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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4월 29일 수요일

German Strategy and the Path to Verdun

군사사에 관심 없는 일반인이라도 ‘전격전’이라는 단어는 들어 봤을 정도로 독일의 군사사상에서 ‘기동전(Bewegungskrieg)’과 ‘섬멸전(Vernichtungskrieg)’ 개념은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짧은 시기에 독일의 일부 군사사상가들은 미래에는 ‘기동전’과 ‘섬멸전’을 통한 전쟁의 승리가 어려워 질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1차대전을 경험한 독일 군인들은 ‘기동전’만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으며 1차대전에서 패배한 것은 ‘위대한’ 슐리펜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수행하지 못한 결과라고 믿었습니다.

폴리(Robert T. Foley)의 German Strategy and the Path to Verdun : Erich von Falkenhayn and the Development of Attrition 1870-1916은 독일의 군사사상에서 이질적 존재였던 소모전략(Ermattungsstrategie)가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과정을 1980년대에 새로 공개된 독일 사료를 바탕으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저자는 새로운 자료를 통해 흥미로운 논의를 끌어내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살펴보고 있는 것은 소모전략이 등장하는 과정입니다.
독일 통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대(大) 몰트케(Helmuth von Moltke der Ältere)나 유명한 군사사가이자 군사평론가였던 델브뤽(Hans Delbrück)은 보불전쟁의 경험을 바탕으로 미래의 전쟁에서는 더 이상 몇 차례의 결정적인 전술적 승리를 통해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특히 러일전쟁의 결과 델브뤽은 자신의 견해를 더욱 확신하게 됐습니다. 수백만의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유럽국가들이 전쟁을 할 경우 한 번의 전투로 수십만의 적을 섬멸하더라도 결정적인 타격을 입힐 수 없다는 점은 너무나도 명백했습니다. 유럽국가들간의 전쟁에 비해 작은 규모였던 러일전쟁에서 조차 러시아와 일본 양 측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 했습니다. 델브뤽은 보불전쟁과 러일전쟁 등을 관찰한 결과 미래의 전쟁은 소모전으로 나갈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 군부에서는 기동전 사상이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군대 외부의 이질적인 사상은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 했습니다. 슐리펜(Alfred von Schlieffen)은 현대전의 변화된 환경을 이해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의 우수한 전술로서 충분히 단기간의 결정적 섬멸전을 통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슐리펜은 델브뤽과 달리 러일전쟁을 통해 신속한 승리의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슐리펜은 러시아군이 전술적으로 무능하고 전쟁의 패배로 타격을 받았기 때문에 양면전쟁이 발발하더라도 프랑스를 신속히 격파한 다음에 상대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는 쉽게 붕괴하지 않았고 러시아군의 동원속도는 슐리펜이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빨랐습니다. 결국 전쟁 전에 예상했던 신속한 승리는 오지 않았고 독일군은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야 했습니다.

