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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6월 23일 월요일

Russia’s Struggle for Military Reform: A Breakdown in Conversion Capabilities

지난번에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27호 1권의 러시아 국방개혁특집을 간략히 소개한 일이 있습니다. 27호 1권의 특집에는 전반적으로 러시아의 사회경제적 한계 때문에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글이 많이 실렸습니다. 27호 1권은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이 있기 전에 기획되었기 때문에 최근의 사태에 대해서는 어떤 평가를 할 것인지가 궁금했는데 바로 27호 2권에 최근의 사태를 반영한 글이 한편 실렸습니다. 필자는 조지타운 대학교의 제임스 마샬James A. Marshall이고 제목은 “Russia’s Struggle for Military Reform: A Breakdown in Conversion Capabilities”입니다. 전반적인 내용은 27호 1권의 특집과 논조가 유사합니다. 러시아의 사회경제적 토대가 허약하기 때문에 러시아군의 국방개혁의 전망은 밝지가 못하다는 것 입니다.

필자가 첫번째로 지적하는 것은 인구와 예산과 같은 전략적 자원 문제입니다. 러시아군은 아직까지도 모병제로 전환하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징집병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데 러시아의 인구가 줄어드는 동시에 병역기간이 단축되어 징집병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어났습니다. 2002년에는 335,000명의 징집병이 필요했는데 2009년에는 병역기간의 단축 때문에 필요한 징집병의 숫자가 625,000명으로 늘어났습니다. 문제는 같은 기간 동안 러시아의 인구가 1억4520만명에서 1억4200만명으로 격감했다는 것 입니다. 병력자원이 부족해서 징집병의 숫자만 채워넣는 형편인데 한해 징집되는 병력 중에서 실제로 군복무에 적합한 건강상태를 가진 인원은 전체의 40~45%수준이라고 합니다. 체력은 물론 다른 질도 크게 떨어지는데 징집병 중 상당수의 문맹자, 알콜중독자, 범죄자가 있다고 합니다. 징집자원의 낮은 질과 함께 여전이 열악한 군인에 대한 처우도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필자가 적용한 이론적 틀은 쉴즈Shils와 재너위츠Janowitz가 2차대전기 독일군을 연구할 때 사용한 좀 오래된 기준이긴 합니다만 ‘군생활에 대해 느끼는 자부심’, ‘상관과의 관계’와 같은 기준은 현대 러시아군에 적용하는데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공식통계를 인용한다 하더라도 러시아군의 탈영율은 평화시라는 것을 감안했을때 꽤 높은 편이며(공식통계에 따르면 2,265명) 필자는 한발 더 나가 실제 탈영율이 공식통계를 상회할 것이라는 추정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러시아 사회에서 극우주의적인 경향이 두드러지곤 있다 해도 소련 붕괴이후로 지속된 민족주의의 약화도 군의 사기를 유지하는데 있어 악영향을 끼칠 것으로 봅니다.
국방예산의 경우 푸틴의 집권이후 급증해서 현재는 미국과 중국에 이어 세계에서 세번째로 많은 예산을 지출하고 있습니다. 2007년부터 2011년까지의 통계를 기준으로 하면 국가총생산의 3.9%를 국방예산에 투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의 부정부패 때문에 증액된 예산의 상당수가 횡령되고 있다고 합니다. 러시아 군검찰의 공식 통계에 따르면 국방예산의 20%가 횡령되고 있고 비공식 통계로는 30% 가까이 횡령되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또한 국방예산의 40%가 핵전력을 유지하는데 소모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 때문에 재래식전력의 현대화에 돌아갈 수 있는 기회비용이 줄어들고 있다고 평가합니다.
다음으로는 러시아의 군수공업이 비효율적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소련이 붕괴된 이후 연구개발 기반이 붕괴되어 이것을 회복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린데다가 러시아의 군수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가 전체 제조업 종사자의 20%에 달해 정치권에 대한 영향력이 막강하다는 점이 주된 요인이라고 합니다. 러시아 군수기업들이 보유한 설비의 70%는 사용한지 20년이 넘은 것이기 때문에 노후화가 심해서 생산 효율을 떨어트리는 원인이 된다고 합니다.

