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John Ellis van Courtland Moon이 1989년에 Journal of Strategic Studies에
기고했던 “Project SPHINX: The Question of the Use of Gas in the Planned
Invasion of Japan”라는 논문을 읽다보니 앞부분에 꽤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왜 미국이 1945년 이전에는
일본을 상대로 화학무기 사용을 적극적으로 검토하지 못했는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1943년의 타라와 전투에서 미군이 상당한 인명손실을 입은 뒤 미국내에서 일본을 상대로 화학무기를 사용해야 한다는 여론이 조금씩 힘을
받기 시작한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갤럽의 조사에 따르면 1944년 9월에 일본을 상대로 화학무기를 사용하는데 찬성하는 여론은
23% 남짓이었는데 1945년 6월에는 40%까지 늘어났다고 하지요. 타라와 전투 이후 일본군이 각 지역에서 보여준 극단적인
저항은 미국인들에게 상당한 문화적 충격을 주었던 모양입니다. 일본군의 저항으로 인명손실이 높아지면서 대중과 언론은 물론 미육군
내에서도 요새화된 섬에서 저항하는 일본군을 상대로 화학무기가 효과적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특히 미육군 화학전국Chemical Warfare Service의 국장 포터William N. Porter 소장은 일본을 상대로 화학무기를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강력하게 펼친 인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포터 소장의 제안은 육군참모본부 작전국에서 검토만 되었을 뿐 1945년 이전에는 그 이상의 단계로 나가질 못했습니다.
문은 그 이유를 몇가지 제시하고 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루즈벨트 대통령이 화학무기 사용에 부정적이었다는 점
입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미국이 먼저 화학무기를 사용하는 것에 반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제시하는 이유가
재미있습니다. 미국은 일본군을 상대로 화학무기를 사용할 경우 유럽전선에서 독일이 화학전을 전개할 가능성을 우려했다는 것 입니다.
일본군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강력한 화학전 능력을 갖춘 독일이 화학무기를 뿌려댄다면 제법 골치가 아팠을 것 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루즈벨트 대통령이 사망한 것과 함께 독일의 항복도 미국이 1945년 부터 본격적으로 일본을 상대로 한 화학전을 진지하게 검토한
이유라는 것 입니다.
이점을 보면 냉전기에 핵무기 사용을 둘러싼 논의가 연상됩니다. 특히 독일의 화학전 능력이 상대적으로 화학전에 대한 보복수단이
마땅치 않은 일본에 대한 억지력으로 작용했다는 설명은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마치 핵무장을 한 강대국이 하위 동맹에 대한 핵억지력을
제공하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고 할까요.
2012년 5월 7일 월요일
2008년 12월 18일 목요일
러시아군의 군수물자 부족문제 : 탄약을 중심으로, 1914~1917
1차대전 발발 직전 러시아는 거의 대부분의 군수물자를 국영공장에서 생산하고 있었습니다. 산업화된 전쟁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로 민간공업이 육성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이 발발한다면 대부분의 생산 부담은 국영공장이 짊어 지어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 입니다. 그러나 이런 체제 아래서는 탄약 수요가 급증할 경우 신속히 대처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전쟁이 발발하자 그대로 현실이 됩니다.
1890년에서 러일전쟁이 발발할 때 까지 러시아의 군수공업은 해외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았습니다.
러시아의 뒤떨어진 공업능력은 소총 조차도 충분히 조달할 수 없었는데 단적인 예로 모신-나강 소총이 처음 채용되었을 때 러시아 정부는 육군의 소요량을 신속히 조달하기 위해서 프랑스와 벨기에에 소총 생산을 발주했습니다. 그 결과 러시아군은 신속히 모신-나강 소총으로 기본화기를 교체했고 러일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예비사단 까지도 신형소총을 지급받을 수 있었습니다. 러시아 정부는 필요한 소총을 획득한 뒤에는 외국으로 부터의 주문을 중단하고 국영조병창을 통해서만 소총을 생산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보충용 소총을 생산하는데 그쳤고 전쟁 발발시 수요량을 충족시킬 능력은 없었습니다. 또 러시아의 TNT 생산은 러시아에 설립된 독일 회사의 톨루엔(toluene)에 크게 의존했는데 독일 기업들은 톨루엔 생산에 필요한 석유제품을 독일에서 들여오고 있었습니다. 독일과 전쟁이 벌어진다면 러시아의 폭약생산에 차질이 빚어질 것은 뻔한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는 자체적인 톨루엔 생산능력 확충보다는 당장 편한 독일 기업으로 부터의 도입에 계속 의존했습니다.
결국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러시아 정부는 급격히 증대된 군수물자의 수요를 채우기 위해 외국 기업에 대한 발주를 늘리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러시아 육군(전쟁성)의 경우 1903년에 260만 루블을 무기 수입에 사용했는데 이것은 1904년에는 1690만 루블로, 1905년에는 7310만 루블로 늘어납니다. 러시아 해군은 1903년에는 1천만루블을 무기 수입에 사용했고 1905년에는 6800만 루블을 수입에 사용합니다. 해외로 부터의 군수물자 수입은 발주에서 도착까지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전쟁 중에는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러시아 정부는 러일전쟁이 종결된 뒤 군대를 개편하는 과정에서 군수물자 생산능력의 확충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 때문에 1차대전 발발 직전 러시아 정부는 미래의 전쟁에서는 러시아가 자체적으로 충분한 군수물자를 생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전쟁상인 수호믈리노프(Владими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Сухомлинов)는 ‘장차 벌어질 전쟁에서 러시아 포병은 포탄이 부족하다고 불평할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의 포병은 많은 양의 장비를 보급받고 있으며 포탄의 보급(체제)도 잘 조직되어 있다’고 호언장담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의 군수공업은 여전히 생산능력이 부족하며 외국의 기술과 중간 생산재에 대한 의존이 높은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전쟁이 발발하자 바로 드러나 버립니다.
