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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19일 일요일

1963년 9월 20일 김종필이 Farleigh Dickinson 대학에서 한 연설

지난번에 이야기 했었던 김종필의 연설문 한개를 번역했습니다. 읽어보시면 박정희의 『국가와 혁명과 나』의 축약본 같다는 느낌도 받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미국 쪽 반응이 어땠는지는 아직 확인할 길이 없는데 나중에 확인할 기회가 생긴다면 재미있을 것 같군요.


사마티노Peter Sammartino 총장님, 존경하는 여러 교수님, 그리고 학생 여러분.

이곳과 같은 명문 대학에서 “신생 민주국가의 리더쉽Leadership in the Newly Developing Democratic Countries”에 관한 저의 짧은 생각을 말씀드릴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을 크나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학자가 아니며 더구나 정치인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지위에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래서 이런 짧은 시간에 이같이 중요한 문제를 충분히 말씀드릴 수 있을지 걱정이 됩니다.

미국은 20세기 중반 이래로 자유세계 전체를 지도하는 국가가 됐습니다. 오늘날 자유세계의 운명은 미국에 달려있기 때문에, 자유세계의 미래는 바로 여러분, 미국 학생들의 리더쉽에 달려있다고 하겠습니다. 실제로 저 뿐만 아니라 자유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경험했던 과거의 역사와 현재 처해있는 상황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미국 청년 학생들의 성향과 포부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실제로 여러분이 세계에 더 나은 미래를 가져다 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저와 같이 보잘것 없는 학생이 이곳에 모이신 훌륭한 분 들 앞에 서게 된 것 입니다.

지구상에 인류가 출현한 것은 대략 50만년 전이었을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이 긴 역사를 거치면서 인류는 성쇠를 거듭하면서 자연선택과 적자생존, 그리고 진화라는 불변의 법칙에 따라 현재의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그렇지만 인류의 역사는 민족 집단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실제 인류 역사에서는 한 종족이 다른 종족에게 적개심을 품은 것이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Nevertheless, the history of humanity is the history of national races, and it is a reality of world history that antagonism of one race to another has played a principal part.)

오늘날 우리는 민족 집단의 상대적인 가치가 개발-저개발, 문명-야만, 풍요-빈곤과 같은 단어에 의해 명확하게 구분되는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이같은 현상적인 차이는 50만년에 걸친 인류 역사에 작용한 진화의 법칙에 따른 결과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차이가 지난 수 세기 동안 있었던 진보적인 종족과 보수적인 종족 사이에 있었던 불가피한 차이로 부터 발생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역사의 발전은 어떠한 형태도 없는 불안정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특정한 경향을 가진 규칙적인 법칙에 따라 이루어진다. 그리고 역사적인 현상의 필수적인 요인들은 절대로 우연적인 지위가 아니라 항상 필연적인 지위에 있다.” 19세기를 유럽 국가들이 아시아 국가들을 식민지, 반식민지로 만든 제국주의 시대라고 칭한다면,  20세기는 아시아 국가들이 식민 지배자들의 압제를 떨쳐내고 자주독립을 향해 나아가는 민족주의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을 것 입니다. 오랫동안 외세의 지배를 받으며 착취당하는 운명에 처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후진국들이 설사 민족주의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수용하는데 그친다 하더라도, 이들 국가들이 민족주의 체제로 전환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할 것 입니다.

그리고 역사는 원인과 그 영향의 연쇄작용입니다. 지금 시작된 원인은 수십년 뒤, 또는 수백년 뒤에 반드시 영향을 끼치게 될 것 입니다. 그리고 어떤 원인의 상대적인 평가는 후손 세대의 행운 혹은 불운에 따라 매겨질 것 입니다. 현재의 후진성의 씨앗이 수세기 전에 뿌려진 것이라고 한다면, 민족주의와 자주에 대한 자각이 후진국에서 유독 강하게 나타나는 것은 본질적으로 역사적 진실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1945년에 제2차세계대전은 자유세계와 공산진영간의 냉전으로 전환되었습니다. 그리고 세계정세는 오늘날 까지도 이렇게 지속되고 있습니다. 국제 공산당은 후진국의 민족주의로 인한 이점을 능숙하게 활용하고 있으며, 특히 후진국을 반미적인 배타주의로 이끌어 이들 국가의 앞날에 혼란을 야기하고,  악화시키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이런 방식으로 합리적인 민족주의 마저도 위험하고 사악한 것으로 생각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점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은 자유세계 국가간의 국제적인 협조 체계를 더욱 교란할 수 있습니다.

