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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19일 일요일

1963년 9월 20일 김종필이 Farleigh Dickinson 대학에서 한 연설

지난번에 이야기 했었던 김종필의 연설문 한개를 번역했습니다. 읽어보시면 박정희의 『국가와 혁명과 나』의 축약본 같다는 느낌도 받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미국 쪽 반응이 어땠는지는 아직 확인할 길이 없는데 나중에 확인할 기회가 생긴다면 재미있을 것 같군요.


사마티노Peter Sammartino 총장님, 존경하는 여러 교수님, 그리고 학생 여러분.

이곳과 같은 명문 대학에서 “신생 민주국가의 리더쉽Leadership in the Newly Developing Democratic Countries”에 관한 저의 짧은 생각을 말씀드릴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을 크나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학자가 아니며 더구나 정치인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지위에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래서 이런 짧은 시간에 이같이 중요한 문제를 충분히 말씀드릴 수 있을지 걱정이 됩니다.

미국은 20세기 중반 이래로 자유세계 전체를 지도하는 국가가 됐습니다. 오늘날 자유세계의 운명은 미국에 달려있기 때문에, 자유세계의 미래는 바로 여러분, 미국 학생들의 리더쉽에 달려있다고 하겠습니다. 실제로 저 뿐만 아니라 자유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경험했던 과거의 역사와 현재 처해있는 상황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미국 청년 학생들의 성향과 포부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실제로 여러분이 세계에 더 나은 미래를 가져다 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저와 같이 보잘것 없는 학생이 이곳에 모이신 훌륭한 분 들 앞에 서게 된 것 입니다.

지구상에 인류가 출현한 것은 대략 50만년 전이었을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이 긴 역사를 거치면서 인류는 성쇠를 거듭하면서 자연선택과 적자생존, 그리고 진화라는 불변의 법칙에 따라 현재의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그렇지만 인류의 역사는 민족 집단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실제 인류 역사에서는 한 종족이 다른 종족에게 적개심을 품은 것이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Nevertheless, the history of humanity is the history of national races, and it is a reality of world history that antagonism of one race to another has played a principal part.)

오늘날 우리는 민족 집단의 상대적인 가치가 개발-저개발, 문명-야만, 풍요-빈곤과 같은 단어에 의해 명확하게 구분되는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이같은 현상적인 차이는 50만년에 걸친 인류 역사에 작용한 진화의 법칙에 따른 결과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차이가 지난 수 세기 동안 있었던 진보적인 종족과 보수적인 종족 사이에 있었던 불가피한 차이로 부터 발생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역사의 발전은 어떠한 형태도 없는 불안정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특정한 경향을 가진 규칙적인 법칙에 따라 이루어진다. 그리고 역사적인 현상의 필수적인 요인들은 절대로 우연적인 지위가 아니라 항상 필연적인 지위에 있다.” 19세기를 유럽 국가들이 아시아 국가들을 식민지, 반식민지로 만든 제국주의 시대라고 칭한다면,  20세기는 아시아 국가들이 식민 지배자들의 압제를 떨쳐내고 자주독립을 향해 나아가는 민족주의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을 것 입니다. 오랫동안 외세의 지배를 받으며 착취당하는 운명에 처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후진국들이 설사 민족주의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수용하는데 그친다 하더라도, 이들 국가들이 민족주의 체제로 전환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할 것 입니다.

그리고 역사는 원인과 그 영향의 연쇄작용입니다. 지금 시작된 원인은 수십년 뒤, 또는 수백년 뒤에 반드시 영향을 끼치게 될 것 입니다. 그리고 어떤 원인의 상대적인 평가는 후손 세대의 행운 혹은 불운에 따라 매겨질 것 입니다. 현재의 후진성의 씨앗이 수세기 전에 뿌려진 것이라고 한다면, 민족주의와 자주에 대한 자각이 후진국에서 유독 강하게 나타나는 것은 본질적으로 역사적 진실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1945년에 제2차세계대전은 자유세계와 공산진영간의 냉전으로 전환되었습니다. 그리고 세계정세는 오늘날 까지도 이렇게 지속되고 있습니다. 국제 공산당은 후진국의 민족주의로 인한 이점을 능숙하게 활용하고 있으며, 특히 후진국을 반미적인 배타주의로 이끌어 이들 국가의 앞날에 혼란을 야기하고,  악화시키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이런 방식으로 합리적인 민족주의 마저도 위험하고 사악한 것으로 생각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점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은 자유세계 국가간의 국제적인 협조 체계를 더욱 교란할 수 있습니다.

