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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9월 22일 일요일

한국전쟁 초기 채병덕 총참모장에 대한 김계원 포병단장의 회고

올해에 10.26당시 박정희의 비서실장을 지냈던 김계원의 회고록이 나왔습니다. 김계원은 한국전쟁 초기 야전포병단장으로 국군의 핵심적인 위치에 있었기에 개전초기의 상황에 대해 상당히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인물입니다. 사실 김계원의 증언 중 가장 정확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은 1960년대 국방부에서 한국전쟁사 편찬을 준비할 당시 했던 증언입니다. 그러나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에서 60~70년대에 구술받은 증언록을 편집해서 공개한 『6.25전쟁 참전자 증언록』에는 이상하게도 김계원의 증언이 빠져있습니다. 그러니 정확도가 약간 떨어진다는  느낌은 들지만 올해 출간된 김계원의 회고록과 작년에 출간된 국사편찬위원회의 구술사료집에 있는 내용을 소개해 보지요.


이 포스팅에서는 제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개전초기 채병덕 총참모장과 관련된 이야기를 소개해 보겠습니다. 김계원 야전포병단장은 장로회 기독교인으로 1950년 6월 25일에는 일요예배에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개전 소식을 듣고 황급히 복귀해 포병의 지휘를 맡았습니다. 김계원이 국사편찬위원회와의 인터뷰에서 증언한 개전 당일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면담자 : 개전 당일 오후에 방문한 의정부 전선은 어떻던가요?
김계원 : 정확한 전선 상황은 잘 모릅니다. 왜냐하면 내가 한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시간이 많이 흘러서 정확한 것에 대해서는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의정부 전선에 갔더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지만 정확한 전황을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당시에 나는 포병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화력지원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주변에서 어떻게 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 한다고 의견을 말했지만, 어느 것도 설득력이 없었습니다. 한참 후에 채병덕 장군이 와서 뭐라고 화를 냈는데, 가만히 들어보니 화력지원이 부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아군이 가지고 있는 포탄의 양이 이미 바닥이 나서 그 양반이 요구하는 더 많은 화력지원은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니 서로 답답할 수 밖에 없었던 것 입니다. 
면담자 : 일선에서도 계속 이동하셨나요?
김계원 : 나는 포병이라서 자동차로 자주 움직여 다녔습니다. 아까 말했던 최덕신 대위가 당시 포병학교 연대의 부관이었습니다. 그래서 전쟁이 발발하자, 나는 전방으로 출동했는데, 최덕신 대위는 마지막까지 포병학교를 지키다가 철수했다고 합니다. 나는 전방에서 활동하다가 의정부 방면에서 헤어져서, 몇 사람과 합류해서 노량진으로 갔습니다. 

나종남 편집, 『국사편찬위원회 구술사료선집 19 : 한국군 초기 역사를 듣다 - 군사영어학교 출신 예비역 장성의 구술』, (국사편찬위원회, 2012), 52~53쪽.


국사편찬위원회와의 면담에서는 채병덕에 대한 표현이 완화되어 있는데 2013년에 출간한 회고록에서는 이때의 상황을 조금 더 직설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해당 부분을 인용해 보지요.


부대의 열악한 통신시설로는 상황이 감지가 안 되어 나는 육군으로 작전국장 장창국(張昌國) 준장1) 에게 올라갔다. 이곳 육군본부 또한 전방상황이 잘 파악되지 않았다. 상황의 요약은 6월 25일 새벽 서부 전방일선에서 북의 기계화부대에 의하여 38선이 돌파당했다는 내용이었다. 그 무렵 육중한 몸의 참모총장 채병덕 장군은 적침의 사실을 통보받고 안면이 벌겋게 상기되어 급히 본부상황실에 도착했다.
“적의 기계화부대가 돌격해 내려오는데 대체 포병은 뭐하고 있었던 거야?”
나를 보자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내가 포병의 상황을 보고 하려는데 틈도 주지 않고 또 흥분되어 말을 이었다.
“망할 놈에 영감태기가 날 보고 한강 남안으로 후퇴하여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여 대비하여야 된다고 아주 명령조로 이야기 하더라고.”
조금 전 총장 방을 찾은 김홍일(金弘一) 장군이 오랜 중국군 공군 전략경험을 진언한 것을 놓고 하는 소리였다.
“장군은 무슨 놈에 장군, 허구헌날 후퇴만 하는 중국군 경력을 가지고.”
전시 위급한 상황에 힘을 합쳐도 부족한 판에 일본군 경력자의 중국군 경력자를 과소평가하는 군 통수권 내부의 처신이 못내 못마땅했다. 전방의 상황이 조금씩 보고가 이루어지자 채 장군의 푸념은 끝이 났다. 

김계원, 『The Father, 하나님의 은혜』, (SNS미디어, 2013),  284~285쪽.


채병덕 총참모장에 관한 당시의 증언을 보면 전황이 매우 불리했기 때문에 불안한 심리상태가 겉으로 표출되는 상태였던 것 같습니다. 김종필은 2011년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서울 함락을 막을 수 없다는 보고를 받은 채병덕이 심하게 손을 떨어서 담뱃갑에서 담배가 줄줄 흘러나올 정도였다는 증언을 했지요.


김계원이 서울 함락 이후 채병덕을 만났을 때 채병덕이 보인 반응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해당 부분을 인용하겠습니다.


면담자 : 철수하는 과정에 채병덕 장군이나 다른 지휘관을 만나셨나요?
김계원 : 한강을 도하한 직후에 채병덕씨를 만났습니다. 죽은 사람에게 좋지 않은 이야기는 할 수 없고, 내 상관이었으니까요. 채병덕 장군도 일본 군대에서 포병 출신이었습니다. 포병 출신인데, 실제로 포병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무기 만드는 것만 했지, 야전포병으로 전쟁을 해 본 경험은 없는 사람입니다. 당시에 채병덕 장군이 참모총장이었는데, 우리 포병 부대들이 “대포가 없어졌다”고 보고를 했더니, 이분이 “가서 바로 대포 뺏어오지 못하면 자살하라”고 대답했다는 군요. 그래서 내가 “자살은 할 수 있겠습니다만, 적의 포병을 뺏어오지는 못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지금 우리 병사들이 힘들게 고전분투하고 있는데, 막무가내로 처리하는 참모총장의 태도에 화가 나서 방에서 나와서 전방으로 갔습니다. 그때 신응균 장군은 일본에 가 있었어요. 그래서 내가 포병학교 학교장 대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것이 어설펐던 시기였습니다. 내 말도 잘 통하지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또 행정부에 있는 장교나 병사들은 대부분 신참들이라서 이야기도 잘 통하지 않았는데, 다만 포병학교에 행정과장으로 근무했던 최덕신 대위는 상황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기특하게도 최덕신 대위가 아무도 없는 포병학교를 지키느라고 혼자 남아있더군요. 

나종남 편집, 위의 책 53쪽.



1) 장창국 육군본부 작전국장의 계급은 대령이었습니다. 김계원의 회고록은 세부적인 사항에서 오류가 조금 있는데 개인의 기억에 의존하는 회고록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