1차대전이 발발하자 모든 참전국의 군지휘부를 경악시킨 것은 전쟁 이전의 예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물자소모였습니다. 전쟁 준비가 가장 충실히 되어 있었다는 평을 받는 독일의 경우 포 1문 당 6개월 소요량으로 1천발의 포탄을 배정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전쟁이 발발한 뒤 6주만에 모조리 소비되어 버리고 일선 부대들은 탄약 부족으로 작전 수행이 어려운 상황에 처합니다.
러시아군 수뇌부 또한 독일과 비슷하게 유럽전선에서는 단기결전으로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고 포 1문당 1천발의 포탄이 있으면 전쟁이 끝날 때 까지 충분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군 포병은 전쟁 전 기간 동안 1,276문의 포를 투입해 918,000발의 포탄을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포 1문당 평균 700발의 포탄을 소비하는데 불과했기 때문에 일부에서는 1천발도 ‘너무 많은 것이 아니냐’하는 의문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소총탄의 경우 1개월에 5백만발이면 충분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탄약 뿐 아니라 전투장비의 소요량도 낙관적으로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소총의 경우 독일과의 전면전이 발발할 경우 동원병력 450만명분과 연간 보충 70만정 만 생산하면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던 것 입니다.
※ 하지만 전선의 물자 소요량은 엄청났습니다. 당초 520만정이면 충분할 것으로 예상한 소총의 경우 전쟁 기간 중 추가적인 병력 동원으로 550만정이 더 필요했으며, 여기에 전쟁 기간 동안의 손실을 보충하는데 720만정이 더 필요했다고 합니다.
전쟁 발발 이전의 낙관적인 예상은 전쟁이 시작되자 마자 철저히 깨지게 됩니다.
러시아군은 병력동원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전쟁이 발발하자 독일의 예상보다 더 빨리 공세에 나설 수 있었지만 군수보급은 병력동원을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전쟁이 시작된 1914년 8월부터 총참모부는 전쟁상 수호믈리노프에게 예상 보다 탄약 소요가 많을 수 있다고 경고했으나 수호믈리노프의 대답은 이랬다고 합니다.
“아껴 쓰는 방안을 강구할 수 는 없는가?”
사실상 러시아군은 소모전에 대한 대비가 안된 상황에서 전쟁에 돌입하게 된 것입니다.
러시아의 국영조병창은 물론 민간 기업들의 생산량을 합치더라도 전선의 요구량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1914년 9월 9일에 수호믈리노프가 러시아의 주요 기업관계자들을 소집해서 총 665만발의 포탄을 주문하고 한달 평균 150만발을 생산할 수 있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러시아 기업들의 생산능력으로는 한달에 최대 50만발을 생산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결국은 러일전쟁 때 처럼 전선의 소요량을 조달하기 위해서는 외국으로부터 군수물자를 도입하는 것 말고는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러일전쟁과는 상황이 달라서 영국이나 프랑스도 자국군의 요구량을 생산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영국은 전쟁 초 러시아로부터 1백만발의 포탄을 주문 받았지만 1915년 9월까지 겨우 5천발을 보내는데 그쳤습니다. 아직 전쟁에 개입하지 않은 미국의 상황은 그나마 조금 나은 편이었습니다. 미국과 캐나다의 회사들은 1916년 6월까지 러시아로부터 주문 받은 910만발의 76.2mm 포탄 중 875,000발을 생산해서 보냅니다 하지만 전쟁으로 발틱해가 봉쇄되었기 때문에 이것들은 아르항겔스크나 블라디보스톡으로 수송되었습니다. 러시아의 열악한 철도망 때문에 미국에서 도착한 포탄들은 항구에 하역된 뒤 전선으로 수송되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문제는 다른 군수물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러시아정부는 러시아의 부족한 소총 및 야포 생산능력을 보충하기 위해서 미국, 영국 등에 소총과 야포를 대량으로 발주했는데 역시 외국 기업들은 러시아 정부의 발주량을 맞추지 못했습니다. 러시아 정부는 1915년에 미국의 윈체스터에 30만정, 레밍턴에 150만정, 웨스팅하우스에 150만정의 모신-나강 소총의 생산을 발주했으며 각 기업들에게 1915년에는 1개월에 10만정, 1916년 까지 1개월에 20만정을 생산할 수 있도록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아직 군수물자 생산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러시아 정부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습니다. 1917년 3월까지 윈체스터는 주문량의 9%를, 레밍턴과 웨스팅하우스는 12%를 납품하는데 그쳤습니다.
