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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8월 21일 토요일

제2차세계대전 시기 항공모함의 전과에 의문을 제기하는 연구

 


밀리터리 오타쿠의 관점에서 읽은 연구논문 중 지난 1년간 가장 재미있었던 걸 꼽으라면 The Journal of Military History 84에 실린 미국 해군대학 교수 피츠시몬즈(James R. FitzSimonds)의 "Aircraft Carriers versus Battleships in War and Myth: Demythologizing Carrier Air Dominance at Sea"를 들겠습니다. 과연 제2차세계대전 당시 항공모함이 전함에 대해 압도적인 우세를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밀리터리 오타쿠 입장에서 환장할만한 주제를 들고 나왔습니다.

피츠시몬즈는 레이테만 해전의 예를 들면서 항공모함의 위력이 과대평가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레이테만 해전에서 미국 해군은 에섹스급 7척을 포함한 35척의 항공모함과 항공모함 항공대 소속의 항공기 1,500여대를 동원해 압도적으로 우세했지만 작전상 미끼로 던진 항공모함을 제외한 일본군 주력을 상대로는 전함 1척과 중순양함 1척만이 미군 항공모함 탑재기에 격침되거나 대파되었습니다. 저자는 이상적인 조건에서 미국 항공모함 항공부대가 전투력을 최대한 집중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함 중심의 일본군 주력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지 못한 점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제2차세계대전 기간 중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항공기가 기동중인 주력함을 격침한 것은 야마토와 무사시 외에 없다는 점을 지적합니다.(히에이는 미국 수상함대와의 전투로 전투불능이 된 상태에서 항공기 공격을 받았으므로 제외합니다.) 진주만 공습 같이 정박해 있는 주력함을 공격한 경우에도 완전히 전열에 복귀하지 못하게 타격을 입힌 사례는 4척 밖에 되지 않는다고 지적합니다.(프랑스 해군의 덩케르크, 이탈리아 해군의 로마, 미해군의 애리조나와 오클라호마) 전함보다 작고 약한 순양함이나 구축함의 경우도 항공모함 탑재기 보다는 수상함이나 잠수함과의 교전에서 더 많은 숫자가 격침되었습니다. 

저자는 제2차세계대전 당시 항공모함 탑재기들은 전함과 같이 빠르고 강력한 방어력을 갖춘 군함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능력이 부족했다고 지적합니다. 해군 항공기용의 폭탄은 1,000파운드 정도로 전함의 갑판에 유효한 타격을 주기 어려웠고, 어뢰는 위력이 충분했으나 명중율이 부족했다는 겁니다. 게다가 뇌격기들은 대부분 저고도에서 느린 속도로 움직여 전함의 대공화력에 대해 생존성이 떨어졌다는 점도 지적합니다. 저자는 제2차세계대전 시기 수상함의 대공화력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대전 초기인 1942년 초의 산호해 해전에서도 미국 함대는 대공화력 만으로 일본군 항공대를 격퇴할 수 있었습니다. 미군 보다 뒤떨어지는 일본 해군 함정의 대공화력도 미국항공모함 탑재기들을 상대로 충분히 유효했다고 지적합니다. 레이테만 전투 당시 일본해군의 이세가 100대 가까운 미군 함재기의 공격을 대공화력 만으로 격퇴한 점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또한 제2차세계대전 시기의 항공모함들의 작전 지속능력이 떨어졌던 점도 지적합니다. 항공모함은 육상기지에 비해 비축할 수 있는 물자에 한도가 있어 장기간 작전을 할 수 없었다는 겁니다. 여기에 항공모함 탑재기의 소모율이 높았다는 점도 지적합니다. 이때문에 미 해군이 항공모함 전력에서 일본군을 완전히 압도한 1944년이 되어서도 미해군의 항공모함 항공부대는 충분한 전과를 거둘 수 없었다고 지적합니다. 예를들어 필리핀해 해전에서는 미해군 항공부대가 전력 우세에도 불구하고 항공모함 한척과 유조선 2척을 격침시키는데 그쳤고 그 댓가로 출격시킨 항공기 200대 중 80대를 여러가지 이유로 상실했습니다. 게다가 장거리 출격 때문에 미군 함재기의 무장 탑재에도 지장이 있어 타격력이 더 감소했다고 지적합니다.(뇌격기들도 항속거리 문제로 폭탄을 탑재했음) 미국 항공모함의 지상 타격도 예상외로 결정적이지 못했다고 지적합니다. 피츠시몬즈는 레이더도 부실하고 대공화력도 약하며 조종사의 수준도 뒤떨어지는 일본군을 상대로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한 미국 항공모함 기동부대가 유럽으로 가서 독일 공군 기지를 타격했다면 어떤 성과가 나왔겠냐고 반문합니다.

반면 전함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평가를 상향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피츠시몬즈는 대평양 전쟁의 분기점은 미드웨이 해전이 아니라 미국의 고속전함부대가 전장에 등장하기 시작한 1942년 말로 잡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전함 전력없이는 태평양에서 전략적인 공세가 가능하지 않았다고 보는 겁니다. 저자는 과달카날의 제해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주 요인이 미해군의 신형고속전함들의 활약이라고 평가합니다. 또한 1943년 이후 미해군의 반격작전에서도 전함의 역할을 더 높게 평가해야 한다고 봅니다. 저자는 제2차세계대전 직후 전함 전력이 급속하게 감축된 주된 요인은 항공모함의 우위 보다는 미해군에 대항할 수상함 전력을 가진 가상적이 소멸하고 대함미사일이 등장한데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제2차세계대전 직후 미국 해군항공대가 해군 내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항공모함 항공대의 위력을 강조하는 여론을 조성한 점도 항공모함의 '신화'를 부풀리는데 일조했다고 주장합니다.

꽤 재미있는 주장을 하는 글 입니다. 

2014년 11월 13일 목요일

[번역글] 영국 해군은 전간기에 쇠퇴했던 것인가?

몇달 전에 The RUSI Journal 159권 4호에 실린 Joseph A. Maiolo의 Did the Royal Navy Decline between the Two World Wars?를 읽고 흥미로운 관점이라고 생각해서 번역을 하겠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이제서야 번역을 하게 됐습니다. 제가 해군에 대해서는 아는게 많지 않아 특별히 덧붙일 이야기는 없습니다만 전간기 영국의 가상 적국에 대한 서술이 부족한 점만 제외하면 괜찮은 글 같습니다.




영국 해군은 전간기에 쇠퇴했던 것인가?

Joseph A. Maiolo


비교적 최근까지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전간기에 영국 해군이 쇠퇴한 것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단호하게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을 것이다.1)  영국 해군은 제1차세계대전에서 승리하여 독일의 대양함대와 잠수함대를 무찔렀다. 그리고 전투력과 명성에 대해 말하자면, 세계의 어떤 해군도 영국 해군에 비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영국 해군의 좋은 시절은 너무나 빨리 지나갔다. 영국 정부는 전쟁이 끝난 뒤 국방비 보다 사회 복지에 더 많은 지출을 하려고 했다. 즉 영국 해군의 쇠퇴가 시작됐다는 것이다. 1919년의 파리 평화회담과 국제연맹의 등장으로 평화가 지속될 것이고 군축이 이루어 질 것이라고 순진하게 생각한 영국 정부는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여 영국 해군의 규모를 영국의 안보 상황에 맞추지 않고 군축 회의의 합의 결과에 맞추었다. 전후 영국 정부가 영국 해군의 우위를 지켜내지 못한 것은 영국 해군 수뇌부의 실책과 맞물려 더욱 악화되었다. 게다가 영국 해군 수뇌부는 새로운 사상과 신기술을 싫어했고 위협에 대처하는 태도도 안이했다는 것이다. 