두번째로는 러시아의 안보환경과 이에 대한 대응 능력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러시아 내부의 비대칭 위협, 중국의 군사적 부상, 그리고 숙적(!)인 NATO의 존재 등 세가지 요인을 지적합니다. 러시아 내부의 비대칭 위협으로는 체첸 민족주의자들의 테러활동을 꼽고 있습니다. 필자는 다양한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러시아의 경제수준으로 유지가 가능한 소규모의 정예 직업군인 위주의 군대로 변화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소규모 군대가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위협은 러시아 내부의 비대칭 위협 정도일 것이라고 봅니다. 반면 숫적으로 우세한 중국군이나 기술적으로 우세한 NATO에 대한 대응은 핵전력이 중심이 되어야 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문제는 러시아가 추구하는 군사력 감축과 정예화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는 점 입니다. 푸틴은 2000년대 초에 국방개혁의 일환으로 부사관의 정예화를 추진했지만 이것은 푸틴이 다시 대통령을 하고 있는 지금까지도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세르듀코프가 국방부장관으로 재직하고 있을 당시 추진한 장교단 감축이 완료되지 못한 이유도 러시아군 부사관단의 수준이 여전히 낮기 때문에 서방국가에서는 부사관의 담당하는 임무를 담당하기 위해 장교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러시아 군부가 여전히 전면전에 대비한 대규모의 병력동원을 염두에 두고 있는 점도 장교단 개혁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봅니다. 필자는 세르듀코프 시기에 강하게 추진된 병력감축과 군구조 개편에 대해서도 미심쩍은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군구조 개편에 대응하는 교리상의 혁신이 있었느냐 하는 것 입니다. 얼마전에 있었던 크림 반도 병합에 대해서도 러시아군의 개혁이 성공한 증거로 보기에는 어렵다는 견해를 보여줍니다. 먼저 우크라이나군은 조지아군 보다도 전투의지가 약해 싸움 자체를 회피했으며, 크림 반도에 투입된 부대는 러시아군의 최정예인 특수부대와 공수부대였다는 점 때문입니다. 군구조 개편의 대상이었던 지상군의 대부분이 아직 전투를 통해 능력을 검증받지 못했다는 필자의 지적은 타당합니다. 필자는 러시아 정부가 러시아군의 전투 능력을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에 크림반도 합병 이후 우크라이나 사태에 개입을 주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번째로는 러시아가 국가적인 역량을 국방개혁으로 전환할 수 있는 역량에 대해 의문을 표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먼저 러시아의 취약한 민군관계를 지적합니다. 그가 주목하는 부분은 세르듀코프의 해임입니다. 그 원인이 푸틴이 장교단 감축과 같은 급격한 국방개혁에 저항하는 군부 보수파의 손을 들어준 것에 있다는 것 입니다. 필자는 군부가 강력하게 저항할 수 있는 원인을 스탈린 사후 문민통제가 약화되면서 군사적 전문성을 가진 군부가 강력해진 것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리고 군부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고르바초프 집권기에는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이 더욱 강화됐고 소련 붕괴 이후의 러시아에서는 이것이 더욱 고착화 되었다는 것 입니다. 필자는 헌팅턴의 민군관계 모델로 이것을 설명하는데 러시아군의 문민통제 유형을 주체적 문민통제Subjective Civilian Control가 아니라 전문성을 가진 군부가 강력한 독립성을 가지는 객체적 문민통제Objective Civilian Control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러시아군은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이용해 군부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고 있으며 군부의 이해관계는 대규모 전면전을 대비해 방대한 군조직을 유지하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군장교단은 자신들의 사적인 이익을 위해서 징집병에 의존하는 현재 체제를 유지하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러시아군의 징집병들이 군지휘관들의 사적인 사업에 노동력으로 활용된다는 사실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지요. 반면 자원병은 지휘관이 사적으로 착취하기 곤란한 대상입니다. 실제로 최근 러시아군에서는 징집병의 비율이 오히려 높아졌다고 합니다.
또한 러시아가 여전히 NATO의 위협에 대응하는 것에 비중을 두는 점도 비판적으로 바라봅니다. NATO에 대응하기 위해 핵전력에 막대한 예산을 쏟아붙다 보니 재래식 전력을 개선하는데 투자할 기회비용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 입니다. 필자는 러시아의 잘못된 위협 인식이 국방개혁의 걸림돌이라고 비판합니다.
마지막으로는 러시아의 군사교리에 대해 비판하고 있습니다. 러시아가 최근 전쟁의 중요한 특성을 올바르게 파악하고 있기는 하지만 보수적인 군부가 여전히 대규모 전면전을 선호하고 있어서 군사교리의 전환이 어렵다는 것 입니다. 필자는 최근(2010년) 러시아의 군사교리가 신속전개능력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전시동원을 위한 대규모의 예비군 확보를 명시하면서도 두가지 상충되는 목표에 우선순위를 부여하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한 세르듀코프 시기의 군병력 감축과 군구조 개혁에 관련된 내용도 거의 반영되어 있지 않음을 지적합니다. 민간 관료들이 원하는 목표와 군부의 요구가 어정쩡하게 반영된 타협물이라는 것 입니다.

러시아군의 개혁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에 미국과 유럽의 관찰자들이 바라보는 시각이 잘못되었을 가능성은 존재합니다. 하지만 러시아 정부의 주장을 전부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 또한 마찬가지로 위험합니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더욱 악화되어 러시아군이 실전을 치르게 된다면 어느 쪽의 주장이 맞는 것인지 확인할 수 있겠지요. 관찰자인 제3자의 관점에서는 적당히 거리를 두고 관망하는게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2008년 12월 18일 목요일

러시아군의 군수물자 부족문제 : 탄약을 중심으로, 1914~1917

1차대전 발발 직전 러시아는 거의 대부분의 군수물자를 국영공장에서 생산하고 있었습니다. 산업화된 전쟁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로 민간공업이 육성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이 발발한다면 대부분의 생산 부담은 국영공장이 짊어 지어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 입니다. 그러나 이런 체제 아래서는 탄약 수요가 급증할 경우 신속히 대처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전쟁이 발발하자 그대로 현실이 됩니다.

1890년에서 러일전쟁이 발발할 때 까지 러시아의 군수공업은 해외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았습니다.
러시아의 뒤떨어진 공업능력은 소총 조차도 충분히 조달할 수 없었는데 단적인 예로 모신-나강 소총이 처음 채용되었을 때 러시아 정부는 육군의 소요량을 신속히 조달하기 위해서 프랑스와 벨기에에 소총 생산을 발주했습니다. 그 결과 러시아군은 신속히 모신-나강 소총으로 기본화기를 교체했고 러일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예비사단 까지도 신형소총을 지급받을 수 있었습니다. 러시아 정부는 필요한 소총을 획득한 뒤에는 외국으로 부터의 주문을 중단하고 국영조병창을 통해서만 소총을 생산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보충용 소총을 생산하는데 그쳤고 전쟁 발발시 수요량을 충족시킬 능력은 없었습니다. 또 러시아의 TNT 생산은 러시아에 설립된 독일 회사의 톨루엔(toluene)에 크게 의존했는데 독일 기업들은 톨루엔 생산에 필요한 석유제품을 독일에서 들여오고 있었습니다. 독일과 전쟁이 벌어진다면 러시아의 폭약생산에 차질이 빚어질 것은 뻔한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는 자체적인 톨루엔 생산능력 확충보다는 당장 편한 독일 기업으로 부터의 도입에 계속 의존했습니다.
결국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러시아 정부는 급격히 증대된 군수물자의 수요를 채우기 위해 외국 기업에 대한 발주를 늘리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러시아 육군(전쟁성)의 경우 1903년에 260만 루블을 무기 수입에 사용했는데 이것은 1904년에는 1690만 루블로, 1905년에는 7310만 루블로 늘어납니다. 러시아 해군은 1903년에는 1천만루블을 무기 수입에 사용했고 1905년에는 6800만 루블을 수입에 사용합니다. 해외로 부터의 군수물자 수입은 발주에서 도착까지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전쟁 중에는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러시아 정부는 러일전쟁이 종결된 뒤 군대를 개편하는 과정에서 군수물자 생산능력의 확충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 때문에 1차대전 발발 직전 러시아 정부는 미래의 전쟁에서는 러시아가 자체적으로 충분한 군수물자를 생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전쟁상인 수호믈리노프(Владими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Сухомлинов)는 ‘장차 벌어질 전쟁에서 러시아 포병은 포탄이 부족하다고 불평할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의 포병은 많은 양의 장비를 보급받고 있으며 포탄의 보급(체제)도 잘 조직되어 있다’고 호언장담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의 군수공업은 여전히 생산능력이 부족하며 외국의 기술과 중간 생산재에 대한 의존이 높은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전쟁이 발발하자 바로 드러나 버립니다.

