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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18일 목요일

러시아군의 군수물자 부족문제 : 탄약을 중심으로, 1914~1917

1차대전 발발 직전 러시아는 거의 대부분의 군수물자를 국영공장에서 생산하고 있었습니다. 산업화된 전쟁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로 민간공업이 육성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이 발발한다면 대부분의 생산 부담은 국영공장이 짊어 지어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 입니다. 그러나 이런 체제 아래서는 탄약 수요가 급증할 경우 신속히 대처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전쟁이 발발하자 그대로 현실이 됩니다.

1890년에서 러일전쟁이 발발할 때 까지 러시아의 군수공업은 해외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았습니다.
러시아의 뒤떨어진 공업능력은 소총 조차도 충분히 조달할 수 없었는데 단적인 예로 모신-나강 소총이 처음 채용되었을 때 러시아 정부는 육군의 소요량을 신속히 조달하기 위해서 프랑스와 벨기에에 소총 생산을 발주했습니다. 그 결과 러시아군은 신속히 모신-나강 소총으로 기본화기를 교체했고 러일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예비사단 까지도 신형소총을 지급받을 수 있었습니다. 러시아 정부는 필요한 소총을 획득한 뒤에는 외국으로 부터의 주문을 중단하고 국영조병창을 통해서만 소총을 생산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보충용 소총을 생산하는데 그쳤고 전쟁 발발시 수요량을 충족시킬 능력은 없었습니다. 또 러시아의 TNT 생산은 러시아에 설립된 독일 회사의 톨루엔(toluene)에 크게 의존했는데 독일 기업들은 톨루엔 생산에 필요한 석유제품을 독일에서 들여오고 있었습니다. 독일과 전쟁이 벌어진다면 러시아의 폭약생산에 차질이 빚어질 것은 뻔한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는 자체적인 톨루엔 생산능력 확충보다는 당장 편한 독일 기업으로 부터의 도입에 계속 의존했습니다.
결국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러시아 정부는 급격히 증대된 군수물자의 수요를 채우기 위해 외국 기업에 대한 발주를 늘리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러시아 육군(전쟁성)의 경우 1903년에 260만 루블을 무기 수입에 사용했는데 이것은 1904년에는 1690만 루블로, 1905년에는 7310만 루블로 늘어납니다. 러시아 해군은 1903년에는 1천만루블을 무기 수입에 사용했고 1905년에는 6800만 루블을 수입에 사용합니다. 해외로 부터의 군수물자 수입은 발주에서 도착까지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전쟁 중에는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러시아 정부는 러일전쟁이 종결된 뒤 군대를 개편하는 과정에서 군수물자 생산능력의 확충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 때문에 1차대전 발발 직전 러시아 정부는 미래의 전쟁에서는 러시아가 자체적으로 충분한 군수물자를 생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전쟁상인 수호믈리노프(Владими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Сухомлинов)는 ‘장차 벌어질 전쟁에서 러시아 포병은 포탄이 부족하다고 불평할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의 포병은 많은 양의 장비를 보급받고 있으며 포탄의 보급(체제)도 잘 조직되어 있다’고 호언장담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의 군수공업은 여전히 생산능력이 부족하며 외국의 기술과 중간 생산재에 대한 의존이 높은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전쟁이 발발하자 바로 드러나 버립니다.

1차대전이 발발하자 모든 참전국의 군지휘부를 경악시킨 것은 전쟁 이전의 예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물자소모였습니다. 전쟁 준비가 가장 충실히 되어 있었다는 평을 받는 독일의 경우 포 1문 당 6개월 소요량으로 1천발의 포탄을 배정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전쟁이 발발한 뒤 6주만에 모조리 소비되어 버리고 일선 부대들은 탄약 부족으로 작전 수행이 어려운 상황에 처합니다.
러시아군 수뇌부 또한 독일과 비슷하게 유럽전선에서는 단기결전으로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고 포 1문당 1천발의 포탄이 있으면 전쟁이 끝날 때 까지 충분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군 포병은 전쟁 전 기간 동안 1,276문의 포를 투입해 918,000발의 포탄을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포 1문당 평균 700발의 포탄을 소비하는데 불과했기 때문에 일부에서는 1천발도 ‘너무 많은 것이 아니냐’하는 의문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소총탄의 경우 1개월에 5백만발이면 충분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탄약 뿐 아니라 전투장비의 소요량도 낙관적으로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소총의 경우 독일과의 전면전이 발발할 경우 동원병력 450만명분과 연간 보충 70만정 만 생산하면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던 것 입니다.