학생 여러분.

역사는 한 민족의 생존은 궁극적으로 그 민족의 책임이며 이와 같은 특성은 어떠한 환경에서 변하지 않는다는 점을 올바르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민족의 역사와 전통에 대한 자각으로 강화된 민족의 자주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을 가지고 진보하는, 그리고 “어느 한 민족”이 가지고 있는 날카로운 자의식, 즉 배타적이거나 봉쇄적이지 않으며 유아론에 매몰되지 않고 굴종적이지 않으면서 국제 협력이라는 추세에 따르는  합리적인 민족주의  없이 후진국이 존속하고 발전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을 미래에 자유 세계를 이끌어 나갈 학생 여러분에게 구하고자 합니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안정된 국가가 직면하는 문제는 상대적으로 특별한 문제가 없습니다. 후진국의 경우에는 그 국가가 낙후되어 있을 수록 불만이 많고 요구 사항이 많아집니다. 정치적, 경제적인 불안정으로 인한 불만이 커져서 폭발하기 직전에 이르고, 종종 상충되기도 하는 사안을 동시에 해결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요구사항은 복잡하고 대처하기 어려울 정도가 됩니다. 후진적인 민주국가의 세기말적인 비극은 이들 국가가 수많은 요구사항을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에 생겨난 것일까요?

오늘날의 또 다른 특징은 대부분의 후진국가는 사실상 그 주권이 강대국에 의해 제약받고 있다는 것 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어느 정도는 피치 못할 과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개별 민족의 민족주의는 강대국의 성장에 따라 사그라 들었지만 본질적으로는 강대국들도 자국민들을 자국의 이해관계와 융성을 기반으로 하는 민족주의라는 국가적 규범으로 결속시키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실 이런 현상을 통해 강대국들은 국가 단위에 기반한 지역 내 공영권을 만들어 확대해 나간 것 입니다.

학생 여러분.

비참한 상황에 처해있는 민주주의 국가가 있습니다. 그곳은 바로 저의 조국 대한민국입니다. 한민족은 4세기에서 5세기에는 만주의 대부분을 영역으로 할 정도로 강성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초에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병합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어떤 민족이라도 흥망성쇠의 과정을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어째서 용맹하고 진취적이었던 한민족이 퇴보하여 5천년 역사동안 지켜온 영토를 일본의 식민지로 내주게 된 것일까요? 우리 스스로를 돌아봐야 합니다. 14세기 말 부터 20세기 초 까지 한반도를 5백년 동안 통치한 왕조는 이씨 왕조였습니다.

유럽에서는 14세기 말 부터 15세기 사이에 르네상스가 일어났습니다. 이 시대는 봉건사회가 쇠퇴하고 귀족과 교회의 권위가 떨어지면서 도시와 시민계급이 발흥하면서 절대주의 국민 국가가 건설되거나 강력하게 추진되고 있었습니다. 달리 말하면 이때는 자유롭고 인본주의적인 문화를 갈망하던 때였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이씨왕조는 사대와 퇴보의 원인이었던 유교를 국교로 삼았습니다. 유교를 국가적인 이상으로 삼으면서 봉건적인 사회 제도에 기반한 유교적 관료제를 구축하여 오늘날의 후진성을 낳은 씨앗을 뿌린 것 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5백년 동안 유교를 유일한 이상으로 숭상했습니다. 유교는 비과학적인 관념론으로 안일한 삶을 살면서 무의미한 허세, 목청만 높을 뿐 아무런 성과도 없는 분노로 긴 시간을 낭비했을 뿐 이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렇게 해서 후손들에게 도덕적인 나약함 뿐만 아니라 문치주의와 국민을 분열시키는 무자비한 당파싸움이라는 비극의 씨앗을 뿌렸고, 이같은 사악한 근원은 오늘날 까지도 이어져 내려오는 서글픈 유산이 된 것 입니다.(Thus they planted for their posterity not only the root of moral weakness, but also the calamity of the literarit and the ruthless factional strife that divided the people, with the result that these evil roots have been handed down to this date as a sad national legacy.)