1차대전이 발발하자 모든 참전국의 군지휘부를 경악시킨 것은 전쟁 이전의 예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물자소모였습니다. 전쟁 준비가 가장 충실히 되어 있었다는 평을 받는 독일의 경우 포 1문 당 6개월 소요량으로 1천발의 포탄을 배정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전쟁이 발발한 뒤 6주만에 모조리 소비되어 버리고 일선 부대들은 탄약 부족으로 작전 수행이 어려운 상황에 처합니다.
러시아군 수뇌부 또한 독일과 비슷하게 유럽전선에서는 단기결전으로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고 포 1문당 1천발의 포탄이 있으면 전쟁이 끝날 때 까지 충분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군 포병은 전쟁 전 기간 동안 1,276문의 포를 투입해 918,000발의 포탄을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포 1문당 평균 700발의 포탄을 소비하는데 불과했기 때문에 일부에서는 1천발도 ‘너무 많은 것이 아니냐’하는 의문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소총탄의 경우 1개월에 5백만발이면 충분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탄약 뿐 아니라 전투장비의 소요량도 낙관적으로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소총의 경우 독일과의 전면전이 발발할 경우 동원병력 450만명분과 연간 보충 70만정 만 생산하면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던 것 입니다.

※ 하지만 전선의 물자 소요량은 엄청났습니다. 당초 520만정이면 충분할 것으로 예상한 소총의 경우 전쟁 기간 중 추가적인 병력 동원으로 550만정이 더 필요했으며, 여기에 전쟁 기간 동안의 손실을 보충하는데 720만정이 더 필요했다고 합니다.

전쟁 발발 이전의 낙관적인 예상은 전쟁이 시작되자 마자 철저히 깨지게 됩니다.

러시아군은 병력동원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전쟁이 발발하자 독일의 예상보다 더 빨리 공세에 나설 수 있었지만 군수보급은 병력동원을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전쟁이 시작된 1914년 8월부터 총참모부는 전쟁상 수호믈리노프에게 예상 보다 탄약 소요가 많을 수 있다고 경고했으나 수호믈리노프의 대답은 이랬다고 합니다.

“아껴 쓰는 방안을 강구할 수 는 없는가?”


사실상 러시아군은 소모전에 대한 대비가 안된 상황에서 전쟁에 돌입하게 된 것입니다.

러시아의 국영조병창은 물론 민간 기업들의 생산량을 합치더라도 전선의 요구량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1914년 9월 9일에 수호믈리노프가 러시아의 주요 기업관계자들을 소집해서 총 665만발의 포탄을 주문하고 한달 평균 150만발을 생산할 수 있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러시아 기업들의 생산능력으로는 한달에 최대 50만발을 생산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결국은 러일전쟁 때 처럼 전선의 소요량을 조달하기 위해서는 외국으로부터 군수물자를 도입하는 것 말고는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러일전쟁과는 상황이 달라서 영국이나 프랑스도 자국군의 요구량을 생산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영국은 전쟁 초 러시아로부터 1백만발의 포탄을 주문 받았지만 1915년 9월까지 겨우 5천발을 보내는데 그쳤습니다. 아직 전쟁에 개입하지 않은 미국의 상황은 그나마 조금 나은 편이었습니다. 미국과 캐나다의 회사들은 1916년 6월까지 러시아로부터 주문 받은 910만발의 76.2mm 포탄 중 875,000발을 생산해서 보냅니다 하지만 전쟁으로 발틱해가 봉쇄되었기 때문에 이것들은 아르항겔스크나 블라디보스톡으로 수송되었습니다. 러시아의 열악한 철도망 때문에 미국에서 도착한 포탄들은 항구에 하역된 뒤 전선으로 수송되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문제는 다른 군수물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러시아정부는 러시아의 부족한 소총 및 야포 생산능력을 보충하기 위해서 미국, 영국 등에 소총과 야포를 대량으로 발주했는데 역시 외국 기업들은 러시아 정부의 발주량을 맞추지 못했습니다. 러시아 정부는 1915년에 미국의 윈체스터에 30만정, 레밍턴에 150만정, 웨스팅하우스에 150만정의 모신-나강 소총의 생산을 발주했으며 각 기업들에게 1915년에는 1개월에 10만정, 1916년 까지 1개월에 20만정을 생산할 수 있도록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아직 군수물자 생산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러시아 정부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습니다. 1917년 3월까지 윈체스터는 주문량의 9%를, 레밍턴과 웨스팅하우스는 12%를 납품하는데 그쳤습니다.