러시아의 자체적인 생산은 물론 수입조차 어려워지자 전선의 탄약 상황은 계속 악화되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듯 러시아군은 1914년 9월 까지만 해도 한달 평균 150만발의 포탄을 생산하면 충분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지만 같은 해 10월에는 이것을 다시 250만발로 늘려 잡았고 결국에는 한달에 최소 350만발은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본국의 탄약 생산이 차질을 빚고 있는 동안 전선의 러시아군은 독일군의 ‘물량공세’ 앞에 피박을 쓰게 됩니다. 1915년 독일군의 춘계 공세 당시 막켄젠(August von Mackensen)의 11군은 1백만 발의 포탄을 퍼부었는데 독일군의 주공을 얻어맞은 러시아 3군은 그 10분의 1도 안되는 포탄만 보급받은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 독일군의 강력한 공세에 처한 러시아군은 급속히 붕괴되어 버립니다. 1915년 8~9월에 있었던 북부전선의 독일군 공세에서도 갈비츠(Max von Gallwitz)의 12군은 3백만발 이상의 포탄을 사용했는데 러시아군은 90만발을 보급받는데 그쳤습니다. 갈비츠의 공세로 러시아군은 빌뉴스를 상실하고 밀려납니다. 단순히 야포의 숫자로만 비교하면 독일군이 압도적 우위는 아니었지만 중요한 것은 포탄의 보급 문제였습니다.
게다가 러시아군은 요새의 역할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요새에 충분한 탄약을 비축하는데 신경을 쓰고 있었습니다. 야전군은 포탄 부족으로 고전하고 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동부전선의 기동전 하에서 큰 역할을 하지 못한 요새들에는 많은 포탄이 비축되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노보게오르기프스크(Новогеоргиевск)와 코브노(Ковно) 요새가 함락되었을 때 독일군은 이 두 요새에서만 200만발에 가까운 포탄을 노획했습니다.
포탄 뿐만 아니라 소화기의 탄약도 부족했습니다. 그 결과 노획무기의 사용이 빈번했습니다. 예를 들어 1916년에 러시아 8군 예하의 2개 군단은 노획한 오스트리아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탄약보급이 잘 되지 않으니 아예 대량으로 노획되는 오스트리아 탄약을 사용하기 위해 부대 단위로 오스트리아 소총을 장비한 것 입니다. 물론 소총 자체의 보급 문제도 있었다고 있긴 했습니다만.
군수물자의 부족이 러시아군 패배의 모든 원인은 아니지만 심각한 문제였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급박한 상황에 직면한 러시아정부는 탄약생산 증대에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정부의 대대적인 투자에 의해 러시아의 자체적인 탄약 생산은 꾸준히 증가했습니다. 그리고 1915년 2월에는 탄약 생산을 감독하기 위해 포병총국(Гравное Артиллерийское Управление) 예하에 폭약류 생산을 위한 위원회를 조직하기도 합니다. 러시아전쟁성은 1914년 9월 러시아 기업들에 1915년 10월까지 포탄의 월간 생산량을 1백만발로 늘리는 조건으로 1천만 루블을 투자합니다. 이 계획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1914년 가을 한 달에 45만발의 포탄을 생산했는데 1915년 7월에는 90만발, 같은 해 9월에는 1백만발을 생산하는데 이릅니다. 폭약생산은 1915년 2월에 96톤이었으나 7월에는 820톤으로, 그리고 10월에는 1,366톤으로 급증했고 생산량 증가의 대부분은 러시아 민간기업에 힘입은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 조차 전선의 수요에는 턱없이 부족했다는 것 입니다.
러시아의 화약류 생산에 지장을 초래한 가장 큰 원인은 황산을 만드는데 필요한 황철석의 조달 문제였습니다. 러시아는 전쟁 이전에 스웨덴과 터키를 통해 황철석을 수입하고 있었고 이것은 전체 수요의 3분의 1 규모였습니다. 전쟁이 터지자 전자는 발틱해의 봉쇄로 수입이 끊기고, 후자는 적국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황철석 수입문제로 발틱해 연안에 건설된 러시아의 황산공장들이 독일군의 진격으로 점령되거나 점령을 피해 이전하는 통에 1915년 초에는 황산 조달이 위험할 정도로 격감했다고 합니다. 물론 나머지 2/3을 차지하는 우랄 지역은 독일군의 위협으로 무사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발트해 연안의 생산시설 상실과 전체 수요량의 30%가 일시에 사라진 것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러시아정부는 우랄 지역의 황철광 생산을 증대시켜 1915년 말에는 황산 생산문제가 해결되고 황산 생산량은 1916년 3월까지 월간 2만톤 이상으로 증가합니다.
한편, 독일군의 화학무기 사용도 심각한 위협이었습니다. 서부전선의 영국군 및 프랑스군과 달리 러시아군은 전쟁 기간 중 방독면 부족에 시달렸습니다. 독일군이 1915년부터 동부전선에서 본격적으로 화학무기를 사용하자 러시아군도 이에 대응해 화학무기 개발과 방독면 생산을 시작합니다. 러시아는 독일군의 화학탄 사용에 맞서 1915년부터 염소가스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는 일반 포탄과 마찬가지로 화학탄 생산능력도 부족했습니다. 러시아군이 1915년 전 기간을 통틀어 사용한 화학무기는 200톤 정도였는데 이것은 독일군이 서부전선에서 단 한차례의 공격작전에 사용하는 규모에 불과했습니다. 예를 들어 1915년 4월의 이프르 전투에서 독일군이 첫날 사용한 염소가스는 150톤 정도였습니다.
