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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월 23일 토요일

수령님의 경제관;;;;

최근 sonnet님이 북한의 개혁 개방 가능성에 대해 전망하는 글을 통해 김정일 체제의 구조적인 한계점을 지적했습니다. 저 또한 김정일 정권의 정통성이 김일성의 노선을 따르른 데서 나온다는 점이 체제의 융통성을 제약한다는 sonnet님의 지적에 동의하는 편 입니다.

김일성은 살아있는 동안 북한 체제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신의 위치에 있었으며 그의 발언 한마디 한마디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북한 인민들에게는 불행하게도 김일성은 쓸데없이 말이 많았으며 그 점은 경제분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김일성은 살아 생전에 중공업화와 이에 기초한 자력갱생 노선을 강조했습니다. 김일성에게 있어서 중공업화는 사회주의 국가로서 당연히 걸어야 할 것이었고 경공업 부터 시작해 중공업으로 이행하는 것은 자본주의 국가나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김일성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그 점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됩니다.

다른 나라들의 공업 발전 력사를 보면 많은 나라들에서는 우선 일정한 기간 중공업을 먼저 발전시킨 다음 경공업을 발전시켰으며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경공업을 먼저 발전시켜 돈을 모아가지고 중공업을 건설하였습니다.

량현갑 편, 『전후 우리 당 경제 건설의 기본 로선』(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61), 4쪽

김일성은 이렇게 중공업화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후 복구기 부터 중공업 위주의 경제건설에 집착했습니다. 그런 점은 1950년대에 김일성이 한 발언에서 잘 드러납니다.

1957년 인민경제계획은 중공업을 우선적으로 발전시키면서 경공업과 농업을 동시에 발전시킬데 대한 우리 당 경제건설의 기본로선에 기초하여 세워졌습니다. 우리는 지난날과 마차가지로 다음해에도 중공업부문에 투자를 집중하고 많은 힘을 돌릴 것을 예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옳은 조치입니다.

지금 일부 나라들에서는 중공업을 좀 죽이자거니 살리자거니 하는 론의가 많다고 하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이런 문제가 절대로 설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중공업을 먼저 발전시키지 않고서는 전반적인 인민경제의 토대를 튼튼히 할 수 없으며 인민생활도 높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중공업을 우선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은 우리 나라 사회주의경제건설의 객관적 요구입니다.

(중략)

오늘 우리가 이런 큰 힘과 튼튼한 밑천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중공업을 우선적으로 발전시키면서 경공업과 농업을 동시에 발전시킬데 대한 우리 당의 로선이 옳았으며 당의 령도밑에 전체 인민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투쟁하여 이 로선을 훌륭히 관철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3개년 계획기간에 당의 방침대로 중공업발전에 힘을 넣지 않았더라면, 인민생활을 높인다고 하여 형제나라들의 원조 같은 것도 그대로 다 때려먹었더라면 그때 한 두해 동안은 잘 살수 있었을지 몰라도 오늘에 와서 아무것도 자체로 할 수 없는 곤난한 처지에 놓이게 되였을 것 입니다.

김일성,「사회주의건설에서 혁명적대고조를 일으키기 위하여 :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한 결론 1956년 12월 13일」, 『천리마운동과 사회주의건설의 대고조에 대하여』(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7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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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전후시기에 우리가 중공업을 우선적으로 발전시키지 않고 파괴된 경제를 복구하지 않고 형제나라들의 원조와 우리의 내부원천을 주로 인민들의 개인적 소비에만 돌렸더라면 우리는 자체의 경제토대를 쌓을 수 없었을 것이며 따라서 오늘 인민경제를 더욱 발전시키며 인민생활을 높이기 위한 5개년 계획을 세울수도 없었을 것 입니다. 전후시기에 있어서의 우리 당 경제정책의 커다란 의의는 그것이 형제나라들의 원조와 우리 나라 내부원천을 가장 합리적으로, 가장 효과적으로 리용하여 짧은 기간에 인민생활을 높일수 있게 하였으며 우리 인민경제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한 자립적 토대를 기본적으로 닦을 수 있게 하였다는 데 있습니다.