저자는 다음으로 마른 전투의 패배 이후 새로이 총참모장이 된 팔켄하인(Erich von Falkenhayn)이 소모전 전략을 구상하고 실행하는 과정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팔켄하인은 독일군 장교단의 주류와는 달리 ‘기동전’과 ‘섬멸전’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총참모장에 임명될 당시 빌헬름 2세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지만 팔켄하인은 근본적으로 독일군 고위장교단 내에서 비주류였으며 결국은 기동전 지지자들과 적대적인 관계가 됩니다.
팔켄하인의 전략구상은 서부전선에서의 소모전을 통해 프랑스와 유리한 조건에서 휴전을 맺은 뒤 동부전선의 러시아를 정리한다는 것 이었습니다. 저자는 1915년의 경험을 통해 팔켄하인이 소모전으로 프랑스에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고 주장합니다. 프랑스군이 1915년 9월에 야심차게 실시한 대공세 당시 독일군은 서부전선에 충분한 예비대를 확보하지 못했지만 공세 초기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에 큰 타격을 주면서 전투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습니다. 동시에 동부전선에서는 1915년의 대공세를 통해 러시아군에게 포로 1백만을 포함한 막대한 타격을 입혔습니다. 팔켄하인은 이를 통해 1916년에는 서부전선에서 대규모의 소모전을 벌여 프랑스를 전열에서 이탈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저자는 1916년 전역에 대한 설명에서 흥미로운 주장을 몇 가지 더 하고 있습니다. 가장 재미있는 주장은 영국군의 솜 공세는 팔켄하인이 미리 예측하고 자신의 소모전략의 일부로 포함시켰다는 것 입니다. 팔켄하인의 원래 계획은 베르덩 공세를 통해 프랑스군을 소모시키며 동시에 프랑스가 영국에 구원 공격을 요청하도록 하는 것 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영국군이 구원공격에 나서면 1915년 가을과 마찬가지로 방어를 통해 영국군을 소모시킨 뒤 그동안 확보해 둔 전략예비를 통해 반격한다는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팔켄하인의 구상은 독일군의 전투력은 과대평가하고 영국군과 프랑스군의 전투력을 과소평가한 상태에서 이루어 진 것이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가 없었습니다. 베르덩 공세는 예상보다 완강한 프랑스군의 저항으로 독일군에 막대한 손실을 입혔으며 영국군의 공세는 팔켄하인의 예측보다 늦게 이루어 진데다 결정적으로 예상 이상으로 강력한 것이었습니다. 원래 팔켄하인이 반격에 투입하기 위해 확보한 예비대들은 영국군의 솜 공세를 저지하기 위해 소모되었습니다. 결국 원래부터 비주류였던 팔켄하인은 1916년의 실패를 계기로 반대파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고 총참모장에서 물러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자는 전후 독일의 역사서술에서 팔켄하인이 정치적 반대파, 특히 힌덴부르크(Paul von Hindenburg)루덴도르프(Erich Ludendorff) 등 ‘섬멸전’ 지지자들에 의해 폄하되었다고 지적합니다. 비주류였던 팔켄하인은 총참모장 해임과 함께 전후 독일군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지만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탄넨베르크’의 영웅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섬멸전’ 옹호자들은 독일이 1차대전에서 패배한 원인이 ‘위대한’ 슐리펜의 가르침을 살리지 못하고 어리석은 ‘소모전’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섬멸전’에 입각해 미래의 전쟁을 준비한 독일군은 2차대전에서 또 다시 ‘소모전’에 의해 패배했습니다. 많은 군사사가들이 지적하듯 ‘기동전’과 ‘섬멸전’은 작전단위의 방법론으로 적당한 것이지 ‘전략’ 단위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수단은 아니었습니다. 1차대전 이후의 독일 군사사상가들은 현대전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채 ‘작전’의 수단을 ‘전략’에 까지 확대 적용한 결과 철저한 패배에 직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폴리의 연구는 풍부한 자료에 근거해 새롭고 흥미로운 주장들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20세기를 전후한 시기 독일의 군사사상은 매우 흥미로운 주제이지만 많은 연구자들은 ‘기동전’과 ‘섬멸전’에만 주목한 나머지 짧은 기간 동안 존재했던 ‘소모전’에 대해서는 많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저자는 1차대전 당시 팔켄하인의 전략이 단순히 팔켄하인 개인의 돌출적인 산물이 아니라 19세기 말 이후의 군사사상에 뿌리를 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팔켄하인의 군사 사상이 형성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고찰이 부족하지만 충분히 흥미로운 설명입니다.

잡담 하나. 독일 군사사상의 발전을 개괄적으로 살펴보고 싶으신 분은 시티노(Robert M. Citino)의 The German Way of War: From the Thirty Years' War to the Third Reich를 추천합니다.
시티노의 저작들에 대해서는 채승병님이 쓰신 ‘전격전의 실체는 무엇인가’라는 글의 마지막 부분을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2009년 4월 21일 화요일

독일 군사사 연구자들의 공통적인 불만

요즘 읽는 책 중에 폴리(Robert T. Foley)의 German Strategy and the Path to Verdun : Erich von Falkenhayn and the Development of Attrition - 1870~1916이 있습니다. 독일의 군사상에서 다소 특이한 위치에 있는 소모전 전략의 등장과 퇴조를 다룬 연구인데 팔켄하인에 대한 조금 다른 해석이 재미있군요.

그리고 역시 두 세계대전을 다루는 연구 답게 2차대전 말기 연합군의 폭격으로 소실된 독일 사료의 문제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독일 군사사 연구자들이 공통적으로 토로하는 불만 중 하나가 1945년의 포츠담 폭격으로 이곳에 소장 중이던 프로이센군 및 제3제국기 독일육군의 1차사료들이 대량으로 유실되었다는 점 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폭격에서 살아남은 문서들은 소련군이 수집해 갔고 이것들은 1988년 고르바초프 정권기에 동독정부에 반환되었다는 정도 입니다. 소련이 문서를 반환한 뒤 1차대전과 관련된 새로운 연구가 여럿 발표되었지요.

