에서 어느 정도 경제를 안정시키고 향후 60년대 경제발전의 기초를 닦았다는 점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하지만 이 시기의 대외 수출은 제자리 걸음이었으며 이렇다 할 적극적인 수출 정책이 시행된 것도 아닙니다. 1957년부터 시행된 수출5개년계획은 구체적인 수출 증대 방안도 없이 만들어 졌으며 결과적으로 목표액의 30% 수준을 달성하는 실패로 끝났습니다. 시행된 수출 진흥책도 결과적으로는 과대평가된 공정환율에 기대는 것 이었는데 이런 방식이 계속되는한 원조 달러에 대한 의존을 끊기가 어려웠겠지요. sonnet님의 「미국의 대한원조와 경제성장의 시작」에 대해 반론하려면 이승만 시기의 수출정책이 과연 원조에 의존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나갔는가를 설명해야 할텐데 당시의 사례를 보면 그 점에 대해서는 부정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2008년 7월 23일 수요일

남한과 북한의 5개년 계획에 대한 몇 가지 잡상

지난 해에 북한 경제 관련 논문을 조금 읽다가 생각난 것들을 「북한의 50~60년대 경제성장에 대한 잡상」이라는 제목으로 끄적인 적이 있었는데 최근 sonnet님 등 여러 대인들께서 이 썰렁한 잡글을 인용해 주셔서 조회수가 대폭 증가했습니다! 그리고 이 글이 인용된 것을 보니 박정희와 김일성의 공업화를 어떻게 볼 것이냐에 대한 토론이 진행되고 있더군요. 많은 분들의 견해를 접하게 되어 좋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여러 대인들께서 이 어린양의 싱거운 글에 관심을 보여주셨으니 변변찮으나마 예전에 했던 이야기에 몇 가지 사족을 달아 볼까 합니다. 깔끔하게 정리가 안된 어수선한 글이라서 미리 읽으시는 분들께 양해를 구합니다.

먼저 남한과 북한의 5개년 계획의 성격 문제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미 sonnet님이 「미국의 대한원조와 경제성장의 시작」이라는 글에서 양자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 해 주셨습니다.
요상하게도 박정희를 싫어하는 분들은 간판이 똑같다는 이유로 박정희의 5개년 계획이 김일성의 그것을 그대로 베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근거는 전혀 없죠. 기본적으로 남한의 5개년 계획은 무역에 기반한 성장을 추구한 것인 반면 북한의 5개년 계획은 ‘자립적 민족경제’ 건설이라는 망상적 목표에 가용 자원을 싹 쓸어넣은 정신병적 도박이었기 때문입니다.

북한의 5개년 계획의 성격은 1958년 3월의 당 제1차 대표자 회의에서 채태된 결정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결정서에서는 “제 1차 5개년 계획 기간에 사회주의적 공업화의 토대를 확고히 축성함으로써 우리 공업의 식민지적 편파성과 기술적 락후성을 완전히 퇴치하고 민족경제의 자립적 토대를 더욱 공고히”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즉 5개년 계획의 목표가 ‘자립적 민족경제’ 건설에 있음을 명확히 하고 있는 것 입니다. 해외 무역을 통한 성장을 추구한 남한의 5개년 계획과 근본적인 성격 부터가 다릅니다. 그리고 이 5개년 계획은 기본적으로 중공업에 의해 이끌어져 나갈 것 이었습니다. 김일성은 이 회의에서 중공업이 없이는 경공업과 농업이 도저히 발전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1957년의 경제 성과를 예로 들어 중공업 우선노선을 반대한 세력을 공격합니다.