※ 하지만 전선의 물자 소요량은 엄청났습니다. 당초 520만정이면 충분할 것으로 예상한 소총의 경우 전쟁 기간 중 추가적인 병력 동원으로 550만정이 더 필요했으며, 여기에 전쟁 기간 동안의 손실을 보충하는데 720만정이 더 필요했다고 합니다.

전쟁 발발 이전의 낙관적인 예상은 전쟁이 시작되자 마자 철저히 깨지게 됩니다.

러시아군은 병력동원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전쟁이 발발하자 독일의 예상보다 더 빨리 공세에 나설 수 있었지만 군수보급은 병력동원을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전쟁이 시작된 1914년 8월부터 총참모부는 전쟁상 수호믈리노프에게 예상 보다 탄약 소요가 많을 수 있다고 경고했으나 수호믈리노프의 대답은 이랬다고 합니다.

“아껴 쓰는 방안을 강구할 수 는 없는가?”


사실상 러시아군은 소모전에 대한 대비가 안된 상황에서 전쟁에 돌입하게 된 것입니다.

러시아의 국영조병창은 물론 민간 기업들의 생산량을 합치더라도 전선의 요구량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1914년 9월 9일에 수호믈리노프가 러시아의 주요 기업관계자들을 소집해서 총 665만발의 포탄을 주문하고 한달 평균 150만발을 생산할 수 있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러시아 기업들의 생산능력으로는 한달에 최대 50만발을 생산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결국은 러일전쟁 때 처럼 전선의 소요량을 조달하기 위해서는 외국으로부터 군수물자를 도입하는 것 말고는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러일전쟁과는 상황이 달라서 영국이나 프랑스도 자국군의 요구량을 생산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영국은 전쟁 초 러시아로부터 1백만발의 포탄을 주문 받았지만 1915년 9월까지 겨우 5천발을 보내는데 그쳤습니다. 아직 전쟁에 개입하지 않은 미국의 상황은 그나마 조금 나은 편이었습니다. 미국과 캐나다의 회사들은 1916년 6월까지 러시아로부터 주문 받은 910만발의 76.2mm 포탄 중 875,000발을 생산해서 보냅니다 하지만 전쟁으로 발틱해가 봉쇄되었기 때문에 이것들은 아르항겔스크나 블라디보스톡으로 수송되었습니다. 러시아의 열악한 철도망 때문에 미국에서 도착한 포탄들은 항구에 하역된 뒤 전선으로 수송되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문제는 다른 군수물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러시아정부는 러시아의 부족한 소총 및 야포 생산능력을 보충하기 위해서 미국, 영국 등에 소총과 야포를 대량으로 발주했는데 역시 외국 기업들은 러시아 정부의 발주량을 맞추지 못했습니다. 러시아 정부는 1915년에 미국의 윈체스터에 30만정, 레밍턴에 150만정, 웨스팅하우스에 150만정의 모신-나강 소총의 생산을 발주했으며 각 기업들에게 1915년에는 1개월에 10만정, 1916년 까지 1개월에 20만정을 생산할 수 있도록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아직 군수물자 생산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러시아 정부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습니다. 1917년 3월까지 윈체스터는 주문량의 9%를, 레밍턴과 웨스팅하우스는 12%를 납품하는데 그쳤습니다.