육군 뿐 아니라 공군의 경우도 전쟁 말기 문서가 대량으로 파기되어 골치아프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이에 대한 언급을 처음 접한 것은 코럼(James Corum)의 독일 공군 창설기에 대한 연구 였는데 읽는 입장에서도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미군의 경우는 많은 자료가 남아 있기 때문에 독일군에 비해서 훨씬 미시적인 부분까지도 서술이 가능합니다. 대대 단위의 전투일지를 종합해 일일 전투식량 재고량까지 파악할 수 있으니 크레벨드(Martin van Creveld)가 지적한 것 처럼 미군은 자료가 많아 문제고 독일군은 자료가 적어 문제라는 말이 허언은 아닙니다.

군사사에 많은 관심을 가진 입장인지라 자료의 소실을 아쉬워하는 연구자들의 한탄을 읽을 때 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독일인들이 마이크로 필름 사본이라도 만들어서 별도로 보관했다면 전쟁통에 중요한 사료들이 완전히 소실되는 참사는 피할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의문을 품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기도 하지요.

쿠르스크 전투와 관련해서 소련군이 프로호로브카 전투에서 전술적 승리를 거뒀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진 이유도 전투에 참여한 무장친위대의 일지가 1980년대 까지도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찾아보면 1차대전의 경우도 비슷한 문제가 있을 것 입니다.

잡담을 조금 더 하자면.

이런 문제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 인데 한국전쟁 초기에 서울이 순식간에 함락되다 보니 국방부의 주요 문서들을 이송하지 못한 채 상당수를 잃어 버린 경험이 있습니다. 결국 빈 공백을 미국 군사고문단의 문서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하는데 그럴 때 마다 우리가 남긴 기록이 단 한 장만 더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백선엽 장군도 한국전쟁 당시 우리가 남긴 기록이 너무 없어서 아쉽다는 이야기를 한 일이 있지요.

조지 오웰이 남긴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는 말은 정말 핵심을 찌르는 것 같습니다. 미군 기록에 많이 의존하다 보니 어떤 경우에는 정말 미국의 시각으로만 문제를 바라보게 되더군요. 그럴때는 정말 식은 땀이 흐르는 것 같았습니다.

2008년 1월 7일 월요일

독일군도 상륙작전을 할 줄 안다! : 1917년 10월의 알비온 작전

2008-01-07 / PM 10:50 본문 조금 추가하고 지도도 넣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에서 감행된 대규모 상륙작전인 갈리폴리 전투는 연합군에게 대재앙으로 기록됐습니다. 하지만 신통하게도 이 전쟁에서 물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독일군이 당당하게(?) 상륙작전에 성공한 일이 있었으니 그 사연은 다음과 같습니다.

유틀란트 전투 이후 독일 해군은 사실상 항구에 틀어 박혀 노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대서양으로 나가지 못한다고 손가락만 빨고 놀 수는 없는 법. 다행히도 독일 해군이 놀 곳이 있긴 있었으니 바로 발틱해 였습니다. 1917년 10월, 독일은 할일 없는 해군을 동원해 리가만의 세 섬, 사레마(Saaremaa, 독일/스웨덴어로는 Ösel)와 히우마(Hiiumaa, 독일/스웨덴어로는 Dagö), 무우(Muhu, 독일/스웨덴어로는 Moon, Mohn)에 상륙작전을 감행합니다. 이 작전은 꽤 멋진 이름을 달게 됐는데 그 이름은 바로 알비온(Albion) 이었습니다.



1. 알비온 작전의 준비

알비온 작전의 필요성이 처음 제기된 것은 해군에 의해서 였습니다. 독일군은 페트로그라드로 진격하기 위해서 리가를 제압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리가만의 입구를 막고 있는 사레마와 히우마를 먼저 떨어트려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해군은 1915년 하반기부터 이 지역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육군에 리가 지역에 대한 공세의 필요성을 제기합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독일 육군은 서부전선에서 먼저 결판을 낸다는 전략을 고수하고 있었고 육군참모총장인 팔켄하인(Erich von Falkenhayn)은 그의 무덤이 될 베르덩에 대한 공세 준비에 몰두하느라 해군의 제안에 대해서는 약간의 관심만 보였습니다. 해군은 다시 1916년 3월에 보다 구체적인 작전안을 내놓지만 여전히 팔켄하인의 관심은 베르덩에 있었습니다.