김일성,「모든것을 조국의 륭성발전을 위하여 : 최고인민회의 제2기 제3차회의에서 한 연설, 1958년 6월 11일」, 『천리마운동과 사회주의건설의 대고조에 대하여』(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70), 15~16쪽

김일성에게 있어 중공업은 민족적 자립경제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리고 김일성이 생각한 민족적 자립경제는 대외무역으로 인한 '폐해'를 최소화 하는 것이 중요한 목적이었습니다. 대외무역을 통해 외국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진다면 정치적인 자립이 위협받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습니다.

자립적 민족 경제의 기본 내용에 대한 김일성 동지의 명제에서 기본으로 되는 것은 자체의 수요를 기본적으로 자체로 보장할 수 있도록 경제를 건설하여야 한다는 것이며 이를 위하여서는 경제를 다방면적으로 발전시키고 부문들 간의 유기적인 련계를 확고히 보장하는 종합적인 경제 체계를 형성하여야 하며 인민 경제를 현대적 기술로 장비하고 자체의 원료 기지 등 생산의 물질적 요인을 자체로 튼튼히 조성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자립적 민족 경제는 한 마디로 말해서 자체의 기술, 자체의 자원, 자체의 간부와 인민의 힘에 의거하여 경제를 발전시키며 생산 수단과 소비재에 대한 국내 수요를 기본적으로 자체로 충족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자립적 민족 경제는 자체의 수요를 기본적으로 자체로 충족시킬 것을 목적으로 하는 만큼 주로 국내 시장을 대상으로 하여 발전하게 된다.

(중략)

대외 시장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에는 경제 발전의 일면성과 기형적인 구조를 면할 수 없으며 국내 수요의 원만한 충족을 보장하지 못 할 뿐 아니라 예속 경제의 참혹한 처지에서 결코 벗어 날 수 없게 한다.

정태식,『우리 당의 자립적 민족 경제 건설로선』(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63), 9~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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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력갱생. 이것은 자기 나라 혁명은 기본적으로 자기의 주체적력량에 의거하여 완수하려는 철저한 혁명적 립장이며 자기 나라 건설은 자기 인민의 로동과 자기 나라의 부원으로 진행하려는 자주적 립장입니다.

이러한 혁명적 립장과 혁명적 원칙을 견지하여야만 우리는 어떠한 복잡하고 어려운 정세에서도 혁명적 절개를 굽히지 않고 투쟁을 계속할 수 있으며 전진도상에서 제기되는 난관과 애로를 용감하게 이겨내고 혁명투쟁의 승리와 건설사업의 성과를 보장할 수 있습니다. 자력갱생의 혁명정신이 없으면 자기의 힘을 믿지 않게 되고 자기 나라의 내부원천을 동원하기 위하여 노력도 하지 않게 되며 안일성과 해이성에 사로잡히고 소극성과 보수주의를 범할 수 있습니다.

어떤 민족이든지 자립적 민족경제를 건설하여야만 정치적 독립을 보장하고 나라의 부강발전과 민족의 번영을 이룩할 수 있습니다.

경제적 자립은 정치적 독립의 물질적 기초입니다. 경제적으로 외세에 의존하는 나라는 정치적으로도 다른 나라의 추종 국가로 되며 경제적으로 예속된 민족은 정치적으로도 식민지 노예의 처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자립적 민족경제를 건설하지 않고서는 사회주의의 물질 기술적 토대를 쌓을 수 없으며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성과적으로 건설할 수 없습니다.

김일성,「국가활동의 모든 분야에서 자주, 자립, 자위의 혁명정신을 더욱 철저히 구현하자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4기 제1차 회의에서 발표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정강, 1967년 12월 16일」, 『천리마운동과 사회주의건설의 대고조에 대하여』(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70), 317~318쪽