※ 동부전선의 초기 화학전에 대해서는 ‘독일군의 화학무기 시험 : 1914~1915’에서 간단히 언급한 바 있습니다.
러시아 정부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러시아의 포탄 생산량은 1916년에는 월간 185만발 까지 증가했습니다. 러시아 측의 주장에 따르면 1차대전 기간 중 러시아군이 사용한 7230만발의 포탄 중 5660만발이 러시아가 자체적으로 생산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러시아군의 포탄 생산은 주로 76.2mm에서 122mm 구경의 포탄에 집중되었고 203mm 이상의 중포에 필요한 포탄의 생산은 전쟁이 끝날 때 까지도 문제였다고 합니다. 기묘하게도 포병을 중시하는 러시아군이 1차대전에서는 독일군에게 화력 면에서 압도당하고 말았습니다.
1차대전 당시의 뼈저린 경험은 이 전쟁을 경험한 미래의 소련 장군들에게 소모전의 중요성을 각인시켰습니다. 러시아군의 기동전은 독일군의 기동전과 달리 소모의 개념도 중요한 요소로 들어가 있는데 이것은 1차대전의 동부전선 경험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투하체프스키 같은 군인들은 1차 5개년 계획기간 동안 스탈린 이상으로 군수물자 생산능력의 확충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비록 전쟁에는 패배했지만 제정러시아가 남긴 유산은 소련에게 거의 대부분 계승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노동자입니다. 1차대전을 통해 러시아의 화학공업은 양적으로 팽창했습니다. 1913년에 33,000명이던 화학공업 부문의 노동자는 1917년에는 117,000명으로 증가합니다. 이렇게 늘어난 노동자들은 소련의 산업화 초기 화학공업의 중핵이 되었습니다.
소련인들은 1차대전에서 얻은 교훈을 잘 살린 결과 2차대전에서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독일군과 싸우게 되었습니다. 막연히 1차대전의 경험만 가지고 러시아를 과소평가한 독일인들은 그 대가를 혹독히 치루게 되지요.
참고문헌
Nathan M. Brooks, ‘Munitions, The Military, and Chemistry in Russia’, Frontline and Factory : Comparative Perspectives on the Chemical Industry at War 1914~1924, Springer, 2006
Martin van Creveld, ‘World War I and the Revolution in Logistics’, Great War, Total War : Combat and Mobilization on the Western Front, 1914~1918,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0
Jonathan Grant, ‘Tsarist Armament Strategies 1870~1914’, The Journal of Soviet Military Studies, 4-1(1991)
Bruce W. Menning, Bayonets before Bullets : The Imperial Russian Army, 1861~1914, Indiana University Press, 1992/2000
Norman Stone, The Eastern Front 1914~1917, Penguin Boosk, 1975/1998
1890년에서 러일전쟁이 발발할 때 까지 러시아의 군수공업은 해외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았습니다.
러시아의 뒤떨어진 공업능력은 소총 조차도 충분히 조달할 수 없었는데 단적인 예로 모신-나강 소총이 처음 채용되었을 때 러시아 정부는 육군의 소요량을 신속히 조달하기 위해서 프랑스와 벨기에에 소총 생산을 발주했습니다. 그 결과 러시아군은 신속히 모신-나강 소총으로 기본화기를 교체했고 러일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예비사단 까지도 신형소총을 지급받을 수 있었습니다. 러시아 정부는 필요한 소총을 획득한 뒤에는 외국으로 부터의 주문을 중단하고 국영조병창을 통해서만 소총을 생산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보충용 소총을 생산하는데 그쳤고 전쟁 발발시 수요량을 충족시킬 능력은 없었습니다. 또 러시아의 TNT 생산은 러시아에 설립된 독일 회사의 톨루엔(toluene)에 크게 의존했는데 독일 기업들은 톨루엔 생산에 필요한 석유제품을 독일에서 들여오고 있었습니다. 독일과 전쟁이 벌어진다면 러시아의 폭약생산에 차질이 빚어질 것은 뻔한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는 자체적인 톨루엔 생산능력 확충보다는 당장 편한 독일 기업으로 부터의 도입에 계속 의존했습니다.
결국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러시아 정부는 급격히 증대된 군수물자의 수요를 채우기 위해 외국 기업에 대한 발주를 늘리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러시아 육군(전쟁성)의 경우 1903년에 260만 루블을 무기 수입에 사용했는데 이것은 1904년에는 1690만 루블로, 1905년에는 7310만 루블로 늘어납니다. 러시아 해군은 1903년에는 1천만루블을 무기 수입에 사용했고 1905년에는 6800만 루블을 수입에 사용합니다. 해외로 부터의 군수물자 수입은 발주에서 도착까지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전쟁 중에는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러시아 정부는 러일전쟁이 종결된 뒤 군대를 개편하는 과정에서 군수물자 생산능력의 확충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 때문에 1차대전 발발 직전 러시아 정부는 미래의 전쟁에서는 러시아가 자체적으로 충분한 군수물자를 생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전쟁상인 수호믈리노프(Владими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Сухомлинов)는 ‘장차 벌어질 전쟁에서 러시아 포병은 포탄이 부족하다고 불평할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의 포병은 많은 양의 장비를 보급받고 있으며 포탄의 보급(체제)도 잘 조직되어 있다’고 호언장담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의 군수공업은 여전히 생산능력이 부족하며 외국의 기술과 중간 생산재에 대한 의존이 높은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전쟁이 발발하자 바로 드러나 버립니다.
