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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19일 월요일

헤르베르트 베르너, 『강철의 관』 (일조각, 2015)


 얼마전 일조각에서 헤르베르트 베르너가 쓴 『강철의 관』을 한권 보내주어 즐겁게 읽었습니다. 잘 알려진 회고록이긴 합니다만 아직 읽어보지 못하던 차에 훌륭한 한국어판을 읽게되어 즐거웠습니다.

 이 책의 저자인 헤르베르트 베르너는 독일 잠수함대의 일원으로 1941년 대서양 전투에 참가하여 1945년 종전 까지 살아남은 드문 경력의 소유자입니다. 이런 특이한 경험은 이 회고록의 가치를 높여줍니다. 이 책의 이야기 구조는 기본적으로 출격-귀환-출격으로 반복되는 단순한 구조를 취하고 있지만 출격을 반복할 때 마다 절망적으로 변해가는 전황과 이것을 극복하면서 살아남는 과정은 굉장한 흡인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분량이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쉬지 않고 읽어나갈 수 있었는데 특히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프랑스의 기지를 탈출하여 노르웨이로 향하는 여정에 대한 서술이 압권입니다. 그리고 아래로 부터 바라본 대서양 전투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대서양 전투를 작전의 관점에서 서술하는 서적에서는 한척의 잠수함이 출격하고 침몰하는 것을 단지 무미건조한 숫자로 보여주지만 이 책에서는 잠수함에 탄 수십명의 목숨이 오가는 긴박한 상황을 보여줍니다. 전투 뿐만 아니라 작전을 마치고 귀환한 다음 프랑스와 독일에서 보내는 시간에 대한 서술도 흥미롭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의 눈을 통해 보여지는 전시 독일사회의 모습은 꽤 흥미롭습니다. 1944년 초 까지는 전황이 악화됨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유지되고 있던 안정이 1944년 여름 이후 잇따른 파국과 함께 무너지는 모습에 대한 묘사는 매우 인상적입니다. 열차를 타고 이동하는 과정에서 만난 육군 장교들과의 대화나 포로로 잡힌 미국 조종사와의 대화 같이 인상적인 에피소드도 많습니다. 하지만 가장 가슴에 와 닿는 부분은 전쟁을 치르면서 가족을 비롯한 소중한 사람들을 잃어가는 이야기 입니다. 저자는 독일 잠수함 승무원들이 겪은 전쟁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이 책을 집필했다고 밝히고 있는데 그 목적은 충분히 달성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해전의 최일선이라 할 수 있는 한 척의 전투함이 주된 배경이 되기 때문에 기술적인 문제에 대한 서술이 많습니다. 번역과 감수가 충실히 이루어졌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원서를 읽지 못했기 때문에 번역에 대해서 뭐라고 할 입장은 아닙니다만 몇몇 문장을 봤을때 번역자가 원문에 충실한 번역을 위해 노력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번역자와 감수자 분께 감사를 드리고 싶네요. 부담 없이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2014년 11월 13일 목요일

[번역글] 영국 해군은 전간기에 쇠퇴했던 것인가?

몇달 전에 The RUSI Journal 159권 4호에 실린 Joseph A. Maiolo의 Did the Royal Navy Decline between the Two World Wars?를 읽고 흥미로운 관점이라고 생각해서 번역을 하겠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이제서야 번역을 하게 됐습니다. 제가 해군에 대해서는 아는게 많지 않아 특별히 덧붙일 이야기는 없습니다만 전간기 영국의 가상 적국에 대한 서술이 부족한 점만 제외하면 괜찮은 글 같습니다.




영국 해군은 전간기에 쇠퇴했던 것인가?

Joseph A. Maiolo


비교적 최근까지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전간기에 영국 해군이 쇠퇴한 것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단호하게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을 것이다.1)  영국 해군은 제1차세계대전에서 승리하여 독일의 대양함대와 잠수함대를 무찔렀다. 그리고 전투력과 명성에 대해 말하자면, 세계의 어떤 해군도 영국 해군에 비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영국 해군의 좋은 시절은 너무나 빨리 지나갔다. 영국 정부는 전쟁이 끝난 뒤 국방비 보다 사회 복지에 더 많은 지출을 하려고 했다. 즉 영국 해군의 쇠퇴가 시작됐다는 것이다. 1919년의 파리 평화회담과 국제연맹의 등장으로 평화가 지속될 것이고 군축이 이루어 질 것이라고 순진하게 생각한 영국 정부는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여 영국 해군의 규모를 영국의 안보 상황에 맞추지 않고 군축 회의의 합의 결과에 맞추었다. 전후 영국 정부가 영국 해군의 우위를 지켜내지 못한 것은 영국 해군 수뇌부의 실책과 맞물려 더욱 악화되었다. 게다가 영국 해군 수뇌부는 새로운 사상과 신기술을 싫어했고 위협에 대처하는 태도도 안이했다는 것이다. 

영국의 쇠퇴를 주목한 역사학계의 경향은 1960년대에서 1970년대에 생겨났는데, 이러한 학설은 영국의 전 세계에 대한 영향력 감퇴와 전후 영국 경제의 상대적인 쇠퇴의 원인을 설명하고자 했다. 영국 해군은 국력의 주요한 척도였기 때문에 영국의 쇠퇴를 연구하는 학파가 여기에 주목한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2) 영국 해군의 쇠퇴했다거나 정체되어 있었다는 이야기는 흥미롭긴 하지만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3) 존 페리스John Ferris, 크리스토퍼 벨Christopher Bell, 데이빗 이거튼David Edgerton, 그리고 본 필자의 최신 연구는 영국 해군이 그 훌륭한 전통을 이어가며 탁월한 기술로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도 그 위용을 유지했음을 증명하였다. 영국 해군은 영국의 안보를 위해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고 군비 통제를 활용했으며 기만을 통해 경쟁국들의 건함 계획에 영향을 끼쳤다. 