그렇다면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경제적 교류가 북한의 '민족경제 수립'에 있어 수행해야 할 역할은 무었이었을까요? 이에 대한 김일성의 생각은 다음의 인용문이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주의 시장을 공고발전시키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매개 형제나라가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를 반대하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건설의 공동위업의 승리를 위한 정치적 리익으로 부터 출발하여 경제적 호상관계에서 프로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숭고한 정신을 발휘하여 협애한 민족리기주의를 철저히 없애는 것 입니다. 특히 발전된 사회주의 나라들이 제국주의를 반대하고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경제적으로 뒤떨어진 나라들에 어떠한 정치적 부대조건도 아무런 사심도 없는 더 많은 물질적 지원을 주어야 할 것 입니다. 그리하여 이 나라들이 제국주의 렬강들의 경제 봉쇄를 성과적으로 물리칠 뿐 아니라 자본주의 시장과의 거래를 적게 하고 사회주의 시장에 의거할 수 있는 조건을 지어주어야 할 것 입니다. 우리는 다른 모든 문제에서와 마찬가지로 대외무역관계에서도 결코 계급적 립장을 떠나거나 공산주의적 도덕과 동지적 의리를 잊어버려서는 안 될 것 입니다.

김일성, 「국가활동의 모든 분야에서 자주, 자립, 자위의 혁명정신을 더욱 철저히 구현하자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4기 제1차 회의에서 발표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정강, 1967년 12월 16일」, 앞의 책 3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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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한 형제 국가가 뒤떨어진 나라에 대하여 사심 없는 원조를 제공하여 자립적 민족 경제의 건설을 최대한으로 촉진하며 락후한 나라는 자력 갱생의 정신으로 부터 출발하여 최단 기간에 나라의 경제력을 강화하여 형제국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은 프로레타리아 국제주의 원칙으로 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정태식, 위의 책 31쪽

위의 인용문은 '외국의 간섭은 귀찮으니 경제적 지원은 아무 조건 없이 날로먹게 해주세요' 정도로 번역하면 적절할 것 입니다.

김일성은 정치적 자립(=고립)을 위해 자체 완결적인 산업 구조를 필요로 했으며 외국과의 교류는 최소한으로 제한하는 것을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 최소한의 교류 또한 북한에 대해 정치적인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는 선에서 용인되는 것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 입니다. 북한은 전후복구기에 사회주의 국가들의 막대한 원조를 통해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지만 김일성은 대외 원조보다는 북한의 자체적인 역량을 과신했습니다. 동시에 대외지향적인 공업화를 외국에 대한 경제적 예속의 길로 보았다는 점은 북한경제가 1960년대 남한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가도록 했습니다.

그 결과는 모두가 잘 알고 있지요.

2010년 1월 13일 수요일

어떤 예측

1958년, 북한 정부는 전후복구가 성공적으로 완수되었다고 자평하고 있었고 이에 대해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막대한 사회주의 형제국가들의 원조가 밑바탕에 있었지만 가장 큰 원인은 중공업 위주의 정책을 견지한 '당의 올바른 노선'에 있었다고 믿었던 것 이지요. 이렇게 자신감을 얻은 북한 지도부는 혼란을 겪고 있는 남한에 대해 우월감을 표출하게 됩니다. 아래의 인용문은 그러한 경향을 아주 잘 보여줍니다.

쏘베트 군대의 결정적 역할에 의하여 한날 한시에 해방된 공화국 남반부에 기여든 미 제국주의자들은 남조선을 강점한 첫날부터 일제를 대신하여 그 보다도 더욱 악랄한 식민지 예속화 정책을 감행하기 시작하였다.

8.15 해방후 우리나라 남반부에서는 어떠한 민주주의적 사회-경제 개혁도 실시되지 않았다. 우리 인민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졌으며 8.15 해방 직후 일제의 패잔 무리들과의 결사적 투쟁에서 우리의 로동자들이 확보하였던 공장과 광산들은 미제 독점 자본에 의하여 횡탈되였거나 매국적인 예속 자본가들의 수중에로 넘어갔다.

이리하여 우리나라 남반부 공업은 미제의 식민지 략탈 정책에 의하여 파탄과 파멸의 구렁이로 떨어지게 되었다.

오늘 남조선에서는 풍부한 전략 자원의 략탈과 관련되는 일부 공업 부문들, 례컨데 중석, 흑연, 동광과 기타 일부 섬유 제품의 생산이 극이 파동적인 곡선을 그리면서 그 생산을 풍전 등화의 운명으로 간신히 지속할 뿐 기계 제작, 야금, 화학 공업 및 기타 중요 공업 생산 부문은 전면적으로 파탄되고 있다.