학생 여러분.

저는 앞서 선진국과 후진국의 결정적인 차이는 지난 수 세기 동안 발생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유럽인들은 르네상스 이래로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면서 피와 땀, 그리고 눈물을 흘려가며, 그리고 혼란과 혁명의 소용돌이와 전쟁, 무참한 비극에 직면하여 시행착오를 거쳐 문제를 하나 하나 해결하면서 오늘날의 민주주의적인 제도, 번영과 자유를 이룩한 것 입니다.

열강이 세계를 식민지로 분할하고 있던 시점에서 공허한 담론과, 고식, 지배층의 당파싸움, 퇴행적인 사대과 쇄국에 빠져있던 한국이 민족주의를 자각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새롭게 발흥한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We may see clearly here that it was by no means accidental that Korea, immersed in empty arguments, temporizing, aristocratic factional strife, retrogressive subservience and isolation, finally fell, without even being conscious of nationalism, as the colony of then emerging Japan in the era which the Powers were dividing the world into colonies.)

한국은 일본의 지배를 36년간 받은 뒤 연합군이 일본을 무찌른 1945년에서야 일본의 압제로 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불행은 해방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국은 인위적인 분단으로 인해서 더욱 더 마비되고 말았습니다. 1910년 이래 한민족의 염원은 일본으로 부터의 독립이었습니다. 하지만 1945년 부터는 한가지 절실한 염원이 추가되었습니다. 바로 민족의 통일 입니다. 하지만 신께서는 한민족에게 한가지 시련을 더 안겨 주셨습니다. 1950년 북한 괴뢰정권과 중국 공산당의 붉은군대가 무방비 상태의 대한민국을 기습적으로 침략했습니다. 한국인이 한국인을 죽이는 동족상잔으로 한국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습니다. 공산당의 침략으로 2백만명에 달하는 한국인 뿐만 아니라 10만명에 달하는 UN군도 희생되었습니다. 수만명에 달하는 여러분의 선배, 친구, 일가친척이 한국이라는 외국 땅에 자유의 수호자로서 잠들어 있습니다. 이같은 사실은 미국이 자유세계를 수호하겠다는  엄숙하고 단호한 선언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먼 미래에 이르기까지 미국민이 한국민과 변치않는 우정과 상호신뢰 속에 살아갈 것이라는 생생한 증언입니다.

학생여러분.

저는 지금까지 민족주의가 후진국의 발전을 위한 정신적인 원동력이기도 하지만 한국의 후진성의 원인이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한 국가의 생존은 궁극적으로 그 국가의 책임이라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후진국이 후진성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 국가의 국민들이 “나의 조국”이라는 확고한 인식을 가지고 미래를 내다보고 정신적인 기반을 만들어줄 합리적인 민족주의를 가져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서구에서 수입된 일반적인 정치적 관념에서는 이와 같은 민족주의는 성공할 수 없으며 대개는 혼란만을 낳을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1945년 부터 16년 동안 한국에서는 자유민주주의가 시련을 겪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한국에 잘 맞지 않는 서구에서 받아들인 그대로의 자유민주주의를 시행하려고 했습니다. 그 결과 정치는 정당간의 투쟁의 장이 되었고, 경제는 파탄이 났으며, 사회는 무법천지가 되었고, 자유는 방종과 혼란으로 대체되었습니다.(Namely, we put it into practice as it is practiced in the West, which did not really suit Korea. The consequence is that politics became partisan strife, the economy went bankrupt, society turned lawless, freedom was replaced by license and disorder.) 이 때문에 1960년과 1961년에 두 차례의 혁명이 일어났던 것 입니다. 되돌아보면 이같은 역사는 한국에 민족주의적인 자각과 전통적인 이데올로기가 부족하고 결여되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제 대한민국 전체가 불굴의 의지, 인내심과 희망, 그리고 과거 우리 조상들의 과오를 진정으로 바로잡고자 하는 마음으로, 합리적이고 올바른 민족주의의 기초위에 자유와 민주주의를 굳건히 재건하고자 분투하고 있습니다. 선진국에서 밟아왔던 과정을 따르기만 한다면 올바른 민주주의가 언제 어디에서건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생각은 모든 필수조건, 특히 경제적인 뒷받침을 먼저 마련할 수 없다면 민주주의는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생각으로 바꿔야 할 것 입니다.(The concept that a sane democracy will suceed anywhere and under any circumstances if the process followed in the developed countries is repeated should be replaced by the logic that a democracy will forfeit its universality unless all the prerequisities, particularly the economic underpinning, can be met beforhand.)