학생 여러분.

역사는 한 민족의 생존은 궁극적으로 그 민족의 책임이며 이와 같은 특성은 어떠한 환경에서 변하지 않는다는 점을 올바르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민족의 역사와 전통에 대한 자각으로 강화된 민족의 자주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을 가지고 진보하는, 그리고 “어느 한 민족”이 가지고 있는 날카로운 자의식, 즉 배타적이거나 봉쇄적이지 않으며 유아론에 매몰되지 않고 굴종적이지 않으면서 국제 협력이라는 추세에 따르는  합리적인 민족주의  없이 후진국이 존속하고 발전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을 미래에 자유 세계를 이끌어 나갈 학생 여러분에게 구하고자 합니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안정된 국가가 직면하는 문제는 상대적으로 특별한 문제가 없습니다. 후진국의 경우에는 그 국가가 낙후되어 있을 수록 불만이 많고 요구 사항이 많아집니다. 정치적, 경제적인 불안정으로 인한 불만이 커져서 폭발하기 직전에 이르고, 종종 상충되기도 하는 사안을 동시에 해결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요구사항은 복잡하고 대처하기 어려울 정도가 됩니다. 후진적인 민주국가의 세기말적인 비극은 이들 국가가 수많은 요구사항을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에 생겨난 것일까요?

오늘날의 또 다른 특징은 대부분의 후진국가는 사실상 그 주권이 강대국에 의해 제약받고 있다는 것 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어느 정도는 피치 못할 과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개별 민족의 민족주의는 강대국의 성장에 따라 사그라 들었지만 본질적으로는 강대국들도 자국민들을 자국의 이해관계와 융성을 기반으로 하는 민족주의라는 국가적 규범으로 결속시키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실 이런 현상을 통해 강대국들은 국가 단위에 기반한 지역 내 공영권을 만들어 확대해 나간 것 입니다.

학생 여러분.

비참한 상황에 처해있는 민주주의 국가가 있습니다. 그곳은 바로 저의 조국 대한민국입니다. 한민족은 4세기에서 5세기에는 만주의 대부분을 영역으로 할 정도로 강성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초에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병합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어떤 민족이라도 흥망성쇠의 과정을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어째서 용맹하고 진취적이었던 한민족이 퇴보하여 5천년 역사동안 지켜온 영토를 일본의 식민지로 내주게 된 것일까요? 우리 스스로를 돌아봐야 합니다. 14세기 말 부터 20세기 초 까지 한반도를 5백년 동안 통치한 왕조는 이씨 왕조였습니다.

유럽에서는 14세기 말 부터 15세기 사이에 르네상스가 일어났습니다. 이 시대는 봉건사회가 쇠퇴하고 귀족과 교회의 권위가 떨어지면서 도시와 시민계급이 발흥하면서 절대주의 국민 국가가 건설되거나 강력하게 추진되고 있었습니다. 달리 말하면 이때는 자유롭고 인본주의적인 문화를 갈망하던 때였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이씨왕조는 사대와 퇴보의 원인이었던 유교를 국교로 삼았습니다. 유교를 국가적인 이상으로 삼으면서 봉건적인 사회 제도에 기반한 유교적 관료제를 구축하여 오늘날의 후진성을 낳은 씨앗을 뿌린 것 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5백년 동안 유교를 유일한 이상으로 숭상했습니다. 유교는 비과학적인 관념론으로 안일한 삶을 살면서 무의미한 허세, 목청만 높을 뿐 아무런 성과도 없는 분노로 긴 시간을 낭비했을 뿐 이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렇게 해서 후손들에게 도덕적인 나약함 뿐만 아니라 문치주의와 국민을 분열시키는 무자비한 당파싸움이라는 비극의 씨앗을 뿌렸고, 이같은 사악한 근원은 오늘날 까지도 이어져 내려오는 서글픈 유산이 된 것 입니다.(Thus they planted for their posterity not only the root of moral weakness, but also the calamity of the literarit and the ruthless factional strife that divided the people, with the result that these evil roots have been handed down to this date as a sad national legacy.)