베르덩 공세가 결국 피박으로 끝나자 독일육군은 동부전선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독일육군은 1916년 하반기부터 본격적으로 리가에 대한 공세를 계획하기 시작했습니다. 12월에 나온 첫번째 계획안은 후티어(Oskar von Hutier)의 제 8군이 드비나 강 까지 진출하는 비교적 소박(?)한 것 이었지만 팔켄하인의 후임인 루덴도르프는 이 계획을 좀 더 확대시키길 원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1917년 8월에 최종 승인된 계획안은 제 8군이 리가 전체를 장악하고 그 후속으로 상륙부대가 사레마, 히우마, 무우에 상륙하는 것 이었습니다.
리가를 장악한 다음 단계인 상륙작전은 카텐(Hugo von Kathen) 보병대장이 지휘하는 제 23예비군단이 수행할 계획이었고 상륙부대는 에스토르프(Ludwig von Estorff) 중장의 제 42보병사단 이었습니다. 제 42보병사단은 제 65보병여단 사령부와 함께 상륙작전을 위해서 사단 예하의 17, 131, 138 보병연대 외에 추가적으로 255 보병연대와 제 2자전거 보병여단, 그리고 독립 돌격중대들을 배속 받았습니다.
루덴도르프는 해군과 작전을 조율하기 위해서 1917년 8월 13일 해군작전국장인 카이저링크(Walther von Keyserlingk) 해군중장과 회의를 가집니다. 이날 회의에서 육군은 9월 초 까지 리가를 함락시키고 그 이후 1개 사단을 투입해 세 섬을 제압한다는 계획을 알렸습니다.

그런데 이 무렵 독일 해군의 사정은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유틀란트 전투 이후 항구에 틀어박혀 별다른 일없이 빈둥거리다 보니 사기는 떨어지고 별다른 활동이 없다 보니 식량 배급도 줄어드는 악재가 겹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1917년에 8월 2일에는 식량 사정의 악화에 불만을 품은 전함 프린츠레겐트 루이트폴드(Prinzregent Luitpold),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Fridrich der Große), 카이저(Kaiser), 카이저린(Kaiserin), 베스트팔(Westphal)의 수병들이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결국 이 폭동은 진압되고 주동자 두 명이 군사재판에 의해 처형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이렇게 알비온 작전 직전 독일 해군의 상황은 매우 어수선했습니다.
또 대해함대(Hochseeflotte) 사령관인 셰어 제독은 발틱해 작전에 자신의 함대를 동원하는 것에 반대하고 있었습니다. 셰어는 대해함대의 주 전장은 어디까지나 북해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육군을 지원하기 위해 발틱해로 병력을 쪼개는 것에 대해 탐탁치 않게 생각했습니다. 셰어 제독은 1917년 9월 11일에 열린 회의에 자신의 대리인인 우슬라(Ludolf von Usslar) 대령을 보내 알비온 작전에 대한 반대의견을 명확히 했습니다. 여기에 발틱해 사령관(Oberbefehlshaber der Ostsee)인 하인리히공(Albert Wilhelm Heinrich von Preußen, 빌헬름 2세의 동생입니다)도 셰어의 의견에 찬성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황제인 빌헬름 2세가 개입해 알비온 작전을 개시하도록 결정합니다. 빌헬름 2세의 작전 개시 명령은 9월 19일에 떨어졌고 이 명령을 하달 받은 제 8군 사령부는 9월 24일에 육군의 작전 계획을 완성하고 이것을 제 23예비군단에 하달합니다.

해군은 알비온 작전을 위해 제 3, 4전대(Geschwader)와 제 2초계집단(Aufklärungsgruppe), 제 2, 9어뢰전단(Torpedoboots Flottille) 을 중심으로 총 10척의 전함을 포함 300척의 군함을 동원했습니다. 이 중 병력 수송선은 19척 이었습니다. 함대의 지휘는 슈미트(Erhard Schmidt) 제독이 맡았으며 기함은 순양전함 몰트케 였습니다. 그리고 상륙부대는 위에서 언급한 증강된 42보병사단으로 총 전력은 병력 24,596명, 말 8473마리, 야포 40문과 차량 2,490대였고 여기에 30일 치의 보급품이 함께 수송되었습니다. 여기에 비행기 65대와 비행선 5대가 투입되는 말 그대로 입체전이 수행될 계획이었습니다.