영국 해군의 쇠퇴를 주장하는 학설에서는 1914년 이전의 10년간을 ‘팍스 브래타니카’의 종언으로 서술한다. 영국 해군은 1906년 세계 최초의 단일 구경 주포 전함인 HMS 드레드노트를 건조하여 독일 해군이 촉발한 건함 경쟁에서 승기를 잡았다. 12인치 주포와 강력한 터빈엔진을 장비한 22,000톤의 드레드노트와 그 후속 전함들은 기존의 전함들을 시대에 뒤떨어진 퇴물로 만들어 버렸다. 이후 계속된 건함 경쟁에서도 영국 해군은 질과 양 모두 상대를 압도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때 영국 해군은 21척의 드레드노트형 전함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독일은 같은 종류의 전함을 13척만 보유한데 그쳤다. 이같은 격차는 독일 해군이 기지에 묶여 있는 동안 영국 해군은 독일의 해운을 봉쇄하고, 독일의 전시 경제를 옭죄어 독일 국민의 사기에 타격을 입힐 수 있다는 것을 뜻했다. 1916년의 유틀란트 전투에서는 세계 1위와 2위의 함대가 격돌했지만 승패를 가르지는 못했다. 하지만 독일 해군은 결전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해 독일이 절실히 필요로 했던 영국의 해상 봉쇄 분쇄와 독일 수상함대 및 잠수함대를 통한 영국 봉쇄에 실패했기 때문에 이 전투는 영국의 전략적 승리로 끝났다.4)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영국 해군이 직면한 가장 큰 도전은 영국, 미국, 일본의 군비 경쟁이었다. 1916년 미 의회는 영국의 해상 봉쇄 가능성과 독일의 잠수함대가 미국의 이해관계를 침해할 것을 우려하여 66척의 군함을 건조하는 것을 승인했는데 여기에는 4척의 전함, 4척의 순양전함, 4척의 순양함, 20척의 구축함, 30척의 잠수함이 포함되었다. 이 전례없는 건함 계획은 다시 1917년에는 전함 10척, 순양전함 6척과 기타 지원함정을 건조하여 1925년 까지 세계 최대의 해군을 건설하는 것으로 확대되었다.5)  미해군의 팽창은 단지 영국 해군을 위축시키는데 그치지 않고 이미 세계 3위의 해군국이었던 일본의 해군 증강을 촉발했다. 1919년 파리 평화회담에서 있었던 미국과 영국간의 해군력 균형에 관한 회담은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듬해에 영국은 미국의 해군력 증강에 맞서기 위해 18인치 주포를 장비한 5만톤급의 전함과 순양전함 8척을 건조하기로 했다. 1922년에는 영국과 미국, 일본 모두가 기존의 전함을 훨씬 뛰어넘는 화력과 방어력을 갖춘 16인치에서 18인치 주포를 장비한 4~5만톤 급의 전함 건조를 추진하고 있었다.6) 

하지만 영국은 미국이 전력을 다해 함대를 건설할 경우 건함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재정적, 공업적 기반이 없었다. 1920~21년에 열린 워싱턴 회의에서 영국측은 현명하게도 미국에게 조약상의 평등한 지위라는 상징성을 양보하는 대신 미국이 건함 경쟁에 나서지 못하도록 유도했다. 워싱턴 해군조약에서는 영국, 미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 해군의 전함 및 항공모함의 총톤수를 5:5:3:1.75:1로 정했다. 하지만 한 미해군 제독이 씁슬하게 토로했듯이 문서상의 동등함이 실전에서의 동등함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미국과 일본은 조약을 이행하기 위해서 새로 건조하는 전함을 폐기 처분하거나 취소해야 했지만 영국은 기존의 구형 전함을 폐기하는 것으로 그쳤다. 영국 해군은 1920년대에 전함 배수량에서 미해군 보다 54,000톤의 우위를 가지고 있었고 가장 유력한 가상적인 일본 해군에 대해서는 279,130톤의 우위를 가지고 있었다. 워싱턴 조약에서는 미해군과 일본 해군의 16인치급 전함에 대응할 수 있도록 영국 해군이 두 척의 16인치급 전함을 건조할 수 있게 했는데, 이렇게 해서 건조된 넬슨과 로드니는 세계대전을 통해 얻은 전훈을 반영한 함포, 기뢰, 어뢰 방어 기술을 적용한 전함이었다. 그리고 조약에서는 각 함선의 성능에 제약을 걸었는데, 전함의 경우 16인치 주포에 35,000톤, 순양함은 8인치 주포에 10,000톤이었다. 이렇게 해서 영국 해군성은 재무성에 더 큰 전함에 필요한 설비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해 줄 것을 요청하는 것과 같이 힘든 일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영국측에서 미국이 순양함의 총톤수를 늘리려 한 것을 저지함으로써 영국 해군은 큰 이득을 얻었다. 영국 해군은 세계 최대의 순양함대를 보유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 있는 해군 기지를 확보했고, 보조 순양함으로 개장할 수 있는 상선을 충분히 확보함으로써 전 세계에 걸쳐 해상 봉쇄를 수행할 수 있는 특수한 능력을 확보했다.7) 