하지만 1957년의 경제적 성과는 소련과 동유럽의 막대한 경제 원조를 바탕으로 달성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은 이 문제점에 대해서는 별로 고려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북한은 자체적으로 중공업 위주의 발전을 수행할 만한 자본이 아직 축적되어 있지 않았고 여전히 외부의 경제적 원조가 결정적인 요인이었습니다. 이 문제점은 김연철의 연구가 잘 지적하고 있는데 이미 전후 복구 3개년 계획이 종결된 시점에서 사회주의권의 원조는 감소추세에 있었고 북한은 축적된 자본의 부족과 기술수준의 저열함을 ‘정신력’으로 상쇄한다는 심히 일본제국주의 스러운 방식으로 나갑니다. 대표적인 것이 천리마 운동이지요. 외형적으로 보면 분명히 북한의 1차 5개년 계획은 생산량의 증대를 가져왔지만 실제로 그 내용을 분석하면 생산품의 질적 저하가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게다가 1950년대 후반기부터 소련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에너지 공급이 감소하자 대외의존적인 북한의 중공업은 치명적 타격을 받습니다.

※ 1950년대 소련과 동유럽의 대북한 원조에 대해서는 「북한의 전후 복구에 대한 "사회주의 형제국가"들의 지원」에 조금 적은 것이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잘 알고 계시겠지만 한가지 더 이야기 하자면 1960년대 북한의 공업생산 성장률은 1950년대의 전후 복구기와 비교하면 급격히 저하되는 것이 특징입니다. 1954년부터 1960년까지의 공업 총생산액은 연평균 39%에 달했지만 1961년에 들어오면 이것은 14%로 낮아지고 1963년에는 8%로, 그리고 1964년에 17%로 증가했다가 다시 감소해 1966년에는 아예 마이너스 성장을 합니다. 북한경제는 벌써 1960년대부터 엉망이었던 것 입니다.

일단 정리하자면 김일성은 소련의 5개년 계획을 모방해 지속적인 중공업화를 추진했지만 이것은 북한 자체의 경제적 역량 미비로 실패하게 됩니다. 사회주의 국가들의 중공업화는 근본적으로 국가 자체의 자기완결적 경제체제를 만드는 것이 목표인데 이것은 제한된 자원을 중공업에 올인하는 도박이기 때문에 위험도가 높은 정책입니다. 스탈린 시절의 소련은 자체적인 경제적 자원 규모가 컸기 때문에 중공업화로 인한 후유증을 자체적으로 어느 정도 흡수할 수 있었지만 경제 규모가 작은데다 외국의 원조에 의존한 북한은 실패할 경우 그 충격을 흡수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실패하면서 북한 경제는 1960년대 내내 심한 부침을 거듭하며 침체에 빠졌는데 김일성은 끝까지 중공업화를 포기 하지 않기 위해서 1970년대에 서방의 자본을 통한 중공업화를 추진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다 아시다시피 대 재앙이었습니다. 지난 글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1970년이 되면 이미 남한은 전체 수출의 50% 이상을 경공업 제품으로 할 수 있을 정도로 수출 기반을 마련했지만 1970년대 초반 국제 경제체제에 발을 담근 북한은 여전히 1차산업 위주의 수출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오일쇼크로 인한 원자재가 하락은 북한에게 결정타로 작용했지요.

그리고 다음으로는 「원조라는 관점을 약간 확장해 보면...」이라는 기린아 님의 글에 인용된 도표에 대해서 조금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저는 처음에 이 도표를 봤을 때 이 도표가 10년 단위의 수출 통계를 정리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가진 책을 몇 권 뒤져보니 그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 도표는 이대근의 『한국무역론』(2003)에 실린 도표와 비슷한데 이대근과 같은 자료를 참고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대근의 한국 무역론에 실린 도표는 1961년과 1970년을 기준으로 한 수출상품의 구성 변화를 나타낸 것 입니다. 즉 기린아님의 블로그에 인용된 표의 “1960”은 아직 박정희가 집권하기 전인 1961년의 수출구조를 나타내는 것이고 “1970”은 글자 그대로 1970년의 수출구조를 보여주는 것 입니다.