1차대전이 발발하자 모든 참전국의 군지휘부를 경악시킨 것은 전쟁 이전의 예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물자소모였습니다. 전쟁 준비가 가장 충실히 되어 있었다는 평을 받는 독일의 경우 포 1문 당 6개월 소요량으로 1천발의 포탄을 배정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전쟁이 발발한 뒤 6주만에 모조리 소비되어 버리고 일선 부대들은 탄약 부족으로 작전 수행이 어려운 상황에 처합니다.
러시아군 수뇌부 또한 독일과 비슷하게 유럽전선에서는 단기결전으로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고 포 1문당 1천발의 포탄이 있으면 전쟁이 끝날 때 까지 충분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군 포병은 전쟁 전 기간 동안 1,276문의 포를 투입해 918,000발의 포탄을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포 1문당 평균 700발의 포탄을 소비하는데 불과했기 때문에 일부에서는 1천발도 ‘너무 많은 것이 아니냐’하는 의문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소총탄의 경우 1개월에 5백만발이면 충분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탄약 뿐 아니라 전투장비의 소요량도 낙관적으로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소총의 경우 독일과의 전면전이 발발할 경우 동원병력 450만명분과 연간 보충 70만정 만 생산하면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던 것 입니다.
※ 하지만 전선의 물자 소요량은 엄청났습니다. 당초 520만정이면 충분할 것으로 예상한 소총의 경우 전쟁 기간 중 추가적인 병력 동원으로 550만정이 더 필요했으며, 여기에 전쟁 기간 동안의 손실을 보충하는데 720만정이 더 필요했다고 합니다.
전쟁 발발 이전의 낙관적인 예상은 전쟁이 시작되자 마자 철저히 깨지게 됩니다.
러시아군은 병력동원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전쟁이 발발하자 독일의 예상보다 더 빨리 공세에 나설 수 있었지만 군수보급은 병력동원을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전쟁이 시작된 1914년 8월부터 총참모부는 전쟁상 수호믈리노프에게 예상 보다 탄약 소요가 많을 수 있다고 경고했으나 수호믈리노프의 대답은 이랬다고 합니다.
사실상 러시아군은 소모전에 대한 대비가 안된 상황에서 전쟁에 돌입하게 된 것입니다.
러시아의 국영조병창은 물론 민간 기업들의 생산량을 합치더라도 전선의 요구량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1914년 9월 9일에 수호믈리노프가 러시아의 주요 기업관계자들을 소집해서 총 665만발의 포탄을 주문하고 한달 평균 150만발을 생산할 수 있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러시아 기업들의 생산능력으로는 한달에 최대 50만발을 생산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결국은 러일전쟁 때 처럼 전선의 소요량을 조달하기 위해서는 외국으로부터 군수물자를 도입하는 것 말고는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러일전쟁과는 상황이 달라서 영국이나 프랑스도 자국군의 요구량을 생산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영국은 전쟁 초 러시아로부터 1백만발의 포탄을 주문 받았지만 1915년 9월까지 겨우 5천발을 보내는데 그쳤습니다. 아직 전쟁에 개입하지 않은 미국의 상황은 그나마 조금 나은 편이었습니다. 미국과 캐나다의 회사들은 1916년 6월까지 러시아로부터 주문 받은 910만발의 76.2mm 포탄 중 875,000발을 생산해서 보냅니다 하지만 전쟁으로 발틱해가 봉쇄되었기 때문에 이것들은 아르항겔스크나 블라디보스톡으로 수송되었습니다. 러시아의 열악한 철도망 때문에 미국에서 도착한 포탄들은 항구에 하역된 뒤 전선으로 수송되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문제는 다른 군수물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러시아정부는 러시아의 부족한 소총 및 야포 생산능력을 보충하기 위해서 미국, 영국 등에 소총과 야포를 대량으로 발주했는데 역시 외국 기업들은 러시아 정부의 발주량을 맞추지 못했습니다. 러시아 정부는 1915년에 미국의 윈체스터에 30만정, 레밍턴에 150만정, 웨스팅하우스에 150만정의 모신-나강 소총의 생산을 발주했으며 각 기업들에게 1915년에는 1개월에 10만정, 1916년 까지 1개월에 20만정을 생산할 수 있도록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아직 군수물자 생산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러시아 정부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습니다. 1917년 3월까지 윈체스터는 주문량의 9%를, 레밍턴과 웨스팅하우스는 12%를 납품하는데 그쳤습니다.
