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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9월 7일 월요일

대량학살의 요건

씁슬한 이야기 하나...

르완다는 서구지정학에 대한 비백인 비평가들이 보기에는 아프리카의 문제에 대해 미국과 유럽은 별 차이가 없을 뿐 아니라 워싱턴과 다른 유럽국가들이 아프리카인의 목숨의 가치를 서방 또는 백인들의 목숨과 비교할 때 이중잣대를 사용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였다. 그들은 서방에서는, 적어도 서방의 일부에서는 유럽인이 유럽인을 상대로 폭력을 행사하는 보스니아 문제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지만 아프리카인이 아프리카인에게 가하는 폭력에 대해서는 거의 완전히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즉 서구의 기준에서 아프리카인이란 실체가 없으며 정체성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유럽은 역사적으로 미국 사회의 요람으로 인식되었고 미국과 바다를 건너 접하고 있으며, 게다가 미국의 국가안보적 이해관계에 중요한 지역이었다. 유럽에서 국경을 넘어 퍼져나가는 폭력사태는 항상 아프리카의 경계를 넘어 퍼져나가는 폭력사태 보다 미국의 정책입안가들에게 더 큰 영향을 주었다.

(중략)


워싱턴은 르완다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다. 소말리아 사태의 정치적 결과로 이미 충분한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 최대한 작은 위험을 감수해야 했지만 그것은 아프리카에서 전혀 가능하지 않았다. 클린턴 행정부의 국무부 공보담당관은 이전의 부시 행정부의 전임자들이 보스니아 문제를 담당할 때 그랬던 것과 큰 차이가 없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르완다 사태를 대량학살(Genocide)라고 칭하는 것 조차 꺼렸다. 4월 28일, 한 기자가 국무부 대변인 크리스틴 셀리(Christine Shelly)에게 국무부는 르완다의 폭력사태를 대량학살로 보는지 질문했다.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네. 기자께서도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만, 비록 대량학살이라는 용어는 엄밀한 법률적 개념이 아니나 이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매우 정확한 법률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대량학살이라는 용어에는 다른 요인들도 포함됩니다."

국무부 출입기자들은 이 발언은 관료적 발언의 놀라운 사례로서 어떤 발언을 하건 도덕적으로 타격을 받기 때문에 아무것도 이야기 하지 않으면서 이야기를 하겠다는 뜻이라고 생각했다.

5월로 접어들면서 대량학살의 징후는 더욱 더 명확해 졌고 UN은 대규모 병력을 파병했다. 미국은 물자를 지원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었다. UN군이 르완다를 이동할 수 있도록 보병수송장갑차가 보내질 것 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물자의 대여 조건, 장갑차의 도색, 그리고 어떠한 표시를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 때문에 천천히 지연되고 있었다. 한 주가 지날 때 마다 사망자가 늘어만 갔다. 어느 순간 사망자의 추정치는 50만명이 되었고 그 숫자는 꾸준히 늘어만 갔으나 워싱턴에서는 논의만 계속하고 있었다.

만약 이 사태가 대량학살이라면 행정부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 했다는 비난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지침은 대량학살이 아니라 '대량학살적 행위(acts of genocide)'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6월 10일, 크리스틴 셀리는 국무부가 대량학살적 행위가 일어나고 있다는 점을 믿을수 있는 모든 근거가 있다고 말했다. 이 브리핑에 참석한 한 기자는 얼마나 많은 대량학살적 행위가 일어나야 대량학살이 되는지 질문했다. 셀리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 질문은 제 직위에서 대답할 수 없는 것 입니다."

다른 기자가 질문했다.

"국무부가 대량학살이라는 단어를 단독으로 사용하지 않는 대신 대량학살의 앞 부분에 "~적 행위"라는 단어를 붙이라는 지침을 가지고 있다는게 사실입니까?"

셀리의 답변은 정부가 혼란을 겪고 있다는 것을 반영했다.

"제가 받은 지침은... 즉... 즉 제가....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용어를 사용하라는 것 입니다. 저는... 저는...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는데 모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표현 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특정 사안에 대해서 절대적인 규정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정의(定義)는 있습니다. 저는 신중한 검토를 거쳐 선정된 표현을 사용합니다."

조지 오웰이 그녀가 당황한 모습을 봤다면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David Halberstam, War in a Time of Peace : Bush, Clinton, and the Generals, Scribner, 2001, pp.273, 276~277

이 당시 미국의 행동은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일이었는데 도덕적인 비난'만' 받았습니다. 세상일이 대개 이렇게 돌아간다는 것은 참 씁슬한 일이지요.


잡담 하나. 크리스틴 셀리는 2005년 12월 17일 병으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링크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2009년 4월 21일 화요일

독일 군사사 연구자들의 공통적인 불만

요즘 읽는 책 중에 폴리(Robert T. Foley)의 German Strategy and the Path to Verdun : Erich von Falkenhayn and the Development of Attrition - 1870~1916이 있습니다. 독일의 군사상에서 다소 특이한 위치에 있는 소모전 전략의 등장과 퇴조를 다룬 연구인데 팔켄하인에 대한 조금 다른 해석이 재미있군요.