영국의 쇠퇴를 주목한 역사학계의 경향은 1960년대에서 1970년대에 생겨났는데, 이러한 학설은 영국의 전 세계에 대한 영향력 감퇴와 전후 영국 경제의 상대적인 쇠퇴의 원인을 설명하고자 했다. 영국 해군은 국력의 주요한 척도였기 때문에 영국의 쇠퇴를 연구하는 학파가 여기에 주목한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2) 영국 해군의 쇠퇴했다거나 정체되어 있었다는 이야기는 흥미롭긴 하지만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3) 존 페리스John Ferris, 크리스토퍼 벨Christopher Bell, 데이빗 이거튼David Edgerton, 그리고 본 필자의 최신 연구는 영국 해군이 그 훌륭한 전통을 이어가며 탁월한 기술로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도 그 위용을 유지했음을 증명하였다. 영국 해군은 영국의 안보를 위해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고 군비 통제를 활용했으며 기만을 통해 경쟁국들의 건함 계획에 영향을 끼쳤다. 

영국 해군의 쇠퇴를 주장하는 학설에서는 1914년 이전의 10년간을 ‘팍스 브래타니카’의 종언으로 서술한다. 영국 해군은 1906년 세계 최초의 단일 구경 주포 전함인 HMS 드레드노트를 건조하여 독일 해군이 촉발한 건함 경쟁에서 승기를 잡았다. 12인치 주포와 강력한 터빈엔진을 장비한 22,000톤의 드레드노트와 그 후속 전함들은 기존의 전함들을 시대에 뒤떨어진 퇴물로 만들어 버렸다. 이후 계속된 건함 경쟁에서도 영국 해군은 질과 양 모두 상대를 압도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때 영국 해군은 21척의 드레드노트형 전함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독일은 같은 종류의 전함을 13척만 보유한데 그쳤다. 이같은 격차는 독일 해군이 기지에 묶여 있는 동안 영국 해군은 독일의 해운을 봉쇄하고, 독일의 전시 경제를 옭죄어 독일 국민의 사기에 타격을 입힐 수 있다는 것을 뜻했다. 1916년의 유틀란트 전투에서는 세계 1위와 2위의 함대가 격돌했지만 승패를 가르지는 못했다. 하지만 독일 해군은 결전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해 독일이 절실히 필요로 했던 영국의 해상 봉쇄 분쇄와 독일 수상함대 및 잠수함대를 통한 영국 봉쇄에 실패했기 때문에 이 전투는 영국의 전략적 승리로 끝났다.4)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영국 해군이 직면한 가장 큰 도전은 영국, 미국, 일본의 군비 경쟁이었다. 1916년 미 의회는 영국의 해상 봉쇄 가능성과 독일의 잠수함대가 미국의 이해관계를 침해할 것을 우려하여 66척의 군함을 건조하는 것을 승인했는데 여기에는 4척의 전함, 4척의 순양전함, 4척의 순양함, 20척의 구축함, 30척의 잠수함이 포함되었다. 이 전례없는 건함 계획은 다시 1917년에는 전함 10척, 순양전함 6척과 기타 지원함정을 건조하여 1925년 까지 세계 최대의 해군을 건설하는 것으로 확대되었다.5)  미해군의 팽창은 단지 영국 해군을 위축시키는데 그치지 않고 이미 세계 3위의 해군국이었던 일본의 해군 증강을 촉발했다. 1919년 파리 평화회담에서 있었던 미국과 영국간의 해군력 균형에 관한 회담은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듬해에 영국은 미국의 해군력 증강에 맞서기 위해 18인치 주포를 장비한 5만톤급의 전함과 순양전함 8척을 건조하기로 했다. 1922년에는 영국과 미국, 일본 모두가 기존의 전함을 훨씬 뛰어넘는 화력과 방어력을 갖춘 16인치에서 18인치 주포를 장비한 4~5만톤 급의 전함 건조를 추진하고 있었다.6) 

하지만 영국은 미국이 전력을 다해 함대를 건설할 경우 건함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재정적, 공업적 기반이 없었다. 1920~21년에 열린 워싱턴 회의에서 영국측은 현명하게도 미국에게 조약상의 평등한 지위라는 상징성을 양보하는 대신 미국이 건함 경쟁에 나서지 못하도록 유도했다. 워싱턴 해군조약에서는 영국, 미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 해군의 전함 및 항공모함의 총톤수를 5:5:3:1.75:1로 정했다. 하지만 한 미해군 제독이 씁슬하게 토로했듯이 문서상의 동등함이 실전에서의 동등함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미국과 일본은 조약을 이행하기 위해서 새로 건조하는 전함을 폐기 처분하거나 취소해야 했지만 영국은 기존의 구형 전함을 폐기하는 것으로 그쳤다. 영국 해군은 1920년대에 전함 배수량에서 미해군 보다 54,000톤의 우위를 가지고 있었고 가장 유력한 가상적인 일본 해군에 대해서는 279,130톤의 우위를 가지고 있었다. 워싱턴 조약에서는 미해군과 일본 해군의 16인치급 전함에 대응할 수 있도록 영국 해군이 두 척의 16인치급 전함을 건조할 수 있게 했는데, 이렇게 해서 건조된 넬슨과 로드니는 세계대전을 통해 얻은 전훈을 반영한 함포, 기뢰, 어뢰 방어 기술을 적용한 전함이었다. 그리고 조약에서는 각 함선의 성능에 제약을 걸었는데, 전함의 경우 16인치 주포에 35,000톤, 순양함은 8인치 주포에 10,000톤이었다. 이렇게 해서 영국 해군성은 재무성에 더 큰 전함에 필요한 설비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해 줄 것을 요청하는 것과 같이 힘든 일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영국측에서 미국이 순양함의 총톤수를 늘리려 한 것을 저지함으로써 영국 해군은 큰 이득을 얻었다. 영국 해군은 세계 최대의 순양함대를 보유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 있는 해군 기지를 확보했고, 보조 순양함으로 개장할 수 있는 상선을 충분히 확보함으로써 전 세계에 걸쳐 해상 봉쇄를 수행할 수 있는 특수한 능력을 확보했다.7) 

영국 해군이 협상을 통해 전함 배수량에서 우위를 달성하고자 노력했다는 사실을 낡은 무기 체계에 대한 집착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국 말고 다른 국가들도 전함의 숫자에 해군력과 국제적인 위신이 달려있다고 생각했다. 전투 함대의 숫적 우위를 달성하기 위한 전략적인 흥정은 영국 해군성의 주특기였다.8) 그리고 영국 해군은 전함이 항공기와 잠수함의 위협에 맞서 발전할수 있는 무기 체계라고 생각했다. 워싱턴해군군축조약에서 주요 열강들은 10년간 전함의 신규 건조를 중단하기로 했기 때문에 영국 해군은 평화로운 긴축 재정의 시기에 막대한 예산을 들여 전함을 교체하는 것을 늦출 수 있었고 동시에 새로운 설계와 건조 기술을 시험해 볼 수 있었다. 동시에 낡은 전함들의 엔진과 방어력, 사격 통제장치를 개량할 수 있었다. 영국 해군성은 새롭게 전함을 건조할 수 있는 1930년대 초반이 될 때 까지 건함 예산을 잠수함, 구축함, 항공모함, 순양함을 현대화 하는데 사용하고자 했다.