한편, 러시아는 독일군의 주력이 상륙할 사레마에 6인치 에서 12인치에 달하는 해안포를 배치하고 있었으며 해군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대량의 기뢰를 부설해 놓고 있었습니다. 이점은 독일 해군이 크게 우려하는 바였습니다. 또한 독일은 러시아가 세 섬에 2개 보병사단을 배치해 놓고 있는 것으로 보았고 여기에 더해 러시아 해군이 상륙 저지를 위해 투입될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독일 해군은 러시아군의 방어가 상대적으로 약한 사레마 섬의 북쪽, 타가만 일대를 상륙 지점으로 정했습니다. 타가만 일대는 6인치 해안포대가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독일군은 러시아군이 타가만에 대한 상륙을 눈치채지 못 하도록 리가 만으로 통하는 Sõrve 반도에 기만 공격을 실시하도록 했습니다. 이 기만 공격에는 제 4전대의 전함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와 쾨니히 알베르트 두 척이 투입되어 러시아군의 12인치 포대를 공격할 예정이었습니다. 두 척의 전함이 러시아군의 주의를 끄는 동안 제 1진인 4,500명은 타가만에 상륙해 상륙 지점의 6인치 해안포대를 제압하고 그 뒤로 제 2진 3,000명이 상륙해 나머지 사단 부대가 상륙할 교두보를 확보해야 했습니다.



2. 알비온작전의 개시

알비온 작전의 준비 단계인 지상 작전은 순조로웠습니다. 후티어의 제 8군은 러시아 제 12군에 사상자 25,000명과 야포 262문을 상실하는 피해를 입히고 9월 3일에는 리가 전체를 장악했습니다. 이에 비해 독일 제 8군의 손실은 4,200명에 그쳤습니다.

상륙은 9월 30일로 예정되었지만 기상이 악화되어 취소되었습니다. 상륙 작전을 총괄하는 제 8군 사령관 후티어는 기상 악화로 상륙이 연기되는 것을 우려해 마침내 10월 8일에 작전을 개시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상륙 부대와 물자의 적재는 9일 시작되어 10일에 완료됐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11일 상륙 부대가 출발합니다.

상륙부대는 12일 오전 3시에 타가만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상륙 부대는 타가만 북쪽 12km 지점에서 정지한 뒤 기뢰 제거작업과 상륙 부대의 전개를 시작했습니다. 상륙 부대 지휘관인 카텐 보병대장은 오전 4시 30분에 상륙 개시 명령을 내렸고 상륙 부대의 제 1진인 제 138보병연대 1대대와 제 10돌격중대가 어뢰정에 탑승해 해안으로 돌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해안에 가까워 지면서 러시아군의 해안포대로 부터 공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해군은 상륙부대를 지원하기 위해 전함으로 해안포대에 대한 제압사격을 시작해 해안포들을 제압했습니다. 상륙부대의 제 1진은 해군의 지원에 힘입어 오전 6시 18분까지 상륙과 장비 하역을 마쳤습니다.
주력 부대가 타가만에 상륙을 감행하는 동안 제 2자전거 보병여단이 주축이 된 조공 부대도 파메로트(Pamerot)에 상륙을 시작했습니다. 조공 부대의 화력지원은 전함 바이에른(Bayern)과 그로서 쿠어퓌르스트(Grosser Kurfürst)경순양함 엠덴(Emden)이 담당했습니다. 이들은 해안포대를 침묵시키는데는 성공했지만 기뢰지대에 들어가게 되어 전함 바이에른이 대파되었습니다.
교두보가 확보되자 후속 부대인 제 138보병연대 주력과 제 131보병연대가 상륙했고 그 뒤를 제 17보병연대와 255보병연대가 따랐습니다. 이 와중에 제 138연대 2대대를 실은 수송선이 기뢰와 접촉했고 이들은 수송선에서 내려 나무 보트로 상륙했습니다. 상륙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13일 저녁까지 주력 부대는 물론 조공 부대인 제 2자전거 보병여단과 18돌격중대까지 상륙을 완료했습니다.

타가만의 상륙

하지만 다음날인 13일 기상이 악화되어 야포와 차량, 마필의 하역에 차질이 생겼습니다. 파고가 심해 장비를 하역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 입니다. 하지만 기상상태가 호전될 때 까지 기다리다가는 러시아군이 증원되거나 방어태세를 굳힐 수 있었습니다.