학생 여러분.

저는 앞서 선진국과 후진국의 결정적인 차이는 지난 수 세기 동안 발생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유럽인들은 르네상스 이래로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면서 피와 땀, 그리고 눈물을 흘려가며, 그리고 혼란과 혁명의 소용돌이와 전쟁, 무참한 비극에 직면하여 시행착오를 거쳐 문제를 하나 하나 해결하면서 오늘날의 민주주의적인 제도, 번영과 자유를 이룩한 것 입니다.

열강이 세계를 식민지로 분할하고 있던 시점에서 공허한 담론과, 고식, 지배층의 당파싸움, 퇴행적인 사대과 쇄국에 빠져있던 한국이 민족주의를 자각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새롭게 발흥한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We may see clearly here that it was by no means accidental that Korea, immersed in empty arguments, temporizing, aristocratic factional strife, retrogressive subservience and isolation, finally fell, without even being conscious of nationalism, as the colony of then emerging Japan in the era which the Powers were dividing the world into colonies.)

한국은 일본의 지배를 36년간 받은 뒤 연합군이 일본을 무찌른 1945년에서야 일본의 압제로 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불행은 해방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국은 인위적인 분단으로 인해서 더욱 더 마비되고 말았습니다. 1910년 이래 한민족의 염원은 일본으로 부터의 독립이었습니다. 하지만 1945년 부터는 한가지 절실한 염원이 추가되었습니다. 바로 민족의 통일 입니다. 하지만 신께서는 한민족에게 한가지 시련을 더 안겨 주셨습니다. 1950년 북한 괴뢰정권과 중국 공산당의 붉은군대가 무방비 상태의 대한민국을 기습적으로 침략했습니다. 한국인이 한국인을 죽이는 동족상잔으로 한국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습니다. 공산당의 침략으로 2백만명에 달하는 한국인 뿐만 아니라 10만명에 달하는 UN군도 희생되었습니다. 수만명에 달하는 여러분의 선배, 친구, 일가친척이 한국이라는 외국 땅에 자유의 수호자로서 잠들어 있습니다. 이같은 사실은 미국이 자유세계를 수호하겠다는  엄숙하고 단호한 선언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먼 미래에 이르기까지 미국민이 한국민과 변치않는 우정과 상호신뢰 속에 살아갈 것이라는 생생한 증언입니다.

학생여러분.

저는 지금까지 민족주의가 후진국의 발전을 위한 정신적인 원동력이기도 하지만 한국의 후진성의 원인이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한 국가의 생존은 궁극적으로 그 국가의 책임이라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후진국이 후진성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 국가의 국민들이 “나의 조국”이라는 확고한 인식을 가지고 미래를 내다보고 정신적인 기반을 만들어줄 합리적인 민족주의를 가져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서구에서 수입된 일반적인 정치적 관념에서는 이와 같은 민족주의는 성공할 수 없으며 대개는 혼란만을 낳을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1945년 부터 16년 동안 한국에서는 자유민주주의가 시련을 겪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한국에 잘 맞지 않는 서구에서 받아들인 그대로의 자유민주주의를 시행하려고 했습니다. 그 결과 정치는 정당간의 투쟁의 장이 되었고, 경제는 파탄이 났으며, 사회는 무법천지가 되었고, 자유는 방종과 혼란으로 대체되었습니다.(Namely, we put it into practice as it is practiced in the West, which did not really suit Korea. The consequence is that politics became partisan strife, the economy went bankrupt, society turned lawless, freedom was replaced by license and disorder.) 이 때문에 1960년과 1961년에 두 차례의 혁명이 일어났던 것 입니다. 되돌아보면 이같은 역사는 한국에 민족주의적인 자각과 전통적인 이데올로기가 부족하고 결여되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제 대한민국 전체가 불굴의 의지, 인내심과 희망, 그리고 과거 우리 조상들의 과오를 진정으로 바로잡고자 하는 마음으로, 합리적이고 올바른 민족주의의 기초위에 자유와 민주주의를 굳건히 재건하고자 분투하고 있습니다. 선진국에서 밟아왔던 과정을 따르기만 한다면 올바른 민주주의가 언제 어디에서건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생각은 모든 필수조건, 특히 경제적인 뒷받침을 먼저 마련할 수 없다면 민주주의는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생각으로 바꿔야 할 것 입니다.(The concept that a sane democracy will suceed anywhere and under any circumstances if the process followed in the developed countries is repeated should be replaced by the logic that a democracy will forfeit its universality unless all the prerequisities, particularly the economic underpinning, can be met beforhand.)