러시아의 자체적인 생산은 물론 수입조차 어려워지자 전선의 탄약 상황은 계속 악화되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듯 러시아군은 1914년 9월 까지만 해도 한달 평균 150만발의 포탄을 생산하면 충분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지만 같은 해 10월에는 이것을 다시 250만발로 늘려 잡았고 결국에는 한달에 최소 350만발은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본국의 탄약 생산이 차질을 빚고 있는 동안 전선의 러시아군은 독일군의 ‘물량공세’ 앞에 피박을 쓰게 됩니다. 1915년 독일군의 춘계 공세 당시 막켄젠(August von Mackensen)의 11군은 1백만 발의 포탄을 퍼부었는데 독일군의 주공을 얻어맞은 러시아 3군은 그 10분의 1도 안되는 포탄만 보급받은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 독일군의 강력한 공세에 처한 러시아군은 급속히 붕괴되어 버립니다. 1915년 8~9월에 있었던 북부전선의 독일군 공세에서도 갈비츠(Max von Gallwitz)의 12군은 3백만발 이상의 포탄을 사용했는데 러시아군은 90만발을 보급받는데 그쳤습니다. 갈비츠의 공세로 러시아군은 빌뉴스를 상실하고 밀려납니다. 단순히 야포의 숫자로만 비교하면 독일군이 압도적 우위는 아니었지만 중요한 것은 포탄의 보급 문제였습니다.
게다가 러시아군은 요새의 역할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요새에 충분한 탄약을 비축하는데 신경을 쓰고 있었습니다. 야전군은 포탄 부족으로 고전하고 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동부전선의 기동전 하에서 큰 역할을 하지 못한 요새들에는 많은 포탄이 비축되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노보게오르기프스크(Новогеоргиевск)와 코브노(Ковно) 요새가 함락되었을 때 독일군은 이 두 요새에서만 200만발에 가까운 포탄을 노획했습니다.
포탄 뿐만 아니라 소화기의 탄약도 부족했습니다. 그 결과 노획무기의 사용이 빈번했습니다. 예를 들어 1916년에 러시아 8군 예하의 2개 군단은 노획한 오스트리아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탄약보급이 잘 되지 않으니 아예 대량으로 노획되는 오스트리아 탄약을 사용하기 위해 부대 단위로 오스트리아 소총을 장비한 것 입니다. 물론 소총 자체의 보급 문제도 있었다고 있긴 했습니다만.
군수물자의 부족이 러시아군 패배의 모든 원인은 아니지만 심각한 문제였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급박한 상황에 직면한 러시아정부는 탄약생산 증대에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정부의 대대적인 투자에 의해 러시아의 자체적인 탄약 생산은 꾸준히 증가했습니다. 그리고 1915년 2월에는 탄약 생산을 감독하기 위해 포병총국(Гравное Артиллерийское Управление) 예하에 폭약류 생산을 위한 위원회를 조직하기도 합니다. 러시아전쟁성은 1914년 9월 러시아 기업들에 1915년 10월까지 포탄의 월간 생산량을 1백만발로 늘리는 조건으로 1천만 루블을 투자합니다. 이 계획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1914년 가을 한 달에 45만발의 포탄을 생산했는데 1915년 7월에는 90만발, 같은 해 9월에는 1백만발을 생산하는데 이릅니다. 폭약생산은 1915년 2월에 96톤이었으나 7월에는 820톤으로, 그리고 10월에는 1,366톤으로 급증했고 생산량 증가의 대부분은 러시아 민간기업에 힘입은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 조차 전선의 수요에는 턱없이 부족했다는 것 입니다.
러시아의 화약류 생산에 지장을 초래한 가장 큰 원인은 황산을 만드는데 필요한 황철석의 조달 문제였습니다. 러시아는 전쟁 이전에 스웨덴과 터키를 통해 황철석을 수입하고 있었고 이것은 전체 수요의 3분의 1 규모였습니다. 전쟁이 터지자 전자는 발틱해의 봉쇄로 수입이 끊기고, 후자는 적국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황철석 수입문제로 발틱해 연안에 건설된 러시아의 황산공장들이 독일군의 진격으로 점령되거나 점령을 피해 이전하는 통에 1915년 초에는 황산 조달이 위험할 정도로 격감했다고 합니다. 물론 나머지 2/3을 차지하는 우랄 지역은 독일군의 위협으로 무사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발트해 연안의 생산시설 상실과 전체 수요량의 30%가 일시에 사라진 것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러시아정부는 우랄 지역의 황철광 생산을 증대시켜 1915년 말에는 황산 생산문제가 해결되고 황산 생산량은 1916년 3월까지 월간 2만톤 이상으로 증가합니다.
한편, 독일군의 화학무기 사용도 심각한 위협이었습니다. 서부전선의 영국군 및 프랑스군과 달리 러시아군은 전쟁 기간 중 방독면 부족에 시달렸습니다. 독일군이 1915년부터 동부전선에서 본격적으로 화학무기를 사용하자 러시아군도 이에 대응해 화학무기 개발과 방독면 생산을 시작합니다. 러시아는 독일군의 화학탄 사용에 맞서 1915년부터 염소가스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는 일반 포탄과 마찬가지로 화학탄 생산능력도 부족했습니다. 러시아군이 1915년 전 기간을 통틀어 사용한 화학무기는 200톤 정도였는데 이것은 독일군이 서부전선에서 단 한차례의 공격작전에 사용하는 규모에 불과했습니다. 예를 들어 1915년 4월의 이프르 전투에서 독일군이 첫날 사용한 염소가스는 150톤 정도였습니다.

※ 동부전선의 초기 화학전에 대해서는 ‘독일군의 화학무기 시험 : 1914~1915’에서 간단히 언급한 바 있습니다.

러시아 정부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러시아의 포탄 생산량은 1916년에는 월간 185만발 까지 증가했습니다. 러시아 측의 주장에 따르면 1차대전 기간 중 러시아군이 사용한 7230만발의 포탄 중 5660만발이 러시아가 자체적으로 생산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러시아군의 포탄 생산은 주로 76.2mm에서 122mm 구경의 포탄에 집중되었고 203mm 이상의 중포에 필요한 포탄의 생산은 전쟁이 끝날 때 까지도 문제였다고 합니다. 기묘하게도 포병을 중시하는 러시아군이 1차대전에서는 독일군에게 화력 면에서 압도당하고 말았습니다.