결국 에스토르프 중장은 위험하지만 과감한 결단을 내립니다. 즉 포병의 지원없이 상륙한 보병부대만 가지고 공격을 개시하기로 결심한 것 이었습니다. 에스트로프는 제 131보병연대는 남서쪽으로 진출해 Sõrve반도를 제압하고 제 255보병연대와 제 1자전거대대, 그리고 제 65보병여단이 지휘하는 17, 138보병연대는 사레마의 가장 큰 도시인 쿠레사레(Kuressaare 독일식 지명은 아렌스부르크Arensburg)를 점령하도록 했습니다. 쿠레사레는 인구 5,000명에 사레마의 가장 큰 항구였고 또 비행장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공인 제 2자전거 보병여단과 18돌격중대는 오리사레(Orissaare, 독일식 지명은 오리사르Orrisar) 방면으로 진출해 러시아군의 퇴로를 북익에서 포위하도록 했습니다.
이 결정은 당시 상황으로 봤을 때 나쁘지 않은 것 이었지만 기상이 악화되어 이들을 지원할 항공기들이 작전을 할 수 없었습니다. 독일군은 항공기에 정찰을 크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이점을 제외하면 작전의 진행은 순조롭게 진행됐습니다. 제 131보병연대는 Sõrve반도를 손쉽게 제압하고 12인치 해안포대의 러시아군을 후퇴시켰습니다. 러시아군은 해안포가 독일군에 손에 그대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포의 핵심 부품을 파괴하고 무사히 철수했습니다.
한편, 제 255보병연대는 쿠레사레로 진격하는 도중 러시아군의 1개 기병연대(?)로부터 공격받았지만 이것을 격퇴시켰고 17연대와 138연대도 러시아군 방어선과 접촉해 이것을 돌파하고 포로 1,000명을 잡는 전과를 거뒀습니다. 이날 저녁 255연대의 정찰대는 러시아군이 쿠레사레를 버리고 퇴각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에스토르프 중장은 러시아군을 신속히 추격하기 위해 다음날인 14일도 보병 부대만으로 추격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에스토르프는 러시아군이 무우섬으로 퇴각하는 것을 신속히 저지하기를 바랬기 때문에 중화기 없이 보병만으로 공격하는 무리수를 두었습니다. 다행히 이것이 성공하기는 했습니다만. 하지만 14일에는 비가 내려 보병의 이동에 심각한 장애를 초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레사레를 점령한 3개 보병연대는 강행군으로 오리사레까지 진출, 조공 부대와 함께 러시아군을 협격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었습니다.
한편, 독일 해군은 이날 러시아 해군의 구축함대와 교전, 구축함 그롬(Гром)을 격침시켰습니다. 그 대신 독일군도 교전 도중 어뢰정 한 척을 상실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10월 15일, 오리사레에 집결한 독일군은 고립된 러시아군에게 총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이 공격을 지원하기 위해서 독일군은 군함 일부를 사레마와 무우 사이의 해협으로 투입했습니다. 이미 오리사레에 도착해 있던 제 2자전거 보병여단과 18돌격중대는 무우섬에 상륙해 러시아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제 138, 255보병연대가 포위된 러시아군을 소탕했습니다. 독일군은 이 공격으로 수비대장인 이바노프와 그의 참모진, 포로 5,000명을 생포하고 야포 8문, 기관총 8정과 말 200마리를 노획했습니다.
러시아 해군은 무우의 수비대 7,000명도 포위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해상으로 철수시키고 해군 함정들도 사레마 수역에서 철수하도록 합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러시아 해군은 독일 해군과의 교전으로 전노급 전함인 슬라바(Слава)가 대파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러시아 해군은 독일군의 소해정 몇 척과 어뢰정 1척을 격침시키는 전과를 올렸지만 독일군과의 전력차가 커서 더 이상의 전투는 무리였습니다. 그리고 발틱해에서 작전 중이던 영국 해군의 잠수함 C32도 사레마 근처 해역에서 독일 해군에 의해 격침 당했습니다.

작전은 대 성공이었습니다. 독일군은 해군 쪽에서 전사 131명과 부상 60명, 육군 쪽에서는 전사 54명과 부상 141명의 피해를 입은 반면 러시아군은 제 107, 118보병사단 등 2개 사단이 완전히 분쇄되고 포로 2만명과 포 141문, 그리고 사레마의 해안포 전부를 상실하는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반면 러시아 해군은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선전했다고 평가됩니다.