1922년 부터 1926년 사이에 영국 정부는 해군에게 같은 기간 동안 미국과 일본 해군이 건조한 군함의 총 톤수에 필적하는 규모의 신규 건조를 승인했다. 영국 해군은 순양함 전력을 성공적으로 확충했고 이로 인해 영미관계에 위기를 초래했다.9) 일본과의 전쟁을 고려해서 배수량 1만톤에 8인치 주포를 탑재한 순양함을 선호했던 미해군은 순양함 전력에 있어서도 균형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미국 의회는 순양함 증강을 계속해서 거부했다. 영국 해군은 해상 교역로 보호를 위해서 중순양함과 6인치 주포를 탑재한 경순양함을 골고루 건조하기를 원했는데 이를 위해 미해군 보다 더 많은 순양함을 필요로 했다. 1927년에 있었던 제네바 회담에서 영국과 미국 협상단은 절충점을 찾지 못하면서 상대방에게 책임을 전가했고 영국과 미국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미의회는 영국과의 협상이 실패하자 순양함을 추가로 건조하는 것을 승인했다. 일각에서는 순양함 건조를 둘러싼 영국과 미국의 경쟁이 해양 패권을 둘러싼 양국간의 전쟁 신호라고 보기도 했지만 이것은 다소 과장된 견해였다.10) 어찌되었건 영국과 미국은 자유주의 국가로서 당시의 국제 질서로 부터 서로 이득을 얻고 있었고 국제적인 문제를 대화로 해결하는 것을 선호했다. 순양함을 둘러싼 논쟁에서 중요한 점은 영국 해군이 워싱턴 조약에 의거해 주요 경쟁 상대에 대해 유리한 점을 최대한 끌어냈다는 점과 영국 해군성이 영국 해군의 우위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에 확신을 가지게 됐다는 점이다. 

전간기의 영국 해군은 일본 해군이 적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봤는데 그 이유는 일본이 정치적인 이유, 예산상의 이유, 그리고 조직의 목표라는 측면에서 너무나도 유용했기 때문이다. 일본과의 전쟁을 상정한 계획은 영국 정부가 대규모 함대는 물론 연료와 탄약을 비축하기 위해 싱가포르의 해군 기지를 증강하도록 설득하기에 적합했다.11) 해군성은 일본과 전쟁을 하게 된다면 주력함대를 싱가포르에 파견해 일본 해군이 전투에 임하도록 끌어낼 것이었다. 일본 해군을 무찌르기 위해서는 전함, 항공모함, 순양함과 기타 지원함정이 균형을 이룬 함대가 필요했다. 달리 말하자면 해군성에서 대영제국의 방위를 위해 필요한 가장 경제적인 전력 구조라 할 수 있었다. 전간기 영국 해군 전략에서 기본적으로 전제한 것은 주력 함대를 가상적의 주력 함대에 대응하기에 적절한 지점에 배치하여 영국의 대외 무역을 보호하고 적국을 해상 봉쇄하는 것 이었다. 그러므로 영국 해군은 장차 벌어질 일본과의 전쟁에서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 독일을 상대했던 방식으로 대영 제국을 방어할 것이었다. 

하지만 항공모함 관련 기술을 놓고 보자면 영국 해군은 캐터펄트와 어레스팅 와이어 부문에서 미해군이나 일본 해군 보다 뒤떨어진 것이 사실이었다. 그 원인은 해군본부가 새로운 장비들을 시험하도록 결정을 내리는데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던 것과 영국 공군과 해군항공대의 역할에 대해 논쟁이 있었던데 있다. 하지만 영국 해군이 기술적인 진보에 거부감을 가진 보수적인 집단이었다고 서술하는 쇠퇴 신화와는 달리 영국 해군은 1918년에 세계 최초의 항공모함인 아르거스Argus를 건조했으며 해군 본부의 입안가들은 미래의 전쟁에서 항공기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기 때문에 전간기에도 항공모함 건조에 많은 예산을 투자했다. 해군항공대는 적 함대를 포착하고, 적의 항공기를 격추시키고, 적의 전함을 어뢰와 폭탄으로 타격한 뒤 아군 전함에게 끌어들여 최후의 승리를 가져올 것이었다.12) 미래의 함대전에서 최종 단계를 전함의 포격으로 마무리 한다는 영국 해군의 구상이 실제로 일어난 것은 매우 드물었다.(예외라고 할 수 있는 사례는 두 건이 있다. 1941년 3월 영국 해군이 이탈리아 해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마타판 곶 해전과 1941년 5월의 비스마르크 격침 이었다.)13)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 항공모함에서 발진하는 폭격기는 전함의 주포를 해전의 주역에서 밀어냈다. 하지만 전간기에는 미해군과 일본 해군 역시 마찬가지로 작전 교리에서 항공모함을 부차적인 위치에 놓고 있었고, 항공모함이 해전에 변화를 가져오기는 하겠지만 혁명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14) 

영국 해군이 전간기에 잠수함의 위협을 과소평가했다는 쇠퇴론자들의 주장 또한 잘못된 것이다. 1920년대에서 1930년대에 영국 해군본부의 전쟁 계획과 작전 연구는 미래의 전쟁에서 적국이 영국의 해상 교통로를 차단하거나 교란시킬 가능성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하고 있었다. 해군본부의 참모장교들은 제1차 세계대전의 교훈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적국이 영국의 해상 교통에 타격을 가하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식은 오늘날의 말하는 ‘비대칭’ 전략이라는 점을 알았다. 바로 영국 주력 함대를 피해서 영국의 민간 상선단을 격침시킬 수 있는 함정을 건조하는 것 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시기이 독일 해군은 영국이 해상 교통에 타격을 입히기 위해서 잠수함을 사용했고 일정한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1917년에서 1918년 사이에 영국과 연합국은 호송선단 방식을 도입해 잠수함의 위협에 대처했다. 해군본부의 참모 장교들은 다음번 전쟁에서도 적국이 동일한 방식을 택하겠지만 그때에는 훨씬 더 큰 잠수함과 중순양함, 항공모함을 함게 운용하여 호송선단을 타격할 것이라고 보았다.15)  영국 외무성과 해군본부는 다른 국가들이 잠수함을 발전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서 외교적 수단과 기만책을 사용했다. 영국은 외교 분야에서 잠수함을 없앨 것을 제안했고 보다 현실적인 차원에서는 다른 국가들의 잠수함 보유량에 제한을 걸려고 했다.16) 예를 들어, 프랑스 해군이 1920년대에 개발한 새로운 대형 잠수함은 영국과 프랑스의 외교 회담에서 자주 논의된 주제였다. 영국 해군 또한 미래의 전쟁에서는 적국이 대규모의 잠수함대를 준비해 놓을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다. 영국의 대잠외교에 있어서 핵심은 어떠한 적이라도 대규모의 잠수함 공세로 전쟁을 시작하는 것을 방지하는데 있었다. 전쟁이 유럽이나 극동에서 일어날 경우 영국 해군은 상선단을 호위 하기 위한 대잠용 함선을 신속히 증강시켜 적의 잠수함 위협을 무력화 시킬 대비가 되어 있었다. 