저는 황금률을 교조적으로 따르거나 권위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이데올로기와 학설은 버려야 한다고 굳게 믿습니다. 현실에 적합한 양립적이고 유연한 민주주의를 독립적으로 개별 국가의 상황에 맞춰 실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선진국의 다양한 민주체제가 수세기에 걸친 시행착오를 거쳐 수많은 희생을 치르고 충분한 경제적 토대를 갖춤으로써 완성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전혀 다른 경로를 밟고 있는 국가들이 선진국과 동일한 민주주의를 그저 받아들이거나 흉내내는 방식으로 실현할 수 없다는 점은 명확한 것 입니다.

한 국가가 오랜 경험과 실험을 거쳐 민주주의를 국가에 맞추고, 이를 적절히 소화해서 받아들여 자국의 고유한 것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잘못된 것 입니까? 모든 곳에서 기적과 횡재가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로마는 하루 아침에 건설된 것이 아닙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후진국의 비극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 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후진국들은 역사적인 배경과 오늘날의 현실간의 차이, 경제적인 궁핍함과 국제 정세에서 기인하는 보이는 압력과 보이지 않는 압력을 극복하면서 신념과 지혜를 가지고 국가를 높은 목표로 이끌어 나갈 수 있는 강력한 “지도력”을 절실히 필요로 합니다.(At any rate, they are in acute need of a strong “leadership” which can surmount the contradiction between historical background and present reality, their nation’s economic destitution and visible and invisible pressure of an international nature, and yet can guide their nations towards a lofty objective with conviction and wisdom.)

저는 20세기 정치 환경의 특징적 현상으로서 강력한 정부와 지도자의 출현, 그리고 그에 따르는 강력한 중앙집권을 제시했습니다. 이것은 모든 국가가 여러가지 방식으로 자국을 보호 하고 자국의 위상을 드높이는 것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한다는 사실에 기인합니다. 또한 개인의 자유와 정부의 권위는 국가의 국내외적인 활동을 통해 나타낼 수 있는 것 입니다.

선진 민주국가들은 자국의 “지도력”을 현저히 강화시켰으며, 의회정치로 인해 발생하는 원심효과를 상쇄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변화무쌍한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강력한 지도력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작은 민주주의 국가가 후진성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강력한 지도력을 강조해야 한다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 입니다. 정치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선진 민주주의 국가와 국민의 문화적 수준이 높은 곳 에서는 여론에 따르는 통치가 가능할 수 도 있을 것 입니다. 하지만 민주국가의 지도자는 스스로의 신념과 이상을 바탕으로 대중 여론을 이끌어가고 국민의 가슴속에 희망과 의욕, 용기를 불어넣어야 합니다. 후진국에서는 국민이 일상의 궁핍함 때문에 민주주의를 “골칫거리”로 여깁니다. 그래서 후진 민주국가의 지도자는 국민이 민주주의 참된 가치에 감사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후진 민주국가의 지도자는 민족정신을 북돋고 진보적인 국가로 나가는 길로 국민을 이끌어서 정치에 신물이 난 국민을 부흥 시켜야 합니다. 후진 민주국가의 지도자는 후진성의 모순에서 기인하는 국민의 불만을 합리적이고 올바른 방향으로 해소하여 국력을 신장시켜야 합니다. 저는 뚜렷한 목표를 제시하고 국민이 이에 따르는 것이야 말로 후진 민주주의 국가의 지도력의 본질이라고 봅니다. 후진 민주주의 국가의 발전에 있어서 올바른 행정 기구의 수립은 시급한 문제입니다. 하지만 이것의 성패 여부 또한 대부분 지도자와 그의 지도력에 달려있음은 자명한 것 입니다. “국가”의 운명이 개인의 운명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이해한다면, 행운을 바라지 않고  근면하게 노력하고, 미래를 바라보면서 현재의 상황을 견디고, 과거를 딛고서 긍정적인 미래로 나가려 노력하는 진정한 “지도력”이 후진국에 필요하다는 점을 거듭해서 이야기 할 필요가 없을 것 입니다.