영국 해군이 협상을 통해 전함 배수량에서 우위를 달성하고자 노력했다는 사실을 낡은 무기 체계에 대한 집착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국 말고 다른 국가들도 전함의 숫자에 해군력과 국제적인 위신이 달려있다고 생각했다. 전투 함대의 숫적 우위를 달성하기 위한 전략적인 흥정은 영국 해군성의 주특기였다.8) 그리고 영국 해군은 전함이 항공기와 잠수함의 위협에 맞서 발전할수 있는 무기 체계라고 생각했다. 워싱턴해군군축조약에서 주요 열강들은 10년간 전함의 신규 건조를 중단하기로 했기 때문에 영국 해군은 평화로운 긴축 재정의 시기에 막대한 예산을 들여 전함을 교체하는 것을 늦출 수 있었고 동시에 새로운 설계와 건조 기술을 시험해 볼 수 있었다. 동시에 낡은 전함들의 엔진과 방어력, 사격 통제장치를 개량할 수 있었다. 영국 해군성은 새롭게 전함을 건조할 수 있는 1930년대 초반이 될 때 까지 건함 예산을 잠수함, 구축함, 항공모함, 순양함을 현대화 하는데 사용하고자 했다.

1922년 부터 1926년 사이에 영국 정부는 해군에게 같은 기간 동안 미국과 일본 해군이 건조한 군함의 총 톤수에 필적하는 규모의 신규 건조를 승인했다. 영국 해군은 순양함 전력을 성공적으로 확충했고 이로 인해 영미관계에 위기를 초래했다.9) 일본과의 전쟁을 고려해서 배수량 1만톤에 8인치 주포를 탑재한 순양함을 선호했던 미해군은 순양함 전력에 있어서도 균형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미국 의회는 순양함 증강을 계속해서 거부했다. 영국 해군은 해상 교역로 보호를 위해서 중순양함과 6인치 주포를 탑재한 경순양함을 골고루 건조하기를 원했는데 이를 위해 미해군 보다 더 많은 순양함을 필요로 했다. 1927년에 있었던 제네바 회담에서 영국과 미국 협상단은 절충점을 찾지 못하면서 상대방에게 책임을 전가했고 영국과 미국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미의회는 영국과의 협상이 실패하자 순양함을 추가로 건조하는 것을 승인했다. 일각에서는 순양함 건조를 둘러싼 영국과 미국의 경쟁이 해양 패권을 둘러싼 양국간의 전쟁 신호라고 보기도 했지만 이것은 다소 과장된 견해였다.10) 어찌되었건 영국과 미국은 자유주의 국가로서 당시의 국제 질서로 부터 서로 이득을 얻고 있었고 국제적인 문제를 대화로 해결하는 것을 선호했다. 순양함을 둘러싼 논쟁에서 중요한 점은 영국 해군이 워싱턴 조약에 의거해 주요 경쟁 상대에 대해 유리한 점을 최대한 끌어냈다는 점과 영국 해군성이 영국 해군의 우위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에 확신을 가지게 됐다는 점이다. 

전간기의 영국 해군은 일본 해군이 적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봤는데 그 이유는 일본이 정치적인 이유, 예산상의 이유, 그리고 조직의 목표라는 측면에서 너무나도 유용했기 때문이다. 일본과의 전쟁을 상정한 계획은 영국 정부가 대규모 함대는 물론 연료와 탄약을 비축하기 위해 싱가포르의 해군 기지를 증강하도록 설득하기에 적합했다.11) 해군성은 일본과 전쟁을 하게 된다면 주력함대를 싱가포르에 파견해 일본 해군이 전투에 임하도록 끌어낼 것이었다. 일본 해군을 무찌르기 위해서는 전함, 항공모함, 순양함과 기타 지원함정이 균형을 이룬 함대가 필요했다. 달리 말하자면 해군성에서 대영제국의 방위를 위해 필요한 가장 경제적인 전력 구조라 할 수 있었다. 전간기 영국 해군 전략에서 기본적으로 전제한 것은 주력 함대를 가상적의 주력 함대에 대응하기에 적절한 지점에 배치하여 영국의 대외 무역을 보호하고 적국을 해상 봉쇄하는 것 이었다. 그러므로 영국 해군은 장차 벌어질 일본과의 전쟁에서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 독일을 상대했던 방식으로 대영 제국을 방어할 것이었다. 

하지만 항공모함 관련 기술을 놓고 보자면 영국 해군은 캐터펄트와 어레스팅 와이어 부문에서 미해군이나 일본 해군 보다 뒤떨어진 것이 사실이었다. 그 원인은 해군본부가 새로운 장비들을 시험하도록 결정을 내리는데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던 것과 영국 공군과 해군항공대의 역할에 대해 논쟁이 있었던데 있다. 하지만 영국 해군이 기술적인 진보에 거부감을 가진 보수적인 집단이었다고 서술하는 쇠퇴 신화와는 달리 영국 해군은 1918년에 세계 최초의 항공모함인 아르거스Argus를 건조했으며 해군 본부의 입안가들은 미래의 전쟁에서 항공기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기 때문에 전간기에도 항공모함 건조에 많은 예산을 투자했다. 해군항공대는 적 함대를 포착하고, 적의 항공기를 격추시키고, 적의 전함을 어뢰와 폭탄으로 타격한 뒤 아군 전함에게 끌어들여 최후의 승리를 가져올 것이었다.12) 미래의 함대전에서 최종 단계를 전함의 포격으로 마무리 한다는 영국 해군의 구상이 실제로 일어난 것은 매우 드물었다.(예외라고 할 수 있는 사례는 두 건이 있다. 1941년 3월 영국 해군이 이탈리아 해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마타판 곶 해전과 1941년 5월의 비스마르크 격침 이었다.)13)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 항공모함에서 발진하는 폭격기는 전함의 주포를 해전의 주역에서 밀어냈다. 하지만 전간기에는 미해군과 일본 해군 역시 마찬가지로 작전 교리에서 항공모함을 부차적인 위치에 놓고 있었고, 항공모함이 해전에 변화를 가져오기는 하겠지만 혁명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14) 