이대근의 연구에 따르면 1961년도의 수출은 1위가 철광석(13.0%), 2위가 중석(12.6%), 3위가 생사(6.7%), 4위가 무연탄(5.8%), 5위가 오징어(5.5%), 6위가 활선어(4.5%), 7위가 흑연(4.2%), 8위가 합판(3.3%), 9위가 쌀(3.3%), 10위가 돼지털(3.0%)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1차 5개년 계획의 성공과 뒤 이은 2차 5개년 계획의 성공으로 이런 구조는 급격히 변화합니다. 1970년의 수출 구조를 보면 1위는 섬유류(40.8%), 2위는 합판(11.0%), 3위는 가발(10.8%), 4위는 광산물(5.9%), 5위는 전자제품(3.5%), 6위는 과자류(2.3%), 7위는 신발류(2.1%), 8위는 담배(1.6%), 9위는 철강제품(1.5%), 10위는 금속제품(1.5%)로 변화되어 있습니다. 즉 이미 1960년대 중반 이후 남한의 수출구조는 1차산업에서 2차산업으로 변화해 있었고 1970년의 수출구조 통계는 그 것의 결과를 보여주는 것 입니다. 북한이 여전히 1차산업 생산품 위주의 수출을 구상하고 있을 때 남한은 이미 오래 전에 수출구조를 혁신하는데 성공한 것 입니다. 물론 김낙년이 지적한 것 처럼 1960년대 남한의 공업화는 부실한 재무구조를 가진 수출기업 등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지만 시작부터 제자리에서 부침을 거듭하다가 스스로의 모순에 짓눌려 자빠져 버린 1960년대의 북한의 공업화와는 비교할 수 없는 대성공이었습니다.

2008년 7월 20일 일요일

수령님의 꿈도 가끔은 이뤄진다

지금은 미라가 되어 세계에서 가장 괴상한 관광상품이 되신 수령님께서는 살아 생전에 많은 꿈을 꾸셨습니다. 수령님은 북조선 인민들이 모두 기와집에 살면서 이밥에 고깃국을 먹을 날을 꿈 꾸셨으며 북조선 전체를 지상낙원으로 만들 것을 꿈꾸셨습니다.

물론 이건 꿈으로만 그쳤고 실현된건 없습니다.

그런데.

수령님이 꿈 꾼 것 중에서 이뤄진 것이 하나 있습니다!

전에 한번 내용을 소개했었던 『Kim Il Sung in the Khrushchev Era』라는 책의 51쪽에는 수령님께서 기계공업을 육성해 미래에는 각국에 Made in DPRK 로고가 새겨진 기계를 수출한다는 포부를 밝히셨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그 꿈은 실현되었으니...


정밀기계인 미사일은 북조선의 주요 수출품이 되었습니다.

2007년 6월 6일 수요일

1차대전 당시 네덜란드의 중립

네덜란드는 1차대전 당시 독일의 침공을 면할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네덜란드가 가진 경제적,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이었습니다. 슐리펜 계획에 따른 보급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네덜란드도 점령해 버리면 편하지만 그렇게 되면 잃어 버리는 것이 더 많았기 때문입니다. 독일군 수뇌부는 전쟁계획을 수립하면서 영국이 중립을 지키지 않는다면 해상봉쇄는 피할 수 없기 때문에 독일의 무역을 위해서라도 대서양의 출입에 용이한 중립국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전쟁이 벌어질 경우 독일과 외부와의 무역을 중개해 줄 수 있는 대서양 국가는 사실상 네덜란드 밖에 없지요. 특히 로테르담은 미국에서 수입하는 밀을 독일로 공급하는 주요 항구였기 때문에 독일로서는 네덜란드와 중립을 유지하는 것이 필수적이었습니다.
독일은 네덜란드가 독일에 우호적인 중립을 지키도록 많은 신경을 썼다고 합니다. 몰트케는 1차대전 발발 이전부터 외교 채널을 통해 독일은 전쟁 시 네덜란드의 중립을 보장할 것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고 하지요. 네덜란드는 벨기에가 독일군의 목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또한 독일의 의도에 대해 많은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고 독일측의 중립 보장은 너무나도 중요했습니다.