1차대전 당시의 뼈저린 경험은 이 전쟁을 경험한 미래의 소련 장군들에게 소모전의 중요성을 각인시켰습니다. 러시아군의 기동전은 독일군의 기동전과 달리 소모의 개념도 중요한 요소로 들어가 있는데 이것은 1차대전의 동부전선 경험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투하체프스키 같은 군인들은 1차 5개년 계획기간 동안 스탈린 이상으로 군수물자 생산능력의 확충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비록 전쟁에는 패배했지만 제정러시아가 남긴 유산은 소련에게 거의 대부분 계승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노동자입니다. 1차대전을 통해 러시아의 화학공업은 양적으로 팽창했습니다. 1913년에 33,000명이던 화학공업 부문의 노동자는 1917년에는 117,000명으로 증가합니다. 이렇게 늘어난 노동자들은 소련의 산업화 초기 화학공업의 중핵이 되었습니다.
소련인들은 1차대전에서 얻은 교훈을 잘 살린 결과 2차대전에서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독일군과 싸우게 되었습니다. 막연히 1차대전의 경험만 가지고 러시아를 과소평가한 독일인들은 그 대가를 혹독히 치루게 되지요.


참고문헌
Nathan M. Brooks, ‘Munitions, The Military, and Chemistry in Russia’, Frontline and Factory : Comparative Perspectives on the Chemical Industry at War 1914~1924, Springer, 2006
Martin van Creveld, ‘World War I and the Revolution in Logistics’, Great War, Total War : Combat and Mobilization on the Western Front, 1914~1918,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0
Jonathan Grant, ‘Tsarist Armament Strategies 1870~1914’, The Journal of Soviet Military Studies, 4-1(1991)
Bruce W. Menning, Bayonets before Bullets : The Imperial Russian Army, 1861~1914, Indiana University Press, 1992/2000
Norman Stone, The Eastern Front 1914~1917, Penguin Boosk, 1975/1998

2006년 5월 21일 일요일

러시아 육군의 개혁 1880-1914 (재탕!)

내가 생각해도 징허다.. 재탕 삼탕 사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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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이후 러시아 육군은 신무기 도입과 체제 개편에 박차를 가했다.

먼저 보병화기의 교체가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1880년대로 들어오자 끄렝끄식 소총은 물론 단발 노리쇠 장전식인 베르던 소총역시 구식화 되었고 유럽 각국이 채용하기 시작한 무연 화약을 사용한 탄창식 노리쇠 장전 소총은 러시아가 보유한 어떠한 보병 화기 보다도 우수했다. 러시아 육군은 1884년 까지 구식인 끄렝끄식 소총을 모두 베르던 노리쇠 장전식 소총으로 교체했지만 이때는 이미 이 소총 조차 구식화 된 상태였다.

이 때문에 러시아 육군은 1889년부터 무연 화약을 사용하는 탄창식 노리쇠 장전 소총의 도입을 추진했으며 여기에 벨기에의 레옹 나강이 설계한 소총과 러시아 육군 장교인 모신이 설계한 소총이 경합을 벌인 끝에 모신의 소총에 나강 소총의 탄창 구조를 결합한 소총이 제식 명칭 M1891으로 채택되었다. 러시아 육군은 1897년까지 200만 정을 생산해서 일선 보병 사단의 장비를 완전히 교체했으며 1903년까지 추가로 170만 정을 생산해서 예비 여단까지 장비 시켰다. 이렇게 해서 러-일 전쟁이 발발했을 때 러시아 육군은 1877년의 전쟁과는 달리 소화기 면에서 상대방을 압도할 수 있었다.

또한 기병의 부무장도 1895년에 나강의 리볼버로 교채했다. 나강 리볼버는 1898년부터 뚤라 육군 조병창에서 생산에 들어갔다.

포병은 강철제 강선식 야포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1880년대까지도 러시아 육군은 시대에 뒤떨어진 청동제 활강포를 장비하고 있었다. 포병의 낙후성은 러시아 육군의 가장 큰 고민 거리였다. 터키와의 전쟁에서 터키군의 야포에 호되게 당하고 나서야 철제 대포의 도입이 급히 추진 되었는데 러시아 내에는 생산 설비가 없어서 1877년에서 1878년 사이에 1,500문을 독일의 크룹 사로부터 수입했다. 자체 생산은 외국에서 도입한 설비로 오부호프 조병창에서1878년부터 시작되었다. 오부 호프 외에 뻬름 조병창도 생산 설비를 교체해서 500문의 철제 대포를 생산했다. 1881년 까지 러시아 육군은 4,884문의 철제 화포를 도입했는데 이중 러시아에서 생산한 것은 2,652문 이었고 독일에서 수입한 것이 2,232문 이었다. 독일에서 수입한 것 중 1,500문은 전시에 긴급히 도입한 것이므로 실제 수입량은 732문이며 이것은 전체 생산량의 4분의 1 정도에 해당하는 것 이었다. 러시아는 야포의 국산화에 그런대로 성공을 거둔 셈 이었다.