러시아의 자체적인 생산은 물론 수입조차 어려워지자 전선의 탄약 상황은 계속 악화되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듯 러시아군은 1914년 9월 까지만 해도 한달 평균 150만발의 포탄을 생산하면 충분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지만 같은 해 10월에는 이것을 다시 250만발로 늘려 잡았고 결국에는 한달에 최소 350만발은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본국의 탄약 생산이 차질을 빚고 있는 동안 전선의 러시아군은 독일군의 ‘물량공세’ 앞에 피박을 쓰게 됩니다. 1915년 독일군의 춘계 공세 당시 막켄젠(August von Mackensen)의 11군은 1백만 발의 포탄을 퍼부었는데 독일군의 주공을 얻어맞은 러시아 3군은 그 10분의 1도 안되는 포탄만 보급받은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 독일군의 강력한 공세에 처한 러시아군은 급속히 붕괴되어 버립니다. 1915년 8~9월에 있었던 북부전선의 독일군 공세에서도 갈비츠(Max von Gallwitz)의 12군은 3백만발 이상의 포탄을 사용했는데 러시아군은 90만발을 보급받는데 그쳤습니다. 갈비츠의 공세로 러시아군은 빌뉴스를 상실하고 밀려납니다. 단순히 야포의 숫자로만 비교하면 독일군이 압도적 우위는 아니었지만 중요한 것은 포탄의 보급 문제였습니다.
게다가 러시아군은 요새의 역할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요새에 충분한 탄약을 비축하는데 신경을 쓰고 있었습니다. 야전군은 포탄 부족으로 고전하고 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동부전선의 기동전 하에서 큰 역할을 하지 못한 요새들에는 많은 포탄이 비축되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노보게오르기프스크(Новогеоргиевск)와 코브노(Ковно) 요새가 함락되었을 때 독일군은 이 두 요새에서만 200만발에 가까운 포탄을 노획했습니다.
포탄 뿐만 아니라 소화기의 탄약도 부족했습니다. 그 결과 노획무기의 사용이 빈번했습니다. 예를 들어 1916년에 러시아 8군 예하의 2개 군단은 노획한 오스트리아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탄약보급이 잘 되지 않으니 아예 대량으로 노획되는 오스트리아 탄약을 사용하기 위해 부대 단위로 오스트리아 소총을 장비한 것 입니다. 물론 소총 자체의 보급 문제도 있었다고 있긴 했습니다만.
군수물자의 부족이 러시아군 패배의 모든 원인은 아니지만 심각한 문제였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급박한 상황에 직면한 러시아정부는 탄약생산 증대에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정부의 대대적인 투자에 의해 러시아의 자체적인 탄약 생산은 꾸준히 증가했습니다. 그리고 1915년 2월에는 탄약 생산을 감독하기 위해 포병총국(Гравное Артиллерийское Управление) 예하에 폭약류 생산을 위한 위원회를 조직하기도 합니다. 러시아전쟁성은 1914년 9월 러시아 기업들에 1915년 10월까지 포탄의 월간 생산량을 1백만발로 늘리는 조건으로 1천만 루블을 투자합니다. 이 계획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1914년 가을 한 달에 45만발의 포탄을 생산했는데 1915년 7월에는 90만발, 같은 해 9월에는 1백만발을 생산하는데 이릅니다. 폭약생산은 1915년 2월에 96톤이었으나 7월에는 820톤으로, 그리고 10월에는 1,366톤으로 급증했고 생산량 증가의 대부분은 러시아 민간기업에 힘입은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 조차 전선의 수요에는 턱없이 부족했다는 것 입니다.
러시아의 화약류 생산에 지장을 초래한 가장 큰 원인은 황산을 만드는데 필요한 황철석의 조달 문제였습니다. 러시아는 전쟁 이전에 스웨덴과 터키를 통해 황철석을 수입하고 있었고 이것은 전체 수요의 3분의 1 규모였습니다. 전쟁이 터지자 전자는 발틱해의 봉쇄로 수입이 끊기고, 후자는 적국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황철석 수입문제로 발틱해 연안에 건설된 러시아의 황산공장들이 독일군의 진격으로 점령되거나 점령을 피해 이전하는 통에 1915년 초에는 황산 조달이 위험할 정도로 격감했다고 합니다. 물론 나머지 2/3을 차지하는 우랄 지역은 독일군의 위협으로 무사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발트해 연안의 생산시설 상실과 전체 수요량의 30%가 일시에 사라진 것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러시아정부는 우랄 지역의 황철광 생산을 증대시켜 1915년 말에는 황산 생산문제가 해결되고 황산 생산량은 1916년 3월까지 월간 2만톤 이상으로 증가합니다.
한편, 독일군의 화학무기 사용도 심각한 위협이었습니다. 서부전선의 영국군 및 프랑스군과 달리 러시아군은 전쟁 기간 중 방독면 부족에 시달렸습니다. 독일군이 1915년부터 동부전선에서 본격적으로 화학무기를 사용하자 러시아군도 이에 대응해 화학무기 개발과 방독면 생산을 시작합니다. 러시아는 독일군의 화학탄 사용에 맞서 1915년부터 염소가스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는 일반 포탄과 마찬가지로 화학탄 생산능력도 부족했습니다. 러시아군이 1915년 전 기간을 통틀어 사용한 화학무기는 200톤 정도였는데 이것은 독일군이 서부전선에서 단 한차례의 공격작전에 사용하는 규모에 불과했습니다. 예를 들어 1915년 4월의 이프르 전투에서 독일군이 첫날 사용한 염소가스는 150톤 정도였습니다.