영국 해군은 대잠외교를 뒷받침 하기 위해서 영국이 소나를 발전시켜 잠수함의 위협을 완전히 해소했다는 선전을 해서 외국의 해군을 기만하려고 했다. 수중의 물체를 음향으로 탐지할 수 있는 기술을 실전에서 사용할 수 있을 정도가 된 것은 1917~18년 무렵으로 이때는 해상 작전에 영향을 끼치기에 너무 늦은 시점이었다. 영국 해군은 전간기에 소나 개발에 대한 정보를 일급 비밀로 하면서 동시에 치밀하게 소나의 성능을 부풀린 정보를 퍼뜨렸다. 1930년대 초반 정보당국으로 부터 독일 해군이 조약을 위반하고 잠수함을 다시 건조하기 위한 실험을 시작할 것이라는 정보가 입수되자 영국 해군은 언론과 정치권을 통해 가짜 정보를 더욱 더 많이 흘렸다. 해군 본부는 1937년에 스페인 내전에서 프랑코 군을 지원하는 독일과 이탈리아의 잠수함을 소나를 활용해 격침시켜 소나의 성능을 과시하는 방안을 고려하기도 했다. 기만 공작의 효과를 평가하는 것은 언제나 어렵고 평화시에 오랫동안 지속된 경우는 특히 그러하다. 1939년, 2차대전 중 독일의 잠수함 공세를 총지휘한 칼 되니츠 제독은 히틀러에게 영국이 소나의 성능을 과장한 기만 전술을 구사하는 가장 큰 원인은 유럽에서 전쟁이 발발했을 때 독일이 충분한 잠수함을 확보해 전면적인 잠수함 공세에 나서는 것을 저지하는데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17) 물론 영국 해군도 독일 잠수함의 위협을 잘못 평가한 측면이 있다. 영국 해군은 독일 해군이 1918년 이래로 잠수함 기술에서 어떠한 결정적인 발전도 없었다는 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되니츠가 새로운 기술 대신에 야간에 부상하여 상선단을 공격하는 것과 같은 새로운 전술을 개발해 소나를 장비한 호위 함대를 회피할 것이라고 잘못 받아들였다.18) 그렇기는 해도 영국 해군의 대잠외교와 기만책은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 1939년 이후 5년간의 전쟁을 치르면서 독일군의 잠수함 공세는 천천히 강화되었고 영국 해군은 이에 맞설 대비책을 충분히 강구할 수 있었다.19)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0년대로 접어들면서 영국 해군에 대한 도전은 급격히 증대되었다. 전세계적인 경제 및 정치 위기에 독일이 1차대전의 설욕을 꿈꾸면서 군비 경쟁을 시작함으로써 영국의 해군 정책의 근간이 크게 흔들렸다. 예를 들어 해군은 일본을 제1의 가상적으로 삼고 막대한 예산을 필요로 했는데 해군의 몫이 크게 줄어들었다.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하자 독일 공군의 폭격기는 매우 큰 위협으로 받아들여졌다. 1933년에서 1936년 사이에 독일의 군사력 증강이 유럽의 질서에 가한 전략적, 외교적 도전이 일본 해군 내부의 과격파와 상호작용을 일으켰다. 일본 해군 내에서는 1936년 워싱턴 조약이 만료되자 일본 해군 내에서는 총톤수를 영국 및 미국과 맞추지 못하는 이상 군비 통제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20) 1934년 이후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소련은  군함 건조에 더 많은 투자를 시작했는데 이때 영국 해군은  구식 전함들을 개장하고 전체 함대의 규모를 일본 해군과 유럽 제2위의 해군을 합한 것 과 대등한 규모로 증강시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영국 해군이 새롭게 시작된 군비 경쟁에 대처하는데 가장 큰 문제는 1930년대 초반 영국 조선업계를 강타한 위기였다.21) 

이러한 위기는 전혀 예측하지 못한 사태가 맞물리면서 생긴 결과였다. 1930년 주요 해군국들은 런던에서 회담을 열고 순양함의 비율을 등을 포함한 몇가지 사안을 결정했다. 런던해군군축조약에서 영국, 미국, 일본은 1936년까지 전함의 신규 건조를 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경제 상황이 정상적이었다면 1936년까지 전함 건조를 연기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을 터였다.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해군성에서 민간 조선소와 국영 조선소에 꾸준히 계약을 발주하고 보조금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선박 건조 능력을 유지하여 낡은 전함들을 대체했을 뿐 아니라 가상적국의 공격적인 함대 건설에 맞설 대규모의 함대 증강도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1930년 런던해군조약이 조인되고 얼마 있지 않아 대공황의 파도가 영국 조선업계를 휩쓸었다. 1929년에서 1935년 사이에 해군성의 신규 발주 감소와 전반적인 공업계의 침체 여파로 군함과 민간 선박 발주는 절반으로 뚝 떨어졌다.22) 비록 갑작스럽게 산박 건조량이 감소하기는 했어도 영국은 1930년대  내내 세계 최대의 조선국으로 남아 있었지만 1940년대 이전까지는 함대를 증강하기에는 부족하고 현존하는 함대를 현대화 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에 그쳤다. 이렇게 위태로운 상황에서 군비 경쟁은 시기상조였다. 만약 일본,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소련이 1941년 이전에 총력을 다해 함대를 증강했다면 영국의 조선 능력으로는 이를 압도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해군성과 외무성은 이런 취약한 시기를 넘기기 위해서 1934~35년 사이에 영국 해군이 세계 최대의 해군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세계 각국의 해군력 증강을 제약할 새로운 국제해군조약을 추진했다. 

1936년의 새로운 해군조약의 협상 과정은 복잡했다. 해군성은 영국이 군비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기 전에 경쟁이 시작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새로운 해군조약에서 함대의 총 톤수를 제약할 것이 아니라 함종별로 주포의 구경과 톤수를 제약하는 것이 옳다는 결론을 얻었다. 함대의 총톤수 제약을 철폐함으로써 군비 경쟁을 억제한다는 발상이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영국 해군성과 외무성은 총톤수의 비율에 국가별로 위계질서를 부여한 것이야 말로 각국 해군의 불만 요인이라는데 합의를 보았다.23)  함대의 총톤수 비율에서 국가의 명예와 위신이라는 요인을 제외하면, 해군력의 규모에는 각 국가의 전략적 필요성과 자원의 수준에 따른 전략적 이해관계가 반영되는 것이며 여기에서 영국을 최우선 순위로 놓고 미국, 일본, 그리고 다른 국가들은 그 뒤에 놓아야 한다는 점을 인식한 것이다. 영국의 군함 건조능력이 구식 전함을 신형 전함으로 교체할 수 있는 수준에 불과하다면 영국의 입장에서는 전함의 성능이 급격히 향상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군함의 함종 별로 성능의 한계를 통일하는 국제조약을 체결하는 것이야 말로 합리적인 것 이 아닐 수 없었다. 1930년대에 제1해군경을 지냈으며 해군 정책의 큰 틀을 만든 어니 채트필드Ernie M. Chatfield경은 해군 군비통제를 통해 “어느 한 국가가 전함의 크기와 성능에서 우위에 서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24) 

이와 같은 관점에서 1935년 6월에 히틀러가 독일의 해군력을 영국의 35% 수준으로 맞춰달라고 제안한 것을 영국 정부가 신속히 승락한 것은 합리적인 결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25) 영국해군의 관점에서 영독해군협정은 독일의 해군력 증강을 덜 위협적이고 지리멸렬한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한 외교적 미끼였다고 할 수 있다. 독일 정부가 해군조약을 준수하여 독일 해군을 작지만 균형을 맞춘 전력으로 만든다면 영국으로서는 이것을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독일 해군이 영국이 두려워 하던 비대칭 전략을 채택하는 것도 막을 수 있었다. 독일의 해군력 건설이 베르사이유조약의 제약을 받고 있었던 1920년대 후반에 독일 해군은 배수량 1만톤에 11인치 주포를 장비해 전함 보다는 빠르면서 순양함 보다는 중무장을 갖춰 영국의 해상 교통을 교란하는데 적합한 혁명적인 전함을 개발했다.26) 영독해군협정의 조항들은 포켓전함과 신형 순양함의 개발을 제약할 것 이었다. 