이제 제 두서없는 이야기를 마칠 때가 되었습니다.

미래가 없는 국가는 그저 비극적이라 하겠습니다. 세계의 평화와 번영, 그리고 인류의 행복은 단지 강대국들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개발도상국들 스스로의 발전과 노력이 기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현실이 될 수 없을 것 입니다.

미래의 열쇠를 쥐고 있는 존경하는 학생 여러분. 수억명의 자유인이 여러분에게 희망과 기대를 걸고 있으며 하루하루의 비극과 빈곤을 견디며 밝은 미래를 고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제 이야기를 마치면서, 이 기회를 빌어 대한민국과 한국민의 독립과 통일, 자유를 위해 항상 아낌없이 헤아릴수 없는 신실한 도움을 주신 미국민들께 한국 속담을 인용하여 진심어린 감사를 드립니다.

그 한국 속담은 이렇습니다. “덕을 베푼 사람은 떠나도 덕은 남는다.”

감사합니다.

“Address of Ambassador Chong Pil Kim, of the Republic of Korea at Farleigh Dickinson University, Rutherford, New Jersey, September 20, 1963”, James A. Van Fleet Papers Box 70/Folder 9 1961-1962, 마샬재단


2013년 6월 8일 토요일

어떤 소신(???)

정치인들의 소신 발언(???)을 시간이 지난 뒤 읽어보는 것은 호사가들의 소소한 재미입니다.


나는 자유당에 소속하여 일하고 있는 것을 영예롭게 생각하고 있다. 왜 그러냐하면 오늘날 우리 나라의 현 실정으로 보아 양단된 국토와 파괴 혼란된 강토우에 국리만복을 증진할 길은 오직 하나 있으니, 이것은 협력-건설일 것이다. 정치의 혼란은 행정의 혼란을 초래할 것이다. 싸움과 혼란속에서 국민은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무엇이 국가를 이롭게 하고 백성을 편하게 할 것인가 말이다. 난경(難境)을 극복하고 궁지를 벗어나는 유일의 비결은 언제나 있는 힘을 다 합치는 협력이다. 남북이 통일되고 국토가 평화될 때 까지는 무엇보다도 협력건설이다. 싸움은 그 후의 이야기다. 정치는 인기 노름인데, 인기없는 자유당에 소속하여 묵묵히 일하는 것이 하나의 애국운동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럼으로 해서 나는 자유당에 소속하여 일하는 것을 영예로 생각한다고 한 것이다. 우리나라 정치가 하로바삐 성실의 정치, 노력의 정치의 정도로 올라가기를 염원하고 나 역시 과거에 걸어온 성실과 노력의 신조를 장래에도 꾿꾿히 가지고 나가게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한희석(韓熙錫, 1909~1983)
『내가 걸어온 길, 내가 걸어갈 길 : 나의 政治白書』(월간 新太陽별책, 신태양사, 1957),   312쪽


한희석은 자유당 소속으로 천안의 국회의원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유당의 대통령선거대책위원장으로 3ㆍ15부정선거의 주모자 중 한명으로 꼽히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묵묵히 일하는게 너무 지나친 듯 싶습니다. 당연히 한희석은  4월 혁명이 터지고 부정선거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구속 됩니다. 이듬해에 일어난 군사쿠데타는 한희석에게 일생 일대의 위기가 되는데 바로 혁명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게 된 것 입니다.


그러나 한희석은 감형되어 출소할 수 있었고 그 뒤로는 무탈하게 살다가 천수를 누리고 갔다고 합니다.

2011년 8월 4일 목요일

민폐

유별나게 군대와 인연(?)이 많으셨던 시인 모윤숙 여사가 5ㆍ16직후 쿠데타를 지지하는 군부대 순회강연을 다닐때의 일화랍니다.