저는 황금률을 교조적으로 따르거나 권위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이데올로기와 학설은 버려야 한다고 굳게 믿습니다. 현실에 적합한 양립적이고 유연한 민주주의를 독립적으로 개별 국가의 상황에 맞춰 실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선진국의 다양한 민주체제가 수세기에 걸친 시행착오를 거쳐 수많은 희생을 치르고 충분한 경제적 토대를 갖춤으로써 완성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전혀 다른 경로를 밟고 있는 국가들이 선진국과 동일한 민주주의를 그저 받아들이거나 흉내내는 방식으로 실현할 수 없다는 점은 명확한 것 입니다.

한 국가가 오랜 경험과 실험을 거쳐 민주주의를 국가에 맞추고, 이를 적절히 소화해서 받아들여 자국의 고유한 것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잘못된 것 입니까? 모든 곳에서 기적과 횡재가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로마는 하루 아침에 건설된 것이 아닙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후진국의 비극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 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후진국들은 역사적인 배경과 오늘날의 현실간의 차이, 경제적인 궁핍함과 국제 정세에서 기인하는 보이는 압력과 보이지 않는 압력을 극복하면서 신념과 지혜를 가지고 국가를 높은 목표로 이끌어 나갈 수 있는 강력한 “지도력”을 절실히 필요로 합니다.(At any rate, they are in acute need of a strong “leadership” which can surmount the contradiction between historical background and present reality, their nation’s economic destitution and visible and invisible pressure of an international nature, and yet can guide their nations towards a lofty objective with conviction and wisdom.)

저는 20세기 정치 환경의 특징적 현상으로서 강력한 정부와 지도자의 출현, 그리고 그에 따르는 강력한 중앙집권을 제시했습니다. 이것은 모든 국가가 여러가지 방식으로 자국을 보호 하고 자국의 위상을 드높이는 것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한다는 사실에 기인합니다. 또한 개인의 자유와 정부의 권위는 국가의 국내외적인 활동을 통해 나타낼 수 있는 것 입니다.

선진 민주국가들은 자국의 “지도력”을 현저히 강화시켰으며, 의회정치로 인해 발생하는 원심효과를 상쇄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변화무쌍한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강력한 지도력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작은 민주주의 국가가 후진성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강력한 지도력을 강조해야 한다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 입니다. 정치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선진 민주주의 국가와 국민의 문화적 수준이 높은 곳 에서는 여론에 따르는 통치가 가능할 수 도 있을 것 입니다. 하지만 민주국가의 지도자는 스스로의 신념과 이상을 바탕으로 대중 여론을 이끌어가고 국민의 가슴속에 희망과 의욕, 용기를 불어넣어야 합니다. 후진국에서는 국민이 일상의 궁핍함 때문에 민주주의를 “골칫거리”로 여깁니다. 그래서 후진 민주국가의 지도자는 국민이 민주주의 참된 가치에 감사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후진 민주국가의 지도자는 민족정신을 북돋고 진보적인 국가로 나가는 길로 국민을 이끌어서 정치에 신물이 난 국민을 부흥 시켜야 합니다. 후진 민주국가의 지도자는 후진성의 모순에서 기인하는 국민의 불만을 합리적이고 올바른 방향으로 해소하여 국력을 신장시켜야 합니다. 저는 뚜렷한 목표를 제시하고 국민이 이에 따르는 것이야 말로 후진 민주주의 국가의 지도력의 본질이라고 봅니다. 후진 민주주의 국가의 발전에 있어서 올바른 행정 기구의 수립은 시급한 문제입니다. 하지만 이것의 성패 여부 또한 대부분 지도자와 그의 지도력에 달려있음은 자명한 것 입니다. “국가”의 운명이 개인의 운명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이해한다면, 행운을 바라지 않고  근면하게 노력하고, 미래를 바라보면서 현재의 상황을 견디고, 과거를 딛고서 긍정적인 미래로 나가려 노력하는 진정한 “지도력”이 후진국에 필요하다는 점을 거듭해서 이야기 할 필요가 없을 것 입니다.