1897년에 독일 육군이 신형 77 mm포를 채택하자 러시아는 이에 큰 자극을 받아 76mm급 야포의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신형 76mm 포는 1900년에 정식 채용되어 생산에 들어갔고 1902년에 개량형이 채택되었다. 76.2mm M1902는 1차 대전 기간 동안 러시아 육군 보병 사단과 기병 사단의 표준 화포였으며 1930년대까지 개량을 거쳐 계속 사용되었다.

한편, 19세기 말 보병 전투를 뒤바꿀 혁신적인 무기가 등장했는데 그것이 바로 기관총 이었다. 러시아 육군은 일찍이 1870년에 수동식 개틀링을 도입해서 사용해 보았으나 수동식 개틀링은 이를 조작하는 사수가 피로해 지면 발사 속도가 급격히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어서 크게 호평 받지 못했다.

하지만 미국인 맥심이 1885년에 개발한 기관총은 이런 수동식 개틀링의 단점을 완전히 극복한 것 이었으며 1889년에 영국 육군에 정식 채용된 것을 필두로 유럽 각국의 군대에 급속히 보급 되었다. 당시 맥심 기관총은 “일반 소총병 1개 중대에 필적하는 화력”을 가졌다고 평가 되었으며 러시아 육군 역시 이 새로운 무기를 시험해 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러시아 육군은 1896년에 2정의 맥심 기관총을 도입하여 시험 평가를 했으며 그 결과 맥심 기관총을 도입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1899년에 58정의 맥심 기관총이 영국으로부터 170,051 루블에 도입 되었으며 1902년부터는 뚤라 조병창에서 면허 생산이 시작되었다.

병력의 증강도 계속 되었다. 1871년에 프로이센의 징병제 군대가 프랑스의 직업군인으로 구성된 군대를 완파 하자 유럽대륙의 여러 나라들은 앞 다투어 징병제를 도입했다. 징병제로 인해 벨기에 같은 소국도 수십 개 사단을 운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독일식의 예비군 체제는 유사시에 현역의 수배가 넘는 대군을 동원 할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에 프랑스 등 주변국들도 예비군을 증강 시킴과 동시에 현역 사단도 증강 시켰다.

러시아 육군은 1881년 근위 사단 3개, 척탄병 사단 4개, 보병 사단 41개를 포함해 총 48개 사단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이 1903년까지 보병 4개 사단이 추가되어 52개 사단으로 증강 되었으며 육군 병력은 1881년에 장교 30,768명, 부사관과 사병 844,396명에서 1904년에는 장교 41,079명, 부사관과 사병 1.066,894명으로 증가했다. 포병은 1881년에 107,601명에서 1903년 154,925명으로 증가했으며 현역 사단들은 청동제 포를 신형 M1902로 교체했다. 기병은 1881년에 근위 기병 2개 사단과 일반 기병 18개 사단이던 것이 1903년에는 근위기병 2개 사단, 일반 기병 17개 사단, 까자끄 기병 6개 사단으로 증가했다. 한편, 예비군은 1899년에 1,969,000명에 달했는데 총 21개 예비 여단이 전시 동원에 들어가면 35개 보병 사단으로 개편 되도록 계획 되었다.

그러나 세계 어느 나라 보다도 많은 병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전시에 이들을 동원하여 이동 시키는 것은 심각한 문제였다. 러시아의 철도망은 아직 부실했으며 독일이나 오스트리아가 가설한 철도의 총 연장 보다도 못할 정도였다. 넓은 영토에 비해 교통망이 발달하지 못 했기 때문에 전시 동원에서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보다 느릴 것은 뻔히 예상되는 일 이었다. 그나마 철도의 도입으로 1867년에는 동원 완료에 25일 이나 걸리던 끼예프 군관구가 1872년에는 9일로 줄어 들었으며 역시 1867년에 동원 완료 까지 111일이 걸리던 까프까즈 군관구가 39일로 줄어 들었다. 1877년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에서도 1876년 11월과 1877년 4월에 부분 동원을 미리 시행 했기 때문에 전쟁 발발시 비교적 신속한 병력 동원이 가능 했던 것 이었다. 전시 동원 속도가 매우 느렸기 때문에 위기 상황이 닥칠 때의 대응 능력은 매우 떨어 졌으며 이것은 군 수뇌부의 큰 고민거리였다. 이 고민 거리는 곧 현실화 되었는데 바로 일본과의 전쟁이었다.