1936년 3월 영국, 미국, 프랑스는 제2차 런던해군군축조약에 서명하였고 이 조약은 영국 해군성이 원하던 규정들을 대부분 담고 있었다.  독일과 소련도 1937년 7월 조약에 서명함으로서 해군군비통제에 따랐다. 이탈리아는 1938년 조약에 서명했다. 영국 해군은 영국이 세계 제일의 해군국으로 남아있겠다는 의지를 천명하기 위하여 1937년 대규모의 전함 건조계획을 발표하고 다섯척의 킹조지5세급 전함의 기공을 시작했다. 1930년대 초반 영국의 조선업계는 위축되어 있었지만 이제 영국 해군은 새롭게 대규모 투자를 단행했고 노동력도 증가했다. 1928년 부터 1941년 까지 신규 건조한 물량으로 영국은 미국과 일본을 포함한 다른 열강의 해군력을 상회할 수 있었다. 영국 해군은 전반적으로 1백만톤의 새 군함을 획득했지만 미국은 70만톤, 일본은 60만톤에 그쳤다.27)  즉, 가상적과 우방국의 해군력을 능가하는 군함을 건조하고 자국의 전략적 목적에 맞춰 해군군비통제를 유도한 국가를 쇠퇴했다고 서술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겠다. 

영국 해군의 계획이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5년간의 평화가 필요했다. 이때문에 제1해군경이자 참모총장위원회Chiefs of Staff committee 위원장이었던 채트필드 제독은 네빌 체임벌린 수상의 대독유화정책을 지지했던 것이었다.28)  해군성은 너무 이른 시기에 독일과 전쟁을 벌이게 된다면 대형 군함을 건조할 예산이 호송선단을 호위할 군함을 건조하는데 전용되거나 제1차 세계대전때 처럼 육군과 공군으로 돌려질 수 있으며 미국과 일본의 군함 건조를 촉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해군성은 영국과 미국, 일본이 보조를 맞추는 한 일본은 군축협상을 준수할 것이라고 생각했다.29) 영국 해군과 미해군은 일본을 건함 경쟁에서 압도할 수 있으며 전쟁에서도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1938년 3월, 일본 정부가 새로운 군함 건설 계획에 대한 자료를 공개하지 않겠다고 하자 제2차 런던해군군축조약 조인국들은 전함의 성능 기준을 배수량 35,000톤에서 40,000톤으로, 주포 구경은 15인치에서 16인치로 상향하기로 했다. 영국과 미국 정보당국은 일본이 새로 건조하는 전함이 이정도 수준일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측은 배수량 70,000톤에 18인치 주포를 갖춘 첫번째 전함을 기공한 상태였다.30) 영국 해군성은 영국 조선소의 건조 능력의 한계 때문에 40,000톤급의 전함을 건조하기로 결정했다.31) 
 
영국 해군이 배수량 40,000톤에 16인치 주포를 장비한 라이온급 전함의 건조를 시작할 무렵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해군성의 예상대로 전쟁이 발발하자 영국 해군의 우선순위는 장기적인 함대 건설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에서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 당장 필요한 것을 갖추는데 돌아갔다. 전쟁 초기에 영국 해군은 소중한 전함을 독일의 잠수함과 일본군의 폭격기에 잃어버리는 등 많은 패배와 재앙을 겪었다. 하지만 싸우는 군대의 질적인 요소는 그 군대가 고난을 이겨내는 것으로 평가해야 한다. 이 점에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해군의 성과는 특히 독일이 프랑스와 노르웨이를 정복해 영국 해군이 전쟁 이전에 구상한 해상전 수행 계획을 뒤틀어 놓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놀라운 것이라 할 수 있다. 영국 해군은 1939~40년에 독일과 이탈리아의 수상함대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으며 비시 프랑스의 해군을 무력화 했고 독일의 잠수함 공세를 막아내는 동시에 히틀러가 영국 침공 계획을 단념하게 만드는데 큰 기여를 했다. 영국 해군이 대서양과 지중해를 장악함으로써 추축국에 맞설 연합이 결성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1945년 이후의 세대의 역사가들은 제2차세계대전 중 영국 해군의 업적에 대해서는 칭송했지만 전간기의 영국 해군에 대해서는 혹독하게 비판했는데 그 이유는 전쟁 초기 패배의 원인이 거기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간기 영국 해군의 역사를 단지 불운한 막간극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전간기의 영국 해군을 당시의 환경을 고려해 바라본다면 전간기의 역사가 불가피한 쇠퇴의 시기가 아니라 수많은 난제에 직면해 탁월한 기량과 대담한 용기를 발휘한 시기였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주석

1) 이에 관한 고전적인 연구로는 Paul Kennedy, The Rise And Fall of British Naval Mastery (London: Macmillan, 1984), pp. 267–98과  Stephen Roskill, Naval Policy Between the Wars, 2 vols. (London: Collins, 1968/76)가 있다. 
2) Gordon Martel, ‘The Meaning of Power: Rethinking the Decline and Fall of Great Britain’, International History Review (Vol. 13, No. 4, November 1991), pp. 662–94. 
3) 영국의 쇠퇴를 주장하는 학설에 대한 가장 최근의 반론으로는 David Edgerton, Warfare State: Britain, 1919–1970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6)가 있다. 
4) Matthew S Seligmann, The Royal Navy and the German Threat 1901–1914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2); Paul G Halpern, A Naval History of World War I (London: UCL Press, 1994). 
5) William J Williams, ‘Josephus Daniels and the US Navy’s Shipbuilding Program during World War I’, Journal of Military History (Vol. 60, No. 1, 1996), pp. 7–38. 
6) John Jordan, Warships After Washington: The Development of the Five Major Fleets 1922–1930 (Barnsley: Seaforth Publishing, 2011), pp. 1–24. 
7) John Ferris, ‘“It Is Our Business in the Navy to Command the Seas”: The Last Decade of British Maritime Supremacy, 1919–1929’, in Keith Neilson and Gregory C Kennedy (eds),Far Flung Lines: Studies in Imperial Defence in Honour of Donald Mackenzie Schurman (London: Frank Cass, 1997), pp. 129–34. 
8) Colin S Gray, The Leverage of Sea Power: Strategic Advantage of Navies in Major Wars (New York, NY: The Free Press, 1992). 
9) Ferris, ‘“It Is Our Business in the Navy to Command the Seas”’, pp. 129–34. 
10) Christopher M Bell, ‘Thinking the Unthinkable: British and American Naval Strategies for an Anglo–American War, 1918–1931’, International History Review (Vol. 19, No. 4, 1997), pp. 789–808. 
11) Christopher M Bell, The Royal Navy, Seapower and Strategy between the Wars (Basingstoke: Macmillan, 2000), pp. 59–98. 
12) Geoffrey Till, Air Power and the Royal Navy, 1914–1945 (London: Jane’s, 1979). 
13) Duncan Redford, A History of the Royal Navy: World War II (London: I. B. Tauris, 2014), pp. 102–08,133–54. 
14) Geoffrey Till, ‘Adopting the Aircraft Carrier: The British, American and Japanese Case Studies’, in Alan R Millett and Williamson Murray (eds), Military Innovation in the Interwar Period(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6), pp. 191–226. 
15) Joseph A Maiolo, The Royal Navy and Nazi Germany, 1933–1939 (Basingstoke: Macmillan, 1998), pp. 63–86. 
16) David Henry, ‘British Submarine Policy, 1918–39’, in Brian Ranft (ed.), Technological Change and British Naval Policy, 1860–1939 (London: Hodder & Stoughton, 1977), pp. 81–163. 
17) Joseph A Maiolo, ‘Deception and Intelligence Failure: Anglo–German Preparations for U-Boat Warfare’, Intelligence and National Security (Vol. 11, No. 1, 1996), pp. 32–58. 
18) Joseph A Maiolo, ‘“I Believe the Hun is Cheating”: British Admiralty Technical Intelligence and the German Navy, 1936–39’, Intelligence and National Security (Vol. 11, No.1, 1996), pp.32–58. 
19) Marc Milner, ‘The Battle of the Atlantic’, Journal of Strategic Studies (Vol. 13, No. 1, 1990), pp. 45–66. 
20) Sadao Asada, From Mahan to Pearl Harbor: The Imperial Japanese Navy and the United States (Annapolis, MD: Naval Institute Press, 2006), pp. 99–157. 
21) Maiolo, The Royal Navy and Nazi Germany, 1933–1939, pp. 133–38. 
22) Ferris, ‘“It Is Our Business in the Navy to Command the Seas’”, pp. 76–95; Jon T Sumida, ‘British Naval Procurement and Technological Change, 1919–39’, in Phillips P O’Brien (ed.), Technology and Naval Combat in the Twentieth Century and Beyond (London: Frank Cass, 2001), pp. 128–47. 
23) Maiolo, The Royal Navy and Nazi Germany, 1933–1939, pp. 15–19. 
24) Ibid., pp. 1–19. 
25) Ibid., pp. 19–62. 
26) Jost Dülffer, Weimar, Hitler, und die Marine: Reichspolitik und Flottenbau, 1920 bis 1939 (Düsseldorf: Droste Verlag, 1973), pp. 109–30. 
27) Edgerton, Warfare State, pp. 26–33. 
28) Maiolo, The Royal Navy and Nazi Germany, 1933–1939, pp. 138–58. 
29) Stephen E Pelz, Race to Pearl Harbor: The Failure of the Second London Naval Conference and the Onset of World War II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1974), pp. 149–64. 
30) Malcolm Muir, ‘Rearming in a Vacuum: United States Navy Intelligence and the Japanese Capital Ship Threat, 1936–45’, Journal of Military History (Vol. 54, No. 4, 1990), pp. 473–85; Maiolo, The Royal Navy and Nazi Germany, 1933–1939, pp. 133–58. 
31) David K Brown, Nelson to Vanguard: Warship Design and Development, 1923–1935 (London: Chatham Publishing, 2000), pp. 35–37.