영국 해군이 전간기에 잠수함의 위협을 과소평가했다는 쇠퇴론자들의 주장 또한 잘못된 것이다. 1920년대에서 1930년대에 영국 해군본부의 전쟁 계획과 작전 연구는 미래의 전쟁에서 적국이 영국의 해상 교통로를 차단하거나 교란시킬 가능성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하고 있었다. 해군본부의 참모장교들은 제1차 세계대전의 교훈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적국이 영국의 해상 교통에 타격을 가하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식은 오늘날의 말하는 ‘비대칭’ 전략이라는 점을 알았다. 바로 영국 주력 함대를 피해서 영국의 민간 상선단을 격침시킬 수 있는 함정을 건조하는 것 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시기이 독일 해군은 영국이 해상 교통에 타격을 입히기 위해서 잠수함을 사용했고 일정한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1917년에서 1918년 사이에 영국과 연합국은 호송선단 방식을 도입해 잠수함의 위협에 대처했다. 해군본부의 참모 장교들은 다음번 전쟁에서도 적국이 동일한 방식을 택하겠지만 그때에는 훨씬 더 큰 잠수함과 중순양함, 항공모함을 함게 운용하여 호송선단을 타격할 것이라고 보았다.15)  영국 외무성과 해군본부는 다른 국가들이 잠수함을 발전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서 외교적 수단과 기만책을 사용했다. 영국은 외교 분야에서 잠수함을 없앨 것을 제안했고 보다 현실적인 차원에서는 다른 국가들의 잠수함 보유량에 제한을 걸려고 했다.16) 예를 들어, 프랑스 해군이 1920년대에 개발한 새로운 대형 잠수함은 영국과 프랑스의 외교 회담에서 자주 논의된 주제였다. 영국 해군 또한 미래의 전쟁에서는 적국이 대규모의 잠수함대를 준비해 놓을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다. 영국의 대잠외교에 있어서 핵심은 어떠한 적이라도 대규모의 잠수함 공세로 전쟁을 시작하는 것을 방지하는데 있었다. 전쟁이 유럽이나 극동에서 일어날 경우 영국 해군은 상선단을 호위 하기 위한 대잠용 함선을 신속히 증강시켜 적의 잠수함 위협을 무력화 시킬 대비가 되어 있었다. 

영국 해군은 대잠외교를 뒷받침 하기 위해서 영국이 소나를 발전시켜 잠수함의 위협을 완전히 해소했다는 선전을 해서 외국의 해군을 기만하려고 했다. 수중의 물체를 음향으로 탐지할 수 있는 기술을 실전에서 사용할 수 있을 정도가 된 것은 1917~18년 무렵으로 이때는 해상 작전에 영향을 끼치기에 너무 늦은 시점이었다. 영국 해군은 전간기에 소나 개발에 대한 정보를 일급 비밀로 하면서 동시에 치밀하게 소나의 성능을 부풀린 정보를 퍼뜨렸다. 1930년대 초반 정보당국으로 부터 독일 해군이 조약을 위반하고 잠수함을 다시 건조하기 위한 실험을 시작할 것이라는 정보가 입수되자 영국 해군은 언론과 정치권을 통해 가짜 정보를 더욱 더 많이 흘렸다. 해군 본부는 1937년에 스페인 내전에서 프랑코 군을 지원하는 독일과 이탈리아의 잠수함을 소나를 활용해 격침시켜 소나의 성능을 과시하는 방안을 고려하기도 했다. 기만 공작의 효과를 평가하는 것은 언제나 어렵고 평화시에 오랫동안 지속된 경우는 특히 그러하다. 1939년, 2차대전 중 독일의 잠수함 공세를 총지휘한 칼 되니츠 제독은 히틀러에게 영국이 소나의 성능을 과장한 기만 전술을 구사하는 가장 큰 원인은 유럽에서 전쟁이 발발했을 때 독일이 충분한 잠수함을 확보해 전면적인 잠수함 공세에 나서는 것을 저지하는데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17) 물론 영국 해군도 독일 잠수함의 위협을 잘못 평가한 측면이 있다. 영국 해군은 독일 해군이 1918년 이래로 잠수함 기술에서 어떠한 결정적인 발전도 없었다는 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되니츠가 새로운 기술 대신에 야간에 부상하여 상선단을 공격하는 것과 같은 새로운 전술을 개발해 소나를 장비한 호위 함대를 회피할 것이라고 잘못 받아들였다.18) 그렇기는 해도 영국 해군의 대잠외교와 기만책은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 1939년 이후 5년간의 전쟁을 치르면서 독일군의 잠수함 공세는 천천히 강화되었고 영국 해군은 이에 맞설 대비책을 충분히 강구할 수 있었다.19)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0년대로 접어들면서 영국 해군에 대한 도전은 급격히 증대되었다. 전세계적인 경제 및 정치 위기에 독일이 1차대전의 설욕을 꿈꾸면서 군비 경쟁을 시작함으로써 영국의 해군 정책의 근간이 크게 흔들렸다. 예를 들어 해군은 일본을 제1의 가상적으로 삼고 막대한 예산을 필요로 했는데 해군의 몫이 크게 줄어들었다.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하자 독일 공군의 폭격기는 매우 큰 위협으로 받아들여졌다. 1933년에서 1936년 사이에 독일의 군사력 증강이 유럽의 질서에 가한 전략적, 외교적 도전이 일본 해군 내부의 과격파와 상호작용을 일으켰다. 일본 해군 내에서는 1936년 워싱턴 조약이 만료되자 일본 해군 내에서는 총톤수를 영국 및 미국과 맞추지 못하는 이상 군비 통제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20) 1934년 이후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소련은  군함 건조에 더 많은 투자를 시작했는데 이때 영국 해군은  구식 전함들을 개장하고 전체 함대의 규모를 일본 해군과 유럽 제2위의 해군을 합한 것 과 대등한 규모로 증강시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영국 해군이 새롭게 시작된 군비 경쟁에 대처하는데 가장 큰 문제는 1930년대 초반 영국 조선업계를 강타한 위기였다.21) 