1904년에 벌어진 러-일 전쟁은 일본이 신속히 황해의 재해권을 장악 함으로서 초반부터 일본이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일본군은 여순항을 손쉽게 고립 시켰으며 비록 러시아가 1902년부터 만주 일대의 군사력을 증강 시키고 있었다고는 하나 일본군에게 순식간에 압도 당했다. 러시아는 매우 멀리 떨어진 만주까지 병력을 동원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으며 이 때문에 여순이 고립될 동안 방어만을 취하고 있었다. 러시아군 포병은 일본군이 투입한 대구경 공성포에 대항할 수단이 없어 속수 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러시아 만주 야전군은 제 1 시베리아 군단과 제 3 시베리아 군단으로 편성 되었는데 이 전력으로 일본군의 3개 야전군(1, 2, 4군)을 상대해야 했다. 시베리아 군관구에서 제 2,4,6 시베리아 군단과 10, 17 군단이 증원 된 후에야 일본군과의 병력 격차가 줄어들었다. 양군은 꾸준히 병력을 증강 시켜서 1905년 1월이 되면 일본군은 만주에 5개 야전군을 투입했으며 러시아도 비슷한 규모의 병력을 투입했다. 하지만 병력 규모는 비슷했으나 러시아군은 상당수가 예비군에서 동원한 시베리아 군단이 주축이었으며 화력은 일본의 정규 사단에 비해 열세했다. 1905년 2월에 벌어진 목단 전투에서 양군의 병력 차는 나지 않았으나 일본군이 254정의 기관총을 보유한 반면 러시아군은 54 정에 불과했다. 또한 러시아 군이 1,200문의 화포를 보유해서 일본군의 1,000문에 비해 우세했지만 역시 러시아군은 중포를 거의 보유하지 않았다. 이 전투에서 러시아군은 총 병력 276,000명중 90,000명을 잃었으며 일본군은 270,000명중 70,000명을 잃었다. 목단 전투는 러-일 전쟁의 지상전에서 여순 전투와 함께 가장 결정적인 전투가 되었다.

러-일 전쟁은 또 다른 개혁의 시작이 되었다. 러-일 전쟁의 참패는 터키와의 전쟁 처럼 새로운 문제를 던져 주었다. 방대한 러시아의 영토는 유사시 신속한 병력의 전개에 큰 장애 요인이 되었으며 일본군은 러시아 육군 보다도 우세한 화력을 가지고 있었다. 훈련상태가 부실한 예비군이 주축이 된 러시아 육군은 불필요하게 많은 희생을 냈으며(비록 일본군 역시 나을 것은 별로 없었으나) 지휘관들의 자질 부족도 심각했다.

1909년에 새로 전쟁상이 된 수호믈리노프는 러시아 육군의 취약점을 개선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06년부터 러시아의 경제가 높은 성장을 이루었기 때문에 군 개혁을 위한 재정 확보는 큰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개혁을 실행할 군인들의 사상이었다.

러-일 전쟁의 경험으로 전투시 양 측방을 보호하고 정찰 및 원거리 타격을 수행할 대규모 기병 집단의 필요성이 강조 되었으나 기병은 보병과 달리 유지 비용이 비싼 것은 물론 훈련에도 시간이 걸려서 예비군으로 만들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러시아는 세계 최고의 기병 보유국 임에도 불구하고 기병 부족에 시달렸다. 러-일 전쟁 직후인 1905년에 74,300명이던 기병은 1908년 까지 83,517명으로 증가했지만 군 수뇌부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불충분 했다. 동원 문제 때문에 기병 사단과 연대들은 최대한 국경 근처에 배치되었다.

포병도 마찬가지로 별로 좋지 않은 상황에 처해 있었다. 러시아 육군의 고위 장성들은 중포의 도입을 추진하기는 했지만 야전 부대가 아닌 요새에 배치하기를 원했으며 운용상의 편의를 위해 1개 포대를 야포 6문으로 줄이자는 안은 1개 포대 8문을 고집하는 고참 포병 장교들로 인해 난항을 겪고 있었다. 요새포를 확보하려는 고위 장교들의 고집은 1911년부터 1914년 까지 유럽의 군비 경쟁이 절정에 달한 시기에 엉뚱한 곳에 수백만 루블의 예산을 낭비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전쟁상 수호믈리노프는 요새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장성들과 타협을 해서 낡은 요새 몇 개를 해체하고 요새 주둔 부대를 예비 연대로 개편할 수 있었지만 이 절충안은 실질적인 전력 증강에는 도움이 되지 못 했다. 각 군단 포병에 122mm 유탄포와 152mm 유탄포를 배치해서 독일의 군단 포병과 비슷한 전력을 확보 하려는 시도는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전쟁이 발발 했을 때 러시아 육군의 1개 군단은 평균 122mm 유탄포 12문을 보유한 것에 그쳤다.

