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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6월 30일 수요일

묘한 기시감

오늘 자료를 뒤지다가 약간 웃기는 글을 발견했습니다. 해당 부분은 대략 이렇습니다.

일년전 나는 광주(光州)에서 문학을 연구한다는 모 여대생이 이런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군인 같이 무서운 직업은 없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을 살육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라고.

나는 아연(啞然)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얼마나 무식을 폭로하는 일구일언인가? 만약 전쟁목적이 모다 인간을 살육하는데 있는 것이라면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나선 군대는 검을 꺾고 입으로만 싸우란 말인가? 우리들은 이런 말을 함부로 입밖에 내는 사람의 의식수준을 의심하는 동시에 그들의 인식부족을 통탄치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학교에서 공부하는, 특히 예술을 한다고 자부하는 사람의 말이라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예술을 하고 있는 사람이던 예술을 할려고 하는 사람이던 간에 그는 누구보다 똑바루 현실을 관찰할 줄 알아야 하며 그 현실가운데서 각양의 인간형을 분별할 줄 알고 그의 가치 판단까지 할줄아는 사람이래야 할 것이다. 이것을 모르는 예술가는 기형아적 존재이며 이 기형성을 벗어날 수 없는 한 여사한 편향의 결함은 면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이러한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마치 평화주의자인것 처럼 또는 지극히 평화를 애호하는 인도주의자인것 처럼 자부할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하나만 알고 열을 모르는 우둔한 인간들의 상투용어를 그냥 반복한데 불과하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러냐 하면 평화를 위협하는 것이 군대의 소위(所爲)라면 평화를 전취하여 항구한 반석위에 건립하는 것도 또한 군대의 소위라는 것을 전연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李愼得, 「軍人과 藝術家」, 『國防』16호(1952. 8), 36쪽

이걸 읽고나니 수메르의 점토판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지 않을까 하는 망상이 일더군요. ㅋ

2009년 7월 24일 금요일

데자뷰? - (5)

BigTrain님 블로그에서 불라바 미사일의 실험 실패와 이에 따른 러시아의 대응에 대한 소식을 접했습니다.

러시아 정보당국은 불라바 미사일이 사보타지의 표적이 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고 RIA Novosti가 보도했다.

러시아 정보당국의 소식통은 RIA Novosti에 제조사의 효율적인 품질 관리 부족이나 제작 과정 때문에 미사일이 세부적인 결함을 가지고 완성되었다고 밝혔다.

이 소식통은 제작 과정상의 태만은 사보타지와 동급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고 밝혔다.

또한 이 소식통은 경쟁상대인 러시아의 미사일 개발회사도 사보타지의 책임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소식통은 고체연료 로켓과 액체연료 로켓 개발사간의 경쟁은 치열하며 “그들은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는데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Sabotage behind Bulava failure?(2009. 07. 20)

이 기사를 읽고 나니 러시아는 소련 시절의 전통을 21세기에도 잘 계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숙청은 설계자, 기술자, 그리고 항공산업의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확대되었으며 연구기관들도 대량 검거의 대상이 되어 고위 행정인력에서 말단 행정직원까지 희생되었다. 예를 들어, 중앙항공역학연구소(Центра́льный аэрогидродинами́ческий институ́т)는 제멋대로 자행되는 공안탄압의 여파를 받았다. 소련의 저명한 항공기 설계자인 투폴레프(А. Н. Туполев) 조차 구제받지 못했다. 그는 체포된 뒤 잠시 수감되었다가 비밀 수용소에서 연구를 계속하게 되었다. 그의 수용소 설계국은 전쟁 기간 중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약 450명의 항공 기술자와 설계자가 체포되었으며 살아남은 300명은 비밀경찰이 감독하는 설계국에서 연구를 계속했다.