러시아의 자체적인 생산은 물론 수입조차 어려워지자 전선의 탄약 상황은 계속 악화되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듯 러시아군은 1914년 9월 까지만 해도 한달 평균 150만발의 포탄을 생산하면 충분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지만 같은 해 10월에는 이것을 다시 250만발로 늘려 잡았고 결국에는 한달에 최소 350만발은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본국의 탄약 생산이 차질을 빚고 있는 동안 전선의 러시아군은 독일군의 ‘물량공세’ 앞에 피박을 쓰게 됩니다. 1915년 독일군의 춘계 공세 당시 막켄젠(August von Mackensen)의 11군은 1백만 발의 포탄을 퍼부었는데 독일군의 주공을 얻어맞은 러시아 3군은 그 10분의 1도 안되는 포탄만 보급받은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 독일군의 강력한 공세에 처한 러시아군은 급속히 붕괴되어 버립니다. 1915년 8~9월에 있었던 북부전선의 독일군 공세에서도 갈비츠(Max von Gallwitz)의 12군은 3백만발 이상의 포탄을 사용했는데 러시아군은 90만발을 보급받는데 그쳤습니다. 갈비츠의 공세로 러시아군은 빌뉴스를 상실하고 밀려납니다. 단순히 야포의 숫자로만 비교하면 독일군이 압도적 우위는 아니었지만 중요한 것은 포탄의 보급 문제였습니다.
게다가 러시아군은 요새의 역할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요새에 충분한 탄약을 비축하는데 신경을 쓰고 있었습니다. 야전군은 포탄 부족으로 고전하고 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동부전선의 기동전 하에서 큰 역할을 하지 못한 요새들에는 많은 포탄이 비축되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노보게오르기프스크(Новогеоргиевск)와 코브노(Ковно) 요새가 함락되었을 때 독일군은 이 두 요새에서만 200만발에 가까운 포탄을 노획했습니다.
포탄 뿐만 아니라 소화기의 탄약도 부족했습니다. 그 결과 노획무기의 사용이 빈번했습니다. 예를 들어 1916년에 러시아 8군 예하의 2개 군단은 노획한 오스트리아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탄약보급이 잘 되지 않으니 아예 대량으로 노획되는 오스트리아 탄약을 사용하기 위해 부대 단위로 오스트리아 소총을 장비한 것 입니다. 물론 소총 자체의 보급 문제도 있었다고 있긴 했습니다만.
군수물자의 부족이 러시아군 패배의 모든 원인은 아니지만 심각한 문제였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급박한 상황에 직면한 러시아정부는 탄약생산 증대에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정부의 대대적인 투자에 의해 러시아의 자체적인 탄약 생산은 꾸준히 증가했습니다. 그리고 1915년 2월에는 탄약 생산을 감독하기 위해 포병총국(Гравное Артиллерийское Управление) 예하에 폭약류 생산을 위한 위원회를 조직하기도 합니다. 러시아전쟁성은 1914년 9월 러시아 기업들에 1915년 10월까지 포탄의 월간 생산량을 1백만발로 늘리는 조건으로 1천만 루블을 투자합니다. 이 계획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1914년 가을 한 달에 45만발의 포탄을 생산했는데 1915년 7월에는 90만발, 같은 해 9월에는 1백만발을 생산하는데 이릅니다. 폭약생산은 1915년 2월에 96톤이었으나 7월에는 820톤으로, 그리고 10월에는 1,366톤으로 급증했고 생산량 증가의 대부분은 러시아 민간기업에 힘입은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 조차 전선의 수요에는 턱없이 부족했다는 것 입니다.
러시아의 화약류 생산에 지장을 초래한 가장 큰 원인은 황산을 만드는데 필요한 황철석의 조달 문제였습니다. 러시아는 전쟁 이전에 스웨덴과 터키를 통해 황철석을 수입하고 있었고 이것은 전체 수요의 3분의 1 규모였습니다. 전쟁이 터지자 전자는 발틱해의 봉쇄로 수입이 끊기고, 후자는 적국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황철석 수입문제로 발틱해 연안에 건설된 러시아의 황산공장들이 독일군의 진격으로 점령되거나 점령을 피해 이전하는 통에 1915년 초에는 황산 조달이 위험할 정도로 격감했다고 합니다. 물론 나머지 2/3을 차지하는 우랄 지역은 독일군의 위협으로 무사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발트해 연안의 생산시설 상실과 전체 수요량의 30%가 일시에 사라진 것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러시아정부는 우랄 지역의 황철광 생산을 증대시켜 1915년 말에는 황산 생산문제가 해결되고 황산 생산량은 1916년 3월까지 월간 2만톤 이상으로 증가합니다.
한편, 독일군의 화학무기 사용도 심각한 위협이었습니다. 서부전선의 영국군 및 프랑스군과 달리 러시아군은 전쟁 기간 중 방독면 부족에 시달렸습니다. 독일군이 1915년부터 동부전선에서 본격적으로 화학무기를 사용하자 러시아군도 이에 대응해 화학무기 개발과 방독면 생산을 시작합니다. 러시아는 독일군의 화학탄 사용에 맞서 1915년부터 염소가스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는 일반 포탄과 마찬가지로 화학탄 생산능력도 부족했습니다. 러시아군이 1915년 전 기간을 통틀어 사용한 화학무기는 200톤 정도였는데 이것은 독일군이 서부전선에서 단 한차례의 공격작전에 사용하는 규모에 불과했습니다. 예를 들어 1915년 4월의 이프르 전투에서 독일군이 첫날 사용한 염소가스는 150톤 정도였습니다.

※ 동부전선의 초기 화학전에 대해서는 ‘독일군의 화학무기 시험 : 1914~1915’에서 간단히 언급한 바 있습니다.

러시아 정부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러시아의 포탄 생산량은 1916년에는 월간 185만발 까지 증가했습니다. 러시아 측의 주장에 따르면 1차대전 기간 중 러시아군이 사용한 7230만발의 포탄 중 5660만발이 러시아가 자체적으로 생산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러시아군의 포탄 생산은 주로 76.2mm에서 122mm 구경의 포탄에 집중되었고 203mm 이상의 중포에 필요한 포탄의 생산은 전쟁이 끝날 때 까지도 문제였다고 합니다. 기묘하게도 포병을 중시하는 러시아군이 1차대전에서는 독일군에게 화력 면에서 압도당하고 말았습니다.

1차대전 당시의 뼈저린 경험은 이 전쟁을 경험한 미래의 소련 장군들에게 소모전의 중요성을 각인시켰습니다. 러시아군의 기동전은 독일군의 기동전과 달리 소모의 개념도 중요한 요소로 들어가 있는데 이것은 1차대전의 동부전선 경험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투하체프스키 같은 군인들은 1차 5개년 계획기간 동안 스탈린 이상으로 군수물자 생산능력의 확충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비록 전쟁에는 패배했지만 제정러시아가 남긴 유산은 소련에게 거의 대부분 계승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노동자입니다. 1차대전을 통해 러시아의 화학공업은 양적으로 팽창했습니다. 1913년에 33,000명이던 화학공업 부문의 노동자는 1917년에는 117,000명으로 증가합니다. 이렇게 늘어난 노동자들은 소련의 산업화 초기 화학공업의 중핵이 되었습니다.
소련인들은 1차대전에서 얻은 교훈을 잘 살린 결과 2차대전에서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독일군과 싸우게 되었습니다. 막연히 1차대전의 경험만 가지고 러시아를 과소평가한 독일인들은 그 대가를 혹독히 치루게 되지요.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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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nathan Grant, ‘Tsarist Armament Strategies 1870~1914’, The Journal of Soviet Military Studies, 4-1(1991)
Bruce W. Menning, Bayonets before Bullets : The Imperial Russian Army, 1861~1914, Indiana University Press, 1992/2000
Norman Stone, The Eastern Front 1914~1917, Penguin Boosk, 1975/1998

2007년 3월 15일 목요일

독일의 점령지역 산업시설 활용 1939-1945 - 항공산업의 사례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전시 동원과 관련해 자주 논의되는 이야기 중 하나는 1940년 독일이 장악한 서유럽의 공업기반이 독일의 전쟁 수행능력에 어느 정도의 도움을 줬는가 하는 점 입니다.