러-일 전쟁에서 큰 위력을 보인 기관총은 더 대량으로 장비 되었다. 각 보병 1개 연대마다 기관총 8정이 배속 되었다. 1914년 까지 러시아 육군은 4,157정의 기관총을 보유 하게 되었다.

기병은 여전히 중요시 되었다. 다른 국가와 마찬가지로 기병 병과는 전통적인 귀족의 아성이었으며 군사 귀족들의 자부심의 상징이기도 했다. 기병의 역할은 보병 사단의 측면을 방어하고 정찰을 실시하며 유사시 적 기병을 격파하는 것 이었다. 또한 정규 기병의 경우 말에서 내러 보병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훈련 받았다. 까자끄 기병의 경우는 근접전을 위해 기병도를 사용했다. 한편 1912년부터 모든 기병 부대는 기병창을 필수 장비로 가지게 되었는데 이것은 전투에서 “충격 효과”를 내기 위해서 였다.

내연 기관을 사용하는 자동차의 도입은 군의 큰 관심을 끌었다. 1898년 12월에 끼예프 군관구 사령관이던 드라고미로프대장이 차량을 군사 수송에 사용하는 방안에 대해 전쟁성에 건의를 했다. 당시 전쟁상 이었던 꾸로빠낀은 이 제안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해서 공병에 시험 부대를 편성해서 차량 운용을 시험해 보도록 지시했다. 이를 위해서 영국에서 자동차가수입 되었으며 1902년에 끼예프와 꾸르스끄 지구의 기동훈련에 처음으로 자동차가 사용 되었다. 자동차 기술의 급속한 발전으로 자동차의 도입은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1906~8년 까지 트럭과 프랑스에서 수입한 장갑차의 시험이 진행 되었다. 그러나 시험은 소규모로 이루어져 군 상층부에 큰 인상을 주지는 못 했다. 최초의 자동차 부대는 공병에 편성되었는데 1910년에 5개 중대가 편성되어 철도 공병에 배속 되었다. 1914년 까지 러시아 육군은 트럭 418대, 승용차 259대, 구급차 2대, 기타 챠랑 32대, 오토바이 101대를 보유했다. 전쟁이 발발했을 때 러시아 전역에는 약 9,000대의 차량이 있었는데 이중 트럭 475대와 승용차 3,562대가 육군에 징발 되었다.

대부분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러시아의 군 항공역시 육군 항공대의 일부로 출발했다. 러시아의 육군 항공대는 1909년에 정식으로 창설 되었는데 1909년부터 1911년 까지 육군 공병국 예하에 있었다. 1911년 까지 러시아 육군 항공대는 항공기 30대로 성장했는데 항공기는 모두 프랑스에서 수입한 기종이었다. 이 무렵 러시아는 러일전쟁의 참패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서 다시 군사력을 증강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1911년에는 항공기가 육군의 기동 훈련에 참가하여 군사적인 잠재력을 인정 받았다. 이 성공에 힘입어1912년에는 육군 항공대가 총 참모부 중앙 관리국(GUGSh) 예하로 배속 변경 되었으며 각 군단에 직할대로 비행기 6대로 편성된 1개 비행대를 배속시킨다는 계획이 세워졌다.

러시아 육군 항공대는 급속히 성장해서 1913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 제국을 추월하여 동유럽에서는 독일에 맞설 수 있는 항공력을 갖추게 되었다. 1913년 4월 1일에 러시아 육군 항공대는 13대의 비행선과 150대의 항공기로 증강되었으며 전쟁 직전인 1914년 8월 초에는 비행선 22대와 항공기 250대, 그리고 항공대 39개로 증강되었다. 또한 1913년에는 러시아 해군도 항공대를 편성했다. 1912년부터 1913년까지 벌어진 발칸 전쟁에서 항공기가 정찰과 연락에 매우 효과적이라는 것이 입증되자 러시아 육군과 해군은 항공기의 추가 획득에 박차를 가했다.