※ 동부전선의 초기 화학전에 대해서는 ‘독일군의 화학무기 시험 : 1914~1915’에서 간단히 언급한 바 있습니다.
러시아 정부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러시아의 포탄 생산량은 1916년에는 월간 185만발 까지 증가했습니다. 러시아 측의 주장에 따르면 1차대전 기간 중 러시아군이 사용한 7230만발의 포탄 중 5660만발이 러시아가 자체적으로 생산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러시아군의 포탄 생산은 주로 76.2mm에서 122mm 구경의 포탄에 집중되었고 203mm 이상의 중포에 필요한 포탄의 생산은 전쟁이 끝날 때 까지도 문제였다고 합니다. 기묘하게도 포병을 중시하는 러시아군이 1차대전에서는 독일군에게 화력 면에서 압도당하고 말았습니다.
1차대전 당시의 뼈저린 경험은 이 전쟁을 경험한 미래의 소련 장군들에게 소모전의 중요성을 각인시켰습니다. 러시아군의 기동전은 독일군의 기동전과 달리 소모의 개념도 중요한 요소로 들어가 있는데 이것은 1차대전의 동부전선 경험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투하체프스키 같은 군인들은 1차 5개년 계획기간 동안 스탈린 이상으로 군수물자 생산능력의 확충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비록 전쟁에는 패배했지만 제정러시아가 남긴 유산은 소련에게 거의 대부분 계승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노동자입니다. 1차대전을 통해 러시아의 화학공업은 양적으로 팽창했습니다. 1913년에 33,000명이던 화학공업 부문의 노동자는 1917년에는 117,000명으로 증가합니다. 이렇게 늘어난 노동자들은 소련의 산업화 초기 화학공업의 중핵이 되었습니다.
소련인들은 1차대전에서 얻은 교훈을 잘 살린 결과 2차대전에서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독일군과 싸우게 되었습니다. 막연히 1차대전의 경험만 가지고 러시아를 과소평가한 독일인들은 그 대가를 혹독히 치루게 되지요.
참고문헌
Nathan M. Brooks, ‘Munitions, The Military, and Chemistry in Russia’, Frontline and Factory : Comparative Perspectives on the Chemical Industry at War 1914~1924, Springer, 2006
Martin van Creveld, ‘World War I and the Revolution in Logistics’, Great War, Total War : Combat and Mobilization on the Western Front, 1914~1918,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0
Jonathan Grant, ‘Tsarist Armament Strategies 1870~1914’, The Journal of Soviet Military Studies, 4-1(1991)
Bruce W. Menning, Bayonets before Bullets : The Imperial Russian Army, 1861~1914, Indiana University Press, 1992/2000
Norman Stone, The Eastern Front 1914~1917, Penguin Boosk, 1975/1998
2007년 2월 15일 목요일
독일군의 화학무기 시험 : 1914~1915
마른 전투 이후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사람 잡는데 타고난 재능을 가진 독일인들은 뭔가 화끈한 한방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후세에 음흉한 이미지를 남긴 전쟁상 팔켄하인은 1914년 10월 초에 화학전을 위한 연구를 지시하고 재주 좋은 독일 엔지니어들은 150mm 유탄포로 발사하는 가스탄 시제품을 2주도 안되는 시간에 완성해 10월 27일 첫번째 실전 시험을 시작했습니다.
1914년 10월 27일, 독일군은 서부전선의 누브-샤펠(Nouve-Chapelle) 전투에서 처음으로 가스탄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이날의 결과는 조금 기묘한 것이 연합군은 독일군이 화학무기를 썼는지 전혀 몰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측은 이날의 성능시험에 만족했는지 바로 17,000발의 가스탄을 생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것 입니다.
독일군은 1915년 1월 15일에 동부전선의 볼리모프 전투에서 가스탄을 보다 대규모로 사용했습니다. 즉, 본격적인 실전 투입이었습니다. 이날 전투에서 독일군은 공격준비사격 동안 15,000발의 가스탄을 발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포탄의 문제 때문인지 놀랍게도 가스탄은 별다른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이날 발사한 가스탄에 의한 사상자는 거의 없었다고 전해집니다.
1914년 말과 1915년 초 화학무기 사용은 독일군 고위지휘관들의 큰 관심사였습니다. 독일의 장성들은 도덕적으로 꺼림칙 한데다 효과도 의심스러운 독가스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찝찝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몇 차례 있었던 실전 시험에서 결과가 신통치 않았기 때문에 그 효능에 대한 의구심이 큰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랬기 때문인지 이프르 전투에서는 전투 초반 상당히 좋은 효과를 거두긴 했는데 전과 확대에 필요한 예비대가 없어 결국 헛수고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이프르 전투에 투입된 화학전 부대는 바로 동부전선으로 이동해서 5월 31일 Humin 공격에 투입됐습니다. 독일측은 동부전선의 기후나 지형이 화학전에는 좀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다고 합니다. 일단 사방이 평야라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이었던 것 같습니다. 독일군은 이날 220톤의 독가스를 사용해 1만 명의 러시아군을 죽이거나 부상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람 때문에 가스가 퍼지지 않은 지역에서는 러시아군이 완강하게 저항해 독일군은 크게 고전했다고 합니다.