참고자료

Richard L. DiNardo, Huns with Web-Feet : Operation Albion 1917, War in History 2005 12
Holger Herwig, The First World War : Germany and Austria-Hungary 1914-1918, Arnold, 1997
Norman Stone, The Eastern Front 1914-17, Penguin, 1975, 1998

2007년 2월 15일 목요일

독일군의 화학무기 시험 : 1914~1915

마른 전투 이후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사람 잡는데 타고난 재능을 가진 독일인들은 뭔가 화끈한 한방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후세에 음흉한 이미지를 남긴 전쟁상 팔켄하인은 1914년 10월 초에 화학전을 위한 연구를 지시하고 재주 좋은 독일 엔지니어들은 150mm 유탄포로 발사하는 가스탄 시제품을 2주도 안되는 시간에 완성해 10월 27일 첫번째 실전 시험을 시작했습니다.

1914년 10월 27일, 독일군은 서부전선의 누브-샤펠(Nouve-Chapelle) 전투에서 처음으로 가스탄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이날의 결과는 조금 기묘한 것이 연합군은 독일군이 화학무기를 썼는지 전혀 몰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측은 이날의 성능시험에 만족했는지 바로 17,000발의 가스탄을 생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것 입니다.

독일군은 1915년 1월 15일에 동부전선의 볼리모프 전투에서 가스탄을 보다 대규모로 사용했습니다. 즉, 본격적인 실전 투입이었습니다. 이날 전투에서 독일군은 공격준비사격 동안 15,000발의 가스탄을 발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포탄의 문제 때문인지 놀랍게도 가스탄은 별다른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이날 발사한 가스탄에 의한 사상자는 거의 없었다고 전해집니다.
1914년 말과 1915년 초 화학무기 사용은 독일군 고위지휘관들의 큰 관심사였습니다. 독일의 장성들은 도덕적으로 꺼림칙 한데다 효과도 의심스러운 독가스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찝찝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몇 차례 있었던 실전 시험에서 결과가 신통치 않았기 때문에 그 효능에 대한 의구심이 큰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랬기 때문인지 이프르 전투에서는 전투 초반 상당히 좋은 효과를 거두긴 했는데 전과 확대에 필요한 예비대가 없어 결국 헛수고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이프르 전투에 투입된 화학전 부대는 바로 동부전선으로 이동해서 5월 31일 Humin 공격에 투입됐습니다. 독일측은 동부전선의 기후나 지형이 화학전에는 좀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다고 합니다. 일단 사방이 평야라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이었던 것 같습니다. 독일군은 이날 220톤의 독가스를 사용해 1만 명의 러시아군을 죽이거나 부상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람 때문에 가스가 퍼지지 않은 지역에서는 러시아군이 완강하게 저항해 독일군은 크게 고전했다고 합니다.
독일군은 Humin 전투 뒤 동부전선에서 세 번에 걸쳐 독가스를 시험했는데 두 차례는 매우 난감한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특히 한번은 독일군이 가스탄 발사를 끝내고 얼마 뒤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가스가 그대로 독일군 방향으로 밀려왔고 이 황당한 상태에 처한 독일군 보병들은 공황상태에 빠져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서부전선에 비하면 러시아군은 가스전에 대한 대비가 부실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효과적인 대응책을 고안했습니다. 러시아군은 독일군이 가스 공격을 시작하면 해당 지역에 큰 불을 질러 독가스가 높이 올라가도록 만들어 독일인들에게 엿을 먹였다고 합니다. 물론 1916년 이후 가스 사용 기술이 점차 세련돼 가면서 이런 임시적인 대응의 효과는 감소했고 러시아는 1차 대전기간 동안 50만 명을 가스 공격에 잃게 됩니다.

독가스는 1914년 겨울부터 1915년 여름에 걸친 몇 차례의 시험을 통해 효과가 있긴 하지만 그냥 믿고 쓰기엔 문제가 많은 물건으로 드러났습니다. 특히 그 효과가 바람에 좌우된다는 점은 분명히 문제였습니다. 독일군은 욕을 먹어가면서 독가스를 사용했지만 효과가, 특히 서부전선에서는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1915-1916년 기간 동안 서부전선에서 가스 공격으로 죽거나 부상당한 연합군 병력은 연합군 전체 사상자의 0.85% 였습니다. 물론 1917년 이후에는 이것 보다는 훨씬 좋은 효과를 거두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관총의 아성에 도전하기에는 문제가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2006년 12월 14일 목요일

독일군 정보부의 삽질과 베르됭의 대재앙

과거의 독일군은 작전과 전술 분야에서는 다른 어떤 나라의 군대보다도 우수하다고 평가받았지만 정보부문에 있어서는 좀 뒤떨어졌다는 것이 전반적인 평가입니다. 사실 1~2차 대전을 통틀어 독일군은 자신들의 잘못된 정보 때문에 피박을 본 사례가 제법 있지요. 아무리 주먹을 잘 써도 앞이 잘 안보이면 별 수 없으니.