어느 연대 마당에 이르렀을 때에는 벌써 오후가 되어 싸늘한 산바람이 일고 있을 때였다. 2~3,000명으로 헤아일 수 있는 사병이 모두 땅바닥에 앉아 있었다. 나는 준비된 사회자의 소개에 의해 연단에 올라섰으나, 도무지 마음이 편안치가 안았던 것은 내 말이 무슨 말이던 땅바닥에 앉아 듣는 사병에게는 너무 지나치는 푸대접이 아닐가 생각되어서 무엇보다 한 연대에 하나씩 속히 대강당을 지어서 그들로 하여금 안정된 자리를 마련해 줌이 옳겠다고 생각되었다.

毛允淑,「一線에 다녀와서 : 巡回講演 感想記」, 『國防』117호(1962. 1), 114쪽

군대를 다녀오신 분들이라면 이 글을 읽고 살짝 짜증이 나실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때의 군대는 극도로 열악한 복무환경을 자랑하고 있었으니 요즘 군생활과는 비교할 것도 아니겠습니다만.

쿠데타 직후 ‘군사혁명’을 지지하는 지식인들의 목소리가 여기 저기서 터져 나왔고 우리의 모윤숙 여사도 그 중 한 분 이셨다지요. 당시 군부에서는 쿠데타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실제로 상당한 효과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당연히 군대 내에서도 정훈교육을 통해 관련 교육이 이루어졌고 모윤숙과 같은 지식인들의 강연은 그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맨 땅바닥에 앉아서 지루한 강연을 들어야 했던 병사들은 어떤 생각이었을지 궁금하군요. 모윤숙이 불편함을 느낄 정도였으니 당사자들은 어떤 심정이었을지.

2009년 6월 7일 일요일

救職의 決斷!

통계는 어떤 문제에 대해 긴 글 보다 더 명확한 설명을 해 준다는 점에서 매력적입니다.

아래의 표는 1961년의 육군 장교 전역 통계입니다.


이 통계 또한 재미있는 사실을 한 가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추가

윤민혁님이 댓글에 문제를 제기해 주셔서 표를 하나 더 올립니다. 1962년도의 육군 장교 전역에 대한 자료는 제게 없어서 1960년의 통계만 올립니다. 1960년 또한 4ㆍ19로 인한 정권교체라는 커다란 정치적 사건이 있었던 해 입니다. 1960년의 통계 또한 재미있는 점을 보여줍니다.


이 표에서 괄호로 표시한 숫자는 감군 계획에 따라 1960년도에 감축할 장교의 숫자입니다. 재미있게도 4ㆍ19이후 원래 예정에 없던 장군 전역이 늘어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영관급과 위관급에서도 원래 계획 보다 더 많은 숫자의 장교가 전역하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2009년 4월 18일 토요일

책을 읽던 중 떠오른 민족주의에 대한 잡상

어제 낮에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50~60년대 경제개발에 대한 책 몇권을 꺼내 놓고 두서없이 읽었습니다. 원고마감이 코앞에 닥쳤는데 이게 무슨 미친짓 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갑자기 근로의욕이 뚝 떨어졌는지라 어쩔 수 없더군요. 다행히 오후 늦게 근로의욕을 회복하긴 했습니다만.

그런데 어제 오후에 읽던 책들은 내용이 내용인지라 50~60년대 경제개발계획이 수립될 무렵 한국의 민족주의적 정치세력과 미국의 대한정책이 가지는 시각차이에 대한 내용이 많았습니다. 1950년대의 미국은 아시아에서 높아져 가는 민족주의적 움직임이 사회주의화로 나가게 될 것이라는 우려를 가지고 있었고 이때문에 4.19의 민족주의적 경향을 미심쩍게 생각했습니다. 이런 민족주의적 성향은 5.16 쿠데타 주도세력에도 일정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지금이야 박정희의 독재적 측면이 부각되어 일반적으로는 5.16 쿠데타가 가진 민족주의적 성향을 간과하는 분들이 많은데 60년대에는 그렇지가 않았지요.

결국 민족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던 군사정권의 경제정책이 수출주도형 경제정책으로의 선회한데에는 미국의 정책적인 압력이 많이 작용했습니다. 사실 미국의 원조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국내의 민족주의자들이 무리하게 내포적 공업화를 추진했다면 북한이 70년대 부터 겪었던 경제적 파탄을 조기에 겪고 남한의 국가 자체가 붕괴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하여튼 40~60년대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매우 흥미로운 시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