8.15 해방전에 남조선에 집중되였던 일제의 식민지적 기계 제작공업 마저도 완전히 파괴되였다. 뿐만 아니라 미제의 식민지 예속화 정책으로 말미암아 기계 수입조차 억제당하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 남조선 경제는 기계에 대한 초보적인 수요조차 충족시킬 수 업는 형편에 처하였다.

제철 공업에서 본다면 그의 대표적인 기업체들인 '대한 중공업' '삼화 제철'에서 생산되던 극소량의 선철류조차 국내에서 소비되지 못하고 생산비 이하의 렴가로써 일본에 공급되였었는데 최근에는 이것마자 증가되는 적자에 못이겨 조업을 중단하고 있다.

남조선 전체 공장수의 33%, 종업원 수의 38.8%를 점하고 있는 방적 공업에서는 1956년 8월 현재로 '대한방적협회'의 발표에 의하면 면방직 공장의 조업률이 62%에 불과하며 특히 중소 직물공장에서의 조업중단률은 95%이고 전체 기업체의 82%가 조업 마비 상태에 빠지고 있다.

1955년에 남조선 제조 공업 총생산액 중에서 36%, 기업체 수의 22%를 차지한 식료품 공업은 그 대부분이 미제의 잉여 생산물인 소맥과 당밀을 원료로 하는 밀가루 제조 공업과 제탕 공업, 미국의 수입 원료로써 그들의 리윤 찌끼를 얻어 먹는 예속 자본가를 육성하는 부문으로 되고 있다.

오늘 남조선의 공업은 이와 같이 급속한 몰락과 전면적인 붕괴의 일로를 걷고 있으며 다시 소생할 아무런 전망도 없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이것이 바로 미제국주의자들의 소위 '원조'의 '혜택'이며 그의 필연적인 결과이다.

김정일, 「우리나라 공업의 발전」, 『우리 나라의 인민 경제 발전』(평양, 국립출판사, 1958), 139-140쪽

60년이 지난 오늘날에 와서는 한국이 북한 공업은 급속한 몰락과 전면적인 붕괴에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됐으니 묘하지요.

게다가 위의 인용문에서 북한측이 비판한 남한의 '매국적인 예속 자본가'들이 전후복구시기 기초적인 자본을 축적하여 1960년대 공업화의 바탕이 될 수 있었다는 점은 정말 아이러니의 극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북한에서는 이런 '예속 자본가'들의 후계자들 중 몇몇을 '민족 자본가'로 바꿔 부르기도 한다지요.

북한이 올바른 노선이라고 생각한 중공업화는 자체적인 자본 축적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추진된 까닭에 지속적인 원조를 필요로 하는 구조를 고착화 시켰고 이것은 1970년대 이후 북한 경제가 걷잡을 수 없이 붕괴되는 단초가 됩니다. 한국에서도 1960년대 중반까지 북한식의 중공업화를 추구하는 지식인들이 많았고 심지어는 남북간의 경제가 역전된 1970년대 까지도 남한 경제의 붕괴를 믿어 의심치 않는 지식인들이 있었다는 점을 보면 예측을 하기 위해서는 정치인 부럽지 않은 낯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009년 4월 18일 토요일

책을 읽던 중 떠오른 민족주의에 대한 잡상

어제 낮에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50~60년대 경제개발에 대한 책 몇권을 꺼내 놓고 두서없이 읽었습니다. 원고마감이 코앞에 닥쳤는데 이게 무슨 미친짓 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갑자기 근로의욕이 뚝 떨어졌는지라 어쩔 수 없더군요. 다행히 오후 늦게 근로의욕을 회복하긴 했습니다만.

그런데 어제 오후에 읽던 책들은 내용이 내용인지라 50~60년대 경제개발계획이 수립될 무렵 한국의 민족주의적 정치세력과 미국의 대한정책이 가지는 시각차이에 대한 내용이 많았습니다. 1950년대의 미국은 아시아에서 높아져 가는 민족주의적 움직임이 사회주의화로 나가게 될 것이라는 우려를 가지고 있었고 이때문에 4.19의 민족주의적 경향을 미심쩍게 생각했습니다. 이런 민족주의적 성향은 5.16 쿠데타 주도세력에도 일정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지금이야 박정희의 독재적 측면이 부각되어 일반적으로는 5.16 쿠데타가 가진 민족주의적 성향을 간과하는 분들이 많은데 60년대에는 그렇지가 않았지요.