이제 제 두서없는 이야기를 마칠 때가 되었습니다.

미래가 없는 국가는 그저 비극적이라 하겠습니다. 세계의 평화와 번영, 그리고 인류의 행복은 단지 강대국들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개발도상국들 스스로의 발전과 노력이 기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현실이 될 수 없을 것 입니다.

미래의 열쇠를 쥐고 있는 존경하는 학생 여러분. 수억명의 자유인이 여러분에게 희망과 기대를 걸고 있으며 하루하루의 비극과 빈곤을 견디며 밝은 미래를 고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제 이야기를 마치면서, 이 기회를 빌어 대한민국과 한국민의 독립과 통일, 자유를 위해 항상 아낌없이 헤아릴수 없는 신실한 도움을 주신 미국민들께 한국 속담을 인용하여 진심어린 감사를 드립니다.

그 한국 속담은 이렇습니다. “덕을 베푼 사람은 떠나도 덕은 남는다.”

감사합니다.

“Address of Ambassador Chong Pil Kim, of the Republic of Korea at Farleigh Dickinson University, Rutherford, New Jersey, September 20, 1963”, James A. Van Fleet Papers Box 70/Folder 9 1961-1962, 마샬재단


2013년 9월 22일 일요일

한국전쟁 초기 채병덕 총참모장에 대한 김계원 포병단장의 회고

올해에 10.26당시 박정희의 비서실장을 지냈던 김계원의 회고록이 나왔습니다. 김계원은 한국전쟁 초기 야전포병단장으로 국군의 핵심적인 위치에 있었기에 개전초기의 상황에 대해 상당히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인물입니다. 사실 김계원의 증언 중 가장 정확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은 1960년대 국방부에서 한국전쟁사 편찬을 준비할 당시 했던 증언입니다. 그러나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에서 60~70년대에 구술받은 증언록을 편집해서 공개한 『6.25전쟁 참전자 증언록』에는 이상하게도 김계원의 증언이 빠져있습니다. 그러니 정확도가 약간 떨어진다는  느낌은 들지만 올해 출간된 김계원의 회고록과 작년에 출간된 국사편찬위원회의 구술사료집에 있는 내용을 소개해 보지요.


이 포스팅에서는 제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개전초기 채병덕 총참모장과 관련된 이야기를 소개해 보겠습니다. 김계원 야전포병단장은 장로회 기독교인으로 1950년 6월 25일에는 일요예배에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개전 소식을 듣고 황급히 복귀해 포병의 지휘를 맡았습니다. 김계원이 국사편찬위원회와의 인터뷰에서 증언한 개전 당일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면담자 : 개전 당일 오후에 방문한 의정부 전선은 어떻던가요?
김계원 : 정확한 전선 상황은 잘 모릅니다. 왜냐하면 내가 한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시간이 많이 흘러서 정확한 것에 대해서는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의정부 전선에 갔더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지만 정확한 전황을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당시에 나는 포병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화력지원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주변에서 어떻게 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 한다고 의견을 말했지만, 어느 것도 설득력이 없었습니다. 한참 후에 채병덕 장군이 와서 뭐라고 화를 냈는데, 가만히 들어보니 화력지원이 부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아군이 가지고 있는 포탄의 양이 이미 바닥이 나서 그 양반이 요구하는 더 많은 화력지원은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니 서로 답답할 수 밖에 없었던 것 입니다. 
면담자 : 일선에서도 계속 이동하셨나요?
김계원 : 나는 포병이라서 자동차로 자주 움직여 다녔습니다. 아까 말했던 최덕신 대위가 당시 포병학교 연대의 부관이었습니다. 그래서 전쟁이 발발하자, 나는 전방으로 출동했는데, 최덕신 대위는 마지막까지 포병학교를 지키다가 철수했다고 합니다. 나는 전방에서 활동하다가 의정부 방면에서 헤어져서, 몇 사람과 합류해서 노량진으로 갔습니다. 

나종남 편집, 『국사편찬위원회 구술사료선집 19 : 한국군 초기 역사를 듣다 - 군사영어학교 출신 예비역 장성의 구술』, (국사편찬위원회, 2012), 52~53쪽.