2013년 3월 24일 일요일

BB-64 위스콘신

노퍽에서 맥아더 기념관을 구경한 뒤 늦은 점심을 먹고 근처에 있는 BB-64 위스콘신을 구경하러 갔습니다. 위스콘신은 미국에서 건조되어 완성된 최후의 전함이죠. 이날 다른 일정 때문에 관람시간을 맞추지 못해서 바깥에서만 구경한 것이 아쉽더군요. 이런 곳은 좀 여유있게 방문을 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BB-64 위스콘신은 미국에서 첫번째로 구경한 전함이었습니다. "전함"의 실물을 태어나서 처음 보는지라 감탄사가 절로 나오더군요. 유감스럽게도 내부는 구경하지 못했으니 바깥에서 잠시 구경하며 찍은 사진을 몇장 올려봅니다.




위스콘신의 함수는 사고로 파손되어 같은 급의 켄터키의 함수를 이식했다죠

이 위치에서 보면 정말 그 거대함에 감탄사가 절로 나옵니다.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을 비롯해 한국전쟁 관련 기장이 둘이나 있네요

2번 포탑을 찍어 봤습니다.



5인치 부포용 Mk.37 사격통제체계의 Director


그리고 위스콘신의 좌현쪽에는 수병 동상이 하나  세워져 있습니다. 이것도 나름 유명한 물건이더군요. 시큰둥해 보이는 표정이 자대 복귀를 앞둔 듯 싶습니다...



블루엔젤스 마킹을 한A-4

늘 그렇듯 나중에 시간이 되면 다시 오겠다는 생각만 하고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아쉬운 마음이 커서 그런지 더 근사해 보이더군요.


2008년 5월 31일 토요일

미 해군의 굴욕

천하의 미 해군도 이런 굴욕을 겪은 때가 있었다지요.

미해군의 전반적인 상황은 1880년대가 될 때 까지도 나아지지 않았다.

1879년 칠레는 페루와 볼리비아를 상대로 전쟁을 시작했고 해상에서 잇달아 승리를 거두었다. 미국은 페루에 경제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페루의 패전이 확실해졌기 때문에 칠레 정부에 휴전을 요청하기 위해서 발파라이소(Valparaiso)에 해군 사절단을 파견했다.
그러나 미 해군 태평양전대가 수 척의 구식 목조전함만을 보유하고 있었던 반면 칠레 해군은 영국에서 건조한 12인치 장갑과 후미장전식 포를 갖춘 두 척의 전함을 포함해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군함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칠레는 미국의 개입이 뜬금없고 주제 넘는 짓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뒤에 한 (미국)하원의원에 따르면 “(사절단을 이끈) 제독에게 미국이 쓸데없이 참견한다면 미국 함대를 바닷속에 처 넣겠다”고 말했다 한다. 한 함장은 이 말에 크게 분노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칠레가 옆 동네와의 싱거운 싸움에서 승리한 것 가지고 미국의 강력한 힘에 맞설 수 있을것이라 기고만장해 하다니!”
물론 이 함장이 자부심에 상처를 입었다고 미국과 칠레가 전쟁에 돌입하지는 않았다. 그랬다면 보잘 것 없는 미국 함대는 끝장이 났을 것이고 그럴 경우 지상전의 결과는 별 의미가 없게 될 것이었다.

Stephen Howarth, 『To shining Sea : A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Navy 1775~1998』, University of Oklahoma Press, 1999, p.223

과연, 시정잡배의 가랑이 밑을 기었다는 한신의 고사를 떠오르게 하는 훈훈한 옛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2008년 1월 7일 월요일

독일군도 상륙작전을 할 줄 안다! : 1917년 10월의 알비온 작전

2008-01-07 / PM 10:50 본문 조금 추가하고 지도도 넣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에서 감행된 대규모 상륙작전인 갈리폴리 전투는 연합군에게 대재앙으로 기록됐습니다. 하지만 신통하게도 이 전쟁에서 물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독일군이 당당하게(?) 상륙작전에 성공한 일이 있었으니 그 사연은 다음과 같습니다.

유틀란트 전투 이후 독일 해군은 사실상 항구에 틀어 박혀 노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대서양으로 나가지 못한다고 손가락만 빨고 놀 수는 없는 법. 다행히도 독일 해군이 놀 곳이 있긴 있었으니 바로 발틱해 였습니다. 1917년 10월, 독일은 할일 없는 해군을 동원해 리가만의 세 섬, 사레마(Saaremaa, 독일/스웨덴어로는 Ösel)와 히우마(Hiiumaa, 독일/스웨덴어로는 Dagö), 무우(Muhu, 독일/스웨덴어로는 Moon, Mohn)에 상륙작전을 감행합니다. 이 작전은 꽤 멋진 이름을 달게 됐는데 그 이름은 바로 알비온(Albion) 이었습니다.



1. 알비온 작전의 준비

알비온 작전의 필요성이 처음 제기된 것은 해군에 의해서 였습니다. 독일군은 페트로그라드로 진격하기 위해서 리가를 제압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리가만의 입구를 막고 있는 사레마와 히우마를 먼저 떨어트려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해군은 1915년 하반기부터 이 지역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육군에 리가 지역에 대한 공세의 필요성을 제기합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독일 육군은 서부전선에서 먼저 결판을 낸다는 전략을 고수하고 있었고 육군참모총장인 팔켄하인(Erich von Falkenhayn)은 그의 무덤이 될 베르덩에 대한 공세 준비에 몰두하느라 해군의 제안에 대해서는 약간의 관심만 보였습니다. 해군은 다시 1916년 3월에 보다 구체적인 작전안을 내놓지만 여전히 팔켄하인의 관심은 베르덩에 있었습니다.