이러한 위기는 전혀 예측하지 못한 사태가 맞물리면서 생긴 결과였다. 1930년 주요 해군국들은 런던에서 회담을 열고 순양함의 비율을 등을 포함한 몇가지 사안을 결정했다. 런던해군군축조약에서 영국, 미국, 일본은 1936년까지 전함의 신규 건조를 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경제 상황이 정상적이었다면 1936년까지 전함 건조를 연기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을 터였다.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해군성에서 민간 조선소와 국영 조선소에 꾸준히 계약을 발주하고 보조금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선박 건조 능력을 유지하여 낡은 전함들을 대체했을 뿐 아니라 가상적국의 공격적인 함대 건설에 맞설 대규모의 함대 증강도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1930년 런던해군조약이 조인되고 얼마 있지 않아 대공황의 파도가 영국 조선업계를 휩쓸었다. 1929년에서 1935년 사이에 해군성의 신규 발주 감소와 전반적인 공업계의 침체 여파로 군함과 민간 선박 발주는 절반으로 뚝 떨어졌다.22) 비록 갑작스럽게 산박 건조량이 감소하기는 했어도 영국은 1930년대  내내 세계 최대의 조선국으로 남아 있었지만 1940년대 이전까지는 함대를 증강하기에는 부족하고 현존하는 함대를 현대화 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에 그쳤다. 이렇게 위태로운 상황에서 군비 경쟁은 시기상조였다. 만약 일본,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소련이 1941년 이전에 총력을 다해 함대를 증강했다면 영국의 조선 능력으로는 이를 압도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해군성과 외무성은 이런 취약한 시기를 넘기기 위해서 1934~35년 사이에 영국 해군이 세계 최대의 해군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세계 각국의 해군력 증강을 제약할 새로운 국제해군조약을 추진했다. 

1936년의 새로운 해군조약의 협상 과정은 복잡했다. 해군성은 영국이 군비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기 전에 경쟁이 시작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새로운 해군조약에서 함대의 총 톤수를 제약할 것이 아니라 함종별로 주포의 구경과 톤수를 제약하는 것이 옳다는 결론을 얻었다. 함대의 총톤수 제약을 철폐함으로써 군비 경쟁을 억제한다는 발상이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영국 해군성과 외무성은 총톤수의 비율에 국가별로 위계질서를 부여한 것이야 말로 각국 해군의 불만 요인이라는데 합의를 보았다.23)  함대의 총톤수 비율에서 국가의 명예와 위신이라는 요인을 제외하면, 해군력의 규모에는 각 국가의 전략적 필요성과 자원의 수준에 따른 전략적 이해관계가 반영되는 것이며 여기에서 영국을 최우선 순위로 놓고 미국, 일본, 그리고 다른 국가들은 그 뒤에 놓아야 한다는 점을 인식한 것이다. 영국의 군함 건조능력이 구식 전함을 신형 전함으로 교체할 수 있는 수준에 불과하다면 영국의 입장에서는 전함의 성능이 급격히 향상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군함의 함종 별로 성능의 한계를 통일하는 국제조약을 체결하는 것이야 말로 합리적인 것 이 아닐 수 없었다. 1930년대에 제1해군경을 지냈으며 해군 정책의 큰 틀을 만든 어니 채트필드Ernie M. Chatfield경은 해군 군비통제를 통해 “어느 한 국가가 전함의 크기와 성능에서 우위에 서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24) 

이와 같은 관점에서 1935년 6월에 히틀러가 독일의 해군력을 영국의 35% 수준으로 맞춰달라고 제안한 것을 영국 정부가 신속히 승락한 것은 합리적인 결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25) 영국해군의 관점에서 영독해군협정은 독일의 해군력 증강을 덜 위협적이고 지리멸렬한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한 외교적 미끼였다고 할 수 있다. 독일 정부가 해군조약을 준수하여 독일 해군을 작지만 균형을 맞춘 전력으로 만든다면 영국으로서는 이것을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독일 해군이 영국이 두려워 하던 비대칭 전략을 채택하는 것도 막을 수 있었다. 독일의 해군력 건설이 베르사이유조약의 제약을 받고 있었던 1920년대 후반에 독일 해군은 배수량 1만톤에 11인치 주포를 장비해 전함 보다는 빠르면서 순양함 보다는 중무장을 갖춰 영국의 해상 교통을 교란하는데 적합한 혁명적인 전함을 개발했다.26) 영독해군협정의 조항들은 포켓전함과 신형 순양함의 개발을 제약할 것 이었다. 