가장 먼저…

전후 연합국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2차 대전 기간 중 독일에 점령된 국가들이 독일 공군에 공급하기 위해 생산한 항공기는 다음과 같았다고 합니다.

국 가1941194219431944총 계
프랑스626681,2855022,517
체코슬로바키아8195688051,9554,147
네덜란드1675414442947
헝가리0073344417
이탈리아003279111
Richard Overy, The Luftwaffe and the European Economy 1939-1945, Militärgeschichtliche Mitteilungen, 1979/2


통계에도 나타나 있듯 독일이 가장 재미를 본 국가는 체코였습니다. 일단 오스트리아를 제외하면 가장 먼저 독일의 수중에 들어온 산업화된 국가였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제국항공성(RLM) 내에는 체코의 기업들에게는 항공기 완제품 생산대신 부품과 반조립 정도만 맡겨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우데트(Ernst Udet)가 체코의 공업시설 활용을 적극적으로 밀어 붙였기 때문에 이미 1939년 말에 체코의 항공기 제조업체들은 독일공군으로부터 총 1,797대의 항공기 생산을 수주 받습니다. AVIA가 이때의 경험으로 전후에도 Bf 109의 짝퉁(?)을 생산한 것은 유명하지요.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체코의 군수 산업체들은 독일 점령지역에서 가장 생산성이 높고 기여도가 컸다는 점 입니다. 체코의 기술 좋은 노동자들은 비교적 말도 잘 듣고 사보타지에 취미가 없었다지요. 군수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도 경호를 위해 무장 병력을 붙여줘야 했던 유고슬라비아에 비하면 체코는 독일 기업들이 털어먹기 좋은 낙원이었다고 합니다.

슬로바키아는 명색은 독립국이었지만 실제 사정은 옆 동네인 체코와 같아서 거의 일방적으로 독일에 털립니다. 독일의 공군사절단(Luftwaffenmission)은 슬로바키아 정부로부터 국영 항공기 공장의 설립과 운영에 대한 권리를 얻어내는데 사실 이건 반 강제적인 것이었지요. 독일은 슬로바키아 정부에게 슬로바키아의 국영 공장이 생산한 항공기의 75%는 독일 공군이 인수하고 25%만 슬로바키아 공군에 공급한다는 조항을 강요해서 아주 재미를 봅니다.

프랑스의 경우는 꽤 흥미로운 경우입니다.
먼저 독일 점령지역의 공장과 비시 정부 관할 지역의 공장을 다루는 주체가 달랐습니다. 비시 정부 관할 지역은 1943년 점령 이전까지는 스위스, 스웨덴과 함께 중립국으로 분류돼 독일항공산업위원회(DELIKO, Deutsche Luftfahrtindustriekommision)의 담당이었습니다. 반면 독일 점령지역은 제국항공성의 관할하에 있었습니다.
프랑스는 특히 항공기 완성품 뿐 아니라 중간 부품의 공급에도 많은 기여를 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는 유럽 대륙에서는 독일 다음으로 항공 산업이 발달한 나라였기 때문에 많은 독일 기업들이 침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제국항공성이 나서기 전에 기업들이 먼저 작업을 시작했다고 하지요. 많은 수의 항공 기업(특히 융커스)들은 아직 프랑스와의 휴전이 체결되지 않은 상태(즉 이론적인 교전상태)에서 프랑스 기업들과 사업계약을 체결하러 인력을 파견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프랑스는 전체적인 항공기 생산에서는 슬로바키아에 뒤지긴 하지만 독일 공군의 중요한 해외 파트너(?) 였습니다. 1942년 까지 독일 공군과 납품 계약을 체결한 프랑스 기업은 192개사였다고 합니다.(같은 기간 독일 육군은 60개사, 해군은 9개사)
프랑스는 휴전 이후에도 자국 정부를 위해서 항공기 생산을 계속했는데 가끔은 독일이 제 3국에 공여할 목적으로 프랑스제 항공기를 주문하는 경우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1943년에 불가리아 정부는 독일측에게 Dewoitine D.520(도데체 왜 이걸 독일에?) 96대를 구매하겠다는 의사를 타전했는데 무슨 이유인지 이건 취소되고 Bf 109 16대가 공여 됩니다.

폴란드의 경우는 말 그대로 안습 입니다. 국가사회주의 강도단의 두목인 괴링 부터가 폴란드는 산업적으로 가치가 없으며 약탈할 건덕지가 없다고 공언할 정도였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인켈은 크라쿠프에, 융커스는 포즈난에 부품 생산 공장을 확보합니다. 물론 폴란드의 경우 서유럽과 달리 항공기 완성품을 조립할 수 있는 공장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폴란드와 유사한 국가로는 유고슬라비아도 있습니다. 유고슬라비아의 항공 기업들은 독일 점령과 동시에 독일 항공기업들의 자회사로 강제 흡수됩니다. 전쟁 이전 유고슬라비아의 대표적인 항공기업이었던 Aeroput은 루프트한자의 정비공장으로 바뀌고 Rakovica는 융커스의 엔진 부품 공장으로 전환됐다고 합니다.

그러나 독일이 가장 재미를 보지 못한 곳은 이탈리아였습니다.
독일은 이탈리아를 점령한 뒤 이탈리아의 항공기업들을 독일의 항공기 생산에 활용하려 했으나 성과가 매우 시원치 않았다고 하지요. 항공기 생산이 1943년에 32대, 1944년에 79대로 독일의 한달 치 생산도 안 되는 규모였습니다.