베르덩 공세가 결국 피박으로 끝나자 독일육군은 동부전선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독일육군은 1916년 하반기부터 본격적으로 리가에 대한 공세를 계획하기 시작했습니다. 12월에 나온 첫번째 계획안은 후티어(Oskar von Hutier)의 제 8군이 드비나 강 까지 진출하는 비교적 소박(?)한 것 이었지만 팔켄하인의 후임인 루덴도르프는 이 계획을 좀 더 확대시키길 원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1917년 8월에 최종 승인된 계획안은 제 8군이 리가 전체를 장악하고 그 후속으로 상륙부대가 사레마, 히우마, 무우에 상륙하는 것 이었습니다.
리가를 장악한 다음 단계인 상륙작전은 카텐(Hugo von Kathen) 보병대장이 지휘하는 제 23예비군단이 수행할 계획이었고 상륙부대는 에스토르프(Ludwig von Estorff) 중장의 제 42보병사단 이었습니다. 제 42보병사단은 제 65보병여단 사령부와 함께 상륙작전을 위해서 사단 예하의 17, 131, 138 보병연대 외에 추가적으로 255 보병연대와 제 2자전거 보병여단, 그리고 독립 돌격중대들을 배속 받았습니다.
루덴도르프는 해군과 작전을 조율하기 위해서 1917년 8월 13일 해군작전국장인 카이저링크(Walther von Keyserlingk) 해군중장과 회의를 가집니다. 이날 회의에서 육군은 9월 초 까지 리가를 함락시키고 그 이후 1개 사단을 투입해 세 섬을 제압한다는 계획을 알렸습니다.

그런데 이 무렵 독일 해군의 사정은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유틀란트 전투 이후 항구에 틀어박혀 별다른 일없이 빈둥거리다 보니 사기는 떨어지고 별다른 활동이 없다 보니 식량 배급도 줄어드는 악재가 겹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1917년에 8월 2일에는 식량 사정의 악화에 불만을 품은 전함 프린츠레겐트 루이트폴드(Prinzregent Luitpold),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Fridrich der Große), 카이저(Kaiser), 카이저린(Kaiserin), 베스트팔(Westphal)의 수병들이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결국 이 폭동은 진압되고 주동자 두 명이 군사재판에 의해 처형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이렇게 알비온 작전 직전 독일 해군의 상황은 매우 어수선했습니다.
또 대해함대(Hochseeflotte) 사령관인 셰어 제독은 발틱해 작전에 자신의 함대를 동원하는 것에 반대하고 있었습니다. 셰어는 대해함대의 주 전장은 어디까지나 북해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육군을 지원하기 위해 발틱해로 병력을 쪼개는 것에 대해 탐탁치 않게 생각했습니다. 셰어 제독은 1917년 9월 11일에 열린 회의에 자신의 대리인인 우슬라(Ludolf von Usslar) 대령을 보내 알비온 작전에 대한 반대의견을 명확히 했습니다. 여기에 발틱해 사령관(Oberbefehlshaber der Ostsee)인 하인리히공(Albert Wilhelm Heinrich von Preußen, 빌헬름 2세의 동생입니다)도 셰어의 의견에 찬성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황제인 빌헬름 2세가 개입해 알비온 작전을 개시하도록 결정합니다. 빌헬름 2세의 작전 개시 명령은 9월 19일에 떨어졌고 이 명령을 하달 받은 제 8군 사령부는 9월 24일에 육군의 작전 계획을 완성하고 이것을 제 23예비군단에 하달합니다.

해군은 알비온 작전을 위해 제 3, 4전대(Geschwader)와 제 2초계집단(Aufklärungsgruppe), 제 2, 9어뢰전단(Torpedoboots Flottille) 을 중심으로 총 10척의 전함을 포함 300척의 군함을 동원했습니다. 이 중 병력 수송선은 19척 이었습니다. 함대의 지휘는 슈미트(Erhard Schmidt) 제독이 맡았으며 기함은 순양전함 몰트케 였습니다. 그리고 상륙부대는 위에서 언급한 증강된 42보병사단으로 총 전력은 병력 24,596명, 말 8473마리, 야포 40문과 차량 2,490대였고 여기에 30일 치의 보급품이 함께 수송되었습니다. 여기에 비행기 65대와 비행선 5대가 투입되는 말 그대로 입체전이 수행될 계획이었습니다.

한편, 러시아는 독일군의 주력이 상륙할 사레마에 6인치 에서 12인치에 달하는 해안포를 배치하고 있었으며 해군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대량의 기뢰를 부설해 놓고 있었습니다. 이점은 독일 해군이 크게 우려하는 바였습니다. 또한 독일은 러시아가 세 섬에 2개 보병사단을 배치해 놓고 있는 것으로 보았고 여기에 더해 러시아 해군이 상륙 저지를 위해 투입될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독일 해군은 러시아군의 방어가 상대적으로 약한 사레마 섬의 북쪽, 타가만 일대를 상륙 지점으로 정했습니다. 타가만 일대는 6인치 해안포대가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독일군은 러시아군이 타가만에 대한 상륙을 눈치채지 못 하도록 리가 만으로 통하는 Sõrve 반도에 기만 공격을 실시하도록 했습니다. 이 기만 공격에는 제 4전대의 전함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와 쾨니히 알베르트 두 척이 투입되어 러시아군의 12인치 포대를 공격할 예정이었습니다. 두 척의 전함이 러시아군의 주의를 끄는 동안 제 1진인 4,500명은 타가만에 상륙해 상륙 지점의 6인치 해안포대를 제압하고 그 뒤로 제 2진 3,000명이 상륙해 나머지 사단 부대가 상륙할 교두보를 확보해야 했습니다.



2. 알비온작전의 개시

알비온 작전의 준비 단계인 지상 작전은 순조로웠습니다. 후티어의 제 8군은 러시아 제 12군에 사상자 25,000명과 야포 262문을 상실하는 피해를 입히고 9월 3일에는 리가 전체를 장악했습니다. 이에 비해 독일 제 8군의 손실은 4,200명에 그쳤습니다.

상륙은 9월 30일로 예정되었지만 기상이 악화되어 취소되었습니다. 상륙 작전을 총괄하는 제 8군 사령관 후티어는 기상 악화로 상륙이 연기되는 것을 우려해 마침내 10월 8일에 작전을 개시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상륙 부대와 물자의 적재는 9일 시작되어 10일에 완료됐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11일 상륙 부대가 출발합니다.

상륙부대는 12일 오전 3시에 타가만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상륙 부대는 타가만 북쪽 12km 지점에서 정지한 뒤 기뢰 제거작업과 상륙 부대의 전개를 시작했습니다. 상륙 부대 지휘관인 카텐 보병대장은 오전 4시 30분에 상륙 개시 명령을 내렸고 상륙 부대의 제 1진인 제 138보병연대 1대대와 제 10돌격중대가 어뢰정에 탑승해 해안으로 돌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해안에 가까워 지면서 러시아군의 해안포대로 부터 공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해군은 상륙부대를 지원하기 위해 전함으로 해안포대에 대한 제압사격을 시작해 해안포들을 제압했습니다. 상륙부대의 제 1진은 해군의 지원에 힘입어 오전 6시 18분까지 상륙과 장비 하역을 마쳤습니다.
주력 부대가 타가만에 상륙을 감행하는 동안 제 2자전거 보병여단이 주축이 된 조공 부대도 파메로트(Pamerot)에 상륙을 시작했습니다. 조공 부대의 화력지원은 전함 바이에른(Bayern)과 그로서 쿠어퓌르스트(Grosser Kurfürst)경순양함 엠덴(Emden)이 담당했습니다. 이들은 해안포대를 침묵시키는데는 성공했지만 기뢰지대에 들어가게 되어 전함 바이에른이 대파되었습니다.
교두보가 확보되자 후속 부대인 제 138보병연대 주력과 제 131보병연대가 상륙했고 그 뒤를 제 17보병연대와 255보병연대가 따랐습니다. 이 와중에 제 138연대 2대대를 실은 수송선이 기뢰와 접촉했고 이들은 수송선에서 내려 나무 보트로 상륙했습니다. 상륙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13일 저녁까지 주력 부대는 물론 조공 부대인 제 2자전거 보병여단과 18돌격중대까지 상륙을 완료했습니다.