그리고 역시 두 세계대전을 다루는 연구 답게 2차대전 말기 연합군의 폭격으로 소실된 독일 사료의 문제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독일 군사사 연구자들이 공통적으로 토로하는 불만 중 하나가 1945년의 포츠담 폭격으로 이곳에 소장 중이던 프로이센군 및 제3제국기 독일육군의 1차사료들이 대량으로 유실되었다는 점 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폭격에서 살아남은 문서들은 소련군이 수집해 갔고 이것들은 1988년 고르바초프 정권기에 동독정부에 반환되었다는 정도 입니다. 소련이 문서를 반환한 뒤 1차대전과 관련된 새로운 연구가 여럿 발표되었지요.

육군 뿐 아니라 공군의 경우도 전쟁 말기 문서가 대량으로 파기되어 골치아프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이에 대한 언급을 처음 접한 것은 코럼(James Corum)의 독일 공군 창설기에 대한 연구 였는데 읽는 입장에서도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미군의 경우는 많은 자료가 남아 있기 때문에 독일군에 비해서 훨씬 미시적인 부분까지도 서술이 가능합니다. 대대 단위의 전투일지를 종합해 일일 전투식량 재고량까지 파악할 수 있으니 크레벨드(Martin van Creveld)가 지적한 것 처럼 미군은 자료가 많아 문제고 독일군은 자료가 적어 문제라는 말이 허언은 아닙니다.

군사사에 많은 관심을 가진 입장인지라 자료의 소실을 아쉬워하는 연구자들의 한탄을 읽을 때 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독일인들이 마이크로 필름 사본이라도 만들어서 별도로 보관했다면 전쟁통에 중요한 사료들이 완전히 소실되는 참사는 피할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의문을 품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기도 하지요.

쿠르스크 전투와 관련해서 소련군이 프로호로브카 전투에서 전술적 승리를 거뒀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진 이유도 전투에 참여한 무장친위대의 일지가 1980년대 까지도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찾아보면 1차대전의 경우도 비슷한 문제가 있을 것 입니다.

잡담을 조금 더 하자면.

이런 문제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 인데 한국전쟁 초기에 서울이 순식간에 함락되다 보니 국방부의 주요 문서들을 이송하지 못한 채 상당수를 잃어 버린 경험이 있습니다. 결국 빈 공백을 미국 군사고문단의 문서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하는데 그럴 때 마다 우리가 남긴 기록이 단 한 장만 더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백선엽 장군도 한국전쟁 당시 우리가 남긴 기록이 너무 없어서 아쉽다는 이야기를 한 일이 있지요.

조지 오웰이 남긴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는 말은 정말 핵심을 찌르는 것 같습니다. 미군 기록에 많이 의존하다 보니 어떤 경우에는 정말 미국의 시각으로만 문제를 바라보게 되더군요. 그럴때는 정말 식은 땀이 흐르는 것 같았습니다.

2008년 9월 27일 토요일

조지 오웰의 수류탄에 대한 추억

카탈로니아 찬가를 읽다 보면 조지 오웰이 장비 부족에 대한 불평을 자주 늘어놓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내전 초반 쓸만한 정규군 부대들은 프랑코 쪽에 많이 합류했고 소련의 지원도 내전 초기에는 외국 지원병들에게 잘 들어가지 않아서 장비 부족은 꽤 심각했던 모양이더군요. 조지 오웰의 무기에 대한 불평 중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사제 수류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철모도, 총검도 없었다. 리볼버나 피스톨도 없었다. 폭탄은 다섯 명이나 열 명에 하나 씩이었다. 이 시기에 사용되던 폭탄은 ‘F.A.I.수류탄’으로 알려진 무시무시한 것 이었다. 전쟁 초기에 무정부주의자들이 생산하던 것 이었다. 이것은 원리상으로는 달걀 모양의 밀스 수류탄과 같았으나, 레버가 핀이 아닌 테이프 조각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테이프를 떼는 즉시 최대한 빠른 속도로 수류탄을 던져야 했다.

이 수류탄을 “공평하다”고들 했다. 맞은 사람과 던진 사람을 다 죽였기 때문이다.

다른 종류도 몇 가지 있었는데, ‘F.A.I. 수류탄’보다 더 원시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약간은 – 그러니까 던지는 사람에게 – 덜 위험할 것 같았다. 그나마 던질 만한 수류탄을 보게 된 것은 (1937년) 3월 말이 지나서였다.

조지 오웰/정영목 옮김, 『카탈로니아 찬가』, 민음사, 2001, 50쪽

※F.A.I.는 1927년에 조직된 무정부주의 단체입니다. Federación Anarquista Ibérica의 약자이죠.

예전에 한국전쟁 당시 제주도에서 수류탄 개발에 참여하셨던 원로 기술자 한 분을 뵌 적이 있었습니다. 찾아 뵈었을 무렵에는 화장품 회사 고문으로 계시면서 가끔 글을 쓰고 계셨지요. 그 분 말씀이 수류탄을 개발하면서 시험할 사람이 따로 없다 보니 기술자들이 직접 수류탄 시제품 시험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귀한 기술자들이 어이없게 희생된 사례가 꽤 있다고 하시더군요. 그 분의 증언을 들으면서 수류탄도 의외로 만들기 어려운 물건이구나 싶었는데 뒤에 조지 오웰의 글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그 분의 이야기를 떠올렸습니다.
생각해 보면 17세기 말에 원시적 수류탄이 사용된 뒤 요즘과 같은 모양을 가지기 까지 거의 300년 정도가 걸렸으니 지금 보면 참 단순한 물건 이라도 우습게 봐선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