독일이 해외의 산업 기반을 활용한 것은 이렇게 외형적으로나마 합법의 탈을 쓴 것도 많았지만 아예 노골적인 약탈로 나가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많았습니다.
먼저 체코슬로바키아가 점령된 다음 접수된 장비와 시설은 불가리아로 매각됐고 폴란드 점령 후 압수된 항공기와 기자재는 루마니아, 불가리아, 스웨덴 등지로 매각, 또는 공여 됐습니다.
독일 공군은 점령지로부터 산업 시설을 인수하는데 필사적이었기 때문에 소련 침공을 앞두고는 제국항공성 내에 산업시설 노획을 위한 조직(Beute-Sonderkommando)를 만들었습니다. 이 조직은 1941년 한 해 동안 소련의 점령 지역내에서 8,400여대의 대형 공작기계를 약탈해서 독일로 보냈다고 합니다.
뭐, 어쨌건 소련도 전쟁이 끝난 뒤 실레지엔과 동프로이센의 기계들을 잔뜩 뜯어 갔으니 피장 파장이려나요?

전체적으로 봤을 때 항공산업 부문만 놓고 보면 독일인들은 2차 대전기간 동안 충분히 재미를 봤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쟁으로 거덜직전까지 가긴 했지만 그것 조차 미국의 경제원조로 피해가니 말 다했지요.

2007년 3월 11일 일요일

1차 대전과 군수체계의 혁명 - Martin van Creveld

이 글은 캠브리지 대학 출판부에서 출간한 Great War, Total War에 실린 Martin van Creveld의 “World War I and the Revolution in Logistics”에서 64-69쪽을 발췌한 것 입니다. 사실 이 글에서 말하는 내용은 같은 저자의 유명한 저서 “Supplying War”의 4장과 거의 동일한데 후자의 분량이 더 많아서 우리말로 옮기는데 시간이 걸리는 고로 양이 더 적은 이 글을 번역했습니다.

1871년부터 1914년 사이의 기간은 유럽의 역사에서 유례없이 인구적, 경제적 팽창이 이뤄진 시기였다. 불과 44년만에 유럽의 인구는 2억9300만명에서 4억9000만명으로 70%이상 증가했다. 같은 기간 동안 산업, 무역, 그리고 교통수단은 눈부시게 발전해 유럽을 전체적으로 변화시켰다. 1870년에 유럽의 3대 공업국인 영국, 프랑스, 독일의 석탄 및 갈탄 생산량은 1억6000만톤이었는데 이것이 1913년에는 6억1200만톤으로 증가했다. 이와 비슷하게 1870년 세 국가의 선철 생산량은 750만톤이었는데 1913년에는 2900만톤으로 거의 300%의 증가를 이뤄냈다. 이런 산업생산의 증가는 두말할 필요 없이 직업, 주거환경, 그리고 문화에 있어서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비록 산업혁명이 18세기 말에 일어났지만 석탄, 선철, 강철로 대표되는 산업화의 영향이 처음으로 나타난 전쟁은 1870년의 보불전쟁이었다.

공장의 굴뚝들이 계속해서 늘어나면서 유럽 각국의 군사력도 크게 증가했다. 사실 19세기 후반 유럽 각국의 군대규모의 증가는 같은 기간 인구 증가보다 더 큰 것이었다. 사회적 발전과 행정 효율의 증가, 그리고 국민개병제의 도입은 방대한 규모의 육군을 유지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군대를 뒷받침하는 사회-경제 체제는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발전해 있었다.
예를 들어 유럽에서 두번째로 거대한 육군을 가졌던 프랑스는 1870년 당시 전체 인구 3700만명 중 군사훈련을 받은 국민은 50만명으로 그 비율이 1대 74였다. 그러나 1914년에는 전체 인구가 불과 10%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군사훈련을 받은 국민은 400만에 달했다.
마찬가지로 독일제국 역시 1870년부터 1914년까지의 인구증가율이 프랑스 보다 높았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1870년에 전체 인구 대비 군사훈련을 받은 국민의 비중이 44대 1에서 1914년에는 15대 1로 증가했다. 유럽 전체를 놓고 볼 때 1914년 전쟁 발발 직전 가용한 병력 자원은 거의 2000만명에 달했다. 그리고 비유럽 국가 중 가장 중요한 미국의 경우 육군 규모는 보잘 것 없었지만 전시 동원능력은 유럽의 어떤 국가보다 막강했다.

전쟁 수행이 보다 복잡해 지면서 군대에 필요한 보급도 마찬가지로 복잡해 졌으며 병사 일인당 필요한 보급량은 병력 증가 보다 더 급속히 늘어났다.
예를 들어 1870년 당시 독일 육군의 군단 사령부 수송대의 마차 대수는 30대 였으나 1914년에는 두 배로 늘어났다. 1870년 전쟁에서 북독일 연방이 보유한 대포는 1,585문 이었으나 1914년 독일 제국이 보유한 대포는 거의 8,000문에 달했다. 게다가 1914년 당시의 무기는 발사속도가 더 빨라졌으며 1890년대에 등장한 기관총은 대표적인 사례였다. 유압식 제퇴기와 포미장전 방식을 채택한 1914년의 대포는 1866년 당시의 대포에 비해 발사속도가 3-4배 늘어났으며 병사 세명이 조작하는 분당 발사속도 600발의 빅커스 기관총은 1866년 당시 1개 보병대대의 탄약 소모량의 절반을 소모했다. 육군 규모의 증가와 무기 성능의 개선으로 전쟁이 벌어질 당시 각 국 육군이 하루의 전투에 보급해야 하는 물자의 양은 대략 (1870년 전쟁의) 12배 이상 늘어났다.
이렇게 필요한 보급품의 양이 엄청나게 증가했기 때문에 1차대전이 일어날 당시 각 국의 정치인과 군인들이 단기전을 예상한 것도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정치인들과 군인들은 만약 장기전으로 들어간다면 경제적으로 국가가 붕괴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Ivan Bloch같은 사람들은 장기전으로 간다면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쨌건 간에 유럽인들은 이런 변화가 미치는 영향을 직접 느낄 수 있게 됐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1870-71년 전쟁에서 프로이센군 포병의 탄약 소모량은 포 1문이 5개월 간 평균 199발 이었다. 1914년 당시 유럽 각국 중 가장 전쟁 준비가 잘된 독일은 포 1문 당 탄약 1,000발을 비축한 상태에서 전쟁에 들어갔으며 이정도면 충분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1,000발로 6개월을 버틴다는 예상과는 달리 불과 1개월 반 만에 비축량은 모두 바닥이 나 버렸다.
다른 나라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모든 교전국들이 1914년 말과 1915년 초 까지 이른바 “포탄 위기”를 겪었다. 일부 국가, 특히 러시아는 이때의 타격에서 회복되지 못했으며 다른 국가들의 원조에도 불구하고 항상 포탄 부족에 시달리다가 결국에는 전쟁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독일은 발터 라테나우(Walter Rathenau)가, 그리고 영국은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가 새로운 전쟁 상황에 직면해 행정 체계를 쇄신하고 산업 동원에 박차를 가했다.