독일군은 Humin 전투 뒤 동부전선에서 세 번에 걸쳐 독가스를 시험했는데 두 차례는 매우 난감한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특히 한번은 독일군이 가스탄 발사를 끝내고 얼마 뒤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가스가 그대로 독일군 방향으로 밀려왔고 이 황당한 상태에 처한 독일군 보병들은 공황상태에 빠져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서부전선에 비하면 러시아군은 가스전에 대한 대비가 부실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효과적인 대응책을 고안했습니다. 러시아군은 독일군이 가스 공격을 시작하면 해당 지역에 큰 불을 질러 독가스가 높이 올라가도록 만들어 독일인들에게 엿을 먹였다고 합니다. 물론 1916년 이후 가스 사용 기술이 점차 세련돼 가면서 이런 임시적인 대응의 효과는 감소했고 러시아는 1차 대전기간 동안 50만 명을 가스 공격에 잃게 됩니다.
독가스는 1914년 겨울부터 1915년 여름에 걸친 몇 차례의 시험을 통해 효과가 있긴 하지만 그냥 믿고 쓰기엔 문제가 많은 물건으로 드러났습니다. 특히 그 효과가 바람에 좌우된다는 점은 분명히 문제였습니다. 독일군은 욕을 먹어가면서 독가스를 사용했지만 효과가, 특히 서부전선에서는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1915-1916년 기간 동안 서부전선에서 가스 공격으로 죽거나 부상당한 연합군 병력은 연합군 전체 사상자의 0.85% 였습니다. 물론 1917년 이후에는 이것 보다는 훨씬 좋은 효과를 거두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관총의 아성에 도전하기에는 문제가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1914년 10월 27일, 독일군은 서부전선의 누브-샤펠(Nouve-Chapelle) 전투에서 처음으로 가스탄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이날의 결과는 조금 기묘한 것이 연합군은 독일군이 화학무기를 썼는지 전혀 몰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측은 이날의 성능시험에 만족했는지 바로 17,000발의 가스탄을 생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것 입니다.
독일군은 1915년 1월 15일에 동부전선의 볼리모프 전투에서 가스탄을 보다 대규모로 사용했습니다. 즉, 본격적인 실전 투입이었습니다. 이날 전투에서 독일군은 공격준비사격 동안 15,000발의 가스탄을 발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포탄의 문제 때문인지 놀랍게도 가스탄은 별다른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이날 발사한 가스탄에 의한 사상자는 거의 없었다고 전해집니다.
1914년 말과 1915년 초 화학무기 사용은 독일군 고위지휘관들의 큰 관심사였습니다. 독일의 장성들은 도덕적으로 꺼림칙 한데다 효과도 의심스러운 독가스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찝찝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몇 차례 있었던 실전 시험에서 결과가 신통치 않았기 때문에 그 효능에 대한 의구심이 큰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랬기 때문인지 이프르 전투에서는 전투 초반 상당히 좋은 효과를 거두긴 했는데 전과 확대에 필요한 예비대가 없어 결국 헛수고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이프르 전투에 투입된 화학전 부대는 바로 동부전선으로 이동해서 5월 31일 Humin 공격에 투입됐습니다. 독일측은 동부전선의 기후나 지형이 화학전에는 좀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다고 합니다. 일단 사방이 평야라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이었던 것 같습니다. 독일군은 이날 220톤의 독가스를 사용해 1만 명의 러시아군을 죽이거나 부상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람 때문에 가스가 퍼지지 않은 지역에서는 러시아군이 완강하게 저항해 독일군은 크게 고전했다고 합니다.
독일군은 Humin 전투 뒤 동부전선에서 세 번에 걸쳐 독가스를 시험했는데 두 차례는 매우 난감한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특히 한번은 독일군이 가스탄 발사를 끝내고 얼마 뒤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가스가 그대로 독일군 방향으로 밀려왔고 이 황당한 상태에 처한 독일군 보병들은 공황상태에 빠져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서부전선에 비하면 러시아군은 가스전에 대한 대비가 부실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효과적인 대응책을 고안했습니다. 러시아군은 독일군이 가스 공격을 시작하면 해당 지역에 큰 불을 질러 독가스가 높이 올라가도록 만들어 독일인들에게 엿을 먹였다고 합니다. 물론 1916년 이후 가스 사용 기술이 점차 세련돼 가면서 이런 임시적인 대응의 효과는 감소했고 러시아는 1차 대전기간 동안 50만 명을 가스 공격에 잃게 됩니다.
독가스는 1914년 겨울부터 1915년 여름에 걸친 몇 차례의 시험을 통해 효과가 있긴 하지만 그냥 믿고 쓰기엔 문제가 많은 물건으로 드러났습니다. 특히 그 효과가 바람에 좌우된다는 점은 분명히 문제였습니다. 독일군은 욕을 먹어가면서 독가스를 사용했지만 효과가, 특히 서부전선에서는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1915-1916년 기간 동안 서부전선에서 가스 공격으로 죽거나 부상당한 연합군 병력은 연합군 전체 사상자의 0.85% 였습니다. 물론 1917년 이후에는 이것 보다는 훨씬 좋은 효과를 거두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관총의 아성에 도전하기에는 문제가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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