1936년 3월 영국, 미국, 프랑스는 제2차 런던해군군축조약에 서명하였고 이 조약은 영국 해군성이 원하던 규정들을 대부분 담고 있었다.  독일과 소련도 1937년 7월 조약에 서명함으로서 해군군비통제에 따랐다. 이탈리아는 1938년 조약에 서명했다. 영국 해군은 영국이 세계 제일의 해군국으로 남아있겠다는 의지를 천명하기 위하여 1937년 대규모의 전함 건조계획을 발표하고 다섯척의 킹조지5세급 전함의 기공을 시작했다. 1930년대 초반 영국의 조선업계는 위축되어 있었지만 이제 영국 해군은 새롭게 대규모 투자를 단행했고 노동력도 증가했다. 1928년 부터 1941년 까지 신규 건조한 물량으로 영국은 미국과 일본을 포함한 다른 열강의 해군력을 상회할 수 있었다. 영국 해군은 전반적으로 1백만톤의 새 군함을 획득했지만 미국은 70만톤, 일본은 60만톤에 그쳤다.27)  즉, 가상적과 우방국의 해군력을 능가하는 군함을 건조하고 자국의 전략적 목적에 맞춰 해군군비통제를 유도한 국가를 쇠퇴했다고 서술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겠다. 

영국 해군의 계획이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5년간의 평화가 필요했다. 이때문에 제1해군경이자 참모총장위원회Chiefs of Staff committee 위원장이었던 채트필드 제독은 네빌 체임벌린 수상의 대독유화정책을 지지했던 것이었다.28)  해군성은 너무 이른 시기에 독일과 전쟁을 벌이게 된다면 대형 군함을 건조할 예산이 호송선단을 호위할 군함을 건조하는데 전용되거나 제1차 세계대전때 처럼 육군과 공군으로 돌려질 수 있으며 미국과 일본의 군함 건조를 촉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해군성은 영국과 미국, 일본이 보조를 맞추는 한 일본은 군축협상을 준수할 것이라고 생각했다.29) 영국 해군과 미해군은 일본을 건함 경쟁에서 압도할 수 있으며 전쟁에서도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1938년 3월, 일본 정부가 새로운 군함 건설 계획에 대한 자료를 공개하지 않겠다고 하자 제2차 런던해군군축조약 조인국들은 전함의 성능 기준을 배수량 35,000톤에서 40,000톤으로, 주포 구경은 15인치에서 16인치로 상향하기로 했다. 영국과 미국 정보당국은 일본이 새로 건조하는 전함이 이정도 수준일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측은 배수량 70,000톤에 18인치 주포를 갖춘 첫번째 전함을 기공한 상태였다.30) 영국 해군성은 영국 조선소의 건조 능력의 한계 때문에 40,000톤급의 전함을 건조하기로 결정했다.31) 
 
영국 해군이 배수량 40,000톤에 16인치 주포를 장비한 라이온급 전함의 건조를 시작할 무렵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해군성의 예상대로 전쟁이 발발하자 영국 해군의 우선순위는 장기적인 함대 건설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에서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 당장 필요한 것을 갖추는데 돌아갔다. 전쟁 초기에 영국 해군은 소중한 전함을 독일의 잠수함과 일본군의 폭격기에 잃어버리는 등 많은 패배와 재앙을 겪었다. 하지만 싸우는 군대의 질적인 요소는 그 군대가 고난을 이겨내는 것으로 평가해야 한다. 이 점에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해군의 성과는 특히 독일이 프랑스와 노르웨이를 정복해 영국 해군이 전쟁 이전에 구상한 해상전 수행 계획을 뒤틀어 놓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놀라운 것이라 할 수 있다. 영국 해군은 1939~40년에 독일과 이탈리아의 수상함대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으며 비시 프랑스의 해군을 무력화 했고 독일의 잠수함 공세를 막아내는 동시에 히틀러가 영국 침공 계획을 단념하게 만드는데 큰 기여를 했다. 영국 해군이 대서양과 지중해를 장악함으로써 추축국에 맞설 연합이 결성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1945년 이후의 세대의 역사가들은 제2차세계대전 중 영국 해군의 업적에 대해서는 칭송했지만 전간기의 영국 해군에 대해서는 혹독하게 비판했는데 그 이유는 전쟁 초기 패배의 원인이 거기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간기 영국 해군의 역사를 단지 불운한 막간극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전간기의 영국 해군을 당시의 환경을 고려해 바라본다면 전간기의 역사가 불가피한 쇠퇴의 시기가 아니라 수많은 난제에 직면해 탁월한 기량과 대담한 용기를 발휘한 시기였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주석