결국 민족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던 군사정권의 경제정책이 수출주도형 경제정책으로의 선회한데에는 미국의 정책적인 압력이 많이 작용했습니다. 사실 미국의 원조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국내의 민족주의자들이 무리하게 내포적 공업화를 추진했다면 북한이 70년대 부터 겪었던 경제적 파탄을 조기에 겪고 남한의 국가 자체가 붕괴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하여튼 40~60년대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매우 흥미로운 시기입니다.

2009년 3월 16일 월요일

북한의 군사 공업화 - 기무라 미쓰히코, 아베 게이지

식민지시기의 공업화는 식민지근대화론과 맞물리는 매우 민감한 문제입니다. 식민지 시기의 경제적 유산이 해방 이후 경제 발전의 원천이 되었다는 논리는 사실 여부를 떠나 약간 불쾌하게 다가올 수 밖에 없습니다. 1970년대 이후 식민지시기의 경제발전과 해방 이후의 경제발전의 상관관계에 대한 수많은 연구와 논쟁이 있었고 그것은 현재까지도 진행중에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논쟁은 한국의 경제발전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기묘하게도 식민지시기 공업화가 대규모로 이루어 진 오늘날의 북한 지역에 대한 연구나 논쟁은 상대적으로 적었습니다.

이 책의 저자인 기무라 미쓰히코(木村光彦) 와 아베 게이지(安部桂司)는 식민지시기의 공업화로 인한 유산이 그대로 북한에 남겨져 1953년 이후까지도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저자들은 먼저 식민지시기, 특히 만주사변 이후 북한 지역의 중화학공업화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북한지역의 공업화에 대한 일본 연구자들의 연구는 국내에 많이 소개되었고 호리 가즈오(堀和生)의 『한국 근대의 공업화 : 일본 자본주의와의 관계』 같이 재미있게 잘 씌여진 책도 있습니다. 그런데 기무라와 아베는 북한지역의 공업화를 설명하면서 거시적인 공업화 경향에 대해 이야기 하는 대신 각 기업체와 공장의 구체적인 활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기업이 언제 어느 지역에 어떤 투자를 해서 무엇을 생산했는가. 저자들은 본문에서 거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분량을 1945년 이전 북한 지역의 일본 기업활동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보론으로 남한 지역의 군수공업에 대해서도 간략히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 또한 좋은 참고가 됩니다. 개별 기업의 활동을 대략적으로 서술해 놓았기 때문에 참고 자료로서 활용도가 높습니다.

1945~50년 시기에 대한 서술은 상대적으로 간략합니다. 저자들은 해방 직후 혼란기에 소련 점령군과 북한인들이 일본 기업을 인수해 산업을 복구하는 과정과 1950~51년 사이에 기초적인 군수공업이 형성되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한데 저자들은 북한이 주장하는 식민지 유산과의 단절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주장과는 달리 상당수의 기업들이 혼란기에 파괴를 면하고 그대로 북한의 공업 기반이 되었음을 개별 공장들의 사례를 들어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자들은 이렇게 북한에 승계된 공업기반이 북한의 전쟁 준비에 동원되는 과정으로 넘어갑니다.

저자들은 일본이 남긴 공업화의 유산이 북한에 승계되는 과정을 증명함으로서 북한이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있는 식민지 유산의 단절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 발 더 나가 식민지의 유산이 1953년 이후의 공업화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합니다. 그렇지만 식민지 유산이 한국전쟁 이후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실질적인 근거를 충분히 제시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설득력이 약합니다. 부록에서 해방이전 일본이 건설한 공장들이 오늘날 북한의 어떤 공장으로 승계되었는가를 정리한 표를 실어 놓았지만 이것 이외에는 주장을 입증할 만한 서술이 부족합니다. 그렇지만 식민지 공업이 해방 이후의 북한에 승계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복원해 낸 점은 주목할 만 합니다.