베르됭 전투는 이런 점에서 독일의 형편없는 정보력이 초래한 재앙의 대표사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애당초 프랑스군의 전투력을 과소평가하고 소모전을 벌이겠다는 발상 자체가 뭔가 문제가 있는 시각이었습니다. 독일육군총사령부(OHL)의 정보국(Nachrichten-abteilung)은 전쟁 말기 까지도 20명 내외의 정보 장교와 비슷한 수의 보조 인력으로 운영되고 있어 업무부담이 심각했고 전선에서 입수되는 정보들을 효율적으로 분석할 수 없었습니다. 형편없는 정보 능력에다가 상대방에 대한 과소평가까지 곁들여 지니 그야말로 상황은 금상첨화였지요.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 전투가 시작됐습니다.

전투 초반에는 병력 우세와 기습효과로 상당한 성과를 거뒀지만 프랑스측도 병력을 증원하면서 팔켄하인의 당초 예상과는 달리 전투는 양측 모두에게 출혈을 강요하는 소모전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쌍방의 손실 교환비가 독일 1에 프랑스 1.1 수준이니 이건 별로 남는 장사가 아니었습니다. 결정적으로 독일군이 확보한 예비대라고는 보병사단 10개가 전부였는데 당시 보병사단의 평균 소모율(솜 전투의 영국군 손실을 참고)을 고려한다면 이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독일군의 공세는 사실상 공격 개시 일주일 밖에 안된 2월 28일에 둔화됐으며 이때부터 본격적인 소모전으로 말려들게 됩니다. 팔켄하인은 공세 초기의 막대한 손실 때문에 공세 초기부터 불안해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켄하인은 3월 초 주공을 담당한 제 5군에 2차 공세를 명령합니다. 정보기관이 프랑스군의 손실을 과대 평가하고 예비대의 규모를 과소 평가했기 때문입니다.

독일군이 프랑스의 손실을 과대 평가한데는 프랑스측의 사단 교대가 독일보다 좀 더 빈번했기 때문입니다. 독일측은 전선에서 물러나는 프랑스군 사단들을 모두 괴멸에 가까운 손실을 입은 것으로 판단했고 3월 초 프랑스군의 손실이 독일측의 3배에 달한다고 오판하고 있었습니다. 이 잘못된 정보는 베르됭을 전쟁사에 길이 남을 생지옥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3월 30일, 팔켄하인은 제 5군 사령관에게 “아군의 손실이 적보다 적은 한 공세를 지속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물론 제 5군 사령부에서는 일선 부대들의 전투력이 한계점을 넘어서 위험수준이 됐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제 10 예비보병사단장 바르펠트(Max von Bahrfeldt) 소장은 “전투 일주일 만에 사단의 장교와 사병들은 무기력과 탈진상태에 도달했다. (상부의) 수많은 요구는 인간의 체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다.”라고 토로할 정도였습니다. 제 5군 사령관인 빌헬름 황태자는 팔켄하인에게 공격 중지를 요청했지만 팔켄하인은 이를 묵살해 버립니다.

5월에 독일군의 손실은 25만명에 달했습니다. 그러나 독일측은 프랑스군의 손실이 52만 이상이라고 추정하고 있었고 6월 초에는 프랑스군의 손실이 80만에 달한다고 오판했습니다. 그나마 영국군이 솜에서 대공세를 개시 함으로서 독일군은 베르됭에서 공세를 중지하게됩니다. 만약 연합군측이 수동적으로 방어만 하고 있었다면 팔켄하인은 계속해서 베르됭에 병력을 밀어 넣으면서 소모전을 계속했을지도 모를 일 입니다. 잘못된 정보가 계속해서 생산되는 한.

어쨌건 잘못된 정보에 의존해 맹목적으로 공격을 계속한 결과 독일은 336,000명의 병력을 잃었고 프랑스는 365,000명의 병력을 잃었습니다. 독일군은 소모전을 통해 프랑스를 붕괴시킨다는 거창한 목표를 가지고 전투를 개시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자신들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소모되고 말았습니다. 멍청한 어르신들을 모신 덕에 병사들만 죽어나간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