1) 이에 관한 고전적인 연구로는 Paul Kennedy, The Rise And Fall of British Naval Mastery (London: Macmillan, 1984), pp. 267–98과  Stephen Roskill, Naval Policy Between the Wars, 2 vols. (London: Collins, 1968/76)가 있다. 
2) Gordon Martel, ‘The Meaning of Power: Rethinking the Decline and Fall of Great Britain’, International History Review (Vol. 13, No. 4, November 1991), pp. 662–94. 
3) 영국의 쇠퇴를 주장하는 학설에 대한 가장 최근의 반론으로는 David Edgerton, Warfare State: Britain, 1919–1970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6)가 있다. 
4) Matthew S Seligmann, The Royal Navy and the German Threat 1901–1914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2); Paul G Halpern, A Naval History of World War I (London: UCL Press, 1994). 
5) William J Williams, ‘Josephus Daniels and the US Navy’s Shipbuilding Program during World War I’, Journal of Military History (Vol. 60, No. 1, 1996), pp. 7–38. 
6) John Jordan, Warships After Washington: The Development of the Five Major Fleets 1922–1930 (Barnsley: Seaforth Publishing, 2011), pp. 1–24. 
7) John Ferris, ‘“It Is Our Business in the Navy to Command the Seas”: The Last Decade of British Maritime Supremacy, 1919–1929’, in Keith Neilson and Gregory C Kennedy (eds),Far Flung Lines: Studies in Imperial Defence in Honour of Donald Mackenzie Schurman (London: Frank Cass, 1997), pp. 129–34. 
8) Colin S Gray, The Leverage of Sea Power: Strategic Advantage of Navies in Major Wars (New York, NY: The Free Press, 1992). 
9) Ferris, ‘“It Is Our Business in the Navy to Command the Seas”’, pp. 129–34. 
10) Christopher M Bell, ‘Thinking the Unthinkable: British and American Naval Strategies for an Anglo–American War, 1918–1931’, International History Review (Vol. 19, No. 4, 1997), pp. 789–808. 
11) Christopher M Bell, The Royal Navy, Seapower and Strategy between the Wars (Basingstoke: Macmillan, 2000), pp. 59–98. 
12) Geoffrey Till, Air Power and the Royal Navy, 1914–1945 (London: Jane’s, 1979). 
13) Duncan Redford, A History of the Royal Navy: World War II (London: I. B. Tauris, 2014), pp. 102–08,133–54. 
14) Geoffrey Till, ‘Adopting the Aircraft Carrier: The British, American and Japanese Case Studies’, in Alan R Millett and Williamson Murray (eds), Military Innovation in the Interwar Period(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6), pp. 191–226. 
15) Joseph A Maiolo, The Royal Navy and Nazi Germany, 1933–1939 (Basingstoke: Macmillan, 1998), pp. 63–86. 
16) David Henry, ‘British Submarine Policy, 1918–39’, in Brian Ranft (ed.), Technological Change and British Naval Policy, 1860–1939 (London: Hodder & Stoughton, 1977), pp. 81–163. 
17) Joseph A Maiolo, ‘Deception and Intelligence Failure: Anglo–German Preparations for U-Boat Warfare’, Intelligence and National Security (Vol. 11, No. 1, 1996), pp. 32–58. 
18) Joseph A Maiolo, ‘“I Believe the Hun is Cheating”: British Admiralty Technical Intelligence and the German Navy, 1936–39’, Intelligence and National Security (Vol. 11, No.1, 1996), pp.32–58. 
19) Marc Milner, ‘The Battle of the Atlantic’, Journal of Strategic Studies (Vol. 13, No. 1, 1990), pp. 45–66. 
20) Sadao Asada, From Mahan to Pearl Harbor: The Imperial Japanese Navy and the United States (Annapolis, MD: Naval Institute Press, 2006), pp. 99–157. 
21) Maiolo, The Royal Navy and Nazi Germany, 1933–1939, pp. 133–38. 
22) Ferris, ‘“It Is Our Business in the Navy to Command the Seas’”, pp. 76–95; Jon T Sumida, ‘British Naval Procurement and Technological Change, 1919–39’, in Phillips P O’Brien (ed.), Technology and Naval Combat in the Twentieth Century and Beyond (London: Frank Cass, 2001), pp. 128–47. 
23) Maiolo, The Royal Navy and Nazi Germany, 1933–1939, pp. 15–19. 
24) Ibid., pp. 1–19. 
25) Ibid., pp. 19–62. 
26) Jost Dülffer, Weimar, Hitler, und die Marine: Reichspolitik und Flottenbau, 1920 bis 1939 (Düsseldorf: Droste Verlag, 1973), pp. 109–30. 
27) Edgerton, Warfare State, pp. 26–33. 
28) Maiolo, The Royal Navy and Nazi Germany, 1933–1939, pp. 138–58. 
29) Stephen E Pelz, Race to Pearl Harbor: The Failure of the Second London Naval Conference and the Onset of World War II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1974), pp. 149–64. 
30) Malcolm Muir, ‘Rearming in a Vacuum: United States Navy Intelligence and the Japanese Capital Ship Threat, 1936–45’, Journal of Military History (Vol. 54, No. 4, 1990), pp. 473–85; Maiolo, The Royal Navy and Nazi Germany, 1933–1939, pp. 133–58. 
31) David K Brown, Nelson to Vanguard: Warship Design and Development, 1923–1935 (London: Chatham Publishing, 2000), pp. 35–37.

2013년 6월 16일 일요일

스미스소니언 항공우주 박물관 - 4 : Steven F. Udvar-Hazy Center

스미스소니언 항공우주 박물관 - 1
스미스소니언 항공우주 박물관 - 2
Me 262에 대한 미군 시험조종사들의 평가
스미스소니언 항공우주 박물관 - 3 : Steven F. Udvar-Hazy Center


스미소니언 항공우주 박물관 분관 두 번째 사진 입니다. 이번에는 제2차 세계대전에 사용된 기체의 사진을 올리려 합니다.



1. B-29 Enola Gay

아마 여기서 가장 유명한 전시물이라면 바로 Enola Gay라는 별명을 가진 이 B-29가 아닐까 합니다. 역사상 최초로 핵무기를 사용한 그 기체지요. 제 개인적인 취향 때문인지는 모르겠는데 B-29라는 비행기는 악명높은 학살자 답지 않게 아름다운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그 반짝이는 거대한 동체를 보면 먼저 감탄사가 나옵니다.(이러면 안되는데 말이죠.)