타가만의 상륙

하지만 다음날인 13일 기상이 악화되어 야포와 차량, 마필의 하역에 차질이 생겼습니다. 파고가 심해 장비를 하역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 입니다. 하지만 기상상태가 호전될 때 까지 기다리다가는 러시아군이 증원되거나 방어태세를 굳힐 수 있었습니다.

결국 에스토르프 중장은 위험하지만 과감한 결단을 내립니다. 즉 포병의 지원없이 상륙한 보병부대만 가지고 공격을 개시하기로 결심한 것 이었습니다. 에스트로프는 제 131보병연대는 남서쪽으로 진출해 Sõrve반도를 제압하고 제 255보병연대와 제 1자전거대대, 그리고 제 65보병여단이 지휘하는 17, 138보병연대는 사레마의 가장 큰 도시인 쿠레사레(Kuressaare 독일식 지명은 아렌스부르크Arensburg)를 점령하도록 했습니다. 쿠레사레는 인구 5,000명에 사레마의 가장 큰 항구였고 또 비행장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공인 제 2자전거 보병여단과 18돌격중대는 오리사레(Orissaare, 독일식 지명은 오리사르Orrisar) 방면으로 진출해 러시아군의 퇴로를 북익에서 포위하도록 했습니다.
이 결정은 당시 상황으로 봤을 때 나쁘지 않은 것 이었지만 기상이 악화되어 이들을 지원할 항공기들이 작전을 할 수 없었습니다. 독일군은 항공기에 정찰을 크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이점을 제외하면 작전의 진행은 순조롭게 진행됐습니다. 제 131보병연대는 Sõrve반도를 손쉽게 제압하고 12인치 해안포대의 러시아군을 후퇴시켰습니다. 러시아군은 해안포가 독일군에 손에 그대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포의 핵심 부품을 파괴하고 무사히 철수했습니다.
한편, 제 255보병연대는 쿠레사레로 진격하는 도중 러시아군의 1개 기병연대(?)로부터 공격받았지만 이것을 격퇴시켰고 17연대와 138연대도 러시아군 방어선과 접촉해 이것을 돌파하고 포로 1,000명을 잡는 전과를 거뒀습니다. 이날 저녁 255연대의 정찰대는 러시아군이 쿠레사레를 버리고 퇴각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에스토르프 중장은 러시아군을 신속히 추격하기 위해 다음날인 14일도 보병 부대만으로 추격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에스토르프는 러시아군이 무우섬으로 퇴각하는 것을 신속히 저지하기를 바랬기 때문에 중화기 없이 보병만으로 공격하는 무리수를 두었습니다. 다행히 이것이 성공하기는 했습니다만. 하지만 14일에는 비가 내려 보병의 이동에 심각한 장애를 초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레사레를 점령한 3개 보병연대는 강행군으로 오리사레까지 진출, 조공 부대와 함께 러시아군을 협격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었습니다.
한편, 독일 해군은 이날 러시아 해군의 구축함대와 교전, 구축함 그롬(Гром)을 격침시켰습니다. 그 대신 독일군도 교전 도중 어뢰정 한 척을 상실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10월 15일, 오리사레에 집결한 독일군은 고립된 러시아군에게 총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이 공격을 지원하기 위해서 독일군은 군함 일부를 사레마와 무우 사이의 해협으로 투입했습니다. 이미 오리사레에 도착해 있던 제 2자전거 보병여단과 18돌격중대는 무우섬에 상륙해 러시아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제 138, 255보병연대가 포위된 러시아군을 소탕했습니다. 독일군은 이 공격으로 수비대장인 이바노프와 그의 참모진, 포로 5,000명을 생포하고 야포 8문, 기관총 8정과 말 200마리를 노획했습니다.
러시아 해군은 무우의 수비대 7,000명도 포위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해상으로 철수시키고 해군 함정들도 사레마 수역에서 철수하도록 합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러시아 해군은 독일 해군과의 교전으로 전노급 전함인 슬라바(Слава)가 대파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러시아 해군은 독일군의 소해정 몇 척과 어뢰정 1척을 격침시키는 전과를 올렸지만 독일군과의 전력차가 커서 더 이상의 전투는 무리였습니다. 그리고 발틱해에서 작전 중이던 영국 해군의 잠수함 C32도 사레마 근처 해역에서 독일 해군에 의해 격침 당했습니다.

작전은 대 성공이었습니다. 독일군은 해군 쪽에서 전사 131명과 부상 60명, 육군 쪽에서는 전사 54명과 부상 141명의 피해를 입은 반면 러시아군은 제 107, 118보병사단 등 2개 사단이 완전히 분쇄되고 포로 2만명과 포 141문, 그리고 사레마의 해안포 전부를 상실하는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반면 러시아 해군은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선전했다고 평가됩니다.


참고자료

Richard L. DiNardo, Huns with Web-Feet : Operation Albion 1917, War in History 2005 12
Holger Herwig, The First World War : Germany and Austria-Hungary 1914-1918, Arnold, 1997
Norman Stone, The Eastern Front 1914-17, Penguin, 1975, 1998

2007년 2월 26일 월요일

데자뷰? - (2)

제가 생각하기에는 우리가 이지스함 1척을 하기 위해서 드는 돈이면 400~500억 하는 차기고속정 25척 이상 건조할 수 있다고 보는데 어떻습니까?

이지스함 1대면 그 정도의 배 200척도 만들 수 있다고 보는데 어떻습니까?

임종인 의원, 2004년 10월 12일 해군본부 국정감사 회의록

그리고. 1920년대 프랑스에서는…

대부분의 유럽국가에서 해군은 유럽대륙의 지상군 위주의 군사 전략에서 부차적인 요소였다. 해군력은 유럽의 대륙국가간의 관계에서는 큰 역할을 할 수 없었고 마한이 역설한 이야기는 유럽 대륙의 현실과는 맞지 않았다. 무엇보다 전통적인 해군 전략은 대륙국가들이 처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즉 대륙국가들은 열세한 해군 전력으로 해양국가의 해군에 효과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던 것이다. 대륙국가의 해군 이론가들은 새로운 기술적 진보가 주력함의 열세를 만회해 줄 것으로 기대했다.

전함의 우월적 지위와 거함거포주의자들에 첫 번째로 도전을 한 것은 “어뢰정”이었다. Jeune Ecole의 수장인 Theophile Aube 제독은 어뢰정이 강력한 해양국가의 해군에 타격을 줄 수 있는 저렴한 대응수단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비록 어뢰정으로 전함으로 이뤄진 함대를 무찌를 수는 없더라도 최소한 전함의 행동을 제약할 수는 있다는 것이었다.

Emily O. Goldman, Sunken Treaties : Naval Arms Control between the Wars,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 1994, pp91-92

이런 이야기가 나온 배경은 다르기 때문에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지만 읽으면서 자꾸만 임종인 의원이 생각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