국사편찬위원회와의 면담에서는 채병덕에 대한 표현이 완화되어 있는데 2013년에 출간한 회고록에서는 이때의 상황을 조금 더 직설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해당 부분을 인용해 보지요.


부대의 열악한 통신시설로는 상황이 감지가 안 되어 나는 육군으로 작전국장 장창국(張昌國) 준장1) 에게 올라갔다. 이곳 육군본부 또한 전방상황이 잘 파악되지 않았다. 상황의 요약은 6월 25일 새벽 서부 전방일선에서 북의 기계화부대에 의하여 38선이 돌파당했다는 내용이었다. 그 무렵 육중한 몸의 참모총장 채병덕 장군은 적침의 사실을 통보받고 안면이 벌겋게 상기되어 급히 본부상황실에 도착했다.
“적의 기계화부대가 돌격해 내려오는데 대체 포병은 뭐하고 있었던 거야?”
나를 보자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내가 포병의 상황을 보고 하려는데 틈도 주지 않고 또 흥분되어 말을 이었다.
“망할 놈에 영감태기가 날 보고 한강 남안으로 후퇴하여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여 대비하여야 된다고 아주 명령조로 이야기 하더라고.”
조금 전 총장 방을 찾은 김홍일(金弘一) 장군이 오랜 중국군 공군 전략경험을 진언한 것을 놓고 하는 소리였다.
“장군은 무슨 놈에 장군, 허구헌날 후퇴만 하는 중국군 경력을 가지고.”
전시 위급한 상황에 힘을 합쳐도 부족한 판에 일본군 경력자의 중국군 경력자를 과소평가하는 군 통수권 내부의 처신이 못내 못마땅했다. 전방의 상황이 조금씩 보고가 이루어지자 채 장군의 푸념은 끝이 났다. 

김계원, 『The Father, 하나님의 은혜』, (SNS미디어, 2013),  284~285쪽.


채병덕 총참모장에 관한 당시의 증언을 보면 전황이 매우 불리했기 때문에 불안한 심리상태가 겉으로 표출되는 상태였던 것 같습니다. 김종필은 2011년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서울 함락을 막을 수 없다는 보고를 받은 채병덕이 심하게 손을 떨어서 담뱃갑에서 담배가 줄줄 흘러나올 정도였다는 증언을 했지요.


김계원이 서울 함락 이후 채병덕을 만났을 때 채병덕이 보인 반응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해당 부분을 인용하겠습니다.


면담자 : 철수하는 과정에 채병덕 장군이나 다른 지휘관을 만나셨나요?
김계원 : 한강을 도하한 직후에 채병덕씨를 만났습니다. 죽은 사람에게 좋지 않은 이야기는 할 수 없고, 내 상관이었으니까요. 채병덕 장군도 일본 군대에서 포병 출신이었습니다. 포병 출신인데, 실제로 포병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무기 만드는 것만 했지, 야전포병으로 전쟁을 해 본 경험은 없는 사람입니다. 당시에 채병덕 장군이 참모총장이었는데, 우리 포병 부대들이 “대포가 없어졌다”고 보고를 했더니, 이분이 “가서 바로 대포 뺏어오지 못하면 자살하라”고 대답했다는 군요. 그래서 내가 “자살은 할 수 있겠습니다만, 적의 포병을 뺏어오지는 못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지금 우리 병사들이 힘들게 고전분투하고 있는데, 막무가내로 처리하는 참모총장의 태도에 화가 나서 방에서 나와서 전방으로 갔습니다. 그때 신응균 장군은 일본에 가 있었어요. 그래서 내가 포병학교 학교장 대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것이 어설펐던 시기였습니다. 내 말도 잘 통하지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또 행정부에 있는 장교나 병사들은 대부분 신참들이라서 이야기도 잘 통하지 않았는데, 다만 포병학교에 행정과장으로 근무했던 최덕신 대위는 상황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기특하게도 최덕신 대위가 아무도 없는 포병학교를 지키느라고 혼자 남아있더군요. 

나종남 편집, 위의 책 53쪽.



1) 장창국 육군본부 작전국장의 계급은 대령이었습니다. 김계원의 회고록은 세부적인 사항에서 오류가 조금 있는데 개인의 기억에 의존하는 회고록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