2. Ar 234

저는 이 박물관의 또 하나의 명물로 세계 최초의 제트폭격기 Ar 234를 꼽겠습니다. 칙칙한 독일 공군 위장색으로 덮여 있긴 합니다만 아주 멋지게 잘 빠진 항공기죠. 그런데 옆에 전시된 Do 335가 한 덩치 하다 보니 왜소해 보입니다. 제가 생각했던 것 보다 작은 기체라서 조금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3. F4U Corsair

재미있게도 2차대전 후반기 미해군의 주력전투기인 F4U Corsair와 F6F Hellcat은 천장에 매달아 전시를 해 놓았습니다.







4. F6F Hellcat






5. Do 335

독일 공군의 중(重) 전투기 Do 335입니다. 전투기 치고는 꽤 커서 놀랐습니다. 바로 옆에 전시된 Ar 234가 종이비행기 처럼 보일 정도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대형 기체인데도 불구하고 그 형상때문인지 둔한 느낌은 전혀 들지 않습니다.









6. Fa 330A

Ar 234와 Do 335 사이에는 Fa 330A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기종은 2차대전 중 U보트에서 정찰용으로 사용한 오토자이로입니다. 커다란 두 대의 비행기 사이에 전시되어 있으니 마치 잠자리 같은 느낌이 드는군요. 단촐한 물건이라 사진을 한장만 찍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약간 아쉽군요.




7. Fw 190F

이 박물관에는 지상공격기형인 Fw 190F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8. He 219

독일 공군의 야간전투기였던 He 219는 동체와 미익만 남아있습니다. 예산이 마련되면 복원을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동체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모습이 사냥해서 깃털을 뽑아놓은 오리 같습니다...




9. Me 163

독일공군이 실전에 투입한 괴작 로켓 전투기입니다. 개성만점이긴 하지만 정말 못생겼네요.






10. Ju 52

독일공군의 주력 수송기였던 Ju 52입니다. 이 박물관에는 루프트한자에서 여객기로 사용한 형식으로 복원해 놓았습니다.





2008년 4월 8일 화요일

브레멘, 브레머하펜, 올덴부르크

함부르크와 킬에서 겨울비를 맞은 다음날 이 어린양은 브레멘으로 향했습니다. 이날은 날씨가 참 좋더군요. 기분이 더 좋아졌습니다.

중앙역에도 브레멘 음악대의 그림이 그려져 있더군요

약간 심심하게 생긴 브레멘 중앙역

브레멘에 대한 정보를 보니 브레멘의 관광명소는 거의 대부분 브레멘 구시가지 중심부에 위치해 있다고 하더군요. 바로 구시가지 중앙으로 향했습니다.

구시가지로 들어가는 길에 좀 유명하다는 동상이 하나 있더군요. 돼지사육사 동상이라고 부른다더군요... 흠. 돼지떼와 돼지치기라... 어쨌건 보는건 즐겁습니다.


여행 가이드를 보면 '브레멘은 한자동맹을 대표하는 도시로서 어쩌고... 시청 광장이 좋다..'라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네. 시청과 시청광장에 들어서니 좋긴 좋더군요.

브레멘 시청

역시 관광명소라는 페트리(St. Petri Dom)성당

역시 관광명소라는 시청앞의 롤란트(Roland) 상

그러나 역시 브레멘의 상징이라면 브레멘 음악대 되시겠습니다.

시청 광장근처에 있는 브레멘 음악대

시청 광장근처의 어떤 서점 앞에 있는...

이 낙서(?)는 길가다가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시 중심지를 대략 구경한 뒤 서점을 찾아 볼까하고 시내를 돌아다녔습니다.

괴테 플라츠 근처의 극장

어느 도시에나 다 있는 공원이지만 날씨가 맑아서 더 멋지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길을 가다 보면 보게 되는 표지판. 독일 역사에 관심있는 분이라면 다 아실법한 인물들입니다. 뭐, 듣보잡 인물의 이름을 거리 이름에 붙이진 않겠지요.



한참을 돌아다녀도 쓸만한 서점을 건지지 못 했습니다. 아주 실망~ 그래서 브레멘 시내 구경을 얼렁뚱땅 마치고 브레머하펜으로 향했습니다.

브레머하펜 역

브레머하펜엔 왜 왔느냐?

또 항구 보러 온 건...

아니고 이걸 보러 왔습니다.

U-2540

네. 그렇습니다. 현존하는 유일한 XXI급 U-보트인 U-2540을 보러 브레머하펜에 온 것이죠.





그런데...






봄에 다시 오라는군요;;;;;

아. 아쉬운데 어쩌겠습니까. 독일의 많은 박물관들이 겨울엔 닫는데 여기도 그렇군요.

그래도 잠수함이니 바깥에서 구경하는 것도 아주 나쁘진 않습니다.


아쉽긴 한데 이 잠수함은 온라인으로도 구경할 수 있습니다.
잠수함 구경을 대강 마치고 항구를 둘러봤습니다. 날씨가 맑으니 기분이 좋더군요. 바람도 상쾌했습니다.

?

브레머하펜 구경을 마치니 벌써 해가 지기 시작했습니다. 음. 역시 위도가 높으니 겨울에는....

다음에는 올덴부르크로 갔습니다. 원래는 올덴부르크에 일찍 가서 서점을 찾아 보려했는데 물 건너 갔지요. 올덴부르크에서는 저녁만 먹었습니다. 그래도 시내에 사람이 북적이니 기분이 좋았습니다. 여행한다는 느낌이 들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