1916년이 되자 주요 교전국들은 전쟁 초기의 문제들을 극복하고 마침내 본격적인 총력전 체제로 들어갔다.
약간의 통계를 인용하면 영국의 경우 연간 대포 생산량이 91문에서 4,314문으로 증가했고 탱크 생산은 전무하던 것이 150대로, 항공기는 200대에서 6,100대로, 그리고 기관총은 300정에서 33,500정으로 증가했다. 그리고 다시 1918년에는 대포 8,039문, 전차 1,359대, 항공기 32,000대, 기관총 120,900정으로 증가했다.
그리고 일일 기준으로 전투 사단의 보급품 소요량은 1914년에 55톤에서 1916년에는 거의 세배로 증가했다. 근본적으로 병사들과 견인용 동물에게 필요한 보급량은 변화가 없었다. 즉 대부분의 보급 소요의 증가는 각종 장비의 증가 때문에 발생했다고 볼 수 있으며 장비에 필요한 보급은 사단 보급량의 60-75%를 차지했다. 가장 중요한 보급품은 탄약이었으며 차량의 증가로 휘발유 및 윤활유의 소모도 크게 증가했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교체용 장비(특히 야전 정비가 여의치 않은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와 예비부품 이었다. 여기에 막대한 양의 지뢰, 철조망, 콘크리트, 철판, 널판지 등 참호전에 필요한 물건들의 소요도 엄청났다. 보급품의 종류는 매우 다양했고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모두 공장에서 생산되는 물건이었다. 마침내 군대가 야전에서 주변의 거주지에서 보급을 조달할 수 있는 시대가 끝난 것 이었다.

이렇게 역사상 유례가 없던 거대한 보급 혁명으로 보급의 중요성이 병사들의 식료품과 말 먹이에서 기계 장비로 옮겨 가면서 모든 국가들이 총력전 체제로 전환할 수 있었고 또 그렇게 돼야 했다. 총력전 체제로 전환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보급 소요량이 크게 증가한 데 비해 보급품을 전방으로 추진하는 기술적인 발전은 1870년 이래 매우 더딘 수준이었다는 점에 있다.
19세기 후반 이래 철도의 효율이 증가하고 또 철도망이 더 조밀해 진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어 유럽의 철도 연장은 101,000km에서 322,000km로 늘어났다. 그러나 철도 수송 체계의 비융통성과 취약성은 1914-18년의 전쟁 기간 동안 여지없이 드러나 버렸다. 이전 전쟁에서도 마찬가지 였지만 철도는 보급품을 싣고 내리기 위해 여러 부대 시설이 필요했으며 철도역 같은 시설들은 적의 기습으로부터 보호 받기 위해 전선으로부터 수십 km 떨어져 있어야 했다. 1870년 전쟁과 마찬가지로 1914년에도 철도역과 전방을 이어주는 수단은 말이 끄는 마차였다. 이런 방식으로는 계속해서 증가하는 전방의 보급소요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이 결과 유럽 각국의 군대는 과거와 비교해서 보급 종단점에서 멀리 진격할 수 가 없게 됐다. 구스타프 아돌푸스나 말버러, 나폴레옹, 몰트케(특히 앞의 세 사람은) 같은 지휘관들은 적의 영역으로 깊이 들어가더라도 충분히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1차대전이 발발하고 몇 주 뒤 벨기에와 북부 프랑스의 철도 시설이 파괴되자 슐리펜 계획은 처음부터 차질을 빚게 됐다. 설사 독일군이 마른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더라도 보급 문제 때문에 더 이상의 진격은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뒤에 기관총과 참호의 활용, 또 유선전화를 이용한 지휘 통제 체계의 문제점 때문에 결국에는 작전적 방어가 작전적 공세보다 더 위력을 발휘하게 됐다. 이런 방어 우위 경향으로 모든 교전국들은 한층 더 동원체제에 박차를 가하게 됐다. 이런 점에서, 보급의 특이한 문제, 즉 전방의 소요량과 이를 추진할 기술적 능력의 불균형이 총력전 체제를 가져오게 됐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이런 대규모의 보급 소요가 총력전을 불러왔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공격하는 쪽이건 방어하는 쪽이건 보급 소요는 엄청났고 특히 1916년 이후로는 급격히 증가했다. 영국군은 솜 공세당시 공격 준비사격을 위해 1,200,000발의 포탄을 준비했는데 이것은 무게로 따지면 거의 23,000톤에 달했는데 이것은 나폴레옹이 보로디노 전투에서 사용한 포탄 양의 100배를 넘는 것 이었다. 만약 첫 번째의 대공세가 돈좌될 경우 그 다음의 공격 준비사격은 더 강력해 졌다.
예를 들어 1917년 6월 Messiness 전투에서는 350만발의 포탄이 발사됐으며 50만 톤의 폭약이 사용됐다. 2개월 뒤의 이프르 전투에서는 4,300,000발의 포탄이 발사됐으며 무게로는 107,000톤에 달했다. 이 무렵 미국의 공장들은 월간 5,000~6,000톤의 무연화약을 생산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남북전쟁 전 기간 중 남부군이 사용한 흑색화약과 비슷한 규모였다. 이렇게 엄청난 규모의 물자가 필요했기 때문에 교전국들은 산업을 총 동원했고 더 많은 것을 전쟁에 쏟아 넣었다. 영국의 경우 1914년 국가총생산의 15%였던 전쟁예산이 1918년에는 85%까지 치솟았다.