다른 사람들, 실험기 K4를 설계한 칼리닌(К. А. Калинин) 같은 사람들은 운이 없었다. K4가 하리코프 근처에서 시험 비행 중 추락해 네 명의 당원이 사망하자 칼리닌은 체포되어 사보타지 혐의로 총살되었다. 1930년대 초에 설계한 최초의 델타익 항공기와 같이 그가 과거에 했던 훌륭한 연구들도 고참 볼셰비키나 레닌의 혁명 동지들 조차 “파괴자”, “트로츠키주의 반동분자” 또는 “인민의 적”으로 몰리는 정치적 상황에서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Von Hardesty, Red Phoenix : The Rise of Soviet Air Power, 1941-1945, Smithsonian Institution Press, 1982, p.54

현재의 러시아가 1930년대의 소련 보다 나은 점은 사보타지 혐의자들이 총살 당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 정도같습니다.

2009년 6월 19일 금요일

데자뷰? - (4)

sonnet님의 ‘가카론(論)’을 접하니 예전에 읽은 책의 한 구절이 생각나는 군요.

스탈린은 각 부의 업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스탈린은 거의 모든 회의를 주관하고 모든 문제에 대해서 자신의 입장을 이야기 했다. 스탈린이 회의에 참여하는 것은 정치국의 활동에 영향을 끼쳤다. 거의 모든 정치국원은 동시에 각 부의 구성원이기도 했기 대문에 행정부처의 회의가 끝난 뒤 정치국 회의가 열리는 것이 관례화되었으며 이 회의는 다섯명(스탈린, 보즈네젠스키, 보로실로프, 즈다노프, 말렌코프) 이외의 국원들도 참여했다.

(중략)

마지막으로, 정치국과 각 부처는 스탈린이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는 협의 체제로 기능을 했다. 군사전략과 외교정책에 대한 핵심 문제의 결정권은 스탈린의 독점적인 영역이었다. 스탈린은 또한 수없이 많은 부차적 문제에 개입했다.

Oleg V. Khlevniuk, Master of the House : Stalin and his inner circle, Yale University Press, 2009, pp.242-243

이 이야기가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 않으시다면 당신은 한국인 입니다.

2007년 3월 7일 수요일

데자뷰 - (3)

할리우드 영화 300에 내재된 오리엔탈리즘

영화는 다르되 기사는 어디에선가 많이 본 듯한 기사다. 내용도 익숙한 내용이다. 정말 예전에 썼던 기사에 명사만 고쳐서 내 놓은게 아닐까?

2007년 2월 26일 월요일

데자뷰? - (2)

제가 생각하기에는 우리가 이지스함 1척을 하기 위해서 드는 돈이면 400~500억 하는 차기고속정 25척 이상 건조할 수 있다고 보는데 어떻습니까?

이지스함 1대면 그 정도의 배 200척도 만들 수 있다고 보는데 어떻습니까?

임종인 의원, 2004년 10월 12일 해군본부 국정감사 회의록

그리고. 1920년대 프랑스에서는…

대부분의 유럽국가에서 해군은 유럽대륙의 지상군 위주의 군사 전략에서 부차적인 요소였다. 해군력은 유럽의 대륙국가간의 관계에서는 큰 역할을 할 수 없었고 마한이 역설한 이야기는 유럽 대륙의 현실과는 맞지 않았다. 무엇보다 전통적인 해군 전략은 대륙국가들이 처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즉 대륙국가들은 열세한 해군 전력으로 해양국가의 해군에 효과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던 것이다. 대륙국가의 해군 이론가들은 새로운 기술적 진보가 주력함의 열세를 만회해 줄 것으로 기대했다.

전함의 우월적 지위와 거함거포주의자들에 첫 번째로 도전을 한 것은 “어뢰정”이었다. Jeune Ecole의 수장인 Theophile Aube 제독은 어뢰정이 강력한 해양국가의 해군에 타격을 줄 수 있는 저렴한 대응수단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비록 어뢰정으로 전함으로 이뤄진 함대를 무찌를 수는 없더라도 최소한 전함의 행동을 제약할 수는 있다는 것이었다.

Emily O. Goldman, Sunken Treaties : Naval Arms Control between the Wars,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 1994, pp91-92

이런 이야기가 나온 배경은 다르기 때문에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지만 읽으면서 자꾸만 임종인 의원이 생각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