전쟁이 발발하자 네덜란드는 독일에 대한 식료품 공급처로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1914년 8월 전쟁이 발발하자 네덜란드 정부는 식량 비축분을 확보하기 위해서 네덜란드에 수입된 곡물을 외국으로 재수출 하는 것을 금지 시켰는데 이때 독일 정부는 즉시 외교적 공갈을 통해 수출 금지 조치를 해제 시켰습니다.
지정학적 위치상 네덜란드는 미국과 독일간의 밀 중개무역을 독점하게 되는데 그 결과 독일은 네덜란드를 통한 식료품 공급에 크게 의존하게 됩니다. 1915년에는 독일이 수입하는 식료품의 50%가 네덜란드를 통해 공급될 정도였다고 하지요. 네덜란드가 1916년에 독일에 수출한 식량은 독일인 120만명이 하루에 3,500칼로리를 섭취할 수 있게 하는 양이었다고 합니다. 독일은 해상봉쇄 때문에 네덜란드는 물론 덴마크, 스위스, 노르웨이, 스웨덴을 통한 식량수입을 늘렸고 네덜란드는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습니다. Marc Frey의 Bullying the Neutrals : The Case of the Netherlands에 따르면 네덜란드는 1914년 1~6월에 독일로 감자 및 밀가루 11,411톤, 버터 7,671톤, 치즈 6,312톤, 달걀 7,868톤, 고기 5,820톤을 수출했는데 이것이 1916년 1~6월에는 각각 51,201톤, 19,026톤, 45,969톤, 20,328톤, 40,248톤으로 증가했다고 합니다.

물론 네덜란드가 이렇게 전략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면서 연합군의 해상봉쇄가 제 역할을 할 수 없게 만드니 영국의 눈치도 안 볼 수는 없었습니다. 네덜란드 외교부는 1916년 11월에 영국 정부에게 독일에 대한 식료품 수출을 늘리는 것은 독일의 침공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영국 정부가 양해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특히 무역에 대한 국가의존도가 높은 만큼 네덜란드가 독일에 대한 무역제제에 동참할 경우 독일 해군이 네덜란드 상선을 공격할 가능성도 높았기 때문에 네덜란드는 영국 측을 설득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영국의 인내심도 한계는 있는지라 영국 정부는 네덜란드 측에 독일에 대한 식량 수출을 50%이상 감축하라는 압력을 가합니다. 여기에 미국이 참전하자 상황은 더욱 꼬이게 됩니다. 미국은 영국보다 한술 더 떠서 독일에 대한 수출을 완전히 금지할 것을 요구합니다. 1917년 10월, 미국이 독일에 대한 무역 금지 요구에 합류하자 네덜란드 정부는 굉장히 골치 아픈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독일은 1916년 말부터 유사시에 대비해 네덜란드를 침공하는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고 네덜란드 역시 독일이 어떤 움직임을 보일지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도 독일은 양면전쟁의 여파로 네덜란드 침공에 투입할 만한 병력을 확보할 수 없어 침공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영국으로 부터의 석탄 공급이 감소했기 때문에 독일의 석탄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다는 점도 독일과의 무역을 계속해야 하는 원인이었습니다.
네덜란드는 미국이 참전한 이후 미국과 영국 양측의 압력에 못 이겨 독일에 대한 수출을 감축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석탄공급을 확보하기 위해서 미국, 영국과의 협상을 통해 독일에 대한 식량 수출을 중단하지는 않았습니다. 네덜란드가 독일에 대한 수출을 완전히 중단한 것은 1918년 9월로 독일의 패전이 확실해 진 뒤 였고 바로 휴전이 이어진 뒤 네덜란드는 다시 독일에 대한 수출을 재개할 수 있었습니다.

1차대전 당시 네덜란드는 융통성있는 외교와 약간의 행운의 덕택으로 중립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미국과 독일을 잇는 중개 무역을 통해 경제적으로도 상당한 이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네덜란드의 금 비축량은 1914년 6월 30일 기준으로 3억620만 굴덴이었는데 1918년 12월 31일에는 10억6890만 굴덴에 달했다고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