개전 직전에 러시아 육군 항공대는 양적으로 큰 성장을 이루었다. 그런데 실제로는 매우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러시아 전쟁성은 육군 항공대를 수입한 항공기로 성장시키고 있었으며 명확한 항공 산업 육성 정책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러시아 육군 항공대는 24 종류의 항공기와 12 종류의 항공기 엔진을 사용했으며 1차 대전이 발발하자 주로 독일제 엔진을 사용하던 항공기 16종류는 예비 부품 이 바닥나서 운용 불능이 되었다. 러시아의 항공 산업은 항공기 조립 생산에 불과한 수준이었으며 항공기 공장은 그저 단순한 “작업장”수준 이었다.

지휘 통신 체계는 병력의 증가를 따라 가지 못 했다. 1914년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삼소노프의 제 2 군은 군 전체에 겨우 25대의 유선 전화를 보유했을 뿐 이었으며 대부분의 통신을 모르스 전신기에 의존했다. 그리고 실전에서 제한된 전화선으로는 예하 군단들 조차 제대로 통제하기가 어려워 전령을 사용하는 실정이었다.

한편, 1912년에 들어오면서 안보 환경에 큰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먼저 러-일 전쟁 이래 숙적이던 일본과의 전쟁 가능성이 희박해 진 대신 동맹국 프랑스와의 밀착으로 독일에 대한 선제 공격의 필요성이 증대했다. 프랑스는 동원 개시후 12일 안에 독일에 대한 공세에 나설 것 이기 때문에 러시아 역시 여기에 맞춰 공격을 개시해야 한다고 압력을 넣었다. 이 때문에 기존에 있던 제 19호 동원 계획을 수정할 필요성이 제기 되었다. 수정 안은 두개가 만들어 졌는데 첫번째 수정안은 А 로서 독일이 프랑스 전역에 주력을 집중할 경우를 상정한 것 이었다. 수정안 А에서는 북서 전선군 예하에 레넨깜프 대장이 지휘하는 제 1 군과 삼소노프 대장이 지휘하는 제 2 군이 동 프로이센에 대한 공격을 맡았으며 이 두개 야전군에 17개 보병 사단, 1개 보병여단과 8개 기병사단, 1개 기병여단 그리고 야포 1,104문과 병력 250,000명으로 편성 되었다. 이 계획에서 주공은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두어 졌으며 이 때문에 남서 전선군 예하에 3, 4, 5, 8 야전군이 배속 되었고 이 경우 남서 전선군은 34개 보병사단, 1개 보병여단 12개 기병사단, 1개 기병여단에 총 병력 600,000을 가지게 되었다. 이 계획안에 따를 경우 공세를 위해서 동원을 완료하는 시점은 20일에서 41일 사이였다.

독일이 주력을 러시아 전선에 집중해서 선제 공격에 나올 경우를 대비한 것이 Г 계획 이었다. 이 경우 1, 2, 4 군이 독일에 대항해 투입 되고 3군과 5군은 오스트리아의 공격을 막도록 했다. 이 경우 러시아는 시베리아 등지에서 충분한 예비 병력이 동원 될 때 까지 완전히 방어로만 전환할 계획 이었다. 그러나 이 경우 시베리아 철도가 아직 충분히 정비 되지 못 해서 실제 동원 시 병력 동원 속도가 계획한 대로 나올 수가 없었다. 실제로 실제 동원 속도는 계획한 수준의 75%에 불과 했다. 여기에 동원한 병력을 지원할 보급 수송체계도 문제가 많았는데 독일 군의 경우 전시에 250,000대의 철도 차량을 동원 할 수 있었는데 러시아는 불과 214,000대에 불과했다.

한편 1912, 1913년의 독일 육군 법 제정과 발칸 전쟁으로 인한 오스트리아와의 전쟁 가능성 증대로 러시아 황제는 육군 예산을 더 증가 시켰다. 우선 1917년 까지 현역을 400,000명 더 늘리는 한편 군단 당 108문인 야포를 132문으로 늘리기로 결정했다. 또한 위에서도 언급 했듯이 프랑스 식으로 1개 포대를 야포 4문으로 개편하는 안도 추진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두마는 1914년 7월 까지도 이에 필요한 예산안을 통과 시키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다. 전쟁이 벌어졌을 때 러시아 육군은 몇 년 전과 비슷한 상태에서 전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글을 쓰면서 베낀 자료들...

Bruce W. Menning, Bayonets Before Bullets: The Imperial Russian Army, 1861-1914(Indiana University Press, 1999)
Daivd G. Herrmann, The Arming of Europe and the Making of the First World War(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7)
Jonathan Grant, "Tsarist Armament Strategies 1870~1914",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Volume 4, Issue 1(1991. 3)
Nikolai K. Struk, "Motor Vehicle Transport in the Russian Army, 1906~14",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Volume 12, Issue 3(1999. 9)
Stephen J. Cimbala, "Steering through Rapid : Russian mobilization and World War I",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Volume 9, Issue 2(1996.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