약간 다른 관점에서 서부전선을 살펴보면 이런 20세기 초 보급의 특이한 문제점들은 모든 작전을 과거의 공성전과 비슷한 유형으로 만들어 버렸다.
각각의 공세를 위해서 막대한 양의 물자가 생산되어 후방에 대규모로 축적된 뒤 전방의 특정한 지점으로 추진되었다. 그리고 공격 개시일이 되고 명령이 떨어지면 엄청난 포탄의 폭풍이 전선을 휩쓸었다. 항상 성공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대규모 포격은 적의 방어선에 상당한 타격을 입힐 수 있었고 특히 1918년 독일의 춘계 공세와 하계 공세 기간이 그런 경우였다.
그리고 공세가 성공하면 다음 공격을 위해서 수많은 병력과 막대한 무기, 통신망, 보급품이 전방으로 추진됐다. 그러나 이런 진격은 결국에는 철도 종단점에서 더 멀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전장지역은 후퇴하는 적에 의해 초토화 되고 또 수많은 포탄구멍으로 엉망이 돼 있었기 때문에 가장 기초적인 수송수단, 즉 말이 끄는 수레나 사람 말고는 사용할 수가 없었고 이런 식의 보급추진은 진격하는 전방 부대를 도저히 따라 잡을 수 없었다. 그리고 솜 전투 처럼 유선 전화에 의존하는 지휘 통신 체계가 붕괴될 경우 초기의 공격이 성공을 거두더라도 후속 부대가 제때 투입되지 못 해 진격이 중지되었다. 보급 문제가 작전과 전략적 문제를 압도하게 되자 양 측의 지휘관들은 결국에는 비슷한 방식을 더 크게 반복하는 것 말고는 도리가 없었다.

2007년 2월 22일 목요일

진정한 이라크전 특수

이라크전 특수가 있긴 있었습니다.

Oil States Plan Weapons Buying Binge

이라크 문제가 꼬여가고 여기에 이란 문제까지 겹치니 중동 국가들이 불안한 모양인지 열심히 무기 수입을 하고 있다는 군요.

네. 이라크 파병에 찬성하던 사람들이 주장하던 이라크전 특수가 있긴 확실히 있군요. 약간 난감한 형태로 나타나긴 했습니다만...

2006년 11월 30일 목요일

미국 육군의 차량화 -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

오늘날의 미육군은 막강한 군사력으로 이곳 저곳 들쑤시며 뉴스거리를 만드는 존재였지만 불과 100년전의 미 육군은 주요 열강의 육군 치고는 비리비리한 군대였습니다. 유럽과 같은 국가 총동원체제가 자리잡힌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상비군이 강력한 것도 아니고. 사실 미국은 육군이 약해도 별 문제가 없는 것이 국경을 마주한 것이 캐나다와 멕시코같이 적대적이지도 않고 군사력도 그저 그런 나라들이었죠.

그래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당시 미육군의 차량화 수준은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유럽의 주요 교전국들에 비해서 크게 뒤떨어 졌습니다. 유럽에 참전하면서 미국이 기여한 것이란 총알받이가 될 청년들 뿐이었다는 빈정거림도 있었다고 할 정도로 미국은 프랑스와 영국으로부터 중요한 군사 장비를 원조 받습니다. 좀 절대적인 비중이죠.

그나마 트럭의 경우는 미 육군이 자체적으로 표준화 해서 생산하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워낙 전쟁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전쟁에 뛰어들었는지라 엉망이었습니다. 1916년에 스탠다드 B, 또는 리버티 트럭이라 불리는 3톤 트럭이 채용 되었지만 생산량이 부족해서 프랑스에 투입된 미육군이 사용한 274,000대의 트럭은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의 219개 모델이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었습니다. 불과 20년 뒤에 가공할 차량화 수준을 달성하게 되는 것에 비교하자면 지독할 정도로 한심한 수준이었습니다. 당연히 일선 부대는 잡다한 트럭의 부품을 제대로 구하지 못해서 트럭의 가동율이 매우 형편없었습니다. 1919년 휴전직후 미육군 제 1 야전군 전체에 가동 가능한 리버티 트럭은 고작 40대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휴전이 체결된 뒤 전쟁성이 나머지 주문을 취소해 버리자 예비부품도 덩달아 취소돼 버렸습니다. 육군의 관점에서 보면 이건 고역이었겠죠.

20년대는 평화롭게, 그리고 궁핍하게 지나갔습니다. 잠시의 호황 뒤에 찿아온 대공황으로 미육군의 예산은 마구 깎여 버렸습니다. 당연히 새로운 트럭을 대량으로 도입 하는것은 꿈에나 가능한 일 이었죠. 미육군은 신형 트럭을 발주하기 보다는 이미 민간 시장에 대량으로 풀려 있는 모델을 구입해서 사용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새로 트럭을 개발하는 것 보다야 후자가 예비 부품을 조달하는데 유리하고 결정적으로 비용도 적게 들었다고 하죠.
그러다 보니 각 병과 마다 서로 다른 종류의 트럭을 구매하는 경향을 보이게 됐습니다. 포병이 사용하는 트럭의 요구 조건과 수송 부대가 사용하는 트럭의 요구 조건이 같을 수는 없을 테니까요. 각 병과별로 차량을 구매하다 보니 1936년에 미육군이 보유한 차량은 총 360개 종류에 달했고 각기 다른 예비부품이 100만개에 달했다고 합니다. 이건 불과 5년 뒤에 소련을 침공한 독일 육군과 비슷한 수준의 난장판 이었습니다.

미 전쟁성은 이 난장판을 정리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2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차량의 표준화에 한층 더 박차가 가해 집니다. 이렇게 해서 1940년에 미 육군은 ½톤, 1½톤, 2½톤, 4톤, 7½톤의 다섯 종류로 차량을 표준화 하기로 결정을 내립니다. 나중에 ½톤 차량은 ¼톤 차량,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지프와 ¾톤 "Weapon Carrier"로 분화 됩니다.

이후의 이야기는 다들 아시다시피 미국의 표준화, 대량생산의 "위대한" 승리였습니다. 미국은 방대한 공업생산력으로 역사상 그 어느 나라도 이룩하지 못한 위업(?)을 달성한 것 입니다! 농담을 조금 보태서 미국이 찍어낸 엄청난 숫자의 트럭이 승리의 원동력 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 해서 미육군의 차량화는 그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그 끝은 창대한 수준을 훨씬 넘어서게 됩니다. 정말 이거야 말로 해피엔딩입니다.