2008년 7월 23일 수요일

남한과 북한의 5개년 계획에 대한 몇 가지 잡상

지난 해에 북한 경제 관련 논문을 조금 읽다가 생각난 것들을 「북한의 50~60년대 경제성장에 대한 잡상」이라는 제목으로 끄적인 적이 있었는데 최근 sonnet님 등 여러 대인들께서 이 썰렁한 잡글을 인용해 주셔서 조회수가 대폭 증가했습니다! 그리고 이 글이 인용된 것을 보니 박정희와 김일성의 공업화를 어떻게 볼 것이냐에 대한 토론이 진행되고 있더군요. 많은 분들의 견해를 접하게 되어 좋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여러 대인들께서 이 어린양의 싱거운 글에 관심을 보여주셨으니 변변찮으나마 예전에 했던 이야기에 몇 가지 사족을 달아 볼까 합니다. 깔끔하게 정리가 안된 어수선한 글이라서 미리 읽으시는 분들께 양해를 구합니다.

먼저 남한과 북한의 5개년 계획의 성격 문제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미 sonnet님이 「미국의 대한원조와 경제성장의 시작」이라는 글에서 양자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 해 주셨습니다.
요상하게도 박정희를 싫어하는 분들은 간판이 똑같다는 이유로 박정희의 5개년 계획이 김일성의 그것을 그대로 베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근거는 전혀 없죠. 기본적으로 남한의 5개년 계획은 무역에 기반한 성장을 추구한 것인 반면 북한의 5개년 계획은 ‘자립적 민족경제’ 건설이라는 망상적 목표에 가용 자원을 싹 쓸어넣은 정신병적 도박이었기 때문입니다.

북한의 5개년 계획의 성격은 1958년 3월의 당 제1차 대표자 회의에서 채태된 결정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결정서에서는 “제 1차 5개년 계획 기간에 사회주의적 공업화의 토대를 확고히 축성함으로써 우리 공업의 식민지적 편파성과 기술적 락후성을 완전히 퇴치하고 민족경제의 자립적 토대를 더욱 공고히”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즉 5개년 계획의 목표가 ‘자립적 민족경제’ 건설에 있음을 명확히 하고 있는 것 입니다. 해외 무역을 통한 성장을 추구한 남한의 5개년 계획과 근본적인 성격 부터가 다릅니다. 그리고 이 5개년 계획은 기본적으로 중공업에 의해 이끌어져 나갈 것 이었습니다. 김일성은 이 회의에서 중공업이 없이는 경공업과 농업이 도저히 발전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1957년의 경제 성과를 예로 들어 중공업 우선노선을 반대한 세력을 공격합니다.

하지만 1957년의 경제적 성과는 소련과 동유럽의 막대한 경제 원조를 바탕으로 달성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은 이 문제점에 대해서는 별로 고려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북한은 자체적으로 중공업 위주의 발전을 수행할 만한 자본이 아직 축적되어 있지 않았고 여전히 외부의 경제적 원조가 결정적인 요인이었습니다. 이 문제점은 김연철의 연구가 잘 지적하고 있는데 이미 전후 복구 3개년 계획이 종결된 시점에서 사회주의권의 원조는 감소추세에 있었고 북한은 축적된 자본의 부족과 기술수준의 저열함을 ‘정신력’으로 상쇄한다는 심히 일본제국주의 스러운 방식으로 나갑니다. 대표적인 것이 천리마 운동이지요. 외형적으로 보면 분명히 북한의 1차 5개년 계획은 생산량의 증대를 가져왔지만 실제로 그 내용을 분석하면 생산품의 질적 저하가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게다가 1950년대 후반기부터 소련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에너지 공급이 감소하자 대외의존적인 북한의 중공업은 치명적 타격을 받습니다.

※ 1950년대 소련과 동유럽의 대북한 원조에 대해서는 「북한의 전후 복구에 대한 "사회주의 형제국가"들의 지원」에 조금 적은 것이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잘 알고 계시겠지만 한가지 더 이야기 하자면 1960년대 북한의 공업생산 성장률은 1950년대의 전후 복구기와 비교하면 급격히 저하되는 것이 특징입니다. 1954년부터 1960년까지의 공업 총생산액은 연평균 39%에 달했지만 1961년에 들어오면 이것은 14%로 낮아지고 1963년에는 8%로, 그리고 1964년에 17%로 증가했다가 다시 감소해 1966년에는 아예 마이너스 성장을 합니다. 북한경제는 벌써 1960년대부터 엉망이었던 것 입니다.

일단 정리하자면 김일성은 소련의 5개년 계획을 모방해 지속적인 중공업화를 추진했지만 이것은 북한 자체의 경제적 역량 미비로 실패하게 됩니다. 사회주의 국가들의 중공업화는 근본적으로 국가 자체의 자기완결적 경제체제를 만드는 것이 목표인데 이것은 제한된 자원을 중공업에 올인하는 도박이기 때문에 위험도가 높은 정책입니다. 스탈린 시절의 소련은 자체적인 경제적 자원 규모가 컸기 때문에 중공업화로 인한 후유증을 자체적으로 어느 정도 흡수할 수 있었지만 경제 규모가 작은데다 외국의 원조에 의존한 북한은 실패할 경우 그 충격을 흡수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실패하면서 북한 경제는 1960년대 내내 심한 부침을 거듭하며 침체에 빠졌는데 김일성은 끝까지 중공업화를 포기 하지 않기 위해서 1970년대에 서방의 자본을 통한 중공업화를 추진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다 아시다시피 대 재앙이었습니다. 지난 글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1970년이 되면 이미 남한은 전체 수출의 50% 이상을 경공업 제품으로 할 수 있을 정도로 수출 기반을 마련했지만 1970년대 초반 국제 경제체제에 발을 담근 북한은 여전히 1차산업 위주의 수출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오일쇼크로 인한 원자재가 하락은 북한에게 결정타로 작용했지요.

그리고 다음으로는 「원조라는 관점을 약간 확장해 보면...」이라는 기린아 님의 글에 인용된 도표에 대해서 조금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저는 처음에 이 도표를 봤을 때 이 도표가 10년 단위의 수출 통계를 정리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가진 책을 몇 권 뒤져보니 그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 도표는 이대근의 『한국무역론』(2003)에 실린 도표와 비슷한데 이대근과 같은 자료를 참고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대근의 한국 무역론에 실린 도표는 1961년과 1970년을 기준으로 한 수출상품의 구성 변화를 나타낸 것 입니다. 즉 기린아님의 블로그에 인용된 표의 “1960”은 아직 박정희가 집권하기 전인 1961년의 수출구조를 나타내는 것이고 “1970”은 글자 그대로 1970년의 수출구조를 보여주는 것 입니다.

이대근의 연구에 따르면 1961년도의 수출은 1위가 철광석(13.0%), 2위가 중석(12.6%), 3위가 생사(6.7%), 4위가 무연탄(5.8%), 5위가 오징어(5.5%), 6위가 활선어(4.5%), 7위가 흑연(4.2%), 8위가 합판(3.3%), 9위가 쌀(3.3%), 10위가 돼지털(3.0%)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1차 5개년 계획의 성공과 뒤 이은 2차 5개년 계획의 성공으로 이런 구조는 급격히 변화합니다. 1970년의 수출 구조를 보면 1위는 섬유류(40.8%), 2위는 합판(11.0%), 3위는 가발(10.8%), 4위는 광산물(5.9%), 5위는 전자제품(3.5%), 6위는 과자류(2.3%), 7위는 신발류(2.1%), 8위는 담배(1.6%), 9위는 철강제품(1.5%), 10위는 금속제품(1.5%)로 변화되어 있습니다. 즉 이미 1960년대 중반 이후 남한의 수출구조는 1차산업에서 2차산업으로 변화해 있었고 1970년의 수출구조 통계는 그 것의 결과를 보여주는 것 입니다. 북한이 여전히 1차산업 생산품 위주의 수출을 구상하고 있을 때 남한은 이미 오래 전에 수출구조를 혁신하는데 성공한 것 입니다. 물론 김낙년이 지적한 것 처럼 1960년대 남한의 공업화는 부실한 재무구조를 가진 수출기업 등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지만 시작부터 제자리에서 부침을 거듭하다가 스스로의 모순에 짓눌려 자빠져 버린 1960년대의 북한의 공업화와는 비교할 수 없는 대성공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